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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숙의 아포리즘, 그 시문화詩文畵의 미학
박 양 근(문학평론가)
1. 들어가기
노정숙은 “사람이 좋아서 시와 수필 밭에서 함께 놀고 있다.”는 작가이다. 날라리 신부에서 날라리 할머니가 되었다고 자신을 자평할지라도『바람, 바람』이라는 시화집만으로도 그의 문학적 낯섦과 치열성은 넘보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2000년 <현대수필>봄 호에서 「말 한마디」로 등단하기 전부터 이미 독서로 문학적 내공을 쌓아올렸고 여행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시와 수필 밭을 떠나본 적이 없다.
수필에서는 제1에세이집 『흐름』을 2001년에, 제2에세이집 『사막에서는 바람이 보인다』를 2007년에 상재하였다. 2013년에 아포리즘 에세이 『 바람, 바람』과 수필집『 한눈팔기』를 동시에 발간하면서 제9회 구름카페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십여 년이 넘도록 <시인회의>와 <분당수필문학회>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도 한번 맺은 인연을 중시하는 그의 성품을 보여준다.
4권의 에세이집을 나란히 세울 때 나타나는 그녀의 초상은 시적 아포리즘을 추구하는 에세이스트라고 하겠다. 독서력과 그림을 바탕으로 한 노정숙의 수필을 대할 때 두드러진 특징은 여류수필에서 찾기 어려운 내용과 형식이다. 여성으로서 어찌 이러한 관심을 지닐까 궁금할 정도로 정치, 여행, 미술, 술에 이르기까지 전개되는 지식과 언어 구사력은 참으로 넓다.
대가족의 맏며느리로 시집간 후에도 눈치껏 국외여행을 떠나곤 한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필연적으로 문학과 그림과 여행과 독서로 엮인 그녀만의 아방가르드 문학이 만들어졌다. 마침내 그녀는 지성과 감성을 지닌 아포리즘작가라는 필력筆曆을 얻는다.
2. 노정숙 에세이의 형성과 진화
노정숙의 산문은 사건전개나 서정적 감동을 중시하지 않는다. 한국수필계에서 여성에세이스트를 찾기 어렵고 아포리즘이 본격적으로 거론되기도 전에, 시적인 간결성과 산문정신으로 사회문제를 다루면서 수필과 다른 에세이를 구축하였다. 첫 작품집인『흐름』에 “노정숙 에세이”라는 명칭을 당당하게 붙이는 것도 자신의 문학적 진로가 확고하기 때문이다. 제1에세이집에 “치열하지 못한 삶에 대한 반성과 답답함”을 풀겠다고 밝힌 그는 제2수필집『사막에서는 바람이 보인다』에서는 “서로 불화하면서도 (더불어) 살 수밖에 없는 이 땅에서 희망”을 얻으려 하였다고 고백한다. 무력한 일상을 떠나 세상과 소통하려는 자아로서 노정숙은 「고백」이라는 수필에서 “사는데 자극이 필요하다. 쓰는데 자극이 필요하다. 끊임없이 갈증에 목이 타는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는다. 데카르트가 말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를 실천하려는 듯 말과 글을 생명수로 삼고 있다. “적게 말하되 많이 듣고, 듣는 것보다 생각하고, 생각하는 것보다 써야한다.”고 믿는 노정숙은 “감성 없는 지식은 공허하고 지식 없는 감성은 잡다하다.”는 말로써 독서에 대한 갈증과 사회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기도 한다. 이것들은 작가로 나아가는 그녀의 방문榜文이고 출사표이다. 이지적인 안목으로 사회문제를 응시하려는 욕망으로서 사회 엿보기는『흐름』의 제2부 <비평, 그 안과 밖>에서 다각도로 펼쳐진다.
정곡을 찌르는 통쾌함이 비평의 매력이다. 바른 비평은 사랑이다. 남에게 칭찬을 해주기는 쉽다. 그러나 오류를 지적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지극한 관심과 애정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침묵하는 다수의 비판을 생각하면 더욱 무거워진다.
