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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UNKNOWN
식사가 끝나 가고 있었다. 요리는 물론 술도 훌륭했다. 로저스의 시중
도 나무랄 데 없었다.
모두들 기분이 좋아졌다. 서로 마음 터놓고 이야기하게 되었다.
워그레이브 판사는 질좋은 포도주로 기분이 풀어져 그의 특성인 풍자
를 섞어 이야기하고 있었다. 듣고 있는 사람은 앤터니 머스턴과 암스트롱
의사였다.
에밀리 브랜트는 매커서 장군과 이야기꽃을 피우며 두 사람이 서로 알
고 있는 친구들 발견해 냈다. 베러 크레이슨은 데이비스에게 남아프리카
에 대해 묻고 있었다. 데이비스는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듯 크레이슨에게
상세하게 이야기했다.
그 대화를 롬버드 대위가 옆에서 듣고 있었다. 그는 때때로 눈을 들어
그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테이블을 둘러보며 모두의 태도를 관찰했
다.
앤터니 머스턴이 갑자기 말했다.
「이상한 게 있군.」
둥그런 테이블 한가운데에 둥근 유리 받침대가 있는 몇 개의 조그만
도자기 인형이 놓여 있었다.
앤터니는 말했다.
「인디언이군요. 인디언 섬이라고 해서 이런 게 놓여 있는 모양이군.」
베러가 얼굴을 내밀었다.
「그럴지도 몰라요. 몇 개 있나요? 열 개지요?」
「그렇소. 열 개요.」
베러는 소리쳤다.
「알았아요! 자장가에 있는 열 명의 인디언 소년이로군요. 내 방 벽난
로 위에 그 자장가 가사가 액자에 들어 있어요.」
롬버드가 말했다.
「내 방에도 걸려 있소.」
「내 방에도.」
「내 방에도.」
모두들 입을 모아 말했다.
베러가 말했다.
「기분좋지 않지요?」
워그레이브 판사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바보 같으니! 우리는 어린아이가 아니오.」
그리고 그는 포도주 잔으로 손을 뻗었다.
에밀리 브랜트는 베러 크레이슨의 얼굴을 보았다. 베러 크레이슨도 에
밀리 브랜트의 얼굴을 보았다. 두 사람은 일어섰다. 응접실의 프랑스식
창문이 테라스 쪽으로 열어제쳐져 바위에 부딪치는 파도 소리가 들려 오
고 있었다.
에밀리 브랜트가 말했다.
「기분좋은 소리군요.」
베러는 날카롭게 말했다.
「나는 싫어해요.」
에밀리 브랜트의 눈이 놀라며 베러를 보았다. 베러는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태풍이 불어오면 여기에 도저히 있을 수 없을 거예요.」
에밀리 브랜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겨울이 되면 저택을 비워 두겠지요. 무엇보다도 가정부가 없으니까
요.」
「겨울이 아니더라도 가정부는 여간해서 오지 않을 거예요.」
「네, 저 두 사람이 와주어서 올리버 부인은 정말 다행이에요. 로저스
부인은 요리 솜씨도 뛰어나니까요.」
베러는 생각했다. 나이가 들면 어째서 이름을 잘못 아는 것일까.
그녀는 말했다.
「그래요. 오윈 부인은 아주 행복한 분이에요.」
에밀리 브랜트는 주머니 속에서 조그만 자수를 꺼냈다. 그리고 바늘을
움직이려다가 갑자기 손을 멈추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윈이라고요, 오윈이라고 했나요?」
「네.」
「나는 오윈이라는 사람을 만난 적 없는데요.」
베러는 에밀리 브랜트의 얼굴을 보았다.
「하지만 분명히…….」
그들은 거기서 대화를 멈췄다. 문을 열고 남자들이 들어왔던 것이다.
로저스가 커피 쟁반을 들고 그 뒤를 따라 들어왔다.
판사는 에밀리 브랜트 옆으로 와서 앉았다. 암스트롱 의사는 베러 곁으
로 왔다. 앤터니 머스턴은 열려 있는 창가로 갔다. 블로어는 호기심에 찬
눈으로 조그만 놋쇠 조각품을 보고 있었다――이상스러운 모양을 하고
있다. 이것도 여자인가.
