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탄로난 비밀(秘密)
[1]
유청풍이 원화각에서 고혜원에게 요리를 가르친 지도 어언 한 달이 지났다.
요리 시간표는 그녀가 완전 초보자라 비교적 단조롭게 짜여졌다. 밀가루 반죽과 만두피 빚는 요령, 그리고 간단한 반찬을 만드는 방법 이 한 달 동안 배울 내용이었다.
그래도 주위 사람들은 벅찰 것이라며 걱정해 마지않았다.
"어때?"
고혜원은 면단(面團:밀가루 반죽)을 가리키며 물었다.
유청풍은 손가락으로 몇 군데를 눌러 보았다.
"반죽 상태는 양호한데 균열(龜裂)은 물을 적게 부어서 생겼어."
고혜원이 반죽한 덩어리는 조금 메마른 상태였으며 칼로 그은 것처 럼 여러 곳에 금이 가 있었다.
어쨌거나 그녀는 요리사부가 모처럼 해준 칭찬이 싫지 않았다.
요리 솜씨가 늘수록 할머니 잔소리가 줄어 어머니 마음이 편안해지 기 때문이었다. 사실 고혜원의 눈썰미와 손재주는 매우 뛰어나서 한 달이라는 짧은 기간에 여러 가지 반찬을 만들어냈다.
다만 유청풍처럼 타인이 감탄할 만한 경지에 오르지 못했을 뿐이었 다.
그녀는 그가 반죽한 것을 유심히 살폈다.
"너도 이제 점혈 수법은 제법이구나."
유청풍의 반죽은 기이하게 사람의 형상과 똑 같았다.
인체의 모형을 닮은 반죽 곳곳에 경락(經絡)과 요혈을 표시한 선( 線)과 점(點)들이 이어져 있었다.
고혜원은 혼자만 아는 상념에 잠겨 들었다.
'알 수 없는 일이야. 검혈의 전인이 분명한데 어째서 공력이 증가 하지 않을까? 그리고 검혈은 아직 살아있는 것일까?'
그렇다고 대놓고 묻자니 자칫 일을 그르칠 것 같아 그녀는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왠지 공허하게 들리는 그녀의 음성이 뒤를 이었 다.
"아주 적합한 체질로 판단했건만......."
그녀가 뜻한 바 대로 무엇이 잘 안 되는 모양이었다. 유청풍은 걱정 말라는 듯 되려 위로의 말을 건넸다.
"사곡 일을 해결해서 홀가분해. 무공 수련은 때가 있다며?"
고혜원은 손가락을 자기 입술에 갖다 댔다.
"쉿! 사실 난 사부님의 밀명(密命)을 받고 하산했단 말이야."
유청풍은 심드렁하게 받아들였다.
"밀명이라니......?"
조심스럽게 밖을 살핀 그녀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대략만 알아둬. 그 분은 문어발처럼 세력을 확장하는 살루문(殺 門)과 정해단을 의심하셔."
유청풍은 거두절미한 말을 알아듣지 못해 눈만 껌뻑거렸다. 이어 그녀는 부가적인 설명을 곁들였다.
"살루문은 교묘히 부채(負債)를 조성한 다음 이를 빌미로 무림을 잠식하는 중이야. 정해단도 인신매매한 자금으로 큰 세력을 구축했거 든. 바로 이들이 지하무림(地下武林)을 주도하기 때문에 의심하는 거 야."
지하무림!
언제부터 무림에서 이러한 용어를 사용해 왔는지 정확히 알 수 없 으나 언제부터인가 살루문과 정해단이 주도하는 별개의 무림을 지칭 하는 말로 인식되고 있었다.
이들 두 단체는 무공을 가르쳐 인재를 양성하는 다른 문파와 달리 공공연하게 납치 및 살인을 자행하는 사악한 조직이었다.
살루문은 채권채무 대행업을 수행한다는 미명 아래 수많은 방파를 집어 삼켰으며 빚을 못 갚는 고수들을 암살하는 잔인한 해위를 서슴 지 않고 있었다.
한마디로 살루문은 백해무익한 집단이었다.
한편 인신매매업을 하는 정해단 또한 살루문에 뒤질세라 미모의 여 인들과 어린아이를 납치함으로써 세간에 공포 분위기를 조장해오고 있었다.
이들은 무인연락소를 통해 명령을 전달하므로 정체가 전혀 드러나 지 않았다. 만일 이런 사실이 노출되거나 요원들의 신상에 이상이 발 생하면 전 조직원은 금세 은신해 버렸다. 그래서 이들을 지하 무림이 라고 부르게 된 것이었다.
세인들은 이미 두 단체가 무림을 거의 잠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의외로 유청풍은 담담히 말했다.
"하지만 와호장과 비등원이 있는 이상 그들의 악행에도 한계가 있 지 않을까?"
실상 개봉부에서 거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양 가는 강호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확보하고 있었다. 더구나 양 가는 상호 왕래가 빈번 하므로 정해단이나 살루문조차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정도였다.
고혜원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모르는 소리야. 앞날이 너무 불투명해......."
"와호장을 감히 누가 침범하겠어? 더구나 비등원이 가까이 있는데. ......" "현 무림의 분위기를 볼 때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존재야."
유청풍은 새로운 사실에 내심 깜짝 놀랐다.
'비등원과 와호장이 앙숙일 줄이야?'
부친과 함께 화목하게 살아 온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었다.
그가 무림정세에 관심을 보이자 고혜원은 설명을 덧붙였다.
"원래 무림은 삼혈(三血)의 눈치를 살피느라 조용했었어.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이십 오 년 전, 표혈(飄血) 사국중(史國重)이 갑자기 사라진 거야. 그리고 몇 년 후에는 검혈 단궐과 독혈(毒血) 방시굉( 房施宏)마저 행방이 묘연해졌지. 결국 삼혈의 실종은 무림에 힘의 균 형을 무너뜨리게 한 결과를 초래했어."
