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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한국 샬트르 성바오로수녀회 125년사] 1~3장
1장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의 창립과 성장
1. 창립 동기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는 1696년 프랑스 샬트르 교구 내 러베빌 라셔날 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창립되었다. 창립 당시 프랑스는 3세기에 걸친 오랜 전쟁-14, 15세기에 걸친 백년전쟁, 16세기 종교전쟁, 17세기 프랑스 프롱드난 등으로 국토와 사람들의 마음이 황폐해지고 가난이 극치에 달했던 시기였다. 창립자 루이 쇼베 신부는 프랑스 아비뇽 교구 빼르뚜이에서 1664년에 출생했고, 아비뇽신학교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그가 파리에서 신학 공부를 하는 동안 보오스 지역의 참담한 사정을 알게 되었고, 타 교구인 샬트르 교구 내 러베빌 본당에 자원하여 1694 년부터 1710년 그가 사망하기까지 러베빌 라셔날 마을 본당의 주임신부로 사목했다. 1696년 루이 쇼베 신부는 공동창립자 마리 안 드 띠이와 함께 4명의 마을 처녀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만들어 가난한 이웃들을 돌보았다. 이 공동체는 환자 간호와 어린이들의 교육을 통하여 마을 사람들의 인간적, 영적 품위 향상을 도모했다.
2. 수녀회의 사도직과 선교정신
러베빌 라셔날의 초창기 수녀들은 창립자 루이 쇼베 신부와 공동 창립자 마리 안 드 띠이의 창립목적에 따라 마을 여아들의 교육과 환자 방문 그리고 이웃이 필요로 하는 일에 단순하게 응답하는 삶을 살았다. 이후 샬트르의 생모리스와 프랑스 내 전역으로 수녀회가 확장되면서 수녀들은 자신들이 속한 본당 내의 학교와 병원, 시약소, 구호사업 등으로 사도직을 넓혀 나갔다.
1708년 루이 쇼베 신부는 당시 샬트르의 교구장이었던 쁠 고데 데 마레주교에게 공동체를 위탁했다. 이후 공동체는 샬트르의 생모리스로 이전하여 프랑스 전역으로 확장되어 나갔고. 1727년에는 주보이신 사도 바오로의 모범을 따라 먼 이역 남아메리카 기아나에서 선교를 시작함으로써 선교 수녀회로서의 초석을 놓았다. 수녀회는 1789년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1792 년부터 1802년까지 약 10여 년간 폐쇄당했다. 기아나에 남아 봉사하고 있던 몇몇 수녀들의 인원 증원에 대한 절박한 호소에 1804년 나폴레옹 1세는 수녀회의 재개를 결정했다. 이를 통해 재개된 수녀회는 공동체의 활기를 얻어 그동안 몰수당했던 사업체들을 다시 찾아 새 분원을 설립했고, 기아나를 비롯한 새로운 선교지를 개척하며 성장해 나아갔다.
기아나에서 시작된 이역 선교는 1770년 일드프랑스와 부르봉 섬의 선교에 이어 1814년과 1817년에 다시금 기아나와 부르봉 섬에 그리고 1818년 마르티니크, 1820년 과들루프에 이어 북미지역,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등 전 세계로 선교 수녀들이 파견되었다. 이후 프랑스 속화법 l880-l903, Jules Ferry의 시행으로 수녀들은 1904년까지 105개의 학교에서 추방되었고, 그 결과 300여 명의 수녀들이 강제 환속해야 했다. 이로 인해 프랑스 내에서 사도직이 어렵게 되자 남아 있던 수녀들은 해외 선교-영국, 홍콩, 베트남, 일본, 벨기, 한국, 태국, 스위스, 중국, 라오스, 필리핀 등으로 넓혀 나갔다.
한편 수녀회는 샬트르 교구장의 이름을 따라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Soeurs de St. Paul de Chartres’라 명명하게 되었고, 바오로 사도를 수녀회의 주보로 하여 그의 선교 정신을 본받아 과감히 해외 선교의 장을 넓혀 나갔다. 2013년 현재 전 세계 40개국에서 4,000여 명의 수녀들이 교육과 의료, 본당, 사회복지 사도직을 중심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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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샬트르 고문서 담당 엘렌 수녀 고중자료,파리신학대학에서 박사과정을 한 것으로 추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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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수녀회의 영성과 정신 및 카리스마
트리엔트공의회의 규정이 발표된 100년 후인 17세기에 프랑스 내에는 많은 훌륭한 영적 지도자들이 나타났다. 즉 그리스도 중심주의의 신학자들과 사목지들, 선교사들이 함께 모여 피정이나 재교육 세미나 등을 통해서 이미 서품받은 사제들을 복음화하려 노력했다.
동시에 미래 사제들의 더욱 철저한 양성을 위해서 신학교를 열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다시 일깨워주고 그들에게 세례성사의 의미를 되찾아 주고자 애썼다. 2〉 이와 같은 노력은 프랑스 각 지방에서 펼쳐졌다. 수녀회의 창립자 루이 쇼베 신부는 17세기 프랑스 영성학 파3)의 그리스도 중심과 파스카 영성의 영향 아래 양성을 받았다. 이로 인해 새로 출발한 러베빌 공동체의 수녀들 또한 자연스럽게 이 영성 안에서 성장했다. 초기 공동체가 여러 위기 안에서 교회의 유익과 이웃의 필요를 위해 보여준 파스카적인 삶과 가르침은 수녀회의 풍요로운 영적 유산이 되었다. 또한, 그리스도 중심의 영성과 파스카 영성은 수녀들이 단순과 겸손 그리고 대담성의 정신으로 사도직과 공동체 생활을 하는 '애덕의 딸’들로 양성되어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 이름으로 세계 각국에서 살아가는 힘의 원천이 되고 있다.
다음은 수도회의 영성과 정신 및 카리스마에 대한 요약이다. 4》
카리스마는 창립자에게 내린 은사로서, 거룩한 유산이며 시간과 공간을 꿰뚫어 오늘 우리의 삶을 비추어주는 빛이다. 카리스마는 사명과 정신, 영성이 통합된 것으로서 우리의 사명은 애덕이고, 정신은 단순, 겸손, 대담성, 가난이며. 영성은 그리스도 중심과 파스카의 영성이다. 나무의 근원이 뿌리이듯이 영성의 원천은 복음 말씀이다, 우리 수도회 영성의 원천인 복음 말씀은 “너희가 내 형제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마태 25, 40이다, 영성 Who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을 나타내며. 이는 창립자의 설립 정신에서 나온다, 정신 How는 나무의 몸통에 해당하며 생명의 책과 회헌, 회칙, 총회 문헌, 자문회 문헌, 관구 지침 등에 근거를 둔다, 정신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에 구체적인 답을 제공하는데, 그 답은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적으로 살아야 한다’ 이다, 사명 What,즉 사도직은 영성의 꽃으로서 애덕이다. 뿌리와 몸통을 통해 올라온 영양분을 받아 피우게 되는 꽃,이것이 사도직인데 이는 사명을 수행하는 일이다, 뿌리에서 몸통을 거쳐 올라온 양분을 먹고 피운 꽃(사도직)이어야만 고유한 사명에 부합하는 사도직이 될 수 있다, spc(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적이 된다는 것은 우리 고유의 영성과 고유의 정신으로 사도직을 수행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새로운 복음화는 먼저 우리가 진정한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 수도자가 될 때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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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마리 롤 보드(Marie-Paul Bord), r300년의 발자취 j,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 1995.
3) 피에르 드 베월(Pierre de Berulle) 추기경, 오라토리회 2대 총장 샤를 드 콩드랑(Charles de Condren), 슐피스 회의 창설자 장 자크 올리에(Jean Jacques Olier), 장 외드(Jean Elides) 둥이 프랑스 영성학파의 중심인물이다, 이들의 핵심되는 영성은 그리스도의 육화 영성으로서 가난한 이들의 구원을 위해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가난한 사람들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다. 이는 오라토리오회의 창시자 성 필립보 네리의 영성에 근거한다.
4) 신정애 아네스 잔 수녀, 2013「연례피정강의록」참조.
2장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의 조선입국과
정착과정 1888-1910
1784년 시작된 한국천주교회는 잇따른 박해로 인해 100여 년 동안 1만 명이 넘는 순교자가 나왔다. 1883년 나가사키에서 주교로 성성되어 조선교구 7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블랑 주교는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기 한 해 전인 1885년 3월, 서울 곤당골 현 을지로 1가에 집 한 채를 구입한 후 고아원을 설립하여 운영했다. 그러다가 고아들 양육을 전담할 수녀들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프랑스 샬트르에 모원을 두고 있는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에 선교 수녀 파견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당시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의 총장 라 크롸 1832-1907 수녀는 자카리아(1842-1889) 수녀를 초대 책임 수녀로 하고, 에 스텔(1859-1905)수녀와 베트남의 사이공에 있던 두 중국인 수련수녀 비르지니(1863-1927)와 프란치스카(1862-1937)를 함께 조선교회로 파견했다. 5》 이리하여 마침내 1888년 7월 22일 4명의 첫 선교 수녀들이 조선 땅에 들어오게 되었다.
조선에 도착한 선교 수녀들은 아직 천주교 박해가 멈추지 않았던 조선 땅에서 사랑과 희생의 삶을 시작했다. 샬트르 모원 고문 서고에 소장된 1888년 8월 10일 자 블랑 주교 서한에는 샬트르의 총장 수녀에게 '수녀들의 파견에 대한 감사와 아울러 계속 적인 수녀회의 지원을 부탁’하는 내용이 있다. 이렇게 시작된 본 수녀회는 샬트르 수녀원의 행정 관할 아래 샬트르 모원과 사이공 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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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선교수녀들의 여정은 수녀회에서 펴낸“조선에 온 첫 선교 수녀 자카리아의 여행일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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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재정적 도움을 받다가 1891년부터는 관구로 승격된 일본 관구에 속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 관구의 관구 장이었던 마리 오귀스타 수녀는 매년 정기적인 시찰을 통해 조선의 수녀원 상황을 파악하고, 이를 샬트르모원에 보고하여 필요한 도움을 받도록 했다.
1888년 7월 22일 조선에 입국한 선교 수녀들은 블랑 주교가 정동에 임시로 마련한 거처에서 약 두 달간 머물다가 9월 7일 종현현 명동의 고아원 구내에 있는 수녀원으로 이주했다.
당시 수녀원의 지도 사제였던 코스트(1842-1896)신부는 수녀원 전례를 비롯하여 일상생활에 관한 통역까지 해줌으로써 수녀들의 정착에 도움을 주었다. 책임자인 자카리아 수녀는 살림 전반과 수녀원 운영을, 에스텔 수녀는 고아원 여아들을, 프란치스카 수녀는 남아들을 돌보았고, 비르지니 수녀는 주방과 세탁을 맡았다.
국내가 불안정하고 수녀원의 생활 또한 궁핍하여 수녀들의 고생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수녀원 원장인 자카리아 수녀는 과로와 병으로 내한한 지 6개월 후인 1889년 2월 3일 세상을 떠났고, 2대 원장으로 스타니슬라 1847-1909 수녀가 부임했다.
1. 한국인 수녀 양성
선교 수녀들이 조선으로 입국하기 전부터 블랑 주교는 한국인 수녀 양성을 계획하고 있었다. 수녀들이 조선에 입국한 지 일주일이 지난 1888년 7월 29일 다섯 명의 처녀들이 한국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의 첫 지원자로 입회했다. 그들은 모두 순교자의 딸들로서 김해겸 마리아 17세, 김순이 마리아 16세, 김복우지 마리아 17세, 박황월 글라라 16세, 심발바라 15세이다.
지원자들은 에스텔 수녀의 지도로 수도 생활을 익히는 한편 선교 수녀들을 도와 남당과 여당의 100명이 넘는 고아들을 돌보며 집안일과 생계를 위한 신학교의 세탁일 그리고 바느질 품 일까지 하느라 고된 생활을 했다. 게다가 빈약한 식생활과 전염병까지 겹쳐 심 발바라(1889년 1월 선종)를 시작으로 김복우지 마리아 수도명 베네딕다와 김순이 마리아(수도명 요셉, 1892년 8월 선종)는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이들 첫 지원자들에 이어 박경준의 두 딸 박마리아와 아가다, 그리고 김 아나스타시아 등 수도 생활을 지원하는 처녀들이 계속 수녀회에 입회했다.
2대 원장 스타니슬라 수녀는 지원자 양성을 위한 수련장 파견 요청 편지를 샬트르 모원에 보냈다. 이에 총장 라 크롸 수녀는 샬트르 수련원의 셋째 선생 수녀로 있던 엘리사벳 1848-1893 수녀를 수련장으로 임명했다. 그리하여 엘리사벳 수녀는 뱅상 수녀와 함께 1890년 3월 3일 종현 수녀원에 도착했다.
지원자들은 수련장 엘리사벳 수녀의 가르침을 받으며 수도 생활을 익혀 나갔다. 수련장과 수련 수녀들 사이의 가장 어려운 문제는 의사소통이었다. 지원자들은 스타니슬라 수녀로부터 일상생활에 필요한 프랑스어를 배우다가 수련장 엘리사벳 수녀가 온 이후부터는 프랑스어와 프랑스어 기도문을 수련원에서 배웠다. 반면 프랑스인 수녀들도 한국어 학습에 매진하며 상호 소통의 어려움을 극복해 나갔다.
한편 수련자들의 양성은 수녀회의 규칙과 프랑스어 기도문, 라틴어 기도문 읽는 법을 배우고 서원 준비를 위한 서원 문답과 같은 단순한 교육과 함께 집안일을 익혀가는 것으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양성 교육은 첫 수련장이었던 엘리사벳 수녀 1893-1896를 시작으로 하여 클라베 수녀(1893.11-1895.7) 에스텔 수녀 (1896.1-1905.7) 가밀 수녀(1905.7-1910.2) 안나 수녀(1910-1923) 등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2. 초창기 한국수녀회의 고통과 시련
1889년 1월 지원자 심 발바라의 선종에 이어 같은 해 2월 3일 초대 원장인 자카리아 수녀가 선종했다. 특별히 1895년 여름 전염병으로 인해 수련장 클라베 수녀를 비롯하여 세 명의 지원자(백 율리안나 에우제니아, 이름 미상의 청원자, 방 아가다 말가리다와 고아들도 한 달 동안에 무려 80여 명이 희생되는 등 수녀회에 커다란 고통과 시련이 잇따랐다. 또한 1896년 2월과 3월에 청원자 한 명과 공자그(1868 –1896)수녀가 전염병으로 죽고, 2월 28일에는 8년여 동안 수녀원의 지도 사제로 전심전력하던 코스트 신부까지도 전염병으로 선종했다.
고통과 시련 중에도 1898년 8월 28일 수련수녀 3명(김해겸 팬쁠,박황월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최복동 골름바)이 한국에서 처음으로 서원을 했다. 1888년에 입주했던 종현 수녀원이 너무 낡고 협소하여 1890년 2층 양옥집을 건축하여 10년 동안 지냈으나 지원자들이 많아 이 집도 역시 협소해지고, 부실공사로 인해 불편함도 컸다. 그리하여 바자 회 등으로 모금해 둔 수녀원 자체기금과 외부인들의 기부 등으로 수녀원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이 수녀원 건물은 1900년 9월 8일 준공 되었고, 수녀들은 이 건물에서 70여 년 동안 살았다.
3. 제물포수녀원 설립
1891년 이후 조선수녀원은 일본 관구에 속했으나 모든 행정적인 지시는 샬트르 모원으로부터 받았다. 기존 사도직의 유지 및 확장 등은 샬트르 모원과 사이공 관구로부터 재정적인 도움을 받았다.
