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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대성당 가톨릭 성 미술 2부. 성 미술. 스테인드글라스
[가톨릭 미술 이야기] 천주교 서울 대교구 홍보위원회
1부
제1장: 명동성당의 역사(조한건 신부)
제2장: 명동성당의 건축(김진태 신부)
제3장: 명동성당의 전례(장긍선 신부)
2부
제4장: 명동성당의 성미술(정웅모 신부)
제5장:명동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정수경 교수)
제4부 성 미술
서울 대교구 정웅모 신부
명동대성당의 내부와 부속 건물. 마당 곳곳에는 여러 점의 성상과 성화가 있다. 그러나 처음에는 이러한 성 미술 작품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벽돌들 한장 한장 쌓아 올린 아름다운 성당이 우리의 눈을 먼저 사로잡기 때문이다.
하지만 좀 더 마음을 열고 120여 년간 같은 자리를 지킨 명동대성당에서 성상과 성화가 속삭이는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면 우리 삶과 신앙을 다듬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성당 마당의 예수상과 성모 마리아상은 우리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들 알려 준다. 또한, 성당 안에 있는 초기 교회의 선조들의 모습은 생명을 바치면서까지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의 희생 위에 한국 교회가 세워졌음을 보여 준다.
어머니 품처럼 따뜻한 명동대성당에서 성상과 성화를 둘러보며 잠시나마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들 돌아보자. 누군가에게는 이 시간이 하느님과 함께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성 미술
* 14사도화
명동대성당의 제단 주변을 둘러싼〈14사도화〉성화는 장발 루도비코의 작품이다. 1898년 명동대성당 축성식 전후에는 반원형 제단의 벽 주변이 텅 비어 있었다. 드브레 주교는 1925년 바티칸에서 거행된 79위 복자 시복식 후에 한국 교회 미술의 개척자였던 장발 화가에게 이 공간에 설치할 작품을 의뢰했다.
화가는 텅 빈 공간을 어떻게 장식할지 많은 고민을 하면서 경주 토함산의 석굴암을 방문했다고 한다. 신라 시대에 조성된 석굴암은 거대한 화강암으로 만든 본존불상 둘레에 10대 제자가 새겨진 모습이었다. 여기서 영감을 얻은 그는 제단의 감실에 계시는 예수님을 제자들이 감싼 듯한 모습을 그리기로하였다.
2년간 심혈을 기울인 끝에 1926년 <14사도화〉를 완성했다. 아치형 벽감에 설치된 사도화는 한국 교회 최초의 제단화로서 명동대성당의 성스러움과 품위를 한층 높여 준다,
화가는 우리나라에서 복음을 전하던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 사제들을 모델로 하여 사도들을 친근한 모습으로 표현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외에 초대 교회에서 복음 전파에 헌신한 사도 바오로와 그의 동행자였던 바르나바도 그렸다, 왼쪽부터 마티아, 시몬,바르톨로메오,소 이교보,요한,안드레아,
베드로,바오로,대 야고보,토마스, 필립보,마태오, 타대오,바르나바 순이다. 사도들은 각자 신원을 드러내는 상징물을 들고 있으며, 작품 아래에는 한글과 라틴어로 이름을 적어 놓아 쉽게 구별할 수 있다.
열네 사도는 제단 벽 가운데의 성모자상 좌우로 일곱 명씩 대칭을 이루는데, 성모자상 바로 아래에는 교회의 두 기둥인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가 서 있다. 사도 베드로는 하느님의 말씀이 담긴 성서와 예수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전권을 상징하는 천국의 열쇠를 들었으며, 사도 바오로는 성서와 자신의 순교 도구인 긴 칼을 들었다.
열네 사도는 샌들을 신고 복음을 선포하기 위한 준비물 하고 있다. 발아래 핀 꽃은 하느님의 창조물인 자연과, 복음을 선포하는 발걸음의 아름다움을 보여 준다. 녹색 배경은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사도들은 근엄한 표정으로 정면이나 측면을 바라보고 있으며 몸은 거의 정면을 향하고 있다. 화가는 당시 독일에서 유행하던 보이론(Beuron)파의 미술 이론을 따라 이 작품을 제작했다.