"......."
유청풍은 눈을 깜빡이며 그녀의 말을 새겨 들었다.
"이대로 나간다면 앞으로 살루문과 정해단이 무림을 완전히 장악해 버릴 거야. 더구나 혈광마검마저 그들의 손에 넘어가면 아무도 그들 을 저지할 수 없게 될 거야."
삼혈은 현 무림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무림오절보다 상대(上代)의 인물이며, 무공 또한 훨씬 고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한데 그들이 어느 날 갑자기 홀연히 사라진 이후로 무림의 판도가 바뀌고 만 것이었다.
물론 검혈이라 불리는 수리마제 단궐이 사곡에서 유청풍에게 뇌운 진기를 전수한 후 죽은 사실을 고혜원은 미처 모르고 있었다.
유청풍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럼 네가 하산한 이유는?"
그는 부지불식간 수리마제 단궐의 말을 떠올렸다.
'당분간 뇌운진기를 지닌 사실을 비밀로 하거라.'
고혜원은 밖에 신경을 쓰는 한편 그의 상념을 깨트렸다.
"최근에 누군가 오절을 암살할 것이란 정보를 사부께서 입수하셨어 . 정해단이나 살루문이 제일 혐의가 짙은 쪽이야."
그녀는 무림의 엄청난 비밀들을 마구 털어놓았다.
유청풍은 무림에 관하여 점차 흥미로운 반응을 나타냈다.
"독혈은 별호만으로도 알겠는데 표혈은 잘 모르겠는걸?"
"신법(身法)과 암기술(暗器術)의 달인이야. 독혈과 더불어 귀계(鬼 計)에도 능통하여 전 무림이 겁낼 정도였지."
유청풍은 궁금증이 풀리자 다시 상념에 잠겨 들었다.
'인물들의 특징은 대충 짐작이 가건만... 과연 누가 그 분께 중상 을 입혔을까?'
문득 고혜원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넌 참 이상해."
봉숭아로 물들인 예쁜 손톱 끝이 선과 점으로 이어진 인체 모형도 의 단전(丹田)을 맴돌았다.
유청풍이 의아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뭐가?"
"불치병을 앓거나 절맥(絶脈)도 아닌 정상인이 어째서 본문과 본가 의 심결(心訣)을 수련하지 못하는 것일까?"
현재 유청풍은 진기가 일 성 정도에 머물러 있어서 답보 상태였다.
화절 서하경의 난향묘심(蘭香妙心)은 물론 십성에 도달하면 금강불 괴를 이룬다는 와호장의 와호심결(臥虎心訣)마저도 그에게는 전혀 효 과가 없었다.
즉, 그는 무공수련의 기초가 되는 내공을 증진시키지 못하면서 심 법의 구결과 초식만 익힌 셈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단궐이 관수점층 술로 진기의 흐름을 막아 놓았기 때문이었다.
이를 모르는 고혜원은 공연히 계면쩍었다.
"진기가 좀 형성될 만하면 배척하니... 자세한 원인을 규명할 때까 지 연습을 계속 하도록 해."
강의를 끝낸 유청풍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너도 너무 신경 쓰지마."
유청풍이 돌아간 후 고혜원은 창가에서 하얀 비둘기 한 마리를 날 렸다.
"백구(白鳩)야, 사부께 이 사실을 알려드려라."
연락용 비둘기는 푸드득! 소리를 내며 힘차게 날아올라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비둘기 다리에 묶여 있는 조그만 통 속에는 유청풍이 단궐의 전인 이라는 사실과 그의 진기가 정체현상을 빚고 있다는 내용이 담겨있었 다.
[2] 구름이 달을 가린 밤.
비등원의 삼층 별각에서는 여인의 달뜬 신음소리가 간헐적으로 흘 러나오고 있었다.
"아하, 더......."
여인은 풍만한 둔부를 들썩이며 허리를 만월처럼 휘었다.
잠자리에 익숙한 중년의 나이답게 탄력과 요령을 겸비한 기름진 육 체였다. 그녀의 전신은 사내라면 누구나 탐하고 싶을 정도로 농염(濃 艶)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비등원의 원주 등인탁은 새우 눈을 치뜬 채 그녀가 전신을 파닥대 면 댈수록 천천히 여체를 달구어 나갔다.
"염정(艶情)은 변함없구먼. 흐흐......."
놀랍게도 다리를 허공으로 휘저으며 쾌락에 몸부림치는 여인은 무 림오절의 한 사람인 색절(色絶) 모염정이었다.
운우(雲雨)를 통달한 나이 때문일까?
그녀는 교묘하게 사내를 쾌락의 수렁 속으로 끌어들였다.
"흥, 그러면 뭐해요. 자기가 전보다 약해진 것... 헉!"
자존심이 상한 등인탁은 다리에 잔뜩 힘을 주었다.
'뭐야, 나도 아직은......!'
갑자기 그는 역동적이고 급박한 동작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시커먼 하물이 원근고저(遠近高低)에 관계없이 마구 후려쳐 댔다. 그 바람에 짜릿한 흥분이 온몸으로 번지자 그녀는 암캐처럼 헐떡거렸 다.
두 사람은 점점 격한 몸짓으로 상대를 달구었다.
사내는 장창으로 찌르듯 그녀를 억세게 밀어붙였다. 묵직한 압력에 맞춰 그녀도 둔부를 활기차게 움직였다. 두 나신이 날뛸 때마다 하 얀 침대보는 난잡하게 흐트러진 채 이리저리 밀려 다녔다. 어느 순간 그는 위치를 옮겨 여체의 뒤에서 달라붙었다.