매커서 장군은 벽난로 쪽으로 등을 돌리고 서서 조금밖에 없는 흰 수
염을 비틀고 있었다. 꽤 훌륭한 식사였다. 장군은 매우 기분이 좋았다. 롬
버드는 벽 옆의 테이블 위에 신문과 함께 놓인 펀치 잡지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로저스가 커피 쟁반을 들고 그들 사이를 걸어 다녔다. 맞좋은 커피였
다. 진하고 뜨거웠다.
모두들 실컷 마셨다. 누구나 만족스럽고 몸이 노곤해졌다. 시계 바늘이
밤 8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방안은 아주 조용했다. 마음이 차분해지
는 정적이었다.
별안간 그 정적을 깨뜨리고 소리가 들려 왔다. 아무 예고도 없이 사람
의 목소리가 아닌 것 같은 날카로운 소리가…….
「여러분, 조용히 해주십시오!」
방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그들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 벽을 보았다. 누가 말한 것일까.
소리는 말을 이었다. 높고 확실한 소리였다.
여러분은 저마다 다음 죄상으로 살인 혐의를 받고 있다――.
에드워드 조지 암스트롱, 너는 1925년 3월 14일, 루이저 메리 크리스를
죽게 했다.
에밀리 캐럴라인 브랜트, 너는 1931년 11월 5일에 일어난 비트리스 테
일러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
윌리엄 헨리 블로어, 너는 1928년 10월 10일, 제임스 스티븐 랜더를 죽
음으로 이끌었다.
베러 일리저버스 크레이슨, 너는 1935년 8월 11일, 시릴 오딜비 해밀턴
을 죽였다.
필립 롬버드, 너는 1932년 2월 어느 날, 동아프리카 어느 마을 사람 20
명을 살해했다.
존 고든 매커서, 너는 1917년 1월 4일, 네 아내의 애인 아서 리치먼드
를 고의로 죽음에 몰아넣었다.
앤터니 제임즈 머스턴, 너는 지난해 11월 14일, 존과 루시캠즈를 살해
했다.
토머스 로저스와 에설 로저스, 너희는 1929년 5월 6일, 제니퍼 블레이
디를 죽게 했다.
로런스 존 워그레이브, 너는 1930년 6월 10일, 에드워드 시튼을 살해했
다.
피고들에게 변명의 여지가 있는가.
소리는 끝났다. 화석 같은 침묵의 순간이 지나고 나서 무엇이 깨지는
큰소리가 났다. 로저스가 커피 쟁반을 떨어뜨린 것이다. 그와 함께 방 밖
에서 외침 소리가 들리고, 사람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롬버드가 맨 먼저 행동했다. 그는 문 쪽으로 달려가 힘차게 양옆으로
열어제쳤다. 그곳에 로저스 부인이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롬버드는 외쳤다.
「머스턴!」
앤터니가 달려가 롬버드를 도왔다. 두 사람은 쓰러진 여자를 안고 응접
실로 갔다. 암스트롱 의사가 달려와 로저스 부인을 소파에 눕히고 들여다
보았다.
그는 말했다.
「대단치 않소. 정신을 잃었을 뿐이오. 곧 의식을 되찾을 거요.」
롬버드가 로저스에게 말했다.
「브랜디를 가져오오.」
로저스는 핼쑥한 얼굴로 손을 떨며 대답했다.
「네.」
그는 어쩔 줄 모르며 방을 나갔다.
베러가 외쳤다.
「누가 말했을까요? 어디서 지껄여댔을까요? 마치――마치――.」
매커서 장군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쓸데없는 장난을 하는 녀석 같으니!」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어깨가 축 늘어졌다. 갑자기 10년
이나 더 늙어 보였다.
블로어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워그레이브 판사와 에밀리 브랜트
만이 겨우 냉정을 되찾고 있었다. 에밀리 브랜트는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두 볼이 불그스름했다. 판사는 언제나처럼 머리
를 목에 파묻고 있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 가만히 귀를 막았다. 다만 눈
만이 무엇을 찾는지 의미없이 방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다시 롬버드가 가장 먼저 행동했다. 정신잃은 여자를 암스트롱에게 맡
기고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 소리는 이 방안에서 들여 온 것 같았소.」
베러가 외쳤다.
