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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놀 외방선교회와 평양 대목구
1. 메리놀회의 한국 진출
메리놀회는 아시아 지역의 선교를 목적으로 창설된 최초의 미국 외방선교회이다. 이 회는 월시(J.A. Walsh) 신부와 프라이스(T.F. Price) 신부가 창설을 주도했으며, 1911년 4월 27일에 미국 주교회의의 인가를 얻었고, 6월 29일에 교황청의 인준을 받았다.
‘메리놀’이라는 명칭은 메리놀회 본부의 위치에서 유래하였다. 창설 당시 이 회의 명칭은 미국 외방선교회(Catholic Foreign Mission Society of America)였고, 본부는 뉴욕에서 40km 떨어진 호손(Hawthorne)에 있었다. 그러다가 1912년 10월 오시닝(Ossining) 근처의 언덕 위로 이전하면서 회원들은 성모마리아의 중재를 간구했고, 자신들이 있는 곳을 ‘마리아의 언덕’(Mary’sKnoll)이라고 불렀다. 이때부터 메리놀(Maryknoll)은 선교회의 명칭이 되었다.
이렇게 설립된 메리놀회는 1918년 9월에 중국의 광동, 광서 지역을 맡아 사목하였고,
한국에도 여러 차례 소속 신부들이 방문하였다. 1918년 10월에는 프라이스 신부와 포드(Ford) 신부가 내한하였고, 1921년 10월에는 월시 총장 신부와 켈리(Kelly) 신부가 잠시 한국을 방문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1년 뒤인 1922년 11월에 메리놀회는 교황청으로부터 평안도지역에 대한 포교권을 위임받았다.
메리놀회에 위임된 평안도 지역은 I860년을 전후하여 복음이 전파되었다. 그러나 이 지역의 교회는 얼마 뒤에 발생한 병인박해로 와해되었고 1880년 이후에야 재건되었다. 그리고 1896년 르 장드르 신부가 파견됨으로써 지역 최초의 본당인 평양본당이 설립되었다. 이후 평안도 지역의 신자 수는 계속해서 늘어갔고 본당도 증설 되었다.
그러나 1920년대 들어 평안도 지역의 교회 상황은 안팎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즉 당시 이 지역에는 5개 본당과 50여 개의 공소가 있었으나, 5명의 신부가 이것을 모두 담당해야 했다. 그리고 교회 외적으로는 천주교보다 먼저 평안도에 진출한 프로테스탄트의 교세가 천주교의 10배에 달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평안도 지역은 사목상 새로운 조치가 필요했고, 이에 뮈텔 주교는 1922년에 평안도의 분할문제를 교황청에 의뢰하였다. 그리고 미국의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들이 활동하는 평안도를 미국의 외방선교회에 위임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서 이 방안도 추진하였다.
1922년 11월 교황청에서는 평안도에 대한 포교권을 메리놀회에 위임하였다. 이에 메리놀회에서는 11월 27일에 번(P.J. Byrne) 신부를 지부장으로 선출하고, 1923년부터 전교 신부를 한국으로 파견하였다. 그 결과 1923년 5월에는 번 신부가 입국하였고, 10월에는 클리어리(P. Cleary) 신부, 11월에는 모리스 신부가 입국하였다. 그리고 1924년 10월에는 캐시디(J. Cassidy) 신부, 뒤피(P. Duffy) 신부, 스위니(J. Sweeney) 신부가 한국에 도착하였다.
2. 평양 지목구의 설정과 발전
1) 지목구의 설정
메리놀회 한국 지부장 번 신부는 동료들과 함께 의주에 머물며 선교지의 현황 들을 파악해 갔다. 당시 평안도 지역에는 5개의 본당이 있었는데, 평양 본당은 김성학 신부, 진남포 본당은 뤄카(Lucas) 신부, 영유 본당은 박우철(바오로) 신부, 의주 본당은 서병익 신부가 주임으로 있었고, 신의주 본당은 박정렬(바오로) 신부가 사목하다가 1923년 10월에 제물포로 전임된 상태였다.