이 이론은 외적인 화려함을 피하고 절제된 표현을 통해 정신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특징이 있다.
〈14사도화〉는 가톨릭교회가 예수 님과 사도로부터 이어지는 교회이며 천상 성인들과 일치된다는 것을 나타낸다. 또한, 교회의 사도들과 성인들처럼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삶의 첫 자리에 두고 올바르게 살아야 함을 일깨워 준다.
* 79위 복자화
대형 성화인〈79위 복자화〉는 제단 부근의 왼쪽에 있다.
성화에 표현된 복자들은 대부분 1839년 기해박해와 1846년 병오박해 때 순교하였으며, 1925년 7월 5일 비오 11세 교황에 의해 바티칸에서 시복식이 거행되었다. 당시 조선 대목구장이었던 뮈텔 주교는 시복식 다음 해에 외국인 화가에게 부탁하여 이 복자화를 제작했는데, 누가 그렸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1925년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된 시복식 미사 때 이탈리아 출신의 주스타니안(Giustanian)이 그린〈영광〉이 제대 위에 걸렸기 때문에 그의 작품이라는 말도 있지만, 〈영광〉과 명동대성당의〈79위 복자화〉는 다른 그림이며, 같은 작가의 작품으로 보기는 어렵다.
작품의 배경에는 가톨릭의 총본산인 성 베드로 대성당이 있고, 성당 지붕에서는 순교자들의 영광을 상징하는 빛이 뿜어져 나온다. 꽃이 핀 초원에는 순교자들 가운데 복자품에 오른 79위가 하늘을 우러러보며 기도를 바친다. 가운데에는 2대 조선 대목구장인 앵베르 주교와 파리 외방전교회의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가 서서 하느님을 찬양하며 기도한다.
그 옆에 붉은 영대를 걸친 김대건 신부가 무릎을 꿇고 천상의 하느님 나라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림 오른쪽에 서 있는 소년은 79위 순교자 가운데 가장 어린 13세 유대철 베드로이다.
좌측의 여자 교우들과 우측의 남자 교우들도 하늘을 우러러본다. 성직자 네 명을 제외하고 남자 순교자는 스물여덟 명, 여자 순교자는 마흔일곱 명이다. 하늘에서는 두 천사가 이들을 천상의 나라로 인도한다. 천사들은 승리를 상징하는 빨마 가지를 위아래로 흔들며 신앙을 지키기 위해 생명을 바친 순교자들을 열렬히 환영한다.
복자들은 칼과 같은 형 집행 도구들이 있는 주변에서 무릎을 꿇거나 서서 기도를 바친다.
세상의 어떤 박해나 시련도 하느님을 향한 사랑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79위 복자화〉는 한국 천주교회가 순교자들의 굳건한 신앙과 희생을 토대로 세워졌다는 것을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 작품이다. 79위 복자들은 1984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맞아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시성식 미사 중에 병인박해 때 순교한 24위 복자들과 함께 성인품에 올랐다.
명동대성당에는 중앙 제대 외에도 세 개의 제대가 보존되어 있다.〈79위 복자화〉바로 이래에는 복자의 시복을 기념하여 1926년 축복된 '치명 복자 제대’가 있다. 중앙 제단 오른쪽
에는 성 베네딕토상 제대(1898년)가 있으며, 왼쪽에는 예수 성심 제대(1898년)가 있다. 명동대성당 축성식 이후 여러 제대에서 예식이 진행되기도 했지만, 오늘날에는 중앙 제대에서만 미사가 봉헌된다.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문학진 토마스 아퀴나스 화가의〈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성당 제단 부근의 왼쪽 벽에 걸려 있다. 이 작품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명동대성당에 방문했을 때 축복 됨으로써 한국 천주교회 공인 표준 영정 1호가 되었다. 성인의 초상화를 미사가 봉헌되는 제단 가까이에 걸어 둠으로써 오늘날에도 교회공동체 안에, 특히 사제들 가운데 그가 여전히 함께한다는 것을 알려 준다.
