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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 특강] 2500년 만에 밝혀지는 열반과 무아의 실체 3강(50:30)
0:11 <초기불경의 세 가지 식>
이걸 가지고 이제 정리를 한번 해볼게요. 지금 초기경의 맛만 봤어요. 맛만 봤는데 정리를 하고 이제 다음으로 넘어갔으면 해서요.
[니까야ㆍ아함경 특강
초기불경에 나타나는 3가지 식]
초기불경에 나타난 3가지 식, 이제 대충 맛을 보셨기 때문에 보시면 이 구절은요 이 강의가 다 끝나고 나서 또 한 번 정리 또 한 번 해 드리기는 할 거예요. 왜냐하면 밑에 출처로 인용은 아니고 출처로 밝혀진 경전들이 지금 이 자료 안에 다 있는 경전들입니다. 그래서 끝나고 한번 다시, 전체 강의를 다시 종합해서 이 1페이지로 돌아오셔서 보시면 좋겠습니다.
[① 일체의 6근작용을 의식하는 순수의식(열반, 9식에 해당) :
볼 수 없고(대상화 되지 않음) 특징이 없고 무한하며(생멸이 없고 영원불변함). 모든 곳에서(일체의 6근작용) 알아차리는(빛나는) 의식(의식의 중심, 의식하는 의식, 순수의식, 순수한 1인칭 주체). 4대와 5온과 어떠한 이원성도 머물 수 없는 의식. ‘열반’ ‘무분별지無分別智’에 해당하는 의식. ‘열반의 자아’(상락아정常樂我淨)에 해당함.(께왓다경 [디가 니까야], 범천의 초대경[맛지마 니까야], 빛나는 마음의 경[앙굿따라 니까야])]
먼저요, 첫 번째 대상화되지 않으며 생멸이 없으며 즉 무형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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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하며 특징이 없고 무한하며 ‘일체를 알아차리는다’가 거기서 뭐라고 돼 있죠? 모든 곳에서 빛나는 의식, 그 모든 곳이라는 건요 부처님한테 모든 거는요 항상 내가 알아차리는 겁니다. 내가 알아차리는 거. 방금 그 자료 하나 보니까 승가도 부처님 때는 현전승가(現前僧伽), 방금 그 자료 하나 보니까 승가도 부처님 때는 현전승가, 아무튼 여기 있는 사람들이 승가다 항상 부처님 발상이 똑같죠. “지금 여기”예요. 지금 여기 함께하는 이들이 저랑 비슷합니다. 저는 항상 주장이 그거예요. 지금 저랑 놀아주는 분이 저의 도반입니다. 과거에 놀았다. 지나갔잖아요. 미래는 또 바뀔 수 있겠지만 지금이 중요해요. 지금·여기·나와 너·이렇게 부처님 머릿속에 이게 있었다는 거죠, 승가에서까지 그걸 적용시켰다는 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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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현재 같이 하는 사람들이 승가다. 지금 현재 같이 하는 사람들이 승가다. 그래서 지금 대상화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을 그 세계라고 할 때, 일체라고 할 때 막막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지금 내가 알아차리고 있는 세계가 일체입니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안에 들어와 있는 세계, 지금 내가 보는 색깔·소리·냄새·맛 내 안에 들어온 개념들이 내 세계예요. 그게 내 세계예요. 그래서 그 일체를 알아차리는 자리가 어디겠어요? 지금·여기죠. 지금 여러분 생각·감정·오감을 뭐가 알아차리고 있죠? 여러분 의식이요. 그 의식이 여기 있지 다른 데 있지 않아요. 열반이 어디 밖에 있나 보다 하면 완전히 지금 삼천포에 빠진 거죠. 열반이 어디 있어요? 일체를 알아차리는 의식이 어디 있겠어요? 모든 곳에서 빛나는 의식이 어디 있겠어요 여러분? 여러분이 모든 곳을 돌아다니시잖아요. 지금 여기서 빛나다가 저기 유럽 가면 유럽에서 빛나요.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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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해외에 나가본 적이 없습니다만. 뉴욕 가서도 빛나고 싶은데 저도. 유럽 가서도 빛나고 싶고. 모든 곳에서 빛나는데 계속 방구석만 빛내고 있으면 아쉽죠. 근데 이 모든 곳이요 방구석이 모든 곳도 돼요. 내가 경험하는 모든 곳이에요. 일체를 알아차리는 자가 어디 있어요? 지금 우주를 다 돌아다녀도 알아차리는 자 그 모든 곳을 비추는 자는요 자기의식이에요. 순수 1인칭 의식. 이렇게 부처님이 친절하게 힌트를 준 겁니다. 형체가 없다. 보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보이지도 않는데 그러면 알아차리는 자이지 대상화되지 않는 의식인데 무한하고 생멸도 없고 일체를 비추고 있는 그 의식. 그럼 이게 보통 우리 유식학적으로는 9식에 해당됩니다. 열반. 식으로 비교하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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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식에 해당됩니다. 볼 수 없고 대상화되지 않으며 특징이 없고 무한하며 생멸이 없고. 영원불멸하다는 얘기고요. 모든 곳에서, 즉 일체의 6근 작용에서 빛나는(알아차리는) 의식. 그 의식. 의식의 중심이자 의식하는 의식이고 순수의식이며 순수한 1인칭 주체인 이 자리. 4대와 5온과 어떤 이원성도 머물 수 없는 의식. 열반의 자리고요 무분별지에 해당되는 의식이며 열반의 자아에도 해당됩니다.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아(我)를 ‘열반의 자아’라고 합니다. 이 열반의 자아는요 제가 쓴 표현이 아니고 원효대사께서 쓰신 표현이에요. ‘열반의 자아’ “열반경종요”(涅槃經宗要, 원효가 열반경의 내용을 집약하고 핵심요지를 설명한 해설서)에서 주장하셔서 여기 본문에도 저기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을 마무리로 넣어놨어요, 비교해 보시라고 나중에. 즉 대승에 오면 형이상학화 됩니다.
4:51<부처님의 방편>
그럴 땐 적극적으로 자아가 나와요. 보시면 열반종요라고 25페이지 보세요. 25페이지에 가면요 열반의 자아와 나중에 풀어드릴게요. 확인만 하세요.
[6) “2가지 ‘자아’가 있으니, ‘법아法我’(소증진여所證眞如 증득되는 진여)와‘인아人我’(能證智, 능히 증득하는 지혜)이다. ‘법아’는 ‘진실한 의미’이며, ‘인아’는 자유자재하다는 의미이다. 진실한 자아 는 열반의 자아’이며, 자유자재한 자아 는 보리의 자아’이다. 실제에 나아가 통하게 논하면 차별도 다름도 없다(둘은 본래 ‘하나의 여래장’이다).”
