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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교회 교리
목 차
1. 교리 / 1
2. 성경 / 3
(1)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말씀/3
(2) 계시/4
(3)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비교/5
3. 하나님 나라 /11
(1) 창세전의 비밀/11
(2) 에덴동산의 의미/14
(3) 천국과 하나님 나라/17
4. 하나님 /21
(1) 유일신/21
(2) 하나님의 이름/26
(3) 하나님의 계시 /29
5. 예수 그리스도 /30
(1) 그리스도의 계시/30
(2) 성령으로 잉태/33
(3) 인자/34
(4) 대속의 죽음/35
(5) 부활/37
(6) 재림/39
6. 성령 /41
(1) 하나님의 영/41
(2) 하나님의 능력/44
7. 인간 /46
(1) 첫사람 아담/46
(2) 하나님의 형상/47
(3) 죄의 몸/50
(4) 원죄와 세상죄/51
8. 부르심과 택하심 /53
(1) 부르심/53
(2) 택하심/56
9. 구원과 예배 /59
(1) 탕자의 비유/59
(2) 믿음을 받을만한 마음의 문을 여는 자/61
(3) 회개와 십자가의 죽음/64
(4) 부활과 영생/66
(5) 영적성장과 영적전쟁/68
(6) 예배와 기도/72
(7) 율법과 율법주의/77
10. 교회 공동체 /80
(1) 성전과 교회 공동체/80
(2) 안식일과 주일/82
11. 천사 /85
(1) 하나님을 보좌하는 영/85
(2) 사탄과 그의 추종자들/86
(3)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은 자들/89
Ⅰ. 교리
기독교의 교리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해석한 바울 등의 사도들이 주장하였으며, 기독교가 로마 가톨릭교회로서 몇 차례의 공의회를 거쳐 신조라고 불리는 신앙고백으로 정리되었다.
이후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됨에 따라 이러한 도그마들은 더욱 공고해졌다. 11세기 동서 교회의 분열 이후에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의 교의가 다른 길을 걷게 되었고, 종교개혁 이후에는 개신교라고 분류되는 그룹에서 독자적인 교의들이 생겨났으며, 개신교의 신념은 성공회의 성공회 39개조 신앙신조, 장로교회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등으로 문서화되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인 성령의 감동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성경의 원본을 통해서 정확하게 번역되고, 그 의미를 잘 전달하게 되는데, 그 의미는 대체적으로 다른 성경 귀절의 인용된 내용을 통해서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기존의 교리는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인간의 의지를 첨가하는 것이 많고, 그것을 고착이라도 하듯이 규정화하는 것이다. 교리는 성경의 내용을 체계화해서 성경을 읽는 자가 이해하기 쉽게 해석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성경 안에 없는 내용도 도입하여 이론적 체계를 세우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으로서 소요리문답과 대요리문답이고 신학대학교에서 체계화한 것이 조직신학이다.
성경은 학문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이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차이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만든 것이 교리이지만, 성경에 없는 내용을 인간의 기준으로 교리에 첨가시켜 만드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따라서 이런 내용을 중심으로 신학대학교에서 배우고, 목사가 되고 신도들에게 가르침으로, 그것이 하나님의 지침이 되고 규정이 되는 것이다.
또한 교리는 이론적으로 체계화되어 학문적으로 배우기 쉽게 만들었다고 말을 하지만, 일반인들은 이해하기 쉽지 않으며, 일반인들이 교리를 논하는 자체를 꺼리게 된다. 신도들이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에게 교리를 설명한다면, 정확하게 말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말하는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말을 하는 것이다. 교리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의문이 들 때가 많이 있다.
마치 율법이 율법주의로 변하는 과정과 유사한 점이 있는 것이다. 누군가 정해진 교리를 벗어나 말하면 교단은 그를 이단화시킨다. 교리에 맞지 않게 말하였으므로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교리가 성경 말씀 위에 있는 듯한 것이다. 거의 대부분 교리가 이렇게 되어 있으므로 교리를 성경 말씀을 근거로 바로 잡는 것이 필요할 것이며, 모든 기독교 신자들이 쉽게 배우고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 교회의 교리는 성경의 내용을 성경에 따른 해석이며, 새로운 규정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따라서 성경을 근거로 하나님 나라,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 인간, 죄와 구원, 교회 공동체, 천사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2. 성경
(1)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말씀
디모데후서 3장 16-17절『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데오프뉴스토스)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서신을 통하여 그가 가진 성경관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성경을 바라보는 관점은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는 것이며, 모든 성경구절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다.
하나님의 감동이라는 단어(데오프뉴스토스)의 의미는 ‘하나님의 입김이 주어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영에 의해 감동된 자가 그 깨달음을 통해 그들의 언어나 사실들을 담아 기록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생각과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담은 책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교회 지도자가 신도들에게 가르치는 일은 오직 성경말씀에 근거해야만 하는 것이다. 교회 지도자가 자기의 생각을 넣어서 말을 하면 안된다. 오직 성령으로 작성된 것이 성경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는 것은 단지 자신의 특출난 성정 때문이 아님을 밝힌다. 그가 생의 수많은 흔들림 속에서도 세상을 역행하며 경건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성경 때문이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온전케 하는 힘이며, 선한 일을 하게 하는 능력이다. 그런데, 오늘날 신학자들이 교리를 만들어서 성경의 말씀 위에 인간의 생각을 주입하여 말을 하므로서 진리가 왜곡되는 실정이다. 따라서 올바른 성경의 의미를 해석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한 시점에 있는 것이다.
(2) 계시
마태복음 13장 11절에서『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비밀로 감추어진 것을 알려주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만 계시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너희는 제자들이다. 예수님 당시에는 오직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만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된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의 비밀을 말해줘도 믿으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들을 통해서, 알려주고, 나아가 믿는 성도들을 통해서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다.
에베소서 1장 4-5절『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비밀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정하는 것이 창세 전의 계획이 되는 것이다.
에베소서 3장 9절에서『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비밀의 경륜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로마서 16장 25-27절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그러면 창세 전에 하나님이 왜 그리스도를 예정하셨는가에 대해서는 창세 전에 하나님 나라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것이다. 이 부분은 다음 장에서 별도로 설명한다.
(3)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비교
(희생제사와 십자가)
히브리서 9장 25-26절『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구약의 희생제사는 죄를 지을 때마다 동물을 죽여서 그 피로 제사를 드린다. 제사장이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구약의 희생제사는 죄인의 죄를 용서받기 위한 제사였다. 신약에서의 십자가는 예수님이 회개하는 모든 죄인들을 위한 단 한번의 희생제물이 되신 것이다. 그래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세상죄를 가지고 가셨다. 예수님의 보혈은 구약의 죄를 사하기 위해 흘리는 것이 아니라, 사탄으로부터 회개하는 자를 사기 위한 속량의 피흘림이었다. 죄인을 산 후에 하나님이 죄를 사해주시는 것이다. 먼저 주인이 사탄으로부터 예수로 바꾸지 않으면 죄가 사해지지 않는 것이다.
