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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30:37-43, 31:10
믿음과 상상력
어떻게 하면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는 것일까요? 저는 이에 대하여 자주 질문을 하곤 합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를 크게 부흥시킨 목회자들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해서 교회를 저만큼 성장시켰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보곤 합니다. 이 두 가지에 대한 답이 오늘 전할 말씀의 내용에 있습니다. 성공한 목회자들과 바르게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을 보면 그들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굳센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런 논리에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믿음이 무엇일까요? 히브리서 11장 1절에는 믿음에 대하여 정의하기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믿음이 무엇인가 하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므로 그 시작은 “바라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바라보며 의지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신 30:20, 개정)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
(시 37:5, 개정)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시 37:6, 개정)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의지하다”는 말을
“1. 다른 것에 몸을 기대다. 2. 다른 것에 마음을 기대어 도움을 받다.”로 정의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기대어 도움을 받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우리들의 몸과 마음을 의지해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며 살기를 원하셨고 또한 지금도 원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도움을 받는 생활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나타나는 것이 “바라는 것, 소망하는 것,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어떻게 “바라고, 소망하며, 기대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런 삶의 실제를 예수님께 나아가서 치료받았던 사람들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 마태복음 9:20, 마가복음 5:25, 누가복음 8:43에 나오는 열두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하다가 치료받았던 여인의 삶에서 우리는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 마태와 마가의 기록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 9:20)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마 9:21)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막 5: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막 5:26)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막 5: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막 5: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한편 ‘함일러라’(ἔλεγεν, 엘레겐)는 3인칭 단수 미완료 능동태로서 ‘그녀가 계속 말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는 그녀가 마음속으로 그 같은 사실을 되뇌이고 또 되뇌였음을 보여준다. 그녀가 생각하고 있는 ‘구원을 얻으리라’(σωθήσομαι, 소데소마이)의 의미는 공관 복음의 치유 기사들을 볼 때 ‘살도록 하는 것’,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다.』 (카리스주석 마가복음 5장 28절)
열두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은 예수님을 의지하면서 그녀가 원하는 것을 계속적으로 말하고 또한 그녀가 질병에서 구원받을 것을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하나님을 의지하려면 우리들이 원하는 것을 지속적으로 말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것을 생각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는 삶을 달리 표현하면 우리들이 원하는 삶을 상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상상하는 삶을 달리 표현하면 묵상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읽은 창세기 31:10에 대하여 크리스 오야킬로메 목사님은 “마음의 능력”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그가 “꿈에 내가 눈을 들어 보니”라고 말하지 않은 것을 주의하십시오. 이렇게 말했다면 그가 자다가 이런 꿈을 꾸었다는 의미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눈을 들어, 나는 한 꿈을 보았다.” 이는 그가 완전히 깨어 있는 상태에서 창조했던 마음의 비전에 관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크리스 오야킬로메 『마음의 능력』 p. 138.)
그리고 창세기 31장 10절을 옥스퍼드 원어대전에서 ‘그러자 내가 나의 눈들을 들었다. 그리고 내가 그 꿈 속에서 보았다’로 직역을 했습니다. 옥스퍼드 원어대전에 있는 내용을 좀더 자세히 읽어보겠습니다.
『31 : 10 내가 꿈에 눈을 들어 보니.
본문을 직역하면 ‘그러자 내가 나의 눈들을 들었다. 그리고 내가 그 꿈 속에서 보았다’이다. 여기서 ‘들었다’에 해당하는 ‘나사’는 무엇을 자세히 주목하여 보기 위해 얼굴이나 눈 등을 ‘들다’라는 뜻이다. 이는 이어 나오는 ‘보았다’에 해당하는 ‘라아’가 단순히 ‘보다’라는 뜻 뿐만 아니라 목적을 가지고 ‘살피다’, 자세히 ‘주목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즉 야곱이 꿈 속에서 무엇인가를 좀 더 자세히 살펴 보기 위해 눈을 들어 주목하였다는 의미이다.』 (옥스포드 원어대전 창 31:10 주석)
옥스퍼드 원어대전의 기록을 주목하여 보면 크리스 오야킬로메 목사님이 설명했던 것처럼 창세기 31장 10절에서 말하는 꿈이 사람이 잠이 들어 꾸는 꿈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생겨나서 꾸는 꿈 즉 상상력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오늘 본문인 창세기로 돌아가서 야곱이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 했던 일들에 대하여 말하자면 야곱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마음으로부터 꾸는 꿈 즉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상상력을 동원하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상상력의 행동을 다른 말로 하면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야곱이 취했던 행동들이 믿음의 행동이었다는 증거를 옥스퍼드 원어대전에서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한편 나무가지의 알록달록한 색깔과 무늬에 영향을 받아 반점을 지니거나 알록 달록한 색깔을 띤 종자가 태어난다고 하는 것은 가축이 수태될 때 어미의 심리 상태나 환경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는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반영한 표현이나 과학적으로는 전혀 근거없는 일이다.