(二種我者 法我人我 言法我者 是眞實義 (言人我)者 是自在義 … 眞實我者 是涅槃我 自在我者 是菩提我 就實通論 卽無別異 원효, “열반종요涅槃宗要”]
진실한 자아, 참 자아죠. 참 자아는 진실자아는 열반의 자아이며 보리의 자아이다. 진실의 자아는 열반의 자아이며 자유자재한 자아는 보리의 자아이다. 결국 열반과 보리의 자아라는 말을 쓰시죠. 열반. 한문으로 뭐죠? 열반아(涅槃我), 보리아(菩提我). 이것이 바로 여래장이라는 게 원효스님의 이건 열반경 풀이예요. 어때요? 그래서 쓴 겁니다. 제가 열반의 자아, 대승에 오면 열반의 자아가 됩니다. 보리의 자아에도 해당되고요. 아무튼 상락아정(常樂我淨)에서 이 아입니다. 아(我). 상(常) 영원하고 락(樂) 지복이며 정(淨) 청정한 오염되지 않는 아(我) 나. 이게 진아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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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의 자아에 해당됩니다. 우파니샤드도 다르지 않아요. 그러니까 부처님이 반대하셨다고 해서 무조건 반대해야만 옳다고 생각하시면 안 돼요. 부처님의 방편을 잘 알고 대승의 방편을 잘 아는 게 중요하지 있는 그대로. 먼저 이쪽만 한쪽이 옳아 하면서 재단해 들어가면 재미없어집니다. 이런 내용은요 께왓다경, 범천의 초대 경, 우리 다 읽었죠. 빛나는 마음 경을 보면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간단하게 보세요. 이 열반의 자리에는 한편으로는 자아라고 했는데요. 열반의 자리는 무아의 자리다 이 말도 맞나요? 안 맞나요? 열반은 무아(無我)다. 어떤 의미로 쓰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열반은 무아 맞습니다. 왜? 12연기가 끊어져야 열반입니다. 아시겠죠. 12연기의 그 연기의 자아가 끊어져야 열반입니다. 그래서 열반은 ‘무아’ 맞습니다. 12연기의 자아가 소멸돼야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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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識)이 더 이상 명색(名色)을 만들지 않아야 돼요. 명색을 만들어야 나라는 게 나오잖아요. 5온이 계속 이어져야지 나의 동일성이 이어지는 건데 이 동일성이라는 건 고정·불변의 동일성이 아닙니다. 변화하는 중에 내 개체의 동일성이죠. 아무리 변화해도 ‘이건 나다’ 하는 게 있거든요. ‘내 것이다’ 하는 게. 그 업보가 이어지니까. 그런데 그게 끊어져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열반은 무아입니다, 본질적으로. 그게 달라요. “그럼 열반무아 제법무아 맞네. 제법에 열반 넣어도 되겠네.” 다른 의미예요. 제법의 무아는 뭐예요? 만법은 연기하니까 고정·불변의 자아가 없다는 무아입니다. 다르죠. 고정·불변의 자아가 없다, 무아. 열반의 무아는요? 연기가 끊어져서 무아. 다르죠. 제법무아(諸法無我)는 연기해서 무아예요. 열반은 연기가 없어서 무아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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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우세요. 간단하죠. 지금 불교 총정리 하는 겁니다. 이거 보시고 초기불경 보면요 여러분이 더 고수가 되실 수 있습니다. 오늘 당장 가서 도전하세요. “유튜브 뭐 덤벼” 하고 이제 초기 경전들을 한번 보시면 뭔 얘기하시는지가 귀에 들어오실 거예요 이제. 열반은 무아입니다. 2가지 무아가 있어요 부처님한테는. 부처님이 무턱대고 무아를 주장하지 않으세요. 부처님은 자명한 분이라니까요. 치밀한 분이고. 조건이 있어요. ‘제법무아’ 제법은 무상해서 무아, 연기하니까 무아, ‘열반’은 연기가 없어서 무아. 그럼 그 무아의 내용은 다른 거죠.
[② 명색을 발생시키는 조건이 되는 의식
(8식 [업보를 저장하고 관리하는 의식]에 해당) :
무지로 인한 마음의 작용을 조건으로 발생하여, 새로운 ‘명名’(수상행온受想行蘊)과 ‘색色’(색온色蘊)을 발생시키는 조건이 되는 의식(식온識蘊). ‘중음신’ ‘재생연결식’에 해당하는 의식. 대상화되어 의식되는 의식.
(“잡아함경” “파구나경頗求那經” “사량경思量經” “대수경大樹經” “노경蘆經”]
두 번째 명색을 발생시키는 조건이 되는 의식이 있습니다. 이거는 뭐죠? 이 중음신에 해당되는 재생연결식에 해당되는 식. 명색을 낳는 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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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뱃속에 들어가는 식. 업보, 업보 잔뜩 묻어가지고 엄마 뱃속에 들어가는 식. 8식에 오히려 해당한다. 업보를 저장·관리하는 의식인 8식에 오히려 해당되는 의식이고요. 그럼 이렇게 보면요 부처님 초기 가르침에 이미 9식·8식 다 있지 않아요. 이것까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유식학적으로 발전하는 그 의식에요 여러 다양한 층차가 이미 부처님한테 다 있습니다. 열반의식도 있고요, 진여로서의 열반의식. 그렇죠. 그리고 지금 업보를 가지고 다음 생을 낳는 의식. 그다음 밑에 가면 3번은 뭐겠어요? 명색을 조건으로 발생하는 의식, 7식·6식·5식. 그렇죠. 명색의 인연이 돼서 작동하는 7식·6식·5식. 이때 이제 7식을 의근(意根)이라고 보자고요, 유식학적으로. 그래서 이 괄호 안의 설명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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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학적으로 붙여본 겁니다 제가. 비교해 보시라고. 부처님 안에 이미 부처님은 의식을요 열반과 6식으로만 구분하셨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또 재생연결식에 해당되는 한 식이 따로 나오고 즉 12연기에서 식과 5온에서의 식이 또 구분되는 거예요, 굳이 말하자면. 2번은 12연기의 식인 거죠, 굳이 말하자면. 그리고 3번은 5온에서의 식인 거죠. 사실 5온에서 식이나 12연기 식이 같은데 그 문맥에서요, 식이 ‘명색’을 낳는 식이냐? ‘색수상행’을 인식하는 식이냐? 그 차이입니다. 그래서 2번을 보시면 무지로 인한 마음의 작용 즉 무명과 행이에요. ‘무지로 인한’이 무명이고요 ‘마음의 작용’이 행, 무명 행 다음에 오는 그걸 조건으로 발생하는 새로운 명, 수·상·행온 3온이죠.
10:55 <중음신과 재생 연결식>
그리고 색온 즉 새로운 명색, 새로운 5온을 발생시키는 조건이 되는 의식, 식온. 중음신, 재생연결식에 해당됩니다. 다음 생과 연결해 주는 의식, 대상화되어 의식되는 의식입니다. 이거는 대상화되지 않는 의식은 아니에요. 그래서 이 의식에 대해서 어디서 나오냐면요 잡아함경 중에 파구나경, 사량경, 대수경, 노경에서 나옵니다. 이거 다 할 거예요. 우리가 읽을 거예요. 노경(蘆經)이요, 갈대 노(蘆) 자거든요. 이게 갈대 같지 않으세요? 거기 이제 미리 예습하면요, 식·명·색이요. 이 솥도 발 3개가 있어야, 도원결의도 3명이 해야지 2명이 하면 좀 이상하잖아요. 3명이 돼야 안정되죠. 쿼크도 3개가 돼야 딱 안정되거든요. 우리 심리도 물리도 그래요. 이것도 이 셋이 갈대가 서로 의지해 주면 지탱해주면 잘 버티겠죠. 그거 설명하는 게 노경입니다. 식과 명·색이 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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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가 서로 의지에 서는 것처럼 서로, 하나라도 무너지면 무너진다. 셋이 버텨주니까 안정적으로 서 있다. 그게 노경이고요.
[③명색을 조건으로 발생하는 의식
(7식[의근]ㆍ6식[의식]ㆍ5식에 해당) :
‘명名’(수상행온受想行蘊과 ‘색色’(색온色蘊)을 조건으로 발생하여, ‘명색’을 대상으로 하여 집착하는 의식(식온識蘊). 대상화되어 의식되는 의식, 심리적 자아(名)ㆍ물리적 자아(色)에 해당함.
