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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율법
교회에서 많이 쓰는 용어 중에 ‘죄’와 ‘죄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교인들은 기도할 때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말하고, 대화에서도 흔히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교회를 일정 기간 다닌 사람들은 ‘죄인’이라는 용어에 익숙합니다. 기독교인 중에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죄’에 대한 개념은 교인들마다 차이가 있고, 모호한 경우가 많습니다. “당신은 왜 죄인입니까?”라고 물으면 쉽게 대답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실상은 죄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신앙생활의 모습이 달라집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죄의 상태를 벗어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죄에 대한 개념에 따라 신앙의 상태가 영향을 받습니다.
1. 죄: 하나님을 떠남
성경에서는 기본적으로 율법(Torah)에서 벗어나는 것을 죄라고 합니다. ‘죄인’은 율법을 지키지 않거나, 율법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을 지칭합니다. 구약에서의 죄는 율법 준수와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율법은 하나님에게서 나왔고, 율법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출16:28).
복음서에서도 유대의 전통에 따라 율법과 죄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특히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은 율법 준수 여부에 따라 죄인을 구별했습니다. 그래서 세리(막2:17), 창기(눅7:34, 37, 39), 이방인(막14:41)이 죄인들로 지칭되었습니다. 세리와 창기는 부도덕한 자의 대표적인 자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알지 못하는 자들을 죄인으로 저주했습니다.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요7:49).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키는지 아닌지에 따라 죄를 정했습니다. 바리새인의 기준에 의하면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누구나 죄인이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신약에서 예수님과 바리새인의 대립을 자주 보게 됩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 사이에 율법에 대한 심각한 해석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 회당은 바리새파적 랍비 유대교가 주도권을 잡고 있었습니다. 랍비 유대교에서는 율법을 인간이 철저하게 실행할 수 있는 계명과 금령(禁令)의 총합이라고 보았습니다. 바리새인은 율법을 해석하고 지키는 기준이 되는 ‘할라카’(halakah)라는 구체적인 율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할라카는 613개의 율례인데 248개의 계명과 365개의 금령으로 이루어졌습니다(유대 전승에 의하면 사람의 몸을 이루는 모든 부분의 총합이 248개라고 한다. 그러므로 365일 우리의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율법을 실천하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바리새인은 율법을 해석할 때 할라카를 사용했을 뿐 아니라, 할라카의 각 조항을 일상생활에서도 철저하게 준수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할라카에 따라 율법을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율법을 해석했습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은 안식일법, 정결예법, 성전에 대한 태도, 금식과 같은 중요한 부분에서 서로 다른 해석으로 충돌하였습니다. 또 살인, 간음, 용서, 이혼, 이웃 사랑, 맹세 등의 율법과 연관된 조항들에 대해서도 분명한 차이를 보였습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의 율법에 대한 논쟁은 격렬했고, 이 대립이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가게 되는 이유 중의 하나였습니다.
바울서신에서는 율법이 이중적 의미로 나타납니다. 바울은 율법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인간에게 죄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중요한 근거라고 봅니다. 바울이 율법 자체를 나쁘게 언급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하지만 바울서신에는 율법과 복음이 자주 대조되어 나타납니다. 바울은 인간이 율법을 지켜서 구원에 이르는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인간이 의롭다고 칭해지는 것은 오지 그리스도의 의(義)에 의해서 가능합니다.
