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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나
2024년 1월 7일 / 사도행전 13:21-22
행 13:21-22 / 이때 백성들이 왕을 세워 주실 것을 요구하자 하나님께서는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그들의 왕으로 세우셔서 40년 동안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22) 그리고 그를 물러나게 하신 뒤에는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찾아냈으니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다. 그가 내 뜻에 복종하기 때문이다.’ 하고 칭찬하셨습니다. 23) 이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이스라엘의 구세주 예수께서 나신 것입니다.
누구인들 장점이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 것이며, 누구인들 단점이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 것인가? 남의 단점을 보면서 내 삶에 그런 단점이 없는지를 돌아보며 고쳐나가야 한다. 반대로 남의 장점을 보면서 거울로 삼아 나도 그렇게 살기를 위하여 힘써야 한다.
성경에 나온 인물 중에 내 세울 수 있는 아브라함, 야곱, 요셉, 모세, 다윗 등등일 것이다. 이에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찾아냈으니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다. 그가 내 뜻에 복종하기 때문이다.’ 하고 칭찬하셨습니다.”라는 본문에 따라 신년 초에 다윗의 생애를 보려고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성도가 되려 함에 그 목적이 있다.
다윗은 멀리서 보면 참으로 굉장한 사람이다. 이스라엘의 왕 중에 가장 훌륭한 왕이라고 평가받는 사람이다. 그가 소년이었을 때 덩치가 엄청나게 큰 블레셋의 장군 골리앗을 물맷돌 한 방으로 쓰러뜨린 이야기는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아주 멋있고 대단한 이야기이다. 양치는 소년에 불과한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고 무엇보다도 귀한 것은 예수님의 육신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왕이 다윗 왕이다. 심지어는 조용기 목사님이 자신을 조다윗이라고 한 적이 있을 정도이다. 요즈음에는 자신의 허물을 많이 보아서 그런지 ‘○베드로’라는 이름을 많이 쓰고 있다.
▶ 그런데 다윗이 살아온 인생 여정을 잘 살펴보면 비극 중에 비극적인 삶을 산 사람이 또한 다윗이다. 사무엘 선지자를 통하여 차기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오히려 그것이 화근이 되어 오랜 세월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니는 신세였고, 겨우 왕이 된 후에도 자식에게 배반을 당하여 도망을 다녀야 했고, 이런저런 고난이 그칠 날이 없는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어쩌다가 남의 아내를 빼앗은 죄로 거의 일평생을 눈물로 침상을 적시며 회개하면서 지냈고, 이런저런 비극들이 그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라고 생각하고 그 벌을 달게 받으면서 살아야 했던 사람이었다. 다윗은 기원전 1030년경에 태어나 기원전 970년경에 죽었으며, 이스라엘왕국의 제2대 왕으로서 40년간(기원전 1010~970년) 통치하였다.
성경에는 다윗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다윗의 생애를 쓴 것은 아니기에 성경에 나타난 것만을 가지고 살펴볼 수밖에는 없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삶을 살았던 다윗의 생애를 살펴보며 많은 교훈을 받을 수 있다. 누구인들 장점이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 것이며, 누구인들 단점이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 것인가? 남의 단점을 보면서 잘못된 것은 반면 거울로 삼아 내 삶에 그런 단점이 없는지를 돌아보며 고쳐나가야 한다. 반대로 남의 장점을 보면서 반면 거울로 삼아 나도 그렇게 살기를 위하여 힘써야 한다.
■ 그러던 차에 지난 2023년 12월 23일 오후 6시 영락교회에서 바흐의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J. S. Bach ‘Christmas Oratorio’)를 연주하였는데, 처음에 튜닝을 하는 것은 당연하였지만 도중에 짧은 시간을 내어 콘트라베이스와 첼로를 몇 번이나 튜닝하였다(1시간 10분 연주하는데 3-4번이나 튜닝을 하니).
본문의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나’라는 제목을 붙여보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늘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경건한 삶을 살고파서 늘 하나님의 말씀에 나를 튜닝하려고 한다. 음이 낮으면 높이고, 음이 높으면 낮추기를 반복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려고 한다.
