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익학당] 윤홍식의 대승기신론 강의 3강(01:33:31)
00:04
대승기신론이 뭐 중요합니까? 그래서 여러분의 여러분 참 마음을 이해하는데 이런 것들은 매뉴얼이고 이제 참고서죠. 참고만 하시고 여러분 진짜 여러분 마음. 예 제가 이렇게 이렇게도 오늘 그려볼까요. 참나를 이렇게도 제가 그리죠(⊙). 한마음을. 너무 찌그러졌는데. 저희 학당 그거 아닙니까 마크 아닙니까. 해서 이걸 많이 쓰는데 요게 뭐냐면 이게 여기가 현상계죠. 현상계의 수많은 존재들. 여기는 절대계죠. 그래서 이렇게 그리면 요게 여러분 안에 한마음입니다. 요놈만 갖고 얘기하면요 본래 텅 비어 있어서 본체는 공(空)해요. 심(心) 마음의 진여라는 문(門)이구요(심진여문).
01:01
근데 이 또 한 측면에서는요 절대계가 현상계를 낳는다는 측면에서는 심(心) 생멸하는 생멸문(심생멸문, ◯) 이게 두 문이죠. 요거는요 이 절대계에서 현상계가 나와서 경영이 되고 있다 라고 하면 이렇게 그립니다(⊕). 동서남북의 중심이다. 아무것도 없는데 거점에서 우주가 나오고 그 우주를 실제로 경영까지 하는 겁니다. 그래서 불교식으로 말하면 요 그림(◯) 불교 절에 있죠. 요 그림은요, 점 하나로 그려진 것도 좀 있으면 좋은데 절에는 요 하나에는 셋이 반드시 들어있다고 이렇게 이자삼점(伊字三點)이라고 하는데 3점을 찍어서 그리고 요게 지금 뭐죠? 만(卍)자 있죠. 만 자. 예 요렇게 그리죠. 그쵸. 이걸 이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이건 우주를 굴리는 측면이에요 만(卍)자는. 중심점이 참나가 우주를 경영합니다. 그 참나 자체는 사실 텅 비어 있어요. 그래서 일심
02:00
한마음 안에 2문이 다 들어있다는 게 이게 결국 우리의 관심사는 한마음인데 포인트가 이거죠. 요놈이 한마음이죠. 요 그런데 이 나머지도 결국은 이 한마음의 작용이기 때문에 한마음은 본체는 텅 비어 있으면서 그 한마음이 생멸하는 현상계 생각 감정 오감의 세계를 낳고 굴린다. 요게 이 대승기신론의 핵심이고요 요것만 이해하시면 이 대승기신론을 다 아시는 거예요. 대승에 대해서 올바른 믿음을 내가 일으키게 하겠다는 건요 그냥 쉽게 생각하시면 대승은 그 탈 승(乘)자죠. 예 대승은 탄다는 거니까 예 탑승하라는 뜻이죠. 많은 사람이 탑승할 수 있으면 대승, 자기만 탑승하면 소승 이렇게 나누거든요. 그래서 소승불교 자리(自利) 나 이롭자는 것만 추구하는 사람하고 자리(自利) 플러스 이타(利他)까지 남도 반드시 도와야 된다. 소승성자들은 남 안 돕냐? 도와요 돕기는. 그런데
03:00
소승성자들의 기본 입장은요 내가 남을 근본적으로 도와줄 수가 없어요. 어느 선까지만 조언해주고 해줄 수 있을 뿐이지 각자 책임이에요. 왜냐하면 나는 열반에 들어서 우주에서 사라져야 되기 때문에 끝까지 책임져 주지 못한다고요. 근원적으로 이 소승 불교 입장은 각자 책임이에요. 각자 자기가 자기 거 책임져라. 그럼 대승이라고 각자 책임이 아닌 건 아닌데 대승은요 내가 해탈하려면 남도 해탈시켜야 돼요. 책임이 무한책임이에요 사실. 각자에게도 제일 책임이 있기는 한데 나에게도 무한한 책임이 있어요 중생에 대한. 왜냐하면 원래 중생이 모두 하나라고 보기 때문에 내가 궁극적으로 해탈할려면 남도 해탈이 돼야 돼요. 나 혼자만의 해탈이란 건 사실 불가능한 거죠. 근데 이 소승에서는 자기만의 해탈이 가능하다고 보다보니까 양심 때문에 남을 도와주고 소승 승자들도 별짓 다 하지만 근원적으로 “나는 너희들을 두고 간다”라는 게 있어요. 이번 생이 마지막이 되는
04:00
정신으로 도와줍니다. 그러니까 가기 전에 좀 도와주는 개념이고 보살은요 내가 또 와서 도와주마 예요. 윤회해서 또 와서 또 와서 영원히 도와주마. 그래서 너를 도와주는 게 사실은 내 공부다. 공부의 핵심이 뭡니까? 소승에서는 열반을 생각하니까 자리(自利)만 닦을 수가 있죠. 자리가 강조 됐고. 여기서는 뭡니까? 결국 육바라밀 공부다 보니까 육바라밀을 혼자 할 수가 없어요. 남이 있어야 돼요. 보시를 어떻게 혼자 해요? 남한테 베풀어야 되는데. 중생이 필요한 거예요. 보살도 공부에서는 중생이 필요한 거예요. 진짜 대승공부는 중생과 함께 닦아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내 6바라밀이 결국 6바라밀이 뭡니까? 양심이에요. 베풀고 남을 참아주고 늘 선정심을 평정심을 유지하고 지혜롭게 판단하고 나와 남 모두를 살리려고 하는 그 마음이 양심이라 열반과 양심의 차이입니다. 내 양심을 다 구현한다는 거에서는요
05:00
모든 중생이 아픔을 겪는 한 내 양심에도 같이 아픔이 있을 거잖아요. 그래서 여러분 양심을 완벽하게 구현한다라는 거엔 전제돼 있어요. 우주의 모든 중생이 완벽하게 해탈해야 된다는 게, 아무도 아픈 사람이 없어야 한다는 게 전제해요. 우주에 안드로메다 저쪽에라도 누구 하나 중생이 오늘 길 가다 자빠졌다는 소식을 들으면 보살이 걱정이 되겠어요 안되겠어요? 그럼 또 6바라밀이 출동하겠죠. 고걸 안타까워하고 도와야 한다는. 그래서 결국에 자신만의 해탈이란 게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러면 이 차이가 어디서 나오느냐? (소승은) 절대계에만 절대계를 깨치는 데만 집중하고 여기 머무는 데만 집중한다면, 대승은 절대계를 가지고 생멸의 세계를 경영하는 데 초점을 두다 보니까 생멸의 세계는 완성이란 게 없거든요. 생멸 생멸 무한 반복이잖아요 생멸의. 현상계는 특징 이거죠. 생멸의 무한반복. 그러니까 내가 지금 중생을 다 구제하는 날이 있을 수 있냐? 그것도 없어요.
06:00
중생을 다 구한다는 게 어떻게 있습니까? 현상계에는 변해가고 있는 세계인데. 또 다른 중생이 나타날 텐데. 그래서 화엄경이나 어느 경우를 보셔도 이 성불을 거부하는 경 대승불교의 핵심을 말하는 경에서는요 “중생이 무한하기 때문에 나도 영원히 해탈에 들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그 해탈이라는 걸 열반에 안주하는 소승식의 해탈이죠. “그건 절대 불가하다”라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이런 걸 전제로 좀 하시고 수행을 하시는 게 좋습니다. 길을 분명히 하셔야 돼요. 저는 이쪽 길만 뭐 옳다라고 말하기 힘들죠 경전마다 여러분 선택이니까. 저는 그런데 저는 이 길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예 이 길로. 왜냐? 이 길로만 가시면요 분명히 한계가 오기 때문에. 안 해보고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실제로 열반에 든다는 수행법들을 다 해보니까 거기서 안 멈추더라는 거죠 문제는. 거기서 멈출려면요 일부러
07:00
의도적으로 6바라밀을 거부해야 돼요. 내 양심에서 보시와 지계와 이런 참나의 작용이 일어나는데 거부해야 돼요. 그걸 다 따르다간 다시 업을 짓게 되니까요? 업을 안 짓는 쪽으로 갈려고 하다보면요 일부러 양심을 거부해야 되는 사태가 오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그래서 알았어요. 소승이 길이 아니구나 하는 걸 알았습니다. 왜냐? 참나의 명령을 거부하게 만드는.. 에고가 나서서 참나의 명령을 거부해야 돼요. “참나 진정하세요. 이러면 문제가 복잡해집니다. 지금 열반에 못 들어갑니다 이런 식이면.” 결국 열반에 왜 들어가야 되는지도 모르는데 열반에 자꾸 들어야 된다고 고집하게 되고 왜 들어가야 되냐 열반에? 내가 편하니까. 포인트가요 내가 편하니까요. 그리고 또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열반만 집착하다 보면요 열반이 지닌 위대한 덕들에 대해서 우린 그 육바라밀이라는 위대한 덕에 대해 무감각하게 해지고, 육바라밀을 중시하다 보면요 이 닦음의 목적이 완전히 달라져요. 보세요.
08:00
열반을 막 강조하다보면요 “편하게 쉬느냐?”에만 포인트를 줍니다. “고통이 없느냐? 편하냐? 행복하냐?”에만 포인트가 갑니다. 육바라밀에 방점을 두면 여러분요 현상계에서 절대계가 가지고 있는 위대한 로고스들, 대표적으로 6가지인데 위대한 로고스를 얼마나 드러냈냐로 현상계 여러분의 삶의 가치를 평가해요. 자 위에 걸로 가치를 평가하면 여러분 괴롭냐 안 괴롭냐 행복하냐로만 여러분의 가치를 평가합니다. 그렇러게 보면요 개 팔자가 상팔자라고 할 때 개가 진짜 행복할 수도 있어요. 가만히 있어도 여러분이 뭐 여러분이 개 종이 돼가지고 먹일 거 다 먹여주고 뭐 해주고. 행복만 따지면. 머리도 나빠서 그렇게 괴로운 줄 모를걸요 아파도. 인간이 머리가 복잡해서 더 괴로운 겁니다. 조금 아파두요 요거 가지고 오만 생각을 다 해요. 암인가? 뭔가 머리가 좋으니까 괴로운 일이 많아요. 머리가 안 좋으면 그렇게 괴로울 수가 없어요. 조금 생각하다
09:00
또 밥 보면 밥 먹고 있겠죠 뭐. 맛있다 하구. 자 이게 뭐냐면요 인간으로서의 어떤 인간으로서의 부여받은 위대한 능력들이 열반 추구한 그 사상만 갖고 얘기하다 보면 쓸모가 없다는 거예요 별로. 6바라밀에다 초점을 뒀을 때 여러분은요 여러분이 가진 동물 이상의 엄청난 재능들이요 제대로 꽃을 피울 수 있고 가치를 갖게 돼요. 의미를 갖게 돼요. 사랑이라는 걸 표현한다는 게 역경 속에서도 사랑을 표현한다는 거, 역경 속에서도 정의를 드러낸다는 거, 이 하나하나가요 엄청 의미 있는 일이 되는 겁니다. 대승철학 대승불교를 따르지 않으면요 인간이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표현한 어떤 고귀한 것들이 다 다 의미가 없는 게 돼요. “열반에나 들지 왜 독립운동 한다고 그랬을까?” 그렇지 않아요? 독립운동 할 게 아니라 어디 산에 가서 그냥 고요히 앉아서 내려놓고 들어가는 게 더 옳지 않나요? 소승 관점에서 보면. 뭐 하러 번뇌 속에 또 뛰어들어요. 독립운동 한다고 또 다른 나라 국민 또 죽여야 되는데.
10:00
“난 살생 못합니다.” 하고 앉아서 요즘 뭐 살생 나 못하니까 군대 거부하는 분들 있던데 그걸 또 양심적 병역거부라는데 저는 아주 반대합니다. 저는 양심 없어서 군대 갔어요? 뭔 얘기냐면 이름을 바꾸면 되는 문제지만 뭔 얘기냐면 거기다가 양심을 붙여버리면 보세요 어느 게 양심적입니까? 누군가가요 살생 좋아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누군가가 여러분 편하게 살으라고 지금 철책에서 총 들고 사람 죽일 생각까지 하고 연구하고 자기를 희생하고 있음으로 인해서 여러분이 편한데 안 미안하세요? 그럼 나라도 가서 대신 해줘야 되는 거 아니에요? 나도 나한테 책임이 왔을 때 당당히 가서 해야 양심적인 것 아닙니까? 살생을 거부한다는 고거 하나에만 딱 부분적인 자명함에만 포인트를 둬버리면요 도둑이 와서 여러분 가족 죽일 때도 “난 살생을 거부합니다. 요렇게 죽이고 가세요.” 하실래요? 저는 거부합니다. 뭐냐 하면 문제가 엄청나게 생겨요.