흰색 두루마기에 갓을 쓰고 붉은 영대를 걸친 김대건(1821-1846) 신부가 정면을 바라본다. 사제가 미사와 성사를 집전할 때 입는 정식 복장은 영대와 제의이다. 그러나 그가 사목하던 때는 박해 시기였기 때문에 두루마기 위에 영대만 걸치고 복음을 전하는 위태로운 모습이다.
김대건 신부가 입은 흰 두루마기는 빛으로 가득한 천상 세계를, 붉은 영대는 하느님을 향한 열정과 사랑, 희생과 순교를 나타낸다. 김대건 신부가 펼쳐 든 성서에는 십자가가 그려져 있고. 오른손에는 십자고상이 들려 있다. 그의 생애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며 증거하는 삶이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성화의 뒷배경은 추상적인 장소가 아니라 서울의 도봉산이다. 우리나라 곳곳을 다니며 목자 없는 양떼와 같은 사람들에게 쉼 없이 복음을 전하다가 한강 백사장 새남터에서 순교한 그의 사목적 열정을 나타낸다. 문학진 화가는〈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그리기에 앞서〈103위 순교 복자화〉1977년. 혜화동성당 소재)를 제작했다.
이 성화를 그릴 당시에 김대건 신부는 성인이 아니라 복자였기 때문에 머리에 후광이 없다.〈103위 순교 복자화〉는 1984년 시성식 후에〈103위 순교 성인화〉로 불리게 되었다.
* 이승훈 베드로
〈이승훈 베드로〉초상화는 황창배 화가의 작품으로 성당 내부 왼편의 제단 쪽에 걸려 있다. 명동대성당의 다른 성화가 유채로 제작된 반민 황창배 화가는 이 성화를 수묵담채로 그렸다. 명동대성당의 성 미술 가운데서 유일하게 한국화이면서 전신상으로 제작되어 눈길을 끄는 작품이다,
이승훈은 중국 북경에 가서 예수회 선교사로부터 교리를 배운 후 1784년 그라몽 신부에게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최초로 세례를 받았다. 그는 교리 서적과 십자고상, 상본 등 여러 신앙 자료를 가지고 귀국하여 이벽, 정약전,정약용,권일신 등에게 세례를 베풀고 초기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그는 외출할 때 쓰는 갓 대신 공부할 때 쓰는 두건을 두르고 단아한 자세로 정면을 바라본다. 배경에는 아무런 장식도 넣지 않고 인물을 두드러지게 함으로써 이승훈의 맑고 밝은 신앙 세계를 더욱 선명하게 표현하였다.
최초로 세례를 받은 사람으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한평생 올곧게 살려는 그의 의지가 강하게 드러난 작품이다.
* 명례방 천주교 집회도
〈명례방 천주교 집회도〉는 김태 바오로 화가가 그린 것으로, 성당 내부의 오른쪽 제단 부분에 걸려 있다. 이 작품을 비롯한 명동대성당 안의 여러 성화는 성 요한 바오로2 세 교황의 첫 방한을 앞두고 제작되었다. 교황은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과 103위 시성식 미사를 봉헌하기 위해 1984년 우리나라를 방문했다.
한국의 천주교는 서양의 선교사들을 통해 들어온 것이 아니라 학자들이 참된 진리를 찾아 연구하는 과정에서 들어오게 되었다. 이는 세계 어디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매우 독특한 점이다. 천주교 집회도는 초기 학자들이 명례방에 모여 교리 공부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명례방 집회는 교회 창설 직후의 공동체 모습으로,초기 한국 천주교회를 이끌었던 이벽 요한 세례자,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등이 김범우 토마스의 집에서 기도하고 교리 공부를 하던 모임이었다. 모든 사람이 흰옷을 입었는데 이벽이 하늘색 두루마기를 입은 것은 그가 하느님 나라의 진리에 대해 가르친다는 것을 상징한다.