야고보서 1장을 2024년 1월 1일~12월 31일 명심하려고 한다.
[믿음과 지혜] 약 1:2-5 /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가난과 부귀] 9-11 /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10)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11)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시련과 유혹] 12-18 /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고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16)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18)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 19-27 /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20)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22)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23)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25)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1. 다윗이 늘 마음에 담고 있었던 일이 있었다.
삼상 16:1-13 /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사울 때문에 언제까지 슬퍼할 작정이냐? 나는 이미 그를 버렸다. 그는 더 이상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없다. 너는 이제 올리브기름을 뿔에 가득 채워 가지고 베들레헴으로 가서 이새라는 사람을 만나라. 나는 그의 아들 가운데서 새 왕이 될 사람을 하나 골라 놓았다.’ 2) 사무엘이 이의를 제기하였다. ‘제가 지금 어떻게 그러한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사울이 알면 당장 저를 죽일 것이다.’ … 5) 사무엘은 이새와 그의 아들들도 제사에 초대하고 그들 역시 몸을 씻은 뒤 새 옷으로 갈아 입고 오게 하였다. 6) 이새가 자기의 아들들을 거느리고 성소로 들어서는데, 맨 먼저 엘리압이 사무엘의 눈에 띄었다. 그래서 사무엘은 속으로 ‘그가 틀림없이 여호와께서 선택하신 아들이겠구나!’라고 생각하였다. 7)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사무엘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너는 그의 용모가 특출하고 키가 큰 것만을 가지고 판단하지 말아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다. 사람은 눈에 뜨이는 외모를 보지만 나는 사람의 마음속을 들여다본다.’ 하고 말씀하셨다. 8) 다음으로 이새는 아비나답을 불러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였다. 그러자 사무엘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이 아들도 주께서 뽑으신 사람이 아니오.’ 하고 대답하였다. 9) 그 다음에는 이새가 삼마를 불러 그의 앞으로 지나가게 하였으나 사무엘은 ‘이 아들도 여호와께서 뽑으신 사람이 아니오.’ 하고 말하였다. 10) 이렇게 이새가 자기 아들 일곱을 모두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였으나 사무엘은 매번 ‘이 아들은 여호와께서 뽑으신 아들이 아니오.’ 하는 것이었다. 11) 그러더니 사무엘이 이새에게 물었다. ‘그대의 아들은 일곱뿐이오?’ 이새가 대답하였다. ‘막내 아들이 아직 남았는데 그 아이는 지금 들에서 양 떼를 지키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명하였다. ‘어서 그 아들을 데려오시오! 그가 오기 전에는 우리가 화목제물을 나누어 먹지 않겠소!’ 12) 이새가 사람을 보내어 막내 아들을 데려왔다. 그는 눈에 총기가 있고 힘도 세 보이는 혈색 좋은 청년이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그가 바로 내가 택한 사람이니 그에게 기름을 부어라!’ 13) 그래서 사무엘이 가져온 뿔에서 올리브 기름을 다윗에게 붓고, 그의 형들이 보는 앞에서 그를 왕으로 삼았다. 그 순간에 여호와의 성령께서 다윗을 사로잡고, 그 이후로는 그에게서 떠나지 않고 함께 계셨다. …
외형을 중요하게 여기는 세상에서 성도들은 내면을 충실히 준비하여야 한다.
세상 사람은 ‘집이 얼마나 넓은지? 얼굴은 잘생겼는지? 어떤 차를 타고 어떤 브랜드의 옷을 입는지? 어떤 학교 출신이며 무슨 학위를 가졌는지? 심지어는 나이는 몇 살인지? 심지어는 어떤 교회에 나가느냐? 이런 외적인 것을 따진다. 그러나 성도는 다윗처럼 내면을 보시는 하나님 앞과 이웃과 후손들에게 본이 되도록 영적인 관리를 하여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한다. 어떤 권사님은 한 교회를 40년간이나 섬겼다고 한다. 정말 나 자신도 놀라지 않을 수 없다. 10년, 20년도 아닌 아니 30년도 아닌 40년을 한결같이 ….