11:00
부분적 자명함이라는 게 그래요. 고 말만 갖고는 맞는 말인데 전체 속에서 놓고 보면 문제가 생겨요. 꼭 그 말만 가지면 맞는 말 같은데. 그래서 부분적인 자명함을 가진 양심적인 보살들이 만약에 출동을 하면요 서로 싸우게 돼 있고 사회가 더 어지러워지게 돼 있어요. 부분적인 데만 집착하다보니까 큰 게 깨져버려요 전체를 들여다보세요. 예 그러니까 이 살생을 거부한다 하는, 그래서 보살은 살생 거부하는 게, 살생 좋아하는 보살이 어딨겠어요? 하지만요 전쟁이 나면 총 들고도 나가요. 사명대사 같은 위대한 보살들은 나갔잖아요. 승병 만들어서 전쟁했죠. 그것 때문에 지금까지도 “뭔 승려가 전쟁에 간여했냐?”고 욕을 먹어요. 재미있죠. 보살도라는 건 이렇게 예 “욕은 내가 먹더라도 모두에게 이로우면 하겠다.” 하는 정신이 보살도입니다. 부분적인 자명함에 빠져서는 큰 보살도를 못 해요. 이런 것도 한번 고민해보세요. 그래서
12:00
뭐 그런 아까 군 문제는 여러 가지 보완이 필요한 영역이니까 그걸 가지고 딱 아니라고 하는 게 아니라 양심이란 말을 그렇게 함부로 쓰진 말자는 겁니다. 진짜 양심이란 거에 대해 더 고민해보시면 여러 가지 대안이 더 뛰어난 대안들이 나오실 거예요. 단순하게 “나는 열반에 들어가서 쉬겠다. 나는 업 짓고 싶지 않다. 살생하고 싶지 않다.” 요런 마인드로만 수행을 하다보면요 이 보살도를 영 이해를 끝까지 못 하게 된다니깐요. 보살도가 하고 싶은 건요 인간의 그 험한 삶 속에서 어떻게든 사랑과 정의와 보시와 지계와 인욕과 정진과 선정과 반야의 꽃을 피우겠다는 몸부림이에요. 그러니까 이 열반은요 전제돼 있는 거지 열반에 안주하질 않아요. 이 모든 일은 열반에서 나오는 일입니다. 참나에서 나오지 않는 6바라밀이라는 건 의미가 없어요. 어거지로 그 어거지로 보시하고 어거지로 인욕하고 계신 거지
13:00
6바라밀이 아니에요. 참나에서 작동하는 양심에서 순수하게 올라가는 베풀고 싶은 마음의 표현이 보시바라밀이고 참나에서 진리가 아닌 걸 거부하는 그 마음을 표현한 게 반야바라밀이고 지계바라밀이고 인욕바라밀이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다릅니다. 그래서 대승철학을 이해할 때 정말 중요한 거는 대승철학을 가져야만 인간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설명이 돼요.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요 정말 성스럽다라고 느꼈던 건 늘 말씀드리지만 저희 부모님이었다니까요. 어디 그 수행처 가서 본 사람들은요 “저 사람들 집에서 참 부모님 속 좀 끓이겠다”라고 보였지 성스러워 보이지 않았어요. 아무리 명상을 잘하고 뭐 뭘 한다고 해도. 남을 위해 희생하는 분을 볼 때 저는 “진짜 저분이 진짜 성스럽다”라고 느꼈어요. 고 얘기는 뭐냐면요 여러분 삶 속에서 수행을 하고 계신다는 거예요. 여러분을 진짜 감동시키는
14:00
진선미가 한번씩 드러날 때는요 오히려 더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구요 오히려 되게 힘든 역경에 처한 분들이 진선미를 드러내 보입니다. 편하게 산 사람들은 진선미 별로 추구 안 해요. 말초적인 쾌락에 빠져 가지고 시간 보내는 일이 많죠. 이 진선미를 추구한다는 데 관점을 둔다는 거랑 고게 서양철학의 핵심인데 이렇게 산다고 사람이 아니다. “진리와 선함과 정의와 아름다움을 추구했을 때 사람이다”라고 하는 고거랑 대승철학의 “6바라밀을 해야 보살이다.” 하는 거랑 다 통해 있어요. 유교에서 “인의예지를 해야 사람이다.” 요거는요 뭔 얘기냐면요 여러분 그냥 사신다고 사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진짜 산다는 거는 오늘 하루에 사랑과 정의와 진리를 얼마나 드러냈느냐 예요. 고게 드러난 만큼 반대로 사랑이 드러나면 탐욕이 물러가구요. 정의가 드러나면 개인적인 쓸데없는 이런 분노들이 자취를 감추고요. 진리가 드러나면 어리석음이 자취를 감춰요
15:00
탐진치가 물러난다고요. 오늘 하루 여러분의 탐진치랑 얼마나 싸우면서 사랑과 정의와 진리를 드러냈는가가 여러분 영성의 수준이고 여러분 존재의 가치입니다. 이게 대승철학 아니고는 설명이 안 돼요. 대승철학이 아니면 요런 게 지금 따져지질 않아요. 열반에 얼마 더 들어있었냐를 가지고 얘기할 거예요. 얼마나 오늘 모든 걸 내려놓고 쉬었는가?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에서 사물을 보게 돼요. 우린 개인적인 거 아니라고 해도 결론이 그래요. 현상계에서 볼 때는 그건 개인적일 뿐입니다. “우리는 소승 아닌데요. 열반 들어가자, 이 탐진치의 고해(苦海)를 거부하고 열반에 들어가자는 숭고한 사상인데요.” 그러니까 그게 개인적이라는 거예요. 요 말을 이해가 안 되실 수 있는데 고민해 보세요. 관점을 여러 관점에서 두루 보셔야지 상황이 보여요. 이런 것도 한번 보시고 그래서 인격자가 되기가 어렵습니다. 진짜 인격자는요 여러분의 생각 말 행동을 감정을
16:00
재료로 해서 그 안에 얼마나 도를 담았냐 예요. 조선시대요 동양에서 글 쓰는 기본이 이문(以文) 글을 써가지고 재도(載道) 글을 어떤 글을 훌륭한 글이라고 하는지 아세요. 이문재도(以文載道) 글에다가요 로고스를 담은, 이게 실을 재(載)자거든요, 로고스를 실은 글이 훌륭한 글이고 이게 문학관입니다. 동양의 문학관. 글에다가 로고스를 얼마나 담았는가? 즉 글을 통해서 로고스를 얼마나 표현했는가? 진리를, 우주의 진리를요 여러분 삶을 통해 얼마나 표현했는가? 요게 만약에 이 생(生)으로 하면(이생재도以生載道) 이게 철학자 아닙니까. 성인 아닙니까. 자신의 생을 통해서 얼마나 로고스를 표현했는가? 요게 여러분 가치예요. 그리고 여러분이 많이 표현하신 분은요 이걸 표현한 정도에 따라 가시고 난 뒤에도 사람들이 감흥하는 게 더 깊고 얕고 차이가 나는 겁니다. 예수님 같으면 한번 왔다 가면요 몇 천 년이 지나도 그분이 통해 표현된 로고스에 감흥하는 사람이 나와요.
17:00
부처님이나 성인들이 다녀가시면. 예 그 차이가 이 원리예요. 혼자 열반에 들다 가시면요 가신지도 몰라요. 그런데 열반에 든 사람들을 우리가 왜 또 지금까지 기리고 있는 사람은 그럼 뭡니까? 그분들이 또 말을 많이 해놨기 때문에 그래요. 결국 그분도 소승을 주장하면서도 소승하자는 말을 가지고 엄청 또 대승적으로 많이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신 만큼 그게 감흥을 일으켜서 또 남는 겁니다. 얕으면 얕은 대로 깊으면 깊은 대로 결국은 6바라밀 했을 때 남지 남에게 보시하고 베풀지 않은 가르침은 사실 남지 않아요. 소승 성자들도요 남한테 보시를 많이 했기 때문에 그리고 스스로 남 앞에서 절제된 모습 지계바라밀을 보여줬기 때문에 선정바라밀을 지켰기 때문에 남들이 물어봤을 때 지혜로운 말을 해 줬기 때문에 지금 여러분 그 인격을 다른 사람들이 그리는 겁니다. 결국 소승도 완전 소승이라는 게 어떻게 있습니까? 양심 없는 사람이 없는데. 대승한 만큼 값을 받아요.
18:00
신기하죠. 요 공식을 모르시면요 오판을 하시게 됩니다. 진짜 소승이 철저히 맞다면요 이 말이 성립이 안 된다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소승성자를 기리고 있지도 않다는 겁니다. 그분들이 보여준 대승적인 모습 때문에 여러분이 감동하신 거죠. 마하리시 같은 인도 성자가 사람들한테 감동 주는 건요 참나를 쉽게 설명해 줬기 때문에 반야, 늘 깨어 있었기 때문에 선정, 남에게 법보시 나이 드셔서두요 일반인이 물으러 왔을 때요 안 만나준 적이 없대요. 늘 만나서 대화해줬어요. 요즘 그런 종정 계세요? 노구를 이끌고 꼭 나와서 대중들 앞에 앉아 계세요. 그럼 대중 중에 누구나 질문할 수가 있어요. 제자들이 늘 말려도 꼭 그러고 계십니다. 뭡니까? 보시죠. 법보시. 이런 것 때문에요 지금 그분이 인격을 다른 사람들이 성자라고 하는 거예요. 그분이 든 선정이야 여러분이 알 길이 없잖아요 사실. 본인 혼자 열 받는 나무를 얼마나 즐겼는지 여러분이 어떻게
19:00
아십니까? 눈 갖고 계시면 여러분 보기엔 다 누구 그 옛날 말이 있어요. “거북이가 제일 도인 같다”고. 가만가만 움직일 때도 천천히 위빠사나인가요 천천히 움직이면서. 나무늘보가 제일 그럼 깨어있는 존재겠죠. 천천히. 남이 보면 겉은 꼭 도인 같아도 우리가 속까지 알 길은 없잖아요. 결국 여러분은 뭘로 그 사람을 판단하냐면요 말로요. 사실 말로 표정으로 행동으로 여러분은 그 사람을 판단하시고 계십니다. 결국 6바라밀을 통해 드러난 거 가지고 여러분은 남을 평가하고 계세요. 그거 아셔야 돼요. 솔직히 해탈했다는 사람 알 길이 뭐예요? 그 사람이 해탈했다니까 그런가 보다 하는 거지. 이해되세요. 역사상 유명한 성자를 치고 말 못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다 달변들이에요. 말을 정말 잘해요. 설명을 잘하니까 그게 파급력이 갖고 퍼지는 거예요. 결국 여러분은 그 사람의 말을 믿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20:00
표정이나 얼굴이나 여러 가지 봤을 때 이 사람이 남 속일 사람은 아니겠지 하고 믿고 계신 거지 결국은 그 믿음도 결국 6바라밀이 든 거 가지고 여러분이 평가하는 게 아니에요. 실제로는요. 요거 냉정히 한번 파악해 보세요. 이게 중요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의 삶이란 건 결국 6바라밀을 얼마나 내가 표현하느냐에 따라서 내 가치가 결정되고 그게 남을 실질적으로 도와줄 수도 있다는 거 아셔야 돼요. 그게 안과 밖의 조화죠. 6바라밀 안에는 선정 바라밀이라는 내적인 게 있고 또 나머지 그 반야라는 내적 반야도 있고 외적 반야도 있죠. 현상계를 굴리는 반야, 현상계 문제를 해결하는 반야. 거기에 바탕을 둔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이런 것들이 여러분을 진짜 여러분의 인격을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인격 바꾸고 싶다고 하는데 대승 철학을 공부하고 싶어도 안 되는 요소가 2개인데요. 하나는 열반에만 집착하는 거예요. 안에만 집착하는 거.
21:00
열반에만 집착하니까요 고민을 하면 안 돼요. 고민하는 새에 빨리 열반락(涅槃樂)이 깨지거든요. 다시 열반락으로 돌아가야 되는 거예요. 근데 고민을 해야 지혜가 느는데 고민을 안 하니까 지혜가 영 안 늘고 실천이 안 나오고 열반락에만 머물게 돼요. 그거 하나가 있구요. 또 하나는요 현상계를 바꿔야 인격이 바뀐다는 것까지 아시는 건 좋은데 바라밀을 하는 게 아니라 보시 지계 인욕을 억지로 하고 계신 거 그러면 이분들은요, 현상계에서 에고가 센 사람들이 잘해요. 에고가 진짜 센 사람들이 잘 참고 잘 버티고 합니다. 여러분은 모순에 빠지는 거예요. 도 닦는 사람이라는 사람들은 현상계를 모르고 현상계를 잘 살아가는 사람들은 도를 몰라요. 우리는 어디로 가야 되느냐 보살은 안 돼요. 양 보살은 양다리를 걸쳐야 보살입니다. 부처를 양족존(兩足尊)이라고 그래요. 양다리 존자. 양족을 못 갖추면요 공부가 엉터리가 돼요. 한편으로는 늘 깨어있고 한편으로는 늘 6바라밀을 통해서 현상계에 뭔가 멋진 작품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분이어야 돼요. 그래서
22:00
일심, 대승불교에서 대승기신론에서 일심을 강조하면서 일심에는 두 문이 있다. “한마음에는 2개의 문이 있다”라고 한 게 이겁니다. 심진여문(心眞如門)하고 심생멸문(心生滅門) 두 개가 다 한마음의 작용이라는 걸 받아들이시지 않으면 공부가 대승이 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요것만 “심진여문만 문이다”라고 받아들여 버리면 대승불교가 끝나버리고 제대로 된 철학이 될 수가 없다는 겁니다. 한마음에 대해서도 결국은 제대로 아는 게 아니다. 한마음은요 절대계만 한마음이 아니라 현상계까지 한마음이기 때문에 한마음은 자동으로 현상계를 창조하게 돼 있는데 여러분이 현상계를 창조하는 한마음의 뜻은 무시하겠다고 나와버리면 한마음도 영원히 반쪽밖에 모르시겠죠. 절대계의 한마음만 알지 우주를 경영하는 한마음은 나는 한마음으로 안 보겠다. 왜냐? 현상계는 괴로우니까. 무상하니까. “무상하고 괴로운 걸 만든 한마음은 나는 받아들이지 않겠다”라고 나가버리면 열반 집착
23:00
사상은 그렇게 됩니다. 그러면 공부가 엉망이 되죠. 한마음이 다른 종교의 지금 신인데 “나는 내 맘에 드는 신만 연구하고 신이 나에게 힘든 일을 시킨다면 그때는 거부하겠다”라는 것밖에 안 돼요. 예수님처럼 궂은 일 힘든 일에서도 신의 뜻이 분명할 때는 자기를 내려놓고 가셨는데 그 마음이 결국은 한마음을 정확히 이해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거거든요. 보살만이 표현할 수 있습니다. 보살은요 내 삶을 통해 작품을 드러내기 때문에 독립운동가는 뭘 드러냅니까? 민족에 대한 겨레에 대한 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드러내요 그 순간에. 그 위기가 왔을 때 “내가 곧 죽겠구나” 할 때 “내가 여기서 로고스를 표현하자. 내 양심에 부끄럽다 이 자리를 피하면. 진정한 충성을 보여주자. 진정한 민족 사랑 겨레 사랑을 보여주자.” 하고 그 로고스를 표현하고 장렬하게 가는 겁니다. 근데 그 인생이 훨씬 가치가 있어서 우리가 기리고 찬양하고 하는 거예요.
24:00
그 인생을 통해 표현된 그 로고스가 너무 아름다워서 우리가 문학작품에서도 드라마에서도 영화에서도 또 기리고 보고 하는 거예요. 이해되시죠. 몇 천 년 전의 전쟁 가지고도 우린 그 안에 표현된 로고스들을 즐깁니다. 그 로고스가 결국 6바라밀이에요.그 사람을 통해 표현된 6바라밀의 모습들 여러 모습들을 즐겨요. 그게 왜 중요하냐면요 여러분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이런 사랑과 정의의 이런 진리 이 자체 추상적인 로고스가 중요한 게 아니구요. 요거는 우리 안에 내적인 법으로서 이 절대계 안에 있는 새겨져 있는 법이 결국은 현상계를 다스릴 테니까 요 법이 로고스죠. 자 이 법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엄청 중요하죠. 당연히 우주를 경영하는. 그런데요 우린 인간이기 때문에 뭐에 관심이 더 많은지 아세요. 로고스가요 한 인간한테 어떻게 표현되느냐가 더 재미있는 거예요. 사랑을요 실제 한 인간이 표현했을 때 그게 진짜 맛이 있는 겁니다. 추상적인 사랑이 맛있는 게
25:00
아니라 그 한 사람을 또 사랑으로 내몬 그 로고스가 의미 있는 겁니다. 한 사람이 표현했을 때 로고스도 살고 절대계도 살고 현상계도 살아요. “인간 안엔 그런 고귀한 가치들이 있구나” 하면서 또 동시에 “한 인간이 그 고귀한 가치를 표현했을 때 그 무상한 에고가 정말 연금술처럼 가치 있는 정말 귀한 에고로 변하는구나 질적으로 변하는구나. 나도 내 인격을 바꿀라면 그런 위대한 로고스들을 표현하고 살아야겠다. 같은 생각이라도 쓰잘데기 없는 것보다는 이왕이면 고귀한 걸 표현해야겠구나.” 이게 인간 사는 맛이죠. 이게 여러분 인간으로서 걸어야 할 가장 아름다운 길이고 그걸 보살도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보살도는요 여러분 익히 아시지만 보리(菩提)는 절대계의 깨달음이고 플러스 살타(薩陀)는 현상계의 중생성이에요. 그래서 보살 그러는데 보살이 되세요. 이게 인간이에요. 그런데 그냥 부처 그래버리면
26:00
대승불교나 소승 불교에서 부처는 열반에 든 존재고 대승불교에서 보면은 부처가 너무 신격화돼 버리다 보니까 인격성이 사라져 버려요. 그래서 대승불교의 꽃은 보살이라는 겁니다. 중생성을 포기하지 않는 깨달은 존재. 그래야 중생성을 통해서 로고스를 표현하기 때문에. 티벳의 린포체들이 활불(活佛)이라고 하잖아요. 살아있는 부처들. 가서 “당신 왜 태어났냐?” 그러면 다 “중생 구제할려고 태어났다” 그래요. 다시 로고스를 표현하고 싶어서 현상계 안에 들어온 사람들이에요. 이 가치를 이해 못 하시면요 인간, 보살도 이해 못하는 건 좋은데 인간의 존재에 대해서 이해가 떨어집니다. 인간이 뭔지를 이해하지 못하세요. 그러니까 늘 이상적인 열반과 너무 이상적인 인격만 그려놓고 늘 나는 추잡스럽고 뭔가 부정적이고 흔들리고 너무 쉽게 흔들리고 나의 에고를 보면요 나는 한없이 부족해 보이는데요 안 그래요. 보살의 마인드는 그게 아니에요. 보살은 여러분들이 그 부족한 게 그대로 아름답다는 겁니다.