「누구예요? 누구지요? 우리들은 아니었어요.」
롬버드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의 눈이 한순간 열려진 창문을 뚫어지
게 쏘아보다가 곧 부정하듯 머리를 저었다. 별안간 그의 눈이 빛났다. 그
리고 난로 곁에 있는 옆방으로 통하는 문쪽으로 재빨리 걸어갔다.
그는 민첩한 동자으로 문 손잡이를 잡고 힘차게 열어제쳤다. 그리고 옆
방으로 뛰어들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이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그 뒤를 따라 서둘러 옆방으로 들어갔다. 에밀리 브랜트
만이 몸을 꼿꼿이 하고 의자에 앉은 채 있었다.
옆방의 응접실과 맞닿은 벽에 테이블이 밀어붙여져 있었다. 테이블 위
에 축음기 한 대가 놓여 있었다. 커다란 스피커가 달린 구식 축음기였다.
스피커는 벽을 향해 있었다. 롬버드가 그것을 밀어젖히자 두 세 개의
작은 구멍이 사람 눈에 띄지 않게 벽에 뚫려 있었다. 그는 바늘을 레코드
에 대었다. 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여러분은 저마다 다음 죄상으로 살인 혐의를 받고 있다――.」
베러가 소리쳤다.
「멈춰 주세요! 멈춰 주세요! 무서워요!」
롬버드는 그 말에 따랐다.
암스트롱 의사가 놀라운 듯 깊이 숨을 내쉬며 말했다.
「몹시 나쁜 장난이로군!」
워그레이브 판사의 낮으나 뚜렷한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은 장난이라고 생각하오?」
의사는 판사를 지켜 보았다.
「장난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판사의 손이 조용히 윗입술을 눌렀다.
「아직 나로선 의견을 말할 수 없소.」
앤터니 머스턴이 옆에서 입을 열었다.
「그러나 잊어버린 일이 하나 있습니다. 대체 누가 축음기를 틀었지요?
」
워그레이브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렇소. 먼저 그것을 조사해야만 하오.」
그는 앞장서서 응접실로 돌아갔다. 다른 사람들도 그 뒤를 따랐다.
로저스가 브랜디 글라스를 가지고 돌아왔다. 에밀리 브랜트는 입에 거
품을 물고 누워 있는 로저스 부인을 내려다보았다. 로저스가 그 옆으로
걸어갔다.
「내가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에설――에설――아무 일도 아니오. 마음
을 굳게 가져야 하오.」
로저스 부인은 거칠게 숨쉬기 시작했다. 가늘게 떨리는 눈이 자기를 들
여다보는 몇몇 사람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로저스가 재빠르게 말했다.
「정신차려요, 에설!」
암스트롱 의사가 부드럽게 그녀에게 말했다.
「이제 괜찮소, 로저스 부인. 정신을 좀 잃었을 뿐이었으니까요.」
「정신을 잃었었나요?」
「그렇소.」
「그 소리, 그 무서운 소리. 하느님의 심판과도 같은――.」
그녀의 얼굴이 다시 핼쑥해지고 눈썹이 떨렸다.
암스트롱 의사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브랜디는…….」
로저스는 글라스를 조그만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있었다. 누군가 한 사
람이 그것을 의사에게 건네 주었고, 의사는 괴로운 둣 숨쉬고 있는 여자
위로 몸을 굽혔다.
「이것을 마시오, 로저스 부인.」
그녀는 좀 목이 메어 흐느꼈으나 이윽고 브랜디를 꿀꺽꿀꺽 마셨다. 곧
얼굴빛이 좋아졌다.
「이젠――괜찮소. 좀 놀란 것뿐이오.」
로저스가 곧 이어서 말했다.
「당신이 놀란 것은 당연한 일이오. 나도 놀랐고. 쟁반을 떨어뜨릴 정
도였으니까. 그런 거짓말을 하다니! 대체――.」
그의 말은 거기서 멈춰졌다. 그것은 하나의 헛기침 소리에 지나지 않았
다. 착 가라앉은 낮은 헛기침 소리였으나, 로저스의 흥분된 말을 가로막
을 만한 위력을 갖고 있었다.
