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한 선교단체에서 나와 고현 누나집에서 신학교 편입을 준비하면서
편입시험 중 하나인 성경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성경을 이전과 달리 집중하면서 읽게 되었습니다.
이전 선교단체의 이름에 '성경읽기'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선교단체였지만 성경읽는 것에 대한 중요성은
제대로 듣지 못한 채 캠퍼스 전도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 성경에 대한 지식은 복음서 로마서 창세기 정도였습니다.
(주로 이 부분으로 성경공부로 배우고 가르치다 보니, 설교자로 나서기도)
그러다 성경을 읽으면서 어렴풋이 하나님께 쓰임받는 이들은 '경제적 가난'을 통해 연단 받는 것을 보고
제 마음에 억지로 '경제적 가난'을 피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경제적 가난'을 받아들여 하루라도 빨리 주의 종으로서 영적 자격을 갖추고 적극적으로 '경제적 가난'을 받아들이면 어차피 겪어야 할 연단의 시간을 줄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릴 때 육신의 아버지의 직업은 표준전과로 유명한 교학사의 부산지부 동구 담당이셨는데 경제적 가난으로 도시락을 못 사거나 등록금을 못 내는 일은 없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부족함을 느끼지는 않고 자랐습니다. 아버지의 일 특성상 무거운 책들을 들고 나루는 일이라 저도 이런 일을 초등학교 어릴때부터 도와 드렸는데.. 체력이 약해서 인지 무거운 묶음 책들을 들고 문방구나 학교 교실에 나를 때면 팔이 떨어지는 육체적 고통도 느끼면서 육체적 노동을 기반으로 하는 직업은 제게 맞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또 땀 흘리며 노동하는 일반적 남자의 삶에 대한 반감을 가진 후 대학 학부를 정할 때 공학보다 자연과학인 물리학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돈이 앞서는 공학도 보다 인류의 미래를 위해 봉사하는 과학자의 모습이 제겐 더 이상적인 삶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과학자로 유명해져 돈도 많이 벌면 좋겠지만 일단 제게 돈은 우선이 아니였습니다. 명예가 돈보다 중요했습니다.
그러다 예수님을 만난 후, 앞선 글에 언급한 것처럼 물리과학자가 아닌 주의 종으로 삶을 살기 위해 신학교 편입을 준비하는 중에 읽게 된 성경에서 '경제적 가난'을 적극적으로 받아 들여 이로인해 얻게 된 영적 유익은 세상 부자의 어떤 어마어마한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이라 생각되었습니다. 이런 경제적 가난의 시간이 끝나 이 시간으로 얻은 영적 깨달음의 은혜를 어쩔 수 없이 대부분의 남자들이 가장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걷는 것으로 얻지 못하는 영적 깨달음의 은혜를 나누면 이로인해 경제적 후원을 받음(어떤 면에서는 구약 선지자의 삶)으로 이 땅에서 인생을 마감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인생을 마감 후 대부분의 남자들이 걸어온 경제적 가치를 우선시 해야 하는 가장의 삶으로 인해 영적 성장은 이루지 못한 이들과 달리 저는 비록 이 땅에서 경제적 가난으로 어렵게 살았어도 내면적으로는 영적 유익을 많이 얻은 자로서 칭찬받을 것이라는 생각도 가졌습니다.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남자의 삶은 세상적으로는 칭찬받을 거룩한 삶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아담의 범죄 이후 찾아온 죄의 결과(하나님과의 관계성 보다 혈육으로 이루어진 가족과의 관계성을 더 중요시 함, 예수님께서도 하나님 보다 혈육을 더 사랑하는 것에 대해 책망하심)