사내가 새로운 자세로 움직이는 순간 그녀도 그에 맞춰 교묘히 허 리를 움직였다. 여체가 요동칠수록 그는 더욱 험하게 몰아쳤다.
환상에 가까운 그런 동물적인 행동이야말로 그녀가 유도하는 독특 한 기술이었다. 그들은 달콤한 쾌감에 젖은 채 절정을 향하여 정신없 이 치달렸다.
어느 순간 등인탁은 이를 악물며 하체에 최대한 힘을 모았다. 순간 허연 둔부가 허공으로 쑤욱 솟아올라 원을 그렸다.
'이때다! 흡진환희공(吸眞歡喜功)으로 아주 조금만.......'
흡진환희공은 교접 중에 상대방 공력을 흡수하는 모염정의 절기였 다.
그녀는 이런 기술로 상대가 느끼지 못할 정도로 진기를 빨아들였다 . 등인탁은 진기가 새나간 줄 아는지 모르는지 힘차게 정점에 올라섰 다. 순간 두 사람은 나른한 신음을 토해냈다.
"하아!"
"음......."
그들은 동작을 멈춘 후 모래성이 무너지듯 가만히 몸을 뻗었다. 짜릿한 여운이 두 나신을 파도처럼 휩쓸었다. 이윽고 등인탁은 만 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떨어져나갔다.
모염정은 그의 팔을 베고 누운 채 은근한 어조로 말문을 꺼냈다.
"살루문에 있던 자를 총관으로 임명한 것은 와호장이 그들과 접촉 한다는 증거예요."
등인탁은 자신이 한 일을 변명하듯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뭐, 꼭 그렇게 말할 것까지야. 오늘날 정해단이나 살루문과 부딪 치려는 사람이 없으니까. 그래서 나도 얼마 전에 정해단이 부탁하는 하녀를 몇명 사들인 거지."
모염정이 눈동자를 묘하게 굴렸다.
"글쎄요? 괜히 친구라고 믿다간 또 당할지 모르죠."
불현듯 등인탁은 한 여인의 영상을 떠올렸다.
'이십 년 전... 방심하다가 기소연을 빼앗겼지. 그녀가 임신만 하 지 않았어도... 그래서 홧김에 벌인 사업이 번창하고 있기는 하지만. ......' 등인탁과 고헌부.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죽마고우(竹馬故友)였다.
공교롭게 두 사람은 홍상여검 기소연을 짝사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명한 기소연은 심성이 바르지 않은 두 사람을 전혀 좋아하지 않았 다.
마침내 등인탁은 기소연을 납치할 계략을 꾸몄다.
한데 이를 눈치 챈 고헌부가 어느날 그녀에게 음약(淫藥)을 먹여 선수를 쳐버렸다. 결국 그 바람에 임신한 기소연은 울며 겨자 먹기로 고헌부와 결혼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고헌부와 등인탁은 겉보기에는 다정한 이웃인 것 같지만 실은 상대방을 원수처럼 여기고 있었다.
모염정은 등인탁의 안색을 살피며 의미심장하게 미소지었다.
"혜원이란 계집아이가 왜 연하의 사내를 요리사부로 삼았을까요?"
"글쎄, 듣자하니 가사를 배운다더군."
모염정은 그의 귀를 입술로 흩어 내렸다.
"서하경의 전서구를 가로채서 봤는데 청풍이 단궐의 전인이라는 거 예요."
그녀는 고혜원이 띄운 전서구 내용을 상세히 알려 주었다. 등인탁 은 크게 놀랐으나 겉으로는 태연자약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하지만 그는 내심 소스라치게 놀란나머지 슬그머니 일어서고 있었 다.
'정말 무서운 녀석이군! 그래서 그 계집아이가 쫓아다녔구나.'
단지 이름만 들어도 오싹한 수리마제 단궐이 아닌가!
지금 등인탁의 턱수염과 손은 심한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행여 모염정이 눈치챌까 염려되어 그는 턱을 매만지면서 연신 양손을 구부 렸다 폈다 하며 속마음을 감추었다.
모염정은 증오심을 공공연히 드러냈다.
"다들 그 도도한 계집을 대단하게 생각하는 게 문제죠. 한번 족쳐 봐요."
미모, 무공, 인간관계에 걸쳐 무엇하나 그녀가 뒤질 것이 없다고 생각하건만 세인들은 그녀보다 고혜원의 사부인 화절 서하경을 훨씬 더 신뢰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모염정은 평생 동안 서하경을 몰락시킬 궁리를 하고 있 었다. 얼마 전 그녀는 고혜원이 사부와 주고받는 전서구를 몰래 가로 채서 읽어 본 것이었다.
등인탁은 놀라움을 간신히 가라앉힌 후 슬며시 여체를 끌어당겼다.
"당신 말대로 화절을 납치할 테니 대신 청풍을 잘 감시하도록 하라 구. 적어도 녀석이 진기를 사용하지 못하는 이유를 알 때까지....... "
그의 머리는 빠르게 굴러갔다.
'녀석에게 뇌운진기만 빼앗으면 이 계집도 함께 처치해야겠군.'
그녀는 그의 내심을 눈치채지 못한 채 걱정하는 투로 말했다.
"알았어요. 성공하면 사람들은 와호장을 의심하겠죠? 한데 당신이 직접 나설 수는 없잖아요?"
"그야 이를 말인가? 조기야를 내세워야지."
모염정은 그를 반듯하게 눕힌 후 위로 올라갔다.
"아, 당신이 도와주었다던 그 점술가 조화상인(造化上人) 요극초( 姚克梢) 말인가요? 그럼 안심해도 되겠군요. 흐응......."
스산한 밤, 음모가 담긴 불꽃은 비등원의 별실에서 끈끈히 타오르 고 있었다.
