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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6년 遊金烏山錄 이하(李馥,1626~16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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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陽溪集> 한국학중앙연구원 발행
탈초 : 카페지기.
역자 : 카페지기(김진곤)
遊金烏山錄
이하(李馥,1626~1688)
金烏山爲鎭於善府 而名於嶺服羣山之中. 環山下數三百里之地 四五六州之人. 苟有高舉壯遊之標致者 蓋莫不以造觀爲快顧. 余家干甘之縣 距山僅一舍地 自免丱齔卽抱反裘之歎者 殆將三十年每選侶欲往. 輒被事魔 恐遂成差池以爲千古之恨
금오산은 선산부의 진산(鎭山)으로 영남에 있는 여러 산 중에서도 이름이 났다. 산 아래 둘레는 삼백 리 가량의 지역에 4~6주(州)에 사람이 살고 있다. 가령 장한 유람을 들고 표식에 이르고자 하는 이는, 대개 이산을 살펴보고 흔쾌히 돌아보게 된다.
나의 집은 감문현에 있어 이 산과의 거리는 근 삼십 리에 있지만, 유년기를 면할 때에부터 경중을 알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었는데, 근 삼십년이 지났지만 매번 벗들과 가고자 하였지만, 번번이 마가 끼고 차질이 생겨 천고지한이 있었다.
*일사(一舍) : 30리 *반구(反裘) : 경중과 본말을 알지 못한다는 비유에서 온 말이다. 한(漢)나라 유향(劉向)의 《신서(新書)》 〈잡사(雜事) 2〉에, “위 문후(魏文侯)가 길에서 모피 옷을 뒤집어 입고 꼴을 지고 가는 사람을 보고 그 이유를 묻자, 털을 아끼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문후가 ‘속가죽이 다 닳고 나면 털이 붙어 있을 데가 없게 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처사다.’라고 말하였다.” 하였다. *차지(差池) : 고르지 아니하여 차이가 남.
是年秋 大決于心 剋日將行 一二同志聞而可之 因爲不約之約 八月二十五日癸酉 遂會靈妙寺. 寺卽山之西麓而在縣東三十里 而近約人皆以家往赴焉. 李精甫 崔器之 薛一之 李華重 李德哉 李德哉 金伯久 李時甫 申子壽 金允述及余 凡十一員. 伯久自善山 子壽自商山 其餘皆縣人也. 於僧房做逹夜話 習日甲戍屬一之 題名于法堂北楣. 將上山 器之以故辭 獨向星山 於是十人各送騎還遂.
금년 가을에는 굳게 다짐하고 결행할 날을 정하니 이 한두 명의 동지들이 듣고 가능하다고 하여, 약속한 바도 없이 약속하여 8월 25일 계유에 영묘사(靈妙寺)에 모이게 되었다. 이 절은 금오산 서쪽 기슭 즉 현(縣) 소재지에서 동쪽으로 삼십 리에 있어, 약속한 사람들 대부분은 대개 집에서 와서 도착하였다.
이정보(李精甫), 최기지(崔器之), 설일지(薛一之), 이화중(李華重), 이덕재(李德哉) 이미중(李美中), 김백구(金伯久), 이시보(李時甫), 신자수(申子壽), 김윤술(金允述) 및 나를 합하여 모두 열 한 사람이었다. 김백구는 선산(善山)에서, 신자수는 상산(商山)에서 왔으며, 그 나머지는 모두 이 고을 사람이다.
승방(僧房)에서 담소하다 밤을 새우고 다음 날 갑술에 설인지에게 부탁하여 법당의 북문설주에 이름을 써붙 인 뒤에 산으로 올라가려고 하니, 최기지가 사정이 생겼다하여 성산(星山)으로 혼자 떠나고, 나머지 열 사람은 각자 타고 온 말을 돌려보냈다.
携笻聯被而步步 自寺後山 下平地邐迤 而上步步 皆向上進去. 遇一石必憩 度一岡輒息 不但爲脚怠而休其力. 所以遊目聘懷 收拾風光 不可與竆曰 依程趁期趲隊者同也. 至山城十步 許巖石矗矗 橫盤山脊. 巖間泉如窟水甚淸洌 及班荊酌水澆飯而食.
지팡이를 짚고 한 걸음 한 걸음 절 뒷산에서 비스듬한 평지를 내려와, 한걸음씩 위를 향해 나아갔다. 바위 하나를 만나면 반드시 쉬고 언덕 하나를 지나면 숨을 돌리며 다리가 피곤하지 않게 하고 힘을 쉬게 하였다. 소위 눈을 돌려 이것저것을 보면서 풍광을 수습하는 것은 하루 종일 할 수 없기 때문에, 일정에 따라 나아가며 대오를 따라 쫓아가는 것이 같았다.
산성(山城)앞 십 보쯤에 이르러 우뚝솟은 바위들에 들어가니 가로 놓인 바위가 산등을 이루었다. 그 바위틈으로 샘물이 솟아오르는데 마치 깊숙한 굴속에서 흘러나오는 약수처럼 매우 깨끗하고 차가웠기에 자리를 깔고서 물을 떠와서 밥을 말아 먹었다.
*반형(班荊) : 옛 친구를 만난 기쁨을 표현할 때 쓰는 말이다. 춘추 시대 초(楚)나라 오거(伍擧)가 채(蔡)나라 성자(聲子)와 세교(世交)를 맺고 있었는데, 두 사람이 우연히 정(鄭)나라 교외에서 만나 형초(荊草)를 자리에 깔고 앉아서[班荊] 옛날이야기를 주고받았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春秋左傳 襄公26年》
過午入城登西門樓 酌秋露一巡 憑軒送目 眼界快爽 己覺非塵臼中心事. 李謫仙詩 “送此萬里目 曠然散我愁”一句政若摹出今日事也. 自靈妙來路 轉山腰不知幾百曲也. 第一曲歷第二曲歷第三四以至登斯樓也. 所到益高 所見益遠 書經曰, ‘若升高必自卑’ 孟子曰, ‘孔子登東山而小魯 登太山而小天下’ 經傳中開示 後人心目處覺得最親切有味也.
