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을 받으면 기분이 좋다. 상은 칭찬이다. 상은 인정받는 것이다. 그러나 국민학교 시절 상을 받아본 기억이 없다. 무척이나 자존심 상할 법한 이야기지만 상이 무엇인지 조차 몰랐다기 보다 나에게는 상 같은 것이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을 했다. 상에 대한 개념이 없으니 더 정확히 표현 하면 상을 받기 위한 어떠한 행동이나 노력을 기울인 적이 없다. 학교는 누나와 형이 다니고 있었고 또래의 친구들이 다니니 그저 거름지고 장을 가는 모양새로 다녔다. 이쯤 되면 집단 따돌림의 대상이 되는 고문관이나 바보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공부를 못하면 개근상이라도 받으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하겠지만 죽을 고비를 수 없이 넘긴 나에게는 개근상마저도 사치였고 언감생심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일 이었다. 약골에 관한 이야기는 또 다른 곳의 이야깃거리로 남겨두고 이곳에서는 상과 관련된 초등학교 시절을 회고해 보고자 한다.
우선 가정환경이 상을 받을 환경이 절대 아니었다. 공부방은커녕 초등학교 6년 가운데 온 식구가 단칸방 생활을 절반정도 하였고 나머지 기간도 코딱지만큼 한 두 개의 작은 방은 여덟 식구가 새우잠을 자는 공간에 불과하였다. 학교에서 돌아와서 벗어 놓은 책 보자기를 끌러보지도 않고 그대로 매고 시계추처럼 학교을 오갔다. 기억 속에 숙제를 한 번이라도 해서 등교한 적이 없었다. 기억에 남는 숙제라고는 여름 방학 숙제로 바늘 못에 짤러 둔 날개 떨어진 방아깨비가 전부 였다.
숙제를 해 가지고 가지 않아서 성적이 나쁜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창피한 일은 발가벗겨서 여학생들이 지나다니는 복도에 손을 들고 벌을 세우던 이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가장 원망스럽게 기억이 남는다. 같은 학년 여학생 반이 바로 옆 반이었기 때문 이었다. 다행인 것은 요즈음과는 달리 여학생들이 내외를 한답시고 한 번도 구경을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국민학생이 상을 받을 수 있는 기회는 우등상과 개근상이 고작이었고 가을 운동회 때에 달리기를 해서 1,2,3 등에게 노트나 연필을 주는 정도였다. 우등상은 예‧복습은커녕 수업시간 조차 반은 졸거나 다른 생각을 하니 우등상을 받을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하늘을 보아야 별을 딴다’는 말이 있다. ‘기회도 노력하는 사람이 잡는 법’ 이다. 나는 달리기조차 잘 하지 못하는 축에 들었다. 왜냐하면 심하게 중이념을 앓아 염증이 흘러내릴까 고개조차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으니 무슨 운동을 하랴! 그런데 기적 아닌 기적이 일어났다. 6학년 가을 운동회에서 노트를 한권 탔다. 초등학교 여섯 개 학년 동안 처음이자 마자막 상이었다. 운동회에서는 한 개조가 7명씩 달리기를 했다. 우리학급은 70여명 이었는데 10개조로 편성되었다. 7명중 연습 때는 5등에서 6등 정도를 했다. 기적은 다름 아닌 1,2,3 등으로 달리던 친구들이 결승선을 앞두고 서로 다리가 걸려 넘어졌다. 개선장군처럼 노트를 들고 달려오던 나에게 어머니가 땅콩이 깊숙이 박힌 고구마를 손에 지어주셨다. 모자는 그렇게 유일무이한 상을 두고 뜨거운 감격의 상봉을 했다. 상의 기운을 받았음인지 또 한번의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당시에는 중학교 진학을 위해서는 입학시험을 봐야 했다. 면소재지에 120명 정원의 중학교가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50-60년대 생을 포괄적 베이비 붐 세대로 일컫는다. 면소재지 중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면내 일곱 개 초등학교에서 50명 정도씩 지원을 해도 최소 삼대 일의 경쟁률이 되었다. 중학교 진학을 위하여는 모의시험지 대금을 포함하여 월200원 정도의 보충 수업비를 내어야 했다. 돈도 없거니와 이산 저산 다니며 소에게 꼴을 먹이는 것이 내 담당이어서 보충수업을 받을 수가 없었다. 학교에서는 보충수업을 받는 사람에 한해서 원서를 써 준다고 했다. 울며겨자먹기로 늦게나마 두어 달 보충수업을 받았다. 우리 동네는 나와 동급생이 20명이었는데 오륙 명 정도가 진학을 포기하고 모두들 원서를 냈다. 그런데 그 시험에서 아버지가 교사인 여자친구와 10여명의 남학생 가운데서는 혼자 합격을 했다. 나의 운명을 갈라놓은 대사건이었다. 1960년대 최고의 음식은 삶은 오징어였다. 기분이 너무 좋으셨던 아버지는 물오징어를 한 궤짝을 들고 담임 선생님을 찾아가셨다. 그날 이후 아버지는 우리 집에 중학생이 있다고 술만 드시면 노래를 부르셨다. 신체적으로 병약했던 나는 운동은 잼뱅이 인줄 알았고 노래는 음치중에 음치요 지능은 바보를 겨우 면한 것으로 가족이나 주위에 인식되어져 있었다.
헬렌 켈러의 어머니는 찰스 디킨즈가 쓴 글을 읽고 헬렌을 교육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선생님의 대명사인 앤 설리번 선생님이 탄생했다. 어머니의 관찰과 역할, 앤 설리번 선생님보다 더 중요했던 헬렌켈러의 선생님으로 마사 워싱턴이라는 흑인 소녀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했던가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시간이 흐르고 부족하지만 나는 합창단 단원으로도 활동을 했고 직장내 체육대회에서는 거의 모든 총목에 출전을 했다.
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
한비수필학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