1924년 1월 메리놀회 신부들은, 신의주 지역은 번 신부, 영유 지역은 모리스 신부, 의주 지역은 클리어리 신부가 맡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면서 1924년 4월 서병익 신부가 서울로 떠났고, 8월에는 영유의 박우철 신부도 신의주 본당으로 전임되었다. 그리하여 의주와 영유본당은 이제 메리놀회 선교사들이 본격적으로 담당하게 되었다. 다만 신의주 본당은 박우철 신부가 부임하여 번신부와 함께 사목하다가 1926년 5월 서울로 복귀하면서 번 신부가 전담하게 되었다. 그리고 진남포 본당은 1926년 4월 서울 대목구의 뤄카 신부에서 1924년에 입국한 뒤피 신부로 교체되었다.
기존 본당을 인수함과 동시에, 메리놀회 선교사들은 새로운 지역에도 본당을 설립해 갔다. 그리하여 1926년에는 은산 본당(1928년 순천 본당으로 개칭)과 마산 본당이 신설되었고, 공소였던 비현 본당(1911년 설립, 1914년 의주 본당 공소)도 다시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 평안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메리놀회 신부도 15명이나 되었다. 이처럼 평안도 지역은 점차 메리놀회 전담 포교지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갔는데, 그 결과 교황청에서는 1927년 3월 17일 평안도 지역을 서울 대목구에서 분리하여 평양 지목구로 설정하였다.
2) 지목구의 발전
(1) 본당과 교세의 증가
평양 지목구가 설정된 후 1927년 9월에는 중화 본당이 신설되었고, 11월 9일에는 번 신부가 초대 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다. 번 신부는 지목구장이 되면서 지목구의 중심을 신의주에서 평양으로 옮기기로 하고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였다, 그러나 사정이 여의치 않자 평양에서 10km 정도 떨어진 서포에 본부를 설치하기로 하고 토지를 매입하였다. 서포의 지목구청 건물은 1931년 3월에 완공되었고, 같은 해 지목구 본부를 서포로 이전하면서 평양 지목구의 서포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초대 지목구장 번 신부는 1929년 8월에 메리놀회 참사위원으로 선출되어 평양 지목구장직을 사임함으로써 서포 시대를 보지 못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번 신부에 이어 제2대 평양 지목구장으로 임명된 사람은 모리스 신부였다. 그는 1930년 4월 지목구장이 된 후 먼저 각 지에 본당을 신설하고 사목 조직의 확충에 힘을 쏟았다. 그리하여 1930년에는 안주 본당과 중강진 본당을 신설했고, 1931년에는 건축 중이던 서포의 교구 본부를 완공했다. 그리고 같은 해 숙천 본당과 서포 본당도 설립하였다. 이후 강계 본당(1933년), 선교리(신리-대신리) 본당(1934년), 강서 본당(1935년), 성천 본당, 정주 본당, 운향시 본당(1936년)이 차례로 신설되었다. 그 결과 모리스 지목구장 부임 초에 본당 12개, 공소 65개, 신자 수 7,202명 이었던 교세는, 그가 사임하던 1936년 7월까지 본당 18개, 공소 134개, 신자 수 1,738명으로 증가하였다.
⑵ 한국인 성직자와 수도자 양성
평양 지목구가 설립될 당시, 평양 지목구 소속 신학생은 대신학생 3명, 소신학생 8명이었다. 이들 중 양기섭(베드로)은 1930년에 서울에서 사제품을 받아 평양 지목구 소속 최초의 한국인 사제가 되었다. 그리고 1931년에는 강영걸(바오로)이 서울에서 사제품을 받았고, 1933년에는 홍용호(프란치스코)가 평양에서 라리보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한편 평양 지목구의 모리스 몬시뇰은 교구 신학교를 설립하려는 움직임도 보였다. 그리하여 1931년 10월경에는 신학교의 설립을 위한 기금을 마련하는 등 준비 작업에 착수하기도 했다. 그러나 평양 지목구의 신학교 설립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다.