(“잡아함경” “음근경陰根經” “봉체경封滯經” “노경蘆經”)]
3번. 명색을 조건으로 발생하는 의식은 7식·6식·5식에 해당되는데요. 그러니까 7식이라는 자아의식이 에고 의식이 6식으로 좋다 싫다를 따지는 거죠, 5식에서 오는 오감 정보를 가지고. 그러니까 여러분 평소 의식이 지금 3번이에요. 지금 의식되는 의식은 3번이죠. 재생연결식은 사실은 뭐 죽어야 아는 거잖아요. 그리고 살았을 때도 우리 안에 있는 무의식이죠. 그런데 지금 2번이 심층의식이라면 3번은 표층의식입니다. 밖으로 드러나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아실 수 있어요, 3번은. 1번은 이 모든 걸 알아차리는 의식이고요. 그래서 명, 수상행온(受想行蘊)이라는 3온에 해당되는 명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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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온(色蘊)을 조건으로 발생하여 명색을 대상으로 하여 집착하는 의식입니다. 식온(識蘊). 명색을 알아차리고 집착해요. 이 집착이 커지면요 재생연결식으로 작용해서 다음 또 다른 5온을 찾아요. 그런데 이때 명은요 심리적인 자아에 해당되겠죠. 보시면 보세요.
13:21<연기의 개체성>
나의 느낌 나의 생각 나의 의지가요 심리적인 자아를 형성하죠. 나의 몸은요? 신체적인 자아. 5온이 결국은요 하나로 해서 ‘5온의 자아’ 이래도 되고요, 나누면 신체적 자아, 심리적 자아가 다 여기 들어 있습니다. ‘난 이런 사람이야’ 하는 게 생긴다니까요. 저게 일정한 연기의 개체성이 생기니까 ‘이게 나야’라는 게 생겨요 당연히. 그러니까 생기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름표를 붙여줘야 되니까. “이건 내 감정이야. 그쪽 감정이 아니야.” 나와 남을 안 가를 수가 없는 게요 이거는 내 연기의 흐름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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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 동아리의 흐름이고 그쪽 동아리의 흐름은 아닌 거예요. 한 개체가 연기의 다발로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경계가 있어요. 이 경계가 없다면 우리는 열반에 못 듭니다. 왜? 내가 아무리 도를 닦아도 옆의 놈이 열반에 들 거예요 그러면. 엉망이면, 내가 공부했는데 과보가 저리 가면 엉망이죠. 놀죠 다 같이. 그렇죠. 뭐 복불복이니까 공부해 봤자. 그러니까 말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해탈을 하려고 해도요 연기의 개체성이 유지돼 줘야 됩니다. 그리고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 것도 고정된 자아가 아니라도 어차피 나예요. 그게 그 나라는 이름에는 고정·불변성이 들어가 있어요 그리고. 나라고 하는 순간. 이걸 컵이라고 하는 순간 고정·불변성이 들어가요. 얘는 컵일 것 같아요, 영원히. 이름을 쓰면 집착이 생겨요. 다만 깨어있는 사람은 집착 안 하고 이름을 쓰는 것뿐이에요. 이름을 안 쓸 수는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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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연기의 자아란 말도 쓰자는 겁니다. 심리적 자아 경험적 자아 이거는 심리학적으로도요 다 발견되는 지당한 거예요. 문제는 이거예요. 심리학자들이요 심리적 자아가 있다. 사람 안에는 에고가 있다. 충동이 있다. 막 개체성이 있는 것처럼 얘기하면 불교학자가 가서 ‘이런! 고정·불변의 자아를 설정하다니..’ 이러는 게 아니에요.
15:24 <윌리엄 제임스의 의식의 흐름>
심리학자도 그거 고정·불변이라고 쓰는 거 아니에요. 자아는 계속 변해요. 다만 이름을 그렇게 붙인 거예요, 이름표를. 보세요. 심리학적으로도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가 주장한 게 뭐예요? 심지어 윌리엄 제임스 주장은요 심리학의 아버지라는 분인데 현대심리학의, 이런 비슷한 경험적 자아, 선험적 자아 다 구분합니다. 이걸(선험적 자아) I라고 그러고 이걸(경험적 자아) Me라 그래요. I가 Me를 알아차린다. 이 I는 항상 목격자다. 그런데 여기에 어떤 의식의 실체가 있다고 접근하면 안 된다. 윌리엄 제임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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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체 없다. 이게 뭐냐 하면 이거예요. 그냥 요놈(前念)이 요놈(後念)을 알아차린다. 바로 이전 의식이 뒤의 의식을 알아차리는 거다. 이해되시죠. 그러니까 항상 지금 의식이 알아차리고 사라지는 거죠. 또 지금 의식이 알아차리고 사라지고. 저걸 이제 전문용어로 ‘의식의 흐름’이라는 말을 만들어내신 분이에요, 윌리엄 제임스가. 즉 같이 관찰을 해도 부처님과 다른 결론을 낼 수도 있습니다. 후설과 부처님은 순수 1인칭이라는 어떤 실체를 강조했고요, 열반의 자리, 불생불멸의 자리를 강조했고, 윌리엄 제임스라는 분은 더 형이하학적으로 접근을 해요. 그냥 의식은 무상하게 흐르고 있을 뿐이지 거기에 어떤 동일성도 없고 그냥 흐름만 있다. 이런 설명도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여기까지 똑같은 그림을 그려요. 이 識을 뭐로 볼 거냐에서 입장이 다를 수도 있다는 겁ㅂ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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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우리는 뭐예요? 후설이나 부처님의 깨어있음 속에서 바라본 알아차림의 결론이 훨씬 자명하다라고 판단한 것뿐이에요. 좀 더 과학적 입장, 실용주의자거든요, 저기 윌리엄 제임스라는 분은. 그분은 ‘의식의 실체 없다’예요, 오히려 결론은. 거의 같은 데까지 와 가지고 관찰해 본 뒤에, 실험해 본 뒤에 결론을 그렇게 내요. 이것도 이제 알아두시면 재밌죠. 다를 수 있습니다. 오히려 부파불교적으로 ‘찰나찰나의 의식만 있다.’ 이렇게 주장할 수도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이거예요. 실험해 보시라. 부처님이 자신 있게 권하신 방식대로 실험해 보시고 본인이 깨달아 보시라. 진짜 열반, 탐진치 없는 세계에 들어가나 못 들어가나 실험해 보고 얘기하자는 겁니다, 그 이상은. 반론까지 소개해 드렸어요, 제가. 그래서 그런 사람들도 경험적 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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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윌리엄 제임스가 주장한 겁니다. 자아에는요 발견되는 Me. I는 목격자일 뿐이라 여기는 의식의 중심일 뿐이거든요. 근데 의식의 중심도요 실체가 없이 중심이 될 수 있다고요, 찰나찰나 변하면은. 부파불교가 찰나찰나 변하는 마음을 의근(意根)으로 삼았듯이 같은 논리입니다. 다 거기서 거기예요. 패턴이 비슷하니까 이 중에 뭐가 더 자명한지는 실험을 통해서 여러분이 선택하시면 되고, 윌리엄 제임스가 이런 말까지 했어요. 이 경험적 자아를 ①신체적 자아, ②물리적 자아, 하나 더 해서 ③사회적 자아 이 3가지로 구분했어요, 사회관계 속에서 나. 근데 이 자아를 정했다고 해서 이게 고정·불변이 아니에요. 이름은 고정·불변이지만 그 안에는 계속 변화하는 내용들이 들어있다고요. 그러니까 그거 가지고 시비 걸면 안 돼요. 자아라는 이름 썼다고. 그러니까 자아라는 이름을 여유롭게 쓰시라고 제가 이 얘기를 드리는 거예요. “알아! 연기하는 줄” 그렇게 되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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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자아” 이러면 답답하네 하면서 “연기 연기” 이러세요. 그럼 할 말 없습니다. 이해되시죠. 그럼 연기 안 하는데 자아란 말 안 쓰고 말해 보세요. 서로 말을 잃겠죠. 그래서 내가 없는데 뭘 가지고 말을 해요? 그러니까 말이 아닌 소리고. 무아병 심하게 걸리면 숨도 쉬면 안 되는 거고요 그거는. 아시겠죠. 자아라는 말을 여유롭게 쓰시라. 다만 내용만 확실히 아시면 돼요. 무상한 연기 속에서 어떤 개체성 그리고 개체 동일성, 일정한 동일성, 고정·불변이 아니고 그거를 나라고 한다. 다른 개체와 구별되는 거죠, 차별성. 이 동일성은 동시에 차별성이죠. 다른 개체들의 연기랑 뭐가 다른 측면이 있겠죠.