따라서 야곱은 우성에 해당하는 순백의 양과 순흑의 염소로부터 (32절 참조) 얼룩 얼룩한 것과 점이 있고 아롱진 열성의 변종(變種)을 수태시키기 위해 얼룩 무늬의 나무가지 앞으로 가축떼를 인도하였으나 이러한 방법으로 변종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옥스포드 원어대전 창 30:39 주석)
한마디로 과학적으로는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 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의 믿음에 응답을 하셨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다보면 과학적으로 납득이 안되는 일들을 읽을 때가 있습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요단강이 갈라지고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일들이 그랬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했더니 그런 기적들이 일어났고 여리고성이 무너졌다고 밝혀주고 있습니다.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났을까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에 응답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야곱이 행한 일들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여 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바로 야곱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행할 때 하나님께서 일을 행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하나님께서 행하실 것을 의지하면서 그 되어질 일들을 바라보며 마음의 눈으로 상상하며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며 꿈을 꾸며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출애굽을 경험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꿈꾸며 상상하며 그 되어질 것을 바라보지 않고 이제까지 살아왔던 생각과 판단대로만 살기를 고집하다가 결국 심판을 받고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시편 기자는 81편 10절에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시 81:10-11, 개정)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으나,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시 81:10-11, 한글킹) 나는 이집트에서 너를 인도해 낸 주 너의 하나님이라. 네 입을 넓게 벌리라. 내가 네 입을 채우리라. 그러나 내 백성들이 내 음성에 귀기울이려 하지 아니하였고, 이스라엘이 나를 전혀 원치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우리들의 입을 크게 열어야 하겠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습니까? 바로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예수님 앞에 나아갈 때 그녀가 원하는 것을 입술로 말하며 그대로 될 것을 생각하였던 것처럼, 우리들이 원하는 것을 말하고, 그대로 될 것을 생각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더 나은 삶을 상상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잘되는 꿈을 꾸며 살라는 말입니다.
잠언 29장 18절을 꿈과 환상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잠 29:18, 한글킹) 환상이 없는 곳에서는 백성이 망하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행복하니라.
(잠 29:18, 현대어)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이들은 얼마나 복되랴.
그러므로 우리들은 반드시 꿈과 상상력을 바르게 활용해야 합니다.
이렇게 꿈꾸는 것과 상상력을 바르게 사용함으로 복을 받고 하나님의 일들을 성취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꿈꾸는 것과 상상력을 활용하여 하나님의 일들을 이룬 실제들
그 산이 옮겨지는 모습을 바라봐야 한다 - 마크 & 패티 버클러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을 다스리고 지배할 권세를 부여 받았다. 그분의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뤄지도록 하나님께 항상 간청해야 할 필요는 없다. 주기도문에 나오는 이 구절은 간구가 아니라 명령이다. 하나님을 향한 명령이 아니라 그분의 뜻에 맞춰지도록 하기 위한 상황과 환경들을 향한 명령이다.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가 허락 받은 권세를 활용해 산에게 명하기를 원하신다. 이때 우리 마음속으로 그 명령이 완전히 성취된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은 마가복음11장에서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하셨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환상은 우리 마음속에 믿음이 일어나도록 도와준다.
예를 들어 내가 부러진 다리의 치유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면 사지가 비뚤어진 모습이나 그로 말미암아 겪게 되는 여러 가지 한계 상황들에 초점을 맞춰서는 안 된다. 대신 예수님처럼 병자를 뛰어넘어 신적인 치유라는 좀 더 깊은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병자가 일어나 뛰어다니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바라봐야 한다. 그 다음에는 예수님처럼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면서 부러진 뼈들에게 원래 창조된 모습대로 온전하게 회복되도록 명령해야 한다.