[3]
비등원과 와호장은 대로를 중심으로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두 장원의 후문을 나서면 뒷산으로 갈 수 있는 좁은 소로길이 보인 다. 그 소로길 끝에 낡은 전각 한 채가 있었다.
세인들은 혈광마검이 보관된 이 전각을 마검각(魔劍閣)이라 불렀다 .
낮이나 밤이나 마검각 주위에는 사람이 별로 다니지를 않았다.
그 이유는 너무나 공포스럽기 때문이었다.
마검각은 지붕과 이를 받치고 있는 네 개의 기둥이 건물의 전부였 다. 원래 이 전각은 낡은 사당(祠堂)이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검을 잡으려다 퉁겨나가는 바람에 벽이 허물어져 네 개의 기둥만 남게 되 었다.
따라서 밖에서도 전각의 중심부가 그대로 보였다.
전각 한 가운데에는 검대(劍臺)로 변한 먼지 낀 제대(祭臺) 위에 삼 척 길이의 장검 한 자루가 검집에서 반 뼘쯤 나와 있었다.
검과 검집은 언제 보아도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검신은 피를 머금은 듯 새빨간 빛을 발산하고 있는데 검집은 칙칙 한 묵색(墨色)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촉수(觸手)와 동시에 즉사한다는 단궐의 혈광마검이었다.
마를 물리치고 강철을 종이처럼 잘라버린다는 혈광마검은 그 이름 부터가 으스스했다.
대체로 이러한 병기는 신검(神劍)이니 보검(寶劍)이나 하는 말로 불려야 하건만 사정이 그렇지가 않았다. 마검(魔劍)이란 말로 불려지 고 있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원래는 혈광검(血光劍)이었으나 이곳에서 보 관하고부터 그런 명칭이 붙었다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무인들은 혈광마검을 차지하기 위해 목숨을 부나방처럼 버리고 있었다.
달빛이 흐릿한 오늘밤도 마찬가지였다.
검에 미친 그림자가 소리없이 마검각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스슷!
인영은 날렵하게 검대 앞에 내려섰다.
'으흐흐, 이 석면장갑을 사용하면 간단할걸?'
구름이 달을 살짝 비켜 가는 순간 사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장한의 칙칙한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손에 고기비늘처럼 번쩍이는 장갑을 끼고 있었다. 그것이 솜과 석면으로 만든 특수한 석면장갑인 모양이 었다.
항상 개방되어 그럴 필요도 없건만 그는 도둑고양이 마냥 조심스럽 게 주위를 살폈다. 탐욕스런 안광을 번뜩이던 그는 드디어 혈광마검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순간 처절한 비명이 밤 공기를 갈랐다.
"끄아악......!"
동시에 검을 놓고 용수철처럼 퉁겨 나온 그는 전신을 비틀다가 이 내 검대 밑에 쓰러졌다. 돌연 마검각 주위에는 유령이라도 나올 듯 스산한 바람이 휘몰아쳤다.
휘류류류륭!
다음 날 아침.
이곳을 담당하는 두 명의 묘지기가 가마니를 들고 나타났다.
비등원과 와호장은 매년 번갈아가며 이들에게 급료를 지급해 오고 있었다.
팔순쯤 된 묘지기는 거무스름한 안면을 잔뜩 찡그렸다.
"이런 또 새카맣게 타 죽었군!"
그의 말대로 시신은 마치 벼락을 맞은 듯, 혹은 독물(毒物)을 뒤집 어 쓴 것처럼 전신이 새카맣게 변해 있었다.
서른 살 가량의 묘지기가 의아해 하며 물었다.
"그러네요. 저는 오늘이 첫 근무라 궁금했건만... 한데 애써 무공 을 익히고 대체 무엇 때문에 여기 와서 죽는 거지요?"
"끌끌, 탐욕이 부른 화(禍)지."
"죽는 줄 뻔히 알면서 욕심을 낸단 말인가요?"
"글쎄? 역질을 고쳤다는 말을 들어보았어도... 아흘흘......."
늙은 묘지기는 무엇이 그리 좋은지 음산하게 웃었다.
고개를 숙인 그의 표정을 보면 자신이 꾸민 음모가 성공하여 매우 흡족해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익숙하게 가마니로 시체를 말아 마검각 뒤로 사 라졌다.
마검각 뒤편으로는 우거진 신록 사이로 언뜻언뜻 봉분(封墳)들이 보였다. 봉분 속에는 혈광마검을 탐내다 죽은 정사(正邪) 양도의 고 수들이 묻혀 있었다.
일부 비석에 전시된 장갑, 집게, 줄, 막대는 혈광마검을 취하려던 도구들로 사자(死者)가 생전에 지녔던 인간성을 대변하는 것만 같았 다.
이십 년 전 단궐이 혈광마검을 마검각에 놓고 사라진 이후 지금까 지 이러한 괴사는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4]
오늘은 와호장과 비등원이 비무대회를 개최하는 날이었다.
이 비무대회는 두 가문이 번갈아 주최자가 되어 격년제로 치르는 정례행사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사시(巳時)가 되자 사람들은 삼삼오오 대회장으로 모여들었다.
행사 장소는 비등원과 와호장 뒤편에 형성된 넓은 공터였다.
그곳은 아름드리 고목 나무가 울타리처럼 빽빽이 둘러싸고 있어 외 부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와호장주 호성검(虎聲劍) 고헌부와 비등원주 섬안비창 등인탁은 상 석에 나란히 자리에 앉았다.
금년 오십 오 세의 동갑인 그들은 서로 흑심을 감춘 채 항상 다정 한 척 사이좋게 지내는 이웃이었다. 실상 이렇게 비무대회를 하는 날 이야말로 두 사람이 만나는 유일한 기회였다.
이를 모르는 세인들은 그들의 아름다운 우정을 일컬어 부탁지교(富 卓之交)라 부르며 칭송해 마지않았다.