율법이 선한지, 혹은 정죄하는 심판이 되는지의 기준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은 귀하고 선합니다. 그리스도를 벗어난 율법은 인간을 심판하는 율례가 되고 맙니다. 따라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지, 율법을 지켜서 구원에 이른다고 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율법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 신약성경 전반에 걸쳐 자주 그리스도의 은혜와 율법이 대조되어 나타납니다. 바울은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이 한 의가 나타났으니”(롬3:21)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율법에 대한 해석의 차이는 죄에 대한 이해의 차이를 가져온다는 사실입니다. 율법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죄의 개념이 달라집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의 논쟁에서 나타나듯이 율법에 대한 해석에 따라 율법은 이중적인 의미로 사용됩니다. 즉 율법을 하나님의 뜻으로 보는 관점과 인간이 지켜야 하는 율례로 보는 관점입니다. 예수님에게 죄는 하나님의 뜻을 떠난 것이었고, 바리새인에게는 율례를 지키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은 율법의 조항을 내세웠고, 예수님은 율법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몇 가지 용례를 보면 그 차이가 명확히 드러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엄격하게 바쳤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율법의 정신에 담긴 정의, 긍휼, 믿음, 사랑을 강조했습니다(마23:23, 눅11:42). 다음으로, 어떤 부자 관리가 예수님에게 영생을 얻는 길을 물었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모든 율법을 빠짐없이 잘 지켰습니다. 예수님은 그 관리에게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을 섬기라고 말함으로써 율법의 정신을 가르쳐 줍니다(눅18:18절 이하). 그 관리는 율법을 율례로 보았고, 예수님은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과 율법사의 대화를 보겠습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어느 계명이 가장 큰지를 물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간결하고도 충격적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예수님은 율법의 세세한 조항을 나열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율법 전체의 정신을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함축했습니다.
성경이 율법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율법에 하나님의 뜻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에서 하나님의 뜻을 빼버린다면 율법은 화석처럼 경직되고 인간을 정죄하는 법이 될 뿐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을 비난한 것은 바리새인이 율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율법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마23:28~29). 율법을 인간이 성취하는 법적 규례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율법에는 하나님의 뜻이 들어 있습니다. 율법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롬7:7).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었다면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롬7:12).
이제 죄의 개념이 분명해졌습니다. 죄는 형식적인 율법의 준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율법을 하나님의 뜻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이 율법을 반대할 리가 없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5:17). 율법을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규례로 보고 자기의 의를 내세우면 율법은 인간을 정죄합니다. 하지만 율법을 하나님의 뜻으로 보면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선한 것이 됩니다. 넓은 의미에서 죄는 ‘하나님을 떠난 상태’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떠난 모든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모든 사람이 죄인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율법 앞에 세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하나님 앞에 세웠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죄의 뜻을 보았으니, 이제 죄에 대해 조금 구체적으로 보겠습니다. 성경에는 ‘죄’를 지칭하는 다양한 경우가 나옵니다. 여기서 개개의 허물이나 잘못을 나타내는 죄의 용례를 보지는 않겠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죄를 지칭하는 몇 가지 용어가 나오는데 이중 ‘하마르티아’는 아주 중요한 점을 시사해줍니다. 하마르티아는 바울서신에 주로 나타나며, 복음서에서는 ‘하마르톨로스’라는 단어와 연관이 있습니다. 하마르티아의 문자적인 의미는 화살이 ‘과녁’을 벗어난 경우, 혹은 ‘목표’를 벗어난 실수를 말합니다. 즉 인간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자신의 삶을 바르게 살아가지 못하는 상태가 죄라는 의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정당한 관계 안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인간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삶의 목적과 의미를 가집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자기 마음대로 살게 됩니다. 자기 삶 속에서 추구해야 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못하고 삽니다. 삶의 목적도, 의미도 상실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이 바로 과녁을 벗어난 인간의 삶이고, 목표를 상실한 인간의 삶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삶의 목표와 의미를 벗어난 상태를 죄라고 보았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떠나게 만들고 삶의 목표를 상실하게 만드는 것도 죄라고 지칭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므로 죄가 권세를 얻는다는 표현을 씁니다. 이때 죄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초자아적 현실을 상징합니다. 이런 현실을 바울은 ‘이 세대의 신’ 혹은 ‘사탄’으로 언급했습니다(고후2:11, 4:4, 11:14, 12:7). 근본적인 의미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마음대로 살면서 목표를 잃은 상태, 혹은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소외시켜 죽음과 허무로 몰아가는 힘이 죄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그냥 막살아서는 안 됩니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망각하며 사는 사람을 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윤리적인 얼마의 조항을 율법으로 잘 지켰다고 해서 죄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상태는 보다 더 근본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근원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떠나 자신의 세계에 갇혀 있는 사람은 죄의 상태에 있는 자입니다.