한국인 사제가 탄생한 이후, 평양 지목구에서는 신학생 양성을 위해 더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1933년에는 서포 본당 내에 예비반 기숙사를 설치하고 예비 신학생들을 공동 기숙시키면서 신학교 입학을 준비시켰다. 그리고 여기서 교육받은 학생들은 서울 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였다.
이와 함께 모리스 지목구장은 신학생들의 외국 유학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1933년에는 김필현(루도비코)과 박용옥(디모데오)이 로마 우르바노 대학으로 유학을 갔고, 같은 해 강현홍(사도요한)도 일본 도쿄의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학교로 유학을 갔다. 그 결과 1933년에 3명 이었던 교구 소속 한국인 사제는, 1944년에 14명으로 늘어났다.
한편 모리스 지목구장은 한국인 수녀의 양성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당시 평양 지목 구에는 메리놀회 수녀들이 진출하여 선교 활동과 자선사업을 펼치고 있었지만, 언어와 문화 차이로 불편함이 컸다. 이에 한국인 수도자의 양성을 절감한 모리스 지목구장은 1931년부터 수녀회 창립 사업을 지원 했고, 그 결과 1932년 6월 27일에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가 탄생하였다. 이 수녀회는 1938년 2월 25일 교황청으로부터 인가를 받은 최초의 한국인 수녀회였다.
⑶ 가톨릭 운동
‘가톨릭 운동’이란 교회 당국의 위임과 지도하에서 행하는 평신도의 조직적인 활동을 말한다. 이 운동은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기초가 마련되었고,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평신도 운동으로 조직화되었다.
즉 교황 비오 10세는 이전까지 경시되었던 평신도들의 활동 영역을 인정하고 평신도들의 적극적인 활동을 기대 했으며, 교황 비오 11세는, 평신도의 교계적 사제직 참여’ 라는 개념에서 평신도 운동을 조직화하였다. 그런 가운데 비오 11세는 1923년에 이탈리아 가톨릭 운동의 강령을 공인했고, 벨기에에서 1925년에 시작된 노동 청년 운동을 가톨릭 운동의 모델로 삼고 크게 격려하였다.
가톨릭 운동은 이후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었고, 한국 교회에서도 1931년에 공식적으로 채택하였다. 한국 교회는 1931년 9월에 ‘한국 공의회’를 개최했는데, 공의회를 위해 구성된 위원회 중에 가톨릭 운동 위원회’(Commissio de Actione Catholica)가 있었다. 그리고 공의회에서 결의된 74개 조항에도 ‘가톨릭 운동’에 대한 내용이 있었다. 이 공의회의 결의 사항은 1932년에 《조선 선교지 공동 지도서》에 포함되어 간행되었고, 《경향잡지》(1932. 10〜1934. 12)에도 연재되었다.
1933년 3월 6일, 한국의 5교구장들은 ‘가톨릭 운동’을 활성화시키는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서울에 모였다. 그리고 이 모임에서 ‘조선 가톨릭 진행회’의 위원장으로 모리스 평양 지목구장을 선출하였다. 이 위원회 조직은 각 교구에 위원 1명씩을 두고 이들이 위원장과 협의하여 사업을 운영하는 형태였다.
‘조선 가톨릭 진행회’의 중요활동은, 평신도들이 성직자와 협력하여 교회사업, 즉 ‘선교와 자선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진행회에서는 좋은 자료를 수집하여 출판물이나 강연 자료로 삼고, 교육 자료를 가지고 지역을 순회하여 가톨릭을 알리며, 유익한 자선 단체가 있으면 선전하여 각 지역에서 본받도록 하고, 교우 의사와 병원을 아픈 사람에게 소개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은 1933년 3월 18일, 5교구장의 공동 교서로 공포되었다.
‘조선 가톨릭 진행회’의 위원장이 된 모리스 몬시뇰은, 이후 본격적으로 가톨릭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우선 평신도 양성에 관심을 가졌는데, 이것은 이들을 잘 인도하여 교회 내에서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지도자로 길러내려는 의도였다. 이에 1933년 9월 제1회 평양교구 전교 회장 강습회가 개최되었다.
