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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하는 기독교 그리고 전통
초기 기독교는 로마 당국의 산발적인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굽히려고 하지 않았다. 교회 지도자들은 교인들을 체계적으로 조직해서 위기를 극복하려고 했다. 때문에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지키려고 자진해서 순교의 길을 택했고 복음은 로마제국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그리스도인들의 숫자가 늘어나자 과거에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문제들이 내부에서 제기되기 시작했다. 사도들처럼 예수님과 일차적 경험을 공유한 인물들이 세상을 뜨면서 생겨난 현상이었다.
기독교의 새로운 세대들은 궁금한 게 한둘이 아니었다. 신앙의 대상이 되는 예수님은 누구이고, 이 세상은 근본적으로 선한가 아니면 악한가? 무엇을 신앙의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가? 세계 도처에 흩어져 있는 각 지역의 교회를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것은 교회의 전통인가 아니면 성령인가? 2세기와 3세기 그리스도인들은 외부의 박해를 인내하는 동시에 내부에서는 이와 같은 간단하지 않은 질문을 해결할 수 있는 적절한 해답을 얻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적절하게 균형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교회는 로마제국 안에서 진행되고 있는 변화의 물결을 타지 않을 수 없었다. 기독교 교회는 더 이상 팔레스타인이라는 제국의 변방 지역을 맴돌아야 하는 낯선 종교가 아니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스 문명에 뿌리를 박고 있는 로마 시민들에게 보다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달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가 무엇보다 절실했다. 실천적인 그리스도의 제자직보다 이론적이고 사색적인 교리가 강조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리스어를 구사할 수 있는 변증가들이 그와 같은 흐름을 주도했다.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세계에 대한 기독교 교훈들이 앞다투어 교리의 형태로 개념화되었다. 그 과정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이론과 이단 논쟁이 발생했고, 그로 인해 기독교는 어느 정도 혼란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 얻은 소득 역시 간단하지는 않았다.
변화하는 기독교
1세기의 교회는 장로나 감독의 역할을 굳이 구분하려고 들지 않았다. 장로와 감독은 이름과 관계없이 동일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의 전통적인 방식을 그대로 답습해서 공동체를 꾸려나갔다. 특정 현안을 놓고서 장로들끼리 협의하고 결론을 도출해내는 방식의 이른바 집단 지도체제 형태였다.
바울이 생존해서 활동하던 시기에는 장로나 감독보다 예언자와 교사가 교회를 주도했다. 바울은 무엇보다 교회 안에서 사도나 예언자, 그리고 교사의 역할을 중시했다. 그들 가운데 특히 사도들은 그리스도 예수와 더불어 생활하면서 활동한 원초적 경험을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위임받은 사명을 실천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부활과 죄의 회개, 그리고 세례를 강조하면서 각 지역으로 흩어져서 교회를 설립했다. 그리스도인들은 공공장소보다는 가정집에서 열리는 작은 집회에 참석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신뢰한다고 고백하기만 하면 아무 때나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교회는 제도적 성격이 그리 강하지 않았다.
2세기에 접어들면서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의 조직을 체계적으로 정비하는 데 박차를 가했다. 이미 110년경에 안티오크에서 감독을 지낸 이그나티우스는 나중에 교회에서 구체적으로 실행될 세 가지의 교회 직제들, 즉 감독(bishop), 장로(presbyter) 그리고 집사(deacon)를 새롭게 제안하기도 했었다.
이와 같은 교회의 직제는 2세기 중반에 이르러서 로마교회를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 도시마다 대개 한 명의 감독이나 감독협의회가 나머지 신자들의 신앙과 생활을 지도했다. 교회는 점차 나름의 건물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 무렵부터 새롭게 신자가 된 사람들은 3년간의 교육과정을 거치고 난 뒤에서 비로소 세례를 받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 세례 후보자들은 기독교 교리에 대하여 교육을 받고, 자신의 삶을 통하여 기독교적 확신이 뿌리내렸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했다. 장로들 가운데는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 장로들은 어린이가 직접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할 때까지 세례를 미루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어느 쪽도 그것을 본격적으로 문제 삼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이처럼 전폭적으로 교회의 틀을 손질하게 된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먼저, 바울처럼 강력한 지도력을 소유한 기독교 지도자들의 부재가 원인이 되었다. 앞서 소개했듯이 갑작스레 밀어닥친 간헐적인 박해가 초래했던 인적 자원의 부재라는 재앙은 초기 기독교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리더십을 확보하도록 부추겼다. 교회에 변화를 초래한 또 다른 원인은 예수님에 관한 정통적 진리를 보존하려는 강렬한 욕구였다. 그리스도인들은 2세기 중반 무렵에 이르기까지 예수님과 관련된 여러 가지 문서를 보유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이외에도 도마복음서, 빌립복음서, 진리복음서를 비롯해서 사도들이 기록한 것으로 알려진 서신들과 기타 온갖 비서(祕書), 신화, 시 등 아주 다양했다.