(율법과 성령의 법)
요한복음 3장 14-16절『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과 니고데모라는 사람과의 대화 중 마지막 부분이다. 니고데모는 이 말씀을 받지 못했는데, 이 시대 사람들은 쉽게 받았다고 말하는지? 3장 2절에서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하나님께로 부터 오신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니고데모는 말했다. 그런데 3장 3절에서『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진실로(아멘) 진실로(이멘)를 두번이나 말하면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거듭나는 것은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다. 3장 4절에서『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라고 응답했는데, 니고데모는 몸이 어떻게 다시 태어나는 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수많은 교회 사람들은 궁금하지도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몸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로 여기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한다고 말씀하셨다. 물은 율법을 나태내며, 세례의식에서 물은 죽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로마서 6장 4절에서『세례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장사지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죄에 대해서 죽은 자는 율법에 대해서 죽은 자가 된다. 그래서 예수와 함께 죽은 자는 율법이 아니라 성령의 법으로 적용되는 것이다.
로마서 6장 8-9절에서『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육적 마음이 죽은 것이 아니라 부모로부터 받은 몸이 죽으셨다. 그와 함께 죽은 자는 마음이 죽은 것이 아니라 몸이 죽은 것을 믿어야만 한다. 미래 육이 죽을 때 그렇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현재에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 44절에서『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율법이 아니라 성령의 법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택함을 입지 못한다. 택함을 입은 자가 예수를 영접한다. 교회 사람들은 예수를 영접하는 자가 택함을 입는다고 말한다. 잘못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 1장 12-13절에서『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영접하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옛언약과 새언약)
신명기 29장 13절『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대로 또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대로 오늘 너를 세워 자기 백성을 삼으시고 그는 친히 네 하나님이 되시려 함이니라』
호렙산에서 세운 언약은 약속이지만, 모압 땅에서 세운 언약의 말씀은 맹세라는 것이다. 29장 14-15절에서『내가 이 언약과 맹세를 너희에게만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우리와 함께 여기 서 있는 자와 오늘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한 자에게까지이니』모든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한다는 말씀이다.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주신 것은 언약이지만 가나안에 들어가는 자에게는 맹세라는 말이다.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자가 하나님께서 하신 맹세에 해당한다.
로마서 6장 4절에서『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성찬에서 잔을 들기 전에 떡을 먹는 이유다. 떡을 먹고 포도주의 잔을 마시는 행위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된 것을 기억하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연합된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포도주의 잔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상징하고, 떡은 예수님의 부활의 몸을 상징한다. 떡을 먹어야 새언약에 참여할 수 있다.
(제사와 예배)
예배는 구약과 신약은 의미가 다르다. 구약에서의 예배는 제물을 드려서 죄를 사함을 받는 것, 곡물을 드려서 감사하는 것, 찬양하는 것을 에배로 생각한다. 그러나 신약에서의 예배는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린다. 영은 성령을 나타내며, 진리는 예수님을 의미한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와 함께 못박힐 때 성령의 능력으로 새생명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배는 예수와 함께 죽고 부활한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성찬도 예배의 연장 선상에 있는 것이다. 잔과 떡을 떼며,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을 다시 확인하는 것이다.
(할례와 세례)
창세기 17장 10절『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남성의 표피를 베는 의식인 할례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영원한 언약을 체결하면서 그 증표로 행하도록 한 것이다.. 할례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고대 이집트에서도 행하였다. 할례는 육체의 죽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할례를 받았다고 하면서도 율법은 지키지 않는 유대인들을 향해『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로마서 2:17)고 비판하였다.
신명기 10장 16절에서『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구약성경은 이미 육체의 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할례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신명기 10장 16절에서『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약시대 유대인들은 육신의 할례만을 강조하는 율법주의에 사로잡혀 있었다.
초대교회 이래 유대인의 할례를 기독교에서는 세례로 대신하게 되었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 2:11-12).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육신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가 중요한 것처럼 기독교인들도 형식적인 세례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삶을 사는 세례의 진정한 의미를 회복해야 한다. 거듭난 삶은 마음의 변화가 아니라 영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야 함을 말한다. 이전의 것이 죽고, 새로운 몸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래서 구약의 할례나 신약의 세례는 같은 의미를 갖는다.
(물과 포도주)
요한복음 2장 9-10절에서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예수님이 가나라는 곳에서 어느 결혼식에 초대되어 갔다. 그런데 포도주가 바닥이 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돌항아리 여섯에 물을 채우도록 해서 물이 포도주로 변하게 했다는 이야기다.
돌항아리는 율법을 상징한다. 물을 채운다는 것은 율법을 완성시키는 의미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율법이 완성됨을 예고한다. 이 돌항아리에 채운 물은 손님들이 손을 씻는 용도였다. 그래서 물은 죄를 씻는 것을 나타낸다.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가 되게 하셨다. 포도주는 피를 상징한다. 예수님이 훌리는 피는 죄를 씻는 용도가 아니라 죄인을 사는 속량의 의미를 갖는다. 하나님이 회개하는 죄인을 사탄으로부터 예수의 피값을 지불하고 사는 것이다. 그래서 죄를 씻어주신다. 이게 보혈의 의미다.
3. 하나님 나라
(1) 창세전의 비밀
에베소서 1장 4-5절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왜 창세 전에 그리스도를 택하셨는가에 대한 질문을 한다면, 대부분 교회에서는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므로, 천지창조 후 아담과 하와가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고, 죄에 빠져, 악해져서 종말에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멸하실 수 밖에 없는 상태가 오게되니까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아시고, 택한 자들만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기로 창세 전에 예정하셨다고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를 예정하신 것을 잘 깨닫기 위해서는 요한복음 6장 63절에서『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의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한다. 예수님은 죽어있는 영을 살리기 위해서 오셨다. 세상 사람들은 기준이 육체인데, 예수님은『육체는 무익하다』고 했다. 그 전제는 영이 다 죽어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영이 죽어있으므로, 영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관심은 육체로 비롯된『나』라는 존재이다. 그래서 내가 부자가 되어야 하고 잘 먹고 잘사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다.
육체 속의 영이 언제 죽었는가? 대부분 교회는 에덴동산에서『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하는 열매를 먹는 순간 죽었다』고 말을 할 것이다. 그런데,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기 전과 먹은 후의 영의 상태를 비교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열매를 먹은 후에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후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서 미리 그리스도를 준비하셔야만 했는가? 그것은 그냥 대부분 교회에서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도는 하나님의 뜻을 잘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세우신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 나라에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유다서 1장 6절과 베드로후서 2장 4절을 근거로, 하나님 나라에서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아서 영들이 땅에 갇혔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예정하셔서 땅에 갇혀있는 범죄한 영들을 구하시려고 계획하셨으며,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마치 탕자의 비유와 같은 개념인 것이다. 탕자는 아버지를 떠났지만, 결국 회개하여 거지가 되어 돌아온다. 하나님을 떠난 영이 그런 상태라는 것이다. 회개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연결된다.