어떤 사람은 자기감정, 자기 고집, 자기 교만에 치우친다. 그러나 다윗은 사무엘 선지자를 통하여 기름 부음을 받고,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어 그때부터 모든 일을 성령이 감동하는 대로, 성령이 지혜를 주는 대로, 성령께서 깨닫게 하는 대로, 성령께서 힘을 주시는 대로, 성령께서 인도하는 대로 행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다윗과 같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자기 고집을 꺾고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마음과 정성, 힘을 다하여 순종할 때 귀한 그릇과 같이 귀한 곳에 쓰신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까지 십여 년이 걸렸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많다. 혈기 많은 청년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까지는 신앙적으로 성숙함과 온전함이 필요했다(마 11:29-30).
어떤 모임이 있을 때마다 눈살을 찌푸리는 일은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 저마다 식탁의 윗자리에 앉으려 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자. “맨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주인이 너희를 보고 ‘친구여, 윗자리가 당신을 위해 마련되어 있습니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 너희는 모든 손님 앞에서 높아지는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높이면 낮아질 것이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앞에 두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데, 제자들은 부끄럽게도 십자가가 아닌 권력과 명예의 자리를 바라보며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이에 제자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는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법으로 살면 안 된다. 세상과 마귀는 자꾸 높은 자리에 올라가라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섬기는 낮은 자리로 내려가라고 하신다. 세상은 으뜸이 되라고 충동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으뜸이 되려 하기보다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라고 하셨다. 섬기는 삶을 사시기 위해서 섬김을 받으려 하는 유혹을 다 물리치셨다.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금식하실 때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했다. ‘돌로 떡을 만들어라.’, ‘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라.’, ‘내게 절을 하면 내가 천하만국의 영광을 다 네게 주마.’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으로 그 시험을 단호하게 물리치셨다.
예수님께서 돌로 떡을 만드실 수 있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돌로 떡을 만드실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높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실 수 있다. 만일 예수님께서 돌로 떡을 만드신다면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될 것이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셨는데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엄청나게 존경하고 우러러보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과감하게 그런 유혹을 거부하셨다. 왜냐하면,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얻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것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자, 사람들은 예수님을 억지로 붙들어다가 자기들의 임금으로 삼으려 했다(요 6:15).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피해 혼자 조용히 산으로 가셨다. 사람들의 인기에 편승해서 임금이 되는 것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시려는 것이었다. 그러면 섬긴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떻게 사는 것이 섬기는 삶을 사는 것일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낮은 자리에 서는 것(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다. 높은 자리에 있기에 마땅히 섬김의 받아야 하지만 스스로 낮은 자리(십자가)로 내려가는 것이다. 으뜸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지만 스스로 으뜸이 되는 자리를 내려놓고 다른 사람의 종이 되셨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모습이 바로 그런 섬기는 삶이다. 예수님은 스승이요, 메시아이며, 하나님이시다. 마땅히 제자들로부터 섬김을 받으셔야 하고 마땅히 사람들로부터 섬김을 받으셔야 할 분이다. 그런데도 친히 대야에 물을 떠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다. 가장 나이가 어린 요한에게 ‘내가 너희들의 발을 씻어줄 테니 가서 대야에 물 좀 받아오라.’라고 하실 수도 있었다. 자신을 팔아먹을 가룟 유다에게 ‘너는 왜 그것밖에 되지 않느냐?’고 책망하실 수도 있었다. 조금 있으면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할 베드로에게 ‘너 같은 놈은 발 씻음 받을 자격도 없어!’라고 열외시키지 않으셨다. 누구의 손도 빌리지 않고 제자들의 발을 하나하나 씻겨 주셨다. 아무도 책망하지 않으시고 사랑스러운 손길로 발을 씻겨 주셨다. 오히려 제자들 한 사람 한 사람 위해 기도하셨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섬김의 모습이다.