로저스는 워그레이브 판사 쪽을 보았다. 판사는 또 한번 헛기침을 했
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누가 레코드를 걸었을까. 자네인가, 로저스?」
로저스는 외쳤다.
「나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맹세합니다!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알고 있
었다면 레코드를 틀지 않았을 겁니다.」
판사는 차갑게 말했다.
「아마 사실이겠지. 그러나 일단 설명을 듣고 싶은데, 로저스.」
로저스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다만 명령대로 했을 뿐입니다.」
「누구의 명령인가?」
「오윈 씨의…….」
「분명하게 들려주게. 오윈 씨의 명령이란 어떤 것이었나?」
「나는 한 장의 레코드를 축음기에 걸어 놓도록 지시받았습니다. 레코
드는 서랍 속에 있었고, 내가 커피 쟁반을 가지고 응접실에 들어갔을 때
아내가 레코드를 틀도록 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갈수록 이상한 이야기로군.」
로저스는 크게 소리쳤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하느님께 맹세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전혀 몰랐습니다. 레코드에는 라벨이 붙어 있었습니다. 음악이라고만 생
각했습니다.」
워그레이브는 롬버드의 얼굴을 보았다.
「라벨이 붙어 있었다고?」
롬버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며 쓴웃음지
었다.
「붙어 있었습니다. <백조의 노래>라고.」
매커스 장군이 별안간 큰소리를 질렀다.
「언어도단이야! 그런 거짓 제목을 붙여 놓다니! 그대로 둘 수 없어!
오윈이라는 자가 누구든――.」
에밀리 브랜트가 옆에서 입을 열었다. 그녀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
다.
「그래요, 대체 어떤 사람일까요?」
판사가 끼여들었다. 오랜 세월 법정 생활에서 몸에 밴 위엄있는 목소리
였다.
「그 일을 신중히 조사해야겠소. 그전에 로저스, 자네는 아내를 침대에
눕히고 오는 게 좋겠네. 그리고 나서 이리로 돌아오게.」
「네.」
암스트롱 의사가 말했다.
「내가 도와주지, 로저스.」
로저스 부인은 두 남자의 부축을 받으며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방을 나
갔다.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앤터니 머스턴이 말했다.
「어떻습니까, 나는 한잔 하고 싶은데요.」
롬버드가 대답했다.
「찬성이오.」
「내가 가져오지요.」
앤터니는 방을 나갔다가 곧 되돌아왔다.
「방 밖에 준비가 되어 있더군요.」
그는 무거운 듯 들고 온 쟁반을 가만히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다음
1,2분은 술을 따르는 데 소비되었다.
매커서 장군은 독한 위스키를 골랐다. 판사도 장군과 같은 것을 마셨
다. 모두들 기분을 바꿔 줄 알코올이 필요했다. 에밀리 브랜트만이 물을
달라고 하여 컵에 따랐다.
암스트롱 의사가 방으로 돌아왔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수면제를 먹여 두고 왔지요. 뭐요, 술이군요. 나
도 한잔 합시다.」
여러 남자들이 글라스에 두 잔째 술을 따랐다. 로저스가 방으로 돌아왔
다.
워그레이브 판사가 좌석의 우두머리가 되어 방안은 마치 법정처럼 되
었다. 판사는 말했다.
「그럼, 로저스, 처음부터 이야기해야만 되겠는데, 오윈 씨는 어떤 사람
인가?」
로저스는 판사를 쳐다보았다.
「이 집 주인입니다.」
「그건 알고 있네. 자네에게 묻고 싶은 것은, 자네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점일세.」
로저스는 머리를 저었다.
「그렇지만 나는 만난 적이 없습니다.」
방안에 희미한 동요가 일었다.
매커서 장군이 말했다.
「만난 적이 없다고? 그건 무슨 뜻인가?」
「우리들은 이곳에 온 지 아직 1주일도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직업
소개소를 통해 편지로 고용되었지요. 플리머스의 레지너라는 소개소입니
다.」
블로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된 곳이오. 신용도 있지요.」
워그레이브가 말했다.