서포의 교구 본부에 모인 전교 회장들은 강습회를 통해 폭넓은 교리 지식을 얻었고, 전교 활동에 보다 큰 의욕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참석자들은 한 달에 한 번은 이러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기를 희망했고, 이에 40명으로 구성된 후원회도 조직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바람은 1934년 1월 평양 지목구의 월간 출판물 제1호인 《가톨릭연구강좌)가 발간되면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당시 모리스 몬시뇰이 책자의 간행을 허락한 것은, 본당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신자들을 가르치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가톨릭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문서 전교가 우선 적으로 필요하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이에 모리스 몬시뇰은 《가톨릭연구강좌》가 가톨릭 운동에 매우 적절한 출판물이라고 평가하고, 이 잡지를 통해 신자들이 가톨릭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촉구하였다.
《가톨릭연구강좌》의 발간 이후 평양 지목구에서는 가톨릭 운동을 더욱 활성화시키기 위해 1934년 8월 ‘제1회 평양교구 평신자 대회’를 개최하였다. 8월 15일부터 19일까지 진행된 이 대회에서는 가톨릭 운동의 활동 목적과 방법 등이 다루어졌다. 그리고 대회 마지막 날 평양교구 가톨릭 운동 연맹’이 조직되었다. 이것은 교구 전체가 분산되지 않고 통일적으로 가톨릭 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것으로 이를 위해 본당과 공소에 지회와 분회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1934년 7월에 《가톨릭연구강좌》에서 이름을 바꾼 《가톨릭연구》를 기관지로 결정하였다.
‘평양교구 가톨릭 운동연맹’에서는 계몽운동, 선전 운동, 자선사업, 교무금 납부 운동, 순회 교리 강습과 묵상회, 교회 출판물 보급 운동, 문맹 퇴치 운동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런 가운데 1935년 10월에는, ‘한국 천주교 전래 150주년 및 순교자들의 시복 10주년’ 기념 축하식을 평양에서 개최하였다. 이 축하식에는 주일 교황사절 마렐라 주교 및 전국 5교구 주교들이 참석했고, 기념식과 함께 사료 전시회, 전국 교리경시대회, 성극 공연 등이 거행되었다.
이후 ‘평양교구 가톨릭 운동 연맹’에서는 1936년 1월부터 교리 강습회와 묵상회를 개최했고, 8월에는 평양에서 제2회 하기 가톨릭대학을 개최하는 등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가톨릭 운동’을 강력하게 추진했던 모리스 몬시뇰의 사임(1936년 7월)과 중일전쟁(1937년 7월)의 여파 등으로 ‘가톨릭 운동’은 점차 약화되어갔다.
3. 대목구 승격
모리스 몬시뇰은 1936년 7월 31일부로 교황청에 사의를 표명했고, 9월 초에 미국으로 귀국했다. 교황청에서는 10월에 모리스 몬시뇰의 요청을 수락하고, 부드(w. Booth) 신부를 임시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부드 신부가 지목구장 서리로 임명된 다음 해, 평양 지목구는 설정 10주년을 맞이했다. 10년 동안 평양 지목구의 교세는 세 배 정도 증가했고, 선교사들은 10명 이상 늘어났다. 그리고 한국인 사제가 3명 탄생했으며, 최초의 한국인 수도회인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가 창설되었다.
부드 신부는 모리스 몬시뇰이 시작한 사업을 계승 발전시켜, 서포의 예비신학생반과교리 경시대회, 하기 가톨릭대학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해 신학생 양성은 물론, 신자들의 교리 지식을 함양시키고 신앙심을 내적으로 충실히 하는 데 기여하였다.
1938년 10월 일본에서 사목하던 오셰아(W. O’ Shea) 신부가 새로운 지목구장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1년 뒤인 1939년 7월 11일 교황청에서는 평양 지목구를 대목구로 승격시키면서 오셰아 신부를 대목구장에 임명하였다. 오셰아 신부는 1939년 10월 29일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주교로 서품되었다.