2. 율법화의 위험
우리는 위에서 율법의 이중적 성격을 보았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선한 것입니다. 율법의 정신이 살아 있을 때 하나님의 뜻이 드러납니다. 하지만 율법이 경직되고 굳어져서 하나님의 뜻을 상실하면 인간에게 무거운 굴레가 됩니다. 당시의 율법학자와 바리새인의 율법에 대한 요청은 아주 엄격한 것이었습니다. 일반 사람들이 지키기에 과중한 율례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눅11:46).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율법학자가 하나님의 뜻을 율법화하는 것에 대해 결코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외식하는 자’, ‘화 있을진저’,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라고 외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예수님이 율법화에 대해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으로 규정하고, 이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는 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한다고 착각했습니다. 왜 바리새인들이 이런 착각을 했을까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여기서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에 관심을 가지려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이 지키고 성취할 수 있는 조항으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얼마의 율법 조항으로 만들려는 유혹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이 얼마의 ‘규례’가 되고 나면, 이 규례는 인간의 처분에 맡겨집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율법이라는 얼마의 규례로 환원한 것입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뜻은 얼마의 ‘규례’에 갇히게 됩니다. 이제 인간은 교만해집니다. 인간이 이 규례를 마음대로 해석도 하고,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규례를 잘 지키는지 감독도 합니다. 그리고 규례만 잘 지키면 하나님의 뜻을 행한 것이 됩니다. 규례에 담긴 원래의 뜻에는 관심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이 율법은 잘 지켰지만, 율법의 더 중요한 정신을 지키지 못했다고 비판했던 것입니다(마23:23).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이 범한 중요한 잘못입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은 바리새인이 범한 잘못을 범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인간의 내면에 하나님을 자신이 조정할 수 있는 ‘그 무엇’으로 만들려는 유혹이 있기 때문입니다. 중세의 성상 숭배도 유사한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중세에 성상 숭배로 인해 많은 논쟁과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어떤 그림이나 형상으로 만들어 놓고 그것을 경배했습니다. 하지만 조각이든 그림이든 형상에 경배한다고 하나님의 뜻을 행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형상에 경배하면서 하나님께 경배한 듯한 착각을 했습니다. 고행을 하고 성지를 순례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고 오해했습니다. 사실 그런 행위들 속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형상에 가두려는 시도 자체가 위험한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어떤 형상이나 개념으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바리새인에게서 나타난 유혹은 우리에게도 똑같이 나타납니다. 얼마의 규례를 기준으로 ‘죄’를 정하거나 혹은 윤리적으로만 규정하면 율법화의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 교회에서 강조하는 어떤 ‘기준’을 가지고 이를 지켰느냐 여부를 ‘죄’의 기준으로 삼으면 율법화가 일어납니다. 도둑질, 음주, 욕설, 폭력과 같은 얼마의 윤리적 관점에서만 죄를 규정해도 율법화가 일어납니다. 율법화가 일어나면 살아 있는 하나님이 뜻이 굳어져 경직됩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죄는 얼마의 규례를 지켰는지 아닌지에 의해 결정됩니다.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 석화(石化)되어 규정화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저지른 잘못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얼마의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지켰다고 생각한 것은 착각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얼마의 규례와 윤리적 범주를 정해 놓고, 이를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도 동일한 착각에 빠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속한 한국교회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 봅시다. 한국교회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이 주일성수, 십일조, 성경 공부, 전도, 경건 생활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주일성수와 십일조는 아주 중요합니다. 모든 교인은 마땅히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주일성수 여부를 율법적으로 적용해서 죄의 기준으로 삼으면 안 됩니다. 마음은 없는데 주일만 지켰다고 죄인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요? 