19:54<윤회의 주체>
나만의 연기의 모습이. 그걸 그냥 그렇게 자아라고 해서 ‘5온의 자아’ 하면 막 5온의 자아를 박살내야만 해탈된다는 그게 경전에서 읽은 그게 생각나서 ‘5온의 자아’ 나오면 경기냅니다. 그러면서 그런 분들이 어디 가서 아집은 제일 많이 부리고 다녀요. “내가 말이야 내가 불교를 안다고.” 아시겠죠. 그게 웃기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자아는 이름이 고정·불변이라 문제성이 있다는 것뿐이지 이름 안 쓰고 말할 재간이 없다 누구도. 부처님도 못 하신 거예요. 그래서 부처님도 제자한테 “너 다음에 어디 태어난다”까지 얘기를 해요. 그럼 고정·불변한 내가 있는 것 같잖아요. 부처님 말씀만 들어도 너 다음에 어디 태어난다. 법화경 보세요. ‘너 다음에 성불한다.’ 수기를 해줘요. “그럼 영혼에 일정한 고정·불변의 영혼이 없다면 윤회의 주체가 없다면 그게 말이 됩니까?” 이 말이 나오는 거예요. 실제 초기불경에서도 그런 질문이 나와요. “부처님 이런 얘기하셨잖아요. 누구한테 어디 태어난다고 하고. 그러면 윤회를 초월한 주체인 자아가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럼 부처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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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 그래요? 또 뭐 침묵하시거나 불리하면 침묵. 회피주의자시죠. 근데 그게 이제 가르침이에요. 아닥해라! 다만 정확하게 짚어줄 때는 짚어줘요. 그러니까 이게 동문서답하는 걸로 보여요. “부처님 다 얘기하셨잖아요.” 그러면요 “무명이 있으면 행이 있고, 행이 있으면 식이 있는 법이며, 무명이 사라지면 행이 사라지고, 행이 사라지면 식이 사라지지.” 이러고 끝내요. 느낌 오세요? “자아는 연기 따라 생겨났다 연기 따라 사라지는 것뿐이다.” 이 말로 끝내요. 그리고 어차피 제자는 어차피 도움이 안 돼요. “뭐라시는 거야?” 이게 있다는 거예요 없다는 거예요 고정된 게? 이 차이예요. 그래서 대화가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있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까?” “자아가 어떻게 되냐고? 무명과 행 때문에 너라는 자아의식이 생기는 거지. 그 자아의식이 명색을 낳고 명색이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해서 계속 돌고 돌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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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얘기해요, 부처님이. “그럼 자아가 있다는 건가요? 없다는 건가요?” “연기하는 너는 있는데 그 너도 결국은 소멸돼야 된다”는 얘기를 하시는 거예요. 이해되세요 이제? 부처님과 여러분을 지금 제가 중간에서 소통을 시켜드리려고 최선을 다해 봤습니다. 이런 내용은요 잡아함경의 음근경, 봉체경, 노경 같은 데 나옵니다. 노경에는 이 얘기도 나오고 저 얘기도 나와요. 그러니까 노경을 보시면요 충돌하는 걸 그 당시에도 알아요. 질문이 들어와요. “아니 식이 명색을 낳는다고 했다가 명색이 식을 낳는다고 하시면 어떡합니까? 부처님 이러시면 안 되죠.” 이런 내용이 노경이에요. 그러니까 뭐라고 하시겠어요? 셋이 갈대처럼 서로 부처님이 대답을 안 하고 제자 하나가 대답을 잘해요.
22:56 <부처님의 연기법>
갈대로 이렇게. 대답 잘했다고 이제 사리불이 찬탄하고 이러고, 말 잘한다고. 드립력 좋다 이런 칭찬받고 그러는 거예요. 여기까지 지금 보셨고 뒤로 오시면 오늘 잡아함경, 법구경까지는 끝내야 되지 않을까요. 기존에 이제 본 거니까.지금 이제 그전에 본 거랑 좀 다르셔야 돼요, 안목이. 어떠세요? 5온과 12연기라는 윤회의 세계. 부처님은요 누가 어떤 언어를 쓰고 질문을 하건 윤회의 세계에서 얘기합니다, 1차적으로. “윤회의 세계에 그런 게 있나? 윤회의 세계에 아트만이라는 게 있나?” 이제 여러분 12연기와 5온으로 사고하시면 불변하는 나라는 게 있을 수 있을 것 같으세요? 아니죠. 그 모든 거를 몰라 할 때만 열반에 도달합니다. 이 감각만 갖추시면 돼요. 뭔 개념이 나오건 연기의 세계로 설명합니다. “그것도 그 원인이 있어서 나온 거 아니야?”
24:00
아주 답답하신 분이에요. 이제 누가 막 정신작용, 의식이라는 거를 독립적인 실체처럼 얘기하면요 “의식은 무명이 있어서 행이 있고, 행이 있어서 식이 있으며, 식이 인연이 돼서 명색이 있는 거야.” 또 이 얘기를 하세요. 그럼 알아들으셔야 돼요. “아! 연기한다고요.” 이렇게. “고정된 나 얘기하지 말라고요. 연기하는 나만 얘기하라고요.” 이 말이에요. 이 정도 눈치면 이제 초기불경 읽을 수 있습니다. 잡아함경의 일체경 보실래요.