27:00
그걸 통해서 6바라밀을 표현하기만 하시라는 거예요. 두렵지 않은, 두려움이 하나도 없이 전쟁터 나가서 싸워서 이기는 사람이 귀한 게 아니라 두려워 죽겠는데 가가지고 나라를 위해 민족을 위해 싸우는 사람 그게 귀하다는 거예요 고 가치가. 이게 인간들의 맛인데 인간들의 맛이 없는 철학을 공부하시면 여러분 인간이 아닌 걸 추구하시게 되면서 멀어집니다. 그건 도가 아니에요. 인도(人道)가 아니에요. 인간이 걸어야 할 길이 아니에요. 보살도는 인도예요. 인간의 길. 인간이 갖고 있는 온갖 약점 추한 거를 그대로 껴안고 가는 거예요. 그 안에서 어차피 인간이 우주에서 부여받은 재료는 딱 이건데 “이 재료 가지고 6바라밀을 펴라”라는 게 지금 우주가 우리한테 준 미션인데 “다른 미션 주세요”라고 거부할 필요가 없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돼요. 근데 여러분이 괜히 공연히 망상을 세우는 게 열반에 들어서 끝나야 되는데 아니면 완벽해지면 진짜 내가 잘 할 텐데 죽음이
28:00
안 두려운 부처 경지만 되면 내가 전쟁 나가서도 잘 싸울 텐데. 중생구제도 끝내주게 할 텐데. 고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가 되기를 거부하는 경전이 등장하고 화엄경처럼 10지보살만 가야지 중생성이 남겨져 있는 선에서 최선을, 만렙, 최선의 경지로 가야지 이상적인 만렙 “완벽한 12지의 경지를 꿈꾸지 마라”라고 얘기가 나오는 겁니다. 모순이 생겨버리니까 중생성을 초월해 버린 순간 그 사람은 중생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은 중생을 도와줄 수가 없어요. 중생이 왜 괴로운지 이미 이해할 수가 없는 경지에 가버렸기 때문에. 그런데도 이제 12지 묘사하는 경전은 “12지인데 못 하는 게 어디 있어. 다 알 거야.” 이렇게 자꾸 보태버립니다 인간의 욕심이. 그래서 전 대승기신론에서 그런 부분을 철저히 반대합니다. 12지면은 어마어마한 불가사의한 능력이 있기 때문에 에고를 초월했으면서 또 에고를 가질 수도 있고 뭐든지 다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얘기를 자꾸 하는데
29:00
그건 이 경을 쓰신 분도 12지까지 가보고 쓰신 얘기가 아닐 텐데 너무 이상론으로 흘러버려요. 그게 화엄경에서 10지보살의 제일 전형적인 모습을 10지로 드러냈을 때 이 심(心)을 제일 잘 쓰는 모습에서 절대 생멸문을 포기 안 하는데 생멸문을 넘어선 그 존재를 그리다 보니까 너무 인간성을 상실한 그 경지까지. 그래서 그럼 같은 생멸문을 굴리는 자리라고 해도 참나는 에고가 없이 굴리잖아요. “그렇게 되면 좋겠다”라는 이상이 들어가 버린 게 돼요. 그럼 대승불교의 원 메시지인 “중생성 안에서 구현하자”는 그걸 상실해버려요 그래서 대승기신론이나 이런 데서 말하는 12지론을 저는 거부하는 겁니다. 제 느낌 아시겠죠. 자 “왜 12지가 있냐 없냐가 중요한 게 아닌데 왜 너는 그렇게 강조하느냐?” 중생성 안에서 한마음을 꽃피운다는 요 이 맛을 전달하기 위해서예요. 지금 12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게 궁극의 공부라는 걸 못 받아들이시면 12지를 따로 세워버리시면 결국은
30:00
“희로애락 없어져야 돼. 그게 더 완벽한 경지야.”라고 해버리는 순간 여러분은 중생성을 거부하게 돼요. 그러면 반야심경에서 “오온이 본래 공하니 버릴 게 없다”라는 그 사상도 거부하게 돼요. 따로 더 좋은 걸 찾게 돼요. 그러면 안 된다는 겁니다. 지금 여러분의 그 이상한 마음 있죠? 이게 그대로 참나의 작용이고 여기서 6바라밀만 집어넣으면 이게 그대로 최고의 요리가 될 수 있다는 걸 받아들이셔야 지금 이 순간 그대로 보살이 되십니다. 이거 싸우고 있으면 안 돼요. 나의 이런 부족한 에고랑 싸우고 있으면 안 돼요. 이 느낌을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 인격이 바뀌려면요 여러분의 모든 약점을 허심탄회하게 다 인정하시면서 동시에 참나의 마음으로 6바라밀을 묵묵히 묵묵히 그 재료 가지고 구현하셔야 돼요. 예전에 봉우 선생님이 멋진 말씀하신 게 기억나는데요. “옛날 성인들 부러워하지 마라.
31:00
그때도 그때나 지금이나 항상 그때 사람들 데리고 역사를 하는 거다.” “아 베드로만 있으면 될 텐데.” 그러지 마라는 거죠. 예수님도 그때 와보니까 다 어부밖에 없어서 어부 데리고 한 거예요. 예수님이 “아버지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어부들 데리고 이건 안 됩니다.” 거부할 수도 있죠. 거부해 버리면요 의미가 없어져요. 하느님이 지금 예수님한테 허락한 사람은 곧 딱 그 제자들인 거예요. 즉 뭐냐 하면 어느 시대나 그 시대의 재료를 가지고 보살은 일해야 되지 그 시대에 없는 재료를 구하면 안 돼요. 예수님이 딱 태어나서 “아 한 2500년 2천 년만 지나면 스마트폰이라는 게 나올 텐데 고게 있어야 일을 하는데 나 못 하겠네.” 이렇게 되시면 일할 의욕이 안 나겠죠. 그럼 그 순간에 집중을 못하면요 역사가 안 일어납니다. 즉 있는 재료 왜 충실할 뿐이에요 성인들도. 공자님도 왔더니, 중국의 인재가 몇 안 돼요. 그 사람들 데리고 또 공자님
32:00
말 들어주는 사람도 몇 안 돼요. 그 사람들 데리고 일을 했지 그 시대 없는 사람들을 찾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뭐냐면 이런 것처럼 밖에 있는 사람만 중생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생각 감정 그 언행의 수준이 여러분의 중생이에요. 지금 여러분이 데리고 있는 그 중생 수준에 맞춰서 역사를 하면 그냥 위대한 보살이지 여러분은 이미 비로자나불이구요 여러분 에고가 좀 후달려요. 그런데 그 후달리는 에고 가지고 잘 쓰시면 돼요. 여러분 원래 비로자나불이니까. 뭔가 막 그럴싸하지 않으세요? “뭐야. 내가 비로자나였잖아.” 좀 이런 제가 항상 잘하는 “아 심심한데 우주나 구해볼까” 하는 고런 마음으로 그냥 그렇게 사세요. 이게 보살도라니까요. 보살도의 진짜 맛을 알면요 너무나 자유가 오고 인간의 가장 심오한 이해가 밀려오는데 요걸 놓칠까 봐 제가 이렇게 여러 가지 지금
33:00
다른 학설들 비판하면서 얘기를 하는 겁니다. 느낌이 좀 오세요? 여러분은 이미 비로자나불이니까 여러분 에고 레벨이 올라가는 건 올라간 대로 의미가 있지만 지금 이대로 이미 귀하단 말이에요. 요 재료 잘 쓰면 별짓 다할 수 있다구요. 여러분의 생각, 여러분 이미 꽤 알고 계시잖아요. 우주에 대해 인생에 대해 고거 써서요 좋은 일 많이 하세요. 그냥 그러다 가시면 돼요. 욕심내지 마시고. 어떻게 보면 이게 더 진정한 욕심이지만. 재미있죠. 이런 관점에서 보셔야 돼요. 그러면 모른다 하고 내려놓을 때 진짜 우주가 다 내려놔지고 우주가 다 내 한마음의 작용이라는 걸 알아요.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생멸현상 모든 추잡스러운 것도 다 그 마음의 작용이다.” 요게 삼매 중에 해인삼매(海印三昧)입니다. 모두가 진리의 바다라는 거예요 하나로 사실은. 바다란 점에서 하나라는 거예요. 바다에 가면 온갖 것들이 다 살지만 다 바다죠. 진리의 바다 속에
34:00
우주 전체가 진리의 바다라는 겁니다. 해인삼매. 동시에 내 인격을 또 끌어올려서 1지 2지 3지 끌어올려서 더 중생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날 바꿔놓겠다는 게 화엄삼매(華嚴三昧)예요. 화엄의 화엄 10지를 따라가겠다는 거. 그래서 화엄경에 나온 두 삼매, 최고의 삼매가 해인삼매랑 화엄삼매인데 고게 하나예요.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은 여러분 마음의 작용이라 참나가 청정하면 마음도 청정합니다. 동시에 여러분은 끝없이 여러분을 닦아서 더 나은 인격으로 바꿔놓고 6바라밀을 좀 더 표현하고 살려고 노력하실 뿐이에요. 더 오버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이번 생에 몇 지 가야 되는데” 이러지 마시고. 지금 몇 지인지도 모르시면서 몇 지를 가겠다고 그러지 마시고 6바라밀을 하나라도 더 멋지게 표현할 연구를 하세요. 이거 하면은 끝없이 아이디어가 나와요. “몇 지 가야 되는데” 하면은요 끝없이 변명과 자기 합리화만 나와요. 과대망상이 나와요.
35:00
어느 날 아침에 한 10지 된 것 같다 다음날은 와이프랑 싸운 뒤에 난 8지 막 왔다 갔다 하는 이런 뭔 놀음입니까? 쓸데없는 짓이죠. 그러지 마시고 여러분 진짜 여러분이 몰입하면 답이 나오는 데다가 몰입을 해야죠. 6바라밀 잘할 생각만 하시면 여러분 레벨은 말 안 해도 우주에서 올려줄 텐데 쓸데없는 데 집착하지 마시고. 이게 나도 좋고 남도 좋은 길이에요. 6바라밀이 그래도 양심이다 보니까 제가 왜 양심이 답이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양심에다가 투자하면요 무조건 나도 좋고 남도 좋게 돼 있어요. 오늘 하루 가만히 계시다가 욕심을 충족시켜 보시면요 나만 좋을 수도 있고 막상 충족하고 나면 나한테도 안 좋을 수도 있어요. 평소에 내가 소원이 늘 남이랑 같이 먹어서 제가 옛날에 그런 적 있어요. 치킨 1마리를 통으로 먹고 싶더라구요. 다 먹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늘 가족들이랑 남이랑 먹다 보니까 아쉬움이 있었는데 1마리 시켰더니 반도 못먹겠더라고요. 남이랑 먹으니까 맛있게 먹었지 혼자 먹으니까 못 먹겠어요.
36:00
즉 “내 욕심을 난 이루었도다” 해서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요 원했던 게 아니고 내 기분도 더 망쳐질 수도 있어요. 절박한 비유인데 와 닿으실라나 모르겠네요. 아무튼 이런 겁니다. 근데 양심을 구현하면요 저쪽도 좋고 나도 좋고 다 뿌듯해져 버려요. 그래서 양심 충족이 공부라고 생각하시는 이상 여러분 혼자서 뭐 잘 해보려는 생각은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여러분만 좋지 그리고 남에겐 해로울 수도 있고 결국 여러분한테도 안 좋을 수 있기 때문에 모두에게 좋은 걸 계속하는 거예요. 6바라밀 공부에서의 선정과 일반 열반 추구의 선정이 차이가 이거예요. 열반 추구하기 위해서 닦는 선정은 내가 좋아야 되기 때문에 남의 기분이 좀 상할지라도 가족하고 싸우는 한이 있어도 난 열반에 들어야 돼요. 근데 대승 6바라밀에서 나오는 선정 어때요? 반야에 기반한 거고 보시 지계 인욕에 기반한 선정이기 때문에 남하고 이 관계 속에서 평정심 유지하는 선정이 더 중요해요.
37:00
남하고 싸우는 중에도 빨리 평정심 찾는 것. 남에게 내가 뭔가 화나고 못마땅한 일이 있을 때도 빨리 회복하는 선정 요게 가치 있는 선정이 됩니다. 달라지죠. 같은 선정인데 의미가 달라지면요 달라져요. 추구하는 가치가 달라지면요 하는 게 다 달라져요. 의미도 다 달라져요. 소승 수행을 추구하면 지금 가족도 다 짐이에요. 다 나를 방해하는 거예요. 우주랑 싸워요. 나를 괴롭히는 우주의 모든 것들과 싸우게 돼 있고 난 거기서 빨리 탈출해야 된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대승철학을 갖게 되면 이 우주는요 나의 로고스를 드러내기 딱 좋은 무한한 장이에요. 그러니까 한번 오고 하기가 너무 아까워요. 끝없이 윤회하면서 표현하고 다녀야지 마인드가 완전히 달라지죠. 양에 차세요? 이번 생 지금 2014년 이때 오셔서 이때 중생 좀 구제하고 여기서 사랑 정의 지혜 이런 거
38:00
표현하신 거 이걸로 양에 차세요? 예술가라면 도화지 찢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 또 표현하고 싶을 걸요. 이게 참나의 마음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명상을 잘하면요 오히려 이 마음이 솟구쳐야지 보살이고, 그런데 “아유 아서라. 이러면 카르마 또 태어나야 돼. 그럼 또 다시 뽀로로 보고 또다시 해야 돼. 요거 싫어. 그러면 다시 또다시 또 누구랑 연애질해야 되고 막 실연당해야 되고 또 어디 가서 험한 일 당해야 되고 또 막상 태어났더니, 외모가 내 마음에 안 들면 또 수술을 해야 되고. 어 고(苦)다 고.” 자 요 얘기 다 지금 누가 하고 있어요. 참나가 하고 있는 말 하나도 없어요. 에고가 하고 있는 거예요. 탐진치예요. 열반에 들겠다는 그 마음이 탐진치예요. 내려놓고 참나가 시키는 대로 가면 예수님의 길 부처님의 길 공자님의 길을 갈 수밖에 없습니다. 소크라테스의 길을. 누가 시키는지 잘 들여다보세요. 열반에 들고 싶어 할 때 물어보세요. “너 누구야? 방금 얘기한 놈 누구야?