안채의 사랑방에는 스물세 명이 있는데. 큰 깃을 쓴 양반과 작은 갓을 쓴 중인, 패랭이를 쓴 상인, 흰 수건을 맨 평민까지 모두 한 방에 있다, 집주인 김범우는 일어서서 늦게 도착한 중인과 천민을 환영하며 안으로 안내한다.
조선 시대의 철저한 신분 사회와 달리 천주교회는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가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이자 한 형제요, 자매라는 것을 가르쳤다. 이렇듯〈명례방 천주교 집회도〉는 초기 신앙 공동체의 교리 공부 모습과 그리스도교의 평등사상을 함께 보여 준다.
이벽은 오른손을 들어 천상 진리를 가르치고 있으며, 왼손은 신앙 서적인《천주실의》내용을 짚고 있다. 천주실의는 이탈리아 출신의 예수회 신부로서 중국 선교에 몸 바쳤던 마태오 리치가 지은 교리서이다.〈명례방 천주교 집회도〉는 신앙 선조들이 자발적으로 교리를 배우고 익혔던 열정적인 모습을 잘 보여 준다.
* 이벽 요한 세례자
한국 천주교회 창설의 선구자 이벽 요한 세례자의 초상화는 제단 부근의 오른쪽 앞에 걸려 있다.
김태 바오로 화가는〈명례방 천주교 집회도〉를 그렸던 해에〈이벽 요한세례자〉도 함께 제작했다. 같은 화가의 작품이기 때문에〈명례방 천주교 집회도〉의 이벽과 초상화에 그려진 그의 얼굴은 닮았다.
이벽은 경기도 광주의 주어사에서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탐구하며 이승훈 베드로에게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최초로 세례를 받게 했다, 중국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이승훈은 1784년 이벽의 집에서 이벽과 정약용 사도 요한,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벽은 한문 교리 서를 들고 먼 곳을 바라본다. 그의 시선은 세상에 살면서도 하느님의 영원한 진리를 따라 살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드러낸다, 배경에 정겹게 묘사된 나지막한 산은 하느님의 진리를 우리나라 산천 곳곳에 전하려는 그의 의지를 엿보게 한다. 또한, 산처럼 견고한 이 벽의 굳은 신앙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벽(요한 세례자)
김범우(토마스)
* 김범우 토마스
김범우 초상은 조영동 토마스 화가의 작품으로, 제단 부근의 오른쪽에 걸려 있다. 역관이었던 김범우는 1784년 이벽의 가르침과 권유로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며 세례를 받고 자신의 집인 명례방을 신앙 공동체의 모임 장소로 제공했다. 김범우의 집은 명동대성당이 자리 잡은 곳
에서 조금 떨어진 장악원 터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785년 김범우의 집에서 신자들이 모이던 중 형리들이 급습하여 모든 사람을 체포했다. 이때 양반들은 모두 풀려났지만, 중인이었던 김범우는 감옥에 갇혔다가 충청도 단양으로 유배를 갔다. 유배지에서도 신앙생활을 하던 그는 결국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나 하느님 품에 안겼다.
초상화에서 볼 수 있는 작은 갓은 그가 양반이 아니라 중인 출신이라는 것을 알려 준다. 큰 눈을 부릅뜨고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정면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서 신앙 고백과 신앙의 전파를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볼 수 있다.
녹색 배경은 하느님께 대한 신앙 안에 영원한 생명과 진리가 있음을 뜻한다. 명동대성당에서는 김범우를 기리기 위해 성당 마당의 좌측 건물을 ‘범우관’이라 부른다. 범우관에는 사무실과 휴게실, 교리실과 유물실 등이 자리 잡았다. 그의 신앙과 나눔의 실천은 명동대성당 곳곳에 여전히 살아 있으며 많은 이들의 삶음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
*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성당 중앙 출입문의 내부 벽에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부조가 걸려 있다.
