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창조신화에 따르면 설문대할망이 제주를 창조합니다. 창조 부분은 여러 버전의 신화가 비슷비슷하고 신화의 마지막 장면은 여신이 물에 빠져 죽거나 죽솥에 빠져 죽는 것으로 끝납니다. 나는 이 신화의 마지막 부분이 너무 허망하고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김 순이 작 [제주의 신화]에 채록된 신화에 따르면 설문대 할망은 결코 죽지 않습니다. 나는 이 신화가 너무 좋습니다. 그 신화입니다.
태초에 하늘나라 여신 설문대가 이 세상을 내려다보고 그 모습이 이름답지 않다고 투덜거립니다. 곁에 있던 오라버니가 “그럼 네가 내려가 네 맘에 드는 세상을 만들어 봐라.”고 합니다. 설문대여신이 지상으로 내려옵니다. 여신은 바위와 흙을 긁어모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삶터를 만들었어요. 그게 제주도랍니다. 제주도를 만들어놓고 보니 산봉우리가 너무 뾰쪽하게 보였나 봐요. 여신은 주먹으로 봉우리를 툭 쳐버려요. 봉우리는 날아가고 움푹 패었는데 그게 백록담이 만들어진 사연이에요. 여신이 치마에 흙을 담아 옮기는 도중에 헤진 치맛자락의 구멍으로 흙이 새면서 여기저기 쌓여 조그만 산들이 만들어져요. 그것이 요즈음 우리들이 말하는 360여개의 화산(오름)들의 탄생 내력입니다. 여신은 치맛자락에 구멍 난 줄도 모르고 창조 노동에 푹 빠졌던가 봐요. 큰 작업을 끝내고
여신은 창조의 디테일에 들어갑니다. 섬의 구석구석에 동굴, 폭포, 해변, 99골짜기도 만들어요. 맹수가 못사는 신비한 골짜기를 만들지요. 풀과 나무들이 자라고 곤충과 새들이 날아드니 사파이어 보석처럼 빛나는 제주섬이 완성 되었어요. 여신은 하늘에서 내려오면서 거인으로 변신했는데 키가 49km, 나중에 아들이 500명. 빨래할 때는 두 다리로 관탈섬과 마라도를 딛었고 한라산을 베개 삼아 누우면 다리가 서귀포 앞바다의 범섬 위에 놓였답니다. 증거도 여기저기 있어요(ㅎㅎ). 고근산 꼭대기에는 동그스레한 여신의 엉덩이 자국이 있고, 범섬에는 설문대가 발가락으로 뚫어 놓은 구멍이 있어요. 또 여신이 툭 쳐서 날려버린 한라산 정상은 수십 킬로 남쪽으로 날아가 산방산으로 남아 있지요.
제주도 창조를 마친 여신은 이제 하늘로 돌아가려고 날개옷을 펼쳤어요. 그런데 날아 오를 수가 없었어요. 여러 번 시도하지만 결국 실패해요. 하늘에서 입고 온 천의가 작업 중에 헤져 여기저기 구멍이 난 것이 화근이었어요. 구멍으로 바람이 세어 부력이 안 생겼지요. 여신은 아무리해도 하늘의 날개옷은 지상에서 고칠 수 없음을 알고는 승천을 포기합니다. 그리고 결심합니다. ‘내가 만든 이 땅, 제주에 영원히 머무르겠다.’ 여신은 마지막 안식처, 좌정할 곳을 찾아 용연, 서귀포 홍리 등을 다니다 결국 신장 49km의 거구를 좌정할 곳으로 수심이 가장 깊은 물장오름 정상에 있는 산정호수를 선택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말을 합니다.
‘나는 이 땅에 스며들련다. 이 섬의 흙은 내 살이요 이 섬의 물은 내 피요 이 섬의 돌은 내 뼈다.’ 말을 마친 설문대 여신이 호수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자 그 때 영롱한 안개가 피어올라 여신의 모습을 살포시 감춰 버렸답니다.
여신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는 여신의 자식들 500명은 울며불며 기다리다 지쳐 그 자리에서 돌로 변합니다. 한라산 영실에 있는 거대 기암들이 모두 이 자식들입니다.
나는 지금도 한라산에는 설문대여신이 살아서 좌정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