39:00
나와. 왜 열반에 들고 싶지?” “괴롭잖아.” “참나는 괴로움을 안 느끼는데 넌 누구야?” 누구예요? 에고예요. 가만히 있는데, “아 참나가 없는 거 같애.” “너 누구야? 참나가 그런 말 할 리가 없는데. 공연히 너 일 긁어서 부스럼 만들지 말고 가만히 있어.” 이게 “몰라”예요. 참나 없다는 말도 “몰라” 해버리세요. 그러면 여러분은요 참나 상태예요. 정신 말짱하고 깨어 있을 때가 참나예요. 따로 찾지 마세요. 고 상태가 최고죠. 고 상태에서 나머지 바라밀들이 다 나와요. 한마음에 대한 얘기를 지금까지 했습니다. 한마음 하나 가지고도 할 말이 이렇게 많아요. 대승기신론 전체가 이 한마음에 대한 설명일 뿐이에요. 요 한마음이요 지금 여러분 안에서 가려져 있다고요. 고걸 다시 복구하자는 겁니다. 미리 좀 말씀드릴 아니면 고게요 삼각이 있어요. 이게 원래
40:00
광명하죠. 여러분 안에 이 로고스를 경영하고 있는 자리, 이 자리니까 얼마나 광명합니까? 그런데 그래서 유교 선비도 똑같아요. 이거를 이 자리를 우리 안에 있는 광명한 덕성(명덕明德)이라고 해서 예 덕 덕(德)자인데 덕성이라고 해서 이 자리를 묘사할 때 주자가 이렇게 설명했어요. 구중리(具衆理) 우주의 모든 이치를 다 갖추고 있으면서, 약자 좀 쓸게요, 응만사(應萬事) 만 가지 일을 모두 대응해서 처리하는 자리. 요게 다를 리가 없죠. 리(理) 사(事)가 불교에서 온 개념이죠. 유교 선비들도 불교의 세례를 이미 받은 겁니다. 우리 아래는 리(理) 로고스가 있어서 사(事) 사건들마다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다. 리는 절대계 사는 현상계입니다. 그래서 이사무애(理事無碍)의 세계를 말하는 거예요. 우리 안에는 리가 있기 때문에 여러분의 닥치는 모든 일에는요
41:00
리가 담겨있어요 원리가. 그래서 여러분이 그 원리를 아시면 적절하게 대응할 수가 있어요. 여러분 몸이 하나 아프고 마음이 아프고 하는 모든 일에도 리가 있죠. 그러니까 병원 가서 맡기면 그 리의 결에 따라서 치료를 해주는 겁니다. 우주 만물엔 다 리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모를 뿐이지 리가 다 있어요. 그래서 그 리에 대해서 적절하게 알고 대응하는데 여러분 참나가 리를 다 알고 있는 건 참나죠. 에고가 뭐 안다고 설치다가 망쳐버릴 수가 있다는 거예요. 에고는 거들 뿐이지 참나가 자기 안의 자기의 리를 가지고 현상계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게 에고는 도와주면 돼요. 명상을 하면서 떠오르는 영감에 따라 움직여주면 돼요. 욕심 부리지 마시고. 그러면 완벽하게 여러분 그대로 여러분의 욕심까지도 다 진리를 표현하는 도구가 돼 버려요. 지금 그렇게 그냥 사시면 돼요. 몇 지니 몇 지니는요 따진다고 해서 마음이 흔들리면 이미 그 지를 따질 의미가 없어요. 그러지 마시고 여러분은 그냥
42:00
이 순간순간 보살이시면 돼요. 이런 느낌이어야 돼요. 고속도로 부산 가는 고속도로 타고 가면서 “지금 부산 얼마 남았지?” 하는 건 걱정이 안 돼요. 갈 거니까. 그런데 고속도로 진입도 못하고 막 걱정하면요 이제 갈 길이 더 멀어지죠. 즉 여러분이 깨어서 보살도를 하고 사시면서 “내가 지금 공부가 얼마나 됐을까?” 따져보시는 거는 그건 여유롭게 따져보실 수 있으니까 그리고 이미 가고 있으니까 그렇게 따지셔도 좋은데 제대로 톨게이트도 못 찾았는데 막 걱정부터 하고 계시면 답이 안 나온다구요. 지금 중요한 거는 길을 달리고 있는 거죠. 보살도를 이 보살도 위를 신나게 달리고 계시면서 고민도 하시고 걱정도 하시고 하면 좋겠다 하는 제 말씀입니다. 자 여기까지 하고 자 아까 대승 얘기하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러면 이런 게 진짜 대승인데 대승기신론은 더 재미있는 관점을 제시해요. 지난번 말씀드렸어요. 이렇게 많은 중생을 구제할 수 있는 큰 공부다 해서 대승 이렇게 주장한 게 아니라 대승기신론은
43:00
독특한 관점을 제시해요. 대승에 대한 올바른 믿음을 내가 일으키마. 하지만 동시에 이 대승을 뭐라고 정해버렸냐면 한마음이라고 정해버려요. 요거 참신한 겁니다. 대승기신론만의 특징이에요. “대승이 뭐냐?” “한마음이다” 해버려요. 한마음이 어떻게 대승이냐? 한마음은 위대하다. 그래서 대(大)고 한마음만 타면 우리는 우주 어디든지 여래 경지까지 다 갈 수 있다. 우주 어디 가서도 이것만 타고 다니면 어디 가서도 보살도 할 수 있고 여래 경지까지 갈 수 있다. 그래서 승(乘)이다. 탈 승(乘)자. “위대한 걸 타고 가자 해서 대승(大乘)이다.” 해버려요. 그래서 대승기신론이라고 해놓고, 중생구제 하는 걸 얘기하는 게 아니라 한마음에 충실하자는 얘기를 하면서 한마음 안에 모든 진리가 다 들어있으니까 한마음을 연구합시다는 얘기로 가요. 그래서 이 대승기신론은 한마음경이에요. 우리말로 하면 한마음경. 철저히 한마음경이에요. “한마음을 어떻게 밝혀서 다시 여러분이 그 한마음을 제대로 쓰는 보살이 될 거냐?” 하는 거기에 관심이 있어요. 그래서 완벽한 이상적 경지로서
44:00
부처 12지 부처를 제시하지만 저는 아까 말씀 드렸지만 그건 이상적인 경지로서만 받아들이세요. 즉 “이 한마음이 완벽한 인격으로 드러나면 어떨까?” 그 정도에서 12지는 의미가 있습니다. 부처라는 존재는. 여러분은 보살을 목표로 하세요. 예 이게 저의 조언입니다. 그래서 불법승 지난번에 불법승의 개입, 뭐죠, 그 귀경송에서 “나는 귀의합니다” 할 때 그 불이 뭐라고요? 이 한마음이 완벽한 인격을 갖춘 그 존재, 그 12지 부처한테 귀의합니다. 석가모니가 아니에요. 역사적 석가모니가 아니에요 이미.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부처는 한마음의 완벽한 구현자를 말하기 때문에, 근데 석가모니는 사실 한마음을 얘기하지도 않았거든요. 이해되시죠. 맥락은 연결되지만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부처는 비로자나불이라는 우주를 경영하는 한마음의 인격적 표현이에요. 그냥 부처. 법. 뭡니까? 한마음 자체. 우주의 한마음이 갖고 있는 그 진리 로고스를 법 그럽니다. 법신 우주의 법신.
45:00
비로자나불을 말해요. 그래서 불(佛) 하면 비로자나불의 인격적인 모습, 법(法) 하면 비로자나불의 그런 로고스적 측면, 승(乘) 승이 와야 이제 보살이 나와요. 그거를 닦으려고 하는 중생. 여러분은 승의 위치에서 공부하시면 돼요. 대승기신론이나 대승불교는 이런 관점에서 이해하시는 게 여러분한테 도움이 될 겁니다. 그래서 승은 뭐였습니까? 무량한 공덕을 갖춘 진여, 승이 무량한 공덕을 갖췄다는 게 아니라 무량한 공덕을 갖춘 진여를 그대로 닦는 수행자들. 즉 에고은 거들 뿐이라는 겁니다. 승려들의 에고도요 거들 뿐이지 이미 무량한 공덕을 갖추고 있는 이 한마음이 드러나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한마음이 드러나면 무조건 6바라밀을 하게 돼있어요. 여러분이 만든 6바라밀이 아니라 자동으로 나오는 6바라밀을 에고가 나오게 거들어주기만 하면 돼요. 즉 “그럼 에고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네요.” 아니에요. 에고가 엄청 노력해야 돼요. 왜냐? 여러분 길 가다가요 불쌍한 사람 봤을 때 도와주고 싶다는 양심의 울림이 있지만
46:00
에고가 금방 묵살하고 가버리잖아요. 몰라. 학당에서 배운 거 잘못 쓰시면 그때 “몰라. 난 괜찮아” 하고 가버릴 수도 있어요. 자 에고가 막아버리기 때문에 에고로 하여금 못 막게 엄청 노력을 해서 또 그걸 막아야 돼요. 그래야 여러분 안에 있는 양심의 소리가 그대로 밖으로 나와서 로고스가 현실을 바꿀 수 있게 됩니다. 인간 사회 바꾸는 비결도 여기에 있습니다. 불법에서 볼 때는 우리 안에는요 불가사의한 능력을 갖춘 전지전능한 한마음, 참나가 왕성하게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데, 에고가 열심히 막고 있기 때문에 못 나오고 있는 거예요. 이거를 안 막는 에고들이 등장하면요 하나님이 한 인격을 통해서 우주를 건져버려요. 그런 존재들이 지금까지 지구를 다녀간 성인들인데 인간 인간이 다 성인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중생들이. 그래서 우리 예전 어른들이 개벽이 되면 후천시대가 오면 이런 말이 있어요. “집집마다 성인 난다.” 한 집에 성인 하나씩 있는 시대도 올 수 있다는 겁니다.
47:01
죽이죠. 집집마다 자기 양심의 소리를 듣는 사람들이요 성인까지는 아니더라도 진짜 양심을 따르는 양심의 울림을 강하게 느끼고 에고가 그 양심의 울림을 표현할려고 노력하는 그런 존재들이 집집마다 있다면요 그게 대동사회고 정토고 지상천국이지 요 조건이 안 되고 그냥 어떻게 하면 지상천국이 될까를 연구하시면요 밖에서 찾는 법은 답이 안 나오겠죠. 예 요 원리 때문에 그래요. 자 지난 시간에 한 거 간단하게 봤고요. 이게 대승에 대한 바른 믿음입니다. 요 한마음에 대한 확신이 생겨야 여러분은.. 자 대승에 대한 그런 바른 믿음은 언제 생길까요? 요 글 읽었다고 생길까요? 바른 믿음은 언제 생겼습니까? 한마음을 체험했을 때. 여러분이 여러분 안에서 참나를 발견했을 때. 진짜 참나가 이렇게 생겼는지? 이 경에서 설명한 대로 생겼는지 확인했을 때. 그리고 이 그 참나 뜻대로 따를 때 제대로 된 믿음이 배양 성립하고 배양되겠죠.
48:01
그러다 보면 그 극치에 가면은 비로자나불 같은 인격 12지도 되지 않겠냐 하는 게 대승기신론의 전체 내용 핵심이라는 겁니다. 이해되시죠. 그러니까 12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 뭡니까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완벽한 참나를 찾아내서 표현하는 거 이것만 하시면 돼요 지금. 자 그래서 총론 볼게요.
[2-1. 총론
“기신론”에서 이르기를, 대승의 믿음의 뿌리를 능히 일으키는 ‘법法’(logos)이 있으므로 마땅히 설명하는 것이다. 그 설명에 있어서 5가지 구분이 있으니 ① 인연분因緣分(책을 쓰게 된 인연) ② 입의분立義分(대승의 의미를 확립함) ③ 해석분解釋分(대승의 의미를 풀이함, 一心, 二門, 三大의 의미를 풀이함) ④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수행과 믿음, 四信, 五行을 설명함) ⑤ 권수이익분勸修利益分(이익을 들어 수행을 권함)이 그것이다
論曰 有法能起摩訶衍信根 是故應說 說有五分 云何爲五 一者因緣分 二者立義分 三者解釋分 四者修行信心分 五者勸修利益分]
2-1총론 기신론에서 이르기를 대승의 믿음의 뿌리를 일으키는 법 로고스가 있으므로 마땅히 설명하는 것이다. 대승의 믿음을 그 일으킬려면요 그게 그 로고스가 어디있겠어요? 참나 안에. 참나 안에 있는 이 법들을 설명을 누군가가 인간의 언어로 해줘야 이게 다 보살도예요. 인간의 언어로 설명을 안 해주면요 참나는 참나고 에고는 에고라 영원히 못 만나요. 위대한 소승 성자들도요 대승성을 다 표현했기 때문에 인류에게 도움이 되는 게 이겁니다. 그분들도 참나를 인간의 언어로 설명을 잘해 줬잖아요.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또 도를 닦는 겁니다.
49:01
그러니까 소승 성자도 필요해요. 대승 큰 보살도에서 보면요 소승은 소승대로 또 인간을 도와줘요. 그럼 크게 보면 다 대승이거든요. 신기하죠. 소승성자도 알면 꼭 가르쳐주고 싶죠 남한테. 그거 양심 때문에 그래요. 6바라밀이 발동하니까 가르쳐주고 싶은 겁니다. 다 대승성이 완전히 없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럴 바에는 대놓고 한번 추구해보자. 그러면 대승불교가 나와요. 대놓고 한번 추구해버리면. 그래서 이제 그걸 양심에 찔리니까 얘기 안 해줄 수가 없잖아요. 나는 아는데 참나가 뭔 말을 하는지 들은 사람들이 경을 안 쓸 수가 없잖아요. 론, 론을 안 쓸 수가 없잖아요. 경은 성인의 말씀이고 론은 이제 그 또 다른 학자분들의 말씀이라고 봤을 때 대승기신론의니까 이 논문을 안 쓸 수가 없더라는 거예요. 그러면 이 논문에서 그러면 논문은 크게 어떤 목차를 가지고 있냐? 이게 궁금할 수 있죠. 거기에 대해서 5가지로 얘기해 줍니다. 인연분 책을 쓴 인연을 먼저 설명하겠다.