- 「비평, 그 안과 밖」 일부
비평은 “사랑이 담긴 비판”이라는 견해는 산문쓰기에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다. 일본의 역사왜곡, 화가의 고뇌, 문학비평 이론, 장애우 문제, 월북 작가, 인터넷문학의 허실, 주부의 가출, 공자의 정치론 등은 독서 영역이 무엇이며 에세이에 어떻게 반영되어야 하는가를 밝혀주는 테제에 해당한다. 비평이란 작가의 외적 시선으로서 글쓰기이므로 경구적이고 교훈적인 문체를 주로 사용하기 마련이다. 노정숙의 에세이는 일상 경험을 작가의 이지적 언어로 귀환시키는 만큼 『흐름』에 실린 안목과 문장은 명쾌하기 이를 데 없다.
노정숙은 「작가의 말」에서 인연을 소중히 여긴다고 하였다. 사람은 만남의 인연으로 살아간다. 그녀는 가능한 한 이상적인 인간형과 대면하기를 원한다. 이상적인 인간형이란 적당주의를 비판하고 ‘차이’와 ‘함께’를 소중히 여기고 그 가치에 사랑과 돈과 시간을 할애하는 사람들이다. 그는 자신마저 늘, 어디서나 새롭게 태어나기를 원한다. 책을 손에서 떼지 않는 전업주부였던 그녀가 의류할인점을 동업했던 기간을 「5년간의 외출」로 간주하고 ‘돈을 벌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대견하게 발견하고 친구와의 만남을 예술에 눈뜬 계기로 삼는 것은 만남의 자기화를 이루어낸 일화들이다
이러한 삶은 자전수필 「흐름 속에 나」와 「일상」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녀의 기질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작은 체구의 어머니로부터는 부지런한 근면을, 육척장신의 아버지로부터는 몽상적 끼를 이어받았다. 부지런한 몽상적 끼야말로 그녀로 하여금 억척같이 문학판을 누비게 하는 내공이다. 첫 에세이집이 노정숙의 이러한 기질에서 시작한다는 점에서 앞으로 지향할 그녀의 문학적 정체는 비평적 문학관, 독서로 연마한 언어 구사력, 문자와 그림의 결속, 아포리즘과 에세이를 융합하고 그 흔적이『흐름』 이후에도 이어지리라 짐작이 간다.
사회 비평의식과 자아 정체성 탐구는 『사막에서는 바람이 보인다』로 이어진다. 『흐름』을 발표한 이후 발표한 단상斷想에 작가 정신을 공유한 벗인 임은자의 그림을 붙여 퓨전화한 두 번째 에세이집에서 그녀는 “이성과 감성이 제 구실을 다했는지” 살피고 싶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녀의 수필론을 구현한 것이기도 하다.
내 안에 잠재한 또 다른 나를 만나는 작업이 수필세계다. 그곳에서는 미지의 세계에 목마른 방랑기와 풍류에 흩날리고 싶은 바람기도 허락한다. 위악僞惡의 옷을 입고 손닿지 않는 현실에 조소를 던지기도 한다. 벗음으로 느끼는 카타르시스가 있다. 때로는 좋은 사람을 만났을 때를 상상하며 수필을 대한다. 솔직함을 최선으로 하며, 치장을 최소화한다. 눈치 보며 밀고 당기는 소모전은 배제한다. 눈에서 시작하는 감성에 충실하지만 서두르지 않고 여과의 과정을 거친다. 긴 시간 퇴고를 하면서 격렬했던 감정도 삭히고 다듬는다. 편안하되 가볍게 대하지는 않도록 장치한다.
- 「선 채로 꾸는 꿈」 일부
작가는 5부로 이루어진 『사막에서는 바람이 보인다』를 엮는 동안 오감이 열린 시간을 즐긴 듯하다. 지친 인간의 삶에 재미거리를 주려는 마음이 깔려 주제는 더욱 다채로워지고 생활인과 작가로서 인생을 풀어내기 때문에 무거운 철학성과 가벼운 오락성을 벗어난 칼럼 같은 에세이에 접근한다.