전능하신 왕의 자녀로서 받은 권세로 말미암아 때때로 우리는 산에게 명령하면서 그 산이 옮겨지는 모습을 바라봐야 한다. 그 다음으로 흔들리지 말고 우리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이 신실한 분이심을 깨닫고 소망의 고백을 굳게 붙잡아야 한다. 하나님은 물리적인 시간을 초월해 살아 계신 분이시기 때문에 때때로 우리는 자신의 고백이 성취되는 모습을 목도하기 위해 기다려야 한다. 그 시간 동안 의심하는 마음에 굴복하지 말고 계속해서 믿음의 고백을 이어나가야 한다.
(마크&패티 버클러,『하나님과의 대화』,임종원 옮김,도서출판 브니엘, 2008, p.233-234)
자신이 건강해진 모습을 그려보라 - 케네스 해긴
말씀을 당신의 눈 앞에서 지키라
내가 아는 분 중에 82세 된 한 여성 복음전도자가 위암으로 2년간 병석에 누워 계셨습니다. 어떻게 그토록 장수할 수 있었는지 의사들도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그때가 1957년이기에 오늘날보다 평균수명이 짧은 이유로). 의사들이 개복하여 악성 종양을 여러 개 발견하고는 그대로 꿰매어 버렸습니다. 더 이상 자기들은 할 일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잠언4:20-22을 읽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말해줬습니다. “내가 예전에 병으로 누워 있을 때 이 구절 말씀을 붙잡았었는데, 한 곳을 놓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말을 계속했습니다. “잠언 4장 21절은 말씀을 네 눈에서 떠나지 말게 하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이 나에게 전환점이 됐습니다. 나는 내 자신을 죽을 것으로 봤어요. 그러다가 이 구절을 붙잡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내 눈을 떼지 않았을 때 나는 내 자신을 산 것으로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나는 전에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일들을 내 자신이 하고 있는 걸 보기 시작했지요.”
나는 그분에게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저렇게 거대해진 배를 볼 때마다 그것이 정상적으로 오므라진 모습을 그려보십시오. 자신이 다시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그려보세요. 하나님은 당신이 이렇게 죽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당신이 원한다면 죽게 되겠지요. 하지만 먼저 하나님께서 당신을 치유하게 하시고 난 그 다음에 죽도록 하십시오. 이렇게 죽지 마세요.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죽으면 영광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자신이 건강해진 모습을 그려보라
내가 텍사스 주의 포트워쓰(Fort Worth)에서 집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책상에서 몸을 펴서 일어서려고 하는데 앞에서 두 여자가 오고 있는 게 보였습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어서 나는 하던 일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고 있는데 한 여자가 두 팔을 벌려 나를 껴안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깜짝 놀라서 봤더니 그 여자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저를 알아보지 못하시겠어요?”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아무개라고 밝히자, 이번에는 내가 두 팔을 벌려 그녀를 안고 그 자리에서 함께 “할렐루야”를 외쳤습니다.
알고보니 약 1년 전에 내가 사역을 해드렸던 바로 그 82세 된 여자 전도사였습니다!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서 죽기만을 기다리던 그분이 지금 이렇게 젊고 예쁜사람으로 바뀌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분이 말했습니다.
“목사님께서 그때 나더러 죽지 말라고 하신 게 기뻤어요. 내가 금방 죽어서 천국가는 것은 가장 쉬운 일이었을 거예요. 하지만 목사님께서 떠나신 후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크게 부풀은 내 배를 볼 때마다 그것이 애초 상태로 오므라진 모습을 그려보았습니다. 내 자신이 다시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구원하는 모습을 그려 보았습니다. 내 자신이 건강해진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서 두 세 달 안에 내 배가 줄어들었어요. 시간이 지나자 내 배는 평평해졌고 모든 증상들은 사라졌습니다.”
(캐네스 해긴,『네 입에 건강이 있다』,오태용 옮김,베다니출판사, 2015, pp.14-15)
나는 처음으로 환상에 두 종류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하나는 하나님께서 특수한 상황과 때에 따라 주시는 초자연적인 환상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자연적인 환상으로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서 우리의 심령 가운데 하나의 약속을 보기 시작하게 되고 그것이 일어나게 되는 경우이다.