50:01
그런데 지금 여기가 뭐예요? 요 챕터가 인연분이죠. 2장. 그러니까 2장을 얘기하면서 전체 목차도 미리 한번 훑어주는 겁니다. 그게 인연분 이 책 지금 2장에 해당되는 인연분 요게 첫 번째고 책을 쓰게 된 인연이요. 왜 썼냐 도대체? 경전 안 그래도 많아 죽겠는데 왜 썼냐 이거예요. 팔만대장경 언제 볼지 모르겠는데 왜 썼냐? 여기에 대해서 설명을 해야 돼요. 왜 썼는지? 두 번째 입의분. 그래서 대승의 의미를 확립한다. 대승이 뭔지 설명하고 들어가야죠. 그게 결국 여기서 뭘 설명하냐면 한마음 설명해요. 한마음의 대승이기 때문에. 한마음 안에 새겨져 있는 진리가 그대로 대승법이기 때문에. 자 세 번째 해석분. 그러면 풀이를 해줘야 돼요. 대승이 갖고 있는 의미란 뭐냐? 결국 뭐예요? 한마음을 풀어줘요. 그러니까 해석본에서 뭘 풀이하게 돼 있겠습니까? 일심(一心) 이문(二門). 한마음에는 2가지 문의 작용이 있고 자 3대는 뭐라고 했죠. 제가 설명 드렸는데
51:00
기억나시나요? 3대. 체상용. 자 체상용인데요. 보세요. 체상용이 지금 이 여기 흔히 대승에서 대(大)는 중생 나와 남을 모두 구제하니까 대 그러는데 대승기신론은 그게 아니라 왜 대승이라고 하느냐? 참나의 작용이 우주적이기 때문에 대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왜 대(大)냐? 구체적으로 들어가면요 본체가 텅 비어 있는 본체가 위대하고. 우주의 본체니까요. 이 로고스를 품고 있는 이 형상, 로고스 안에 이거는 우리가 흔히 금강경에서 말하는 그런 버려야 할 상이 아니구요. 이거는 그냥 상이라고 번역하면 아쉬워요. 이거는 묘상(妙相)이라고 할게요. 진리의 상이에요. 진리도 하나의 상입니다. 보세요. 보시랑 지계랑은 다르죠. 분명히 결되죠. 그럼 그게 하나의 상이 돼요. 참나 안에는 그것도 상이에요. 현상계의 상은 아니에요. 차별적인 참나 안에 묘하게 있는 그 상이죠.
52:00
그래서 묘상이라고 하는 게 더 맞은데 실상(實相)이나. 실상이 있어요. 참나 안에 있는 실상. 그게 상(相)이예요. 상이 위대하고 우주를 낳은 모든 로고스가 다 이게(相) 서양철학에서 이데아예요. 이데아가 위대하고 그 이데아대로 만들어진, 플라톤이 뭐라고 했습니까? “현상계는 이데아의 그림자다.” 이게 진짜고 현상계는 그림자다. 왜냐? 요거(相)는 절대계고 현상계는 그 무상하니까 그림자라고 했는데 현상계도 이것(相) 그대로 만든 거기 때문에 현상계 용(用), 작용도 위대하다. 그래서 한마음의 본체(本體)와 한마음의 상(相)과 한마음의 작용(作用). 이게(체) 텅 빈 거. 점 세계 박힌 거 여기에 상(相)이 다 들어있죠. 요 자체도 사실은 체상용인데요. 요 안에 진리의 상이 다 들어있고 고게 현실적으로 표현되는 작용도 위대하다. 그럼 절에 가시면 기와마다 기와 밑에 보면 요거(◯) 아니면 요거() 아니면 요거(卍) 그려져 있어요.
딱 보시면서 한번 음미해보시면. 또 용(用)은 이건 만(卍)자만이 아니라 이것(⎈)도 용입니다.
53:00
오행(五行) 팔괘(八卦)가 동양에 있듯이 팔방으로 돌려버리면 뭐가 돼요. 절 입구에마다 있죠. 법륜(⎈) 법륜이 그대로 용(用)이죠. 법륜(法輪)을 굴린다고 하잖아요. 부처님이 법률 굴리는 이 용어를 설명 잘하셨는데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팔정도(八正道). 팔방이죠. 팔정도 원래 전륜성왕이요 이 바퀴를 굴려서 차크라예요. 이게 인도 말로 바퀴가 전륜(轉輪)이라는 게 차크라를 굴린다는 거예요. 위대한 왕은요 차크라를 굴릴 줄 안다는 거예요. 팔방을 경영한단 뜻도 있고요 전설에 의하면 전륜성왕이 아침에 딱 나오면 차크라가요 몸 안에 있는 차크라만이 아니라 우주선이에요 우주선. 요즘 보면 우주선이에요. 비행체. 금륜 은륜 여러 가지를 갖고 있는데 전륜성왕은 차크라가 눈앞에 금륜이 떠있대요. 그걸 타고 자기가 다스리는 사회를 바로 한 바퀴 하루에 한 번씩 시찰해요. 그래서 전륜성왕입니다. 운전한다고 그래서. 차크라를 운전하는 위대한 왕. 사해를
54:00
차크라로 다스린다는 거예요. 이 차크라를 굴린다는 의미도 이게 재밌는 게 동양에서는 정치 잘하는 걸 홍범구주(洪範九疇)라고 해서 딱 이렇게(⎈) 그려놓거든요. 황극(皇極) 중심에 서서 팔방을 잘 다스린다는. 의미가 뭔가 통하는 게 있어요. 요것도 기억해 두세요. 그런데 전륜성왕은 정치를 실제로 팔방을 다스리는데 부처는 뭘 잘하냐? 그러면 부처는 법륜을 굴린다고 해서 전법륜(轉法輪) 그래요. 앞에 전륜성왕하고 똑같습니다 부처는. 정치라면 전륜성왕이고 도를 가르치면 부처거든요. 그러니까 부처도 뭔가 굴려야 돼요. 그러니까 전법륜.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린다. 그럼 어떻게 이루어져 있냐? 진리의 수레바퀴 가운데가 텅 비어서 열반이고, 절에 보면 가운데 텅 비어 있습니다, 열반이고 밖에가 팔정도예요. 팔정도 가르치는 게 사실은 사람들의 마음에 어떤 진리를 펴는 거잖아요. 그것도 다스림이거든요. 사람들의 그 지혜를 다스리게 해주는 거, 마음을 닦게 해 주는 거
55:00
요것도 훌륭한 정치죠. 전륜성왕과 부처님이 지금 하나로 통해 있는데 전법륜 하는 존재가 부처입니다. 이것도 용(用)이에요. 실제 용을 쓰는 모습이에요. 그러니까 부처님은요 일반 아라한하고 차원이 다른 게 이걸 강조했다고요 용까지도 강조했다구요. 텅 빈 열반, 그 열반 안에 팔정도의 진리가 들어있다가 실제로 밖으로 표현했을 때 그 로고스대로 바르게 보고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동해야 되는 그 진리를 온몸으로 표현 하셨어요. 그러니까 이분도 결국 대승적으로 인도 전역을 돌면서 중생을 구제하다 길에서 돌아가셨잖아요. 위대한 대승보살의 모습을 갖췄거든요. 그런데 거기서 더 나아간 게 지금 대승불교죠. 그래서 부처님이 갖고 있던 두 가지 문제가 있었어요. ①출가주의, 출가해야 더 완벽해진다는 거랑 ②열반주의, 결국엔 열반에 들어가야 된다는 이게 보살도랑 안 맞는 두 개가 있었어요. 요거를 배제하고 경을 새로 써서 대승경전들을 많이 만든 겁니다.
56:00
석가모니랑도 뭔가 좀 안 맞는 게 있어서 요 부분을 보완까지 했어요. 자 하지만 또 통하는 건 이렇게 있어요. 이게 지금 해석분(解釋分)이에요. 이런 식으로 풀이를 앞으로 자세히 해줄 겁니다. 제가 미리 해드렸는데. 그 다음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자 다 좋은데 이 한마음을 제대로 믿고 닦아야 되잖아요. 내가 육바라밀 실제 닦아야 되잖아요. 수행신심분은요 수행, 4가지 믿음과 5가지 수행, 그래서 수행은 수행에 해당되고 4가지 믿음은 신심에 해당돼서 수행신심분이라는 이름이 붙게 됩니다. 실제 어떻게 닦을 거냐 이겁니다.
[* 대승법의 핵심
① 일심一心 ② 이문二門(심진여문心眞如門ㆍ심생멸문心生滅門) ③ 삼대三大(본체[體]ㆍ형상[相]ㆍ작용[用])
* 4종 믿음
① 근본根本(진여법) ② 불佛(진여법의 원만한 구현자) ③ 법法(진여법의무량한 공덕) ④ 승僧(진여법의 충실한 수행자)
* 5종 수행
① 보시布施 ② 지계持戒 ③ 인욕忍辱 ④ 정진精進 ⑤ 지관止觀]
그래서 보시면요 이게 1심 2문 3대랑 연결되게 돼 있다는 거죠 구조가. 4신(四信) 4가지 믿음 5행(五行). 왜냐하면 굳이 5행이 아니거든요. 6바라밀을 5행이라고 했단 말이에요. 이건 4, 5 좀 맞추고 싶었던 것 같아요. 4도 이상한 게 삼보(三寶)에 대한 귀의면 굳이 셋이면 되거든요. 4가 필요 없거든요. 굳이 불법승에 대한 믿음 외에
57:00
근본에 대한 믿음이라는 걸 하나 더 추가했어요. 그러니까 불법이 합쳐진 존재를 지금 근본이라고 본 거죠. 진여(眞如). 그러니까 이거 굳이 넣은 거는 제가 볼 때는 숫자를 좀 맞추시려는 의도였던 것 같다. 그래서 4종 믿음 보세요. 4종 믿음 근본에 대한 믿음, 즉 진여법 자체에 대한 믿음. 불(佛) 진여법의 완벽한 구현자에 대한 믿음. 법(法) 진여법의 무량한 공덕에, 진여법 안에 있는 공덕에 대한 믿음. 그럼 3번하고 1번이 겹치죠 사실은. 1, 2, 3번이 사실은 다 겹치죠 서로. 겹치는 부분이 있죠. 네 번째 승(乘) 진여법을 충실히 닦는 수행자에 대한 믿음. 이렇게 해서 4가지 믿음을 갖고 자 이 믿음이 확고해질 때가 언제겠습니까? 요 4가지 믿음이? 결국은 참나를 체득할 때 제대로 믿음이 꽃피우고요 하지만 꽃피우기 전에도 이미 믿음은 있어요. 왜 이 믿음이 가능할까요? 기독교에도 있잖아요. “나 처음 믿은 그 순간 귀하고 귀하다.” 믿음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믿음도 양심의 작용이에요.
58:00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믿음도 여러분이 뭔가 끌리는 것도 양심의 작용인데 여러분 탐진치에 왜곡돼 있어요. 왜냐면 그 믿음은 이미 진리를 정확히 본 믿음이 아니기 때문에. 끌림으로써의 믿음이죠. 그 믿음만 계속 유지하고 계시면요 도가 안 닦입니다. 그 믿음은 처음 여러분 움직이는 그 힘으로써만 의미가 있어요. 일단 그쪽이 끌려서 움직였다면 그 다음에 뭘 해야 돼요? 거기서 말하는 것들이 진짜로 이루어지는지 수행을 해서 확인을 해야 돼요. 그래서 수행이 나옵니다. 처음 믿음 가지고는 설명이 안 돼요. 믿음만으로는. 믿음은 여러분을 움직이는 양심의 발로이긴 하지만 아주 부분적인 데 꽂혀 있을 확률이 크고 전체적인 그림을 아직 못 보고 있고 실제로 실험해보신 것도 아니에요. 그래서 수행이 필요한데 이 수행이 뭡니까? 보시 지계 인욕 정진, 뭐죠, 선정 지혜 하면 6개가 돼버리죠. 근데 5개로 하고 싶으니까 어떻게 했어요? 지관(止觀). 선정과 지혜를 묶어서 지관 이렇게 묶어 버렸습니다.
59:00
자 그런데 이거는 바라밀이라고 보세요. 6바라밀을 닦는 거지 6바라밀은 아직 아니에요. 행(行)이라고 했지 바라밀이라고는 안 해요. 왜냐? 아직 에고를 하고 있어요. 즉 지금 오행까지도 참나를 봤다는 얘기입니까? 못 봤단 얘기입니까? 못 봤단 얘기. 자 사신(四信) 오행(五行) 동안 참나를 아직 못 봐요 사실은. 오행이 닦다 닦다가 사신과 오행을 닦다 닦다가 언제? 참나를 딱 보는 순간 믿음이 꽉 차게 되고 수행이 바라밀로 변해버립니다. 그게 1주보살 이상이에요. 홍익학당에서 1급이라고 말하는 경지 이상이 될 때 이 변화가 일어나요. 재밌죠. 이런 게 일어나야 돼요. “그럼 사신 오행에서 그러면 참나 체험은 없습니까?” 아니 참나 체험은 이 안에 다 있어요. 참나에 대한 체험은 있어요. 학당에서 8급이라고 하는, 8급에서 7급 정도가 겪는 이런 체험은 있지만 하지만 참나가 늘 흐른다는 걸 모르는 한 아직 믿음이 꽉 찼다고 안 해요 불교에서.
01:00:00
참나가 늘 한결같다는 걸 아는 경지. “진여가 내 안에 늘 살아있다. 한마음은 늘 내 안에 있으면서 나의 본질이다”라는 걸 알 때 여러분이 1주보살에 도달해요. 1지(地)가 아니고요. 1주(住) 머무를 주(住)자. 1주보살에 도달하면서 여러분이 사신오행을 마스터하고 본격적인 6바라밀 수행으로 들어가요. 이제 참나를 늘 느끼니까 참나와 함께 살아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동안 억지로 하던 수행들이 바라밀로 변해요. “참나가 원하니까 한다”로 바뀌어요. 그전에는 그게 좋다고 해서 한 거죠 사실. 왜 보시해야 되는지 모르고 한 거예요. 그냥 그게 좋다고 하니까 한 건데 이때는 “참나가 원하니까 한다”가 돼요. 이럴 때 인격이 바뀌어요. 그러니까 아까 제가 말씀드렸지만 열반에만 집착해도 안 되고 억지로 그게 좋다니까 그 인격 만들어도 안 돼요. 여러분의 에고의 놀음에 불과해요. 아니면 참나의 한 부분에 대한 집착밖에 안 돼요. 이제 원만한 공부가 1주보살 이상부터 펼쳐집니다. 그게 대승기신론 설명 정말 잘되어 있어요.