범죄한 영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은 물질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며,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이유는 바로 하나님을 떠난 범죄한 천사를 가두기 위한 것이고, 그 범죄한 천사의 영이 흙에 갇혀 사람이 되었으며, 사람들이 하나님께 회개하여 다시 하나님 나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창세 전에 그리스도를 계획하시고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구원자라는 의미가 된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재림, 천년왕국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세상에 온 영들을 구원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창세 전에 택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회개하는 죄인을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도록 하는 것이다.
(2) 에덴동산의 의미
창세기 2장 8-9절『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동방의 에덴은 세상 가운데 예루살렘 성전과 같은 어떤 성스러운 구역을 정해놓고 에덴이라고 했는가 아니면,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를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는가 풀어야 할 난제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 가운데서 창조하셨다. 그리고 그를 에덴에 들어가도록 하고 살아가도록 하신 것이다. 그런데, 그 에덴에서 첫사람이 남자와 여자로 분화된다. 공교롭게도 첫사람이라는 히브리어는 아다마이고, 남자의 이름이 아담이다. 그래서 신도들은 혼동을 한다. 첫사람과 남자의 아담을 같은 존재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첫사람과 남자 아담은 다른 존재이다.
에덴에서 남자(아담)와 여자(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겨, 선악과를 먹으므로, 그들은 세상으로 쫒겨나온 것이다. 첫사람이 창조된 그 곳으로 돌아왔다. 창세기 3장 23절『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만일 에덴이 세상 속에서 성전과 같은 그런 곳이라면,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예배하던 그들이 죄를 지으므로, 하나님이 성전 밖으로 쫒아버린 것이 된다. 그게 무슨 큰 비밀이라는 것인가? 그래서 세상 창조 전에 미리 그리스도를 예정하셔서, 죄를 지은 인간들을 구하기 위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계획을 하셨는가 말이다.
창세 전의 비밀은 바로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천사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범죄한 천사들이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고,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다. 범죄한 천사들은 하와를 상징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어두운 구덩이(지옥)에 가두었는데, 천사의 영을 흙과 결합시며 만들어진 것이 사람이다.
유다서 1장 6절『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베드로후서 2장 4절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성경은 비유와 상징적인 표현이 많다. 창세기 2장 24절에서『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성경은 말한다. 남자는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부모는 하나님이시며, 그의 아내는 범죄하여 하나님을 떠난 영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 이제 그리스도를 통해서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큰 비밀이라고 말한다. 에베소서 5장 31-32절에서『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신도들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먹으므로 하나님께 죄를 지었는데, 이것을 원죄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래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원죄를 물려받는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신도들은 죄와 죄의 몸을 잘 알아야 한다. 죄는 계명을 어기는 것이 근본적 죄가 아니라,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탐욕의 마음이 죄라는 것이다. 이것은 계명을 어기기 전에 이미 하와가 품었던 마음이고, 그것을 실행하므로 계명을 어긴 것이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마음을 가진 하와는 하나님 나라에서 악한 천사를 상징한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악한 천사의 영이 육체에 자기 죄를 가지고 들어온 존재라는 것이다.
죄의 몸은 첫사람으로부터 시작된다. 골로새서 1장 15절에서『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그는 그리스도이시다. 첫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이 그리스도라는 말이다. 첫사람은 죄의 몸을 다음 세대에 전해주는 역할을 했고, 마지막 사람 그리스도는 죄의 몸에 대해서 죽어야 했다. 그래서 그가 십자가에서 죽으시므로 죄의 몸도 죽은 것이다. 죄의 몸은 죄를 담는 그릇과 같은 것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이 죄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로마서 6장 6-7절『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죄의 몸이 죽었으므로, 죄에서 벗어난다.
(3) 천국과 하나님 나라
마태복음 3장 2절에서『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성경에서는 천국이라는 용어와 하나님 나라가 등장한다. 마태복음 5장 3절에서도『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말했다. 천국이 회개하는 자에게 주어진다는 말이다.
헬라어를 보면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ἡ βασιλεία τῶν οὐρανῶν)』이다. 헤 바실레이아는 왕국이고, 톤 우라논은 문법적으로 관사가 있는 복수 명사로서 성도들의 심령 속으로 들어오는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라고 번역된 것은 사도행전 19장 8절에서『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라고 되어있다. 헬라어를 보면 『테스 바실레이아 투 데우(τῆς βασιλείας τοῦ θεοῦ)』로 되어 있다.
성부 하나님이 다스리는 하나님 왕국이라는 의미다. 보통 교회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인 것이다. 투 데우는 관사(투τοῦ)가 있는 것으로 성부를 의미한다. 관사가 없을 때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이렇게 두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아야만 하는 것이다. 천국이라고 번역된 톤 우라논은 성도의 심령에 새성전이 세워지고, 그 성전에 임하시는 호 로고스가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인 것이다. 바로 성도의 심령 속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것이다. 성도의 심령 속에서 호 로고스가 바로 하나님 나라이며, 곧 호 로고스가 성령의 능력으로 다스리는 나라인 것이다.
누가복음 17장 20-21절에서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헤 바실레이아 투 데우)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엔토스 ἐντὸς) 있느니라』
엔토스는 영어로 within(~가운데)에 해당된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들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있다고 하셨다. 바로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나라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는데, 그들은 영의 눈이 닫혀있으므로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나라(헤 바실레이아 투 데우)가 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성도로서, 천국(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이 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성도의 심령 속에 새성전이 세워지고 새성전에 그리스도가 재림해 들어오셔서 임재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성부(첫째 하늘:헤 바실레이아 투 데우)와 그리스도(둘째 하늘:하나님의 우편), 성도(셋째 하늘: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가 성령으로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첫째하늘은 성부가 보좌로 계신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성부 하나님이 영으로 임재하는 하나님 나라이다. 아무도 본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알 수 있다. 디모데전서 6장 16절에서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둘째 하늘은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 영의 몸을 입고 임재하시는 아들의 나라이다. 골로새서 1장 12-13절에서『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셋째하늘은 새하늘과 새땅이라고 하기도 하고, 천년왕국(천국)이라고도 한다. 사도바울이 고린도후서 12장 2절에서 셋째하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셋째하늘의 존재들(성도)은 영적으로 영생을 하며, 신령한 몸을 입고 있다.