우정의 상징 부탁지교에서 부탁이란 고헌부의 부자와 등인탁의 탁 자를 따서 만든 합자(合字)였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삼척동자도 두려워할 만큼 검술과 창술의 달인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이들 두 사람은 무림오절과 겨뤄도 결코 뒤지지 않을 만큼 뛰어난 고수라는 것이었다.
본부석이 마련된 곳에서 전면으로 체구가 당당한 두 소년을 필두로 삼백여 명에 달하는 양가의 정예무사들이 행사장에 정렬해 있었다.
지금 이곳에는 두 소년과 정예무사를 제외하고 하급무사나 여인들 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주최자인 고헌부는 등인탁에게 인사를 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등원주(鄧院主), 그럼, 시작하겠오이다." 등인탁은 느긋한 태도로 팔자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러시지요."
고헌부는 매부리코를 씰룩대더니 천천히 장내를 둘러보았다.
"여러분, 알다시피 본 대회의 목적은 양가가 친선을 도모하고 그 동안 갈고 닦은 무공 실력을 가름하는 데 있다. 모두 전면에 보이는 마검각을 주시하라."
순간 모든 사람들은 일제히 그의 등뒤를 응시했다.
행사장에서 백여 장 떨어진 언덕 위에 낡은 전각 한 채가 보였다. 그 전각이 바로 지난 수십 년 동안 전설처럼 알려져 있는 마검각이었 다.
마검각 안에 있는 혈광마검은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오싹한 핏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고헌부의 카랑카랑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누구나 저 혈광마검을 만지면 죽는다. 단궐의 전광신공을 수련하 지 않는 한! 하지만 등조민(鄧祚岷)과 고일두(高逸杜)는 무공의 길이 무한한 점을 명심하고 부디 절차탁마하여 단궐을 능가하도록 하거라 ."
순간 장내는 은연중 공포 분위기가 감돌았다.
'아! 저러다 제 이의 북망지겁을 일으키는 게 아닐까?'
불현듯 그들은 지난 날 수백 명이 혈광마검 아래 까맣게 타죽은 북 망산의 혈전을 상기하게 되었다.
수리마제 단궐은 아직도 이들에게 두려운 존재로 남아 있었다.
사실 그가 무슨 이유로 자신의 마검을 놓고 사라졌는 지, 혈광마검 을 만지면 왜 죽는 지, 그 이유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무림에 한 명 도 없었다.
그것은 무림최대의 불가사의였다.
단지 단궐이 생명과 같은 검을 버렸기 때문에 죽었을 것이라는 점 과, 전광신공을 익힌 자만이 혈광마검을 다룰 수 있다고 막연히 추정 할 뿐이었다.
고헌부는 음성에 더욱 힘을 실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 중에서 아무나 혈광마검의 주인이 되어 불상사 를 종식시키도록 해라. 본 비무대회는 오늘이 마지막이니 만큼 정정 당당한 자세로 최선을 다하도록....... 갈(葛) 총관, 시작하게!"
고일두와 등조민의 바로 뒤에 서 있던 와호장의 총관 갈곤태(葛鯤 態)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즉시 본부석을 향해 비쩍 마른 몸을 굽혔다.
"예! 명을 거행하겠습니다."
그가 돌아서는 순간 등조민과 고일두는 무사들을 인솔하여 자신들 의 장원 쪽으로 이동하여 자리를 잡았다.
갈곤태는 두 소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두 분 도련님은 사장(沙場) 안으로 입장해 주십시오."
양가 무사들이 정렬한 중간지점에는 모래를 부어 만든 직경 오 장 쯤 되는 원형의 경기장이 마련되어 있는데 그곳이 바로 비무장이었다 .
비등원의 대표격인 등조민은 목창(木槍)을, 와호장을 대표한 고일 두는 목검(木劒)을 들고 비무장 한 가운데로 걸어나와 마주 섰다.
그들은 다시 나란히 몸을 돌린 후 본부석을 향해 군례(軍禮)를 취 한 다음 서로 마주보았다.
두 소년은 아직 여드름이 채 가시지 않은 열 여섯 살의 동갑나기였 다.
각자 부친을 닮았음인지 등조민은 눈이 가늘었고, 고일두는 매부리 코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각자 무공의 정수를 터득한 듯 두 눈에서 예리한 광망을 쏟아내고 있었다.
등조민은 창을 수직으로 세워 가슴 앞에 끌어당기더니 갑자기 밑으 로 내렸다. 이어 그는 다시 본부석을 향해 돌아섰다.
"건의 사항이 있습니다!"
고헌부는 이마를 살며시 찌푸렸다.
"뭐냐?"
등조민은 기상천외한 질문을 던졌다.
"매번 하던 방식보다 이번에는 닭싸움으로 겨루면 안 되겠습니까?"
그야말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대련방법(對鍊方法)이었다.
고헌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닭싸움......?"
이때 두 장원의 무사들은 일제히 등조민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거 재미있겠는걸?'
그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기대에 찬 눈짓을 주고받았다.
고일두는 벌써 등조민의 의도를 눈치챈 터였다.
닭싸움이란 어린아이 시절에나 하던 놀이였다. 이제 그들은 머지않 아 성년이 될 터이고, 이번에 마지막 비무대회인 만큼 어쩌면 상당한 의의가 있는 일일지도 몰랐다.
'맞아, 앞으로 할 기회가 없을 거야.'
그는 즉시 손을 높이 쳐들었다. "찬성입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이번이 마지막이 아닙니까?"
등인탁은 자리에 앉아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오, 무공수련을 떠나면 성인이 될 터인데 영원히 못할 거요 . 옛 추억이 새삼스럽구려."