1892년 말부터 제물포에 수녀원 설립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제물포에 수녀원을 세우고자 한 첫 번째 목적은 환자 수녀의 휴양을 위한 요양소 설치에 있었다. 초대 원장인 자카리아 수녀와 많은 지원자, 청원자들, 수련자들의 희생을 지켜보면서 스타니슬라 원장 수녀는 수녀들을 위한 요양소 건립의 필요성을 느꼈다. 스타니슬라 원장 수녀는 샬트르 모원과 사이공 관구의 강디드 수녀와 협의하여 그 동의를 얻고 제물포에 수녀원 건립을 추진했다. 제물포수녀원 설립의 두 번째 목적은 수련원 확장에 있었다. 당시 만주지역에서 선교하고 있던 이나르 신부는 샬트르 모원에 자신의 선교지에 수녀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다. 샬트르 모원에서는 만주지역의 선교를 장차 조선인 수녀들이 맡을 수 있기를 기대하며 서울수련원 확장의 뜻을 품었고, 그 후보지로 제물포를 지목했다. 그리하여 샬트르모원에서는 1893년 3월 6일 제물포수녀원의 설치를 서울의 뮈텔(1854-1933) 주교에게 정식으로 건의했고, 뮈텔 주교는 이 건의를 받아들였다. 그 결과 1893년 5월 12 일자로 사이공 관구의 강디드 수녀는 그 건축비용으로 3,000달러를 뮈텔 주교에게 발송했고, 풍부한 자금을 얻게 된 뮈텔 주교는 수녀원 건축과 아울러 제물포성당의 설계와 건축도 착수했다.
제물포수녀원과 성당의 건축공사는 명동대성당을 설계했던 코스트 신부 등의 도움을 받아 중국인 인부들과 기술자들이 담당했다. 그러나 1894년 6월 이후 청일전쟁의 여파로 중국인 기술자들이 본국으로 돌아가 공사가 잠시 중단되는 어려움도 겪었다. 1895년 5월 중국인 기술자들이 다시 조선에 입국함으로써 그해 제물포성당의 정초식을 갖게 되었고, 마침내 1896년 7월 4일 제물포성당이 준공되었다. 제물포수녀원은 본래의 설립 목적대로 환자 수녀들의 요양소로 사용되었으나 수련원은 둘 수가 없었다. 소임을 위해 파견된 수녀들은 서울수녀원과의 연계 속에 보육사업과 의료사업 그리고 교육 분야에서 활발하게 사도직을 시작했다.
한편 서울수녀원에서와 마찬가지로 제물포수녀원 수녀들 역시 전염병으로 인해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콜레라로 인해 조선인 이발바라 베로니카 수련수녀, 홍 크리스틴 에우제니아 수련수녀와 줄리엔느 수녀(1854.3-1903.4)가 희생되었고, 엠마누엘 수녀(1866.4~1912.8)는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또한, 제물포수녀원과 본당 사제와의 어려움으로 인한 ‘제물포수녀원 소송사건’ 6)을 겪으면서도 제물포 지역에서의 수녀들의 활동은 계속되었다.
4. 초기 수녀회의 사도직 활동
1) 사회복지 사도직
본회가 한국에 진출하게 된 직접적 계기는 고아들을 돌보는 사회복지사도 직을 이행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한국수녀회 설립 초기에 있어서 고아원 운영과 관리는 본회의 사도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가난한 이들과 병든 이들을 돌본다.”라는 수도회의 창설 정신은 교육과 환자 간호 그리고 사회복지 사도직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한국에서의 첫 활동이 고아 구제사업 및 그들의 교육이라는 점은 본 수도회의 초창기 사명과 그 맥락을 함께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수녀회는 조선에 진출한 후 바로 교구로부터 종현에 있는 고아원의 운영을 위임받아 1888년 9월 8일 성모 성탄 축일에 블랑 주교에 이어 자카리아 수녀가 고아원의 2대 원장이 되었다.
1888년 175명의 아동을 교구로부터 인수하여 고아들을 위한 사도직을 시작하게 되어 1898년에는 원아의 숫자가 331명까지 늘었다. 이후 한 일 병합 때까지는 약 200명 내외의 고아들을 지속적으로 돌보았다.
한편 1894년 8월 18일 제물포에 수녀원이 세워지고 수녀들이 파견되자 이곳에서도 곧 고아들을 위한 사도직이 시작되었다. 즉 제물포 수녀들은 가난한 이들과 환자들을 보살피던 중 그 해가 을 길에 버려져 있던 4살 여아와 12살 된 여아를 수녀원에서 양육하며 고아 구제사업을 하게 되었고, 1894년에는 8명의 고아가 수녀원에서 보호를 받았다. 이렇게 시작된 제물포 고아원은 1896년 8월 15일 별도의 건물을 지었고, 1902년 원아들이 144명까지 늘게 되자 1909년 다시 새로운 건물을 짓게 되었다.
2) 의료사도직
1854년부터 선교사인 메스트르 신부(1808-1857)는 프랑스 성영회의 도움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사회사업이라 할 수 있는 성영회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고아와 기아들을 모아 양육하는 이 사업은 병든 아이들의 치료를 위한 의료활동을 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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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수녀회 100년사, 140-155쪽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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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메스트르 신부 이후 교회 당국에 의한 의료사업은 1857년에 실시되었다. 당시 조선 교구장이던 베르뇌(1814-1866) 주교가 로마 교황청에 보낸 11월 7일 자 서한에는 “ 한 중요한 도시에 세운 시약소 덕택으로 저희는 더 많은 우상숭배자 자녀들에게 천국의 문을 열어 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성영회 사업의 일환으로 시작된 이 시약소는 우리나라에 서양 의료를 도입한 선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곳은 1866년에 일어난 병인박해로 인해 잠시 중단되었다가 블랑 주교에 의해 재개되었다.
블랑 주교는 자신이 설립한 고아원과 양로원의 운영을 위해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의 파견을 요청하면서 그들에게 위의 사업체들에 딸린 시약소의 일도 맡아 줄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 따라서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 수녀들이 조선에 도착하자 블랑 주교는 교구에서 운영하던 고아원을 수녀들에게 위임했다.
교구로부터 고아원을 위임받은 수녀회는 고아원을 운영하면서 자연스럽게 의료사도직에서도 활동하게 되었다. 당시 고아원에서는 병약한 아동들을 우선적으로 받아들였고, 이들에게 세례를 주며 간호했다. 초대 원장이었던 자카리아 수녀는 이미 서인도제도 마르티니크 지방의 선교병원에서 근무한 바 있었고, 1894년 인천에 파견되었던 클레망스 수녀도 베트남 통킹의 야전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한 경력이 있었다. 수녀들은 주로 고아원의 아동들을 간호했고, 일반 환자를 위한 의료사도직 분야에 직접 투신하기 시작한 것은 1894년 여름 제물포 수녀원에서부터였다.
1894년 제물포에 진출한 수녀들은 수녀원 건물 안에 시약소를 설치하여 무료진료 활동을 시작했다. 클레망스 수녀는 제물포수녀원에 부임하면서 환자들을 위한 봉사에 전념했다.
그리고 클레망스 수녀의 뒤를 이어서 줄리엔느 수녀와 뱅상 수녀 등이 환자의 무료진료에 임하게 되었다. 줄리엔느 수녀가 뮈텔 주교에게 보낸 서한에 의하면 “1897년 8월부터 8개월 동안 제물포 시약소에서 2,623명의 외래환자를 진료했고, 275명의 환자를 방문 치료했다”라고 보고하고 있다. 7) 서울의 종현 수녀원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시약소 즉, 무료 진료소를 개설한 것은 1899년이었다. 시약소를 개설한 지 10년이 지난 1909년에는 외래환자의 진료비 제물 포의 진료 수를 능가했다. 의료사도직의 전개 과정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수녀들의 방문 진료 활동이었다. 수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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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수녀회 100년사 』187쪽, 줄리엔느 수녀가 뮈텔 주교에게 보낸 보고서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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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환자의 영혼을 구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외래환자를 진료하는 바쁜 임무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환자를 방문하여 진료했다. 즉 수녀들은 환자들을 왕진하면서 그들의 영혼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었고, 죽을 위험이 있는 환자들에게 대세를 베풀었으며, 대세를 받은 환자가 살아날 경우에는 신앙생활을 계속할 수 있도록 인근의 신도들과 연결시켜 주었다.
비록 수녀들의 의료지식은 면허를 가진 전문의사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지만, 이웃에 대한 사랑과 신뢰를 통하여 보충되었다. 수녀들은 이와 같은 사도직 활동을 자신들의 고유한 사명으로 확신하고 수녀회의 창립 정신을 이어가는 가운데 큰 보람과 기쁨 안에서 의료사도직을 계속해 나갔다.
3) 교육 사도직
조선 천주교회는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1865년 서울에 일반 학생을 교육하기 위한 목적으로 교육기관 설립을 계획했으나 병인박해로 인해 무산되었다. 개항 이후 신앙의 자유가 점차 허용되자 교회는 교육기관의 설립을 다시 추진했다. 1882년 인현 학교를 효시로 천주교의 교육 활동은 비교적 활발히 전개되었다. 1890년대에 이르러서는 각 본당에서 한두 개의 소규모 학교를 운영함으로써 천주교회는 대중교육을 위한 실천을 본당을 중심으로 벌여나갔다. 1909년부터 1910년 사이에 본당을 중심으로 한 124개의 학교에 3,048명의 재학생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교회학교의 운영은 1908년 통감부에서 제정한 '사립학교령’의 영향을 직접 받게 됨으로써 상당수의 학교들은 통감부의 인가 없이 교회에서 독자적으로 운영했다.
⑴ 수녀회의 여성 교육
1888년 조선에 진출한 본 수녀회는 고아원의 운영을 맡아 하면서 고아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사도 직을 실천했다. 수녀들은 고아들에게 읽기, 쓰기, 수공예 등을 가르쳤으나 이것이 본격적인 교육기관으로 전환되지는 않았다. 개신교에서 고아들을 모아 가르치기 시작해서 경신학교로 발전시켰던 것과는 달리, 고아를 보호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 수녀회의 고유한 사도직의 하나였기 때문에 고아원은 그 독자적인 성격을 계속 유지해 나갔다.
그러다가 1899년부터는 교육 사도직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그해 8월 제물포수녀원의 수녀들이 여학교를 시작했고, 이 학교에서는 읽기, 쓰기, 수예 및 기도문과 요리 문답을 교육했다. 학생들은 신자뿐만 아니라 외교인도 반이나 되었다. 이 학교가 제물포 '박문 학교’ 의 전신이다.
서울수녀원에서는 1900년 가을에 종현으로 이전해 온 현 계성초등학교의 전신인 인현 서당에 수녀를 파견하여 남학생들과 함께 여학생들을 받아 교육하기 시작했다. 1904년 노일 전쟁으로 인해 학교를 임시 휴교하기도 했으나, 1908년에는 기숙사를 마련하여 지방의 여학생들까지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아울러 약현성당의 두세(853-1917) 신부가 1901년에 설립한 여학교(가명소학교의 전신)에 2명의 수녀를 파견함으로써 교육 사업 분야에 본격적으로 진출해 나갔다.
이와 같은 여성 교육은 당시 사람들의 편견에도 불구하고 계속되었고 좋은 성과를 거둬나갔다. 당시 파리 외방전교회의「조선교구 통신문」이나「조선교구 연말 보고서」에는 수녀회에서 수행하던 여성 교육 사업의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곧 국문과 한문, 산술과 지리 이외에 수예 등의 과목과 서양의 신지식을 포함해서 여성 교육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교과과정이 편성되어 있다는 내용이다.
(2) 지방 본당에서의 여성 교육
조선 천주교회는 사회의 애국 계몽운동에 발맞추어 교육 활동을 활발히 전개해 가면서 여성 교육에 관한 관심도 높아졌다. 수녀들이 여성 교육 분야에 더 많이 투신하기를 요구했고, 지방에 있는 사제들이 본당에 있는 여학교에 수녀들을 파견해 주기를 요청했다. 그리하여 1909년 처음으로 평양 관후리 본당 성모 학교에, 같은 해 10월 안악 매화동의 봉삼 학교와 11월에는 제주도 신성 여학교에 교사 수녀들이 파견되었고, 1910년에는 진남포 성당의 여학교에서도 교육이 시작되었다.
1909년 당시 한국인 수녀는 지원자까지 포함하여 49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14명이 교육 사도직에 투신하고 있었다. 요컨대 우리 수녀회는 조선에 진출한 후 11년이 지난 1899년부터 본격적으로 교육사도 직을 실천했다. 그 후 1900년부터 1910년에 걸쳐서 수녀회의 교육 사도직은 계속 성장했고, 당시 천주교회에서 운영하던 대부분의 여성 교육기관에서 우리 수녀들이 봉사했다.
그러나 수녀회의 교육 기관들은 초등교육을 수행하는 데에 그쳤고, 시대적 전환기에 요청되던 고급 인재를 양성하는 데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이는 당시 교회에서 운영하던 교육 기관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문제점이었다.
4) 본당 선교 사도직
1873년 말 대원군이 물러가고 교난의 여파가 진정되면서 1876년 이후 많은 선교사들이 다시 입국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담당 지역에 공소를 세우고 지도자를 키워 포교 활동을 재개함으로써 조선교회는 회생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가운데 1876년 조일 통상조약, 1882년 조미 통상조약, 1886년 조불 조약 등으로 문호가 개방되면서 조선교회는 복음화를 위한 선교에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들은 치외법권의 보장을 받은 신분을 활용하여 국내 각지를 여행할 수 있게 되자 공소의 복원과 함께 전국적으로 활발한 포교 활동을 전개했다. 지방에서는 아직도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이 있었으나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교세가 확장되어 나갔다. 그리하여 교우 촌을 중심으로 새로운 본당설립을 추진함에 따라 본당의 분할과 발전은 속도를 더해갔다.
더욱이 파리 외방전교회의 설립 목적에 따라 조선인 교구 사제 양성을 위해 전력한 결과 1896년에는 3명의 조선인 사제 8〉가 탄생하면서 조선교회는 더욱 활기를 띠어갔다.
우리 수녀회는 본당을 기반으로 하는 교구에 협력하면서 본당 사도직을 시작하게 되었다. 더욱이 교구 사제인 루이 쇼베 신부에 의해 본당 주변의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해 창립된 수녀회가 조선에 진출, 활동함으로써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기 드문 본당 중심의 수녀상이 심어지게 되었다. 1899년부터는 제물포 본당에서 운영하는 학교사업에 협조하기 시작했고, 이를 통해 신앙교육과 선교에 힘쓰게 되었다.
본당 사도직을 위해 파견된 수녀들은 본당 학교에서 주로 경문과 유희, 노래, 교리지도, 한글과 가사 등을 가르쳤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 학부모들의 상담자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본당의 제의 방 관리와 전례를 돕는 일도 했다. 매화동 본당 학교에서는 학습지도 이외에 우도 신부 (오보록,1865-1913)의 장려로 수녀들은 양잠강습소를 개설하여 누에치기와 명주실 뽑는 일을 가르치는 양잠기술을 보급함으로써 주민들의 소득 증대에도 이바지했다.
이와같이 수녀들은 본당에 파견되어 학교 교육과 교리, 시약소, 환자 방문 등을 통해 선교사도 직에 임했다. 수녀들의 활동은 민족의 개회키, 수난기에 동참하면서 본당 선교 사도직 활성화의 밑거름이 되었다. 당시 수녀들은 가정에서 익힌 한글과 서양 수녀들로부터 약간의 교리, 영성 교육밖에 받은 것이 없었지만 그들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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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1896년 4월 26일 우리나라 약현성당(藥現聖堂: 현 중림동성당)에서 뮈텔 주교의 주례로 강성삼(라우렌시오, 1866-1903), 강도영(마르코, 1863-1929), 정규하(아우구스티노,1863-1943) 세 명이 조선인 최초로 서품을 받았다. 한국가틀릭대사전, 한국교회사연구소,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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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서나 단순하게 헌신적으로 봉사했다. 수녀들의 이러한 삶은 지역 주민들의 존경과 신뢰를 얻었고 많은 이들이 가톨릭으로 입교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수녀들의 본당 진출과 활발한 사도직은 선교의 좋은 기회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여성 해방의 정신적 뒷받침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봉건적 가정생활의 풍습으로 여자들의 바깥출입이 여의치 못한 때였으나, 성당에서 경영하는 학교에서 좋은 표양을 주는 수녀들이 지도하였기에 부모들이 안심하고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무지와 봉건주의의 멍에에서 근대적 사회질서로 옮겨가는 과도기에 수녀들의 존재와 삶, 활동은 젊은 여성들에게 새로운 가치와 남녀평등의 빛을 밝혀주는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1909년부터 수녀들은 서울과는 너무도 멀고 낯선 평안도, 황해도 그리고 바다 건너 제주도의 본당에까지 파견되었는데, 이는 1700년대에 샬트르의 작은 공동체 수녀들이 대서양을 횡단하여 유형 수들의 섬 카이엔에 가서 복음적 삶을 증거가 된 단순성과 대담성의 재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거리와 관계없이 그들을 필요로 하는 어느 곳이든 가서 말보다는 행동으로, 가난한 형제들에게 영적, 인간적 도움을 줌으로써 본당의 사목에 활력을 불어넣은 수녀들을 통해 본당 중심으로 사도직을 시작했던 첫 공동체의 모습을 볼 수 있다.