01:01:00
저희 학당의 모든 체계도 다 대승기신론에 근거해서 만들어진 겁니다. 제가 이걸 오래 공부해 가지고 확인을 받고 만든 거예요. “대승기신론에 설명된 거랑 제가 공부한 거랑 맞아 돌아가니까 학당도 이렇게 공부하자” 해서 그 체계를 맞춘 겁니다. 그래서 서로 맞게 돼 있는 거예요. 우연히 맞은 게 아니고 대승기신론을 가지고 제가 공부를 많이 했기 때문에 맞춘 겁니다. 자 이렇게 해서 수행신심을이 닦다 보면 이제 한마음에 대해서 이해하게 되고. 자 1주보살은 왜 아직 1지가 아니냐? 지금 사신오행만 닦았지 6바라밀을 본격적으로 닦진 않았잖아요. 1주보살이 됐는데 육바라밀 또 진짜 무량하게 닦아야 1지보살이 돼요. 이게 대승기신론 체계입니다. 자 대승기신론은요 3겁이 걸리는데 10지보살 가는 데. 아니 3무량겁이 걸리는데, 1무량겁 2무량겁 3무량겁이 걸려요. 1무량겁
01:02:00
끝에 1지보살이 돼요. 2무량겁 끝에 7지보살이 돼요. 3무량겁 끝에 이제 사실은 10지가 돼요. 이 10지에서 이제 한 번 더 점프하면 뭐죠? 11지가 되고 12지가 돼요. 자 이래서 공부를 하면 특히 대승불교에서 흔히 3단계로 이 단급을 나누는 게 요것 때문에 그래요. 1단 7단 10단이 큰 고비거든요. 그래서 보통 10단을 얘기하기도 하고 아니면 여기서 바로 12지 얘기하기도 해서 한 3번, 3단계에 걸친 수행을 강조합니다. 여기(1지)는 뭡니까? 에고를 초월해서 참나를 제대로 아는 상태. 7지에서는요 아집이 떨어진 상태. 마지막 10지 12지 거치면서 무지가 떨어진 상태. (1지는) 무지와 아집을 넘어서 있는 참나가 있다는 걸 정확히 아는 상태. 요렇게 수행의 3단계예요. 어느 문파나 저 3단계에 근거해서 설명합니다. 10단계 아니면 3단계 12단계 요 안에서 다 놀아요. 이렇게 아시면 돼요.
01:03:01
그래서 그런데 요 얘기하려고 했죠. 대승기신론에 의하면 처음 공부해서 만겁 동안 요걸 사신오행(四信五行)을 닦아요. 만겁 때 1주보살에 들어가요. 그러면 여러분 1주보살에서 6바라밀을 닦는 수행은 얼마큼 하셔야 돼요. 무량겁 빼기 만 겁이요. 거의 무량겁. 이해되세요? 욕심 부리지 마시고 저 얘기 들으시고 “아유 차분하게 하자.” 그래서 1주를 목표로, 먼저 1조를 목표로 하셔야 돼요. 1주를 목표로. 막 “내가 오늘 3지인가? 4지인가?” 하지 마시고 1주를 목표로 가셔서 1주가 된 뒤에 매일 아침 눈 뜨면서 “참나와 함께 오늘은 어떤 6바라밀이 해볼까?” 하고 계속 같이 하다 보면 6바라밀 노트, 양심노트 쓰시면서 하루하루 여러분 인격을 점검하시다 보면, 그러다 보면 이제 1지도 되고 2지도 되고 하는 겁니다. 1지는요 여러분 양심이 늘 6바라밀을 시킨다는
01:04:00
것을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아는 경지예요. 다시는, “한마음이 6바라밀로 우주를 경영한다”는 거에 대해 다시는 의심하지 않는 경지. 1지까지 가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이유가 이거예요. 참나 깨치고 난 뒤에도 6바라밀을 어마어마하게 해봐야 안다는 거예요. 참나가 뭘 원하는지? 그럼 지금 수많은 지금 전 세계에서 성자니 막 참나니 얘기한 사람이 다 어느 정도인지 알겠어요? 여기(1주)예요 여기. 6바라밀 아직 구경도 못한 분들이 많아요. 이런 분들이 흔히 윤리 쉽게 부정합니다. “참나면 됐지 윤리는 이제 필요 없다. 그동안 고생했다. 이제 참나다” 하고 가는데 그 뒤로 이제 또 무량겁을 닦으시면 말이 좀 바뀔 겁니다. 같이 참나 깨달은 분이, 무량겁 열심히 공부한 분이 1지될 때쯤에 본인은 여전히 1급이라는 1주라는 사실에 뭔가 충격을 좀 받았을 때쯤에 변화가 또 올 수도 있죠. 이렇게 걸려요. 또 아니면 하늘이 이뻐해서 그래도 공부했는데
01:05:00
자극을 자꾸 주겠죠. 그런 터무니없는 논리에 빠져요. 이 참나만 아시는 분들은요 “우주가 공하다. 참나면 된다. 윤리도덕도 없다. 자유다. 도인은 자유다.” 자유는요 무슨. 본인 욕망에 허덕이는 게 다 보이는데. 남이 보면 그 사람은 무지와 아집에서 못 벗어나고 있어요. 참나의 뜻을 이해를 못 했어요. 그래서 지금 말이 1주지 1주가 아니라 1주 정도까지 공부하고 보통 탈선해서 등급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많아요. 거기서 오만하게 굴다가 떨어져 버려요. 이 얘기를요 수많은 선사(禪師)들이 경고합니다. 서장(書狀)이나 진심직설(眞心直說)이나 다 보시면 나와요. “예리한 근기들이 쉽게 참나를 얻은 뒤에 전날의 구습을 못 버리고 막행막식하다가 다시 지옥고에 빠져든다.” 도로 다시 내려가요. 또 업을 좋은 업 짓겠습니까? 그런 마인드로 깨어난 뒤에 악업을 더 지어요.
01:06:00
예전엔 능력이 없어서 못 지었는데 참나를 알고 나니까 막 이제 말빨도 살고 남들이 또 우러러 봐주거든요. 엄청 악업을 지어요. 자기만 공부 안 하면 좋은데 반 전체 공부 못하게 만드는 애들 있죠. “이번에 올해는 시험 안 본대.” 말해 가지고 그 반 그대로 죽는 거죠. 그래서 이런 거 조심하시고. 그래서 경전들을 보셔야 되는 이유가 이래요. 이거 어마어마한 영감을 가지고 쓴 책인데 이 정도 정보를 안 접하시고 공부를 하신다는 게. 영적인 거는요, 과학은요 여러분 하나 공부할려면 저 뉴턴부터 공부하시면서 영적인 거는 갑자기 요즘 시대 유행하는 거 한 권 읽고 영적인 걸 이해했다고 나오는 건 정말 비상식적인 태도 아닙니까? 몇 천 년 전부터 연구된 분야인데. 그 분야의 모든 정보를 대략이라도 아시고 공부를 시작하셔야지 갑자기 시작하시니까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요즘 나온 이 영상 책들이요 영성을 대중화 하는 데는 좋은데
01:07:01
너무 깊이 없는 영성을 만들어 놔 가지고요 탈선이 더 많이 되는 문제가 있어요. 저는 그래요. 보살도는요 “안 그랬으면 좋았을 걸” 이거 가지고 보살도 못 하잖아요. 이왕 이렇게 된 이상 사이비 영성이라도 영성은 배웠을 거 아니에요. 빨리 꼬셔서 다시 이 길로 돌아오게 만드는 법을 연구해야 됩니다. 이제 와가지고 뭐 그게 어쩌니 저쩌니 할 필요가 없고 빨리 인욕하셔야 돼요. 보살도 적용 실전 팁입니다. 이 상황을 빨리 인욕하세요. 이미 일어난 일은 일어났으니까 그것대로 의미가 있는 거니까 받아들이시고 지금 어떻게 하시는 게 맞겠어요? 조금 이따 양심 회의하실 때 그런 얘기 많이 해주세요. 좋은 아이디어. 자 아직 진도가 좀 남아서 조금만 더 할게요. 왜냐면 지금 진도 1~2줄 나간 것 같아요. 뒤에 내용이요 말만 길지 별 내용이 없으니까 쭉 한번 읽어볼게요.
[2-2. 인연의 총체적 모습
먼저 ‘책을 쓰게 된 인연’(인연분)을 말하겠다. 혹자가 묻기를 “어떤 인연으로 이 ‘기신론’을 지은 것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답하였다. 이 인연에는 8가지가 있다. 8가지 인연은 어떠한 것을 말하는가? ① 인연의 ‘총상總相’(총체적 모습)으로, 이른바 중생으로 하여금 일체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여 궁극의 즐거움을 얻게 하고자 함이니, 세간의 명예ㆍ이익ㆍ공경을 구하고자 함이 아니다.
初說因緣分 問曰 有何因緣而造此論 答曰 是因緣有八種 云何爲八 一者因緣總相 所謂爲令衆生離一切苦 得究竟樂 非求世間名利恭敬故.
* 보살(군자, 義) : 대아적 효율성(爲令衆生離一切苦 得究竟樂)
중생(소인, 利) : 소아적 효율성(求世間名利恭敬)
* ①인연총상因緣總相 / ②~⑧ 인연별상因緣別相]
인연의 총체적인 모습과 인연의 개별적인 모습을 얘기합니다.
01:08:00
총론과 각론을 얘기해요. 이 책 왜 썼는지를 지금 설명해야 되는 장이니까. 왜 쓴 거야? 이 책을 쓰게 된 인연을 말하겠다. 혹자가 묻기를. 꼭 혹자가 물어서 이런 말 한 거 아닙니다. 저자가요 보통 옛날, 혹(或)문장식이라고 그래요 이걸. 누가 혹자(或者)를 가상해서요 질문을 하게 만든 다음에 자기 대답을 하는 식, 그러니까 질의응답으로 글이 가야 재미있으니까 쓰는 취하는 방식이에요. 수심결도 이렇게 돼 있죠. 유교 경전들도 다 이래요 대부분. 그러니까 유교에 대한 많은 논서들이요 혹문장식으로 많이 가요. 이런 글이 읽기가 편하거든요. 자 “어떤 인연으로 이 기신론 지었나?”라고 누가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이 인연에는 8가지가 있다. 8가지 인연이란 무엇을 말하는 거냐? 인연의 총상의 모습으로 중생으로 하여금 일체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여 궁극의 즐거움을 얻게 하고자 함이니 세간의 명예나 이익 공경을 구하고자 함이 아니다. 자 8가지 인연을 얘기하는데 첫 번째가
01:09:00
총상(總相)이라고요. 총체적인 모습. 나머지 7개는 개별적인 모습이겠죠. 그래서 총체적인 모습을 얘기하는데 왜 썼냐 이 책을? 총론식으로 말하자면 중생들을 일체 고를 벗어나서 궁극의 즐거움, 열반의 즐거움을 얻게 하고자 합니다. 저는 이런 게요 대승불교의 큰 모순이라는 거예요. 이런 설명들이. 그러니까 이 저자마저도요 되게 모순에 빠져있는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뭐냐면요 이 보살도가 완전하게 자리를 못 잡았을 때 나타난 특징입니다. “보살이 돼서 뭐 하실래요?” “모든 중생을 열반에 들게 할 거예요.” 그럼 뭔가 이상하죠. 자기는 보살도 닦으면서 중생들은 다 열반에 들게 하겠대요. 이 모순이요 화엄경에도 나오고 어디든 나옵니다. 이게요 소승불교에서 대승불교로 넘어올 때 애매하게 타협한 결과예요. 부처님이 들었다는 열반을 부정하지도 못하고 또 대승은 얘기하고 싶고 하다 보니까 애매한 주장이 나오는데, “다 열반에 들어. 좋아. 다 좋은데 나는 열반에 안 들고 다른 사람들
01:10:00
열반 들도록 도와줄게.”라는 식으로 뭔가 약간 좀 궁색해요. 아니 열반에, 그렇게 중생들한테는 권하는 열반을 왜 자기는 안 들면서 남들은 거기 들으라고 하죠? 좀 이상하죠. “이거 되게 좋은 거예요.” 하고 남들 다 가입시키고 본인은 가입을 끝까지 안 해요. 뭐 믿겠어요? 그렇게 영업하는 사람. 수상하잖아요. 모순이 있어요. 화엄경에도 이런 말이 자꾸 나오는데 요거는 좀 모순입니다. 제가 돌려서 번역해 드려요. “이 열반이 소승의 열반이 아니라 보살의 열반입니다.” 하고 마는데 사실 문맥을 보면 제가 보면서도 “왜 이렇게 썼을까?” 하는 그게 있어요. 이해되세요 무슨 말씀인지? 원래 대승불교의 자신감이 진짜 있는 내용이라면 뭐라고 해야겠습니까? “모든 중생을 보살로 만들기 위해서 보살도를 편다” 라고 해야 맞죠. “왜 중생들은 열반에 들게 하고 자기들만? 뭐 좋은 거 있으니까 그러는 것 아니냐?” 하는 의혹이 생기지 않을까요? 중생들이 볼 때. 그럼 여러분이 중생이라면
01:11:00
여러분은 그냥 열반에 들어야 되는 거예요? 보살 잘못 만나면 열반에 들어버리는 거잖아요. 나는 원치 않았는데 사실은. 좀 이상하죠? 요 이상하다는 것도 아셔야 됩니다. 이게 역사 속에서요 다양한 그 당시 소승 불교 사람들을 설득하면서 대승을 주장하다 보니까 나온 내용이에요. 심지어 어떤 주장까지 있는지 아세요? 보살도가 당당하지 못 하니까 “니네들 알한은 해탈에 들었는데 니네들은 왜 윤회를 한다는 거야? 아라한이면 이미 해탈에 들어야 되는데 너희들 아라한도 아닌 것 아냐?” “아닙니다. 우리는 아라한은 공부했습니다.” “그러면 윤회를 못할 텐데.” “그래서 일부러 몇 개의 업만 남겨놨습니다. 고거 갖고 돕니다.” 이게 성유식론(成唯識論)이나 수많은 불경에서 처음에 이런 식으로 궁색한 설명을 해요. 우리는 일부러 몇 개를 안 지웠다는 거예요 업을. 그거 가지고 계속 돌면서 바라밀을 해야 되니까. 그런데 반야심경이 나오면은요 뭔 말이 나옵니까? 오온이 본래 공하다고 가버리면요 그 말도 다 궁색한 소리라는 거 아시겠죠?
01:12:01
“왜 윤회를 안 하는 거야?” “윤회도 본래 공해”라고 나가버려야 최고의 고급 대답이에요. 그럼 그 주장대로라면 지금 중생은 열반에 들게 하고 난 안 들겠다는 발상이 되게 이상해지고, 되게 궁색하게 나온 얘기란 것도 아셔야 돼요. 근데 아무튼 숭고한 뜻이죠. “중생 모두를 도와야겠다” 하는. 열반에 들게 하지 않게, 즉 “중생을 모두 해탈에 들게 하지 않는 해탈이라는 건 의미가 없다” 이렇게 좀 우리가 긍정적으로 읽어보자고요. 세간의 명예나 이익 공경을 구하고자 한 게 아니다. 자 소인들은요 세간의 명예 이익 공경을 구하죠. 즉 이게 명예욕이나 물욕이죠 권력욕. 이것 때문에 움직이면 소인이고, 보살은요 그것 때문에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다라는 걸 밝히고 있어서. 논어에 보면 이 말이 나오죠. “군자는 정의에 밝고 의리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 나 소인의 그 욕심의 마음으로 한 거 아니다. 보살을 마음, 양심의 마음으로 지금 이 책을 쓴 거다 요걸 밝힙니다.