하지만 2세기에 들어서면서 기독교는 중대한 위협에 직면했다. 기독교의 가르침을 왜곡한 영지주의, 즉 비밀스러운 지식 운동이 교회를 분열 직전으로 몰아갔다. 영지주의자들은 기독교의 다양한 문서들을 나름대로 평가해서 필요한 것들만 취사선택했다. 자칫하다가는 기독교의 전통이 붕괴할 수 있는 상황에서 교회는 기존의 느슨한 조직을 손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내부의 위협, 영지주의
기독교의 초기 역사상 가장 심각한 내부적 위협으로 간주되는 바 있는 영지주의는 다양한 경향들이 혼합된 일종의 종교 운동이었고, 현재까지도 영지주의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 견해와 부정적 견해로 나누어지고 있다. 영지주의의 추종자들에게 있어서 물질적인 것은 예외 없이 타락하고 악한 것에 불과했다. 그들에게는 오로지 영적인 것만이 선하고 순수할 따름이었다.
영지주의의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옮기면 영적인 지식, 즉 세상의 악의 기원을 알게 됨으로써 구원을 완성하게 만드는 비밀스러운 지식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선택받은 소수의 특별한 사람들만이 그노시스(gnosis)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었다. 영지주의자들은 이 지식이 평범한 인간들은 상상할 수 없는 보다 높은 영역으로부터 자신들에게 직접 전달된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들은 비밀스럽고 신비한 지식을 소유하지 못한 다른 사람들을 진리의 그림자로 규정하면서 노골적으로 경멸하기도 했다.
12개 정도의 분파들로 구성된 영지주의는 물질을 부정해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1:14)와 같은 성서의 내용 역시 배격할 수밖에 없었다. 영지주의자들은 그리스도가 육신이 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면 영지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는 누구일까? 그들은 예수님과 그리스도를 따로 분리했다. 이것만 놓고 보자면,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를 구분한 19세기와 20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주장은 그리 새로울 게 없다. 영지주의자들은 그리스도를 예수라는 이름의 평범한 젊은이를 잠시 사로잡은 어떤 영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사도들의 교훈은 달랐다.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의 인성, 즉 사람이 지닌 성품을 거듭해서 확인한 바 있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육신을 주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라고 명령했다. 영지주의자들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인성을 그토록 강조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구원이란 물질세계로부터 영적인 것으로의 후퇴가 아니었다. 오히려 영적 세계와 물질적 세계를 한꺼번에 통일하고 회복할 수 있는 전폭적 갱신이 기독교가 믿고 가르치는 구원의 핵심이었다.
영지주의자들이 활개를 치게 된 데는 몇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대표적인 것들을 꼽자면, 엘리트주의와 공포 그리고 마르키온의 영향이었다. 영지주의의 핵심 교리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선과 악이라는 이원론적 세계관에 관한 믿음이고, 또 다른 하나는 구전이나 비밀문서들이 전해주는 은밀한 진리에 관한 믿음이었다. 영지주의자들은 선택받은 일부에게는 하늘의 영적 요소가 육체에 갇혀 있는데, 이 영의 씨앗을 소유한 소수의 사람들이 쓸모없는 몸에서 해방되면 영의 세계로 다시 올라갈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런 가르침에 매료된 엘리트들은 독특하게 신비로움을 자극하는 영지주의에 매력을 느꼈다.
영지주의가 득세하도록 영향을 미친 또 다른 요인은 자연의 재앙이었다. 1세기 후반부터 로마제국은 여러 가지 재앙에 시달렸다. 63년경부터 갑자기 지진이 심해지더니 79년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해서 항구도시이자 로마인들의 휴양지로 유명한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이 순식간에 폐허가 되었다. 그리고 80년대 중반에는 로마제국 전체에 흑사병이 창궐해서 하루에만 10만 명의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이런 절박하고 암울한 상황 덕분에 세상을 외면한 채 영적 세계를 강조한 영지주의는 별다른 노력 없이 추종자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영지주의를 토대로 신학을 구축했지만, 나중에 테르툴리아누스에게 이단으로 낙인찍힌 마르키온의 영향은 나머지 요인들보다 더 자세한 설명이 요구될 정도로 결정적이었다.