예수님은 섬기는 삶의 최종 종착지가 죽음임을 아셨다. 그런데도 그 길을 가셨다. 한두 번 섬기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런 섬김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 섬김을 완성하신 것처럼, 우리의 생명 다할 때까지 섬김의 삶을 살라고 말씀하신다. 십자가가 섬김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 섬기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십자가가 우리의 가슴에 새겨져야 한다. 십자가의 정신이 우리의 마음 중심에 자리하고 있어야 한다. 섬김의 완성인 십자가를 잃어버린 사람은 결코 예수님을 닮아갈 수 없다. 예수님처럼 참된 섬김의 삶을 살 수 없다. 진정한 섬김은 결코 내 힘이나 내 노력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 안에 가득할 때 진정 섬기는 자로 살아갈 수가 있다.
2. 그렇다면 왜 우리는 그런 섬김이 잘 안될까?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려고 노력하는데, 왜 예수님처럼 섬기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일까?
‘빈자들의 성녀’라고 불리는 마더 테레사(Theresa) 수녀에게 배울 것이 있다. 어느 날 한 어린이의 상처를 지극한 정성으로 치료해 주고 있었다. 그때 인근에 살던 한 주민이 이렇게 물었다. ‘수녀님! 당신은 당신보다 더 잘 살거나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 편안하게 사는 것을 보면 부러운 마음이 안 드시나요? 당신은 평생 이렇게 사는 것에 만족하십니까?’ 그러자 테레사 수녀가 이렇게 대답했다. ‘허리를 굽히고 섬기는 사람에게는 위를 쳐다볼 시간이 없답니다.’
마더 테레사의 말을 통해 왜 우리가 예수님을 수십 년 동안이나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처럼 섬기는 삶을 살지 못하는지 그 이유 중 하나를 깨달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눈이 자꾸만 높은 곳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바라보시는 곳을 보지 않고 다른 곳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예수님에게 ‘높은 자리를 달라’고 청탁했던 이유도 예수님께서 바라보시는 곳을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십자가라는 죽음의 자리를 바라보고 가시는데, 제자들은 권력이라는 영광의 자리를 바라보며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대속물로 주시려는 희생의 자리를 바라보고 가시는데, 제자들은 세상 영광을 얻을 궁리만 하고 있으니 예수님을 닮을 수가 없었다.
제자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다. 이제부터라도 예수님이 바라보시는 곳을 바라보아야 한다. 예수님은 결코 높은 곳을 쳐다보지 않으셨다. 하늘 영광의 보좌가 당신의 자리임에도 그곳을 바라보지 않으셨다. 언제나 낮고 천한 곳을 바라보며 사셨다. 그곳에는 지옥으로 달려가는 죄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은 그리할지라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뿐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미워하는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섬겨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다. 원수까지 사랑하고,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에게 보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위해 기도해주고, 그들이 잘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축복할 때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된다고 하셨다.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고 발버둥을 친 사울 왕을 죽이지 않고 2번이나 편히 가게 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울을 물러나게 하신 뒤에는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찾아냈으니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다. 그가 내 뜻에 복종하기 때문이다.’라고 칭찬하셨던 것이다(행 13:22).
3.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다윗의 업적에 앞서 마음이라도 닮고 싶어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❶ 믿음으로 인내한 다윗 / 사무엘상 24:1-2의 기록을 보면 사울이 온 이스라엘 전국에서 선발된 최고 정예병들 삼천 명을 거느리고 다윗 일행을 제거하려고 엔게디 광야의 험한 산지에 이르렀다. 다윗을 따르는 사병들은 600명 정도이니, 그것도 사울 왕을 치려는 병사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보다 다섯 배가 많은 군대를 동원하여 일시에 다윗 일행을 섬멸하려고 작정하였다. 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밀한 보호 아래 있는 다윗을 찾아내지는 못하였다.