정오가 지나서 성(城)에 들어가 서문루에 올라앉아 추로주를 따라 돌려 마시고 난간에 기댄 채 두루 살피니, 안계(眼界)가 너무도 상쾌하여 이미 속세속에서의 적정거리가 사리즌 걸 깨달았다. 이적선이 읊은 시에 “이곳에 와서 만 리나 되는 곳에 눈을 보내니 가슴이 확 트여 수심이 흩어지네.”라고 한 구절이 바로 오늘의 이 경치를 묘사한 것 같았다.
영묘사에서부터 올라오는 길이 산허리를 돌아온 것이 몇백 굽이인지 알 수 없고, 한 구비를 지나면 다음 둘째 굽이, 다음 셋째, 넷째 굽이를 돌고 돌아 이 서문루에 오르게 되었다.
더 높이 오르면 더 멀리 볼 수 있는 바를, 『서경』에서 이르기를, ‘만약 높이 오르려면 반드시 낮은 데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하였고, 맹자가 이르기를 ‘공자가 동산(東山)에 올라가서 노(魯)나라가 작다고 하였으며, 태산(泰山)에 올라가서는 천하가 작다.’고 하였는데, 경전 속에 보여주는 것은 후인들이 마음과 눈을 두는 곳을 깨닫는데 가장 친절하게 설명하여 의미가 있다.
*추로주(秋露酒) : 추로백(秋露白)이라고 하는 술로, 홍만선(洪萬選)의 《산림경제(山林經濟)》 〈치선(治膳)〉에 이르기를 “가을 이슬이 흠씬 내릴 때, 넓은 그릇에 이슬을 받아 빚은 술을 추로백이라 하니, 그 맛이 가장 향긋하고 톡 쏜다.”라고 하였다.
酌罷遂佛衣起 循堞而西登金山信地將臺 其埈雄峭奇之狀 有未易形容者. 山高日暮 風力漸緊 凛凛然不可久留 迤臺而下經 別將館臨池暫憩. 因入宿鎭南寺 方到寺未飯罷甚, 曲肱成睡睡 覺同行諸人呼韻促製 乃題近體一律. 夜一更聯枕就臥 別監自外方還 聞余來卽求見 門僧迎報就睡乃還.
한 잔씩을 마시고 옷을 털고 일어나 성가퀴를 돌아 서쪽 김산(金山) 관할 장대(將臺)에 오르니, 그 웅장하며 기이하게 생긴 형상은 형용할 수가 없었다. 산이 높고 날이 저무니 바람이 점점 세차게 불어와, 추워서 오래 머물수가 없었기에 대를 돌아 오솔길로 내려오면서 별장관 임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진남사(鎭南寺)에 들어가 묵기로 하였기에, 절에 도착하자마자 밥도 먹기 전에 피곤이 몰려와 팔을 베고 졸다가, 동행한 이들이 운(詩韻)을 부르며 시를 짓기를 재촉하는 것을 깨닫고 이에 근체시(近體詩) 한 수를 지었다. 밤이 벌써 초 경이 되어 나란히 잠자리에 누웠는데, 별장이 나들이에서 돌아와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와서 만나기를 청하여, 문 앞의 스님이 맞이하여 취침 중이라고 보고하자 돌아갔다.
乙亥. 早起視之 密雲四合 山岳潛形 不崇朝下雨之微. 諸同行皆以阻雨爲慮. 余笑謂曰, “昔韓文公遊衡嶽能以至誠開其雲. 古今人同不同不可知 十室之邑必有忠信 今吾儕十人中 安知不有感通之誠如古人者乎.”因命酒觀碁. 別將來見請與同遊許之. 別將姓名鄭潤立云.
을해일. 일찍 일어나 보니 짙은 구름이 사방에 깔려 산은 그 자태를 감추었고, 아침이 지나지 않아 비가 조금씩 내렸다. 동행한 여러 사람들이 비 때문에 막힐 것을 걱정하여 내가 웃으며 말하기를, “옛날에 한문공(한유)이 형산(衡山)에서 노닐 때 지성을 드려 구름이 걷히게 하였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이 같으면서도 달라 알 수 없지만, 열 집이 사는 작은 고을에서도 반드시 성실하고 믿을만한 이가 있다고 하였으니, 우리 열 사람 중에서도 하늘을 감응시킬 만한 지성이 있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느냐”라고 말하고, 술을 시키고 바둑을 두었다. 별장(別將)이 찾아와서 함께 유람하기를 청하므로 허락하였는데 별장의 성명은 정윤립이라고 하였다.
*십실지읍핑유충신(十室之邑必有忠信) : 《논어(論語)》 공야장편(公冶長篇)에, “공자가 이르기를, ‘작은 고을이라도 반드시 구(丘 공자의 이름)처럼 충신(忠信)한 사람은 있으나 구처럼 학문을 좋아하지는 못한다’[子曰十室之邑必有忠信如丘者焉, 不如丘之好學也]”라고 하였다.
旣朝食出寺門 天地開霽 風日晴朗. 登大將臺 乾端坤倪 眼力所極 千奇萬勝 軒豁呈露 無一點蔽遮 前言之戱似成眞讖 相與一囅而罷. 臺有扁額曰制勝臺 字如棲鴸 畫頗蒼古 問之乃堂舅黃上舍公所書也. 僧將居其臺放出山下 在遂吟詩一律. 行到南門樓酌一盃 題名因書 臺中所吟詩一之筆也.