3장 식민지 시대와 해방 전후의 수녀회
1910—1948
1. 교회 활동과 수녀회
1910년 8월 22일 '한일강제병합조약’에 조인하고 이를 8월 29일에 공포함으로써 우리 민족은 나라 없는 민족이 되었고 일제의 식민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5년 8월 일제는 소위 포교규칙을 제정, 공포하여 총독부의 허가 없이는 선교할 수 없게 했다. 본당 신설 역시 사전에 총독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고 허가를 받으려면 설립 이유와 그 유지방법이 충분하다고 인정되어야 했다. 이로써 본당설립에 큰 지장을 받게 되었다.
일제는 선교와 종교단체의 교육기관 설립을 탄압하는 ‘포교규칙’과 '사립학교규칙 개정령’을 공포했다. 교회의 포교 방침에 따라 많은 교회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교육에 종사하던 우리 수녀들은 일제의 교육에 대한 제약 속에서 타격을 받았다. 사립학교 개정령으로 차츰 수녀들은 교단에서 떠나 본당 내의 종교 활동이나 예비자 교리, 가정방문, 제의실 등의 일로 전환하게 되었다.
수녀들은 교과 수업 대신에 방과 후 교리교육을 했는데 이것은 한글 교육을 통한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결과가 되기도 하여 일제 시기 민족자주 및 독립운동에 보탬이 되었다. 한편 일제가 교사자격증을 요구함으로써 수녀회에서는 교사 수녀 양성을 시작했다.
일제의 압제로부터 벗어나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 투쟁하던 독립운동 당시 조선 천주교회를 대표하던 뮈텔 주교와 드망즈(안 세화 1875–1938)주교는 일본의 조선 통치를 합법적인 것으로 간주했고 독립운동에 반대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조선인 사제들과 신학생들 그리고 천주교 신자들은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에 한마음으로 임하면서 몇몇 학생은 퇴학 처분을 당했다. 천주교 신자들도 안성과 해주, 강화, 광주, 수원 그리고 간도 등지에서 독립 만세를 부르며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투옥을 당하기도 했다.
우리 수녀들은 기도와 희생으로 나날의 어려움을 수용하는 생활로써 이들과 뜻을 같이하며 지냈고, 몇몇 수녀들은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난 이후 학생의거를 두려워하던 일제에 의해 구금당하기도 했다. 9〉 또한 조선 천주교회는 사회, 문화 활동을 폭넓게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미 1880년대부터 프랑스인 선교사들이 시작한 고아원, 양로원, 시약소 등은 독립운동 이후에는 다른 양상을 띠고 발전했다. 특히 독립운동 이후로 전국 각지에서 청년운동이 활발해진 것을 계기로 교회가 경성구 천주교회 청년연합회를 발족시켰다. 이들은 발족과 동시에 사회사업과 교육 사업을 당면한 과제로 채택하여 활발히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1931년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을 맞아 청년연합회는 의료기관의 신설을 제창하여 1936년 서울에 성모병원을 설립했다. 샬트르 모원에서는 15,000원을 희사 10) 했고 우리 수도회는 병원이 성장하는데 큰 노력을 기울였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제의 탄압정책이 극도에 달했다. 일제는 먼저 평양교구의 미국인 주교를 위시하여 사제 35명을 가뒀다. 그리고 광주와 춘천의 아일랜드인 주교와 사제 32명을 구금 하였으며 이듬해에는 구금된 미국인 사제들을 본국으로 추방했고, 모든 외국인 주교들을 일본인 주교로 대체하려 했다.
일제는 신학교와 교회의 학교들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여 1942년 서울의 용산신학교가 폐교된 데 이어 대구신학교가 폐쇄되었다. 그리고 총독부의 인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덕원 신학교를 일본군들이 징발했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일제의 탄압은 더할 수 없이 가혹해졌다. 사제와 신학생들은 군인이나 노무자로 징용되었고, 평양의 대성당을 위시하여 곳곳에서 성당들은 군용으로 징발되었다. 11》 외국인 사제가 사목하다가 본국으로 추방되어 간 본당의 우리 수녀들은 본당을 떠나 일시 귀원 해야 했다.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패망하게 되자 우리나라는 일제 치하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이했고, 해방 이후 교회 활동은 활발히 전개되어 갔다. 12〉 민족의 해방은 신앙의 완전한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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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수녀회 100년사, 229쪽 참조,
10) 샬트르 모원 고문서고 소장자료, 1936년도 기록.
II》1"경향잡지j, 1946. 9, 25쪽: 일본군으로부터 강제 징발되었던 교회건물은 평강성당, 종현성당, 장연 신부 사택, 경성 성바오로수녀원 경영 보육원 용산분원,대구신학교, 경주성당,부산성당, 왜관학교, 덕원신학교, 원산 수녀원, 함흥 신부 사택,목포 주교관 등이다.
12) 서울대교구총람 편찬위원회,r서울대교구총람, 1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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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가져왔다. 그리하여 한국천주교회는 주체적으로 사목방침을 펴나갈 수 있었다. 1946년 8월 일제하에서 정간되었던 경향 잡지가 속간되었고, 10월에는 일간지「경향신문」을 창간했다. 이어「가톨릭청년 도 속간되었다. 교육 분야에서도 종래에 초등교육 과정에 머물렀던 학교들이 중등 및 고등교육 기관으로 개편되었다. 동성 상업학교는 인문 중, 고등학교로 개편되었고, 계성, 논산의 대건, 부평의 박문, 안성의 안법학교 등이 중등학교로 승격되었다. 무엇보다도 종래의 경성 천주교 신학교가 1947년 5월 성신 대학으로 승격되었고 이에 따라 소신 학교도 성신 대학부 속 중학교로 승격되었다.
교황청은 1947년 8월 평양교구의 선교사였던 메리놀회 변(1888-1950)신 부를 한국의 임시 교황사절로 임명했다. 그때까지 조선은 일본주재 교황사절의 관할 하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교황청은 한국 주재 교황사절을 파견함으로써 간접적으로 한국의 독립을 제일 먼저 승인한 결과가 되었다. 또 1948년 11월에는 본 수녀회가 일본 관구에서 독립하여 '한국 관구’가 되었다. 13》 이처럼 한국교회는 일본교회의 종속에서 벗어나 독립교회로서의 기반을 굳혀갔다. 다른 한편 8·15 광복은 북한교회에 또 다른 고난의 시기를 가져다주었다. 소련군의 북한 주둔과 더불어 공산주의자들이 종교박해를 감행함에 따라 덕원 수도원이 폐쇄되었고, 많은 사제와 수도자 및 신자들이 희생당했다.
2. 대구수녀원 설립과 성장 과정
로마 교황청에서는 1911년 6월 11일 뮈텔 주교가 담당하던 서울대교구로부터 경상도와 전라도를 분리하고 대구교구를 신설하여 1대 교구장으로 드망즈 주교를 임명했다. 1912년 10월 10일 드방즈 주교의 요청으로 서울로부터 2명의 조선인 수녀들, 곧 방 엘리사벳 스테파나 수녀와 강부길 테클라 수녀가 대구의 여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수녀들은 소세(1877-1921)신부가 지어준 수녀원에 기거하면서 소녀들의 교육을 담당했다. 14〉
이후 김 세실리아 수녀와 이 아녜스 수녀가 다시 서울로부터 파견되어 4명의 수녀들이 함께 분원을 이루어 생활했다.
대구에 파견된 수녀들의 역할이 교구 사목에 큰 활기를 넣어 주는 것을 확인한 드망즈 주교는 서울수녀원 분원이 아닌, 대구교구를 위한 독립된 수녀원을 설립하여 더 많은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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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300년의 발자취 200쪽에서 마리 롤(Marie Paul Bord) 수녀는 관구가 아닌 ‘준관구’로 서술하고 있다.
14) 수녀회 100년사, 233-234쪽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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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 교구 사목을 위해 일할 수 있기를 원했다. 드방즈 주교는 1914년 6월 13일 자신에게 대구수녀원의 설립을 위임한 15》 베이 드 바야 주교에게 샬트르 수녀원에 대구수녀원 설립 문제를 요청해주도록 청했다. 그리고 샬트르의 총장 수녀에게 대구수녀원을 설립할 수 있는 허락을 공식적으로 요청했다.
1915년 3월 25일 드방즈 주교는 샬트르의 총장 수녀로부터 대구수녀원의 수녀 파견에 대한 서신을 받았다. 그러나 샬트르에서 직접 파견하는 일은 어렵고, 동경과 서울에서 각각 수녀들을 파견하는 일을 추진 중임을 알렸다. 16) 그리하여 10월 12일 대구수녀원 설립을 위해 서울에서 뱅상(1870-1939) 수녀와 3명의 한국인 수녀一오 데레사 루시아, 임 안나 마리, 최 모니카 막달레나가 도착했다. 3일 후인 10월 15일에는 수녀원과 수녀원 성당 축성식이 있었고, 첫 미사와 성체강복이 이어졌다. 17)
11월 5일에는 제물포수녀원에서 2년간 지낸 일이 있던 마리 테오뒬르 수녀가 일본에서 도착하여 공동체에 합류했다.
이와 같이 서울과 제물포에 이어 대구에도 샬트르성바오로수녀원이 설립되었다. 서울수녀원과 대구수녀원의 관계는 그 설립 목적 및 배경에서 나타나듯이 두 수녀원이 각각 독립된 수녀원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서울수녀원과 대구수녀원은 한 가족으로 지내며 상호 협조 관계 속에서 서로에게 관심을 갖고 도왔다.
1) 대구수녀원의 초창기 생활
신설된 대구수녀원을 위해 서울수녀원의 가밀 원장 수녀가 자주 방문하면서 수녀원 생활이 자리 잡는 것을 도왔다. 그런데 대구수녀원 초창기의 어려움은 한국인 수녀들과 프랑스인 수녀들 사이의 갈등이었다. 제물포수녀원 사건을 고려하여 수녀회에서는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소임 이동을 감행하기도 했고, 갈등의 완화를 위해 드망즈 주교 또한 고심하며 중재 역할을 했다. 18) 1920년 5월 말경에는 베아트릭스(1874 –1950) 수녀가 서울에서 대구로 전출되었고, 1921년 9월 2일에는 아델(1885-1971) 수녀가, 1922년 12월 22일에는 25세의 아가다(1897-1978) 수녀가 부임했다.
1924년 6월 10일에는 서울수녀원으로 다시 떠난 베아트릭스 수녀의 후임으로 안느(1873-1946)수녀가 제물포에서 대구수녀원으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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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J.D., 1914. 6.13.
16) J.D.,1915. 3.25.
17) J.D., 1915. 10.15.
18)J.D., 1917. 10.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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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녀들은 학교와 집안일 그리고 고아들을 양육하는 일 등을 하면서 초창기의 갖가지 어려움을 인내하며 극복해 나갔다. 그러던 중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1915년 5월부터 성영회 지원금이 줄어 고아원 운영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수녀들은 생활에 필요한 비용과 50여 명의 고아들을 양육하는 데 드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1918년부터 양잠업을 시작했다.
수녀들이 치던 누에고치는 최상급으로 품별되어 한국인과 일본인이 생산한 것보다 비싼 값에 팔렸다. 이에 용기를 얻은 수녀들은 수녀원 주위에 뽕나무를 심어 양잠업을 더욱 발전시켜 나갔다. 양잠업의 목적은 영아원의 살림을 꾸려나가는 것 외에도 성영회의 소녀들이 장차 결혼할 때 도움을 주려는 것이었다. 19>
대구에서 수녀들이 종사하는 학교 역시 주교와 신부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학부모들과 지역 사회인들에게도 호평을 받았다. 이는 수녀들이 기도시간과 공동체 생활 이외의 시간을 아이들 교육에 쏟았기 때문이었다. 20》 교구의 당가唐家 신부였던 무세(1876-1957) 신부는 대구수녀원의 초대 지도신부로서 수녀원과 고아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마련해 주었다.
한편 대구수녀원 설립이 확정되어 수녀원 건물을 건축하던 중, 1915년 8월 드방즈 주교는 수녀원 묘지를 준비했고 9월 초 묘지 설치허가를 얻었다. 1926년 8월 28일에는 늘어나는 수녀 지원자들로 인해 1927년에는 성당을 신축하고 옛 성당을 수녀들의 숙소로 사용하게 되었다. 21) 1932년 수녀들은 마산 완월동의 성지학원에 파견되어 학교 수녀로 일했으며, 1937년에는 왜관의 소화 여자학원에서 학교 수녀로 일하게 되었고, 이어 호남지방에도 진출하여 전라북도 전주에도 분원을 설립함으로써 더욱 넓은 지역에 걸쳐 학교에서의 어린이 교육과 본당에서의 전교 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동안 대구 본원에서는 가까운 본당의 유년반, 교리 교사, 순회 전교사로서 약 주머니를 들고 가난한 집, 환자가 있는 집들을 방문하면서 위로와 도움의 손길을 펼쳤다.
2) 대구수련원 설립
대구교구의 드망즈 주교는 수련원 건물의 건축도 계획했다. 그는 샬트르 수녀원에 가서 총장 수녀를 방문하여 몇 가지 결정을 내렸는데, 그 결정사항들은 대구수련원의 완전 독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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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C.R.T.,1919.
20) C.R.T., 1921.
21) 10., 1915. 9.4,『수녀회 100년사j, 244-245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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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을 시사하는 것이었다.22)
1925년 12월 28일 드방즈 주교는 프랑스에서 반 로씀 추기경으로부터 로마 교황청에 요청한 그의 청이 허락되었다는 편지를 받았다. 그리하여 1925년 성탄에 죠르즈 (1892—1946) 수녀를 초대 수련장으로 하여 지 원자들을 교육하기 시작했다.
이때는 수련원을 위한 건물이 없었으므로 본관 동편 작은 칸막이 방이 수련자들의 거처가 되었다. 1927년 2월 27일 청원자 7명에게 교회법상의 시험을 치른 후 3월 25일 성모영보첨례 날에 7명이 착복을 했고, 이로써 대구의 수련원이 정식으로 개원되었다. 23) 신설된 대구수련원의 지원자 및 착복자, 서원자의 수는 계속 증가했다. 늘어나는 수녀 수로 인해 고아원을 신축하여 집 전체를 수녀들이 사용하도록 했다. 수련원을 건축하게 된 것은 10년 후인 1937년이었다. 24)
수련자들은 보육원 원아들을 돌보는 일과 양잠업, 주방일, 밭일, 세탁일, 다리미일 등 잡다한 일들이 끊임없는 가운데 바쁜 일손을 도우며 수도 생활을 익혀 나갔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도 드망즈 주교는 지원자들에게 국내 혹은 국외에서까지 학교 교육을 받게 함으로써 수녀회의 사도직 활동의 준비를 튼튼히 했다. 일제 치하에서 또 1차 세계대전 후의 경제 공황기에 국내 혹은 국외에서까지 지원자들을 교육하는 일은 크나큰 희생과 결단이 필요한 것이었다. 드망즈 주교는 이와 같은 희생을 무릅쓰고 인재양성에 주력한 결과 수녀회는 그들이 봉사하고 있는 지역사회 안에서 활발하고 효과적인 투신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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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우녀회 100년사j, 254쪽 참조,
23) 10., 1927. 3.25.