[* “잡아함雜阿含” “일체경一切經”
‘일체一切’라는 것은 ‘12입처’(6근根인 6내처內處와 6경境인 외처外處, 6근과 6경이 서로를 거두어들이는 자리)를 말하니, 시각(眼)과 색깔(色), 청각(耳)과 소리(聲), 후각(鼻)과 향기(香), 미각(舌)과 맛(味), 촉각(身)과 촉감(觸), 마음(意)과 법칙(法)이다. 이것을 ‘일체’라고 한다. … ‘나는 이 일체 외의 다른 일체를 별도로 세우겠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단지 말뿐이니, 물어보면 알지 못하고 의혹만 더 커질 것이다. 왜 그러한가? 그것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도 예전에 한번 본 건데 부처님은 지금 이 순간 내가 알아차리는 그 색과 그 소리·냄새·맛 그게 내 세계의 전부라고 생각하신다고요. 일체라는 것은 12처, 6근에 6내처가 있어요. 안에 있는 자리 6개랑, 6외처 밖에 있는 자리 6개가 뭐겠어요? 안에 있는 게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밖에 있는 게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25:02
안에 있는 게 눈, 밖에 있는 게 색깔. 안에 있는 게 귀, 밖에 있는 게 소리. 코·냄새, 혀·맛, 몸뚱이·촉감. 그렇죠. 그리고 의근·생각, 마음과 그 대상이 되는 법칙. 그 법칙을 담는 게 개념이니까요 마음과 개념 이러셔도 돼요, 방편으로. 이것을 일체라고 한다. 그럼 여러분이 지금 알아차리는 거잖아요. 지금 그러니까 이 말을 들으시고도요. 보세요. 이게 깨어서 경을 읽지 않으면요 이 말을 듣고 그렇습니다. “그렇지 일체는 색깔·소리·냄새·맛이지.” 이러고 계시면 경을 잘못 읽고 계시는 거예요. 지금 이 말씀을 들을 때 정신을 차리세요. 1인칭으로 존재하세요. 그리고 지금 경험되는 것들이 뭐예요? 온갖 2인칭들이 색깔·소리·냄새·맛 밖에 없죠. 체험하면서 들으시라고요. “이게 일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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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들으셔야 돼요. 이해되세요? 안 그러고 막연히 일체 그러면 3인칭처럼 생각한다고요. 나도 3인칭, 내 마음도 3인칭처럼 세계도 다 3인칭. 객관적으로 이 세계가 있는 것처럼 이게 후설이 반대한 객관주의입니다. 과학주의고 객관주의예요. 이 객관주의가 불교에서 말하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라고 하는 법집(法執)이에요, 법집. 만법이 나랑, 나랑이라는 게 주관과 별개로 존재하고 만법이 연기 밖에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거예요. 만법이 연기 밖에 따로 있는 것처럼. 아집은요? 나라는 게 연기 밖에 따로 있는 것처럼 자아가 생각하는 거예요. 연기 속에서, 주객 관계 속에서 있는 건데 대상이 있어야 내가 있는 건데. 그렇죠. 그러니까 나와 너는요 이원성의 세계예요. 그래서 이원성을 날려버리면 없죠. 그래서 열반에는 아까 얘기했지만 열반에는 어떤 이원성도 없대잖아요. 그럼 나와 너도 없는 거예요. 열반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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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객이 없습니다. 그래서 무아예요. 현상계는요? 주객이 있어요. 주객이 있어서 굴러가는데 고정된 주체 고정된 객체는 없다고요. 그래서 무아예요. 귀에서 피 나시겠죠 이제. 저 피 토할 것 같아요. 나는 이 일체 외의 다른 일체를 별도로 세우겠다라고 혹시 누가 망상을 부린다면 그건 말뿐이다. “그건 말이지 그런 걸 경험할 수가 있나?”이거예요. 이게 오히려 과학주의 객관주의적 주장입니다. 아니 일체라는 게 객관적으로 있는 거지 절대적 시공간이 있고, 다 우리 밖에 시공간이, 절대적 시공간이 아니라 상대적 시공간이 있더라도 우리 밖에 있는 거지 그게. 이게 되게 문과들의 착각이요 이번에도 막 책 보는데 문과들의 착각이, “양자역학으로 인해 드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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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가 알아차림에 의해 존재한다는 게 입증됐다.” 과학자들이 들으면 기겁할 내용입니다. 과학자들은 관념론을 절대 인정하지 않습니다. 객관주의입니다, 과학은. 과학은 주관성을 배제할수록 자명하다고 생각해요. 근데 주관주의의 극치인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사상으로 양자역학을 비슷한 말을 쓴다고 해서 “우리가 서로 하나 됐구나.” 하시면 정말 동상이몽이죠.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철저히 입장이 다릅니다. 객관주의 과학주의는 일체 세계가 존재하고 나의 의식은 뇌의 작용일 뿐이에요. 지금 뇌의 전기적 작용일 뿐입니다. 그래서 AI랑 여러분이랑 그렇게 구별을 안 해요, 과학은. 이해되시죠. 이 태도를 반대하는 겁니다 지금. 후설이 이걸 반대하면서 “유럽에 학문의 위기가 왔다. 이 과학주의가 들어서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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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땅에 떨어졌다.” 그 철학이 뭐냐? 그게 일체는 내 정신에서 바라보는 일체를 이 관점이 땅에 떨어졌다 하고 현상학을 주장한 건데, 지금 부처님이 딱 현상학적 관점이에요. 세계는 뭐냐? 내 의식에서 현상, 현상화된다는 건 나타났다, 내 의식에서 나타난 거, 나타난 거 딱 그게 일체라는 거예요. 됐죠. 법구경의 3법인(法印)에 대한 가르침, 다시 보죠.
[* “법구경”의 ‘3법인法印’에 대한 가르침
1. “일체의 행위(行)는 무상하다!”(諸行無常)라는 진리를 꿰뚫어 볼 때, 고통을 싫어하여 벗어난다. (무상을 떠나 ‘영원한 열반의식’에 안주하니 ‘상常바리밀’이다.) 이것이 청정(淨)에 이르는 길이다. (20장 277게송) (부정을 떠나 ‘청정한 열반의식’에 안주하니 정淨바라밀이다.)
2. “모든 행위(行)는 고통이다!”(一切皆苦)라는 진리를 꿰뚫어 볼 때, 고통을 싫어하여 벗어난다. (고를 떠나 ‘지복의 열반의식’에 안주하니 낙樂바라밀이다.) 이것이 ‘청정’(淨)에 이르는 길이다. (20장 278게송)
3. “일체의 법(法)은 내가 아니다!”(諸法無我)라는 진리를 꿰뚫어 볼 때, 고통을 싫어하여 떠난다. (무아를 떠나 ‘참나인 열반의식’에 안주하니 ‘아我바라밀’이다.) 이것이 ‘청정’(淨)에 이르는 길이다. (20장 279게송)
4.과거에서 벗어나고 미래에서 벗어나라. 그리고 현재에서도 벗어나라. ‘존재의 피안’으로 건너가서 일체에서 자유로워진 마음은, (무상ㆍ고ㆍ무아ㆍ부정에서 자유로워진 마음이 ‘상락아정의 마음’인 ‘열반의식’이다.) 다시는 태어남과 늙음을 겪지 않을 것이다. (24장 348게송) (생사를 다시 겪지 않는 마음이 ‘상락아정의 열반의식’이다.)