아침 식사를 마치고 절문을 나서니, 천지가 가지런히 다 보이고 바람이 그치고 날씨가 화창했다. 대장대(大將臺)에 오르니 하늘 끝자락과 땅 끝까지 눈에 보였는데, 온갖 기이하고 좋은 경치가 탁 트이어 드러내니 한 점 가려진 것 없이 다 드러나 보였으니, 아침에 농담으로 했던 말이 마치 예언한 것처럼 이루어져 서로 바라보며 한번 크게 웃었다.
대(臺)의 편액에 제승대(制勝臺)라고 쓰여 있는데, 글자가 솔개가 깃들어 있는 듯 필획이 자못 창고(蒼古)하여 물어보니, 내 외당숙 황진사공(黃進士公)이 쓴 글이라고 하였다. 이 대(臺)에 사는 승장(僧將)은 산 아래에 출타하였기에 머무는 동안에 율시(律詩) 한 수를 읊었다. 남문루(南門樓)에 이르러 술을 한 잔 씩 하면서 글로 써서 제명하였는데, (장군)대에서 읊은 시를 일지가 붓으로 썼다.
自樓轉緣南城 十步一休上見月峯. 峯戴石而無土 其圓尖陡高之勢 雖若小下於若思峯 其斬截巖巖之象 决無阿附意可敬也. 乃作絶句二章因所見以起興峯上酌一巡. 酌罷上控遠臺. 臺在見月之上若思之下 破瓦遺礎皆可尋見 口號絶句一首.
남문루에서 남성(南城) 가장자리를 돌아가면서 열 걸음에 한 번씩 쉬면서 현월봉에 올랐다. 정상에는 흙은 없고 바위로 덮여 있는데, 그 둥글고 뾰족하게 높이 솟은 모양은 비록 약사봉(若思峯)보다는 작고 낮으나, 그 베어낸 듯한 형상이 조금도 아첨하는 기색이 없으니, 참으로 공경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절구 두 장을 지어 소감을 피력하는데 흥이 일어 정상에서 한 잔 씩 돌렸다. 술자리를 파한 뒤에 공원대(控遠臺)에 올라갔다. 이 공원대는 견월봉의 위쪽과 약사봉의 아래쪽 중간에 위치한 것으로 깨어진 기왓장과 주춧돌만 남아 있을 뿐이었기에 입으로 절구 한 수를 읊었다.
遂登若思峯. 峯之勢直挿天半 逈出雲表乃金烏山第一峯也. 以城西前後所經歷記 或通於西而碍於東 或通於北而碍於南 或通於三面而碍於一方 而若思則前無敵而後無對 左如朝而右如衛, 自東自西自南自北 無小無大無遠無近 莫不拱揖環抱 奔走踊躍. 呈奇逞勝於一擧目之下 眞坡翁所謂 “偉哉. 造物眞豪縱攫土搏沙爲此弄者也.” 依松而立据而坐 朗爾而吟 劃然而嘯 不覺骨爽魂淸 滌盡煙火胸襟. 神仙無則己如有之 所謂 飄飄乎若羽化而登者卽此之謂也. 乃作詩一遍有 “飄然觀羽化 不覺世緣空 ”之句此乃說 出眞興致也.
드디어 약사봉에 올랐다. 봉우리가 반 공중에 똑바로 꽂힌 기세로 멀리 구름위로 머리를 내밀고 있었는데 이곳이 금오산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다.
산성(山城)의 서쪽에서 앞뒤로 지나온 경로를 되돌려 생각해보니, 어떤 곳은 서쪽이 통하고 동쪽이 막혔으며, 어떤 곳은 북쪽이 통하고 남쪽이 막혔고, 어떤 곳은 삼면이 통하고 한 면이 막혔다. 약사봉은 앞뒤로 대적할 봉우리가 없으며 왼쪽은 모든 봉우리가 조회하듯 머리를 숙이고 오른쪽은 호위하듯 둘러섰으며, 동서남북 어디에서나 크고 작고 멀고 가깝고 할 것 없이, 손을 맞잡고 읍을 하며 둘러싸고 뻗어 달리며 춤을 추며 뛰어 오르는 듯하였다. 한번 눈을 돌려 내려다보면 기이하고 뛰어난 승경을 드러나 보이니 참으로 소동파(蘇東坡)가 말한 “위대하도다. 조물은 진실로 호탕하고 거리낌 없어서, 흙 다지고 모래 뭉쳐 이렇게 장난을 하였다네.”라는 것과 같았다.
소나무에 기대고 바위에 걸터앉아 낭낭하게 읊으며 휘파람 빼어부니, 나도 모르게 뼛속까지 상쾌하고 정신이 맑아져서 가슴속 사람 흔적을 말끔히 씻겨 나갔다. 신선이 없으면 몰라도 신선이 있다면 “바람에 나부껴서 하늘에 올라가는 것 같다.” 는 말은 이를 두고 한 것 같다.
마침내 시 한편을 지었는데 ‘표연히 우화를 바라보며 세상 인연 공(空)이란 걸 깨닫지 못했네.’라는 구절인데 이것은‘참된 것에서 나온 흥치’를 설명한 것이다.
*연화(煙火) : 사람이 살고 있는 집에서 불을 때어 나는 연기라는 뜻으로, 사람이 사는 기척 또는 인가를 이르는 말
直峯之下有庵 亦以若思名. 尋庵向下路極危僻 諸同行莫利先入 余與華重乃敢下 餘人皆從之來 惟精甫與別將留憩峯頭 余笑吟二客不能從之句. 遂至庵 庵廢己久 有石佛一軀 露坐崖广下 是所謂若思者非耶. 傍有積瓦朽材 三面石壁削立 高與峯齊, 惟前一面坼罅如門而林湥. 路險蒙翳 犖确幽閴阻隘 盡日不見人來往. 其通望之快 與峯上所見 不可同日語 而其奥邃窈靜亦足爲奇觀之一助. 柳柳州所謂 遊之適,大率有二者驗矣. 乃次曺適庵韻 使華重並原韻書巖壁上仍題名 其下酌酒痛飮
봉우리 바로 아래에 암자가 있는데 약사암(若思菴)이라 하였다. 암자를 찾아 내려가는 길이 매우 가파르고 위험하여 동행하는 사람이 모두 앞서기를 꺼려하므로, 내가 이화중(李華重)과 함께 과감히 내려가니 나머지 사람들도 뒤따라오는데, 오직 이정보(李精甫)와 별장만이 정상에 머물며 쉬고 있어 내가 웃으며 “두 분만이 따라오지 못하는구나.”라고 구를 읊었다.