고린도전서 15장 44절에서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신령한 몸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소마 프뉴마티콘(영의 몸)이다. 그들은 둘째하늘의 영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차별이 있는 신령한 영의 몸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셋째하늘이 바로 잃어버린 에덴이며, 이 땅에서 회복해야 할 하나님 나라(톤 우라논)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이지만 셋으로 설명한다. 첫째하늘과 둘째하늘과 셋째하늘은 성령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운행되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천사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가 세가지의 형태로 인간들의 눈에 보이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감옥(지옥)에 갇혀있는 죄인이 된다. 그렇게 살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예수가 자신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믿고, 그 자신도 예수와 연합하여 죽은 자임을 고백할 때, 육적 자아는 죽고, 영적 부활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죽었던 영이 살아나서 영의 몸을 입음으로 성도가 하나님 나라(천국)이 된다.
하나님 나라는 이땅에서 살아있는 동안에 성도가 누리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현재적 부활생명을 가진 자만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것이다.
4. 하나님
(1) 유일신
신명기 6장 4-5절『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하나님은 유일신이시며, 한 분이시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신을 찾고 숭배한다. 기적이 일어나고,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는 어떤 행동을 하는 자가 나타나면 신으로 추대하려고 하는 모양이다. 심지어는 대자연의 장엄함에 두려움을 느껴, 바다나 산이나, 나무나 돌을 신적인 대상으로 삼기도 한다.
예수님에 대해서,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행하시는 표적과 수많은 기적을 보고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이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도 있었고, 수많은 유대인들은 그를 신성모독죄로 여기는 자들도 있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 승천 하신 후에 제자들이 그 권능을 받고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이적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제자들을 신처럼 떠 받들려고 한 것이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권능을 받아서 이적과 기적을 베푸셨다. 예수님은 자의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성부께서 지시하는 것을 행한다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6장 38절『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성부 하나님의 뜻은 요한복음 6장 40절에서『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오늘날 기적을 베푸는 어떤 사람이 나타나면, 사람들은 그에게 신적인 모습을 바라보려고 한다. 어떤 사람이라도 기적을 베푼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행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뒤에 있는 신적인 존재가 하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육신을 가진 존재는 신적인 존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바울과 바나바도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이적을 보여주었는데,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했다.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신적인 존재로 숭배하려고 한 것이다.
사도행전 14장 15절『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존타)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사람들이 신을 찾는 마음은 자기에게 유익이 있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다. 신을 통해서 세상의 복을 얻고,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신을 찾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죄 가운데서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떠나 헛된 일을 하는 자들이 바로 죄인이라는 것이다. 헛된 일은 우상숭배이며, 우상은 바로 자기 자신인 육적 자아인 것이다. 육적 자아가 바로 탐욕이며, 우상인 것이다. 사람들은 육적 자아가 원하는 대로 스스로 우상이 되거나, 어떤 대상을 통해서 자기 만족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헛된 망상을 바리고, 유일신인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유일신인데,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존재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존재는 분명이 있지만, 알 수 없다. 그런데, 오늘날 신도들은 살아계신 하나님 이라고 말을 한다. 마치 죽지 않고 살아있는 사람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고 말을 한다. 모두가 자기 중심의 생각으로 말을 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출애굽 후에 모세가 시내산에서 계명을 받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40여일이 지나도록 내려오지 않자,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이라고 숭배한 사실이 있었다.
인간은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분이시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분이 성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교회 성도들은 믿고 아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엑서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한 것을 믿을 때,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도 된다는 사실을 믿는다. 부활생명이 바로 영생이며, 부활생명을 가진 성도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유일신에 대한 신앙은 오직 믿음인 것이다. 믿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믿음 만이 유일신으로 인도하신다.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세상 사람들에게는 신을 믿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그들의 언어로 신을 찾는 것이다. 한글 성경에는 하나님(하느님), 영어권에서는 갓, 중국은 천제, 이슬람은 알라, 유대인들은 엘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부르는 이름은 일반 명사이다. 모두가 자기가 믿는 신이 진짜라고 생각한다. 심지어는 기독교 내에서도 신도들이 각자 믿는 신이 진짜인지 아닌지 모호하다. 이렇게 사람들이 생각하는 신은 제 각각이라고 볼 수 있다. 심지어는 신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한다든지 하는 주관적인 표현은 더욱 자기가 믿는 신을 자기 스스로 구체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수많은 신들 중에 참 신인 유일신은 단 한분이시다. 한분 외에는 모두 가짜라는 말이다. 그 한분은 자신이 모세라는 사람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밝혔다. 스스로 있는 자는 히브리어로 “하야(에흐예) 아세르 하야(에흐예)”이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은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유일신을 아도나이라고 불렀다. 이스라엘 패망 후, 이집트의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의 명으로 이스라엘의 열두지파에서 지파별로 6명씩 차출하여 알렉산드리아에서 72일간 헬라어로 번역한 성경을 70인역이라고 하는데, 아도나이라고 불렀던 유일신의 이름을 YHWH로 표기하고 헬라어인 큐리어스(Kurius)라고 불렀다. 라틴어로는 도미너스(Dominus)라고 한다.
그러다가 알렉산드리아에 살고 있던 디아스포라들이 YHWH에 adonai의 모음 a, ai를 붙여 YHaWHai로 전환해서 야훼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이후 번역 과정에서 YHWH 부분을 영어로 Jehovah(제호바:한글 여호와)로 표기했다. 오늘날 미국 New International Version에는 큐리오스를 The LORD 로 번역 표기하고 있으며, 구약 신약 모두 이렇게 표기하여 아도나이나 야훼라는 표현이 사라졌다. 영국에서 번역한 King James Version도 이를 따른다. 헬라어 큐리오스는 히브리어 아도나이를 번역한 것이다.
한글성경(개역개정)에는 영어성경과는 달리『여호와, 주님』으로 혼재 되어있다. 창세기 4장 26절, 시편 110편 1절 등 구약성경에는 여호와, 신약성경 사도행전 2장 34절 등에는 영어의 LORD에 해당하는『주』로 되어있다. 대부분 나라들의 번역성경은 영어 성경 제호바와 The LORD로 각각 번역하므로, 이에 따른 것이다. 어떤 나라는 구약성경에 제호바를 번역하거나, 어떤 나라는 The LORD로 번역하기도 했다.
이렇게 하나님의 정체성을 하야 아세르 하야, 아도나이, 야훼, 여호와, The LORD, 주님 등으로 자기들의 언어에 따라 표현했지만, 이 모든 정체성의 표현은 유일신이라는 의미다.
요한복음 8장 58절에서『예수님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내가 있느니라” 라는 부분의 헬라어는 “에고 에이미”이다. 이 부분의 히브리어가 바로 하야 아세르 하야(나는 스스로 있는 자)인 것이다.