01:13:01
그래서 보살은 대아적 효율성이라고 제가 주장하는 게 이겁니다. 즉 모든 중생을 행복하게 하겠다는 거죠. “모든 중생을 다 불보살 만들겠다” 이렇게 우리가 해석하자고요. 고게 지금 대아적 효율성이고요, 소아적 효율성은요 세간의 명리 공경을 추구하는 게 소아적 효율성이죠. 나름 대승기신론에서 구분하고 있는 군자와 소인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구경락(究竟樂)을 얻게 하겠다.” 예 그래서 이거 이것도 하나 보시고. 구경락이 나쁜 게 아닌데 이런 식 표현이 소승 불교에서 쓰는표현으로 보이기가 쉽다고요. 보살 만들겠단 말을 왜 당당히 못하느냐? 문제가 있어요. 저기 화엄경에서도 똑같애요. 이렇게 말을 합니다. 화엄경에선 구경락이 아니라 구경열반(究竟涅槃)이라는 말도 써요. 그러면 중생들 싹 구경열반에 집어넣어 버리겠다는 게 되거든요. 그건 뭔가 문제가 생겨요. 고런 부분도 생각하십시오.
01:14:00
[2-3. 인연의 개별적 모습
② 여래의 ‘근본적인 의미’를 풀이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바르게 이해하여 오류가 없도록 하고자 함이다. (입의분, 해석분 중 현시정의顯示正義ㆍ대치사집對治邪執) ③ 선한 바탕이 성숙한 중생으로 하여금 ‘대승법’을 감당하게 하여 그 믿음이 물러나지 않게 하고자 함이다. (해석분 중 분별발취도상分別發趣道相. 3종 발심)
* 3종 발심
①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신인信忍) ② 해행발심解行發心순인順忍 ③ 증발심證發心(법인法忍)]
자 2-3 인연의 개별적인 모습. 자 그러면 또 다른 이 책을 쓴 이유들은 뭐냐? 개별적인 다른 이유는? 여래의. 여기서부터는요 이 책에 목차가 돼요. 큰 흐름이 돼요. 이 책의 중요한 내용을 설명해 줍니다. 내가 요거 할라고 이 책 썼단 얘기를 하다 보니까 이 책에서 제일 지금 저자가 강조하고 싶은 부분 있죠. 고 부분들을 미리 얘기해 주는 거니까 지금 책 한 권을 미리 읽는 맛이 나요. 보세요. 먼저 여래의 근본적인 의미를 풀이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바르게 이해하여 오류가 없도록 하고자 합니다. 요게 지금 인연분(因緣分) 다음에 펼쳐지는 입의분(立義分)과 그 해석분(解釋分) 있죠. 그게에 뭡니까? 아까 한마음에 대한 설명이었다는 거죠. 그래서 그 해석본 중에서 어떤 내용이냐면요 현시정의(顯示正義) 올바른 어떤 한마음에 대한 올바른 뜻을 풀어주는 거. 현시(顯示)라는 건 드러내 보여주는 거거든요. 한마음에 대한 올바른 풀이를 보여주는 거랑 대치사집(對治邪執) 자 사집(邪執)은 뭐냐면요
01:15:00
사악한 집착이거든요. 그럼 이 한마음을 가리는 게 뭘까요? 그것도 다 얘기해 준다는 겁니다. 여러 크게 뭐냐 하면요 두 개예요. 요거 하나 좀 설명 드릴게요. 자 이 자체는 광명하죠 참나는. 그걸 본각(本覺)이라 그래요. 깨달을 각(覺)자 참나는 본래 깨달아 있습니다. 요게 모든 화두선과 최상승선이 가능한 그 원리예요. 이유예요. 대승기신론은요 최상승선을 추구합니다. 다른 경전들은요 뭔가 상을 만들어서 거기에 몰입하게 만드는데 대승기신론은 그 얘기 하긴 합니다마는 그거는 부수적으로 보고 진짜는요 “그대가 본래 열반이다”라는 걸 깨달으라고 강조해요. 그래서 육조단경(六祖壇經)에서 다 대승기신론을 인용합니다. 요게 선불교의 또 경전이에요. 그리고 이런 이 대승기신론을 제일 잘 푼 양반으로 지금 꼽히는 분이 우리나라 원효 스님이죠. 그러니까 이거는요
01:16:00
그 원효스님이 이 육조단경(六祖壇經)보다 훨씬 높이 받들어져야 되는 분인데도 지금 이 원효, 조계종(曹溪宗)이다 보니까 조계(曹溪)가 육조 스님 아닙니까. 조계산에서 공부하셔서 육조 스님인데 조계종에는 지금 그 이전의 대승기신론을 전 세계에서 인정받을 정도로 풀이한 분이 우리나라 원효 스님이라는 거. 요것도 이 원효 스님을 저는 많이 강조했으면 좋겠고. 원효 스님은 실제 대승불교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분이에요. 스스로 거사(居士)가 돼버렸죠 이런 걸 받아들여야 불교가 통이 커지고 변합니다. 승속(僧俗)을 나누면 안 돼요. 원효 스님 주장이 진속일여(眞俗一如)예요. “니르바나와 현상계는 하나다.” 그리고 그런 대승불교를 온몸으로 보여줘요. 그래서 그런 것도 좀 강조... 원효 스님 얘기랑 또 연결돼서 지금 말이 꼬였는데... 원효 스님이 강조한 것도 본각(本覺)입니다. “우리는 본래 깨달아 있다.”
01:17:00
자 그다음에요 그런데 그런데 우리는 지금 실제로는 불각(不覺)이잖아요. 깨닫지 못했잖아요. 참나 잘 안 와 닿죠. 6바라밀을 잘 안 나오잖아요. 그거를 불각 그럽니다. 그럼 불각을 일으키는 원인이 저 사집(邪執)이요. 사악한 집착. 두 개가 있는데, 뭐냐면 나에 대한 집착 아집, 법집 세상에 대한 집착. 나와 나의 것에 대한 집착이에요. 나 그리고, 뭐죠, 이거 이제 법이 대표적인 게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거든요. 생각 감정 오감입니다 이 법이. 우리 식 표현으로 생각 감정 오감이죠. 우주에 존재하는 이 법들, 로고스들에 대한 집착, 로고스가 표현된 이 대상들에 대한 집착, 생각에 대한 집착, 감정에 대한 집착, 오감에 대한 집착이 법집이고. 그거를 나라고 또 내꺼야 하고 그게 나야 하고 에고의 나에 집착할 하는 거를 아집 그럽니다. 요거를 굴리는 참나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 생각 감정 오감으로 이루어진 나를
01:18:00
그게 나의 전체라고 집착하는 겁니다. 자 이게 아집이고 예 이게 법집이거든요. 자 그래서 고게 사집(邪執)이에요. 우리가 대치(對治), 상대하여 다스려야 할 사악한 두 개의 집착. 아집 법집. 이 아집과 이걸(법집) 무지(無知)라고 그래요 흔히. 이게 아집이고 이건 심리적인 장애구요 나에 대한 집착이기 때문에. 법집은요 무지예요. 즉 현상계가 내 참나의 작용이란 걸 모름으로 인해서 생겨난 집착이기 때문에 무지. 그걸 또 내꺼야 하고 나라고 집착하는 거는 아집. 자 그다음에 본각(本覺) 불각(不覺). 아 여기 나의 것이라고 해서 이제 다 나의 것 아닙니까 하지만 그 나의 것이라는 건 이게 대상이라는 거죠. 내 마음에 어떤 대상이 되는 것들에 대한 집착. 그리고 그걸 다 내 것이라고 집착하는 거는 아집에 속해요. 자 본각불각 있고 그다음에 비로소 시(始)자 시각(始覺)이 있어요. 이건 뭐냐면요 이게 결국 3무량겁을 거치면서 깨달음을 하나하나 다시 닦아가는 깨달음을 시각(始覺)이라고 그래요.
01:19:01
시작할 시(始). 비로소 시(始). 다시 내가 깨달음을 열어가는 걸 시각이라 그래요. 이게 삼각(三覺)이고. 이 불각(不覺)은 깨달음이 아니니까 사실은 불각은 아니고 진짜 깨달음은 이각(二覺)이죠. 불교에서 중요한 깨달음. 본래 여러분이 완벽하다는 거랑 지금 여러분이 하나씩 닦아간다는 거. 본각(本覺)은 해인삼매(海印三昧) 시각(始覺)은 화엄삼매(華嚴三昧). 1지 2지 차근차근 밟아야 된다는 거. 이게 2각(二覺)이거든요.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이 이각에 대해서 노래해요. 철저히 이각만 노래해요. 그러니까 원효 스님이요 금강삼매경 강의가 신라 왕실에서 들어왔을 때 소를 타고 가면서 그 주석을 쓰시거든요. 론을 쓰거든요. 경이 원래 있으니까 원효 스님이 쓴 건 논문이 되죠. 원래 소(疏)인데 또 논문이라고도 부르는데 그 논을 쓰는데 “반드시 소를 타고 가면서 그래서 나는 쓰겠다. 소뿔 위에다 걸치고 종이를 걸치고 쓰겠다.” 이렇게 하는 이유가요 이각(二覺) 때문에 그래요. 이각(二覺). 금강삼매경이 이각 사상이니까.
01:20:00
소가 뿔 2개죠. 그 각이랑 이 각이랑은 발음만 같지 각은 아닌데 “뿔 2개에다가 종이를 걸치고 쓰겠다” 하는 게 소가 그걸 상징해요. 이각(二覺). 우리한테는 이각이 있다. 본각과 시각. 본래 완벽한 참나랑 내가 닦아서 다시 개발한 참나. 요게(본각) 비로자나불이면 요건(시각) 뭘까요? 노사나불이에요. 자 여기(본각)는 법신(法身)의 세계의 비로자나불이에요. 여기(시각)는 보신(報身)의 세계 노사나불이에요. 내가 닦은 만큼 내 꺼예요. 그럼 여러분 여러분 그 원효 스님이 생각한 최고의 수행은 뭘까요? 본각과 시각을 일치시키는 거죠. 그러면 12지부처가 돼요. 본래 깨달은 게 에고의 세계에 완벽히 표현되면. 시각은 에고의 세계에 표현된 깨달음이에요. 본각은 깨달았을 때 그 참나 그 자체예요. 시각은 에고의 세계에 표현된 참나예요. 여러분 지금 에고의 수준에 따라 드러나는 참나 수준이 다르죠. 비로자나불은 같지만 노사나불은 사람마다 달라요. 그래서 보신(報身)이라고 합니다. 업보에 따라 다르니까.
01:21:00
근데 똑같이 참나라는 건 확실히 둘 다 참나예요. 이해되세요? 태양은요 태양 그 자체로는 비로자나불인데 지구에 보이는 태양은 노사나불이에요. 그래서 구름 끼면 안 보이기도 하고 태양빛이 변해요. 본체가 변하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있어서 태양 빛은 달라진다. 밤엔 안 보여요 태양이. 태양 사라졌나요? 있는데 안 보여요. 예 이런 게 보신의 세계예요. 참나도 우리한테 와서는 안 보일 때도 있고 보일 때 약할 때도 있고 이래요. 근데 그거는 참나의 탓이 아니라 여러분 에고 탓입니다. 이렇게 해서 대치사집까지 해서 근본 의미를 풀이해서 중생들이 오류 없게 개념을 잘 잡고 공부하게 할려고 이랬다. 세 번째는요 요거 8개만 하고 끝낼게요. 세 번째는 선한 바탕이 선근(善根)이라고 하죠. 영적 지능이에요. 타고난 영적 영성 지능들. 영성지능이 성숙한 중생. 영성지능이 성숙하면요 요런 얘기 하면 바로 터지거든요. “아 이게 참나구나.
01:22:00
아 6바라밀 이런 거구나.” 이렇게 빨리빨리 이런 걸 알아가는 이런 주제를 알아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대승법을 감당하게 하여 그 믿음이 물러나지 않게 하고자 합니다.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할려고 이 책을 썼다. 고게 해석분 중에서 분별발취도상(分別發趣道相) 도에서 도에 발심하는 걸 분별해 놓은, 그 상을 분별해 놓은 장이 있거든요. 고거는요 발심, 3종발심. 중생이 발심을 크게 하는 게 3번인데 이제 그걸 묘사해 놓습니다. 고게 별 게 아니고 여기 3무량겁를 거치면서 여기서 참나를 제대로 알았을 때 한번 발심하고, 또 보세요. 여기서 발심하고 1지될 때, 1지까지 오면서 발심하고, 1지 된 뒤에 참나를 이제 알고 살면서 발심하고. 이게 3번이에요. 처음에 수행해 가지고 참나를 진짜 만나서 확인했을 때 제대로 된 발심이 일어나고. 참나를 안 뒤에 6바라밀을 열심히 닦는 발심이 있고. 그다음에 6바라밀을 닦고 하다 보니 진여가 확연해지면서 1지보살에 들어가면서 그 뒤로는 진여만 따라가요.