일체 행위는 무상하다(諸行無常)라는 진리를 꿰뚫어 볼 때, 이게 전제가 연기하니까 예요. 이것이 있어야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어야 이것이 있으니까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하니까 그리고 그 상호의존성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계속 굴러가니까 무상한 거예요. 이 진리를 꿰뚫어 볼 때, 고통을 싫어하여 벗어난다. 이 진리를 정확히 인가할 때요 그러면 먼저 무상한 세계를 알아차려야겠죠. 1인칭 관점에서 무상한 세계를 2인칭으로 해서 바라보시면 깨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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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보신다면 이 무상함이 드러날 거고, 그때 진리가 인가가 돼요. 일체는 무상하구나! 제행은 무상하구나! 이게 인가가 될 때, 이게 정확하게 인가가 되면요 이 고통을 싫어하여 벗어날 수 있게 돼요. 내려놓게 됩니다. 이 무상함을 철저히 인식 못 하면요 깨어서 이걸 인식 안 하고요 막연하게 세상이 무상하구나! 우리 다 알죠. 막연하게는 다 알아요. 과학자들은 더 잘 알겠죠. 우주는 원자·분자의 이합집산일 뿐이에요. 우주는 영원히 뭉쳤다 흩어졌다 뿐이에요, 원자·분자의. 이렇게 무상함을 아는데 왜 해탈을 못 하죠 과학자들이? 그렇죠. 이게 개념으로만 아는 거랑 또 실험까지 해봤어요. 그것도 좋아요. 정신을 차리고 내 정신에서 인가를 해야 돼요, 깨어서. 정신을 차리고 일체를 정신의 현상으로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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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정신에서 나타난 현상, 내 정신이라는 1인칭에 기대서 있는 2인칭으로 세계를 바라보면서 “이 모든 것들이 연기하니까 무상하구나!” 할 때 이게 놓아집니다. 그러면서 순수 1인칭으로 존재할 수 있게 돼요. 이 부분이 빠져 있으니까 과학자들이 무상함을 알면 더 잘 알죠. 그렇지 않겠어요? 더 전문가인데. “사실 우리 막 원자·분자 뭉치고 흩어진 것뿐이잖아요.” 해도 원자·분자 감이 안 와요, 사실은. 동그란 거 아닐까? “화학식, 분자식 쓰시오.” 이러면 다 그놈이 그놈 같고. 그러니까 더 정확하게 실험을 통해 아는데도 왜 해탈이 안 되는가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래서 요즘 많은 분들이 열반을 배제하고요 이런 깨어서 일체를 내 정신의 현상으로 보면서 얘기하는 이런 관점을 배제하고 일체는 무상하다는 걸요 과학적인 사례를 들어서 “일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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쪼개면 공입니다. 다 쪼개면 원자·분자 다 공입니다.” 이런 얘기하는 건요 의미가 없는 게 그러려면 과학자들은 이미 다 열반에 드셨어야 돼요. 뭔가 빠져 있는 게 있겠죠. 그게 정념(正念)이에요. 깨어서 정념·정지(正知) 깨어서 알아차리지 않으면 절대 해탈이 안 옵니다. 왜? 정념이라는 행위가요 일체를 몰라 하고 깨어있는 행위가 이미, 보세요 정념 상태, 정신 딱 모아보세요. 거기에 이미 탐진치가 없어요. 탐진치가 없는 자리를 체험하면서 연구하니까 탐진치 없는 자리로 더 안착돼서 들어가는 거예요. 깨어있지 않고 연구하면 탐진치 상태에서 계속 얘기하는 거예요. 이해되시죠. 그리고 아무리 얘기를 해도 탐진치가 사라지질 않아요. 40년, 50년 학자로서 연구해도 안 사라져요. 왜? 한 순간도 안 깨어있었던 거죠. 정신을 차려서 딱 1인칭 관점이 되면 1인칭 자리에는 탐진치가 안 묻어요. 왜? 탐진치는 2인칭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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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진치는 명(名)의 작용이에요. ‘수상행(受想行)’의 작용이에요. 탐진치를 알아차리는 자가 되시라고요. 이러면 탐진치에서 벗어나버리거든요. 그래서 달마조사(達摩祖師)가 그 제자 혜가(慧可, 487-593)이 “마음이 괴로워요.” 하니까 “그 괴로운 마음을 나한테 갖고 와 봐라.” 그럼 괴로운 마음을 딱 알아차리려고 보니까 어떻게 됐겠어요? 1인칭 관점이 서버린 거예요. “괴로운 놈 어디 있냐?” 좀 전에 나 괴롭히던 마음, 그 마음을 2인칭으로 봐버리니까 깨어나 버린 거예요. 없죠. 1인칭이 강해져버리니까 사라져버린 거예요. 탐진치가 사라져버리니까 “안 괴로운데요.” “봐. 너 마음 편안해졌지!” 이게 안심법문(安心法門)이라는 달마가 중국에 와서 가르침 편 겁니다, 첫 번째 혜가라는 제자한테. 그게 뭐냐? 괴로운 마음을 알아차려본 거예요. 그러면 괴로운 마음을 알아차리는 놈은 괴로움이 아니거든요.
34:01
그렇죠. 여러분 졸릴 때요 조는 놈을 알아차려 보세요. 그 알아차리는 놈은 안 졸립니다. 물론 그러다가 다시 졸리는 마음에 끌려갈 수도 있지만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으면 잠에서 나와 버립니다. 잠으로 못 들어가요. 항상 이 1인칭 관점을 유지하는 게 정념·알아차림,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인데요 쪼개서 말하면. 일단 마음챙김, 정신을 딱 차리는 거예요. 눈만 똑바로 뜨셔도 돼요. 눈 똑바로 뜨세요. 눈에 초점을 분명히 하시면 깨어나게 돼요, 정신이. 1인칭 관점이 딱 서요. 그렇죠. 그럼 제가 2인칭이 돼요. “난 1인칭이고 너희는 2인칭이야.” 이게 분명해야 돼요. 이게 깨어있는 거예요. 그러면 일체의 2인칭의 세계가 명색(名色)의 세계 밖에 없다는 걸 알아요. 그 명색을 내려놓으면 나는 열반에 들어가는 거예요, 아주 간단하게.
35:00<무상,고,무아>
지금 무상·고·무아를 통해 들어가는 방식도 똑같아요. 1인칭 관점에서 바라보니까 무상(無常)이 보인 거예요. 그전에는 무상을 제대로 본 게 아니라니까요. 마음을 챙겨서 봐야 ‘정견(正見)’이 서요. 정견이 서야 진리로 꿰뚫어 볼 때 고통에서 떠날 수 있게 돼요. 못 꿰뚫어봤기 때문에 못 떠나는 겁니다. 깨어서 바라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것이 벗어나기만 하면 이게 청정에 이르는 길이다. 끝이에요. 열반에 들기가 이렇게 쉬워요. 또 모든 행위가 5온입니다. 5온을 바라보세요. 5온을 바라보는데 내 마음에 나타난 모든 걸 바라보는 겁니다, “몰라 괜찮아” 하시면서. 그럼 1인칭 관점이 되는데 이 모든 것들은 계속해서 연기하고 있으니까 무상하니까 고통이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고통이라는 건. 그게 통증을 준다는 게 아니에요, 단순히. 내 뜻대로 되지가 않는다. 내 마음대로 부려지지가 않는다. 그래서 고통이다. 또 다른 말로 내가 아니다.
36:00
세 번째 다 같은 거예요. 다 연기하니까 예요. 연기하니까 무상한 거고요,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찰나찰나 연기하고 있으니까 무상하고, 무상하니까 내 뜻대로 통제가 안 되고 고통이고, 통제가 안 되는 거 보니까 “내 것이 아니구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내 물건이 아니구나” 모든 행위는 고통이다(一切皆苦)라는 진리를 꿰뚫어 볼 때 고통을 싫어하여, 즉 혐오가 필요합니다. 혐오라는 건요 1인칭 관점이 확립됐을 때예요. 이게 확립돼서 일체를 2인칭으로 볼 때 2인칭 세계가 무상·고·무아의 특징을 갖고 있다는 걸 알고, 내가 찾는 열반이 아님을 알고, 탐진치의 세계임을 알고 내려놓는 거예요. “몰라”를 해버리는 게 혐오입니다. “몰라” 해버리고 내려놓는 게 혐오고, 이 혐오의 마음을 고상하게 ‘출리심(出離心)’이라 그래요. 미워하여 떠나는 마음, 윤회의 세계를 떠나는 마음, 그럴 때 어디에 도달해요? 열반에 도달합니다. 그러면 ‘청정‘에 이르게 된다.
37:01
‘일체의 법은 내가 아니다’라는 진리를 꿰뚫어 볼 때 고통을 싫어하여 떠난다(諸法無我). 여기에다 일체의 법에 열반을 괜히 붙이지 마시라고요. 열반도 무아는 맞지만 그 무아가 아니라고요, 여기서는 ‘연기하니까 내 것이 아니라는 말’이 포인트입니다. 그래서 ‘고통을 싫어하여 떠난다‘고 돼 있잖아요. 그래서 ‘고통을 싫어하여 떠난다’고 돼 있잖아요. 이것도 고통인 거예요 다. 아무튼 떠나게 되는 거죠. 떠나야 열반에 도달하죠. 청정함에 도달하죠. 그러니까 보세요. 여기서 내 것이 아니라서 떠나야 되는데, 여기 제법(諸法)에다가 무위법(無爲法)도 법이라고 열반을 넣어버리면 열반도 떠나야 되죠.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소리입니다 이건. 그리고 무위법이니 유위법이니 나눈 거는 부파불교 때예요. 부처님 때가 아니에요. 아니 후대에 제자들이 해놓은 개념 구분을 갖고 부처님한테 갖다 댄다는 게 기가 막히죠.