「귀에게 바침」은 그 예문으로 제시할 만하다. 사귀던 남자의 집에 첫인사를 하러 갔을 때 들었던 “앞으로는 귀를 내 놓고 다니거라.”라는 사적인 대화를 인문학적 시선으로 풀어내어 연인의 귀, 악마의 귀, 그리고 예술가들의 귀까지 이야기한다. 뿐만 아니라 「계율: 늙지 말 것」은 조각가 로댕과 소설가 엘리엇 아베카시스의 일화를, 「멋진 환자」는 작가 젤린스키를 소개하고 둘째오빠의 죽음을 다룬 「좋은 죽음」조차 문학적 관점으로 그린다. 『사막에서는 바람이 보인다』에는 독서를 통하여 노정숙이 만난 숱한 철학자, 시인, 정치가, 유명배우, 영화감독, 조각가, 노벨문학상 작가, 브라질 원주민 등이 차례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세계 인물평전이라고 하여도 손색이 없다.
그녀는 평범한 일상과 대면하여도 숨이 차다. 사소한 만남조차 “Who's Who”에 대한 목마름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여물지 못한 말”과 “그 언어의 언저리에서 서성이는” 자신이 불쌍하다고 단정한다. 작가로서의 한계성을 자각하고 언어에 대한 거침없는 욕망은 새로운 미적 세계로의 의욕을 불러일으키고 있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사막에서는 바람이 보인다』가 지닌 다른 구조적 특징은 아포리즘이라는 짧은 산문이 도입된 점이다. 그림이 있어 곁가지 수식이나 설명이 필요 없다고 느낀 탓인가. 친구이자 예술의 반려자인 임은자의 영향 때문일까. 아니면 수화隨畵에세이에 대한 남다른 눈뜸 덕분일까. 그 어느 경우이든 제3장 <즐거운 쉼표>는 노정숙의 전위적 실험을 한껏 펼쳐내는 무대이다. 「능동의 욕구」, 「풍경은 얼굴을 가지지 않는다」, 「실수」, 「남자의 매력에 대하여」, 「딴 황동규」, 「각성」 등은 원고지 5매의 압축성과 메스 같은 아포리즘 담론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에서 「유효기간」은 이런 요건을 갖춘 대표작에 속한다.
‘통조림보다 짧다. 사랑의 유효기간’
오랜만에 탄 전철에서 본 광고다. 어쩌면 당연한 이 말에 걸려 넘어졌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당당하게 말하는 영화 대사에서 시대의 사랑을 눈치 챘어야 했는지. 변화에 발맞추지 못하는 이 아둔함이라니. 그런데 이 문구가 무엇을 광고하자는 것이었는지 정작 생각이 나지 않는다.
세련미의 극치에서 오는 허무감인가.
- 「유효기간」 전문
단수필에 대한 노정숙의 관심은 10여 년 동안 공부한 시적 영향을 부정하지 못한다. 수필과 시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작법은 산문시와 혼동하기 쉽다. 하지만 노정숙의 경우, 시의 형식과 산문정신이 합치고 그림 이미지의 뒷받침을 받으면서 미니멀리즘으로 발전한다. 미니멀리즘은 오브제가 그대로 작품이 될 수 있다는 뒤샹의 형식으로서 종래 예술이 지향했던 감성적 표출을 거부하고 엄격한 구성 원리와 단순한 형태를 채택하여 본질이나 주제를 강조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림의 제목처럼 “내게서 떠난 여물지 못한 말들이 불쌍하다”, “언제부터인가 남자들은 우는 법을 잊어버렸다”, “가시를 무디게 하지 마라”, “기다리면 더디게 오는 법, 이제는 내려놓는다.”, “그냥 내가 좋아하는 일만 한다”는 경구적 문장이 여기에 속한다. 아포리즘 내용과 미니멀리즘 형식을 결합한 대표작 중의 하나가 「각성」이라고 하겠다.
「각성」은 짧은 길이, 삽화의 도입, 교훈과 격언이 이어지는 연쇄적인 문장으로 되어 있다.
사랑의 또 다른 분석, 새로운 사랑은 없다. 사랑의 본질은 측은지심이다. 그를 향한 아니, 나를 향한 측은지심, 말과 몸의 측은지심. 이 가을, 더욱 쓸쓸해지는 각성이 아닌가.