(2) 하나님의 이름
사도행전 16장 29-32절『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피스튜손 에피 톤 퀴리온 예수)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주의 말씀(호 로고스)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바울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라고 말했다.『피스튜손 에피(영어의 on) 톤 퀴리온 예수 πίστευσον ἐπὶ τὸν κύριον Ἰησοῦν 』는 위(하나님 나라)이신 주 예수를 믿으라는 말이다.
주 예수(톤 큐리온 예수 τὸν κύριον Ἰησοῦν)에서 주라고 번역한 큐리온(큐리어스)은 히브리어 아도나이를 번역한 것인데, 영어 성경은 the Lord로 번역되어 있다. 그리고 여호와로 번역된 히브리어 야훼를 The LORD로 번역했다. 개역개정은 주라고 번역했지만, 영어의 LORD는 거룩한 주님이라는 의미다.
톤 퀴리온 예수(τὸν κύριον Ἰησοῦν)를 다시 번역하면 여호와 예수이다. 여호와 예수를 믿으라는 것이다. 여호와의 이름이 예수라는 말씀이다. 유일신이신 하나님의 정체성은 여호와이시고, 여호와의 이름이 예수가 되는 것이다. 여호와의 이름인 예수를 통하여 세례를 주고, 병을 낫게하는 의미는 바로 여호와께서 하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1장 21-23절『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예수가 여호와의 이름으로서, 바로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하나님의 아들로 칭하기를 원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창세 전에 그리스도를 예정하시고, 여호와의 이름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나타내셨으며, 세상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었던 것이다.
교회 신도들은 예수를 성자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성부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의 권능을 가진 예수를 아들로 되기를 원하셨다. 예수님의 죽음은 죄를 심판하는 하나님의 공의이신 것이다. 신도들이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하면, 하나님의 공의를 방해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아들을 통해서 죄인들을 구하는 것이지,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를 예정하시고, 계획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으며, 성도의 심령 속으로 재림해 들어오셨다. 성도에게는 이미 예수님의 재림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종말에는 믿지 않는 자를 심판하시기 위해 세상에 재림하실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종말이 이루어지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리로 돌아가실 것이다. 교회 신도들은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말을 하면서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라고 말을 하므로, 하나님에 대한 정의를 흐트러뜨리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을 보내시기도 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그리스도 역할도 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인간과 같은 모양을 하시기도 하고, 십자가에서 죽기도 하는 것이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죄인에게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메시지인 것이다.
요한복음 14장 9-10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3)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실 때, 자연 속에서 나타내시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로서 나타내실 때가 있다.
일반계시에 대해서, 로마서 1장 20절“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분명히 보여 알려졌고, 지어진 피조물로부터 이해되며, 이 사실을 부인할 수 있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성경 내용을 염두에 둔다면, 일반계시는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의 지혜와 능력과 초월하심을 증명하는 하나님의 계시라고 할 수 있겠다.
특별계시는 하나님이 이적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기로 택하신 방법이다. 특별계시는 꿈, 환상 등으로 계시되며, 이런 경우 대언자(천사나 선지자)를 통해서 계시된다. 그리고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등으로 계시된다. 하나님을 계시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특별계시의 한 형태인 호 로고스의 말씀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다.
히브리서 4장 12절『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특별계시의 궁극적인 형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 요한복음 1장 14절『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5. 예수 그리스도
(1) 그리스도의 계시
갈라디아서 1장 11-12절)『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갈라디아서 3장 23절에서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계시될 믿음의 때』는 율법을 통하여, 의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않으면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를 말한다.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이 곧 그리스도의 미음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나의 미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믿음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자가 된다. 그리스도의 믿음은 인류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고, 하나님이 부활시켜 주는 믿음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자는 이 믿음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스도 계시의 복음은 갈라디아서 1장 1절에서『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설명되고 있다.
그래서 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임을 분명히 말한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1장 12절에서 다시 강조한다.『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계시라는 것은 헬라어 아포칼리시스 라고 하는데, 동사 아포칼리토에서 비롯된 단어다. 그래서 아포칼리시스는 덮개를 벗기는, 감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는 그런 의미를 갖는다. 가리워져 있는 덮개를 벗겨서 안에 감추어진 것이 밝히 드러나는 것을 계시라고 한다.
예수님이 천국의 비밀을 씨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설명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왜 비유로 말씀하시는가 라고 물었다. 마태복음 13장 11절에서『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제자들에게 계시가 주어진 것이다.
마태복음 13장 34-35절에서『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감추어진 비밀이 드러내는 것이 계시다. 제자들은 천국의 비밀을 알게되었다.
구약을 읽을 때, 율법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하면, 수건이 덮혀져 있는 것이다. 구약을 읽을 때, 율법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자가 하늘로부터 믿음의 선물을 받는 자들이고, 수건이 벗겨지는 것이다. 그래서 계시가 이루어지는 자들이 된다. 단순히 예수를 믿어 구원받는다 라는 수학 공식처럼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나라로 부터 물질 세계가 창조되고,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영들이 이 세상에 오게되어, 영이 흙으로부터 인간으로 만들어지고(첫사람 아담), 그 사람을 통해서 하와(범죄한 영들)가 분리되고, 그 둘을 통해서 인간들이 출생하여, 다시 마지막 아담(그리스도)를 통해서 흙을 벗고(옛사람이 죽고), 하늘의 장막 집(영의 몸)을 입게 되는 모든 과정을 통해서 왜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게 되었으며, 대속의 죽음을 하시게 되었는가를 깨닫게 되는 것이 계시가 되는 것이다. 구약 안에 모든 비밀이 담겨져 있는데, 그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것이다.
(2) 성령으로 잉태
마태복음 1장 21-23절『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처녀는 절대 아이를 낳을 수 없다. 즉, 이것은 사람으로부터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처녀의 아들임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거듭난 영적 이스라엘이 잉태하여 하나님 아들이라 칭함을 받았으니 그 이름이 예수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도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성도가 영적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으니 그 이름이 예수라, 성도의 심령 속에 성전이 들어서면 그 성전에는 예수라는 이름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리고 성령세례를 받고, 심령 속에 새성전이 세워지고, 그 성전 안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여 들어가 임재하실 때, 그 성도 역시 임마누엘이 되는 것이다. 신도가 예수믿는다고 임마누엘이 되는 것이 아니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가 임마누엘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육신의 눈으로, 인간의 경험으로는 절대 믿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그러나, 불가능이란 없는 유일신 하나님이 하시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믿을 때, 세상의 법칙이 아니라, 성령의 법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성령 법 안에 있는 자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생명을 받을 있다. 부활생명은 죽었던 육체가 다시 살아나는 개념이 아니라, 육체에 갇혀있던 영이 신비로운 영생의 몸을 입고 살아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 43-44절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3) 인자
골로새서 1장 15절에서『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인자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첫사람 아담과 마지막 사람 아담인 것이다. 또한 인자는 그리스도이시다.
