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홍콩
지명부터 “향기로운 항구 ” 향항 (香港 )이라서 그럴까 ? 홍콩은 오래전부터 낭만이 출렁이던 천혜의 해협이었다. 1837년 6월 7일, 최양업 김대건 최방제 신학생이 도착했을 때도 무지하게 신났을 것이다. 무엇보다 6개월이나 걸렸던 대륙의 도보 횡단이 완주 되는 순간이었다. 또 신학생으로서 학업에 임할 수도 있었다. 거기다가 당대 최고 선진 문물인 대영제국의 영화가 당, 송 시대부터 터를 잡은 중국의 문화 위에 꽃피우려 하였으니, 동서양이 만나는 ‘세계의 도시’가 따로 없었다. ‘동방의 진주’라 불리던 이 영화는 1842년 아편전쟁 조인식 후 150년이 넘도록, 최강대국의 조차지로서 일신우일신, 나날이 새로운 빛을 더해갔다.
김대건 신부님이 홍콩과 마카오에 한 차례 살았다면 최양업 신부님은 두 차례를 살았다. (이하, 마카오를 홍콩에 포함해서 말해도 될 정도로 두 도시는 가깝고, 홍콩의 비중이 압도적이다.) 두 분이 함께 산 첫 번째는 4년 반 정도 (1837 년부터 1842년까지 중 롤롬보이 피난 기간은 제외)이고, 1847년 초 부제 최양업으로서 재차 갔을 때는 마카오에 있던 파리 외방 극동 대표부가 홍콩의 스타운톤가로 이사 온 무렵이었다.
이때 최부제는 현석문 가롤로 등이 작성한 <기해ㆍ병오박해 82위 순교자들의 행적 >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로마 교황청에 상신한다. 이 시복시성 청원서는 1847년 10월 15일 예부성성 (시성성)에 접수되었고, 1857년 9월 24일에 82위 전원이 가경자로 선포된다. 병오년 순교자의 명단에는 김대건도 있었으니, 김신부님이 성인품에 오른 것은 절친 최양업 부제의 홍콩 체류 덕분이다. 1859 년에서야 최신부님은 경상북도 안곡에서 이 기쁜 소식을 편지로 나눈다. “우리 가경자들이 머지않아 성인 반열에 오르시어 세계의 모든 교회에서 공식으로 공경을 받으실 날이 올 때, 얼마나 기쁘고 영광된 날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정작 한국 순교성인을 만들어낸 장본인은 아직 가경자시니, 최신부님의 느긋한 성품은 천상에서도 여전하신가 보다.
홍콩은 필자가 개인적으로 식도락 호사를 누렸던 곳이다. 2006년 1월 만주벌판의 삭풍은 심양 기온을 영하 30도 밑으로 떨어뜨렸다. 코끝이 알싸하면 영하 10도인데, 영하 30도가 넘으니 마스크 사이로 올라오던 입김이 머리카락 고드름으로 얼었다. 마침 방학을 맞은 필자가 그렇게 하자고 종용한 것인지 홍콩 한인성당 주임인 대구교구 동창이 먼저 부탁해온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여튼 두 달이나 한국에 갈 일이 있다고 미사를 부탁해 올 때는, 정말 “홍콩 갈 듯”이 기뻤었다. 죄송하지만 필자가 지금까지 기억하는 건 신자분들의 얼굴이 아니다. 또 영상 12도밖에 안 되는데도 얼어 죽겠다던 따뜻한 남쪽 기후만도 아니다. 바로 그때 맛보았던 전 세계의 요리이다. 레지오가 8팀 있었는데 수요일 점심마다 강복을 준 다음 한 팀씩 돌아가며 외식을 했다. 단장님들끼리 뭔 얘기가 오갔는지 불문율은 오직 하나, 심양에서 온 신부님이 먹은 국가의 음식은 제외한다는 거였다. 당시 홍콩은 유럽 각국과 남미 수 개국의 음식점이 한 블록 안에 있었으니, 이게 영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2017년, 한국 사제모임 참석차 홍콩에 갔을 때 적잖이 놀랐다. 1997년 영국이 반환한 지 꼭 20년밖에 안 되었는데, 중국말을 하자 환영하는 빛이 아니었다. 우중충해진 도시 역시 동방진주의 때깔은 아니었다. 시민들의 눈에도 빛이 바래졌다. 그러고서 2년 후엔 아니나 다를까, 홍콩시위가 터진 것이다. 아무려나, 여전한 마카오에는 파리 외방 극동대표부와 조선 신학교, 또 앞 벽만 남은 바오로 성당과 김대건 동상이 있는 카모에스 공원이 들러야 할 곳이다.
@작성자 : 이태종 사도요한 신부 (청주교구 , 중국 차쿠 거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