- 「각성」 일부
사랑에 대한 무망함을 알려주는 격언이 단락 내에서 이어지면서 측은지심과 비움으로 진행하던 내용이 마침내 “기다리면 더디게 오는 법, 이제는 내려놓는다.”는 방점으로 마무리한다.
작가는 고향이나 가족을 그리움으로 음미하지 않는다. 냉정할 정도로 건조하다고 할 정도로 군더더기를 덜어낸다. 그녀는 아마 사막에 가더라도 낙타나 오아시스를 찾기보다는 사막 바람만으로 낙타와 오아시스 나뭇잎을 떠올릴 것이다. 자신의 삶보다는 사회 현상을 응시하면서 수필의 신 원리를 찾아낸 두 작품집은 에세이의 ‘흐름’을 시종 따르고 있다. 제2 수필집에는 삽화가 배열되어 있지만 두 수필집은 샴쌍둥이처럼 주제, 문체, 경구의 개입, 인문학적 지식, 미니멀리즘, 기행수필이라는 은 동질 요소들을 공유한다. 이것이 ‘노정숙 에세이’라고 당당하게 붙이는 이유라 하겠다.
3. 아포리즘 시화詩化와 겹눈 뜨기
문학세계에 발을 디딘 노정숙에게 멈춤이라는 표지판이 없다. 개인적으로는 가족생활이 안정기에 접어들었고 중견작가의 이름을 얻고 여행자로서 세계를 기행하는 여유도 즐긴다. <현대수필> 편집위원과 분당수필문학회 회장을 거치고 <시인그룹>에서 시작詩作을 이어오고 있다. 역으로 풀이하면 십여 년의 세월로 인하여 타성과 권태에 젖기 쉽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노정숙은 이러한 주변의 염려를 조롱이라도 하듯 신선한 실험창작을 그치지 않는다. 2012년 「시작」에서 시인으로 등단하고, 2013년에는 사진을 곁들인 아포리즘 에세이 『바람, 바람』과 『한눈팔기』라는 에세이집을 동시에 발간하였다.
두 작품집은 노정숙의 최근의 문학적 변신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전자가 산문시를 연상시키는 짧은 글과 사진 이미지가 결합하여 아포리즘 에세이라는 새로운 진전을 보여준다면, 『한눈팔기』는 사회성 에세이로부터 개인적 자화상으로 선회한 시선을 찾을 수 있다.
『바람, 바람』에서 노정숙은 “소설이 될 만한 생의 내력도 간결하게 뭉치고 시가 될 절정의 순간도 눙쳤다”라고 말한다. 다사다난한 삶과 시적 희열을 “거친 창唱과 곡哭”으로 뭉치고 담백한 언어로 눙친 기법은 생의 환희와 고통을 태워버린 후 사리 같은 언어로 표현할 때만 가능하다. 그녀가 이루어낸 아포리즘 에세이의 본성이 이것이다. 생의 아픔조차 자신을 키워준 인연이라고 감사하는 문학적 입신이 그의 아포리즘이기도 하다. “일상의 순간을 소묘하는 80편의 아포리즘 에세이”가 세상의 다양한 표정과 시적 전율의 순간을 배합해준다. 소설적 서사와 시적 응축에 몰입하고 구속에서 자유로움을 얻은 작품을 비유하라면 바람처럼 편력하는 선승의 바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녀는 왜 바람 여행을 떠나는가. 그 이유는 『한눈팔기』에 실린 「괴테를 찾아서」에서 찾을 수 있다. “체험을 통한 예술작품의 이해는 또 다른 문화 속으로 융해되어 자신만의 경지를 (갖게 된 것을) 말한다.”로 정의된다. 여행이 예술관을 새롭게 정리해주는 “생의 흐름과 인연의 만남”이라는 작가의식이 그녀의 아포리즘을 개척해 나간다. 인간의 공시적 삶을 하나의 공간으로 형상화한『 바람, 바람』의 제1부 <바람의 편력>은 시체를 태우고 목욕을 하고 빨래하는 「갠지스 강가에서」로 대변된다. 생사가 하나라는 깨침은 사막의 쌍봉낙타를 등장시킨 「눈물 표지판」과 자작나무를 오르는 회색 곰을 그린 「겨울 채비」로 이어져 운주사의 와불을 “누운 자에게 말 걸기”로 읽어낸다. 그녀의 발걸음은 마침내 보들레르의 안식처인 「시인의 집」에서 멈춘다.