어쨌든 적극적으로 '경제적 가난'을 받아 들인 후, 상상하지도 못한 경제적 가난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서울 사랑의 교회 고등부 교사로 한 팀을 담임하고 나서 졸업식날 가진 돈이 없어 떡볶기 집에서 팀원 중 한명의 학생이 대신 떡뽁기 값을 낸 것은 '경제적 가난'의 첫출발이였고 3년 동안의 오산리 기도원 생활, 7년 동안의 여의도 ㄴㅅ훈련(이때 한번도 무료급식소 이용치 않음,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어떤 행동을 했을까는 상상에 맡김, 북한의 꽃제비는 참조가 됨, 나아가 기도원에 있을 때 몇천원이지만 하나님께 드려진 성도의 헌금에 손을 대는 후에 기도원측에 회개의 사과의 편지를 전하기도, 경찰에게는 붙잡히지는 않았지만 컵라면과 빵을 도둑질하는 생계형 절도도 할 수 밖에 없는 비참한 시간을 보냄)의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비록 몇천원이라도 하나님께 드려진 헌금(오산리 기도원의 예배당 뒤쪽에 있던 헌금통에 입구가 좁아서 천원짜리 뭉치가 걸려있는 것을 보고 젓가락으로 건져내 죽 사먹기도)에 손을 대고 비록 불신자들이겠지만 정직하게 땀을 흘리는 노동의 수고로 경제적 활동을 하는 이들의 빵과 컵라면을 몰래 가져가면서 주의 종을 살겠다는 제 자신은 더 이상 예비 주의 종이 아닌 생계형 절도범에 불과했습니다. 이 중에도 하나님께 경제적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기도원에서 여의도순복음교회 예배당에서 아침저녁으로 드렸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여의도 순복음교회 사순적기간 특벽새벽기도회나때 나누어주던 빵과 음료수를 여러개 챙겨 등에 매는 가방에 모은 것을 들켜 여의도순복음교회 봉사자들로 부터 도둑취급 받기도)
결국 기도원에서의 3년 여의도에서의 7년의 ㄴㅅ훈련을 마친 후 내린 결론은 더 이상 경제적 가난을 벗어나야 겠다는 생각과 함께 지난 시간들이 하나님의 관심 없이 혼자 장구치고 북치고 보낸 시간 같아 지난 시간에 대한 보상심리도 발생해 그후 영등포역근처 원룸텔에 들어간 후 5년 동안은 성경을 읽는 것도 기도하는 것도 쉬었습니다.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정확하게 정리가 되지 않고 나도 할만큼 했다는 생각에...주일날은 가까운 교회도 찾아가지 않고 노트북의 유투브로 신앙적인 설교가 아닌 미래에 일어날 휴거 같은 것에 대해 설교하는 설교를 듣고 한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경제적 가난을 자처해 훈련 받았지만 만신창이가 된 저를 또한 내버려두시는 하나님께 대한 원망과 불신은 지금까지 억누루고 지냈던 육신의 정욕을 추구하는 삶(주로 포ㄹ노 싱청)을 살았고 경제적으로는 웹활동을 통해 얻은 돈으로 먹고 살기에는 부족함이 없었고 오히려 저축할 정도로 돈을 모아갔습니다.
이렇게 5년의 시간을 보내고 난 후, 하나님께 대한 거부감과 반항의 시간을 충분히 보냈다는 생각이 찾아오게 되었고 다시 지난 시간을 뒤돌아 보고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회복하자는 마음에 숨겨두었던 성경책을 다시 읽게 되었고 하나님의 뜻을 찾는 기도를 하게 되었고 나머지 제게 주어진 이 땅에서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이때 제 나이는 1996년도 청년의 나이에서 50의 중년을 맞이 하게 되었고 탈모에 새치흰머리에 배나온 전형적인 아저씨의 모습이였습니다. 2,000만원 가량의 돈을 모았기에 이 돈으로 무엇인가 해야 겠다는 생각에 성경을 읽으면서 관심이 들어온 사람의 몸(육적으로 긍정적인 면으로)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전에는 성적인 호기심으로만 여겼던 '마사지'를,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의 몸에 대해 알고 싶어 대림동에 있는 마사지 학교에서 여러가지 마사지 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후 코로나가 찾아오면서 마사지 교육 후 생각했던 계획(2년 정도 실제 마사지사로 스킬을 키운 후, 발마사지 봉사로 최종적으론는 성폭행으로 상처를 가진 여성들을 돕는 봉사자의 삶을 살려고)은 뒤로 미루고 당장 원룸텔에서 월세로 옮기면서 가지고 있던 돈을 거의 다 사용하였기에 강원도 대관령으로 돈을 벌러 가게 되었습니다. 