조각가 임송자 릿다는 1984년 5월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대회 및 103위 시성식’ 때 명동대성당을 방문한 교황의 얼굴을 부드러운 질감으로 표현하였다. 성인 부조 앞의 성수대에서 신자들은 성수를 찍어 머리에 묻히며 기도하면서 교황을 바라본다. 성인 교황도 여전히 온화하면서 신앙심 가득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미소짓는다.
* 프란치스코 교황
명동대성당의 중앙 출입문 내부 벽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부조가 걸려 있다. 교황은 특유의 온화한 미소를 띠고 사람들을 조용히 바라본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더욱 극진히 보살피고 사랑하는 교황의 모습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4년 8월 16일에 열린 '한국 순교 성인 124위 시복식’을 거행하기 위해 우리나라를 방문했다. 교황은 명동대성당에서도 미시를 봉헌하였으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교황의 모습을 본뜬 청동 부조를 제작하였다.
* 십자가의 길
명동대성당의 양쪽 벽에 걸려 있는〈십자가의 길〉은 최종태 조각가의 작품이다. 성당 건립 초기부터 여러 종류의 ‘십자가의 길’이 설치되었다가 1989년 현재의 작품이 설치되었다. 작가는 사실적이면서도 단순한 형태로 작품을 제작하여 신자들이 예수 님께서 걸으셨던 마지막 길을 함께 걷도록 도와준다.
모든 성당에는 내부나 외부에 ‘십자가의 길’이 설치되어 있다. 십자가의 길은 예수 님이 걸었던 마지막 길을 14처로 나눈 것인데, 명동대성당에는 15처인 예수 부활도 설치되어 있다.
십자가의 길을 통해 우리 인간에 대한 예수님의 지고한 사랑을 보고 느낄 수 있다. 예수 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이 길을 걸으시며 우리 개개인을 극진히 사랑하셨고 그 사랑의 힘으로 구원의 새로운 세계를 열어 주셨다.
* 청동 정문
명동대성당 정면에는 세 개의 문이 있다, 성당의 ‘문’은 하느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 마음을 가다듬으며 통과하는 곳이다. 교회 미술에서 ‘3’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상징하며, 세 개의 문은 ‘성부, 성자, 성령’ 하느님을 뜻한다. 사람들은 문
을 통해 성당 안으로 들어가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께 기도하며 그분께 가까이 다가간다. 사람들은 세 개의 문 가운데 양쪽에 있는 작은 문을 통해서 성당 안으로 들어간다. 중앙 문은 주일이나 대축일 미사처럼 큰 행사 때만 열린다.
중앙 문에는 최의순 요한비안네 조각가의 작품이 있다. 작가는 이 문을 3단으로 나누어 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주요 장면을 저부조로 묘사하였다. 특히 교회가 우리 사회에 기여한 덕목을 부각하여 형상화했다.
상단에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미사를 집전한 중국인 사제 주문모 신부와 우리말 교리서《주교요지)를 편찬한 명도회 정약종 회장이 있다. 가운데에는 상복 차림으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과 박해를 피해 길을 떠나는 신자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하단에는 파리 외방 전교회 출신 메스트르 신부가 세운 성영회에서 고아를 돌보는 내용이 묘사되었다.
지친 아기를 안은 여인은 성모 마리아를 떠오르게 한다. 그 옆에는 시 약소에서 병자와 노인을 돌보는 신자들과 약탕관이 있다. 작가는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아 우리나라 초기 교회의 주요 활동 모습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새겼다. 이것은 초기 교회의 정신을 이어받아 오늘날에도 교회가 사랑의 실천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 준다.
그는 3년 동안 혼신의 힘을 다한 끝에 1987년, 높이 2.5m, 폭 1.25m의 작품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성당의 벽돌 구조물이 무거운 청동 문을 지탱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여 설치되지 못한 채 22년 동안 창고에 잠들어 있다가 2009년 초에 이 문을 걸게 되었다.
