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됨
“사람 좀 돼라.”
초등학교 동기생 모임에서 옆자리 앉은 친구가 느닷없이 내게 던진 말이다. 참 낯익다. 어릴 때 부모님이 나에게 많이 했던 말이다. 그땐 무슨 뜻인지 몰랐다. 막연하게 착한 사람이 돼라. 어른들 말 잘 듣는 순한 사람이 되라는 정도로 이해했다. 많은 시간이 흘렀다. 부모님도 돌아가시고, 지금은 내가 그때의 아버지 어머니 나이보다 더 많다. 어떻게 살았기에 동갑내기 소꿉친구가 내게 그런 말을 할까?
‘사람 좀 돼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던 때는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과 저학년 때이다. 철없던 시절에 거의 매일 들었다. 친구의 ‘사람 좀 돼라’는 말이 농담이 아니라면 나는 아직 철이 덜 든 사람이 아닌가? ‘사람됨’이란 뜻은 ‘사람의 됨됨이나 인품’이다. 여기서 ‘됨됨이’는 ‘사람이 지닌 품성이나 인격’을 말하고 ‘인품’은 ‘사람이 사람으로서 가지는 품격이나 됨됨이’를 뜻한다. 됨됨이나 인품이란 모두 추상적으로 쓰이는 말이다. 눈으로 볼 수도 기준을 정할 수도 없는 것이다.
‘철없다’는 ‘사리를 분별할 만한 지각이 없다’이다. 사리는 일의 이치이다. 세상에 일어나는 일이나 사안에 대한 이치를 모두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문제가 되는 어떤 일이나 사안을 생각할 때 옳고 그름보다 다름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소중하지 않을까.
친구와는 서로 개인적이 이익이나 손해 볼 일로 의견 충돌을 한 것이 아니다. 이겨도 그만 저도 그만인 시사(時事) 문제다. 좀 더 크게 보면 그렇지는 않다. 사안이 우리 국민 미래 삶의 질과 이어질 수도 있다. 원전 폐쇄와 4대강 댐 물 개방 문제다. 아무리 다투어도 두 사람이 가진 지식이나 상식으로는 해결될 일이 아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사람 좀 돼라”는 말로 부아를 돋운다.
친구를 원망하기 전에 우리나라의 현실이 나를 답답하게 한다. 정부에서 추진하는 원전 폐쇄나 4대강 댐 물 개방 정책은 우리 국민 대다수가 수긍할 수 있는 논거부터 보여주었으면 한다. 이것이 부족하다 보니 내가 친구로부터 본론과는 관계없는 “사람 좀 돼라”는 말까지 듣는 게 아닐까. 현재 상황으로는 두 문제에 모두 어느 쪽으로 가야 우리의 삶이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살기가 좋고 행복하게 될 것인지 판단하기가 어렵다. 문제가 너무 크고 미래를 담보하기에는 많은 전문가의 연구가 더 필요할 것 같다.
가만히 생각하니 친구와 내가 한 논쟁은 ‘도토리 키 재기’ 아니면 ‘난쟁이끼리 키 자랑하기’였다. 상대를 이해시킬 확실한 논거도 없이 신문이나 방송에서 주워들은 이야기로 갑론을박했다. 거기에 사이사이 언성도 높이며 상대의 말도 끝까지 들어주는 예의까지 갖추지 못했다. 확실한 논거나 증거도 없이 자기 생각만 옳다고 우겼다.
요즈음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이기만 하면 원전 폐쇄나 4대강 댐 물 개방 문제로 갑론을박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논쟁의 수준이 신문이나 방송에서 많이 들어온 정도다. 상대를 설득할 뚜렷한 근거나 증거를 가진 것도 아니다. 그만그만한 지식으로 상대를 설득하려 한다.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논의의 초점과는 관계없이 인신공격하는 일도 있다. 여기에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편이 생겨 점점 집단화된다면 국론의 분열로 발전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전 국민이 민감하게 받아들일 쟁점이라면 정부는 더 구체적이고 확실한 연구와 검토 끝에 정책을 내놓아야 정부의 방침에 국론이 집중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친구처럼 자기의 의견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사람 좀 돼라’고 엉뚱하게 말해 내 삶의 여정이 혹시라도 잘못되었나 걱정하게 만들지 말았으면 한다. 친구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남은 내 삶에 기운이 빠질 수도 있다. 말이 반듯하다 해 행동이 반듯한 게 아니다. 얼굴이 곱다고 마음이 고운 것도 아니다. 학문이 높다고 인격이 높은 것이 아니다. 부를 쌓았다고 덕을 쌓은 것도 아니다. 사람이란 겉만 보고는 알 수 없다. 어디에서 읽은 글이다. 사람됨이란 마음의 양식에 달렸지 않을까.♡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