24) r수녀회 100년사j, 255—256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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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독립운동 및 세계대전과 수녀회
1) 서울수녀원의 생활
대구수녀원의 설립과 더불어 대구지역에서의 사도직 활동이 점차로 전개되어가는 한편 서울수녀원에서는 가밀 원장 수녀의 담당하에 사도직 활동이 펼쳐졌다. 1912년 학교 수녀들이 대구로 파견되어 간 다음 해에 서울에서는 다시 장호원에 수녀들을 파견했다. 파견된 수녀들의 활동은 지역사회 안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1913년 7월 21일에는 한국수녀회 설립 25주년 기념 미사를 조촐히 지냈고, 이어 7월 29일에는 수녀회 첫 지원자 입회 25주년을 축하했다. 25) 그해 우리 수녀회에는 지원자 19명, 청원자 21명, 수련자 8명이 있었고, 서원 수녀는 총 28명으로 한국인 20명, 외국인 8명이었다. 26) 1917년 수녀회는 샬트르로부터 새 규칙서를 받아 뮈텔 주교의 도움을 얻어 한국어 번역을 시작했다. 같은 해 9월에는 한국인 김영제 신부가 황해도 장연에서 시작한 본당 학교에 수녀들을 파견하여 교육과 선교 사도직을 했다.
한편 1914년에 시작된 1차 세계대전은 1918년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 그 이듬해 1919년 봄에는 한국에서 선교하다가 소집되어 종군했던 신부들이 전쟁터에서 한국 선교지로 돌아왔다. 그러나 불로(1889-1915) 신부와 기요(887-1916)신부는 전사했고, 망(1874-1918, 27) 신부는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그 외의 종군 사제들은 몇 달간의 휴양을 거친 후 자신의 선교 지역으로 다시 부임했다. 이에 따라 수녀들도 이전에 파견되었던 임지로 다시 부임해 갔지만, 매화동, 진남포, 제주도에는 파견되지 않았다.
1차 세계대전 동안 수녀원과 고아원의 궁핍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당시 성영회에서 고아들을 위해 보내주던 돈이 불안정했고 큰 수입이 없던 수녀원에서는 서울과 제물포의 260여 명이 넘는 고아들을 양육하는 것이 어려웠다. 수녀들은 1919년에 서울의 유럽인 자녀를 대상으로 수녀원 안에 프랑스어 학교를 개설했고, 이와 관련하여 프랑스 정부는 수녀들에게 지원금을 보조해 주었다. 수녀들의 외국인 아동교육은 이전에도 사적으로 조금씩 있어 수녀원 살림에 보태기도 했었다. 28) 고아원 운영을 위해 수녀들은 또한 자선복권을 판매했는데 유럽인과 일본인 부인들도 협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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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J.M.,1913. 7.21; 7.29.
26) C.R” 1913.
27) 「수녀회 100년사」 259쪽,주(註)95 참조,
28) J.M., 1913.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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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근(바오로,1868-1939) 신부는 1924년부터 지도 사제로서 수녀회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한기근 신부는 당시 경향 잡지사 사장으로 일하면서「경향잡지」나 강론 등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 수녀회와 고아들을 소개하는 글을 써서 도움을 호소했다. 그는 수녀회의 생활을 위해 애써 주었고, 틈틈이 수녀들의 교육에도 힘썼다. 이런 한기근 신부의 열성은 각처 본당 사제들과 교우들의 호응을 얻어 수녀원의 생활에 큰 보탬이 되었다. 29> 그러나 이 시기 수녀들은 과로와 영양부족이 겹쳐 겨울이면 독감에, 여름이면 장티푸스, 콜레라 등에 시달리면서 생명을 잃는 이들이 많았다. 고아들도 마찬가지였다. 뮈텔 주교는 이러한 상황을 일기에 남겨두고 있다. 30)
독립운동이 일어난 1919년 당시 교회 장상들이 일제하의 민족적인 투쟁에 무관해지려는 태도를 보였으므로 31》 수녀들 역시 전교나 학교, 간호, 보육원 등 일상의 사도직에 충실히 임하며 지냈다. 그러나 수녀들의 일제강점기에 대한 회고담에서 우리 수녀들이 당시에 어떠한 마음으로 민족을 생각하고 나라를 생각했었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당시 숙명 학교에 재학 중이던 손임녀 아녜스 수녀는 학생들의 시위에 합세하여 등교를 거부했던 일과 일본인 선생에 대한 거부행위를 했던 일을 회상했다. 그리고 일본인들의 행패와 무시, 심지어 프랑스인 사제로부터까지 무시당했던 아픈 기억을 회고하고 있다. 32) 독립운동과 관련하여 후에 제주도 신성 여학교의 교장이 된 최정숙 베아트릭스는 당시 수녀원의 지원자였으나 독립운동에 관여한 관계로 일본 정부의 주목을 받게 되어 수녀원에 누를끼치게 될까 염려하여 수녀원 입회를 단념했다.
또한, 1929년 1월 광주학생운동을 계기로 수녀 지원자였던 이 동화 라셀 수녀, 이용선 바틸다 수녀 그리고 김정숙 오를레아 수녀는 일본 경찰에 의해 구금당하기도 했다. 이 일로 인해 상급학교 진학에까지 지장을 가져오게 되었다고 이동화 라셀 수녀는 증언했다. 33)
1925년 11월 23일에는 드브레(1877-1926)주교의 집전으로 새로 건립된 기숙사를 축성했다.
1926년 3월 7일에는 1년여에 걸쳐 공사한 수련원과 고아원 건물을 준공, 축성했으며 드비즈( 1871-1933)신부의 설계, 감독 하에 1930년 5월 13일부터 시작된 수녀원 성당 건축은 같은 해 10월에 준공, 1월 1일 뮈텔 주교에 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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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수녀회 100년사」 260—264쪽 참조,
30) J.M., 1915-1918.;1수녀회 100년사丄 266-268쪽 참조聲
31) J.M.,1909. 11.4.; 서울의 뮈텔 주교와 대구의 드망즈 주교는 독립운동 당시의 수녀원의 동태(勤態)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 '본국 프랑스 혁명의 격동 속에서 입었던 피해의식이 정치에 무관하려는 압장 을 취하지 않았는가’라고 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32) 손임녀 아네스 수녀의 중언, 1987. 5,수녀회 100년사j, 2기쪽,
33) 1990. 7. 28 중언; 「수녀회 100년사」 2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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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성되었다. 고아원과 기숙사 건축과 마찬가지로 수녀원 성당을 건축하는 데에 여러 본당에서 성의껏 모아 보내준 성금의 도움이 컸다.3 4 〉 1932년 7월 3일에는 영아원을 지어 축성했다. 35》 1936년에는 늘어나는 고아들을 수용하기 위해 용산 삼 호전(현 원효로 4가)에 약 2만여 원을 들여 벽돌 3층 건물을 신축, 분원을 개설하고 50여 명의 고아를 돌보았다.
1933년 1월 23일 조선교구의 교구장이며 우리 수도회의 은인이요 보호자였던 뮈텔 주교가 80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뮈텔 주교는 그의 생전에 수녀원의 미사, 피정 강론, 고해성사 등 틈틈이 수녀들의 영성 생활을 돌보았고, 수녀들이 돌보고 있는 고아원 운영을 위해 많은 도움을 주었다. 또한, 수녀원의 살림과 사도 직 활동, 수녀원 및 고아원의 건축문제 등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공동체 내에 어려운 문제가 생겼을 때는 이를 해결해 주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심지어 수녀들 하나하나의 건강까지도 자주적인 사랑과 관심으로 돌보았다. 뮈텔 주교의 뒤를 이어 라리보(1883-1974 )주교가 서울대교구 9대 교구장으로 취임했다.
1938년 7월 21일 한국수녀회 설립 50주년을 기념했다. 아울러 설립 당시에 입회했던 김해겸 펜쁠 수녀와 박황월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수녀의 수도회 입회 50주년을 축하했다. 36》
이 해에 파리 외방전교회에 보내는 연말 보고서에는 한국수녀회의 설립 50주년에 대한 기록이 있다. 그곳에 수녀회의 첫 공동체 수녀들에 관해 언급하고, 50주년 당시 200여 명에 가까운 한국인 수녀들이 자선사업과 교육 사업에 봉사하고 있음을 알리고 있다. 또한, 그 전해에 보낸 연말 보고서에는 구체적으로 수녀들이 활동한 결과를 보고하고 있다. 37》
한국수녀회 설립 50주년을 지낸 다음 해인 1939년은 가밀 원장 수녀가 수도 생활을 시작한 지 50주년이 되는 해였다. 금 경축을 지낸 가밀 수녀는 4년 후인 1943년 12월 17일 의식이 맑은 가운데 병자성사를 받고 수녀들에게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며 애덕을 실천하고 살 것’을 유언으로 38》 남긴 뒤 20일 새벽 4시 30분에 숨을 거두었다. 가밀 수녀는 1896년 조선에 입국하여 47년간 겸손과 인내의 덕으로 우리 수녀회의 성장을 도왔고, 많은 수녀의 귀감이 되는 삶을 살았다. 그가 마지막 원장직을 이행하는 동안 최성소 놀벨다 수녀원장 추대 시도가 있었는데 39》이 사건을 계기로 가밀 수녀는 허양옥 미리 요한 수녀를 그의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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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C.R. 1930.
35) J.M.,1932. 7.3.
36) r수녀회 100년사j, 287쪽 참조,
37) C.R. 1938.
38) 「관구공문」, 제 1호, 1943. 12.30. /수녀회 100년사j, 299-300쪽
39) r수녀회 100년사j, 320쪽 참조: 1943년 노기남 주교가 수녀원 행정에 개입하여 최성소 수녀를 원장으로 임명
함으로써 일어났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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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자로 샬트르에 추천했다. 이에 따라 그가 죽기 3개월 전인 9월 17일에 허양옥 수녀는 한국인으로서는 처음 원장으로 임명되었다. 허 수녀는 이후 1948년 한국수녀원이 관구로 승격되면서 대구의 베아트릭스 수녀가 관구장으로 부임해 오기까지 약 5년간 서울수녀원의 원장으로 일했다.
2) 제물포수녀원의 생활
제물포수녀원의 불화와 소송사건 이후 1909년 10월 13일 제물포 원장 수녀로 부임해 간 엠마누엘 수녀는 무엇보다도 수녀원 내의 공동체적 화합과 일치를 위해 노력했는데 부임한 지 3년도 안 된 1912년 8월 7일 세상을 떠났다. 샬트르에서는 1912년 9월 13일 엘레느 수녀를 제물포수녀원의 원장으로 임명했고, 엘레느 수녀에 이어 1932년 5월 30일에는 아델 수녀를 임명했다. 아델 수녀가 제물포에 부임한 이후에도 전 시기에 이어 보육사업과 의료사업 그리고 교육 분야에서 봉사하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샬트르 모원의 고문서고 소장자료 중 1932년 10월 13일 당시 제물포의 상황을 간략히 소개하고 있는 바로는 40) 당시 3명의 프랑스 수녀와 15명의 한국 수녀, 보육원아 60명, 가난한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학교의 학생 64명, 일반 초등학교 386명, 유아 학교 125명이 있었고, 수녀들은 좋은 공동체 분위기에서 애덕을 지키며 살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수녀원 건물 안에 방 하나를 이용하여 마련된 무료 진료소가 너무 좁아 새로 건축해야 할 일과 5, 6명이 살기에 알맞은 수녀원에서 20여 명의 수녀가 살았으므로 수녀원 건축문제도 시급함을 언급하고 있다. 41>
제물포의 본당 신부였던 드뇌(1875-1947) 신부는 수십 년을 두고 사재를들여 수녀원과 원아들을 돌보았고, 용현동, 영종도 등지에 농지 20만 평을 매입하여 보육원에 기증함으로써 운영에 확고한 재정적 기반을 수립해 주었다. 그러나 1928년에 증축된 원사에도 불구하고 고아 수가 격증하여 받아들여야 할 고아들을 다 받아들이지 못했다.
3) 대구수녀원의 생활
대구수녀원 초기부터 수녀원의 정착과 성장을 위해 전력을 기울여 오던 드망즈 주교가 1938년 2월 9일 63세를 일기로 선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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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일본관구 고문서고 소장자료: 1932. 10. 13, 앙즈 마리아 관구장수녀의 기록, 수녀회 100년사 284쪽 참조.
41) 위와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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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방즈 주교의 서거 이후 1943년 베아트릭스 수녀는 다시 서울로 올라왔고 대구수녀원의 3대 원장으로 르네 수녀가 부임하여 세계대전 중의 가장 어려운 시기를 이끌었다. 1939년에 일어난 2차 세계대전으로 일본의 식민지 정책은 점점 심해졌고 국내의 경제난이 극도에 달한 1944년부터는 모든 수녀들이 전시복(몸빼와 군인모자)으로 바꿔 입고 밤, 낮 불려 나갔다. 수녀원에서도 전쟁에 나간 군인들의 방한복을 만들어야 했다. 수녀들은 책임량을 채우느라고 미사 외에는 식사 시간도 교대하며 방한복을 만들고 보육원 아들을 돌보느라 쇠진했다. 그런데 식량과 생활필수품이 다 배급제였으므로 수녀들은 거의 콩깻묵과 텃밭의 비름나물로 두 해 여름을 지냈다. 따라서 영양실조로 고생하는 사람이 많아 하는 수 없이 수녀원은 해산 명령을 내렸으나 상당수의 수녀는 끝내 친가로 돌아가지 않았다. 42》
1942년 착좌식을 하고 경성교구의 교구장에 취임한 노기남 주교는 1945년 8월 17일 모든 성직자와 교우들에게 축복하고 고유(告論)를 발표하여 시국을 위한 특별 기도를 당부했다.
수녀들은 노 주교의 당부에 따라 열심히 기도하며 신중하게 모든 일을 해나갔다. 해방과 더불어 1945년 초에 해산되었던 수련자들도 하나둘 모여들어 기쁨을 나누며 수도원 내 질서를 잡아나갔다.
해방과 더불어 1948년 일본 관구에 속해 있던 수녀원이 한국 관구로 승격되어 1대 관구 장으로 베아트릭스 수녀가 부임하면서 서울과 대구의 두 수녀원은 한 관구로 통합되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부족하여 수녀들이 착복 준비를 할 때도 옷감을 구할 수 없어 돌아가 신 수녀들이 입던 옷을 고쳐 입고 착복 식을 했고, 계속되는 정전 사태로 카바이트 불도 제대로 쓸 수가 없어 빈 통에다가 기름을 붓고 심지를 담가 불을 밝히며 살았다. 이런 어려운 여건에서도 수녀원에는 지원자가 많아 수련원은 만원이 되었고, 해방과 더불어 인재양성에 눈을 돌려 수련자 중에는 학교에 다니는 사람도 많아졌다. 이때부터 청원자들도 소임을 나가게 되었고, 수련자들은 대성당 청소, 집안일, 미군 빨랫감 세탁 등 많은 일을 하며 지냈다.
해방 후 일본군에게 징발되었던 교회 건물들을 되찾게 되면서 우리 수녀원에서도 보육원 용산분원을 찾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일본군이 헐어버린 수녀원 내 건물-보육원 영아부, 안 기숙사, 옛 시약소 건물 등은 언제 복구될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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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r수녀회 85년사, 315쪽.
대구수련원은 1945년 1월 30일부터 8월 30일까지 7개월간 임시 해산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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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기도 및 공동체 생활과 수녀 양성 교육
1) 기도 생활과 공동체 생활
이 시기의 기도 생활은 1911년에 간행된『성봐로슈녀회규구그를 기초로 하여 이루어졌다.
이 규칙서는 「살트르 생모리스 수녀들을 위한 회칙 초안」을 기초로 하여 한기근 신부가 작성하고 뮈텔 주교가 감준한 것으로서 수도자의 본분과 복음삼덕 및 여러 덕행 실천에 관한 내용과 학교와 병원 등에서 사도직 활동을 하는 수녀들을 위한 규칙을 규정하고 있다. 특별히 정결과 청빈, 순명의 복음삼덕 수행을 가장 강조했고, 기도 생활은 이와 같은 복음삼덕을 실천하는 원천적인 힘이었다. 이 시기의 서원 생활의 영성은 ‘이탈을 중시하는 자기부정의 수도 생활이었다.