* 예수 사형 선고 받으심
명동대성당 좌측의 사제관 앞 정원에는 예수님의 거대한 두상이 전시되어 있다. 장동호 프란치스코 조각가가 제작한 〈예수 사형 선고받으심〉이다. 명동대성당 건립 100주년 기념으로 성당 뒷마당에서 조각 전시회를 가진 후에 이 작품을 기증하였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얼굴을 보며 그분이 겪으신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를 깊이 느낄 수 있다. 예수 님은 머리에 날카로운 가시관과 못이 박히는 혹독한 고통을 당하면서도 눈을 굳게 감고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이시는 모습이다.
2천여 년 전 온몸으로 사랑을 실천하시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 님을 눈앞에서 마주 본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예수 님은 돌아가신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고통 속에 숨을 거두셨지만 죽음에 굴복하지 않고, 모든 것을 견뎌 내고 금방이라도 눈을 뜨실 것처럼 보인다. 작가는 예수님의 죽음과 그 죽음을 뛰어넘어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신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 준다.
좌대에 붙어있는 세개의 못은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을 당하셨을 때 양손과 발에 박혔던 것으로, 그분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가운데 한 분이시라는 것을 드러낸다. 또한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이 세상과 모든 사람을 극진히 사랑했다는 것을 말없이 알려 준다.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 김대건 안드레아〉는 이춘만 크리스티나 조각가가 제작한 성상으로, 명동대성당과 연결된 교구청 별관 입구에 있다. 조각가는 김대건 신부가 체포되었을 당시의 모습을 꾸밈없이 묘사했다. 갓과 두루마기도 갖추지 못하고 상투 튼 머리에 홑저고리만 입은 김대건 신부는 십자가나 묵주 등 그리스도교와 관련된 어떤 상징물도 지니지 않았다.
김대건 신부는 오직 하느님 아버지께서 머무시는 천상을 바라보며 기도한다. 또한, 명동대성당과 교구청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보면서 세상과는 전적으로 다른 신앙의 세계로 초대한다. 자신의 생명은 물론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신앙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려 준다. 아울러 그의 부릅뜬 눈과 꽉 다문 입, 거칠고 강인한 표정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 깊고 굳건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자신에게 닥칠 어떤 난관에도 주저앉지 않고 복음 선포에 앞장서겠다는 강한 의지를 볼 수 있다.
한국 천주교회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여러 순교자들의 신앙과 희생을 통해 건립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뒤를 이어 오늘날 5천여 명의 성직자와 1만여 명의 수도자들이 배출되어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있다.
* 예수상
〈예수상〉은 최종태 조각가의 작품으로, 교구청 신관 마당에 서 있다. 부활하신 예수 님께서 양손을 활짝 펴고 명동대성당을 찾는 모든 사람을 축복하며 환영해 주신다.
실제 사람 크기와 비슷하게 제작된 성상에는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려 주는 특별한 상징물이 없다.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평범한 모습이며, 얼굴 또한 낯설지 않다.
그래서 더욱 친숙하게 다가오는 이 성상을 통해 예수 님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28)” 하고 말씀하시는 듯하다.