암자에 도착하니 암자는 오래전부터 폐허가 되었고, 석불 한 구만이 절벽을 지붕 삼아 노천에 앉아 있는데, 이것이 소위 약사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곁에는 기와와 썩어가는 재목이 잡다하게 쌓여 있고, 삼면은 깎아 자른 듯한 절벽이 산봉우리와 가지런히 높이 솟아 있었는데, 오직 앞쪽 한 면만 대문처럼 터져 있으나 숲이 깊었다. 길은 험한데 나무들이 덮혀 있고, 험한 돌들이 그윽하여 가로막혀 있어 하루 종일 오가는 사람을 볼 수 없었다. 그 전망의 통쾌함이 산봉우리 위에서 보던 것과는 같은 말로 할 수 없으니, 그 깊숙하고 고요한 정취 역시 진귀한 볼거리의 하나로 충분 하였다.
당나라 유종원(柳宗元)이 말한바 있는 유람하는 즐거움 중 대략 두 가지를 경험하게 되었기에 조적암(曺適菴)이 운을 이어서 시를 짓고, 이화중을 시켜 원운과 함께 암벽 위에 쓰고 제명(題名)한 후에 그 아래에 모여서 술을 흠뻑 취하도록 마셨다.
*노좌(露坐) : 노천(露天)에 나앉는 것. *몽예(蒙翳) : 수목으로 덮이어 있음.
自前面嵓竇取路穿林越巘入寶峯寺. 精甫與別將自峯頭徑行先到寺待之. 別將乞米寺僧炊飯以饁同行人. 寺在山腰 地形絶奇 長江橫其左 疉巒聳其後 洞壑清幽 景致灑落, 前有老檜高可累百尺. 林楓巖菊 白白紅紅 如濃如薄 可賞可愛. 壁間有李光叔詩 次其韻書其下. 饁罷日己夕 轉向山北 上北門樓題名 酌酒相屬. 徙倚危欄 瞻望長安 則雲霞掩暎之間 鳥嶺橫截環亙如隔屛幛 自中原月岳以上不可得 而見焉指點髣像猶能記得白岳木覓之所在也. 乃吟 “北極懷明主 危樓望北辰 ”之句 而餘想輪囷有不能自己者也.
앞쪽의 바위틈 사이에서 길을 취해 숲속을 뚫고 산 고개를 넘어 보봉사(寶峯寺)에 들어갔다. 이종보와 별장은 산꼭대기에서부터 지름길로 와서 먼저 도착하여 기다렸고, 별장은 스님에게 쌀을 빌려 밥을 지어서 동행한 사람들에게 가지고 왔다.
절은 산허리에 있는데 지형이 빼어났다. 큰 강이 그 왼쪽에 가로 놓여있고, 겹겹이 산들이 그 뒤에 솟아 있었는데, 계곡이 맑고 그윽하며 경치가 시원하였으며 앞에는 노송나무가 있는데 수 백 척이나 될 듯 하였다. 단풍 숲과 바위틈의 국화는 희고 붉고 짙은 듯 옅은 듯, 볼만하고 사랑할 만 했데, 벽 사이에 이광숙(李光叔)이 지은 시가 있기에 그 운을 이어서 시를 읊고 그 아래에 써넣었다.
야외에서 식사를 마치니 해가 이미 기울어, 산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북문루에 올라서 제명(題名)을 하고 술을 따라 서로 권하였다. 난간으로 옮겨 몸을 기대어 멀리 서울을 바라보니, 저녁놀 아득한 가운데 조령이 고리를 걸친 듯 가로 놓여 병풍으로 가린듯하여, 중원의 월악산(月岳山)부터 그 이상은 보이지 않고, 가리키는 지점을 보니 어렴풋이 백악산과 목멱산이 있는 곳인 것 같았다.
이에 “대궐에 계시는 성상을 그리며 누각에 높이 올라 북극성 바라보오.”라고 한 시구를 읊으니, 어려운 일 떠올라 나 자신을 어쩔 주체할 수 없었다.
*윤균(輪囷) : 구부러진 바퀴라는 뜻으로 어려움에 봉착했음을 말한다.
視暮入城 又宿鎭南寺. 丙子 出自北門直道龍澤寺 寺前有屹松臺 臺上朋息 移晷乃入寺. 寺側有瀑水 從巖洞出澄泓清澈成潭於盤石上 狀同主屹龍湫 寺名龍湫以此也. 次白沙相公朴淵韻. 午食別別將 卽向華嚴寺 寺距龍澤咫尺亦瀟爽可遊. 使一之題名. 蓋鎭南 寶峯 北城樓 龍澤及此皆有題名而皆出一手也.
해지는 것을 보면서 성에 들어가 다시 진남사(鎭南寺)에서 잤다. 다음 날 병자(丙子)에 북문에서 나와 용택사(龍澤寺)에 바로 이르니, 절 앞에 흘송대(屹松臺)가 있어 대위에 올라 벗들과 휴식을 취하다가 그늘이 옮겨 가서 절에 들어갔다. 절 곁에 폭포가 있는데, 바위틈에서 흘러 내리는 맑고 깨끗한 물이 반석 위에 못을 이루었다. 그 모양이 주흘산(主屹山) 용추(龍湫)와 같아서 절 이름을 용택(龍澤)으로 하였다. 백사 상공의 박연폭포 운을 이었다.