기도 생활의 내용은 초기와 같이 조과, 만과 묵상, 미사, 성모 소일과의 시 신공, 특별성찰, 매괴신공, 성서낭독, 성체조배가 매주간의 정규적인 기도였고 성모 소일과는 라틴어로 했다. 프랑스어 기도 책을 보지 못하는 경우는 허락을 받아 매괴신공으로 대신했다. 1945년 3월에는 한국어 번역판 기도서가 나의-서 적지 않은 수녀들이 이제껏 대강의 뜻만을 짐작하여 바쳤던 프랑스어 기도를 우리말로 더욱 정성껏 바치게 되었다. 수녀들은 공식기도 외에 일정한 지향을 두고 공동체가 함께 염경기도를 바치기도 했고, 성로신공, 묵주기도 등 개인적인 기도도 바쳤다.
피정 지도는 서울은 뮈텔 주교가(후에는 라리보 주교가), 대구는 드망즈 주교가 주로 했으며, 이후에는 한국인 사제들이 담당했다. 지도자들은 피정 때에는 프랑스 수녀들과 한국 수녀들에게 따로 강의했다. 드망즈 주교의 일기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43) 피정 일정은 3일간 강의 및 영적 지도와 고해성사 그리고 미사와 성체강복과 함께 진행되었다. 당시 기록을 보면 수녀원에서는 피정 때에 침실 출입을 막기 위해 열쇠로 침실 문을 잠그기도 했을 만큼 피정을 중요시했으며, 사제들도 수녀들의 피정에 관하여 많은 관심을 갖고 협력하여 이 기간을 지키도록 배려해 주었다. 44〉
1947년 9월 25일부터 27일간 열린 우리 수도회 총회는 기도 생활에 관한 상세한 규정을 정했는데 성무 일도 전후의 기도문들과 성시간 및 9일 기도 전후의 기도, 영적 독서, 월례 피정, 고해성사 등과 같은 내용이었다.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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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D.M. J916. 8.22; 8.26; 1917. 8.6; 1918. 8.19; 8.23; 1919. 8.5, 8.8.
44) 김영제(金永濟> 신부 서한. 1918. 8.13, 장연.
45) 예수의 르네(Ren은e de Jesus) 총장수녀의 서한,1947.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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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선에서 교육과 간호 그리고 전교 활동을 하는 수녀들도 수도자로서의 기도 생활을 소홀히 하지 않도록 언급하고 있다. 특별히 1월 25일 성 바오로 사도 개종 축일이나 6월 29일 베드로,바오로 축일, 10월 1일 성녀 소화 데레사 축일 등에는 하루 성체 현시와 주교 집전의 성체 강복이 있었다.
공동체 생활에 있어서 두드러진 것은 철저한 '관면(寬免)생활’과 '과실 고백 회’로서 이는 공동체 안에서의 형제적인 애덕 실천을 지탱해 주었다. 수도 공동체 생활에 있어서 관면은 장상과 수하 수녀 그리고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에 큰 자리를 차지했다.
관면 생활의 더욱 근원적인 가치는 그 내적인 의미에 있다. 즉 순명 서원에 의해 자신의 모든 원 의를 하느님께 종속시킨 수도자는 장상을 통해 매일의 일상생활 안에 나타나는 일과 사건,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알아보고 언제나 이에 응하려는 자세를 지니고 산다. 또한, 관면에 앞서 자기 행동에 책임이 있음을 자각한다.
관면의 대상은 생활의 모든 영역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그 첫째는 통신, 외출, 면회 등 외부와의 교제와 연락이었다. 이는 순명의 종속 안에서 이루어졌다. 둘째로는 청빈 생활에 관한 모든 것이었다. 셋째로 지방분원의 경우 수도 생활이 회칙을 따르지 못할 때 관면을 청했다. 즉 기도, 휴식, 식사 시간 등 공동시간을 지킬 수 없을 때와 휴식, 수면, 식사, 음식, 개인의 건강상, 위생상 필요한 특별한 허락을 필요로 할 때였다. 넷째로 소임 생활과 사도직 생활을 장상에게 종속시키기 위해 소임 터에서 일어난 일 등 일상의 거의 모든 활동과 시간 사용-개인 빨래, 다리미, 바느질, 목욕, 도와주기 등 20여 조목도 장상의 관면을 받고서 이루어졌다. 46》
흔히 샤피트르 라고 불렸던 과실 고백 회는 주 1회에 걸쳐 전 공동체 회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공동체적 삶을 반성하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모든 이 앞에서 공동생활에 저해되었던 행위들을 고백하고 새로운 한 주간의 삶을 다짐하고 기도하는 시간이었다. 이러한 고백 회는 수도 공동체의 질서 유지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으나 이의 진정한 의미는 역시 그 내적인 가치에 있었다. 즉 성덕의 길에 나아가는 데 있어서 양심 성찰만큼 중요한 것은 없으므로 성찰을 통해 수녀들은 위대함과 비참함을 지닌 인간의 보편적 진리를 깨달았고 동시에 자기 자신의 기질과 소질 및 성향을 알아볼 수 있었다. 수녀들은 점심 식사 전 15분간 그리고 끝기도 후의 특별성찰 시간에 영혼의 약점들-주로 회칙준수 상황을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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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과실고백과 관면에 대한 설명,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1954): 1948년 이후에 나온 책자이나 그 전에도 같은 관면생활 양식 안에서 생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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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실고백회는 본원에서는 주 1회, 지방분원에서는 월 1회 총원장이나 지방원장의 주관하에 실시했다. 각자 과실고백서 한 권을 지니고 있으면서 날마다 자신이 범한 과실을 구체적으로 명기된 각 항목의 조목에 '正’자로 표시하면서 매일매일 완덕으로 나아가려 노력했다.
과실고백회는 1965년 39차 총회 전까지 철저히 이행되었고, 순명의 덕이 가장 강조되었다. 47> 인간의 위대함, 존엄성, 창의성 등의 긍정적인 면에 중점을 두고 적극적인 애덕의 실천을 강조하는 오늘날과 달리 당시 수녀들은 죄성을 지닌 인간의 나약함과 비참함 등의 부정적 측면을 제거하는데 전력투구했다. 이는 트리엔트공의회 이후 계속되는 교회사조의 한 측면을 반영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말기, 일제는 서양인 선교사들이 담당하고 있는 역할을 일본인으로 교체하고자 시도했다. 이러할 때 1942년 주교품에 오른 노기남 주교가 한국인 수녀를 원장으로 선임하고자 하여 1943년 수도원 행정에 개입했다. 이로 인해 우리 수녀회 안에 커다란 분열이 생기게 되었다. 48> 이에 프랑스 샬트르 본부에서는 이 문제에 과격한 반응을 보이는 수녀들을 이동시켰다. 그리고 교회법상으로 교구장 주교라도 수녀원 행정에 대해 간섭하지 못한다는 원칙에 따라 주교에 의한 원장임명은 무효화 되었다. 이 사건에 관한 내용은 노 주교의 일기에 짤막하게 그러나 생생히 기록되어 있다. 49》 이 사건은 일제의 요구와 민족적인 선의에서 발상하였다고 여겨진다.
2) 수녀 양성 교육
일제 치하에서 지원기의 일과와 교육은 전 시기를 그대로 답습했다. 그러나 1910년 이후 수도회의 사도직 확산에 따라 지원자들이 제물포분원 이외의 여러 본당과 학교에까지 파견되어 교사로서 일하기도 하고, 사도직 준비로 학업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기간도 지원기를 한 것으로 간주하고 청원기 혹은 수련기로 들어갔다.
지원자가 분원에 파견되었을 때는 그 분원 원장의 지도를 받으면서 지냈고, 분원 원장과 분원 수녀들은 지원자가 수도 생활에 적합한지 아닌지를 소임 및 생활을 통해 평가했는데 이는 오늘날의 유기서원기의 성격을 띤다.
지원자의 입회 자격은 앞 시기에 이어 일본강점기 때에도 「샬트르의 생모리스 수녀들을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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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수녀회 100년사, 319쪽 참조,
48) 위의 책, 320쪽 참조,
49) 노기남 주교 일기, 1943.2-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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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칙초안」에 나타난 규정이 그대로 적용되었다. 50) 그러다가 1946년 이후 이 회칙은 좀더 구체화되어갔다. 1946년의 회칙에서는 지원자의 자격에 대해 '성격이 선량하고 품행이 단정한 사람, 건강하고, 합법적인 부부의 자녀, 18세 이상 30세 미만인 사람, 건전한 지향과 동기를 지닌 사람’ 등으로 일반적인 자격을 규정하면서 동시에 교황청의 관면이 필요한 경우까지 규정 51) 해 놓았다.
지원자들의 지원 기간은 1927년까지는 지난시기와 같은 기간이었으나, 1928년에는 기간이 단축되어 3~5개월 만에 청원기로 넘어갔다. 그러나 1929년부터는 다시 전과 같이 1년에서 2년이 보편적으로 되었고, 경우에 따라 단축되거나 연장되기도 했다.
지원자들의 신앙생활 기간은 전 시기에서와같이 태중 교우들이 가장 많고 태중 교우가 아닌 경우라도 영세 후 10년 이상 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지원자들의 분포비율은 신자 가정 대 미신자 가정의 비율이 10:1 정도로 신자 가정 출신자의 지원율이 월등히 높았다.
「수녀회 100년사」에는 출생지별 분포 및 부모의 직업별 분포가 소개되어 있다. 52)
청원기의 생활 및 교육은 수녀회의 규칙과 프랑스어 기도문, 성가 교육과 함께 바느질, 주방, 고아 돌보는 일 등 소임 생활의 계속이었다. 1927년부터는 수련자로 받아들이기 전 청원자 중 필요한 이들에게 중학교 교육을 받도록 했다. 수련기에 들어간 수련자들은 매일의 일정표에 따라 규칙적인 생활을 했고 '서원 문답’을 공부하며 첫 서원 준비를 했다. 이들의 생활은 언제나 많은 일이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일과 기도를 조화 하는 데에 주력했다.
대구수련원 수련자들은 수련장 죠르즈 수녀의 지도로 수련을 받으며 많은 집안일을 분담해야 했다. 50여 명의 보육원 아이들을 돌보면서 주방일, 밭일, 세탁일, 다리미 일과 미싱자수, 바느질, 뜨개질, 수단(신부 제복) 제의 및 수도복 만들기 등을 했다. 그리고 목화를 심어 물레로 실을 뽑아 무명을 짜서 이를 염색하여 아이들의 옷을 만들어 입히기도 했다. 젖소와 닭, 비둘기까지 돌보고, 당시 유스티노신학교 학생들의 세탁까지 해야 했으므로 매우 바쁘게 움직이며 살았다. 그러나 이들의 부족한 일손은 뒤이어 입회한 지원자들의 도움으로 부담을 덜었다. 그러던 중에 보육원을 새로 짓게 되어 수련원도 차츰 안정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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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클로드 마레쇼, 한국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역,샬트르의 생모리스 수녀들을 위한 회칙초안, 제X장,47쪽 참조(이후「회칙초안그이라 명명함).
51)위의 책, 2 4 조: 영세 후 다른 교파에 속하였던 자; 만 1 5 세 미만자; 공포심이나 강요 혹은 꾀임으로 인하여 입회한 자; 결혼한 자로 부부 다 같이 세속에 있는 자; 다른 수도회에서 서원을 했던 자나 아직 서원 중에 있는 자; 중한 죄를 범한 자.
52) 수녀회 100년사. 302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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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르즈 수녀의 후임으로 아델 수녀가 몇 개월 동안 2대 수련장으로 있었고, 1930년 12월 9일에는 블랑쉬 수녀가 3대 수련장으로 부임했다. 그때 수련원에는 공부하는 수련자 외에 지원자까지 합하여 거주자가 수십 명이나 되었다. 블랑쉬 수녀는 1979년 8월 5일, 생의 마지막 날까지 대구 본원에 머물며 대구수련원의 초창기부터 일제탄압, 2차 세계대전, 8 시5 해방 등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우리 수녀들과 동고동락하면서 많은 후배를 양성하고 대구수녀원의 성장을 지켜보았다.
이 시기 동안의 유기서원기나 계속 수련기의 형태는 지난시기의 형태를 유지해 나갔다.
즉 생활 속의 자아 수련 혹은 공동체적 덕행의 노력 속에서 수도자적 자질이 양성되었으며, 기도 생활과 전례, 월례 피정과 연례 피정 등을 통한 영적 쇄신의 계기를 마련함으로써 수도자 양성 교육을 대신에 했다. 이 시기는 회칙 및 규칙 생활이 중심을 이루고 이에 대한 헌신적인 노력이 지대했는데 개인과 공동체적 수련이 특징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인 예를 우리는 '과실 고백 회’에서 볼 수 있는데, 고백 내용은 시간 사용, 침묵, 애덕, 순명, 가난, 단정 등 일상생활을 포괄하는 것으로 수녀들의 삶은 의도적인 계속 수련이었다. 따라서 매일의 과중한 일 가운데서도 수녀들의 내적 생활의 수련은 아주 활발했다.
일반양성은 초기에는 수녀원 자체 내의 기초교육을 받고 사회사업 혹은 본당 학교 등의 사도직에 임했다. 수녀들은 1920년까지만 해도 학교에서 교사자격증 없이 학생들에게 한글, 한문, 경문과 교리, 산술, 바느질, 예의 등을 가르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립학교령’ 반포 이후 1927년에는 체계적인 교사양성 계획을 추진하여 학교 교육을 받아 교사자격증을 받도록 했다. 그리하여 1931년 청원자 2명이 처음으로 교사자격증을 취득했다. 학교 현장을 떠난 수녀들은 본당 사목만을 돕게 되었고, 국가에서 마련한 교원양성소의 단기과정을 거쳐 자격증을 받기도 했다. 또한, 학교에서 활동하던 수녀들이 대학에 진학하도록 함으로써 1948년부터는 정식으로 4년제 대학을 마친 수녀들이 나왔다.
대구수녀원에서는 드방즈 주교의 적극적인 배려로 지원자 2명이 일본 동경에 있는 대학에 입학하는 등 활발한 수녀 교육이 이루어졌다. 53》
본 수녀회는 한국에 설립된 첫 수녀회로서 한국에 진출하는 여러 수도회를 도와 수녀원 안에 함께 기거하기도 하고 그들의 편의를 도우며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왔다. 룻찡의포교 성베네딕도회54' 메리놀회, 중국 신의섭리회 등이 우리 수녀원에 머물면서 사도직 활동을 모색했다.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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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C.R.T. 1927,1930, 1931, 1932, 1934 참조,
54) 포교베네딕도수녀회,원산수녀원사1988, 86-87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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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1931년 9월 14일 스위스의 캄 하일릭크로이쯔에 소재하는 올리베따노성베네딕도수녀회가 연길교구에 자리 잡으면서 지원자들의 수련에 언어와 풍습 등 어려움을 겪게 되자 우리 수녀회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김해겸 팬쁠 수녀와 이 아가다 공자가 수녀가 그해 11월 연길에 파견되어 그곳에서 지원자들의 선생 수녀로서 세탁법, 다리미질법, 장 담그는 법 등 기타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가르친 후 만 6개월 만에 귀원 했다. 56>
5. 사도직 활동의 전개
1) 사회복지 사도직
일제강점기에 총독부에서는 1921년 사회과를 통해 사회복지사업을 시행했으나 근대적 의미의 사회복지 행정은 1944년에 이르러서야 시행되었다. 51) 1, 2차 세계대전과 세계적 추세에 따른 경제공황, 사회적 빈곤을 겪음으로써 걸인, 빈민, 부랑아들이 속출하여 구호시설이 시급한 상황이었는데 총독부의 미봉적이고 형식적인 구빈 행정은 별 효과가 없었다. 따라서 종교단체에 의한 사회사업이 활발히 이루어졌는데 일제의 지배하에서 엄격한 정교분리의 원칙을 고수했던 당시 가톨릭교회에서는 총독부와의 마찰을 피해가며 선교 활동을 했고 사회사업도 꾸준히 수행해 갔다.
수녀회에서는 1932년에 종현 고아원 유아부를 벽돌 2층으로 개축했고, ‘천주교고아원’이란 명칭을 '천주교보육원’으로 개칭했다.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종현과 용산 삼호정의 보육원에서 1927년까지 구호되고 양육된 고아의 수는 4,300명을 넘어섰다. 한편 인천에서는 1894년 제물포 본당에 분원을 설립한 이래 수녀들은 전교는 물론 보육원과 무료 진료소 운영 등 활발한 사도직을 전개했다. 보육원은 서울의 보육원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운영되었으나 이곳에서는 남녀 어린이들을 모두 돌보았다. 고아들과 일반인들을 위해 큰 도움을 주던 무료 진료소는 1935년에 캐나다 관구의 필로메나 수녀가 보육원을 위해 내한하여 부속병원을 개설함으로써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해방 후 1946년에는 미 군정으로부터 보육원 후생시설 인가를 받았다.