「그 편지를 갖고 있나?」
「아니, 없애 버렸습니다.」
「이야기를 계속해 주게. 그래, 편지로 채용되어…….」
「네, 날짜가 편지에 지정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지정된 날 이곳에
왔습니다. 모든 게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지요. 식량도 충분히 저장되고,
가구며 부엌살림도 훌륭한 것으로 갖춰져 있었습니다. 그저 먼지만 털면
될 정도였지요.」
「그리고…….」
「그 밖에 특별히 말씀드릴 건 없습니다. 우리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것도 편지였습니다만, 손님을 맞을 테니 방을 준비 해 두라는 내용이었
습니다.
그런데 어제 오후에 다시 편지가 와서 주인어른과 마님은 좀 늦어진다
면서, 손님들에게 실례되지 않게 할 것과 식사와 커피를 대접하고 레코드
를 틀라는 지시가 씌어져 있었습니다.」
판사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편지는 가지고 있겠지?」
「네, 갖고 있습니다.」
로저스는 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냈다. 판사는 그것을 받아 들었다.
「흠, 과연. 리츠 호텔이라고 되어 있군. 타이프라이터로 찍혀 있어.」
블로어가 판사 옆으로 다가왔다.
「좀 보여 주십시오.」
그는 판사의 손에서 빼앗다시피 편지를 받아 들고 눈을 빛냈다.
「콜로네이션 타이프라이터군. 아직 신품입니다. 종이는 엔사인. 어디서
나 쓰고 있는 거지요. 이 편지에서는 어떤 단서도 잡히지 않을 겁니다.
지문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아마 없을 테지요.」
판사는 날카로운 눈길로 블로어를 보았다. 앤터니 머스턴이 블로어 옆
에 서서 어깨너머로 들여다보았다.
「보기드문 이름이군. 유릭 노먼 오윈. 부르는 느낌이 꽤 좋은데.」
판사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자네에게 경의를 표하네, 머스턴. 자네 덕분에 묘한 게 생각났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둘러보고 자라가 놀랐을 때처럼 고개를 움
츠렸다가 길게 빼며 말했다.
「우리는 이 인물에 대해 저마다 알고 있는 것을 하나하나 털어놓아야
만 되겠소. 한 사람씩 이 집 주인에 대해 바를 제공해 주기 바라오.」
그는 일단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우리는 모두 그로부터 초대받은 손님이오. 모두들 어떻게 초대되었는
지 알게 되면 반드시 얻을 것이 있으리라 보오.」
한순간 침묵이 흘렀다. 에밀리 브랜트가 마음을 정한 듯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이상한 점이 있었어요. 나는 보낸 이의 주소가 확실치 않은
편지를 한 통 받았어요. 2,3년 여름 어느 피서지에서 알게 된 어떤 여자
로부터 온 것 같았지요.」
나는 그 이름이 올턴 또는 올리버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올리버
부인이라는 사람도, 미스 올턴이라는 여자도 만난 적은 없어요. 물론 친
한 사이도 아니지요.」
「그 편지를 갖고 있소, 미스 브랜트?」
「갖고 있어요, 찾아오지요.」
그녀는 방을 나가 편지를 가지고 곧 돌아왔다.
그 편지를 읽고 난 다음 판사는 말했다.
「알 수 있을 것 같군. 크레이슨 양, 당신은?」
베러는 비서로 채용된 사정을 설명했다.
판사가 말했다.
「머스턴, 자네는?」
앤터니 머스턴이 말했다.
「전보를 받았습니다. 친구인 배저 버클리라는 남자로부터였지요. 노르
웨이에 가 있는 줄 알았기 때문에 좀 놀랐습니다. 이리로 오라는 전보였
지요.」
워그레이브 판사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암스트롱 의사, 당신은?」
「나는 의사로서 불려왔습니다.」
「흠. 지금까지 이 집 사람들과 친분이 있었소?」
「없었습니다. 편지 속에 동료의 이름이 있기에…….」
「믿었다는 거로군요. 그래, 그 동료란 오랫동안 소식이 없었던 사람이
었겠지요.」
「아니――네, 그렇습니다.」
블로어의 얼굴을 보고 있던 롬버드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판사님, 지금 깨달은 일입니다만…….」
판사는 한손을 들었다.