사도행전 2장 17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고 하였다.
우리가 성령에 대해 민감해지면 환상과 꿈이 우리 생활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4차원의 세계」에서 조용기 목사는 “성령님께서 오셔서 여러분이 읽는 성경 귀절을 살아나게 하시고 젊은이가 환상을 보고 늙은이가 꿈을 꾸게 하십시오.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돕기 위해서 오십니다. 성령님께서는 젊은이가 환상을 보고 늙은이가 꿈을 꾸게 도와 주셔서 새로운 창조의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 환상과 꿈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를 제한하는 벽을 차버리고 무한대한 우주로 뻗어 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미래에 대한 아무런 꿈도 갖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결코 창조적인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창조적이 되기를 멈춘다면 그 순간부터 여러분은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환상과 꿈은 사차원의 세계의 언어이고 성령님은 그것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환상과 꿈을 통해서만이 여러분이 보다 큰 교회를 그려보고 꿈꿀 수가 있으며 새로운 선교지를 그려볼 수가 있고 여러분의 교회가 성장하는 모습을 그려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했다.
환상은 성령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있지 않은 일을 자기 마음대로 어떤 일이 생기기를 상상한다고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상상을 해보고 또 어떤 일이 일어나나 보라.
(중략)
조용기 목사님은 초창기 개척 교회를 하실 때 눈을 감고서 자기 교회에 사람들이 꽉 찼다고 생각하며 설교했다. 눈을 뜨고 보면 15명, 20명, 30명, 혹은 35명이었지만 10,000명이 앉았다고 생각하고 또 훨씬 더 큰 교회가 성도들로 꽉 찼다고 생각하고 결코 눈을 뜨지 않고 설교했다고 한다. 오늘날은 15만 명의 교회가 되었고, 조 목사님은 50만명의 교회를 그리면서 지금도 설교하신다.(1983년 현재, 역자 주) 만일 조 목사님이 “아유, 오늘 예배당에는 겨우 열 다섯 명이 모여서 예배했을 뿐이야”라고 했더라면 오늘 같은 교회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는 육체적인 눈을 감은 대신 영적인 눈을 뜨고 있었다. 커다란 강당이 앉고 선 사람들로 꽉 메워진 것을 영안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는 잃은 양들이 부지기수로 예수님께 몰려오는 것을 보았지 실제로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수를 본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 영광!
(찰스·프란시스 헌터 부부, 「신유의 방법」, 이미혜 역, 서울서적, 1990, pp.74-86)
상상은 우리 영혼의 묵상 기관이다 - 조나단 웰튼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1:18-19)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자신이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밝히려고 했다면, 그는 단어를 신중히 골라가며 말했을 것이다. 이 기도는 영적인 눈이 밝아지는 것에 대해서 그가 어떤 가치를 두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마음의 눈이란 인간의 상상력을 의미한다. 분명히 상상력은 1세기에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현대의 교회에서는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기에 변두리의 위치로 옮겨졌다. 사실 사람들은 “음,그건 그저 제가 상상한 겁니다”라고 말하면서 상상에서 오는 것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상상을 통해 말씀하시려는 것을 억제하지 말아야 한다. 아담과 하와는 타락 전에 상상력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상상력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악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상상의 영역을 되찾아야 하며 상상에서 오는 것이라면 무조건 가치 없게 여기는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 예수님까지도 인간의 상상의 능력을 승인하셨다.
또 간음하지 말라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5:27-28)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상상력을 사용하는 것이 현실 세계에서 실제로 그 일을 하는 것과 같다고 하셨다. 만약 어떤 사람이 상상으로 죄를 지었다면 보이는 세계로 자신이 저지른 죄의 얼룩을 가져오게 된다. 상상의 세계는 물리적인 현실에 실제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부정적인 문맥에서 말씀하셨지만 바꾸어 말하면 이 말씀은 상상의 힘과 합법성을 보여준다. 예수님께서 마음에 이미 간음을 했다고 하신 것은 인간의 상상력을 말씀하신 것이다. 묵상에서 상상력을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한 예다. 하지만 상상력의 힘과 현실성을 분명히 보여준다.