마르키온, 영지주의의 사도
영지주의가 득세하도록 적잖게 기여한 사람이 있었다. 목회자의 아들이지만 행동은 가풍과 전혀 무관했다. 나중에 교회에 분열이라는 충격을 안겨주게 될 그 사람의 이름은 마르키온(Marcion of Sinope, 110?~160)이었다. 마르키온의 아버지는 흑해 남부 지역 폰투스(Pontus) 교회의 감독이었다. 마르키온은 처음부터 아버지의 발걸음을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에 선박업자가 되었다. 마르키온은 세계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직접 보고 겪은 일 덕분에 세상에 대해 상당한 염증을 느꼈다. 하지만 염세적인 세계관과 사생활이 서로 무관하다는 게 그의 한계였다. 영지주의의 금욕적 신앙을 추종하는 마르키온은 마땅히 극복해야 할 육체적 욕구에 발목을 잡혔다.
140년경 마르키온은 욕망에 굴복하여 중대한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으나 잘못을 회개하지 않자 교회는 곧장 그를 파문해버렸다. 그래서 마르키온은 로마로 피신했는데, 그곳에서는 그의 범죄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로마교회는 부유한 선박업자를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현재의 화폐가치로 환산해도 2억이 훌쩍 넘는 거액을 바치고서 얻어낸 환심이었다. 그는 로마에서 영지주의 교사 케르도(Cerdo)의 지도를 받으며 자신의 생각을 다듬었다.
마르키온은 다른 영지주의 분파들과 달리 성서에서 영적인 비밀을 찾아내려고 하지 않았다. 그의 주장은 대부분 영지주의의 세계관으로부터 빌려온 것들이었다. 마르키온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는 물질세계를 창조하고 분노를 발하는 구약성서의 하나님과는 관계가 없었다. 사랑이 넘치는 그리스도의 아버지는 결코 누구의 육체를 부활시키거나 아니면 신체적을 처벌을 가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마르키온은 예수 그리스도를 한낱 영으로까지 축소시켰다. 마르키온은 그리스도가 단지 인간으로 보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나중에 가서 가현설, 즉 도케티즘(Docetism)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마르키온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 세상이 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세속적 욕구는 무엇이든지 철저하게 부정했다. 마르키온의 추종자들은 성찬식을 가질 때도 포도주 대신에 물을 사용했다. 포도주를 마시면 육체적인 쾌락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란 게 그 이유였다. 그들은 육체적인 관계 역시 철저하게 금했다. 부부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마르키온은 추종자들을 가르치다가 한 가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도들이 남긴 기존의 문서들과 자신의 가르침이 상충하고 있었다. 마르키온은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는 문서들만 따로 편집해서 모순을 해결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누가복음과 바울의 10개 서신들을 엮어서 하나의 정경을 만들었다. 마르키온은 누가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탄생 일화를 삭제해버렸다. 바울 서신들 가운데 구약성서와 관련된 구절들은 모두 제거되었다. 구약의 하나님과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남김없이 배제되었다. 마르키온은 새로운 신약성서를 아주 흡족해 했지만, 로마교회의 생각은 달랐다.
144년 로마교회는 마르키온이 헌금한 돈을 모두 되돌려주었다. 폴리카르푸스와 리옹의 이레나이우스 같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마르키온의 고집스런 그릇된 가르침을 바로잡아 보려고 노력했다. 기독교의 용어를 차용하고 심지어 성서를 오용해서 나름의 신앙체계를 구축한 마르키온의 사상은 교회에 상당한 위협이 되었다. 사도들로부터 감독에게 전수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정통적 신앙 앞에서도 마르키온은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마르키온은 또다시 교회를 떠나야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는 재력을 활용해서 수많은 추종자를 이끌고 소아시아로 갔고, 로마교회는 재정적으로 적잖은 타격을 입었다.
오리게네스, 영지주의의 흔적
마침내 마르키온을 비롯한 영지주의자들은 2세기가 지나기 전에 교회 밖으로 완전히 밀려났다. 하지만 영지주의는 기독교의 내부에 쉽게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북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 출신 오리게네스(Origenes)였다. 알렉산드리아는 50만 권 이상의 장서를 갖춘 도서관을 보유하고 있는 고대 세계 학문의 중심지였다. 오리게네스의 아버지 레오니다스(Leonidas)는 202년에 밀어닥친 박해와 맞서 자신의 신앙을 지키려다가 목숨을 잃었다.