점심을 먹은 뒤에 별장과 작별하고 곧 화엄사(華嚴寺)로 향하였는데, 절은 욕택과 지척 간인데 역시 고요하고 상쾌하여 여행할 만 하였다. 설일지에게 제명하게 하였는데, 진남 보봉 북성루 용택과 이곳 모두 제명하였는데 모두 한 손에서 나왔다.
暫休卽行尋到道詵窟下 窟在千尋絶壁上 人跡難到處 問詵能出入是窟否 老釋答以“詵師於窟中能造室以居”云. 殊涉傀誕也. 窟門而下有細徑 橫壁如拖帶 遊山人或有能攀緣入窟中者云 是則不知命者 其示立巖墻者 殆有甚焉. 嗚呼唏矣. 窟傍有一線 流從壁頂 硯滴而下下 不依壁懸在空中始滴如散雪落地 方知爲水眞異觀也. 乃口吟一絶 使華重披藤書石 書後覆其藤題名亦如之 蓋不欲人之知也.
잠깐 동안 휴식을 끝내고 나아가 도선굴(道詵屈) 아래에 이르렀다. 굴은 천장(千丈)이 넘는 절벽 위에 있어 사람의 발길이 다다르기 어려운 곳이어서 도선이 어떻게 이 굴을 드나들 수 있었느냐고 물으니, 늙은 스님이 대답하기를 “도선대사는 이 굴에서 집을 짓고 살았다.”라고 하였는데, 아주 황당하였다.
굴문 아래로 좁은 길이 절벽에 비스듬히 띠를 두른 듯이 가로놓여 있어, 산을 여행하는 사람 중에는 간혹 가장자리를 잡고 굴속으로 들어가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이것은 운명을 모르는 것으로, 서 있는 암장을 보면 매우 위태로운데, ‘아!’하고 탄식만 나올 뿐이다.
굴 옆으로 한 줄기기의 물이 암벽 정상에서 흘러내려 방울방울 적시며 떨어지는데, 벽에 매달려 있지 않고 공중에서 적시는 모습이 눈이 흩어지는 것 같아, 물이 참으로 기이한 관경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에 절구 한소리를 읊어 이화중을 시켜 등덩굴을 재치고 돌에 글을 쓰게하고, 글을 쓴 뒤에 등덩굴로 제명을 덮어두었는데, 대개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한 것이다.
窟之南數十步有瀑布亦奇壯可觀. 沿暴而下 上外城門樓題名 卽尋寒碧樓乃冶隱吉先生晩歲考槃之地也.
年代旣遠 荒墟遺址雖不可識其堂房墻砌 而徘徊景慕之餘肅然 若淸風爽韻之襲人也.
有苦竹數叢 尙能耐存於苯尊 薈蔚之中其寓物興感之懷 惡可以泓穎盡哉.
굴의 남쪽 수십 보 사이에 폭포가 있어 그 장관이 볼만하였고 폭포를 끼고 내려와서 외성(外城)의 문루에 올라 제명(題名)하였다. 곧 한벽루(寒碧樓)를 찾아갔는데 야은 길재 선생이 만년에 은일한 곳이다. 그 연대가 이미 요원하여 허물어져서 유허만 남아 있어 그 집과 담장을 식별할 수 없으나, 거닐어보면 우러러 회상하며 공경심이 숙연하게 일어나고, 맑은 운치가 사람에게 다가오는 듯하였다. 고죽 몇 포기가 여전히 잡초 틈에서 견디고 있는데, 울창한 잡목 가운데 그 대나무가 주는 감회를 어찌 글로 다 할 수 있겠는가.
*홍영(泓穎) : 홍(泓)은 벼루의 별칭(別稱)인 도홍(陶泓)이고, 영(穎)은 붓의 별칭인 모영(毛穎)인데, 여기서는 필찰(筆札)의 뜻으로 쓰였다.
諸同行曰, “子於此不可無一語” 因誦旅軒張先生 “竹有當年碧 山依昔日高 淸風猶緊髮 誰謂古人遙 ”之詩 而使余次其韻遂歌次之凡三篇. 乘曛入玉林寺 人馬皆來候於寺. 寺舊名大穴 在寒碧樓傍 移于東南五里地改今名.
동행이 모두 말하기를 “자네가 여기에 와서 어찌 한마디 말도 아니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므로, 나는 여헌 장현광 선생의 “대나무는 지금도 푸르고 산은 옛날과 다름없이 높이 솟아, 맑은 바람 아직도 머리카락 날리는데 누가 옛사람을 멀다고 하겠는가.”라는 시를 읊으니, 그 운을 따서 지으라고 하므로 마침내 그 운을 따서 세 수를 지어 읊었다.
저녁 무렵에 옥림사(玉林寺)에 들어가니 사람과 말이 모두 와서 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옥림사의 옛 이름은 대혈사(大穴寺)이며, 한벽루 곁에 있었는데 동남쪽 오 리 쯤에 옮겨 세우고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丁丑 自曉雨. 作乃題一節以示同遊曰, “衡雲己喜開山斗 白雨寧憂阻愼齋 踏盡金烏山上下 滿山秋興眼中皆”雨不止皆留宿 行中糧絶 各倩僧分送遠近 乞米而食 亦遊山之一興味相與供笑. 乃呼韻作近體一首贈別諸友.
정축일. 새벽부터 비가 왔다. 칠언절구 한 수를 지어 보이면서 “형산의 구름 이미 기쁘게 산두가 열렸는데 소낙비가 재계 막는 걸 어찌 걱정하리오. 금오산 위아래를 남김없이 유람하고 울긋불긋 가을 흥취 눈에 가득 담아왔네.”라고 읊었다.