상상력은 우리 영혼의 창조적인 기관이다. 이 땅의 모든 발명품은 누군가의 상상력에서 나왔다. “지금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상상되었던 것들이다”라는 말처럼 말이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창조하시고 이 땅에 사람을 만들기로 하셨을 때에도, 무엇을 창조하실지 상상하셨을 것이다. 하나님은 상상력이 대단하시다!
(조나단 웰튼 『선지자학교』 채슬기 옮김. 도서출판 순전한나드, 2012. pp. 205-207.)
믿음은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케네스 해긴 - 성경적 기도)
나는 고향집 근처에서 목회를 하셨던 목사님 한 분을 알고 있습니다. 시골 목사였던 그분은 한 번도 큰 교회의 목회를 해 보신 적이 없었습니다. 담임한 교회들은 대부분 작은 규모의 지역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런 조건이 아니었다면 상황도 달라졌겠지만 고등학교 졸업이 그의 학력의 전부였기 때문에 교단 내에서는 성공의 기회를 더 얻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목사님은 영혼을 건지는 데 탁월했기 때문에 부흥 집회 요청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새로 주님을 영접하는 사람이 없거나 오랫동안 구원받는 이들이 없는 교회로 가서 은혜가 넘치는 부흥 집회를 이끌었고, 많은 이들이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왜 그가 계속해서 집회 강사로 초청을 받았는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가 60대 초반이었을 때 그와 얘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때도 그는 여전히 많은 영혼들을 건지며 계속해서 성공적인 부흥의 행진들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옛날 오순절 교단에서처럼 그의 교회에는 제단의 섬김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교회 성도들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게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늘 나에게 비결이 뭐냐고 묻습니다. 사실은 정말로 간단한 것입니다. 내가 그것을 위해 하나님을 믿고 있는 어떤 부분이나 치유의 영역에서 믿음을 적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혼을 건지는 영역에서도 믿음을 적용하는 것뿐입니다.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할 거라는 생각 같은 건 아예 들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의심이 생기려고 하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대적합니다. 아주 간단한 것이죠.”
“다른 사람들이 기도하는 것 이상으로 굉장히 많은 기도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확실히 기도를 합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지만 나의 성공은 이 한 가지 핵심에 근거를 둔 것입니다. 내게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담대함이 있다는 점입니다. 나는 믿음의 눈으로 사람들이 예배에 나오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제단이 구원받기 원하는 사람들로 꽉 찬 모습을 바라봅니다. 집회가 내가 생각한 대로 흘러가지 않거나 사람들이 다른 때처럼 주님을 영접하려고 앞으로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꼭 그것과 관련해 기도하는 시간을 늘리거나 하나님을 더 찾지는 않습니다. 다만 믿음을 더 훈련할 뿐입니다. 회심의 시간을 시작할 때 사람들이 나오는 모습을 그려보는데, 그러면 사람들이 나옵니다.”
이 목사님이 말하고 행한 것은 그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자신감의 표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목사님도 기도를 했지만 기도에만 집착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도 계속해서 잘못된 것을 바라볼 때가 많습니다. 계속해서 상황을 바라보고 계속해서 일어나지도 않는 일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누군가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젯밤 예배에 거의 아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아마 오늘 밤에도 사람들이 나오지 않을지 모릅니다.”
혹은 재정과 관련해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재정 문제가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돈을 받게 되면 돈이 생긴 것을 믿겠습니다.”
혹은 믿지 않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것과 관련해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가족과 친구들이 구원받는 것을 보면, 그들에게 작은 변화라도 생기는 것이 보이면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셨고, 그들을 다루고 계신 것을 믿을 겁니다.”
그런 태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어떤 담대함도 보여주지 못합니다. 그런 태도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 안에 거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 태도나 사고는 그저 보이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즉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걸어야 하는데 보이는 것을 따라 걸음으로써 사람들이 자신의 기도를 모두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릴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기도할 때 상황을 바라보거나 일어나지도 않는 일을 바라보는 대신에 하나님이 그 기도에 응답하시려고 자신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하고 계신지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캐네스 E. 해긴 『성경적 기도』 정승혜 옮김. 서울: 베다니출판사, 2014. pp. 355-356.)