「기다리시오.」
「그러나…….」
「그 이야기는 한 번에 하나씩 처리해야 하오. 우리는 지금 오늘 밤 우
리가 이곳에 모이게 된 까닭을 조사하고 있는 거요. 매커서 장군, 당신
은?」
장군은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편지를 받았지요. 이 오윈이라는 사나이로부터. 나의 옛 친구와 와
있다면서 갑자기 초대장을 보내는 실례를 용서해 달라고 씌어 있었소. 지
금 그 편지는 갖고 있지 않소.」
「롬버드, 자네는?」
롬버드는 판사가 이야기를 시작할 때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솔직하게
이야기할 것인가, 숨길 것인가. 그는 마음을 정하고 말했다.
「나는 당신들과 같습니다. 초대 편지가 왔는데, 잘 아는 친구 이름이
씌어 있고――요컨대 잔뜩 유혹한 내용이었지요. 편지는 찢어 버렸습니
다.」
워그레이브 판사는 블로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목소리는 기분
나쁠 만큼 조용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모두 여러 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들었
소. 우리들은 한 사람씩 이름이 불려져 죄를 문초받았소. 그리하여 지금
그 일에 관한 조사를 하고 있는 거요.
지금 거기에 대한 조그만 일 하나가 나에게 의문을 갖게 하오. 불려진
이름 속에 윌리엄 헨리 블러오라는 이름이 있었소. 그런데 우리가 아는
범위 안에서는, 이 가운데 헨리 블로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없소. 또
한 데이비스라는 이름은 불려지지 않았는데, 여기에 대해 무언가 할말이
없소, 데이비스 씨?」
블로어는 기분나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드러나 버렸군요. 솔직하게 인정하지요. 내 이름은 데이비스가 아닙
니다.」
「윌리엄 헨리 블로어요?」
「그렇습니다.」
롬버드가 말했다.
「좀더 물어 봅시다. 블로어 씨, 당신은 본디 이름을 숨기고 이곳에 왔
을 뿐 아니라 큰 거짓말쟁이오. 당신은 남아프리카의 나타르에서 왔다고
했소. 나는 그곳을 잘 알고 있는데, 당신은 그곳에 한 발자국도 들여놓은
일이 없소.」
모든 눈이 블로어에게로 쏠렸다. 노여움에 찬 의혹짙은 눈빛들이었다.
앤터니 머스턴이 한걸음 그에게로 다가섰다.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요? 할말이 있소?」
블로어는 머리를 뒤로 젖히며 네모난 얼굴을 내밀었다.
「여러분은 나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나는 신분증명서를 갖고 있습니
다. 언제든지 보여 드리지요. 나는 런던 경찰국의 수사과에 근무했었고,
지금은 플리머스에서 탐정사무실을 열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일 때문에
고용되어 온 겁니다.」
워그레이브 판사가 물었다.
「누구에게?」
「이 오윈이라는 사나이에게지요. 비용으로 꽤 많은 액수의 송금 수표
가 함께 들어 있었고 용건이 편지에 씌어 있었습니다. 손님으로 꾸미고
오도록 지시되어 있었던 거지요. 여러분들 이름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의 행동을 지켜 보는 게 내 임무였습니다.」
「그 까닭이 씌어 있었소?」
블로어는 내뱉듯 말했다.
「오윈 부인의 보석입니다. 그런데 오윈 부인이라는 여자는 있지도 않
군요!」
판사는 손가락으로 입술을 눌렀다. 무언가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당신의 추리는 올바르다고 생각하오. Ulick Norman Owen! 미스 브
랜트의 편지를 보면, 휘갈겨 써서 잘 모르겠지만 세례명은 읽을 수 있도
록 되어 있소――Una Nancy요. 어느쪽이나 모두 같은 머리글자인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소.
Ulick Norman Owen――어느쪽이나 머리글자만 취하면 UN Owen이
오. 좀더 머리를 쓰면 곧 알 수 있소. UNKNOWN(어디의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사람)이오!」
베러가 외쳤다.
「하지만 그건 미친 짓이에요!」
판사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말했다.
「확실히 그 말이 맞소. 우리는 의심할 여지없이 머리가 돈 사람으로부
터 초대를 받은 거요. 틀림없이 위험을 즐기는 살인광이겠지!」
첫댓글 잼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