제5장: 스테인드글라스
인천가톨릭대 교수 정수경
"오늘 스테인드글라스 상자를 뜯는 일을 끝냈다. 그런데 불행히도 많은 것이 깨져 있었다“ - 1897년 9월 1일. 뮈델 주교 일기-
긴 박해 시대를 지내고 마침내 건축된 한국의 첫 서양식 주교좌성당인 명동대성당. 지금 보아도 위풍당당한 그 모습이 건축 당시에는 어떠했을지 머릿속에 그려 본다. 어디서나 보이는 높은 뾰족탑과 멀리까지 울려 전해지는 종소리 그리고 성당의 회색 벽면에 투영된 스테인드글라스의 색 그림자까지 명동대성당의 여러 모습은 당시 신앙인들에게 아름다움의 경지를 넘어 경이로움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명동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는 프랑스에서 제작되어 국내에 유입됐지만, 작품에 남아 있는 서명을 통해 그 사실들 확인할 수 있을 뿐 작품의 계획과 진행 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아쉽게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아직 풀리지 않은 궁금증과 함께 명동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가 그 신비감을 더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1898년 프랑스에서 조선의 종현까지 어떠한 경로로 그 많은 스테인드글라스가 들어올수 있었을까? 정확한 내용은 아직 학인할 수 없지만 작품을 설치하는 것이 결코 녹록지 않았음을 뮈텔 주교의 일기 한 구절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 스테 인드글라스
1898년 최초의 주교좌성당인 명동대성당에 설치된 스테인드글라스는 19세기 유럽의 표현 양식을 직접적으로 수용했다는 점에서 교회사적, 미술사적 의미와 가치가 큰 작품이다. 작품에 ‘GESTA Freres’라는 제작자의 서명이 남아 있어 당시 프랑스 툴루즈의 대표적인 스테인드글라스 제작사인 제스타 공방에서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명동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는 두 차례의 보수, 복원을 거쳤다. 먼저 1984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맞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방한하면서 6·25전쟁 당시 절반 이상 훼손되었던 스테인드글라스 보수, 복원을 이남규가 맡아 진행하였고, 2005~2007년에 장상건이 2차 보수, 복원 작업을 마쳤다.
* 로사리오 십오단
〈로사리오 십오단〉은 명동대성당에 들어서면서 가장 처음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는 스테인드글라스로 제대 뒤편의 다섯개의 창에 설치되었다. 이 도상은 한국 교회와 명동대성당의 주보 성인인 ‘성모 마리아’와 연관이 있다. 각각을 살펴보면 성모 마리아의 다섯 가지 기쁨을 나타내는 성모 영보,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예수 탄생, 주님 봉헌, 예수를 성전에서 찾으심을 담은 ‘환희의 신비 5단’과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을 나타내는 겟세마니의 기도 ,매 맞으시는 예수, 가시관을 쓰신예수, 십자가를 지신 예수,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묘사한 '고통의 신비 5단’, 그리고 예수 부활, 예수 승천, 성령 강림, 성모 승천, 성모 대관으로 이어지는 ‘영광의 신비 5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뾰족 아치형으로 된 창의 상. 중,하 세 부분에 타원형에 가까운 구획을 두어 모두 열다섯 개의 장면으로 구성했으며 이야기의 순서는 제대를 바라보고 왼쪽에서 오른쪽 창으로, 각 창의 위에서 아래로 진행되고 있다.
각 장면 밑에는 이야기의 진행 순서를 알리는 번호가 로마자로 적혀 있고 위아래는 뾰족 사잎원(네개의 잎으로 둘러쌓인 형태의 창)과 포도 잎을 비롯한 각종 식물 문양이 장식된 구획을 두어 장면을 구분했다.
각각의 장면에는 바닥의 타일, 계단,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 등에서 원근법을 도입해 공간의 깊이감이 강조된 르네상스 시대 이후 유럽 스테인드글라스의 표현 양식을 보여 준다, 인물 표현에서도 옷 주름과 얼굴 등에 음영을 강조해 중세 스테인드글라스에서 느낄 수 있는 명료함보다는 3차원의 공간감이 강조된 회화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 아기 예수 탄생과 동방 박사의 경배, 예수와 열두 사도
명동대성당의 좌우 트랜셉트 창은 맨 위쪽에 있는 장미 창을 중심으로 두 개의 2연 창이 나란히 배치된 4연 창으로 이루어져 있다. 명동대성당에서 유일하게 4연 창으로 되어 있는 트랜셉트 창에는 나란히 배열된 네 개의 뾰족 아치 창을 하나의 장면으로 하여 〈아기 예수 탄생과 동방 박사의 경배〉와 〈예수와 열두 사도〉가 각각 표현되어 있다.