1940년 1월 하순 평양으로 돌아온 오세아 주교는, 봄 피정을 계기로 대폭적인 신부 이동을 단행하였고, 이때 관후리 본당에서 기림리 본당(평양시 기림리)이 새로 분할되었다.
4. 태평양 전쟁과 메리놀회의 추방
1937년 7월에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1941년 12월에 하와이를 공격함으로써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면서 적국의 국민인 평양 대목구의 메리놀회 신부들을 즉시 연금하였다. 메리놀회 신부들은 각 지방 경찰서로 연행되어 감금되었고, 오셰아 주교는 비서인 월리엄 수사와 함께 서포 주교관에 연금되었다. 메리놀회 신부들뿐만 아니라 메리놀회 수녀들도 영유 수녀원에 감금되었고, 한국인 신부3명(홍용호, 김필현, 박용옥)도 마찬가지 상태에 있었다.
일제는 메리놀회 선교사들을 본국으로 추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오셰아 주교가 한국을 떠나지 않겠다는 입장을 표명 하면서 일본 정부는 일단 이들을 감금해 두었다. 그리하여 평양대목구의 사목 활동은 마비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당시 서울 대목구의 라리보 주교는 서울 대목구장직을 사임하면서 노기남 신부를 후임으로 추천하였다. 그 결과 노기남 신부는 1942년 1월 3일부로 서울 대목구장 서리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교황청에서는 서울 대목구뿐만 아니라, 평양 대목구와 춘천 지목구의 재치권도 노기남 신부에게 부여하였다. 이것은 양 교구를 맡고 있던 메리놀회 선교사들과 골롬반회 선교사들이 구금된 상태에서, 사목 공백을 우려한 교황청의 임시 조치였다.
노기남 신부는 1942년 1월 18일 착좌식을 거행한 후, 2월 4일 평양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교황청의 결정 사항을 신부와 신자들에게 알린 후 다음날 평안남도 도청을 방문하여 도지사와 경찰국장을 만났다. 노기남 신부는 이들에게 미국인 신부들을 설득하여 조선을 떠나게 하라는 요청을 받았고, 만약 그들이 떠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한국인 신부와 신자들을 통해 스파이 노릇을 하는 것으로밖에 인정할 수 없다는 협박도 받았다.
관후리 본당으로 돌아온 노기남 신부는 몇몇 신부들을 소집하여 이 문제를 논의했고, 현시점에서 평양 대목구를 비롯한 한국 교회를 위해서는 미국인 신부들이 한국을 떠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에 오셰아 주교를 찾아간 노기남 신부는 평양 대목구의 책임자로서 한국을 떠날 수 없다는 오셰아 주교에게, 자신에게 평양 대목구를 맡긴다는 교황청의 전문을 보이며, 현시점에서 미국 신부들이 귀국하는 것이 한국 교회의 공익에 부합한다고 설득하였다.
결국 오셰아 주교는 귀국을 결정했고, 이 결정에 따라 경찰서에 감금되어있던 평안북도의 메리놀회 신부들은 신의주 본당 사제관으로, 평안남도의 신부들은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들이 살던 평양의 양촌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1942년 6월 1일 오셰아 주교를 비롯한 모든 메리놀회 신부와 수도자들은 미국으로 강제 추방되었다.
5. 한국인 교구장의 탄생과 대목구의 변화
노기남 신부가 평양 대목구의 관리 책임을 맡았을 때, 평양 대목구에는 구금된 메리놀회 신부들을 제외하고 8명의 한국인 신부가 있었다. 그러나 이들만으로는 교구를 운영할 수가 없었다. 이에 노기남 신부는 서울 대목구에서 임시로 신부를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아울러 자신이 평양에 상주하며 교구 업무를 볼 수 없기 때문에 1942년 2월 홍용호 신부를 평양 대목구 감목대리로 임명하고, 그에게 교구의 모든 관리권을 위임하였다.