제2부 <미안하다, 사랑>과 제3부 <백년 학생>은 오감이라는 시적 프리즘으로 순화시킨 작품으로 묶여있다. 지성보다는 사진으로 배양한 작품이 다수를 차지한다. 「소금」, 「박꽃」, 「겨울 산」, 「꽃뱀」, 「낮술」, 「A4용지」, 「가로등」은 미물이 어떻게 생명의 존재로 거듭나는가를 일러준다. 노정숙이 감수성을 이미지화하는 과정은 모티브에 영적 텔레파시를 투사하여 그 전율을 포착하여 농축시키는 것과 같다. 가로등을 “한눈 잃은 가로등”, 프라이팬을 “깊이 댄 흉터 하나”, 박꽃을 “하룻밤에 피고 지는 생”으로 의미화하고, 가스 불에 올려놓은 빨래를 지켜보며 “너도 한번 타 봐” 라고 자아를 일깨우기도 한다. 모든 형상마다 아포리즘의 자질을 내포시키면서도 “재미있게, 쉽게 써서 감동을 준다.”는 문학정신을 지켜오고 있다.
3년 동안 쌓아두었던 소금자루를 헐었다. 간수가 빠진 소금은 보송송 살갑게 얽혀 있다.
독기 쓴기 다 버리고, 달다
50년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울끈울끈 삐죽빼죽 간수가 빠지지 않은 나는 뭔가. 간수가 빠지고 나면 또 달기는 할까.
- 「소금」 전문
「소금」에는 3년 동안 쌓아둔 소금을 허는 행위와 “보송송 살갑게 얽혀 있다”는 감수성과 “독기를 빼면 달다”라는 아포리즘과 “나의 간수가 빠지면 달기는 할까”라는 자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가는 구태의연하고 현학적인 형식을 단연코 거부하고 자아를 해탈시키는 수필시학을 세우고 있다.
4부 <사람 풍경>은 지금까지 감추어온 작가의 집안내력을 엮어낸다. 그녀는 가족의 일원이 아니라 방관자처럼 개개인의 인생사를 사람 사는 풍경화로 그려낸다. 아흔이 넘은 고모는 첫눈에 반해 결혼했지만 이혼을 했고, 외할머니는 정미소 핏대줄에 팔을 빼앗겼고, 한량 아버지는 몇 달 만에 집을 찾아오고, 큰 엄니는 시앗에게 안방까지 내어주었다. 소설보다 더 소설적인 집안 이야기가 울음죽인 곡哭으로 들린다. 시집가는 딸에게 ‘네 향기를 버리지 말라’고 타이르고 신림동 고시원에서 공부하던 때의 아들에게는 ‘광야로 떠나라’고 격려하는 부분에서는 경쾌한 창唱의 가락이 들려온다. 이러한 2중주를 듣고 있다가도 곰국이 타는 매캐한 냄새에서 육신을 태우는 다비를 떠올린다는 글에서는 생사의 본질이 같다는 이치를 찾아낸 그녀의 내공에 무릎을 칠 수 밖에 없다. 어릴 적부터 중 장삼 색깔을 좋아했던 작가는 “몸, 지다”라는 철리哲里와 “세상이 그냥, 지네”라는 극도로 압축된 아포리즘으로 삶에 대한 미련을 단숨에 정리해버린다. 이토록 가벼우면서도 무겁기 짝이 없는 알고리즘이 노정숙 수필의 ‘혈穴’이고 노정숙의 “창唱과 곡哭”이 요동치는 수필의 심장이기도 하다.
마침내 노정숙의 에세이는 『한눈팔기』라는 포즈에 다다른다. 그의 한눈팔기는 두 눈을 감고 세상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어둠속에서 섬광 같은 빛을 만날 때 저절로 한 눈만 뜨는 것처럼 미지근한 현실에서 탈출할 수 있는 뜨겁고도 냉정한 몸짓이다.