로마서 5장 14절에서『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예수님은 마지막 아담으로서 첫사람의 모형이라는 것이다. 모형은 복사판으로서 갇다는 의미다. 무엇이 같은가? 바로 그리스도라는 의미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가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은 첫사람이다. 따라서 그(예수 그리스도)는 첫사람이면서 마지막 사람이라는 의미가 된다. 첫사람이 만들어 준 죄의 몸을 없애고, 마지막 사람으로 부활생명의 몸을 전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게 그리스도의 역할인 것이다. 첫사람은 죄의 몸을 남자와 여자에게 주었지만, 마지막 사람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남자와 여자에게 부활의 몸을 주신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생령은 생명이다. 첫사람은 한정된 생명을 주었지만, 마지막 사람은 영생의 몸을 주는 것이다.
(4) 대속의 죽음
요한복음 11장 50절『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은 대속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속량이다. 속량은 노예를 돈으로 사는 의미를 갖는다. 사람들은 사탄의 노예인데, 하나님이 예수의 피값으로 사는 것이다.
속량이라는 말은 덮혀지는 것(카파르)이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부터 덮혀지는 것이다. 그래서 속량이 없는 죄사함은 없다. 하나님이 사는 자는 죄인이 회개하여 돌이키는 자로서, 하나님의 아들을 대신 죽게해서 죄인을 사는 것이다. 놀라운 은혜다. 회개하는 자에게만 자기 아들의 죽음의 값을 지불하는 것이다. 회개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주어진다. 그래서 하나님의 것이 된다.
속량 곧 죄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장사지내는 것이다. 로마서 6장 6-7절에서『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죄인이 죄에 대해서 죽어야만 속량이 적용되는 것이다. 죽는 것은 육적 몸이 죽는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을 하셨지만, 예수의 죽음은 곧 죄인의 죽음이라는 것이다. 십자가에 높이 달린 예수님을 기억하며, 그 주검에서 자신을 발견해야만 하는 것이다.
로마서 6장 8-11절에서『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살아있다는 말은 부활생명을 받은 자가 된다. 장차 육체가 죽어서 다시 사는 그런 개념이 아니라, 영적으로 하늘의 생명을 받는 자라는 말이다.
(5) 부활
고린도전서 15장 20절『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15장 13-10절에서는『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는 것이 없었을 것이고, 그러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라』고 했다. 신도들의 신앙에 있어서 부활신앙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 신도들의 대부분은 부활신앙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부활에 대한 믿음이 그들 가운데 많은 차이가 있음을 보게 된다. 그들은 부활에 대해서 과거, 현재, 미래적인 부활을 믿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그들이 믿는 부활의 의미를 시제에 따라 생각해보면,
첫째로 부활은 2천년전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이며,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셨는데,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 했다. 첫 열매가 되셨다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과거에 있었던 한 사건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를 믿는 자마다 부활하고 영생할 것임을 표본으로 보여 주셨다는 것이다. 기독교인이면 누구나 믿는 부분이다.
두 번째로 과거에 일어났던 부활은 오늘 우리 가운데서도 계속 일어나고 있다. 이 현재적 부활은 믿는 자마다 영적으로 거듭나는 부활이다. 현재의 부활은 과거에 죄로 죽어있던 영이 살아나는 것이고,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창조되는 것이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새 피조물은 영적으로 하늘 생명의 영의 몸을 가진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이전의 몸이 아니라 다른 몸이다. 비록 눈에 보이는 육체로 인해서 이해를 할 수 없게 만든다. 부활의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예수와 함께 육의 몸(옛사람)이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죄에 대해서 죽고, 세상에 대해서 죽고, 부활의 첫열매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새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교회 사람들은 현재적 거듭남의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부활은 미래적으로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믿음으로 살다 죽으면 천국에 올라가 있다가 마지막 날에 완전한 모습으로 부활하게 되고, 죽기 전에 예수님이 오시면 영혼이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부활을 믿지만, 현재적 완전 부활이 아니라는 것이다.
세 번째로 미래적 부활은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있을 몸의 부활이라는 것이다. 믿는 사람의 영혼이 구원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된 후에도 그 육체는 때가 되면 죽지만,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죽었던 몸이 부활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을 한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나온다"고 했다.
요한복음 11장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니"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자에게는 예수님처럼 부활이 있으며,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고 하는 사실은 장래에 우리를 다시 살리시겠다는 뜻도 들어있다 라고 말을 한다.
거듭남, 새로운 피조물, 새사람, 부활생명 다 같은 용어이지만, 교회 사람들은 다르게 해석하기 때문에 부활에 대해서 믿지만, 죽은 후에 있을 미래의 막연한 믿음이 되는 것이다. 현재 부활을 맛보고 있지만, 미래에 확정된다는 의미가 된다. 이렇게 말을 하는 모든 것은 자신의 육체를 바라보기 때문이며, 육체가 죽어서 모든 것이 확정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6) 재림
사도행전 1장 11절에서『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셔서 이 땅에 사십일간 머무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올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라고 하셨다. 그 말을 마친 후에 제자들이 보는 상황에서 승천하셨다. 그런데, 제자들이 본 장면은 하늘 공간적 개념이 아니라, 심령 속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오순절에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신 것이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신 것과 예수님이 재림하는 것과는 다른 사건인가? 다른사건이 아니라 같은 사건이다. 부활승천 하신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제자들의 심령 속으로 들어오시고, 오늘날 성도의 심령 속으로도 들어오신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재림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것을 믿는 성도의 심령 속으로 예수님이 들어오시는 것이다. 그래서 주인이 되시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믿지 않는 신도(기타 사람들)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도에게는 심판자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어려움을 피할 수 있도록 보혜사로 오신 것이다.
물론 마지막 날에 성도가 아닌 자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은 심판주로 오신다. 이것이 백보좌 심판이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교회의 신도에게는 그들이 원하는 재림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깨달아야 한다. 재림을 가다린다고 하는 신도들은 백보좌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재림을 기다리는 신도들은 여전히 율법 속에서 헤매고 있는 자들이다.
성도의 심령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지면, 성도가 하나님 나라(천국)가 된다. 그래서 천국 혼인잔치로 비유하신다.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신부인 성도가 만나 하나가 된다. 성도는 천국의 열매를 맺고, 다시 부활의 씨를 퍼뜨려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활의 열매를 계속 맺도록 해야만 한다.
6. 성령
(1) 하나님의 영
로마서 8장 9절『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대부분 교회 사람들이 성령에 대해서 알고있는 지식은 성령 하나님이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한분으로서 성부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정말 이해하기 힘든 말을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교리로 만든 삼위일체를 믿고 있기 때문이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이제는 고유명사처럼 되어 버렸다.