오리게네스 역시 아버지를 뒤따라 순교할 생각이었지만, 어머니가 옷을 숨겨놓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거리에 벌거벗고 나설 것인지를 놓고서 고민해야 했던 당시 열여섯 살 소년은 어머니의 순간적인 기지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당시 교회로서는 이보다 다행스런 일이 없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오리게네스의 교육적 재능에 주목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두 해가 지난 뒤에 소년은 열여덟 살이라는 약관의 나이에 교회에서 운영하는 알렉산드리아의 교리문답학교를 책임지게 되었다.
3세기를 대표하는 여러 탁월한 교부들 가운데서도 진정한 천재로 인정받는 오리게네스는 그리스 사상을 두루 섭렵한 학자이자 놀라울 정도의 독창적 능력을 소유한 변증가였다. 오리게네스는 특히 다작을 한 것으로 유명했다. 나중에 라틴어 성서, 불가타역을 번역한 바 있는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혹은 제롬)는 그가 2천 권의 책을 집필했다고 주장하면서 “우리는 오리게네스가 집필한 것보다 더 많은 책을 읽기란 불가능하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오리게네스는 플라톤 철학에 대한 자신의 지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영지주의와 맞섰다. 그러면서도 그는 경우에 따라서는 영지주의와 비슷한 견해를 피력하기도 했었다. 체계적인 신학이 존재하지 않던 시대의 어쩔 수 없는 한계였다. 오리게네스에 따르면 하나님의 창조는 원래 영적이었다.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 이후에야 비로소 물질세계를 창조했다. 결국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사탄을 비롯해서)을 죄 없고, 영적인 상태로 회복시킬 것이라고 오리게네스는 자신의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오리게네스 역시 마르키온과 마찬가지로 육체적인 정욕을 실제 삶 속에서 철저히 배격하려고 노력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보다 더욱 심한 행동까지 서슴지 않은 정도였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마태복음 19장 12절의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라는 말씀을 문자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믿었던 오리게네스는 스스로 자신의 남성을 거세해버렸다. 문자적 해석이라는 함정에 빠진 결과였다. 지나치게 엄격한 금욕생활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옷은 한 벌만 소유했고, 금식할 때는 물만 마셨으며, 사람들을 만나러 돌아다닐 때는 절대로 신발을 신는 법이 없었다. 맨땅에서 잠을 청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영지주의자들처럼 오리게네스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성서 안에서 신비한 메시지를 발견하도록 격려하기도 했었다. 성서의 모든 구절이 문자적이고 도덕적이며 영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일부 사람들만이 비밀스런 지식을 소유할 수 있다는 영지주의자들의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성서를 해석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그들의 영향이 여전했다. 상당수의 교사들이 오리게네스의 영향을 받아서 성서의 본문에 감추어진 영적인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고 계속해서 가르쳤다. 본디 1세기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결혼이라는 의식을 통한 남녀 간의 결합에 이중적인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선택의 기회를 제공했다. 바울은 욕망에 불타는 상태보다는 결혼이 낫다고 가르쳤다.
오리게네스 역시 그와 비슷한 주장을 피력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내와 결혼하도록 허락하셨다. 왜냐하면 모든 이가 절대적으로 순결한 최상의 조건에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3세기 중반에 이르게 되자 그리스도인들은 결혼을 통한 신체적인 즐거움을 더 이상 거론하지 않았다. 오로지 자녀 출산을 위한 결혼, 즉 정숙한 결혼이나 혹은 평생 순결을 유지하는 게 그리스도인의 이상적인 덕목으로 강조되었다. 이 모두 영지주의가 남긴 흔적이었다.
새로운 전통의 수립
기독교 신앙에 상당한 위협이 되었던 영지주의자들은 역설적으로 2세기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들의 정체성을 근본부터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믿고 따라야 할 신앙의 내용은 무엇일까?”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기준은 무엇일까?” “진정한 사도의 가르침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이 모든 문제들은 2세기 당시 그리스도인들 혹은 교회의 정체성과 직접 관계가 있었다.
첫 번째 문제는 전체 교회가 인정하고 예배에 활용할 수 있는 신약성서를 히브리어 성서, 즉 구약성서에 기초해서 정경으로 확립하는 것과 관계가 있었다. 두 번째 문제는 신앙 또는 진리의 규범 원칙을 결정해서 정통적 신앙의 토대를 확보하는 것이 올바른 해답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문제는 사도를 대신할 수 있는 존재로서 감독직을 비롯한 교회의 핵심이 되는 직제를 수립하는 것으로까지 확대되었다.
<다음 시간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