비가 그치지 않아 모두 유숙하였다. 여행 중에 양식이 떨어져서 시주승들을 원근에 나누어 보내, 쌀을 빌려서 밥을 지어 먹었는데 이 또한 ‘여행의 한 가지 흥미’라고 서로 말하며 함께 웃었다. 이에 운(韻)을 불러 근체시 한 수를 지어 여러 벗에게 이별로 주었다.
*형운(衡雲) : 형산(衡山)의 구름이다. 형산은 오악(五嶽)의 하나인 남악(南嶽)으로 호남성(湖南省)에 있다. 소식(蘇軾)의 〈조주한문공묘비(潮州韓文公墓碑)〉에 “공의 정성이 형산의 구름을 개게 하였으나 헌종의 미혹함은 돌리지 못하였고, 악어의 포악함을 길들였으나 황보박ㆍ이봉길의 비방은 그치게 하지 못하였고, 남해의 백성들에게 믿음을 받아 사당에서 백세토록 제향을 받으나 그 몸은 하루도 조정의 위에서 편안히 있지 못하였으니, 공이 능한 것은 하늘의 일이요, 능하지 못한 것은 인간의 일이었다.〔公之精誠 能開衡山之雲 而不能回憲宗之惑 能順鰐魚之暴 而不能弭皇甫鎛李逢吉之謗 能信於南海之民 廟食百世 而不能使其身一日安於廟廷之上 蓋公之所能者天也 其所不能者人也〕” 하였다. 《古文眞寶後集 卷8》
戊寅. 早朝冒雨散歸 將歸諸同行屬余爲遊山錄 因謂曰, “是行入山之後 少無阻鬱觀覽可謂富矣. 而惟東陽一寺未果見 是爲慊然於心也.” 余曰, “諸君之言太苛矣. 昔周愼齋遊小白山只見其一洞而不能見其二洞, 退溪先生繼愼齋而遊見其二洞 遂置其一洞而曰以俟後日之遊. 二先生者非不知窮探極搜 不遺毫末之爲快也. 豈非以好事多取造物 所忌物色分留 高人能事天慳鬼秘之境 不可以一舉而盡之故也耶.
무인일. 아침 일찍 비를 무릅쓰고 출발하려는데, 돌아가는 여러 동행인들이 나에게 유산록(遊山錄)을 지을 것을 부탁하며 말하기를 “이번 여행은 산에 들어온 후에 조금도 장애받지 않고 충분히 관람할 수 있었으니 풍성하다 할 만하다. 오직 동양사(東陽寺) 한 곳을 보지 못하고 가는 것이 마음에 꺼림칙하다.”라고 하여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제군의 말이 너무 가혹한 것 같네. 옛날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이 소백산을 유람할 때 다만 그 한 골짜기만 구경하고 그 나머지 골짜기는 보지 못한 채 돌아왔고, 퇴계 선생도 주신재를 이어서 그 두 개 골짜기를 유람하면서, 그 첫째 골짜기에 이르러 말하기를 “뒷 날에 유람할 것을 기다린다.”라고 하였으니, 이 두 분 선생이 끝까지 탐색하여 모두 구경하는 것을 알지 못해서 조금의 쾌거도 남기지 않은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좋은 것만 많이 취하고 싫어하는 물색은 남겨둔 것은, 고인들께서 능히 하늘이 아껴둔 비경을 볼 수 있지만 한 번에 다 보는 것은 불가하다고 여겼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今吾儕無一日滂沱之阻 有三晝淸明之快能 踏盡千萬仞高峯, 觀盡千萬重勝狀. 東陽一寺不特九牛之毛 不見而還 曷足爲病 是亦先輩俟後之好意也. 况遊山之法匪直爲眼孔 所見峯巒之明秀 巖㕡之奇古 寺刹之瑰麗 而己其中喫緊事有三. 一曰, 山之大脉絡. 二曰, 山之大形體. 三曰, 山之大功用. 不務領略此三者 而惟屑屑焉. 一僧舍之未見爲意 則不幾於放飯而問齒決乎. 今請爲諸君言之.
지금 우리들은 하루도 비가 주룩주룩 내려 걱정한 적 없고 사흘 동안 날씨가 청명하고 쾌적한 속에서 천 길 만 길이 넘는 봉우리를 모두 답사하고, 천 겹 만 겹 펼쳐진 승경을 다 보았네. 동양사(東陽寺) 한 절은 구우일모(九牛一毛)와 같이 특별하지 않은데, 보지 않고 돌아간다고 해서 어찌 병이 되겠는가. 이 역시 선배가 후인을 기다리는 호의이네.
하물며 산을 유람하는 방법이 봉우리의 수려함과 바위와 골짜기의 기이함, 사찰의 빼어남을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요긴한 것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산의 혈맥이요, 둘째는 산의 형태요, 셋째는 산의 역할이네. 이 세 가지를 짐작하여 아는 것에 힘쓰지 않고 사소한 것을 도모하겠는가. 절간 한 곳을 못 본 것을 마음에 두는 것은, 밥을 크게 뜨고서 마른 고기를 이빨로 끊는 것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 제군들을 위하여 말하고자 청하네.
*방반(放飯) 치결(齒決) : 맹자가 사람이 먼저 힘써야 할 도리를 모르는 것을 비유하여 “밥을 크게 뜨고 국을 흘리며 마시면서 포를 이로 깨물어서 끊지 말기를 따지는 것을 일러서 힘쓸 것을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放飯流歠而問無齒決, 是之謂不知務.]”라고 하였다. 《孟子 盡心上》
所謂大脉絡者 東國之山皆從長白山流出來. 其自長白來 起伏盤屈班班 有條理縈紆連斷歷歷 可指擬 而山經地志雖以山斗之雄博 猶有茫昧 非授受之歎. 今余後山斗蓋將千有餘年 何敢抗顔杜撰 有若發前人所未發者乎. 不言之可也.