38:01
4번 여기까지 할게요, 마지막. 부처님이요 최상승법을 논하십니다. 이게 후대에 두고두고 모든 족첸, 마하무드라 최상승선의 핵심입니다. 보세요. 과거에서 벗어나고 미래에서 벗어나라. 연기의 세계에서 존재하는 건 이거 밖에 없죠. 지금 존재하는 거, 지금 이게 모든 부처님 말씀은 정념, 깨어서 신수심법(身受心法) 내 몸 마음 호흡 내 생각을 보고 계셔야 돼요. 알아차리다 보면, 홍익학당에서도 제일 강조하는 게 뭐예요? 깨어있는 마음챙김. 깨어서 마음을 챙기고 알아차리다 보면 생각·감정·오감을 알아차리다 보면 뭐가 알아차려져요? 무상·고·무아가 알아차려졌죠. 이번에는요 그렇게 깨어서 바라보면서 한 찰나
39:00
지나가면 과거가 되죠. 전찰나, 과거 지나갔으니 “몰라” 하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찰나는 아직 안 왔으니 “몰라” 하고. 그러면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접촉점이 현재거든요. 이 현재도 딱 잡아서 어디가 현재냐 할 수가 없죠, 순간 사라지니까. ‘찰나찰나 사라지는 그 자리’를 보고 있으라는 거예요. 과거는 지나가서 없고, 미래는 오지 않아서 없고. 과거로부터 벗어나고 미래로부터 벗어나면요 과거·미래가 없으면 현재도 없는 거예요. 과거와 미래에 만나는 접촉점을 현재라고 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이 현재도 없는 겁니다. “그래도 지금은 있지 않냐” 해서 ‘지금·여기’ 이런 말을 쓰는 거예요. 여기서 현재라는 말은 과거·미래의 접촉점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일정한 폭이 있어요. 폭이 없어버리면요 그냥 영원이 됩니다. 왜냐하면 폭이 없으면요 과거·현재·미래가 아무도 설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어떤 개념도 설 수가 없어요.
40:00
그래서 부처님 말씀대로 하면요, 그러니까 이렇게 얘기해도 돼요. ‘과거 몰라 하고 미래 몰라 하시오’랑 같은 말이에요. 과거·미래가 없으면 현재가 없다니까요. 부처님은 친절하게 현재까지 넣어준 거예요. “과거 몰라. 미래 몰라. 현재 몰라” 해버리면 딱 지금 이 순간밖에 없는 거죠. 그러니까 과거·미래랑 떨어진 지금 이 순간. 그럼 이미 참나 상태인 거죠. 그런 거는 현상계에 없어요. 지금 이 순간은 참나밖에 없어요. 그러면 바로 ‘존재의 피안’으로 건너가 버려요. 일체의 자유로워진 마음, 그러면 탐진치가 사라져버리죠. 이 상태는 없는 거예요. 이렇게 해서 존재의 피안, 열반으로 건너가 버린 마음. 과거·미래·현재가요 연기가 시간 속에서 굴러가요. ‘지금·여기·나너·이렇게’가 끝없이 굴러가는데 지금과 여기라는 건 시간성을 지금 가정하고 한 지금·여기입니다. 과거·미래로부터 초월적인 지금·여기를 말한 게 아니고 제가 얘기한 지금·여기는 폭이 있는 거, 과거와 미래가 만난 지금
41:00
이 현재, 현재 이 장소, 그리고 나와 너. 이원성을 전제한 거잖아요. 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지금을 말한 건데. 여기서 연기에서 벗어난다는 건 ‘시간의 흐름 속’에서의 지금이 아니라 과거·미래·현재가 ‘없는’ 지금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이거는 ‘열반자리’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존재의 피안으로 바로 건너가 버리죠.
41:23 <열반의 의미>
그럼 일체에서 자유로워진 그 마음은 다시는 태어남과 늙음을 겪지 않을 것이다. 그 자리에 안주해버리면 다시는 5온의 세계에서 잡히지가 않는다. “연기의 세계에 들어오지 않고 떠난다.” 이게 부처님 결론입니다. 최상승선법이에요. 우리 제가 강조하는 14조의 가르침에서 뭐라고 하죠? 과거를 집착하지 말고, 미래를 걱정하지 말고. 그렇죠. ‘지금 이 순간 현존에 만족하라’ 할 때 지금 이 순간은요 과거·미래 뗀 순간입니다. 그대로 참나 상태, 열반에 만족하라는 거예요. “과거 몰라 하시고,
42:00
미래 몰라 하시고 지금 이 순간 열반의 자리에 만족하십시오.” 하면 끝입니다. 부처님도 이 말밖에 없어요. “과거·현재·미래에서 벗어나라. 연기의 세계에서 벗어나라. 찰나찰나 굴러가는 연기의 세계에서 벗어나면 열반의 세계, 불생불멸의 세계에 안주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끝내자니 아쉬워서 7페이지는 읽고 끝내야겠어요. 왜냐하면 이 얘기를 오늘 안 해놓으면 아쉬울 것 같아요. 계속해서 왜냐하면 열반 얘기를 했거든요. 지금 5온과 12연기 얘기는 잘 아실 거예요. 그리고 그 5온과 12연기의 세계의 특징은 ‘무상·고·무아’라는 것까지 아셨는데 열반에 대해서 부처님이 지금 이렇게 의식으로 얘기하는 게 맞는가? 불생불멸이라고 이렇게 형이상학적으로 얘기하는 거 아닌가? 탐진치의 소멸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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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열반을 알았는데 ‘불생불멸의 열반’이라는 말을 자꾸 썼고, ‘열반의 자아’라는 말까지 썼기 때문에 제가 또 책임을 져야 되니까.
[* “우다나”의 열반
(전재성 역, “우다나-감흥어린 시구” 한국빠알리성전협회)
1. 열반경 3
“수행승들이여, 태어나지 않고, 생겨나지 않고, 만들어지지 않고, 형성되지 않은 것이 있다. (무위법인 열반은 생멸이 없는 영원불변의 존재이다.)
수행승들이여, 태어나지 않고, 생겨나지 않고,
만들어지지 않고, 형성되지 않은 것이 없다면,
세상에서 태어나고, 생겨나고, 만들어지고,
형성되는 것으로부터의 여읨이 알려질 수 없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태어나지 않고, 생겨나지 않고,
만들어지지 않고, 형성되지 않은 것이 있으므로,
세상에서 태어나고, 생겨나고, 만들어지고,
형성되는 것들로부터의 여읨이 알려진다.”
2. 바히야의 경
“물도 없고 땅도 없고, 불도 없고 바람도 없다.
거기에는 별도 반짝이지 않고, 태양도 비추지 않는다.
또한 거기에는 달도 빛나지 않고, 어둠도 존재하지 않는다.
(지수화풍과 이원성의 소멸, 무형이며 무한하게 빛나는 열반의식에 안주)
성자인 바라문이 스스로 자신의 체험으로 이것을 알면
(스스로 열반의식에 안주함)
그는 물질계와 빗물질계, 즐거움과 괴로움에서 벗어나리.