다윗은 사울을 피하여 모두 15번이나 도피하였다. 다윗은 유다 광야를 중심으로 도피하느라 젊은 나날을 다 보냈다. 유다 광야의 날씨는 사해 옆에 있어서 이스라엘에서 가장 덥다. 보통 40-45˚ 가장 더울 때는 54˚가 된다고 한다. 하루 이틀도 아닌 십여 년을 피난민으로 살아야 했다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다윗은 해냈다. 15번의 도피생활 중에 사울 왕을 원망하지 않았고, 절망하거나 인생을 포기하지도 않았다. 그만큼 인내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생에서 끊임없이 찾아오는 문제도 결국 믿음과 사랑 그리고 인내의 문제라고 보아도 괜찮을 것이다(약 1:2-4).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문제들이 있는데 여러 가지 시련이다. 시련은 누구에게나 오며 피할 수 없다. 그것도 한두 가지 시련이 아니다. ‘겪는다. 당한다. 만난다’라는 말은 ‘한 가운데로 떨어지는 것’이란 말로 우리의 삶의 한복판에 뚝 떨어진다는 말이다. 내가 원하는 것도 아니고 기대했던 것도 아니다. 아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데 예고 없이 불쑥 찾아오는 것이다.
그때 우리가 할 것은 인내(忍耐)이다. 참다 참다 도저히 못 참겠다는 순간이 있는데, 이것을 ‘포기의 순간’이라고 부른다. 인생의 문제는 이 ‘포기하고 싶은 순간을 어떻게 뛰어넘느냐?’이다. 누구나 거룩함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하였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다. 더는 못 한다. 여기까지가 내가 할 수 있고 그다음은 못 한다.’ 이 ‘포기하고 싶은 순간’을 뛰어넘는 것이 진짜 인내이다. 물이 100°에 이르지 않으면 끓지 않는다. 99°에서는 물이 끓지 않는다. 시험도 1점 차이로 떨어지고 합격하기도 한다. 올림픽 우승은 0.01초 차이로 갈린다. 승리하는 비결은 끝까지 참는 것이다.
❷ 처참한 상황에서도 경건한 모습을 잃기는커녕 빛된 삶을 살았다 / 다윗은 참으로 이상한 사람이다. 인간적으로 보면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이해조차 할 수 없는 거룩하고 신령한 사람인지? 아니면 바보같이 멍청한 사람인지? 자기에게 해(害)가 될지라도 그리고 남의 조언(助言)보다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기준을 두고 있는 다윗은 사울이 그처럼 그를 죽이려고 하는데도 한 번도 사울과 맞서지 않았다. 자기가 원하면 얼마든지 사울을 해칠 수도 있었다. 자기를 벽에 박으려고 사울이 던진 창을 주워 사울에게 던질 수도 있었지만, 창을 던지기는커녕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다윗의 마음 한쪽 귀퉁이에서는 ‘너도 사울을 향해 창을 던져라’는 악마의 소리도 들렸을 것이다. 만약 그때 다윗이 창을 사울에게 던졌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나님 마음에 꼭 맞기는커녕 다윗 역시 사울 왕과 별로 다를 바 없는 불행하게 살았을 것이다.
사무엘상 24장이나 26장에 나오듯이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이 ‘사울을 죽이고 왕이 되시오.’라고 했다. 다윗이 사울을 죽인다 해도 정당방위로 얼마든지 변명할 수도 있다. 또 다른 사람이 사울을 죽이도록 가만히 있을 수도 있었지만, 다윗은 적극적으로 부하들을 만류하며 자기를 원수처럼 끈질기게 죽이려는 사울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피하기만 하였다.
❸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다윗은 원수 같은 사울 왕의 목숨을 맡기면서 자기는 결코 왕을 해치지 않으니 하나님께서 해결해 달라고 기도한 적도 없었다. 오히려‘하나님! 임금님의 마음에 평안을 허락하사 악한 영의 시달림에서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라고 눈물로 기도하였을 것이다. 성경에는 이런 말이 없지만 경건한 성도라면 당연히 그렇게 했을 것이다. 이 대목은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우리에게 닥쳐오는 시험에 대한 모두의 모범 답안이다.
길보아 산에서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사울 왕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은 즉시 자기 옷을 갈기갈기 찢고 슬퍼하기 시작하였으며, 그와 함께 있던 부하들도 모두 옷을 찢으며 행동을 같이 하였다. 이리하여 그들은 사울과 요나단을 비롯하여 길보아 전쟁에서 전사한 이스라엘의 모든 군인을 위하여 슬퍼하면서 저녁때까지 단식하고 울었다(삼하 1: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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