한편 대구에서는 오래전부터 사회복지에 큰 열성을 가지고 일하고 있었다. 물론 이때의 사회복지는 전교의 효과적인 수단이기도 했다. 신자들도 1880년 연령회를 조직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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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수녀회 85년사, 509쪽 참조,
56) J.M., 1931.11.1; 1932. 5.9.
57) 아산 사회복지사업재단, 韓國의 社會福經硏社, 서울, 1979, 40-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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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식 무료 장례식을 거행하여 외교 인들에게 호감을 주었다. 58》 또 성영회 활동으로 시작된 고아 구제사업은 1885년 초 대구지역에서만도 70명의 고아가 가톨릭 신자들의 보호 아래 양육되었다. 59>
1915년 10월 대구에 정식 수녀원이 설립되었을 때 드망즈 주교는 수녀원의 설립과 더불어 고아원 운영도 함께 계획하고 있었다. 수녀원이 설립되자 드방즈 주교는 곧 교우 가정에 맡겨져 있던 어린이 중 50명을 수녀들에게 맡겼다. 보육원 건물은 없었지만, 수녀원 건물이 컸기 때문에 수녀원 내에 방을 마련하여 보살피기 시작한 것이 대구보육원의 시작이었다. 원사가 신축되자 그 당시 대구 부립 고아원에 있던 40여 명의 어린이를 인수하여 함께 수용했다. 60) 원아의 수는 1947년경에는 250명에 달했다. 1934년 평양 관후리에서는 본당 사제인 코노르신부가 성당 구내에 있던 성모 학교의 구 교사 중 한 건물을 양로원으로 마련했고, 고아들을 따로 모아 돌보았다. 61〉 우리 수녀들 두 명은 1909년 이미 관후리 '성모 보통학교’에 파견되어 활동하고 있었는데 1934년부터는 양로원과 고아원에서도 봉사하게 되었다. 이 사도직은 1940년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에 관후리 본당의 모든 소임을 인계하고 철수할 때까지 계속했다. 그러나 이 고아원과 양로원은 1949년 공산당에 의해 폐쇄되었다.
1910년에 파견된 진남포 본당에서도 수녀들은 학교와 유치원 및 전교 분야에서 크게 활약했다. 그러던 중 1933년에 진남포 본당의 스위니(1895-1966)신부는 고아원과 양로원을 설립하고 이를 수녀들에게 맡겼다. 고아원은 주로 최순단 밥티스틴 수녀가, 양로원은 김 발렌티나 수녀가 담당했다. 20여 명의 고아는 본당 학교인 '성심학원’에서 교육받게 했다. 그러나 스위니 신부의 자비 로 운영되던 고아원은 해방 전 스위니 신부가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면서부터 운영이 어려워져 해산되었다. 62〉 양로원은 남녀 노인들이 많을 때는 130명까지 되었고 특히 장애인들이 많았다. 63》 또한 양로원 안에 시약소를 마련하여 본당의 포스 칼 신부가 직접 환자들을 치료했다. 이 양로원도 스위니 신부가 떠난 후에 운영난에 봉착했으나 1936년에 진남포 부에서 양로원 운영 보조비로 500원을 보조함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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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대구대교구사편찬위원회,大邱本堂百年史대건출판사,대구,1986, 138쪽.
59) 이 성영회의 활동은 경상도에서 최초로 시작된 고아원 사업이다.
60) 단기 4286년 2월 20일에 천주교 백백합 보육원장이 경상북도 지사에게 올린 보고서 어설의 연혁 일람표」제 2항 참조.
61) 天主敎平壞敎區史編第哀具舍,「天主敎平壞敎舍史j, 분도출판사, 왜관,1981, 316쪽,
62) 최순단 밥티스틴 수녀 중언,1987. 6.
63) 이동화 라셀 수녀 중언, 198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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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업은 계속되었다. 64〉 이곳 또한 1945년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에 인계하고 철수했으나 공산당에 의해 폐쇄되었다. 이와같이 북한지역에서는 선교사와 수녀들의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1927년 평양교구가 설정되고 그 지역을 미국 '메리놀 외방전교회’가 담당하게 됨으로써 의욕적인 사목활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공산당에 의해 모든 활동이 중단되었다. 우리 수도회는 북한지역에서 철수하기까지 평안도에 관후리, 진남포, 의주 등 3개 본당과 황해도에 사리원, 장연, 신천, 재령, 매화동, 은율 등 6개의 본당에 분원을 내고 교육과 전교 사도직에 임했다. 그중 진남포와 매화동, 재령 본당에서는 의료사도직을, 관후리와 진남포 본당에서는 사회복지 사도직을 병행하여 실시했다.
강릉에서는 1947년 골롬 반 회 제라프티 멘 신부의 요청으로 우리 수녀들이 파견되어 '성심보육원’에서 60여 명의 고아를 돌보았다. 수녀들은 원아들에게 초등교육을 시켰고, 능력 있는 아이들은 고등 교육까지시켜 후에 교사가 된 사람도 있었다. 65> 점차로 원아의 수가 줄어 1962년에 보육원을 폐쇄했다. 한편 남쪽 지방인 부산에서도 보육사업이 시작되었다. 1946년 2월 10일에 부산 범일동 본당 신부인 정재석 요셉 신부가 고아들을 모아 본당 근처에 있던 30평짜리 한옥에 수용하고 수녀들을 청함으로써 '소화보육원’이 설립되었다. 처음에는 30여 명 정도의 어린이들이 있었고 운영은 주위 사람들의 후원과 특히 미군 부대와 양친회(養親含)의 원조로 이루어졌다.
2) 의료사도직
(1) 북한지역
우리 수도회가 북한지역에 처음 파견된 것은 1909년 관후리 본당이다. 이는 1894년 제물포 수녀원이 설립된 후 두 번째로 지방에 파견된 것이다. 이후 평안도와 황해도의 여러 본당에 분원이 설립되어 어린이 교육과 전교 사도직에 힘쓰는 한편 의료사도직도 수행했다.
이때의 의료활동은 본당에 부설된 의료기관에서 이루어졌다. 수녀들이 있는 시약소의 역할은 컸고, 재령 본당 성심의원의 경우에는 정식 간호사와 의사의 자격을 지닌 수녀가 근무하여 활발한 의료활동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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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天主敎平壞敎舍史,350쪽.
65) 송재성 방지거 수녀 중언,198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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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황해도 매화동 본당에 파견된 수녀들은 본당 전교와 더불어 유치원, 학교 등에서 활동했는데, 1934년경에는 본당 내에 무료 시약소가 개설되었다. 이는 자선의료기관으로서 평일에는 환자들에게 약만 투여하고 의사들에 의한 진료는 주일에만 있었다. 여기에서 봉사한 의사는 하 의사와 표 의사였고, 간호사 역할은 박 뱅상 수녀와 강양자 마리 레지스 수녀가 담당했다. 66〉 진남포 본당에서는 보좌였던 포스칼 신부가 1932년 본당 내에 시약소를 개설하고 하루 평균 30~40명의 환자를 직접 진료했다. 67) 그 후 양기섭 베드로, 1905 -1982 신부가 9대 본당 주임으로 부임하여 1943년 평양 시내 명협동에 소화병원을 신설했다. 이 병원은 내과, 외과, 산부인과 등의 진료과목에 입원실 7개, 의사 3명, 간호 수녀 3명으로 구성되어 일반 외래환자를 진료하면서 극빈자들에게는 무료봉사하여 의술로나 운영에 있어 호평을 받아 오던 중 1945년 10월에 폐원되었다. 68) 재령 본당 박정렬, 바오로 1891-1943 신부는 문창리 관문 거리에 있는 삼성의원을 인수하여 설비를 새로 갖춘 후 1940년 9월 1일 '성심의원’으로 개원했다.
이 병원의 운영을 위해 우리 수녀들을 요청하여 3명의 수녀가 재령 본당에 파견되었다. 그중 전 데오도리나 수녀와 이유순 아쁠리나 수녀가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다가 후에 의사 시험에 합격하여 의사로 봉직했다. 이 성심의원은 내과와 소아과 7개의 병실을 갖추었고 정식 의사 2명에 간호사로 구성되어 손색없는 병원으로 날로 번창했다. 전 데오도리나 수녀는 무료 진료소를 개설하여 가난한 이들을 돌보기도 했다. 69》 그러나 해방 후 공산당의 탄압이 시작되자 병원을 처분하고 수녀들은 본원으로 귀원했다.
(2) 서울지역
수녀원 설립 시초부터 수녀원 내에 개설되어 있던 서울의 무료 진료소는 이 시기에 이르러 프랑스인 뱅상 수녀의 책임 아래 황수자 베네딕다 수녀와 몇몇 우리나라 수녀들이 도우며 운영되었다. 박병래 의사는 시약소 초기부터 도움을 주었는데 이는 성모병원 개원으로까지 이어졌다. '뾰족집 병원’이라 불렸던 이 시약소는 인기가 높아 일본 개업의들의 질시와 방해를 받았다. 일제 총독부가 개업의들을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비영리기관인 시약소의 설치허가를 주저하기도 했고, 우리 시약소에서 독극물을 취급했다고 트집 잡거나 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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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黃海道天主敎舍史刊行事業會, r黃海道天主敎舍史j,한국교회사연구소, 서울,1984, 174쪽.
67) 天主敎平壞敎區史編第委具舍,「天主敎平壞敎會史j, 349쪽,
68) 위의 책, 354쪽.
69) 黃海道天主敎舍史刊行후業舍,「黃海道天主敎요史^ 261-2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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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의 활동을 돕던 박병래에게 학위를 받는 데에 필요한 연구 논문 제목을 주지 않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70》 비록 작은 규모의 시약소였으나 우리 수녀들은 수녀원 안의 무료 진료소에서 1936년 성모병원이 개원된 후에도 계속해서 가난한 환자들을 돌보았다. 성모병원의 발전과 더불어 이 무료 진료소도 환자가 늘어 하루에 100명을 상회하는 환자들이 방문했다. 71) 그러나 1939년 뱅상 수녀가 사망한 후에는 수련장이던 으제니 수녀가 잠시 환자 진료를 해 오다가 중단되었다. 72)
성모병원의 초대 병원장에는 박병래가 취임했고 병원 일은 프랑스인 뱅상 수녀의 책임 아래 9명의 수녀가 파견되어 경리, 회계, 물품 관리, 간호와 기타 사무를 담당했다. 개원 당시부터 많은 환자가 모여들어 외래환자는 하루에 100명을 훨씬 넘었다. 초기에는 소아과와 내과를 주로 했는데 그리스도교적 박애 정신으로 종교를 불문하고 한결같이 대우하고 정성껏 돌보아 호평을 받았다. 특히 간호 수녀들의 인상은 대단하여 당시 성모병원에 입원했던 한 환자가「경향잡지」에 투고한 내용을 보면 수녀들을 “천상에서 내려온 선녀인가”라고 말하고 있다. 73〉 당시 일본 총독 우가끼 역시 수녀들이 운영하는 성모병원에 대해 매우 만족해했다고 한다. 74》 1946년 성모병원 개원 10주년 기념식 때에는 10년 근속 수녀 5명 75》에 대한 표창식이 있었다.
1944년 5월 성모병원이 발전함에 따라 확장이 불가피하게 되고, 일제의 종교계 탄압에 대응하기 위해 용산에 있다가 폐쇄되었던 예수 성심 신학교 건물에 성모병원 분원을 개설했다. 진료는 주로 권의정 의사가 담당했고 박병래 원장은 하루나 이틀에 한 번 정도 입원환자들을 돌보았다. 이곳에도 우리 수도회의 수녀가 6명이 파견되어 간호와 병원 운영을 도왔으나 해방이 되어 신학교가 복귀하게 되자 다시 본원으로 병합했다.
1944년 제기 동본당에 파견된 수녀들은 전교하면서 의료활동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방문하여 간단한 약을 나누어 주는 것으로 시작했는데 1946년 김봉학이 기증한 20만 환으로 집 한 채를 사 진료실을 꾸미고 투약과 진료 활동을 했다.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지자 미군의 원조를 받아 1947년에 ‘성모 의원진료소’를 건립하고 방 다섯 개의 진료실과 이혜춘 여의사를 채용하여 진료를 시작했다. 이 성모의원은 수녀회에서 시작한 첫 의료기관으로서 후에 성바오로병원의 모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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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후생일보제1735호, 1972.9.13.
71)「후생일보j, 제173公호, 1972. 9.20.
72)남형우 요한 수녀 중언,1987. 6.
73)「경향잡지j, 1939. 2,62족.
74)「경향잡지j, 1939. 2.
75) 홍순덕 이렌 수녀, 최종희 토마스 수녀, 김음문 젤뜨루다 수녀, 정정현 크리스티나 수녀, 오데레사 루시아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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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지방 본당 의료사도직
교회의 의료사업이 차츰 의원과 병원 시대로 들어서기는 했으나 시약소의 활동은 여전히 활발했다. 이 시기에 본당에 설립된 시약소는 논산과 서산 본당의 시약소를 들 수 있다. 1932년 논산 본당에 파견된 수녀들은 전교와 더불어 시약소를 운영했으나 그 후의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76) 1945년 서산 본당에 파견된 수녀들은 수녀원 내에 작은 시약소를 마련하여 약을 실비로 판매하기도 하고 가정방문 시 필요한 약들을 나누어 주기도 했다. 2, 3년 후에는 단층 건물을 개조하여 일반의사 1명이 외래진료를 맡고 수녀가 간호하면서 정식 의원으로 개원할 날을 기다리던 중 한국전쟁이 나자 인민병원으로 넘어갔다. 77》 전쟁 후 1953년에는 작은 규모이긴 하지만 '자모의원’이라 명명하고 유료병원으로 운영하여 오다가 1968년에 폐원했다.
제물포 무료 진료소는 1937년 본당 사제 드뇌 신부의 도움으로 벽돌로 된 3층 현대식 건물을 신축하여 병원다운 면모를 갖추었다. 이 병원에는 16개의 크고 작은 방이 있었는데, 주로 보육원 아동들을 위한 시설이어서 입원 시설이 없이 진찰과 시약만 했다. 78> 또 아직 의사 수녀가 없어 일반 의사들이 79) 와서 진료했는데 필로메나 수녀의 헌신적인 봉사로 인해 모두들 한 마음으로 협력했다. 1911년부터 1938년까지 서울과 제물포의 무료병원에서 치료한 환자 수는 각각 87,368명과 128,036명이었다. 81》
(4) 대구지역
대구지역에서 수녀들이 가정방문을 통한 의료활동을 시작한 것은 1928년부터이고. 82〉 1929년에 3,250명의 치료환자를 기록했다. 드방즈 주교는 성직자들이 잇따라 사망하자 1931년 11월에 성직자들을 위한 의무실과 휴식처로 사용될 2동의 건물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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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논산에 거주해 오던 한 노인의 중인에 의하면 시약소는 초기부터가 아니라 제8대 주임인 상제(Pierre Singer, 成裁德) 신부 재임 시 즉 1949-1950년 경에 열었다고도 한다.
77) 신옥희 보니파시오 수녀 중언, 1987. 6.
78) 천주교인천교구답동교회, 영洞本堂 八十五年史j, 1974, 164쪽,
79) 초기에 정재원, 박창현, 김종순 의사가 많이 수고했다,
80) 흥순자 아드리아나 수녀 중언,1987. 6.
81) 수녀회 100년사, 341쪽〔표8 참조,
82) C.R.T.,1929: 프랑스인 수녀 한 명과 한국인 수녀 한 명이 매일 가정방문을 하며 진료사업을 하고 있고, 이 활동이 아주 좋은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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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실은 수녀원 경내, 휴식처는 주교관 경내에 별관으로 세워졌다.83〉 그리고 이 의무실, 즉 무료 진료소의 운영은 프랑스 간호 수녀인 르네 수녀에게 맡겨졌다. 르네 수녀는 프랑스의 간호사 자격을 갖춘 유능한 간호사였다. 이 무료 진료소는 성직자들을 위한 것이기는 하였으나 부수적으로 가난한 일반인들에게 약간의 치료와 약품을 제공했는데 하루에 무려 360명의 환자를 진찰하기도 했다. 84》 그리하여 1년도 못 되어 드방즈 주교는 일반 진료소에 적합한 새 건물을 짓기로 했다.