(열반의식 안에서 명색을 낳는 의식이 소멸하니, 명색이 소멸하여 윤회의 흐름이 끊김)”]
보시면 우다나 제가 번역한 게 아닙니다. 전재성 박사님 역으로 우다나는 ‘감흥어린 시구’라는 건데요. 우다나에 있는 열반경, 바히야경을 볼게요. 열반경이 많아요. 열반을 주제로 한 경들은 다 짧은 열반경들이 많은데 그중에 3번, 열반경 3번. 수행승들이여, 태어나지도 않고 생겨나지도 않고 만들어지지도 않고 형성되지도 않은 것이 있다. 이건 불생불멸이죠. 이게 무위법이죠. 생멸이 없는 열반이 있다. 영원불변의 존재라는 겁니다. 생겨나지도 멸하지도 만들어지지도 않으니까 연기의 세계 바깥에 있다는 거예요. 수행승들이여, 태어나지 않고 생겨나지 않고 만들어지지 않고 형성되지 않은 것이 없다면 이런 연기 밖에 있는 열반이라는 게 없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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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태어나고 생겨나고 만들어지고 형성된 것으로부터 ‘떠남’이라는 게 알려질 수 없다. 절대 연기 세계 못 떠나. 연기 밖에 열반이라는 불생불멸의 세계가 있으니까 내가 ‘연기를 떠날 수 있다고 얘기한 거야’라는 구절이에요. 어떠세요? 가장 적극적으로 열반을 얘기한 구절 중에 하나입니다. 탐진치의 소멸로만 얘기하다가 전혀 연기 밖에 세계가 있다니까. 거기 가야 된다니까.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태어나지 않고 생겨나지 않고 만들어지지 않고 형성되지 않은 즉 연기되지 않은 연기로 인해 존재하지 않은 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열반에 들 수 있는 거다 이 소리입니다. 이 연기의 세계에서 떠날 수가 있다. 왜 저쪽으로 옮겨가면 되니까. 이거 옮겨감의 개념이 있는 거예요. 근데 그게 법구경에서도 이미 있었죠. ‘무상·고·무아’의 고통을 벗어나서 청정한 세계로 가자고 했죠. 피안으로 건너가자는 말을 자꾸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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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피안은 뭐죠? 건너가자는 거예요. 피안이라는 건요 여기서 볼 때 저쪽 바다 건너 물 건너 저쪽 언덕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저쪽 언덕으로 배 타고 건너가야 돼요. 열반은 연기의 세계에서 연기가 없는 세계로 건너가는 겁니다. 이게 부처님 머릿속이에요. 열반으로 건너가야 되는 거예요. 그리고 열반은 생멸이 없고 연기가 없는 세계예요. 그러니까 만들어진 세계가 아닙니다. 조작된 세계가 아니에요. 바히야 경 한번 보세요. 물도 없고 땅도 없고 불도 없고 바람도 없다. 지수화풍이 없다, 거기에는. 이거 아까랑 똑같죠. 그럼 같은 묘사를 하는데 한쪽에서는 열반이고 저쪽에서는 의식이니까 열반과 의식이 같은 거죠. 거기에는 별도 반짝이지 않고 태양도 비추지 않는다. 이거 별과 태양 같은 물질적인 빛이 없어요, 거기에는. 거기에는 달도 빛나지 않고 어둠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이원성도 없어요. 지수화풍과 이원성이 없다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거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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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자인 바라문이 즉 브라만이죠. 브라만이 스스로의 자신의 체험으로 이것을 알면. 자신의 체험으로 이걸 알면 즉 스스로 체험해 보라고 부처님이 얘기하시죠. 이거는 상상의 세계가 아니야. 5온의 세계, 연기의 세계를 네가 스스로 알아차려서 벗어나 봐. 지수화풍이 없는 그 자리에, 체험으로 이걸 알면 그대는 그는 물질계와 비물질계, 즉 명색이에요. 정신과 물질, 즐거움과 괴로움, 모든 이원성에서 벗어날 것이다. 이거 똑같죠, 께왓다경이랑. 이게 열반을 노래하다가 나옵니다. 어떠세요. 여기 자체에는 지금 열반이라는 말은 없지만 열반을 노래하다가 나와요. 어떤 의식으로 설명하지 않고 어떤 세계로 설명하는 거죠. 그러니까 부처님 머릿속에는요 열반의 세계가 있고 그 열반의 세계는 무한하게 빛나는 의식이에요. 의식의 세계예요.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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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의식은 연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그 의식하고는 달라요. 그래서 그 무명에 이끌려가지고 무명이 지은 행위에 거기에 오염돼 가지고 5온에 집착하는 의식이 아닌 거예요. 그리고 5온의 정신작용, 물질작용을 갈망하고 새로운 정신작용과 물질적용을 갈망하고 거기에 집착하고 그거를 계속해서 인식하고 식별하는 그 의식이 아닌 거예요. 연기 밖의 의식인 거예요. 그렇죠. 여기까지 종합해보면 부처님 머릿속이 충분히 알아지실 거라고 봅니다. 오늘 나온 내용을 토대로 다음 시간에는 아함경·니까야를 한 구절 한 구절 읽으면서 파헤쳐보시면 이거를 이 교재를 잘 간직하세요. 이 교재를요 잘 메모해 놓으시고 앞뒤로 계속 보시면 니까야·아함경 전체에 맞먹습니다. 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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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구절들만 엄선한 거니까 이걸 잘 이해하시는 게 니까야 막연히 몇 권씩 보시는 것보다 여기 요약돼 있는 경전들을 정확히 자명하게 꿰뚫어 아시면, 단 깨어서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그 말이 그대로 여러분 체험이 돼서 스스로 체험하게 돼요. 그래서 정신과 물질작용을 초월한다는 게 뭔지 스스로 알게 될 거라는 거예요. 부처님이 의도한 건 이겁니다. 그 브라만교의 그 복잡다단한 신앙 신화 체계 다 “몰라” 해버리라는 거예요. 다 괄호 안에 넣어버리고 “몰라” 해버리고. 아트만이고 참나고 브라만이고 아트만은 또 브라만이랑 연결돼요. 그래서 아트만을 쉽게 인정 못하시는 게요 아트만을 인정해버리면 또 브라만이 들어와요, 하느님이. 이해되시죠. 그래서 이게 아트만을 쉽게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형이상학을 끌고 와요. 그러니까 다 “몰라” 하라는 거예요. “몰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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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몰라” 한 뒤에 남는 그 자리, 그 알아차리는 배경 의식 그게 열반이라는 거예요. 거기는 탐진치 없지 않냐? 그러니까 아트만 이런 자아로서 얘기를 안 하시고 “탐진치 없지 않냐”로 얘기하시는 거예요. “고통도 없고 청정하고 탐진치 없고 얼마나 좋냐.” ‘상락아정(常樂我淨)’도 얘기 안 하신 거예요. 상락아정에 아(我)가 또 들어있으니까. 상락아정은 대승에서 나온 말입니다. 부처님은 반대로 무상·고·무아를 떠나라고만 했어요. 그걸 뭐로 받았냐 대승에서? “그러면 상락아정에 도달하겠네요”라고 받은 거예요. 무상(無常)에서 상(常), 고(苦)에서 락(樂), 무아(無我)에서 아(我). 이때 진아론이 다시 등장한 거죠. 그렇죠. 이렇게 이해하시면 돼요. 그래서 “진아론이 그럼 틀렸다는 거냐?” 아니라는 거예요. 다만 부처님이 쓰신 방편은 철저히 형이상학 체계를 배제하고 일체의 선입견을 배제하고 내가 깨어서 체험하고 있는 그대로 경험한 것으로부터 자명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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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실상을 우리가 수용하고 인가하는 거. 그걸 목표로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정념(正念)에서 정견(正見)을 얻는 거. 이게 제일 열반에 들어가는 열쇠였던 거죠. 이 부분만 잘 이해해주시면 이제 석가모니 부처님이 2500년 만에 자기의 속마음이 확 이렇게 펼쳐지는 걸 보시게 될 겁니다. 기뻐하시지 않을까요? 여기까지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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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녹취) [초기불교 특강] 2500년 만에 밝혀지는 열반과 무아의 실체 3강(50:30) (홍익학당) | 작성자 수호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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