고일두와 등조민은 금년 가을이면 각자 또 다른 절기를 연마하기 위해 사부가 있는 곳으로 떠나도록 되어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더 이상 닭싸움을 할 기회가 없으므로 고루한 기존 의 방식을 탈피하여 색다르게 치르자는 제안이었다.
드디어 고헌부는 건의를 수락해 주었다.
"좋아, 승낙한다."
일순 양편의 무사들은 볼거리를 만난 듯 일제히 귀가 따가울 정도 로 함성을 질러댔다.
"와아......!"
어느덧 그들의 눈에서 수리마제 단궐에 대한 공포심은 사라지고 어 린 시절 향수가 배어 나왔다. 그들은 지겹고 딱딱한 비무보다 무료함 을 달랠 수 있는 흥미로운 닭싸움이 훨씬 좋았던 것이다.
두 소년은 다시 사 장 밖으로 나가더니 무기를 임시 가대(架臺)에 세워 놓았다.
곧바로 갈곤태는 음성이 울려 퍼졌다.
"안전을 고려하여 제한사항을 말씀드립니다. 발바닥이 한 자 이상 허공에 뜨거나 양손을 놓치면 패하는 겁니다. 물론 사장 밖으로 밀려 나갈 경우는 실격패(失格敗)가 됩니다. 자... 준비!"
구령이 떨어지자 두 소년은 각자 좌측 발을 직각으로 들어올려 우 측 허벅지에 댄 후 좌측 다리와 발등을 꽉 잡았다.
다시 말해서 지금 그들은 오른 발바닥만 지면에 닿아 있는 상태였 다.
뿌우우!
드디어 갈곤태는 힘차게 각(角)을 불었다.
동시에 등조민과 고일두는 번개같이 사장 안으로 뛰어 들었다. 이어 등조민은 좌측 무릎 끝을 정면으로 향한 채 날카롭게 밀어댔 다.
"얏!"
그는 비룡해(飛龍解) 삼초식 중 제일초식 잠룡개안(潛龍開眼)을 펼 쳤다.
수중(水中)에서 잠자던 용이 눈을 팍 뜨듯 그는 날카로운 직선공격 을 감행했다. 그가 노리는 것은 고일두의 좌측 허벅지였다.
순간 고일두는 재빨리 우로 일 보 피하는 일방 무릎으로 등조민의 옆구리를 찔렀다.
"어딜... 차앗!"
고일두가 시전한 절기는 와호장 비전절학인 호성팔품(虎聲八品)의 제일초식 백호비상(白虎飛翔)이었다.
등조민은 역습을 당하자 허리를 우로 구부리면서 빙그르르 돌았다. 방금 그의 동작은 비등원이 자랑하는 경공법, 비룡번회(飛龍飜回)였 다.
이어 그는 고일두의 엉덩이를 냅다 박았다.
"받아라!"
그러나 고일두는 날렵하게 껑충 뛰어 좌로 물러나 즉시 공격 자세 로 전환했다.
"노호일격(怒虎日擊)은 무적이다."
그들은 좌측 무릎을 무기 삼아 자신들이 평소 연마한 절기를 선보 이기 시작했다. 양측 무사들은 아슬아슬한 동작이 나올 때마다 자기 편 공자를 응원해 주었다.
"비등원, 이겨라!"
"금년에도 와호장이 승리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막상막하의 몸놀림을 구사하여 서로 쉽게 공략하 지 못했다. 그들은 약간의 빈틈만 보아도 재빨리 공격해 들어갔다.
고일두가 공격하면 등조민은 방어하는가 싶더니 이내 역공을 취하 고 등조민이 물러나면 고일두는 어느새 약점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그들은 이마에 땀을 뻘뻘 흘리며 사장을 이리저리 휩쓸고 다녔다. 관전하는 사람들조차 누가 이길지 섣불리 장담하지 못했다.
이윽고 고일두와 등조민은 최후의 승부수를 띄웠다. 등조민은 일갈 을 터트리며 일격을 가했다.
"비룡운번(飛龍雲飜)!"
그가 신형을 좌우로 신속히 움직이자 두 개로 분리되었다.
상대방이 전혀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변신은 매우 빨랐다. 고일두도 한 소리 크게 외침과 동시에 두 개로 만든 신형을 팽이처럼 회전시켰다.
"호천탈망!"
관전자들은 흩어진 그들의 실체를 쉽사리 분간하지 못했다.
갑자기 두 사람 주위에 매서운 강기가 휘몰아쳤다.
두 개의 강기는 사방에 뿌연 먼지를 휘날리며 상대를 향해 빛살처 럼 부딪쳐 갔다.
쾅!
요란한 충돌음과 함께 두 사람은 손을 놓고 사장에 벌렁 쓰러졌다. 그러나 등조민이 간발의 차이로 먼저 넘어지고 말았다.
순간 고헌부는 칼날 같은 매부리코를 지그시 쓰다듬었다.
'역시 자질에서 차이가 나는구먼... 커어허허.......'
하지만 등인탁은 담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누가 봐도 그런 태도는 승부와 무관한 것 같았다.
갈곤태는 즉시 와호장의 상징 동물, 호랑이가 그려진 삼각 깃발을 번쩍 들어 올렸다.
"와호장 승리!"
거의 동시에 양편에서 천지가 떠나갈 듯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
"승부를 떠나 정말 멋있다!" 특히 비등원 무사들은 일찍이 부인을 잃고 외아들을 키워 온 원주 를 위하여 격려의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짝짝짝! 하는 박수 소리가 조금 가라앉을 때였다.
고일두가 느닷없이 소리쳤다.
"어이, 요리사부! 나하고 한판 해 볼까?"
순간 모든 사람들은 와호장 후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이제 막 요리강습을 끝낸 유청풍이 나오고 있었다. 하지 만 그는 아무 소리도 못 들은 양 천천히 걸어갈 뿐이었다.
