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엉골(범골) (순례지/성지)
간략설명: 배론 신학당의 꿈을 이어
지번주소: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부평리 581
여주 또는 문막 나들목에서 나와 42번 국도를 타고 여주와 문막 중간쯤에 위치한 부평 교차로에서 남으로 3km 가량 세종 천문대 방향으로 내려가서 천문대를 오른편으로 끼고 1km 정도 간 뒤 다시 우회전해서 계곡 안쪽으로 1km 정도 거슬러 올라가면 부엉골 예수 성심 신학교 터가 자리 잡고 있다.
이 예수 성심 신학교는 1885년 10월 28일 개교하여 온갖 수난과 역경을 이겨내면서 성소를 키워 내 오늘날의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을 있게 한 모태이다. 최초의 방인사제 김대건 안드레아(金大建, 1821-1846년), 최양업 토마스(崔良業, 1821-1861년) 신부의 뒤를 이어 한국 교회의 목자들을 키워 낸 성소의 못자리는 바로 이곳에 그 첫 씨앗이 뿌려졌던 것이다.
예수 성심 신학교 초창기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이 자료는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의 기원을 1885년 10월 28일에 개교한 부엉골 예수 성심 신학교로 보고 있으며, 또한 1902년까지 초기의 학생 84명에 대한 약력을 소개하고 있다.
조선교구 제7대 교구장 블랑(Blanc, 白圭三) 주교는 당시 국내 사정이 여전히 불안하고 인원도 부족해서 신학교의 설립을 망설이고 있었다. 하지만 페낭 신학교의 한국 학생들이 그곳의 기후와 풍토를 이겨 내지 못함으로써 그들의 철수가 시급해졌고, 이미 1884년에 일부가 귀국하게 됨에 따라 신학교의 설립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페낭 신학교에 보관된 자료에 의하면 1884년에 전 안드레아, 이 아우구스티노, 한 바오로가 귀국했고 이듬해에 최 루카가 귀국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렇게 해서 서둘러 개교한 부엉골의 예수 성심 신학교는 임시로 초가 몇 칸을 매입해 신학교를 설치, 요셉 마라발(Joseph Maraval, 徐若瑟) 신부가 홀로 교수직을 맡고, 여기에 페낭에서 돌아온 학생 4명과 조선에서 입학한 3명을 포함해 모두 7명의 신학생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부엉골 신학교는 그리 오래 운영되지는 못했다. 시설이 좋지 않은데다 학생 수도 얼마 되지 않았고 그 동안 콜레라로 인해 한문 교사 1명과 학생 1명이 사망했다. 그러는 동안 1886년에 한불조약(韓佛條約)이 체결 · 비준되면서 블랑 주교는 신학교를 다른 곳으로 옮길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개교 2년이 지난 1887년 봄, 부엉골 예수 성심 신학교는 용산 함벽정(函碧亭, 현 용산구 원효로 4가)의 커다란 조선 가옥에 꾸며진 새 보금자리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