바라보기는 열망이다./ 바라보다 지치면 한눈팔기를 한다./ 한눈팔기는 모색이다./ 이내 모든 것을 아우르게 되지만 끊임없이 나를 벼린다./ 바람 넣기로 굳어지지 않으려 애쓴다./ 세찬 바람 속에서 비상하는 바람을 품는다.
- 「작가의 말」에서 인용
『한눈팔기』라는 제목은 나스메 소세키의 소설에서 빌려 왔다. 인생이란 태어나고 죽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는 사실을 현재의 관점과 과거의 관점으로 보여준 자전소설처럼 노정숙의 인간관도 완성되지 않는 삶을 반추하며 살아가야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는 초기의 두 에세이집에 나타난 사회적 지향성이 축소되고 제3작품집의<사람 풍경>을 보다 풍성하게 반영한 흐름을 잇는 작품집임을 암시한다. 아포리즘 에세이에서 자전적 반추로의 변화를 알려주는 서곡은 「冊, 울다」로서 『바람, 바람』에서 동일제목으로 발표한 글이 본격수필로 확장된 작품이다. 내적독백을 바탕으로 책이 주체이고 작가가 타자가 되어 명편名篇을 성취하지 못한 좌절과 절망을 토로하고 있다.
마음 먼저 달려가는 어설픈 고백과 울툭불툭 치닫고 올라오는 대책 없는 열정으로 밀고나간 것이 내 잘못이다. 유려하게 분칠하지 못한 건 내 실수다. 눈에 번쩍 뜨일 삼박한 말을 찾지 못한 것 내 죄다.
그러나 혀끝이 달콤하지 않다고 투정하며 내 진면목을 헤아리지 못한 건 그의 잘못이다. 민얼굴의 신선함, 꾸미지 않은 날것의 풋풋함을 읽어내지 못하는 건 그의 실수다. 반짝이진 못해도 내 깊은 속내를 따라오지 못한 건 그의 죄다.
- 「冊, 울다」의 일부
책이 자책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책은 독자들이 흘린 눈물로 얼룩이 지기를 원하지만 작가는 책을 벽에 내동댕이친다. 이러한 자학행위에는 “나도 언젠가는 내 꼴에 맞는 값”을 이루겠다는 작가의 꿈이 깔려 있다. 이러한 작품으로는 「못난이 백서」, 「안녕, 스티브」, 「술꾼, 글꾼」, 「치명적 사랑」과 같은 수필과 「이 적나라함」, 「그 한마디」, 「불편한 독서」 등의 평설 에세이를 들 수 있다.
『한눈팔기』는 수사법에서도 남다른 특징을 보여준다. 세상을 채소밭으로 은유하고, 폐경을 완경으로 풍유하며, 복권당첨은 “대책 없는 자뻑이나 막무가내의 긍정”이라는 반어법으로 표현한다. 생에 대한 치열성 조차 ‘난 죽었다’는 아이러니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술과 글을 대비하는 경우, 술과 글은 마음을 푸는 도구다.” 라고 두 개념을 일치 시키면서도 “폭음 후에 쓸 만한 글 한편 건진다면 매일 밤 내 간을 혹사시켜도 좋겠다.”는 자학에 가까운 결연한 마음을 행간에 담기도 한다. 과장법의 멋을 음미하기에 앞서 글에 대한 노정숙의 짝사랑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한눈팔기』에 나타나는 세 번째 초점은 삶과 인생에 모아진다. 그는 자신의 모습을 ‘집에 있는 갖가지 전자제품처럼 고물이 되어간다’고 표현할지라도 겸손하면서도 위엄 있게 늙어가는 어른이기를 바란다. 고물과 골동품으로써 아포리즘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폐경기 이후 여성의 몸이 비로소 신을 영접하며, 지혜가 본격적으로 가동하는 시기라는 설을 믿게 한다. 휘번들거리지 않으면서 그윽한 향취가 있다. 여유로운 인품에 절로 머리를 조아리게 한다. 물건으로 말하면 오래 간직할수록 값이 올라가는 골동품과 같다
- 「고물론」 일부
노정숙은 “말랑말랑한 노인”을 미래의 초상화로 내건다. 이러한 감성을 바탕으로 어머니의 딱딱한 발톱을 깎으며 가슴이 저렸던 이야기를 「노인은 나의 미래」에서 거듭 제시한다. 아포리즘 에세이가 먼저인지, 본격수필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녀는 어머니의 이미지를 닮고 싶은 것이 분명하다. 심지어 유서산문 「나를 받아주세요」에서는 죽음에 대한 달관을 보여주기도 한다.