새 무료 진료소는 대기실, 조제실, 진찰실, 공동병실, 의사실, 간호사실 등의 시설을 갖춘 95평 건물로써 1934년 7월 16일 대구 성요셉의원으로 개칭하여 축성되었다. 이 진료소는 완전한 무료 진료소였기 때문에 개설에 앞서 의사와 약사조합의 반대를 받았으나 당시 천주교 의사인 박영대 의사가 근무하고 있던 도립병원의 부속진료소가 됨으로써 해결되었다. 박영대 의사는 정기적으로 이 무료 진료소를 방문하여 진료했고, 수녀들은 간호사로서 헌신적인 봉사를 하여 감독관청의 인정을 받았다. 85>
대구 성요셉의원은 ‘천주교 시술소’,혹은 '천주교진료소’라 불렸으며 일반인들에게는 '성교당 병원’ 혹은 ‘수녀당 병원’이라 불렸다. 86〉 1929년부터 1940년까지 이 무료 진료소에서 치료받은 환자 수는 원내진료 131,634명, 원외 진료 16,120명이었다. 87〉 한편 영천의 용평과 전주 및 경주에도 진료소가 설치되었다. 영천의 용평진료소에서는 델랑드(1895-1972) 신부가 미리 2명의 처녀를 대구진료소 수녀에게 보내 훈련을 쌓게 한 뒤 열었는데 시작한 해에 벌써 3,000명의 환자를 치료했다. 88) 그러나 무허가라는 이유로 지방 경찰의 압력에 못 이겨 1년 만에 문을 닫았다. 전주의 무료 진료소는 설치 이후의 기록이 없어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경주 본당에는 1946년 수녀원 분원이 설립되었을 때 정행만 프란치스코 본당 신부가 '성모병원’이라는 이름으로 작은 진료소를 마련했고 이곳에서 간호 수녀인 오복희 막달레나 수녀가 책임자로 활약했다. 그 후 재정난으로 1955년에 폐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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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C.R.T.,1931.
84) C.R.T.,1932.
85) C.R.T., 1934.
8에 1984.2, 18-1分쪽.
87) C.R.T.,1929-30, 1934-35,1939-40.
88) C.R.T.,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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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교육 사도직
(1) 유아교육
수도회에서는 1909년에 파견된 평양 관후리 성모 학교에서 아동들을 유치반과 보통 반으로 나누어 교육한 것을 비롯하여 일제하에서도 제물포 박문학교, 장연 경애학교 등에서 유치 반을 운영했다. 당시에는 일제가 아직 유치원에 대해서는 초중등학교와 같은 시설기준령이나 교과 운영교원 자격 요구 등 법적 제한을 마련하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 수녀들은 총독부 허가와는 무관하게 파견되었던 본당 학교에서 유치 반 형태로 유아교육을 해오고 있었다. 이와 같은 유치반은 국문, 한문, 교리 등을 교육과정으로 하여 보통학교 과정을 준비시키기 위한 기초 지식 습득과 조기 신앙교육을 목적으로 했다.
1920~1930년대 수도회의 유아교육은 차츰 양적 증대가 이루어졌다. 1920년대에 새로 시작된 유아교육 기관은 진남포, 종현, 매화동, 대구, 약현 등 다섯 곳이었고, 1930년대에도 5개소가 늘어났다. 그러나 운영상의 체계에서는 1920년대까지는 별반 큰 변화가 없었으며 초등교육 기관에 속한 유치반과 인가받은 유치원이 함께 운영되고 있는 과도기적 현상을 보였다. 그리고 유치반이 독립된 유치원으로 완전한 운영 형태를 바꾼 것은 1930년경부터였는데 이때부터 유치원 운영에 필요한 자격증 취득을 위해 수녀들을 교육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수도회의 유아교육 활동은 초등교육과 별다른 구별이 없었다. 그러나 이후 약 10년, 20년 사이에 일반인의 인식과 교육법의 변호사회-,교육의 발전에 맞추어 각 본당의 유치원들이 점차 인가를 받고 운영체계를 갖추어 나갔다. 따라서 수녀들도 자격 있는 보모들을 채용하고 유치원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해 함께 노력했다.
1940년의 창씨 개명으로 유치원 어린이들의 이름도 대부분 일본식으로 바꾸었고 어린이들을 위한 정상적인 교육이 무시되었다. 교육내용은 집단생활의 질서, 규율훈련, 생활 훈련을 중시했고 유아의 개별적인 성장발달은 도외시되었다. 이로 인해 유치원 교육이 정체되고 변질하였으며 그 결과 해방 후 오랫동안 유치원 교육에 악영향을 끼쳤다. 90)
이러한 영향은 우리 수녀들이 운영하고 있던 유치원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수녀들 역시 유치원에서 일본어로 가르쳐야 했다. 음악은 대개 일본 노래를 가르쳤으며 심지어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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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金玉速, 幼兒敎存史, 268쪽.
90) 위의 책, 268-2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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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민요까지도 일본어로 바꾸어서 가르쳤다. 91) 뿐만 아니라 대개의 유치원이 일제의 간섭과 생활난으로 운영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수도회의 유아교육 활동 역시 매우 침체 되어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유치원 소임으로 파견된 경우가 1941년에 시작된 문산 본당 한 곳뿐이었다. 문산 본당에서는 1938년 9월 2일 분원설립 후 환자 간호와 어린이 교육을 맡아 전교를 돕다가 1941년부터 유치원 수녀가 파견되기 시작했는데 92》 1950년 한국전쟁으로 폐원되었다.
이밖에도 이 시기에는 대구 성모유치원이 일시적으로 문을 닫았으며 왜관 천신유년부는 짧게 운영되었다. 일제 말 우리의 유치원 교육 활동은 별다른 발전 없이 명맥만 유지되고 있었다. 그리고 1944년 이후 유치원 수가 급격히 줄어드는 것을 볼 때, 93〉 기존 유치원들의 현상 유지도 어려운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해방 후 이북지역에서는 공산당의 압력으로 우리 수녀들이 활동하고 있던 모든 사도직 활동을 포기하고 철수하게 되었으나, 이남 지역에서는 경주, 서산, 진주 등의 본당에 유치원이 신설되어 수녀들이 운영을 맡게 되었고, 대구 성모유치원이 재 개원되었으며 왜관 천신 유년부가 인가를 받고 '순심유치원’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공주 근화유치원은 1946년 4월 5일 당시 본당 주임 신원식(루카) 신부를 초대 원장으로 개원하여 우리 수녀들이 파견되어 일했다. 1947년 4월 10일에는 경주 본당에 속한 경주 귀도 유치원에도 파견되었다. 신원식 신부가 그 후 경주유치원을 인수하게 되자 1950년 3월부터 수녀들은 이곳에도 파견되어 일했다. 94> 1947년 4월 10일에는 서산에 천사유치원을 개원했으나 3년 만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휴원 되었다. 그러나 1년 만에 재개원하여 현재까지 계속 운영해 오고 있다. 진주 옥봉 본당에는 1947년 6월 1일에 수녀가 파견되었는데 수녀원도 없었고 한 명만 파견되었으므로 문산 본당 분원에서 일주일에 두 번씩 출근했다. 약 6개월 후 수녀 한 명이 더 파견되어 이때부터 유년 반을 조직하여 50여 명의 어린이에게 유치원식의 다양한 교육을 시작했다. 이 유년 반이 모체가 되어 1949년 '성심유치원’으로 발전되었다. 95》
(2) 초등교육
우리 수도회를 포함한 가톨릭교회의 초등교육이 가장 활발했던 때는 일제강점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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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홍석영 모니카 수녀의 중언, 1988.7.10.
92) B.T” 1939.
93) 金玉范,幼兒敎有史, 269쪽: 해방 전까지의 유치원 중가 추세표를 보면 1943년에 277개였던 유치원 수가 1945년에는 165개소로 줄어들었다
94) 경주천주교회,r 경주본당 5 0 년j , 1976 51-52쪽.
95> 수녀회 85년사, 4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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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우리 민족의 가장 긴급한 문화적,사회적 요청에 대한 응답으로 많은 본당에서 초등교육기관을 운영하거나 야학 등을 개설하여 문맹 퇴치와 민족교육에 노력했다.
수도회는 이와 같은 교회 교육기관의 증대와 더불어 전국적으로 더 많은 본당 학교에 파견되어 사도로서의 사명을 다했다. 그러나 우리의 교육 활동은 당시의 교육법 규정의 한계 내에서 이루어졌으므로 교육법과의 마찰과 갈등도 필연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을 맞기까지 우리 수도회에서는 총 23개 초등 교육기관에서 지속적 혹은 단기적으로 교육을 계속했다.
이 시기에 수녀들이 새로 파견된 곳은 장호원의 매괴학교, 안성의 안법학교, 대구의 효성학교로 모두 1912년 10월 초에 파견되었다. 그리고 이미 1800년대 말부터 시작된 7개교 중 3개의 학교에서 철수되었는데 그중 제주도의 신성 여학교는 1916년에 폐교되었고 매화동 봉삼학교와 진남포 해성 학교에는 재파견이 이루어져 해방 후 철수할 때까지 사도직이 계속되었다. 수녀들은 대부분 여학생의 교육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했으며, 그 결과는 눈에 띌 만큼 효과적이어서 수녀가 가르치는 학교는 언제나 호평을 받고 해를 거듭할수록 성장과 발전을 계속해 나갔다. 96>
1920년대에 수녀들은 의주 해성 학교 1921, 개성 본당 학교 1926, 왕림 광선학교 1929, 괴산 숭애 강습소 1928등에 파견되었다. 수녀들이 가르친 교과목은 대개 한글, 산수, 노래, 교리 등이었다. 위의 신설된 네 곳 중 왕림을 제외한 세 곳에서는 모두 2, 3년 만에 철수했다. 철수 원인은 의주의 경우 메리놀회 수녀들의 입국에 따른 사도직의 인계였으나, 개성과 괴산의 철수는 다른 사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1년도 서울대교구 연말 보고서에서는 정확한 이유는 밝히지 않고 다만 ‘곤란한 사정 때문에’라는 함축된 표현을 쓰고 있다.
1930년대에 우리 수녀들은 은율 해성학원 1931, 논산 소화 학술강습소 1932, 마산 성지학원 1932 원주 소화강습소 1934, 수원 소화 학술강습소 1935, 왜관 소화 여자학원 1936, 전주 해성 보통학교 1937등에 새로 파견되었다. 은율 해성학원은 해방 후 공산정권의 유물론적 독재체제가 날로 강화되어 활동을 계속할 수 없게 되어 수녀들을 철수했다. 그 후 1950년 6월 24일 본당 주임 윤의병 바오로 신부가 피랍, 피살된 후 해성학원은 인민학교 분교로 변신하였다. 97〉 논산 소화 학술강습소 또한 일제 말 탄압으로 폐쇄되었다. 마산 성지학원은 대구수녀원의 교육 사도직으로서 처음 파견된 분원이었으나 일제 말기 탄압으로 학원 문을 닫게 되어 전교만 했다. 그러나 해방 후 폐원된 학원 건물을 되살려 본당 주임 박성춘(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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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부이용,1912-1913, 장호원 연말 보고서; C.R.T.,1913. 참조,
97) 黃海道天主敎舍史刊行事業舍,「黃海道天主敎會史j, 3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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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가 성지여자중학원 3학급 설립 인가를 받아 초대 원장이 되었고, 수녀들은 이곳에 재파견되어 발전하는 성지의 역사와 함께했다. 이 시기 원주 소화강습소에 수녀들을 파견함으로써 우리 수도회에서는 처음으로 강원도에 발을 내딛게 되었으나 일제 말에 강습소는 폐교되고 말았다. 수원 소화 학술강습소는 해방 후 1946년 1월 26일 6년제 소화 국민학교로 인가되어 개교식을 거행해 수녀들은 학교 교사로서 활동했다.
1936년 4월 24일에는 왜관 소화 여자학원에 3명의 수녀가 파견되었다. 이 학원은 여성들을 위한 왜관 유일의 교육기관으로 그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다가 10년 후에는 남녀공학 순심 초급중학교를 설립함으로써 왜관 유일의 중등 교육기관으로 발전했다. 전주 해성 보통학교는 설립한 지 1년만인 1938년 9월 30일에 학제 변경에 따라 해성 심상소학교로 개칭, 남녀공학 6학급 인가를 받았다. 한편 이 시기부터 본당 교리학교에서 수녀들은 교리 교사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교사자격증과 재정문제로 학교를 떠나 본당에서 교리 교사로 활동하게 됨으로써 수녀들의 활동은 점차 직접선교의 형태로 변화되었다.
그러나 재정적인 문제나 기타 여러 가지 곤란 중에서도 서울수녀원에서는 1927년부터 체계적인 교사양성 계획을 추진함으로써 1930년대부터는 정식 자격을 갖춘 교사 수녀들이 배출되기 시작했고, 대구수녀원에서는 드방즈 주교의 적극적인 추진으로 더욱 활발한 교사 양성계획이 실천되었다. 그런데 이 시기 학교 수녀들은 지방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대부분 학생들을 인솔하여 신사참배를 해야 했고, 1940년 창씨 개명 때에는 학생은 물론 수녀들도 성과 이름을 바꾸어야만 했다. 또 종교교육을 금지하므로 학교에서는 비공식적으로 가르치다가 장학사가 오면 다른 시간으로 대체를 하거나 때로는 방과 후에 가르치기도 했다.
1930년 말에 사리원 명성학원을 위해 파견된 수녀들은 학교와 함께 유치원에서도 일했다. 당시 사리원에는 취학 시기를 놓친 사람들이 많아서 수녀들은 가난한 이들과 아이들을 모아서 가르쳤다. 98》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수녀들이 마지막으로 파견된 학교는 전주 수류 공립학교였다. 수류지방이 벽촌이라 일반 교사들을 채용할 수 없어 교회뿐 아니라 관청에서도 수녀 파견을 간곡히 요청했다. 수녀들은 정식 교원자격증을 갖고 일했으며, 파견된 지 1년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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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홍석영 모니카 수녀의 중언,198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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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는 본당 전교와 유년반을 위해 2명이 더 증원되었다. 이곳은 한국전쟁 발발 후 잠시 성직자와 수녀들의 은신처가 되기도 했으나 공산군의 진입으로 체포되어 고생을 겪다가 이후 분원이 폐쇄되었다. 제물포 박문학교 여자부는 그대로 존속되었으나 남자부는 1945년 6월에 건물 소개령으로 교사가 헐리고 학생들은 공립으로 편입되었다. 계양구 계산동 효성 학교에서는 1944년에 일본인 교장이 임명되어 수녀들에게 일반 양복을 입도록 요구했으며 국민복에 군인 모를 쓰고 군사훈련까지 받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장호원 매괴학교는 이미 수녀들이 철수한 뒤였지만 1942년에 학교를 빼앗겨 이름조차 욱산으로 바뀌었다. 장연 경애학교, 진남포 해성학교 등은 공립으로 흡수되었다. 논산 부창동 소화학원과 마산 성지학원은 일제의 탄압으로 폐쇄되었으며, 전주 해성학원은 학교를 일제의 저금관리소로 징발당하고 학생들은 공립으로 편입시켰다. 그 밖의 학교들은 교회에서 유지 시켜 왔고 수녀들의 활동도 지속 되었으나 전쟁 말기 일제의 수탈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3) 중등교육
일제하 천주교회의 중등교육 기관으로는 남대문 상업학교가 유일한 학교였다. 이는 중등교육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학교 설립 및 유지의 어려움 특히 재정 부족에 가장 큰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99> 1944년 ‘계성 여자상업 전수학교’가 세워져 수녀회의 중등교육 활동이 시작되었다. 계성 여자상업 전수학교는 일제 말 사립학교에 대한 간섭이 강화됨과 동시에 지정 보통학교에 내주던 보조금이 중단되자 이들의 간섭에서 벗어나 여성 인재를 양성하여 국가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설립되었다. 당초에 여자 고등보통학교를 설립하고자 했으나 총독부에서 설립인가를 내주지 않았다.