이 때도 당장 돈이 목적이였지만 공학보다 자연과학을 택한 기질이 발동해 흙으로 지어진 사람의 몸에 대한 영적 유익을 얻을 것을 더 우선시 하는 마음을 가지고 강원도 대관령에 일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여러 알바 중 건설현장 알바도 자주 가봤지만 타고난 기본 체력이 약해서 오래도록 할 수 없었기에 강원도 대관령에 가서 한달도 버티지 못하고 돌아올 것을 기정사실화하고 갔는데 6개월을 보내게 되었고 흙위에서 일하는 대관령 환경의 특성상 일하면서도 제가 밟고 있는 흙에 대한 묵상을 통한 영적 유익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6개월동안 오로지 제가 흘린 땀의 댓가로 정직하게 경제적 활동을 하였고 이후 저는 사람에 대한 이해(흙으로 지어진)의 마침표를 찍고 어떤 모양으로던 하나님께 쓰임받고 싶었고 이렇게 하나님께 쓰임받음으로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신 후원자들의 후원으로 살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급성우울증이 찾아오면서 우울증 상태에서 생활비와 대출금을 갚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다시 대관령으로 일하러 갔지만 이전의 일잘한다고 칭찬받던 저의 모습은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일을 못한다 수준이 아니라 사망자가 생길 안전사고를 일으켜 민폐를 끼칠 날이 올 것 같아 결국 한두번 서울로 돌아오다가 최종적으로 대관령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젠 급성우울증과 혼자 싸우는 시간동안 2년차 대관령에서 일하며 모은 돈은 월세내는 것만으로 벅차 결국 고독사 집주인분에게 피해를 주지 말자는 생각에 최소한의 짐을 챙겨 야반도주(?)하게 되었습니다. 200만원의 보증금은 받지 않은 채 나머지 가지고 있던 몇천원은 편의점에서 삼각김밥과 컵라면으로 떼우고 나니 수중에는 단 십원도 없었고 은행계좌에도 제로였습니다. 이젠 남아 있던 경제적 활동의 정신력이나 체력은 바닥을 보였고 급성우울증은 도움을 고사하고 안전사고의 가장 큰 원인(건설현장의 높은 건물층에 있을 때 투신의 유혹을 강하게 받음, 대관령에서는 큰 나무마다 목멜 생각에 사로잡혀)을 제공하였습니다.
이렇게 모든 경제적 활동의 능력은 제로를 벗어나 마이너스 상태(경제적 활동의 현장이 자살하고픈 충동의 현장으로 바뀜)에 서울역나기를 시작하게 되었고 다행히 우울증관련 책치료를 통해 자살 충동에서 벗어나 살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우연히 알게된 앱테크로 한달에 10만원도 못되는 벌이는 주변 사람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아도 되는 정도로 벌이가 되었습니다.
1996년도 제가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경제적 가난'을 통해 연단 받은 자들을 주의 종으로 서시는 것을 보고 히후 적극적으로 '경제적 가난'을 받아들인 삶을 살았지만 원치 않게 하나님께 드려진 헌금(비록 몇원이라도)에 손을 대고 마트의 빵과 컵라면에 손을 대는 생계형 절도범의 살면서 그리고 지난 2년 동안 돈이 없어 우울증치료까지 받지 못해 서울역으로 도피할 수 밖에 없는 경제적 가난의 삶은 자주 하나님 보다 돈이 더 인간의 존엄을 살려주는 도구로 생각되어 96년도 개인적인 결단(경제적 가난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임)을 후회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면을 좋아하지만 라면 위주의 지난 시간의 식단은 무료급식소에서 이전 보다 더 잘 먹게 되면서 후회스럼도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 3년 차 서울역나기 후 남은 제 인생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결정해야 하는데 제가 하나님으로부터 주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지 않았다면 남은 인생은 거저 신앙적으로 문제되지 않는 경제적 직업을 가진 후 평범한 평신도의 삶을 살던지 까마귀로부터 3년동안 고기를 공급받은 엘리야가 이후 선지자의 삶을 더 적극적으로 산 것처럼 주의 종으로 살던지 가부간의 결정을 내려야 할 것 같습니다. (급하게 글이 길어지는 것 같아서 마무리 짓고 다음에 기회내면 연결해서 제 경제관에 대해 글을 적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