노정숙의 종교관은 「해찰하다」와 「지저스, 지저스」에 나타난다. 두 작품은 십자고상이 벽에서 떨어져 십자가와 예수가 분리된 사건을 소재로 한다. 홀쭉한 예수의 아랫도리를 공통적인 소재로 삼고 있지만 아포리즘 수필인 「지저스, 지저스」가 예수의 부활을 초종교적으로 풀이한다면, 「해찰하다」는 자아의 구원을 꿈꾸는 신변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십자고상이 벽에 거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이 짐 져야하는 희생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기행작품도 외면할 수 없다. 제4부 <바람 넣기>는 노정숙의 인문학적 편력을 보여준다. 그중에서 「내 침대」는 아포리즘 에세이 「그 침대」를 확장한 작품이다. “그 침대”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를 다룬 글이라면 “내 침대”는 가족 간의 어긋난 생활방식을 진솔하게 보여주는 산문이다. 「마두금 가락에 날다」 또한 아포리즘 수필 「눈물 표지판」을 확장한 것으로 자신을 “등짐을 잔뜩 싣고 사막을 건너는 쌍봉낙타”에 비유한 점에서 종교적 희생과 순례에 가깝다.
현대는 불신과 배신으로 메말라 버린 사막과 같다. 그 현장에서 살아가는 인간을 위해 울리는 음악이 마두금의 가락이다. 노정숙이 현실을 떠나 바람의 여행자가 되려는 이유는 문학이 필요로 하는 영감과 상상의 기운을 얻기 위해서다. 문학에서 바람이 상징하는 것은 시적 영감이 아닌가. 노정숙은 『흐름』부터 『한눈팔기」에 이르기까지 한 눈으로는 현실을 바라보고, 다른 편으로는 책과 글과 여행에 다른 한눈을 팔아왔다. 두 눈은 짝눈이 아니다. 노정숙은 세상을 직접 살피며 글을 쓰기 때문에 겹눈 같은 수필미학을 이어올 수 있다.
4. 다시 바람이 불면
노정숙은 첫 에세이집 『흐름』부터 제4 에세이집 『한눈팔기』에 이르기까지 시종 외면하지 않았던 것은 ‘바람과 바라보기’ 이다. 그는 풍요의 도시를 떠나 막막하기 그지없는 사막으로 걸어 들어간다. 때로는 번잡하기 이를 데 없는 거리를 떠나 적막한 책의 공간으로 들어간다. 그 속에는 늘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바람이 불고 돌아올 때면 그녀는 딴 사람이 된다. ‘되어보다가 죽을 지라도 딴 사람이 되려는 욕구’가 얼굴에 가득하고 어깨에 짊어진 바랑에는 생의 이면을 보면서 넉넉해진 작가의 문학 작품이 담겨 있다.
그의 문학은 가벼우면서도 무게를 지닌다. 시적 사색이라는 약탕에서 달여진 소재를 잔잔하게 풀어내지만 눈매는 예지로 번득이고 언어는 수도승의 옷자락처럼 자연스럽기 이를 데 없다. 아포리즘 에세이도 촌철살인의 비판보다는 온고지신의 포용으로 풀어내어 허허실실보다는 허즉허, 실즉실의 냉정과 열기를 함께 갖는다. 노정숙의 바람은 다시 어디로 갈까. 그녀의 시선과 발걸음이 향하는 방향은 알 수 없지만 한국수필의 현대성은 그녀가 있음으로 지평이 넓어지리라 기대한다.
- <현대수필> 2014.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