이러한 결정에 따라 1942년 2월 서울 대목구에서 4명의 신부가 파견되었다. 그리하여 오기선(요셉) 신부는 신의주 본당, 심재덕(마르코) 신부는 운향시 본당, 조인원(빈첸시오) 신부는 안주 본당, 임세빈(요셉) 신부는 진남포 본당(보좌)에서 사목하게 되었다. 그리고 5월 하순에는 다시 이우철(시몬) 신부가 신의주 본당 보좌로, 김교명(베네딕도) 신부가 기림리 본당으로, 서기창 신부가 ‘영원한 도음의 성모 수녀회’ 지도 신부로 임명되어 파견되었다.
1942년 12월 주교품을 받은 노기남 주교는, 한 사람이 세 교구의 사목 책임을 맡기에는 관할 지역이 너무 광범위하다고 생각했다. 이에 노기남 주교는 교황청에 평양대목구를 다른 책임자에게 맡겨줄 것을 요청하는 동시에 흥용호 신부를 대목구장으로 추천하였다.
교황청에서는 노기남주교의 요청을 받아들여, 1943년 2월 18일 홍용호 신부를 평양 대목구장 서리로 임명하였다. 이에 따라 3월 21일 평양 관후리 성당에서는 각 교구의 신부 대표와 신자 대표들이 모인 가운데 교구장 착좌식이 거행되었다.
착좌식을 마친 흥용호 신부는 교구와 본당을 운영하기 위해 성직자가 부족함을 절감하고 각 교구에 신부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서울 대목구의 김영식(베드로) 신부, 함흥 대목구의 한도준(마태오) 신부, 연길 대목구의 김충무(클레멘스) 신부와 한윤승(필립보) 신부가 평양으로 왔다.
이와 함께 홍용호 신부는 신심을 강화함으로써 신자들이 전시 체제의 어려움을 극복하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1943년 5월 1일 〈평양교구 봉헌 기구문〉을 반포하여 평양대목구의 전 성직자와 신자들이 성당이나 가정에서 열심히 봉헌토록 하였다. 아울러 같은 해 10월에는 신부들의 묵상회를 개최하여, 사제들도 정신 무장과 성직자로서의자세 확립을 통해 시국을 타개해 나갈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전쟁 말기가 되면서 일제의 탄압은 날로 강화되었다. 그 결과 평양 대목구는 1944년 2월에 교구청을 비롯하여 관후리 성당과 부속 건물 일체를 강제 징발당했다.
이에 흥용호 대목구장은 주교좌 본당을 평양 계리 산정현에 있는 장로교회 건물로, 주교관과 교구청은 경창리 2-12번지로 이전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4년 4월 17일 흥용호 신부는 주교로 임명되었고, 6월 29일 산정현 교회에서 사우어 주교의 주례로 주교 서품식을 거행하였다. 이로써 홍용호 주교는 노기남 주교에 이어 두 번째 한국인 주교가 되었다.
홍용호 신부의 주교 임명에는 노기남 주교를 비롯하여 평양대목구 신부들도 일정한 역할을 한 듯하다. 즉 노기남 주교는 홍용호 대목구장이 주교품을 받지 못하면 일본인 대목구장으로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여, 평양 대목구 신부들에게 홍용호 신부의 주교 임명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작성하도록 했고, 자신도 탄원서를 써서 동경의 교황사절을 통해 로마로 보냈다고 한다.
대목구장 주교가 탄생하면서 지금까지 평양 대목구에서 사목하던 서울 대목구 소속신부들은 본래 대목구로 복귀하였고, 대신 덕원 자치수도원구의 김동철(마르코) 신부와 최병권(마티아) 신부가 파견되어 사목을 도왔다. 그리고 흥용호 주교는 1945년 5월 산정현의 주교좌 성당을 상수구리에 있는 옛 수녀원 자리로 옮겼고, 그곳에서 몇 달 뒤 해방을 맞이했다.
자료: 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한국천주교회사” 제5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