소위 대맥에 이어졌다는 것은 동국의 산이 모두 장백을 따르며, 흘러 내려오네. 그 장백에서 오는 것이 솟았다가 낮아졌다가 구불구불한 게 뚜렷하고, 조리를 가지고 얽혀 이어지고 끊어지는 것이 역력하여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 있네.
비록 산두가 웅장하고 넓은 지식으로 산경지지(山徑地誌)에 기록한 것이라도, 분명하지 않은 것이 있어 주고받을 수 없는 것이 아쉽네. 지금 나는 산두(山斗)로부터 천여년 뒤의 후인인데, 어찌 감히 두찬에 얼굴 붉히며 전인이 드러내지 못한 것을 마치 밝혀낸 것처럼 하겠는가. 말을 하지 않음이 옳네.
*산두(山斗) : 한유(韓愈) *두찬(杜撰) : 근거나 출처가 확실치 못한 저술(을 하다)
若論其形體 則若思一峯爲望於中 雙眸所揩八方在前. 其東則俯看眼下如臨食案者 仁洞之留鶴也 天生也 漆谷之架山也 大丘之公山也. 遠望雲際 乍見螺鬟者 靑松之普賢也 慶州之涵月也.
만약 그 형체를 논하면, 약사봉(若思峯)을 중심으로 두 눈을 닦고 팔방을 앞에 두는 것이네.
그 동쪽은 아래를 굽어보면 눈 아래에 밥상같이 놓인 곳이 인동의 유학산이고, 천생산이며, 칠곡의 가산이고 대구의 공산이며, 멀리 구름 끝을 바라보면 상투처럼 잠깐 보였다가 사라지는 것은 청송의 보현산이요, 경주의 함월산이다.
其南則近而伽倻環拱於新安冶爐之境, 遠而頭流隠暎於湖海 雲天之外至如天王峯. 雄高特絶之尊才可標指 而識別其界其眞面目則終有所不能分明也.
그 남쪽을 바라보면 가까운 가야산이 신안과 야로의 경계를 둘러싸고, 멀리는 두류산이 호해에 비치며, 구름하늘 바깥에 이르는 것은 천왕봉 일 것이다. 크고 높으며 특히 뛰어난 절승지로 표지가 되나, 그 경계와 참모습을 식별하는 것은 끝내 분명하게 할 수 없다.
其西則金陵之黃岳 茂朱之德裕 報恩之俗離 或近或遠皆環立向之. 其北則尚州之甲長如奴隊之在面前 聞慶之曦陽主屹如藩垣之圍四外也
그 서쪽은 금릉의 황악산, 무주의 덕유산, 보은의 속리산이 혹은 가깝게 혹은 멀게 둘러서서 바라보고 있다.
그 북쪽은 상주의 갑장산이 노복처럼 눈앞에 대를 이루며 있고, 문경의 희양산과 주흘산이 울타리처럼 사방을 둘러싸고 있다.
其自北而東也 遠則太白也 小白也 清凉也 鶴架也, 近則華山也 冷山也 曺溪也 飛鳳也. 自西而北也 普門也 黃嶺也. 自南而西也 修道也 乞水也. 自東而南也 琵瑟也 雲門也 載岳也 圓寂也.
그 북으로 부터 동쪽은 멀리는 태백산 소백산 청량산 학가산이고, 가깝게는 화산, 냉산, 조계산,비봉산이 있고, 서쪽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보문산, 황령산이 있고, 남쪽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수도산, 걸수산이 있으며, 동쪽에서 남쪽을 바라보며 비슬산, 운문산, 재약산, 원적산이 있다.
或呈半身於天末 或露一面於雲端 或如周公營洛旣尊王室 分封九服藩衛乎國畿也. 或如叔孫制禮己定名位列竪 綿蕝揖讓於野外也. 或而千兵萬馬長驅而疾馳也. 或如怒虎藏龍跳閃而蜿蟺也. 或如畫地新就墨跡淋漓也. 或如鏡面初開物象涵泳也. 洛江由東北發源環山圍野不知其幾折而東入于海, 鑑湖從西南發源環山圍野不知其幾折而北入于江 此則金烏之大形體也.
혹은 하늘 끝에 반신을 드러내고, 혹은 구름 사이에 한쪽 면만 보인다. 혹은 옛날 주공이 낙양을 도읍으로 왕성을 경영하여 왕실을 높이고 구복(九服)으로 분봉하여 나라의 수도를 호위토록 한 것과 같으며, 혹은 옛날 숙손통(叔孫通)이 예를 제정하여 정해진 이름대로 줄을 세우고, 야외에서 면체하고 읍양하는 것과 같다.
혹은 천병만마가 길게 늘어져 말을 몰며 달려가는 듯하고, 혹은 성난 범과 숨었던 용이 뛰어오르고 번쩍이며 엉켜있는 것 같으며, 혹은 화선지에 새로 나아가는 먹물 자국이 방울져 스며드는 것 같기도 하고, 혹은 거울면이 비로소 열리자 물상이 잠겨 헤엄치는 것 같기도 하다.
낙동강 물줄기가 동북에서 발원하여 산을 두르고 들을 안으며 몇 구비를 돌았는지 모르게 동해로 들어가고, 감호(鑑湖)는 서남에서 발원하여 역시 산과 들을 감고 돌아 몇 구비를 꺾여서 북쪽에서 강에 합류하였으니 이것이 금오산의 큰 형체이다.
*면체(綿蕝) : 한(漢)나라 숙손통(叔孫通)이 처음 의례(儀禮)를 제정할 때에, 여러 선비들을 데리고 교외에 나가서 면체(綿蕝)를 하고 연습하였다. 새끼로 줄을 치는 것을 면(綿)이라 하고 띠[茅]를 묶어 자리를 표시하는 것을 체(蕝)라 한다.