그들은 당시 우리 수도회에서 운영하고 있던 특수 교육기관인 계성 여학원 폐원을 인가 조건으로 내세우면서 고등보통학교가 아닌 상업학교를 인가해 주겠다고 했다. 100) 이 교섭 과정에서 우리 수도회와는 무관하게 학교 설립을 추진하던 분들에 의해 조건이 수락되었다. 그럼으로써 계성 여학원의 폐원이라는 희생 아래 계성 여자상업 전수학교가 설립되었다. 101)
1944년 8월 10일 3년제 실업학교 설립이 인가되어 9월 8일 성모 성탄축일에 개교식과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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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C.R., 1923.
100) 수녀회 85년사,544쪽.
101) 앞의 책, 5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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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식을 동시에 가졌다. 102) 초대 교장은 당시 계성 여학원 교장이었던 장발(루도비코, 1901-2001)이 겸임했고, 수녀들은 교장을 도와 가톨릭적인 여성 교육을 위해 일반과목과 함께 종교를 맡아 강의했다. 당시 신입생의 1/3이 신자였으나 수녀들의 지도로 차츰 영세자가 늘어 졸업생 중 2/3가 신자가 되었다.
해방을 맞아 미 군정이 시작되면서 설립자의 의도대로 학교를 설립할 수 있는 교육의 민주화가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애초의 의도를 되살려 인문계 여학교로 재출발하기 위해 1946년 4월에 군정청 문교부에 인가를 요청하여 6월 24일부로 인가를 받았다. 이로써 학제를 변경하여 6년제 계성 여자 중학교가 각 학년 2학급, 전체 12학급으로 재출발했다. 103 》
한편 해방 후 천주교회에서는 일제 말에 빼앗겼던 학교들을 되찾고, 운영권을 회복하여 교육 사업의 발전적 계기를 맞았다. 특히 국가에서 초등교육을 의무화할 계획이어서 기존의 사립 국민 학교를 폐교하고 중등학교로 전환하는 학교들이 있었다. 우리 수녀들이 사도직을 하고 있던 마산, 왜관, 전주 등에서도 해방 후 군정 시기에 이같은 변화를 겪었다. 이 경우 국민학교에서 가르치던 수녀들이 단기간의 교육과정을 거쳐 중등교원 자격증을 취득하여 중학교에서 가르쳤다.
마산 성지여자중학원은 1932년 마산 성지학원에서 출발한 이후 일제 말에 폐쇄되었던 학원 건물을 되찾아 1949년 5월 박성춘 신부가 성지 여자 초급중학교로 설립 인가를 받았다.
전주의 성심 여학원은 일제 말에 폐교된 해성 학교를 회수하여 1946년 8월 1일 이상화(바르틀로메오,1876-1957) 신부가 설립한 것으로 1948년 1월 1일에는 성심 여자 초급중학교로 발전되었다. 1946년 9월 7일 개교한 왜관 순심 학교는 남녀공학으로서 수녀들은 학교 개교 당시부터 교장 신부를 도와 학생지도와 학교 발전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했다. 김천 성의 학원은 국민학교에서 중등학교로 바뀌었다. 이 학교는 1907년에 김성학(알릭스,1870-1938) 신부에 의해 설립된 사립 성의 학교를 해방 후 당시 교장이던 최재선(요한, 1912-2008) 신부가 1947년 국민학교를 폐교하여 중등교육 기관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대구 대건중학교는 본래 남자부만을 계획했던 것을 수녀들의 노력으로 여자부까지 설립하게 하여 1946년 9월 20일 개교 이래로 수녀들이 여성 교육을 위해 헌신했다. 이것은 후에 효성 여중·고의 시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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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계성여자중고등학교, 계성 30년사, 1975, 11쪽.
103) 앞의 책, 47-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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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수녀회의 특수 교육기관 및 기숙사
이 시기에 행해진 교육 사도직 활동 가운데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계성 여학원이다. 학교의 설립과 성격은 중등교육을 마친 일본인과 조선인 자녀들에게 수신, 가사, 재봉, 자수, 꽃꽂이, 서도, 요리, 영어, 프랑스어 등 가사에 필요한 제반 학과를 가르치는 가정학교였다. 104) 1927년 5월 8일에 수련원 건물의 한 층을 교사로 하여 개원했고, 당시 학생은 약 50명 정도였다. 남형우 요한 수녀의 증언에 의하면 교육과정은 가정과 1년, 연구과 1년의 2년 과정이었으나 가정과 1년만 수료하는 사람이 많아서 보통 100여 명 학생 중 가정 과가 70여 명 연구과가 30여 명쯤 되었다고 한다.
입학생들은 제1 고등보통학교, 제2 고등보통학교 등 일류학교 출신의 일본 여학생들이 대부분이었고 한국 학생도 10여 명 끼어 있었는데 대부분이 가문이 좋고 수준이 높아 여 학원의 명성이 상당히 높았다고 한다. 교사로는 일본인 6명과 프랑스 수녀 2명, 아일랜드 수녀 1명과 한국인 수녀로는 남형우 요한 수녀가 있었다. 초대 원장은 가밀 수녀였고, 2대 원장은 계성 여자상업 전수학교 교사였던 이동구였으며 3대는 장발이 잠시 계성 상업 전수학교와 겸임했다.
교사는 수련원 3층을 사용하다가 계성 보통학교 여자부가 새 교사로 옮기게 되자 그 건물을 기증받아 내용과 시설을 확장한 후 1937년 봄에 새 원사로 옮겼다. 또 이 해에는 여 학원 창립 10주년을 맞아 일본인 신자 회와 연합하여 여 학원의 확장과 보육원의 후원을 목적으로 6월 27, 28일 양일간 바자회를 열었다. 105)
그 후 계성 여자 상업 전수학교 설립과 관련하여 1945년 3월 18일 마지막 졸업생을 내고 폐원했다. 그 근본 원인은 조선총독부의 사학 억제정책에 있었다. 당시 교회의 구내에는 계성유치원, 계성 초등학교, 계성 여학원이 있었으므로 여자 중등 교육기관만 있으면 유치원에서 전문학교까지 마칠 수 있는 종합 교육기관이 되는 셈이었다 106》
수녀들은 또한 정규과정의 학교는 아니었으나 유럽인을 대상으로 프랑스어 학교를 운영했다. 이 학교를 운영함으로써 수녀들은 프랑스 정부로부터 원조금을 받아 수녀원 사업에 사용했다. 107) 수녀들의 회고에 의하면 1930년대까지도 프랑스 수녀들이 수녀원 내에서 개인 또는 단체로 외국인들에게 프랑스어 교습을 했으며 그 사례금은 수녀원 수입이 되었다고 한다.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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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C.R.,1927.; J.M.,1927.5.8.; 샬트르모원 고문서고 소장자료, 1927년도 가밀 원장수녀의 보고서,
105) 「경향잡지」, 1937. 7, 3기쪽,
106) 계 성 30년사, 10-11쪽.
107) C-R”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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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 학교는 이후 한국인에게까지도 개방되어 1960년대 초까지 계속되었다.
수녀들은 또한 기숙사를 운영 했다. 최초의 기숙사는 서울 본원에서 수녀원 내에 설립한 기숙사였다. 이것은 경성에 와서 학교에 다니는 지방 학생들을 위해 세운 것으로 초기에는 20여 명의 학생들을 수용했다. 수녀들은 기숙생들의 종교교육, 덕육에 주력하여 착하고 거룩한 교우를 양성하고자 했다. 학생들은 수녀원 성당에서 매일 아침 미사, 영성체, 성체조배, 십자가의 길 등 전례 및 신심 생활을 했으므로 후에 그들 가운데 수도자가 배출되기도 했다.
1927년부터는 기숙사를 일반 그룹과 수녀 지원자 그룹으로 나누어 운영했다. 수녀 지원자 그룹은 지원기에 사범학교 졸업자를 양성하려는 수녀원의 계획에 의한 것으로 약 20여 명의 학생이 있었다. 8.15해방 후에는 수녀원 내에 있던 기숙사를 현 주교관 아래 자리로 이전했고, 대상도 계성 학교 학생뿐만 아니라 타교생들과 남학생도 받아 명칭을 '수녀원기숙사’에서 '성모기숙사로 개칭했다. 여기에는 서울 시내 각 중-고, 대학의 학생들이 있어 학교 간의 유대가 맺어졌다.
그러다가 1956년에는 기숙사를 헐어 운동장을 확장하고, 1957년 2월에 캐롤 주교와 유엔 한국 부흥위원단의 원조로 새 기숙사를 현 계성여고 수녀원 자리로 신축 이전하면서 계성 여자 중고등학교의 기숙사로 사용하게 되었고, 명칭도 ‘계성 기숙사’라 칭했다. 이후 10여 년간 운영되다가 점차 지방 학생이 줄어들고 1969년 중학교 신입생부터 평준화되어 기숙사생이 감소하고 효율성이 높지 않아 그해 봄부터 폐사했다.
4) 본당 선교 사도직
일제의 단계적인 식민지화 정책으로 민족교육과 종교교육에 탄압을 받으면서도 교회의 포교사업은 그렇게 불리한 편은 아니어서 본당의 발전은 계속되었다. 조선교구의 1909년 교세를 보면 외국인 신부 48명, 한국인 신부 13명, 52개의 본당에 신자 수가 71,252명이었다. 그러다가 1911년에는 외국인 신부 48명, 한국인 신부 15명, 55개의 본당에 신자 수가 76,843명으로 증가하였다. 그리하여 1911년 4월 8일 교황 비오 10세는 조선 대목 구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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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박상일 벨라지아 수녀, 손임녀 아네스 수녀, 곽성진 보르지아 수녀, 오숙영 잔 로드 수녀 등의 중언, 1988. 6. 12.
109) 「경향잡지」, 1924. 4, 145쪽 참조,
110》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한국가톨릭대 사전j, 부록, 3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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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와 전라도 2개 도를 나누어 대구 대목 구를 설정하고, 그 나머지 포교 지를 서울 대목 구로 개칭한다고 선포했다. 111》 그리고 대구 대목 구의 교구장으로 드방즈 주교를 임명했다.
이에 대구 본당이 계산동 본당으로 개칭되고 주교좌 본당으로 출범하면서 이곳을 중심으로 교세가 증가하여 수녀들의 본당 진출은 더욱 확산하였으며,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어린이들의 기초교육과 교리지도를 통해 민족정신과 신앙을 일깨우면서 복음전파를 계속해 나갔다.
수도회 초창기 때처럼 수녀들은 민중 계몽의 필요성과 이를 통한 전교의 효과를 통찰한 본당 신부들의 요청으로 이 시기 동안 전국 29개 본당에 파견되었다. 이 가운데 2개의 본당에서만 학교나 시약소 등의 간접 선교의 방법 없이 본당의 교리지도, 제의 실, 가정방문 등의 사도직 활동을 한 데 비하여 나머지 27개의 본당에서 수녀들은 여전히 소학교, 유치원, 시약소, 양로원 등의 일에 종사하면서 동시에 교리지도, 가정방문, 신심 단체지도 등으로 본당 전교의 일익을 담당했다. 또한, 수녀들은 서울을 중심으로 한 중부지역, 황해도, 평안도 지역 그리고 1911년 대구교구로 분리될 때 대구에 속한 지역 등 세 지역으로 파견 된 것을 볼 수 있다.
우선 중부지역에의 본당 수녀 파견을 보면, 1912년 안성 본당에 파견된 수녀들은 학교에서 어린이들에게 일반과목과 교리를 가르치는 한편, 본당의 필요에 따라 제의실, 가정방문, 첫영성체 교리 등을 하면서 전교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점차 엄격해지는 교사자격 요구에 부응하지 못해 수녀들은 학교에서의 교과나 교리교육을 그만두고 본당의 교리, 가정방문, 단체지도와 유아교육, 학교의 서무 등을 맡아 보게 되었다. 1900년에 설립되어 평택, 천안 일부, 진천까지의 사목을 담당해 온 안성 본당에서는 많은 성직자, 수도자가 배출되었다.
1912년 장호원 본당에 파견된 수녀들은 학교에서 교과 지도와 함께 교리교육을 하는 한편 본당의 전례, 복사단, 첫영성체 준비 등을 했다. 1914년 성체 성혈 대축일에 지방에서는 처음으로 성체거동 행사를 준비했고, 성가대와 복사단 지도 및 그때의 모든 행사절차를 도왔다. 112》 이곳에서도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가 나왔다.
1927년에는 세 명의 수녀들이 ‘갓등이’라고 불리는 경기도 화성군의 왕림 본당에도 파견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앵베르(1796-1839) 주교가 은신해 있던 곳이기도 한 이곳은 1888년 7월에 설립된 우리나라의 세 번째 본당이면서 한강 이남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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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Acta Apostolicae Sedis, 1911, 224—225쪽,
112) 天主敎甘谷敎舍,甘谷本堂九十年史, 轉國敎舍史硏究所, 서울, 1988, 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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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본당이 된 유서 깊은 곳이다. 1927년 왕림 본당에 파견된 수녀들은 본당과 학교 사도직올 겸하여 학교 교육과 교리지도, 정방문, 신심 단체지도 등을 하다가 1981년에 재정난으로 학교가 폐교되었고, 본당에서는 1984년에 철수했다. 113) 이외에도 수녀들은 충북 괴산 충남 논산, 강원도 원주, 수원 북수동, 서울 혜화동, 제기동, 공주 중동, 서산, 청주 수동본당 등 서울대교구에 속하는 중부지역에 계속 진출하여 본당 선교와 함께 소학교, 야학교, 유치원 등의 사도직을 했다.
이 시기 본당 선교 사도직만을 위해 파견된 곳이 있는데, 신천 본당에서는 학교 교육이나 의료사도직을 하지 않고 제의실, 교리반 지도, 가정방문 등을 했다. 그러나 본당 사목의 활성화를 위해 우리 수녀들을 초청했던 이기준(1884-1977) 본당 신부가 바뀌자 본당의 경비 절감을 위해 교구장의 양해하에 수녀들은 철수했다.
한편 대구지역에서는 1915년 대구수녀원 설립 이후 수녀들은 계산동 본당에서의 사도직 활동과 함께 인근 남산 동본당에서 유년반과 미혼여성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서양 수녀들을 동반하여 약주머니를 들고 가난한 집, 병자가 있는 집들을 방문하고 위로하면서 자연적으로 사도직 경험을 쌓았다. 이와 같은 경험을 토대로 1932년에는 대구수녀원에서도 완월동 본당을 비롯하여 활발한 본당 진출이 이루어졌다. 114)
일제하의 민족적 수난과 교회에 대한 집요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전국적으로 수녀들의 본당 진출이 가능했던 것은 수도 성소의 계속적 증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교적이고 폐쇄적인 사회에서 비난과 천대, 박해를 받아야 했던 여성들이 수도 성소에의 길을 통해 한 인간으로서 스스로의 독립된 길을 신념대로 개척해 나갈 수 있음이 천주교회의 제도 밑에서 공공연히 보장된 것이다. 그리하여 수녀들이 교육 의료, 자선활동 및 교리지도로 전국 각지의 본당에 파견되면서 조선의 젊은 여성들에게 더욱 활발하게 수도 성소의 씨앗을 심고 키워주게 되었고, 동시에 수도 성소의 증가는 계속적인 본당 진출의 원동력이 되었다. 한편 일제시기 제한된 신앙의 자유를 이용하여 조선 천주교회는 점진적으로 성장했으며, 일제하에서 선교사들이 이룩해 놓은 교세 확장은 그 어느 때보다 주목할 만했다. 1910년 1개 교구에 신자 수 73,517명에서 일제 말기 1941년에 9개 교구에 183,262명으로 약 2.5배가 증가하였다. 115) 실로 일제하 36년간은 온갖 수난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가 성장을 위해 꾸준히 노력한 시기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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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한국가톨릭대사전, 112쪽참조,
114) 계산동을 비롯. 완월동,왜관,전주. 문산, 비산동, 수류,경주, 김천, 진주, 옥붕,진해 등이다,
115) 한국가롤릭대사전편찬위원회,「한국가롤릭대 사전J 부록, 3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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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샬트르 성바오로회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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