01:23:00
그런 발심이 있고. 3종발심을 설명합니다. 자 그래서 3종발심에 뭐 있습니까? 밑에 써놨죠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 믿음이 성취되는 발심. 자 신성취 이러면 딱 급수가 나와야 돼요. 여러분. 신성취면 무조건 1주보살입니다. 믿음이 성취됐다는 건 뭐예요? 자 보세요. 4가지 믿음과 아까 사신오행(四信五行)이 있었죠. 4가지 믿고, 이게 같이 닦는 거예요. 4가지 믿음을 가지고 5가지 6바라밀을 열심히 닦다가 1주보살에 들어가죠. 그때 이 믿음이 성취됐다라고 하고. 다른 말로는 신상응지(信相應地) 그래요. 믿음이 상응하게 됐다. 이제 진리와 상응하게 됐다. 신성취, 신상응지라고 하면요 1주보살이에요. 신성취발심은 1주보살이 내는 발심이요. 이때 이제 참나에 대해서 확신하게 됩니다. 아직 6바라밀이 제대로 나오지는 않지만. 그 다음 해행발심(解行發心). 이제 참나가 6바라밀의 모습을 6바라밀의 어떤 가르침을 나한테 보여주고 가르쳐주고 하는 걸 열심히 따라가면서 닦아가는 6바라밀을 닦는 과정이 해행발심. 아까가
01:24:00
확신하는 가르침이었다면 이번에는 순종하는 가르침 6바라밀에. 그러다가 증득(證得)을 하게 됩니다. 진리를 그대로 깨치게 되는데 고게 증발심(證發心). 증발심은요 “참나는 6바라밀 덩어리”라는 걸 확인하게 돼요. 이때가 1지보살이에요. 증발심은 1지 이후 모두 다 증발심입니다. 2지건 3지건. 참나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의심 안 하거든요. 참나를 내가 소화하는 능력이 차이가 날 뿐이지 참나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았다 예요. 그러면 보세요. 지금 전 세계 1주보살 정도 한 사람들이 성인 성자 소리 듣는데 이 사람들이 지금 참나를 증득했다는 겁니까 이 이론대로라면? 아니에요. 이제 확신이나 하는 단계라는 겁니다. 이거하고 무량하게 6바라밀을 닦은 뒤에 양심노트를 쓰면서 닦은 뒤에야 “참나가 양심이구나” 하는 말이 나와요. 간단한 예 들어드릴게요. 지금 그런 공부자가 별로 없다는 증거가 지금 참나가 양심이라고 얘기하는 분이 드물더라고요. 제가 “참나는 양심이다” 했더니 요거 가지고 공격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아요. “참나가
01:25:00
양심이라니 저 사람 가짜다. 참나는 양심을 초월한 건데 어떻게 양심이 되느냐?” 막 사시겠단 얘기죠. 제가 그런 분들한테 이런 얘기 들을 그게 아닌데 지금 그래요. 저는 원망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요 밤에 산에 들어가 보세요. 대나무 숲에. 모기가 와서 물죠. 모기가 이상한 겁니까? 여러분 이상한 겁니까? 거기 들어간 여러분이 이상한 거죠. 모기 문다고 원망하기 힘들죠. 모기 밭인데 거긴. 보살은요 그런 거 신경 쓰지 마세요. 짜증은 5분 정도만 내시고 막 욕도 한 5분만 신나게 하세요. 이렇게 막 하다가 5분 정도 지나면 “응 여기는 원래 모기밭이지.” 하고 다시 인욕바라밀로 돌아오세요. 그러니까 중생이죠. 무지와 아집의 절은 존재들이 중생이에요. 다른 거 아닙니다. 진리 얘기할 때 못 알아들어요. 나랑 다르면 싫어해요. 그러니까 이제 또 조금 이따가 회의 시간에
01:26:00
연구해 보세요. 어떻게 이런 사람들을 우리가 나아가게 할 건가? 도에 발심하게 할 건가? 보살들은 끝없이 연구해야 될 주제지 환자에 대해서 분석하고 연구해야지 의사가 환자한테 짜증만 낼 수는 없잖아요. 5분 안에 짜증을 접으시고 다시 평정심으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계속 보살도를 연구하세요. 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④ 선한 바탕이 미약한 중생으로 하여금 그 ‘믿음’을 닦고 익히게 하고자 함이다.(수행신심분) ⑤ ‘방편方便’(형편에 따른 처방)을 보여, ‘악업의 장애’를 소멸시키고 그 마음을 잘 보호하고 어리석음과 오만함을 멀리 떠나게 하여, 삿된 가림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함이다.(수행신심분 중 정진精進) ⑥ ‘지관止觀’을 닦고 익힘을 제시하여, 범부ㆍ이승의 마음의 허물을 다스리고자 함이다.(수행신심분 중 지관止觀)
⑦ ‘전념專念’(염불)이라는 방편을 제시하여, 아미타불 앞에 왕생하게 함으로써, 반드시 ‘신심’이 확정되어 물러서지 않게 하고자 함이다.(신상응지信相應地, 1주의 경지). (수행신심분 중 염불念佛) ⑧ 이익을 보여주어 수행을 권하고자 함이다.(권수이익분) 이와 같은 8가지 인연으로 “기신론”을 지은 것이다.
二者爲欲解釋如來根本之義 令諸衆生正解不謬故 三者爲令善根成熟衆生 於摩詞衍法堪任不退信故 四者爲令善根微少衆生修習信心故 五者爲示方便消惡業障 善護其心 遠離癡慢 出邪網故 六者爲示修習止觀 對治凡夫二乘心過故 七者爲示專念方便 生於佛前 必定不退信心故 八者爲示利益勸修行故 有如是 等因緣 所以造論.]
자 네 번째, 선한 바탕이 미약한 중생, 선근이 미약해요. 영성 지능이 떨어져요. 그럼 무지와 아집에 더 많이 휘둘린다는 얘기죠. 그런 분으로 하여금 믿음을 닦고 익히게 하고자 합니다. 수행신심분. 지금 무지와 아집에 휩싸여 있어도요 사신오행을 닦다 보면요 다시 회복할 수 있다 이겁니다. 그 다음 다섯 번째. 방편을 보여 방편은요 형편에 따른 처방이라 약간 임기응변을 부리는 걸 허용하잖아요 방편의 세계는. 방편을 보여서 악업의 장애를 소멸시키고 그 마음을 잘 보호하고 어리석은가 오만함을 멀리 떠나게 하여 삿된 가림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합니다.
01:27:00
요 내용이요. 수행신심분 중에서, 즉 보세요. 수행신심에서 그 오행 중에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있었죠. 그 정진 챕터에 보면 요런 내용들이 나온다는 겁니다. 정진해서 나아가자 하는. 그다음 지관, 정진 나왔으니까 지관 나와야겠죠. 그 뒤에 지관 파트에서는 뭔 얘기를 했다는 겁니까? 지관을 닦고 익히는 방법을 제시하여 범본부나 이승(二乘) 소승 성자들로 하여금 마음의 허물을 다스리고자 합니다. 소승성자도요 제대로 된 육바라밀, 지관 수행을 하면, 6바라밀의 기초가 되는 제대로 된 명상과 제대로 된 관법 수행을 하면 사고가 커져서 대승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겁니다. 대승불교에서 관법(觀法) 수행의 핵심이 뭔지 아세요? 읽으시면 나오는데 대승불교 기신론에서. 응작(應作) 불응작(不應作) 해서 될 일과 안 될 일 판정하는 거예요. 즉 양심 노트로 저희가 도와드린 겁니다 미리. 저희 몰라는 선정 수행이고요. 양심 노트 쓰시라는 거는 지혜수행이에요. 대승기신론하고 딱 맞게 만들어 놨어요.
01:28:00
그럼 빨리 여러분이 1지보살이 되실 수 있어요. 대승기신론에서 뭐라고 하냐면 1주보살 되기 전에 지관(止觀) 수행해서 해야 될 게 지(止)가요 “일체가 본래 열반이다”는 걸 깨치는 거구요. “몰라”만 하시면 돼요. 관(觀)이 뭐냐면 해서 될 일과 안 될 일 판정하는 거예요. 그런데 구체적 기준이 없잖아요 대승기신론만 갖고 말하면. 6바라밀에서 근거를 세워서 분석을 하시는 게 좋죠. 자 7번 자 여기서는요 수행신심분 중에 지관(止觀) 장인데요. 자 대승기신론은 대단한 게 중생들이 또 이것만 수행하면 어려울까 봐 나무아미타불 하는 수행을 또 방편으로 제시해요. 일곱 번째 전념(專念), 염불에 몰입하라는 얘기입니다. 몰입하는 염불법을 제시하여 아미타불 앞에 왕생하게 함으로써 반드시 신심이 확정되어 물러나지 않게 하고자 함이다. “진짜 부처를 봐야 나는 믿겠습니다” 하는 사람은요 “아미타불을 염하면서 한번 염불해봐라. 아미타불이 눈앞에 보일 것이다”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그 아미타불 본 사람은 극락 갈 수 있다.” 그러면
01:29:00
그 경지가 원효 스님이나 이렇게 “1지냐? 여기가 1주냐?” 말이 많은데 제가 이번에 번역하면서 자세히 음미해 본 바로는 지금 1주보살을 말해요. 믿음이 확정됐다. 무조건 1주예요. 자 유사 문제. 아까 뭐였어요? “믿음이 성취됐다. 믿음이 상응한다. 자 믿음이 확장됐다.” 몇 주? 1주예요. 믿음이 나오면 다 1주예요. 왜냐하면 1지는 믿음의 차원이 아니거든요. 실천의 차원이고 이해의 차원이지. 확신하게 됐다. 참나를 더 이상 의심하지 않게 됐다는 건요 아미타불을 더 이상 의심하지 않게 됐다. 늘 아미타불을 볼 수 있으니까. 고게 1주보살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몰입하면 아미타불이 눈앞에 생생하게 나타날 정도의 수행, 고게 참나의 작용이거든요. 에고가 억지로 그려서는 흩어져 버려요. 참나가 작동할 때 에고 살짝 거들어주면 이게 그려집니다. 시각화가 가능해요. 티벳 불교도 그 고정도 하면 1주예요. 만다라를 그리고 부처를 그리고. “그러면 극락 간다는 얘기는 뭡니까?”
01:30:00
아미타불 열심히 외면 극락 간다는 건요 1주보살 정도가 되면요 참나가 내 안에 늘 흘러요. 참나가 극락이거든요. 그래서 좀 더 세게 얘기한 거로 보시면 됩니다. 물론 그런 분이 돌아가시면 당연히 일반 영계보다 좋은 영계에 가시겠죠. 그런데 경전에서 말한 것처럼 성인들이나 사는 세계에 간다고 생각하시면 안 되구요 “내 안에 늘 극락이 있으니까 어디를 가도 극락이다”라고 생각하시는 게 더 자명합니다. 그게 수행신심분 중에 염불편이 그래요. 마지막. 이익을 보여줘 수행을 권하고자 함이다. “수행하면은 이런 이득이 있어.” 하고 에고를 한 번 더 설득합니다. “끝내줘. 여자 친구가 생겨.” 막 이런 뭔가 그런 식의 이익을 얘기해 줘요. 권수이익분(勸修利益分). 권면하고. 닦음을 권면한다는 거예요 이익을 제시해서. 에고에 대해서 정말 잘 파악하고 계시죠. 영업을 할려면 이렇게 이익까지도 얘기를 해줘야 돼요. 안 하니까 안 그러면. “대학 가면 여자 친구 많이 사귈 수 있을 거야”라고 막 얘길 해주는 거죠. 저도
01:31:00
낚인 게 예전에 공부할 때 딱 12년을 닦으래요 저더러 수행을. 이제 단학 수행이 좀 익어서 태식 수행에 들어갔는데 딱 저한테 지도해주던 분이 “12년만, 12년을 꾹 참고 해야 된다. 원래 이 단학이라는 건.” 그러면서 “12년만 지나면 장가도 잘 갈 거야.” 이 말이 굳이 이 말하고 이 말하곤 관계가 없는데 아마 제 안색이 안 좋았겠죠? 그때가 24살, 96년이면 제가 20 한 4살 됐나요? 23~4 됐을 때 고 얘기를 딱 듣고 걱정이 되잖아요. 12년 뒤면 선 30.. “설마 하늘이 그럴까?” 막 이랬는데 깨끗이 지나고 지금은.. 그러니까 되더라구요. 근데 그때는 그 당시에는요 “30대 어우 그때까지 내가 이렇게 막 솔로로 수행만 한다고?” 그건 아닌 것 같았어요. 근데 딱 그분이 아마 우리의 안색을 읽었는지 “12년 지나면
01:32:00
장가 좋게 갈 수 있어.” 이랬는데 문제는 그분도 솔로로 가셨어요. 솔로. 그래서 솔로로 살다 가셨어요. 그래서 어디 가서 하소연할 데도 없어졌는데. 근데 신기하죠. 에고는 그런 말 좀 들어야 해요. 그런 에고도 그것도 방편이에요. 방편으로 필요하긴 해요. “12년 해라. 그리고 장가 간다 못 간다는 모른다.” 이러면은 왠지 에고가 괜히 흔들리겠죠. 그런데 왠지 뭔가 이렇게 적절한 조언은 또 도움도 됩니다. 그래서 방편이란 거는 큰 목표를 갖고 잘 쓰면 약이구요. 그런데 거기에 집착해버리면 독이 되고요. 그래서 이런 거 잘 쓰시면. 그래서 대승기신론도 할 얘기 다 하고 또 에고도 적절히 자극해 주면서 “이익이 있을 거야.” 뭐가 효능이 뭔지 얘기도 해주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관점에서 여러분도 보살도를 한번 바라보시면 지금 대승기신론 한번 다 본 거예요. 그래서 다음에 이제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게... 지금 인연분 다 안 끝났나요?
01:33:00
예 인연분이 아직 안 끝났죠. 이 논문을 왜 쓰게 됐는지 얘기 한 번 더 해요.
[2-4. 논論이 필요한 이유
혹자가 묻기를 “경經 가운데 이러한 법이 이미 갖추어져 있는데 어찌하여거듭 설명하는 것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대답하였다. ‘경經’ 중에 비록 이러한 법이 있으나, 중생의 근기와 행실이 똑같지 않아서 이해하는 바에 따라 인연이 서로 달랐다. 이른바 여래께서 세상에 계실 때는, 중생의 근기가 예리하고 설명하는 분(여래)의 몸과 마음의 업이 뛰어나서, 원만한소리가 한 번 펼쳐지매 온갖 중생이 똑같이 이해하여 ‘논論’이 필요 없었다.
問曰 修多羅中具有此法 何須重說 答曰 修多羅中雖有此法 以衆生根行不等受解緣別 所謂如來在世 衆生利根 能說之人色心業勝 圓音一演 異類等解 則不須論.
그러나 여래께서 열반에 드신 뒤에, 어떤 중생은 능히 스스로의 힘으로(경을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힘이 있음) 광대한 경經을 듣고서 이해하는 경우도 있고, 또한 어떤 중생은 스스로의 힘으로 경經을 적게 듣고 많이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어떤 중생은 스스로의 심력心力은 없어서 광대한 논論을 통해서 이해를 하는 경우도 있고, 또한 어떤 중생은 다시 광대한 논문이 많은 것을 번거롭게 여겨서, 마음으로 핵심을 담은 간단한 글에 많은 뜻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즐겨서, 능히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사람(맨 마지막 사람)을 위하여, 이 “기신론”으로 여래의 광대하고 심오한 법法(logos)에 담긴 끝이 없는 의미를 총괄하고 포섭하고자 하였기에, 응당 이러한 논을 설하는 것이다.
若如來滅後 或有衆生能以自力 廣聞而取解者 或有衆生亦以自力 小聞而多解者 或有衆生無自心力 因於廣論而得解者 亦有衆生復以廣論文多爲煩 心樂總持少文而攝多義 能取解者 如是此論爲欲總攝 如來廣大深法無邊義故 應說此論.
2-5. 인연분을 마침
여기까지 ‘인연분’(책을 쓰게 된 인연)을 설명하였다. 다음에는 ‘입의분’(대승의 의미를 확립함)을 설명한다.
已說因緣分 次說立義分]
지금까지는 쓰게 된 원인이고 남들한테 또 설득해야 돼요. “수많은 경이 있는데 그런 논문을 그런데 굳이 또 왜 썼냐?” 고 얘기에 대해서 한 번 더 설명하고 이제 입의분(立義分)으로 들어갑니다. 구체적인 대승의 의미로 들어가요. 그런데 하지만 제가 미리 다 설명해 드렸어요. 요 내용이 구체적으로 설명이 나옵니다. 결국은 한마음에 대한 얘기입니다. 또 예습해서 다음에 오시면요 또 한마음에 대해서 더 깊이 알아보는 시간 갖겠습니다. 예 수고하셨습니다.
01:33:31
[출처] (녹취) [홍익학당] 윤홍식의 대승기신론 강의 3강(01:33:31) (홍익학당) | 작성자 수호천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