고일두는 그런 유청풍을 조소 어린 눈으로 응시했다.
'자식이 분수를 몰라? 누님이 기를 너무 돋구어 놓았어.'
유청풍과 동갑인 고일두는 고혜원의 하나 뿐인 동생이었다
그는 유청풍이 누나의 요리사부가 되자 못마땅하게 여긴 나머지 진 작부터 별러 왔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개울 건너 빈촌은 가난 하고 천민들이 주로 사는 반면 고부택은 고관부호들만 거주하여 아이 들마저 사고방식과 행동이 거만한 어른들을 닮아갔다.
다시 말해서 고부택 아이들은 빈촌을 깔보는 습성이 생긴 것이었다 .
그런 고일두는 무서운 누나 고혜원을 의식하여 눈치만 살피던 중 비무를 핑계삼아 유청풍을 혼내줄 심산이었다.
그는 앞을 가로막은 채 다시 시비를 걸었다.
"자신 없으면 패했다고 말해!"
이때 유청풍은 단궐이 당부하던 말을 상기했다.
'참아야 한다. 내 마음을 냉정하게 다스리려면.......'
그가 막 비켜 가려는 순간 고일두는 멱살을 움켜쥐었다.
"너, 내 말이 안 들려?"
비로소 유청풍은 턱이 들린 채 나직이 입을 열었다.
"오늘은 양가가 비무하는 날인데 내가 끼면 되겠어?" 그는 최대한 자제하여 이곳을 벗어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고일두는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어라, 도전할 의향이 있다 이거지?"
그는 진기를 잔뜩 모은 후 갑자기 발을 걸어 확 밀어제켰다.
실상 그가 이렇게 행동하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양가의 비무는 비등원주와 와호장주가 합의하에 허락할 뿐 어느 일 방이 임의로 선언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순간 유청풍은 뿌연 먼지를 뒤집어 쓴 채 그대로 나뒹굴었다.
'웃!'
그는 벌떡 일어나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상상해서 지껄이지 마라. 어른들 앞이라는 점을 명심해."
고일두는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핑계로 빠져나가겠다? 빈촌 출신이라 다르군. 그래서 우리가 거지 같은 빈촌 녀석들과 안 어울리는 거야. 알았어?"
일순 유청풍은 검미를 확 찌푸렸다가 다시 폈다.
'아, 내가 본의 아니게 빈촌 아이들 가슴에 못을 박는구나.'
그는 난처한 표정으로 본부석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친 찰나 고헌부는 싸늘한 안광을 뿜어냈다.
'일두와 붙여서 따끔한 맛을 보여주고 싶지만.......'
체면을 중시한 그 역시 유청풍이 와호장을 드나드는 자체를 눈에 가시처럼 여긴 터였다.
이를 지켜보던 등인탁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슬쩍 아량을 베풀면서 관망해 볼까?'
그는 넌지시 승낙 의사를 밝혔다.
"이미 무사들 앞에서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소이다."
고헌부는 짐짓 못이기는 척 하며 점잖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하마."
이때 등조민은 고일두가 승리하리라 믿었다.
'청풍아, 넌 졌다. 일두는 벌써 오 년째 무공을 연마했거든.'
그는 어머니가 없이 자랐다는 공통점 때문에 유일하게 유청풍과 친 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현재 여기 모인 모든 사람들은 당연히 고일두의 승리를 점쳤다. 이 제 유청풍은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참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빈촌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드디어 유청풍과 고일두는 출발선 밖에서 닭싸움 자세를 취했다.
갈곤태는 좌우를 둘러 본 후 길게 각을 불었다.
뿌우......!
신호와 동시에 유청풍과 고일두는 재빨리 뛰어나와 난타전을 펼쳤 다. 뿌연 먼지가 휘날리는 가운데 두 사람은 연신 둔중하게 충돌했다 . 퍽! 퍼버벅!
결과는 모든 사람들이 예상한 그대로였다.
고일두는 일방적으로 유청풍을 몰아붙였다.
잠깐 사이에 그는 유청풍의 허리, 엉덩이, 허벅지를 망치로 두드리 듯 무섭게 찍어댔다. 하지만 조기에 끝날 것 같던 닭싸움은 예상외로 숨막히게 진행되었다. 좀 과하게 표현하면 용쟁호투(龍爭虎鬪)란 말 이 어울릴 정도였다.
유청풍과 고일두는 내심 감정을 품고 있어서 행동이 몹시 거칠었다 . 그것은 멀리까지 퍼지는 파열음이 증명하고 있었다.
한데 살과 뼈가 뭉개지는 소리는 모두 유청풍의 몸에서만 나왔다.
그때마다 유청풍은 신형을 기우뚱하며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
열세에 놓인 그는 투지를 살려 고일두의 맹공을 잘 버텨내고 있었 다. 일순 고일두의 눈에서 흉흉한 빛이 흘러나왔다.
'이쯤이면 상당한 타격을 받았을 거야. 슬슬 박살을 내 줄까?'
실상 그는 유청풍을 골병들게 하려고 교묘히 공격했을 뿐 아직 자 신의 절기를 하나도 발휘하지 않았다.
유청풍은 고통을 참으며 코로 연신 더운 김을 뿜어냈다.
'훅훅! 다시는 빈촌을 얕보지 못하게 만들어 줄 테다!'
고일두는 신속하게 유청풍의 뒤로 돌아가 통렬한 일격을 가했다.
"맛 좀 봐라. 타앗!"
퍽! 우직!
둔탁한 충돌과 동시에 골절이 으스러지는 소리가 급박하게 들렸다. 이때 근엄하던 고헌부의 입술이 한쪽으로 슬며시 말려 올라갔다.
'커허허......! 아마 몇 달은 족히 운신하지 못할 게야.'
다른 사람들도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유청풍은 고통을 참으며 이를 악물었다.