십일조나 헌금을 생각해 봅시다. 헌금은 주님의 은혜에 대한 응답입니다. 언제나 감사의 마음으로 주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헌금이나 십일조 여부를 좋은 신앙인이나 죄인의 기준으로 삼으면 안 됩니다. 이렇게 되면 주일성수나 십일조를 율법화 하고 바리새인들이 범한 잘못에 빠지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떠난 사람이 주일성수하고 억지로 십일조 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을 지킨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는 율법화와 윤리화가 과도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죄는 얼마의 율례를 지키는지에 따라 결정되거나, 윤리적 조항의 준수 여부에 따라 규정됩니다. 교회에 출석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율법적인 의무가 되었습니다. 왜 신앙생활이 이렇게 무거운 율례가 되었습니까?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바리새인에게서 극복하려고 했던 것들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응답이며, 그에 따른 자발성과 기쁨이 뒤따라옵니다. 우리는 예배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며 그의 은혜에 감격합니다. 신앙은 예배를 통해 새롭게 힘을 얻습니다. 신앙은 모든 굴레를 떨치고 새로운 세계를 향하는 환희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희망으로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율법화되면 신앙은 활력을 잃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윤리화되면 죄책감만 양산됩니다. 하나님의 뜻 대신에 율법과 윤리가 앞서 있는 교회에서 교인들은 답답해하고, 그들의 신앙은 질식합니다. 이런 교회는 경직되고 생명력이 없으며, 사회에 대해서도 배타적입니다. 이런 교회는 이웃을 위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지도 않습니다. 단지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교회입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조금 더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주일성수나 헌금을 가볍게 여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교인들에게 주일성수를 권하고, 헌금의 의미에 대해 잘 가르쳐야 합니다. 경건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인 중에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 하는 이가 있으면 잘 권유하고 도와야 합니다. 그러나 주일성수 잘하고, 헌금 잘하고, 성경 공부에 잘 참석하는지 여부가 죄나 신앙의 기준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주일성수, 헌금, 경건 생활, 성경 공부 모두 그 자체로 귀하고 중요하나 결코 이들을 율법적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 외에 다른 무엇인가를 신앙의 기준으로 삼으면 그것은 율법이 됩니다. 이를 행하면 거룩한 자가 되고, 이를 지키지 못하면 죄인이 됩니다. 이때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율법화에 빠지게 됩니다. 이제 죄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근본적인 차원을 벗어나 인간이 지키는 율례가 됩니다.
3. 바리새인의 의(義)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율법화는 심각한 결과로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얼마의 율법으로 만들면 하나님이 이 율법에 갇힙니다. 그러면 이 율법을 지키면 ‘나는 하나님의 뜻을 지켰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을 지키는 주체는 ‘나’라는 인간이 됩니다. 여기서 인간이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는 자신의 ‘의’(義)가 드러납니다. 이것이 정확하게 바리새인이 자신도 모르게 빠졌던 함정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면서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규례를 지키면서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는 의를 ‘바리새적인 의’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나는 거룩하다’는 착각입니다. ‘나는 주일성수를 했다’는 의식, ‘나는 헌금을 충분히 했다’는 의식은 위험합니다. 주일성수를 하고 헌금을 한 주체가 바로 ‘나’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일을 지켰고, 내가 헌금을 했다는 의식은 결국 ‘나는 의롭다’라는 바리새적인 의에 빠지게 합니다.
바리새인은 아주 훌륭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율법에 대해 박식했고 율법의 그 많은 조항을 엄격하게 지켰습니다. 그들은 경건한 생활을 했습니다. 누구보다 모범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오직 자신의 의가 자리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우리는 누구도 바리새인의 의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런 바리새적인 의에 빠지면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교만해집니다. 이런 인간은 바로 이중의 죄에 빠집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율법에 가둔 죄이고, 다른 하나는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긴 죄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의’(義)는 자기 성취로 다가옵니다. 의가 더 이상 하나님의 은혜가 아닙니다.