상상력을 발동하라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린도후서 9:8)
당신은 다른 사람에게 더 많이 나누어주기를 원하지만 경제적으로 곤경에 빠져 그렇게 할 수 없는가? 그렇다면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돌파구’다. 당신은 아마 ‘그게 무슨 말인가’ 하며 의아해 할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당신 안에 있는 가난과 궁핍의 이미지를 없애버려야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하나님의 풍성한 비전으로 채워야 한다. 그러면 돈을 비롯하여 다른 것들이 더 많이 들어올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약속하신 번영의 말씀에 관하여 계속 묵상하면 된다. 당신의 삶에서 그 약속이 실제로 이루어진다고 믿어야 한다. 예를 들어 당신 자신이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너그러운 복지가가 되었다고 상상해보라. 당신의 머리 속에 항상 쪼들리는 사람이 아니라 풍부하게 나누어주는 당신의 모습을 그려보라. 그렇게 할 때마다 하나님의 약속이 당신에게 더 생생하게 느껴질 것이며 당신의 믿음이 성장할 것이다.
“어머나, 목사님, 설마 저의 상상력을 사용하라는 말씀은 아니지요?” 바로 그것이다. 당신은 왜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상상력을 주셨다고 생각하는가? 상상력에 하나님의 말씀을 더하면 그것은 놀라운 것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상상력은 오직 세속적인 것이 되고 당신에게 믿음을 공급하는 대신 당신을 속박할 것이다.
때때로, 특히 의심의 이미지가 오랫동안 당신의 머리 속에 있었다면 새로운 희망의 이미지를 창조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거의 평생 동안 가난하게 살았다면 당신이 하나님 안에서 부유하게 되는 모습을 그리는 데에 꽤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어 있으면 그것이 가능하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묵상하라. 결국 당신은 마음(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입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시는 당신이 경제적인 실패로 인하여 방해받지 않을 것이다.
성경본문: 고린도후서 8:1-14
(케네스·글로리아 코플랜드 『365일 묵상집 7·8월 믿음에서 믿음으로』 오소희 옮김. 2015년. 사랑의 메시지 출판사,7월 10일)
믿음으로 말을 하여 치유받은 간증이 지나간 금주의 묵상에 있었는데 제 마음에 이 간증이 깊은 인상을 주어 다시 말씀드리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당신 안에서 행하신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얼굴 한쪽에 악성 종양이 생겼던 사람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 종양은 커다란 자주빛 가지나무처럼 생겼는데 크기가 그의 머리만하게 자랐었습니다. 의사들은 그걸 만지려고 하질 않았습니다. 예진을 했었는데, 그대로 내버려 둬야 좀 더 살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 남자는 신유를 믿었기 때문에 치유집회라는 집회는 다 참석을 해봤습니다. 치유전도자들이 그에게 안수를 했었습니다. 목사님이 기름을 바르고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목사님께서 나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보니까 그 종양이 아직 그대로 있긴 하지만 줄어들기 시작했어요. 줄어들고 있는 게 보였어요. 온 교회 사람들이 다 볼 수 있었지요. 약 3, 4개월 지나니까 종양이 점점 더 작아졌어요. 마침내 어느 날 그 남자가 교회에 나왔는데 그의 얼굴에 전혀 아무런 이상이 없었습니다. 그 종양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그의 얼굴의 모든 피부는 신생아 피부처럼 보였습니다!”
그 목사님이 어떻게 된 거냐고 그에게 물었습니다. 자기가 성경을 읽다가 빌립보서 2:13을 보게 되었다고 목사님께 말했습니다. 아침마다 거울을 볼 때 그 종양에다 손을 얹고 “하나님이 이 종양 안에서 역사하고 계신다. 빌립보서 2:13에 내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고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내 영 안에서 행하실 뿐 아니라 또한 내 몸 안에서도 행하고 계신다”라고 선포했습니다.
날마다 주마다 계속 그 말을 하고, 또 하고 했습니다. 약 3개월쯤 하고 나니까 그 종양 크기가 줄어드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것이 깨끗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을 축복하시려고 특별히 선별해 내신 게 아닙니다. 그 사람은 말씀을 보았고, 말씀을 읽었고, 스스로 말씀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말씀이 말한 것을 받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안에서 역사하시면서 그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나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십니다. 내가 치유 받아 건강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입니다.
(케네스 해긴 『네 입에 건강이 있다』 오태용 옮김. 서울: 베다니출판사, 2005. p.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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