성경을 통해서 보면, 하나님 나라에는 하나님과 천사가 있다. 이런 상태가 안식의 상태라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을 대적한 범죄한 천사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래서 안식이 깨져버린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물질세계에 가두기 위해 세상과 사람을 창조하신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종말 때 다시 물질세계가 사라지고, 원래의 하나님 나라로 회복할 날이 올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에 보내진 인간들이 회개하여 하나님 나라로 돌아오기를 원하시고, 사람들 중에 선지자를 택하셔서 언약을 주시고, 성령의 빛을 보내주시고, 죄를 깨닫기를 원하신 것이다. 성령은 범죄한 인간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이킬 때, 하나님이 보내시는 생명의 빛과 같은 것이다. 성령은 생명의 빛이며, 죽었던 영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수 있다. 성령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으므로, 성령은 성부의 일체이시나, 성령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유일신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다. 정확하게는 하나님의 영이라고 해야만 할 것이다. 구약성경에서는 대부분 하나님의 영이라고 표현된다. 신약에 와서 하나님의 영을 예수의 영, 또는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사도행전 16장 6-7절『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디모데와 함께 한 바울은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려 했지만, 예수의 영이 막으셨다. 예수의 영은 성령을 의미한다. 성부 하나님이 성령을 예수님께 보내시면, 예수님은 성령을 제자들에게 보내시는 것이다.
요한복음 14장 26절『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보혜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내는 성령이다. 따라서 비록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생명의 빛이신 성령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예수님의 이름이 있으므로, 결국 예수님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라는 교리는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말을 하면서, 사실상 세분의 하나님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성령은 성부에게서 나오지만, 예수님은 성부로 부터 성령을 받아서 예수의 이름으로 성령을 보내시는 것이다. 오늘날 잘못된 교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동등하신 하나님이라고 했는데, 성자와 성령은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으므로 동질이라고 할 수 있으나, 동등하신 하나님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성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기 때문이다. 삼위일체의 교리는 삼신 사상을 연상시킨다.
예수의 영이 막았다는 말은 예수님이 막으신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호 로고스가 되어서 제자들의 심령 속에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심령 속의 성전을 이해하지 못하면 곤란하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심령 속의 성전을 의미한다. 제자들은 옛성전을 무너뜨리고 새성전을 부여 받았으므로, 예수님이 그 성전 안으로 재림하여 들어가신 것이다. 그래서 성전 안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제자들이 표적과 이적을 나타내는 것도 예수님이 성령의 능력으로 이렇게 하시는 것이다.
(2) 하나님의 능력
요한복음 20장 21-22절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성령은 새생명으로 태어나게 해 주신다. 성부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성령의 빛을 보내주시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세례로 부활생명의 빛을 보내주신다. 성령세례는 이전의 육의 몸은 예수와 함께 죽고, 부활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 주는 것이다. 부활생명은 성령의 능력으로부터 나온다.
성령은 심판의 불세례로도 나타난다. 마태복음 3장 11-12절『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불세례에 대해서 알고 있는 신도들은 많지 않다. 이는 성령모독죄와 연관이 있는 것이다. 사실상 성령모독죄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으니, 불세례를 어떻게 알겠는가?
누가복음 12장 49-50절『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불은 불세례를 의미하며, 예수님이 받을 세례는 성령세례로서 부활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세상의 모든 죄를 대속하기 위한 죽음이다. 원죄이건 세상죄인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면 다 용서받는 것이다. 성경은 십자가의 죽음을 물세례와 불세례로 표현했다.
불세례는 소돔과 고모라에 살았다면 하늘에서 내려오는 불로 다 타죽을 그런 자라는 것이다. 불세례를 받은 자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는 형식적 의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새긴다.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는 간음을 주제로 널리 인용된다. 육체적 간음이라기 보다는 영적 간음을 말한다. 영적 간음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또한 우상을 따라가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로 말을 하자면 예수를 믿지만, 기복신앙, 율법주의, 영지주의도 따르는 신자를 두고 말을 하는 것이다. 이들이 영적 간음의 대표적인 것이다. 하나님은 영적 간음을 아주 싫어하신다.
예수 안에 있지 않으면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성경적으로 보면 당연한 결과이다. 왜냐하면 죄인은 하나님 나라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를 믿으면서도,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라는 것이다. 이게 바로 성령모독죄요, 영적 간음이라는 것이다. 불세례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심판인 것이다. 깨닫고 회개하는 자는 하나님이 불세례를 받은 것으로 간주하시고,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성령 모독하는 자는 앞으로 불세례 심판을 받을 것이다.
7. 인간
(1) 첫사람 아담
고린도전서 15장 45절『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프쉬겐 조산)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프쉬겐 조산은 살아있는 생명체이다. 고린도전서 15장 46절『그러나 먼저는 신령(프뉴마티콘)한 사람이 아니요 육(프쉬케)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프뉴마티콘) 사람이니라』 프뉴마티콘은 신령한이 아니라 영적인 이라는 의미다. 프쉬케는 생명이다. 인간은 흙(육체)와 영이 결합된 존재인데, 이 두가지가 결합되므로 살아있는 생명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창세기 2장 7절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네페쉬 하이)이 된지라』
네페쉬 하이는 살아있는 생명체이다. 한정된 생명을 의미한다. 첫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그리스도)을 가진 자다. 또한 범죄한 천사들에게 죄의 몸을 주기 위해 세상에서 창조된 자임을 표현한다. 세상에서 창조된 첫사람 아담이 에덴동산으로 옮겨간 것은 에덴동산의 주인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곧 첫사람 아담이 그리스도라는 의미가 된다. 골로새서 1장 15절에서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그리고 창세기 2장 21-22절에서『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첫사람 아담이 잠들었다는 말은 육체로는 죽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그리스도의 자리로 돌아감을 상징한다.
첫사람과 남자 아담은 다른 존재이다. 첫사람은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남자 아담은 범죄한 천사의 영을 가진 사람들을 의미한다. 남자와 여자로 표현한 것은 나눈 것은 그리스도의 머리와 몸을 상징하는 것이다, 남자는 그리스도의 머리, 여자는 그리스도에 속하는 자로서 서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첫사람은 사라지고, 남자 아담과 여자 하와가 나타난 것이다. 이는 이후 그리스도 안에서 새창조를 예고하고 있다. 아담의 갈빗대를 수단으로 한다. 죄인된 인간이라는 피조물이 등장하는 것이다. 남자 아담과 여자 하와는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없는 자가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다. 아담이 930세를 살았다는 말을 하는 것은 바로 남자 아담 때부터 계산되는 것이다. 첫사람 아담은 남자 아담이 아니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의 형상
골로새서 1장 15절에서『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헬라어 성경을 번역하면『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의 첫번째 나신 분(초태생)』이 된다. 첫사람은 마지막 아담의 표상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성전을 의미한다. 창세기 1장 26-27절『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은 골로새서 1장 15절에 의하면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성전으로 말씀하셨다.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몸은 옛성전, 부활하신 몸은 하늘로부터 오는 새성전인 것이다. 요한복음 2장 19-21절『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하나님은 최초로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심령 속의 성전(하나님의 형상)으로 두셨으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후에는 하나님이 없는 옛성전이 된 것이다. 이 비유가 포도원과 농부의 비유이다. 성전을 통해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어야 하는데, 아무도 찾지 않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눈에 보이는 성소를 두어,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하셨다.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죄를 깨닫도록 하신 것이다. 그 성소는 성전으로 발전하게 되지만, 돌로 된 성전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고, 인간의 탐욕의 자리로 타락하게 된다.
