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
송인걸 편집국장 2000.09.29
개벽계성(開闢繼聖) 정산 송규 종사(鼎山 宋? 宗師)는 원불교 교조인 원각성존(圓覺聖尊)소태산 박중빈 대종사(少?山 朴重彬 ?宗師, 1891∼1943)의 법통(法統)과 종통(宗統)을 계승한 종법사로서 일원대도(一圓?道) 정법회상(正法會上)의 법모(法母)이자 제법주(制法主)이다.
정산종사는 소태산 대종사가 영광에서 새 회상 원불교를 창립할 때에 친히 맞아들인 상수제자(上首弟子)로 수위단 중앙에 임명되어 8인 동지와 함께 백지혈인(白指血印)으로서 법인성사(法認聖事)를 성취하고, 부안 봉래산에서 새 회상 교법을 제정할 때에 소태산 대종사를 보필하는데 대표적인 역할을 하였다.
정산종사는 『원불교 교사(敎史)』의 모체가 된 『불법연구회 창건사(佛法硏究會 創建史)』를 집필하였으며, 소태산 대종사가 원기28년(1943) 6월 1일에 열반하자 종통을 계승하여 제2대 종법사가 되었으며, 『교헌(敎憲)』을 제정하고 새 회상의 교명(敎名)을 ‘원불교’로 완정, 천하에 공시했다.
또한 새 시대 주세성자(主世聖者)로서의 대종사관과 주세회상(主世會上)으로서의 원불교관을 확립한 정산종사는 『원불교 교전(敎典)』 편수를 친재(親裁)하는 것을 비롯 『예전(禮典)』과 『세전(世典)』을 친저하는 등 모든 교서의 편찬요강을 제시하였다.
정산종사는 교재정비(敎材整備) 기관확립(機關確立) 정교동심(政敎同心) 달본명근(達本明根)의 ‘사대경륜(四?經綸)’에 따라 교화 교육 자선 산업 등 각 기관의 터전을 확립하였으며, 특히 오늘날 명문사학으로 발전한 원광대학교를 설립하는데 앞장섰다.
또한 동원도리(同源道理) 동기연계(同氣連?) 동척사업(同拓事業)의 ‘삼동윤리(三同倫理)’를 제창, 대세계주의인 일원대도로 하나의 세계(일원세계)를 건설할 깃발을 높이 들었다.
정산종사는 1900년 8월 4일(음력)에 경북 성주군 초전면 소성동에서 부친 구산 송벽조(久山 宋碧照) 대희사와 모친 준타원 이운외(準陀圓 李雲?) 대희사의 2남 1녀중 장자로 탄생했다. 본관은 야성(冶城), 족보명은 홍욱(鴻昱), 호적명은 도군(道君), 휘(諱)는 추(樞).
정산종사는 어려서부터 천품이 총명하고 국량이 호대하며 기상이 화청하였다. 일찍이 조부의 사숙(私塾)에서 한학을 공부하였으며, 10여세에 이르러 당시 영남의 거유인 공산 송준필(?山 宋?弼)선생 문하에서 유학을 익혔다.
이어 유학공부에 만족하지 못한 정산종사는 도(道)에 크게 발심, 마음공부의 스승을 찾아 가야산 등지로 구도행각을 나서며 기도생활로 일관한다.
전라도로 구도의 발길을 옮긴 정산종사는 원기3년(1918) 봄 정읍군 북면 화해리에서 소태산 대종사와 역사적인 만남을 갖는다. 이어 그해 7월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원불교 영산성지)를 찾아 소태산 대종사의 문하에서 원불교 창립의 주역이 되었다.
1919년 9월 조부(송훈동)와 부모, 부인(중타원 여청운 종사)과 아우(주산 송도성 종사) 등 가족이 모두 영광으로 이주하여 원불교 창업에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된다.
원기17년(1932) 33세시에는 ‘원각가(圓覺歌)’를 지어 크고 뚜렷한 대각의 경지를 노래하였다.
대종사 열반후 종법사위에 올라 일제 말엽의 갖은 고초를 이기고 8.15해방을 맞은 정산종사는 국가와 민족이 나아갈 바 바른 길을 제시한 『건국론(建國論)』을 저술하고 전재동포구호사업(戰災同胞救護事業)을 전개토록 하였다.
원기38년(1953)에는 제1대 성업봉찬대회를 열어 교단 창립 제1대를 마감하고 제2대를 뜻깊게 맞이하였다. 원기45년(1960) 회갑을 맞아 삼동윤리를 설하고 회갑연을 대신하여 전무출신 요양재단인 ‘법은재단(法?財團)’을 설립케 하였다.
그 후 숙환이 점차 가중되어 『대종경(?宗經)』과 『정전(正典)』의 편수완결을 촉진하는 특별유시를 내린후 원기47년(1962) 1월22일 각처에서 운집한 남녀대중에게 모든 종교가 동원도리요, 모든 생령이 동기연계요, 모든 사업이 동척사업이라는 삼동윤리(한 울안 한 이치에 한 집안 한 권속이 한 일터 한 일꾼으로 일원세계 건설하자)의 대법문을 거듭 설하고 세계주의와 일원대도로 천하를 한 집안 만들자고 당부한 후 1월24일 오전 10시30분 63세를 일기로 거연히 열반상을 나투었다.
정산종사는 종법사 취임전 25년과 재위 19년, 합 44년간 후천개벽의 새 주세불 소태산 대종사의 상수제자요, 종통계승자로서 교단창업에 무량한 공덕을 끼쳤다.
정산종사의 법위는 열반 직후 대각여래위로 추존되었으며, 유·불·선 삼교에 달통한 법모요, 제법주로서의 무량법문은 후래제자들에 의해 『정산종사 법어』로 집대성되었다.
유족으로는 장녀 승타원 송영봉 원로교무와 차녀 태타원 송순봉 교무가 전무출신하여 뒤를 이었으며, 친제 주산 송도성(主山 宋道?) 종사의 아들인 융산 송천은 교무(원광대 총장)가 입사(入嗣)하여 가계를 잇고 있다.
교단은 원기81년(1996) 정산종사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회를 발족, 성주성지(星州聖地) 성역화 사업, 원음방송 창립 등 각종 기념사업을 전개해 오고 있다.
[출처] 정산종사의 생애|작성자 성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