4. 하나님께 돌아감
지금까지 죄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죄만 말하다가 끝낼 수는 없습니다. 이제 ‘구원’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구원은 다양한 의미가 있지만, 소극적 개념으로는 죄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넓은 의미에서 구원은 더 이상 죄의 지배 아래 있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바로 하나님께로 ‘돌아감’입니다. 죄의 상태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지배로 들어가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인간이 자기의 한계를 알게 될 때 진정 죄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인간은 이웃 하나도 사랑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가족 하나도, 자기 자신조차고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을 두고 있는 인간의 교만을 봅니다. 하나님과 분리되어 자신의 세계에 갇혀서 자기가 주인인 줄 알고 살아갑니다. 인간이 인간인 바 가지는 근원적인 한계가 죄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믿는 인간의 교만이 죄입니다. 이제 자아(ego)라는 잘못된 자신에게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품으로 들어가는 것이 구원입니다. 나그네의 방랑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하나님께만 소망이 있습니다. 그분에게서만 안식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앞서 하마르티아와 연관해서 죄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과 분리되어 하나님을 떠나 ‘삶의 목표와 의미’를 상실하며 사는 것을 죄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삶의 목표와 의미를 추구하는 것을 거창하게 생각해서 겁내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사회적으로 대단한 성취를 해야 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큰 성취를 해야 삶의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되면 ‘삶의 의미’를 다시 율법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성취 여부에 따라 의미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취가 기준이 되면 삶의 의미가 율법화가 된다는 말입니다.
먼저 우리의 삶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을 통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 당시에 창기와 세리는 가장 대표적인 죄인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도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마지막 단계에까지 간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면서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자기 삶에서 새롭게 의미를 찾았습니다. 최악의 상황에 놓인 자들이었지만 자신을 귀하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 안에서 달라진 새로운 존재의 첫걸음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자신을 귀하게 여깁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할 수 있는 작은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크고 거창한 것에서 시작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기독교인으로서 삶에 의미를 두고 할 일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이웃을 위한 사랑, 평화를 위한 적은 헌금, 고통받는 자를 위한 위로, 병든 자를 위한 방문, 북한의 굶주리고 억압받는 자를 위한 기도 등도 귀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의 삶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라면,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다는 점입니다. 예화를 하나 들겠습니다. 에릭 리델(Eric Liddell)은 영국의 육상 선수로 1924년 제8회 파리올림픽에 참가해서 400미터에서 금메달을 땄습니다. 그는 원래 100미터 경기의 우승 후보였으나, 경기가 일요일에 열리자 그는 신앙적 이유로 경기를 포기했습니다. 그 일로 그는 국민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 주 종목이 아닌 400미터에 출전해 금메달을 땄습니다. 그의 올림픽 메달 이야기는 매우 극적이었기에 그에 관한 영화(Chariots of Fire, 1981)도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에릭 리델의 일생에서 다른 사건을 주목하려고 합니다. 에릭 리델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어릴 때부터 자신은 주님을 위해 달린다고 생각했습니다. 대회에서 우승한 뒤에는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는 인터뷰를 하거나 간증을 했습니다. 그런데 슬럼프에 빠지면서 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가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더 이상 아무런 성취를 못 하기에 자신의 삶은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낙심하여 달리기를 거의 포기했습니다. 어느 날, 에릭 리델이 외출에서 돌아오니 그의 할머니가 감자를 깎고 있었습니다. 할머니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주님 안에 있다면 감자 하나를 깎아도 의미가 있단다.” 이때 에릭 리델은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반드시 메달을 따고 좋은 결과가 있어야만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면, ‘달리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삶의 목표와 의미를 정한다는 것을 세상적인 성취와 연결해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우리 삶의 어떤 부분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한다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산다면, 양파 하나를 벗겨도 하나님의 나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쓰레기를 치우는 것도, 비뚤어진 의자의 줄을 맞추는 것도 귀한 일입니다. 아무리 큰 사회적 성취를 해도 자기의 세계에서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은 죄인입니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자신의 삶을 바르게 세우는 사람입니다. 기독교인의 삶의 목적과 의미는 어떤 성취를 하는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얼마나 하나님과 함께하는지에 달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