所謂功用云者凡物有體雖微細莫不有用. “曾謂泰山不如林放乎.”大易言設險, 鄒聖論地利爲國功用 孰如城池乎
소위 산의 역할(功用)이라 말하는 것은 대개 만물은 미세하더라고 그 쓰임이 있지 않은 것이 없다. 공자께서는 일찍이 이르기를 “태산은 임방(林放)과 같지 않다.”고 하였고, 『역경(易經)』에는 ‘나라의 요해지에 방비시설을 한다.’라고 말하고 있으며, 맹자도 ‘땅의 이점이 나라를 위하여 역할을 한다.’고 논하면서 “누가 성이나 해자와 같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증위태산불여지방호(曾謂泰山不如知放乎) : 계씨가 태산에 여제(旅祭)를 지냈다. 공자가 염유에게 “네가 그것을 바로잡을 수 없느냐?”라고 하자, 염유가 “불가능합니다.”라고 하자. 공자가 “아, 일찍이 이르기를 태산의 신령이 예의 근본을 물은 임방만도 못하다고 생각하느냐.”라고 하였다.〔季氏旅於泰山 子謂冉有曰 女不能救與 對曰 不能 子曰 嗚呼. 曾謂泰山不如林放乎. 임방은 공자의 제자로 예의 근원을 빌문하였음. *설험(設險) : 요해지에 방비 시설을 함.
此山峻高險截而四圍如削 眞所謂一夫當關萬夫莫開者也. 於是而墉之壑之 高矣湥矣. 粉堞連雲屹屹. 言言凡内城四千八十二步, 外城四千二百八三十五步, 大池四, 中池三, 屬邑六, 倉十有餘所. 挈壼七處置, 别將居 僧將設 衙兵器械精 寺刹殷.
이 산이야말로 높고 험준하여 사방이 깎아지른 것 같아서, 이른바 한 사람이 지켜도 만 사람이 뚫을 수 없는 곳이다. 이 담장과 골짜기는 높고 깊으며 분첩은 구름에 이어져 우뚝 솟았다.
내성(內城)이 사천팔십이 보요, 외성(外城)은 사천이백삼십오 보이며, 큰 못이 네 개, 중간 못이 세 개, 속한 읍이 여섯, 창고 십여 곳이다. 결호(挈壼)는 일곱군데에 두었고, 별장이 거주하며 승장을 설치하여 관아의 병사와 기계가 면밀하고, 사찰이 성하였다.
*기계(器械) : 무기 및 화기.
城中居人户亦且非少 以爲戰有寇來不上之險 以爲守有虎豹在山之威 此豈非金烏之大功用乎. 雖然此特一時 耳至於萬世之功用又有大於此者. 而有非人人之所與知 吾請索言之
성안에 사는 사람의 호수가 역시 적지 않고, 전쟁으로 외적이 침입하여 오르지 못할 정도로 험하고, 방호하고자 호랑이나 표범이 있을 정도로 위세가 있으니, 이것이 금오산의 큰 역할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특히 한때의 예를 말한 것이고, 귀에 들리는 만세의 역할은 이보다 더 크다고 할 것이니, 사람마다 다 알고 있는 일이 아니므로 내가 청하여 언급하고자 한다.
嗚呼冶隱先生以一身任萬古綱常之大防 生而隠於此山之中 殁而藏於此山之下, 祭而廟於此山之麓, 先生之節此山不足爲高. 而此山之名得先生而益高眞與首陽相上下. 天地相終始 此其所以爲鎭於善府 而名於嶺服 羣山之中者也.
아! 야은 길재 선생이 한 몸에 만고에 사람이 지켜나갈 큰 법칙을 맡아서, 살아서는 이 산에서 은일하였고 죽어서는 이 산 아래에 묻혔으며, 이 산의 기슭 사당에서 제사 지내니, 선생의 절의는 이 산이 부복할 정도로 높다. 이 산의이 명성도 선생으로 인하여 얻고 더욱 높아져 참으로 수양산(首陽山)과 더불어 상하를 더불게 되었다.
천지는 시종을 함께하니 이것이 선산부의 진산이 된 가닭이며, 여러 산중에서 영남 사람들에게 이름나게 된 연유이다.
百世之下吾與諸君得聞三綱五常之道 免爲夷狄禽獸之歸者 寧可不知其所自乎. 此其功用萬世永賴 奚但擬之於一時禦暴僃患之. 爲功爲用而止哉. 然則錄是遊者 其輕重取舍自有所當審者矣.
백 세대를 내려와서 나와 제군이 함께 삼강오륜의 도를 듣게 되어, 오랑캐와 금수가 되는 것을 면하게 되었는데 어찌 그 근본을 알지 못하겠는가.
이 공용은 만세에 영원히 힘입을 것인데 어찌 한때의 폭행을 막고 근심을 방비하는 것에 비교하겠는가. 공이 되고 쓰임이 되는 것에 대하여 그치면서 이 유람을 기록하여 그 경중을 얻고 버리면서 스스로 마땅히 살피고자 하였네.
向所謂 觀望之遠近 景致之多少 適足爲眼助 興之餘事. 爾由是論之 東陽之見不見 何足爲吾儕此遊之損益乎. 咸曰子之言確 遂並記 其言爲之錄. 崇禎 丙午九月日 陽溪散人書于陽溪精舍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원근을 바라보면 경치의 다소는 눈을 만족하는 데 충분하고 흥취는 나머지 일이네.
자네들이 말하는, 동양사(東陽寺)를 보거나 못 보는 것을 우리들의 이번 놀이에서 어찌 손익으로 삼을 수 있겠는가. 라고 말을 마쳤다. 모두가 말하기를 “자네의 말이 확실하네.”라고 하여 병기를 마치고 그 말을 기록문으로 삼는다.
숭정 병오년(1666) 9월 일 양계정사에서 양계산인이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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