'우윽! 여기서 죽더라도......!' 사람의 독기(毒氣)란 참으로 묘한 힘을 지녔다.
평상시 같으면 누워서 끙끙 앓을 고통도 다른 일에 몰입하면 잊는 법이다. 특히 오기에 찬 승부의 경우 초인적인 잠재력이 폭발하는 경 우가 종종 발생하는데 지금의 유청풍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한 손을 놓친 채 삼 보나 밀려났지만 비틀거리면서도 용케 중 심을 잡았다. 오히려 그는 재빨리 돌아서서 고헌부의 허리를 겨누고 역습을 시도했다. 실로 놀라운 투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얏!"
순간 고일두는 날렵하게 한쪽으로 피해버렸다.
"네 맘대로......?"
그러나 유청풍은 눈을 부릅뜨고 악착같이 달라붙었다.
'좋다! 네가 막연산 멧돼지보다 강하냐?'
그는 피멍 든 하체에 힘을 주며 죽기 살기로 충돌해 갔다.
고일두는 그의 무서운 집념에 혀를 내둘렀다. '아니, 뭐 이런 괴물 같은 놈이 다 있어?'
실상 그도 등조민과 일전을 치른 나머지 많이 지친 상태였다.
쉽게 꺾일 것 같던 유청풍은 지겹게 끈질겼다.
금세 자빠질 듯한 사람이 계속 달라붙으면 상대는 피곤하기 마련이 다. 하지만 고일두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최후의 일격을 준비하고 있 었다.
유청풍도 여차하면 공격하려고 이리 저리 몸을 움직여 기회를 노렸 다. 바로 그때였다.
쿵!
고일두는 번개같이 다가와 유청풍의 허리를 강하게 박았다.
한순간 유청풍은 앞으로 확 기울어지며 휘청거렸다.
'어어......?'
그는 중심을 잡기 위해 껑충껑충 뛰면서 한 손을 풍차처럼 휘둘렀 다. 기회를 잡은 고일두는 눈에서 무서운 안광을 쏟아냈다. '놈, 끝장을 내 주마!'
그는 전신진기를 무릎 끝에 모은 다음 맹렬한 속도로 달려갔다.
엉덩이가 부서질 바로 그 순간, 유청풍은 몸의 각도를 겨우 틀었다 .
'어차피 넘어질 바에야 최대한 충격을 줄여야지.'
눈 깜짝할 사이에 고일두는 유청풍의 후미를 빠르게 강타했다.
팟!
다행히 유청풍의 몸이 몹시 흔들려서 고일두는 어설프게 측면을 스 치고 지나갔다. 그래도 그 위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결과를 나타냈다.
유청풍은 중심을 잃고 그 자리에 벌렁 드러누웠다.
'헉헉....... 생각보다 매서운 놈이구나.'
맹렬한 기세로 직진하던 고일두는 그만 폭 고꾸라지고 말았다.
'어이쿠! 자식들, 무슨 모래를 이렇게 많이 깔아 놓은 거야?'
두 사람은 다리가 풀려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조차 없었다. 오직 가쁜 숨소리만이 멀리까지 들릴 뿐이었다.
이윽고 고일두는 먼지를 털며 씁쓸한 눈빛을 발했다.
"제길, 무승부잖아?"
그때 유청풍이 냉랭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무슨 소리! 내가 이겼다."
그의 선언에 고일두는 눈을 부라렸다.
"뭐라고? 생떼 쓰지 마라."
유청풍은 고일두의 발 밑을 가리켰다.
"잘 봐, 네가 넘어진 자국을......."
일순 모든 사람들의 눈동자는 사장 테두리로 향했다.
유청풍의 발자국은 사장에서 끊겼으나 고일두가 죽 끌고 간 자국은 손가락 길이만큼 사장 밖으로 이어져 있었다.
고일두는 비로소 자신이 패한 사실을 알았다.
'헉! 내가 실격패를......!'
그는 너무나 어이없어 멍한 표정을 지은 채 허공을 바라보았다.
모든 사람들 역시 정신없이 구경하느라 미처 그 점을 착안하지 못 한 것이었다. 고헌부는 예상이 빛나가자 아연 실색했다.
'아니, 이게 어찌된 일이냐?'
지극히 짧은 순간 등인탁은 눈을 가늘게 떴다.
'으음, 역시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군.'
간접 비교를 하면 무공을 모르는 유청풍이 이겼기 때문이었다.
등조민은 어안이 벙벙하여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청풍의 힘이 저리 대단할 줄이야?' 관전하는 무사들은 너무나 민망하여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유청풍은 고일두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불만 없지? 그럼 난 간다."
이때 고일두는 도저히 삭이지 못할 앙심을 품었다.
'두고보자! 다시는 개봉 땅에 발을 못 붙이게 만들어 주마!'
유청풍은 두 장주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어르신들, 안녕히 계십시오."
그는 마검각 뒤편 길을 따라 총총히 사라졌다. 물론 어깨가 확 기 울어질 정도로 절뚝거리면서 말이다.
등인탁은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너털웃음을 흘렸다.
"허허허! 거 인물은 엉뚱한데 있었구먼."
고헌부는 그 말에 속이 몹시 뒤틀렸다.
'으윽! 본장에 먹칠을 하다니... 저 녀석을.......'
그는 태연히 일어나 최종 판정을 선언했다.
"이로써 객원(客員)으로 참가한 유청풍이 금일 닭싸움의 승자다!"
언뜻 대수롭지 않을 듯한 소년들의 승부였으나 양가 무사들은 한결 같이 답답함을 느꼈다.
'젠장, 마지막 비무대회가 전례 없이 쓸쓸하네.'
삭막하게 변한 분위기를 입증하듯 전통처럼 내려왔던 회식(會食) 자리에 간부들은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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