〈아기 예수 탄생과 동방 박사의 경배〉와 〈예수와 열두 사도〉는 〈로사리오 십오단〉과 마찬가지로 사실적인 표현이 주를 이루나 다소 어색한 배경 처리로 3차원의 공간감은 강조되지 않는다, 이는 6·25전쟁으로 절반 이상 훼손되었던 스테인드글라스의 정확한 원형 확인이 어려운 가운데 보수, 복원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결과로 보인다.
상단 좌우 맨 끝 창에는 두 천사를 배치하고 각종 식물 문양으로 장식했으며 맨 하단에는 역시 포도 잎, 떡갈나무 잎과 같은 식물 문양 장식을 배치했다. 그리고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를 집약적으로 보여 주는 성경 문구가 라틴어로 쓰여 있다.
* 명동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에 표현된 식물 모티브
명동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에는 각 창마다 다양한 패턴의 식물 문양이 도입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여덟 개의 구획으로 이루어진 장미 창이며, 명동대성당의 장미 창은 비록 작은 규모이기는 하나 고딕 성당의 가장 특징적인 요소라 할 수 있다.
중앙의 원형 꽃문양을 중심으로 모두 여덟 개의 꽃잎이 배열된 형태를 취한 장미 창은 명동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에 두루 쓰인 포도 잎을 모티브로 하고 있는데 각각의 잎이 물고기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여기서 물고기는 초기 신도들의 신앙 고백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상징한다.
또한, 숫자 ‘8’은 그리스도교에서 부활을 상징하는 수로 여기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예루살렘에 입성해서 8일째 되던 날 무덤에서 부활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덟 개의 포도 잎으로 이루어진 명동대성당의 장미 창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구원의 메시지를 함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명동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에 많이 사용된 모티브는 포도나무 잎이다. 포도나무 잎은 떡갈나무, 단풍나무 잎 등과 함께 중세 그리자유' 창에 즐겨 사용되던 나뭇잎 문양이다.
이러한 나뭇잎 문양은 스테인드글라스의 장식적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 도교적 상징으로 표현된 것이기도 하다. 특히 포도는 성경에서도 많이 사용된 비유로 하느님과 인간의 긴밀한 관계를 표현하는 데 자주 사용되었다. 이러한 포도 잎이 신자들의 시선이 가깝게 닿을 수 있는 신자 석 창의 문양으로 쓰인 것도 하느님과 인간을 이어 주는 일종의 매개로 작용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동일한 그리자유(거의 무색에 가까운 유리에 회색계통의 채도가 낮은 한 가지색으로 기하학적 문양이나 식물 모티브를 그려 장식하는 스테인드글라스 표현기법) 한가운데의 백합 문양은 명동대성당의 주보 성인인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모 님을 상징하는 백합 문양을 아케이드보다 높은 클리어스토리에 둔 것은 ‘천상의 모후’이신 성모 님의 이미지와도 일맥상통한다.
* 44차 세계 성체 대회 기념 스테인드글라스
주 출입구 상단 반원형 창에 설치된 이남규의 스테인드글라스는 1989년 서울에서 개최된 제44차 세계 성체 대회를 기념하여 제작되었다. 이 작품은 명동대성당에서 유일하게 현대적으로 새롭게 제작된 스테인드글라스이다. 중앙에 자리한 성체를 성령의 세 비둘기가 에워싸고 있고 가장자리에는 밀 이삭과 포도송이가 추상적으로 표현되었다. 이 작품은 오방색을 기조로 한 한국적인 색채와, 작품에 깊이를 더해 주는 이남규 작가 특유의 글라스 페인팅 기법이 잘 드러나 있다.
혜화동 성당에도 이 작품과 유사한 구성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설치된 바 있다.
이남규는 이 작품을 설치하기에 앞서 1984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방한을 맞아 명동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의 보수, 복원을 진행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