오늘날 신도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자는 말을 많이 한다. 원래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 있었는데, 아담이 죄를 범하므로 하나님의 형상이 사라졌다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 어떤 삶을 살 것인가에 주목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자기의 형상을 통해서,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이 그들에게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심령 속에 성전이 세워져 있는데, 그 성전에 하나님은 없고, 자기가 우상처럼 앉아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과 자기의 형상은 어떻게 다른가? 하나님의 형상은 심령 속의 성전에 하나님이 계시지만, 자기의 형상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육적 자아)이 그 성전에 앉아있는 것이다. 첫사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자기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들이다. 자기의 형상은 옛사람으로 표현된다.
대부분 교회 신도들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거룩한 품성 등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사람들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이 있었는데, 타락하므로 형상이 사라졌지만, 이제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은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도 신도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 무엇인가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원래 하나님의 형상이 있었는데, 아담으로 인해서 형상을 잊어버렸으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자 라고 말을 한다면 이는 영지주의에 가까운 말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와 함께 자기라는 옛사람이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였음을 믿을 때,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라고도 할 수 있다. 심령 속의 성전에 예수 그리스도가 임재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이다.
(3) 죄의 몸
로마서 6장 6절『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죄의 몸은 첫사람으로부터 왔다. 죄의 몸은 죄와는 다르다. 죄는 모든 사람이 각자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것이고, 태어나자 말자 죄의 몸으로 죄가 들어온 것이다. 죄의 몸은 첫사람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죄의 몸을 육의 몸으로도 표현한다. 고린도전서 15장 44절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죄의 몸은 죄를 담는 그릇과 같은 것이다. 성경은 옛사람으로 표현하는데, 옛사람이 죄의 몸이며, 육적 자아를 의미하기도 한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셨는데, 그 자기라는 것이 육적 자아를 의미한다.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는 죄의 몸에 대해서 죽기 위해 태어나신 분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애서 죽으셨을 때, 다 이루었다는 말은 죄의 몸을 다 제거하셨다는 말이다. 요한복음 19장 30절『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그래서 예수와 함께 죽은 자가 죄의 몸에 대해서 죽었다고 표현한다.
(4) 원죄와 세상죄
죄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탐욕이고,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것은 죄의 결과이며, 죄의 결과는 사망이다. 계명을 어기는 것을 죄로 생각하는 자들은 영적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인 것이다. 죄는 세상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시작되었다. 로마서 5장 12절『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은 첫사람 아담이다.『한 사람으로 말미암아』라고 번역되었는데,『한 사람을 통하여』라는 말이다. 첫사람 아담은 죄가 세상에 들어오는 통로인 것이다. 즉 통로라는 말은 죄가 통과하는 몸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죄의 몸이 죄의 통로이다.
교회 목사들 중에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죄라는 말을 하는 자들도 있다. 그러면 예수에 대해서 알지 못한 상태는 죄가 아니라는 말인가? 사람은 예수를 믿지 않더라도 이미 태어날 떼부터 죄인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를 안믿는 것이 죄라는 말을 하는 자들은 죄의 의미를 모르는 자들이다.
요한복음 16장 7-9절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말했지만 제자들은 근심이 가득했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여 거처(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를 마련하고 데리러 온다고까지 했다. 이 모든 일이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일로 인해서 세상에 사람들이 갇혀 살게 되고 그리스도를 예정했고 등등의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말했지만 여전히 깨닫지 못한 것이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셔서 다시 성도의 심령 속으로 들어가면 성령으로 깨닫게 해주시겠다고 하신다. 예수님이 죄에 대해서 하나님 나라에서 발생한 죄의 근본을 말했지만 예수님의 말을 믿지 않아서 성령을 통해 깨닫게 해주겠다는 것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죄를 사해주는 권세를 가진 것을 믿지만 온전히 믿지 않으면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창세전에 일어난 죄에 대해서 설명했는데 제자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을 통해서 가르쳐 주겠다고 하므로 성령을 통해서 가르쳐줌에도 예수의 말을 온전히 믿지 않는 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다. 이를 성령훼방죄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성경에서 죄인이 예수의 피로 죄를 용서받았다고 하는데도 여전히 현재 또는 앞으로 지을 죄를 용서받아야 한다고 믿는 자들이 있는 것이다. 이들이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다. 성령모독죄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 현재와 미래의 죄는 용서받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신도들에게 적용된다. 그들은 과거의 죄만 용서받았다는 말이다.
로마서 8장 1-2절에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로마서 6장 7절에서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난다고 말을 한다. 죄를 완전히 용서받은 것을 믿지 못하는 자들은 죄와 사망의 법인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죄의 몸인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죽지 않은 자들이다. 단순히 예수의 피가 자신들의 죄를 용서해주었다고 믿는 자들이다. 그런데, 그들에게 죄의 몸이 죽지 않으므로, 계속 세상죄가 죄의 몸에 쌓이는 것이다. 그들은 날마다 회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613개의 율법의 규정을 하나라도 어기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이다.
8. 부르심과 택하심
(1) 부르심
부르심은 하나님이 성경 말씀을 통해서, 계시를 통해서, 원래 백성된 자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의미가 있다.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천사의 영이 육체에 갇혀 인간이 되었지만, 원래 인간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이다. 이게 부르심이다.
세상으로 비유하자면 출애굽 사건이 이와 같은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갇혀 부르짖음으로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구하는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이다. 원래 하나님 백성이었는데, 애굽의 노예가 된 것이다. 원래 하나님 나라의 천사였는데, 세상에 사는 인간이 된 것이다. 인간들이 하나님을 찾을 때, 하나님은 다가가신다. 그래서 인간들은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이다. 이게 부르심이라는 의미가 된다.
애굽을 나와서 홍해바다를 건넌 백성들은 부르심을 얻은 자라고 할 수 있다. 거의 2백만 정도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실제 가나안에 들어가는 믿음을 가진 자는 두명 뿐이었다. 출애굽 당시 19세 미만의 어린 아이와 40년간 광야에서 살다가 태어난 사람을 제외하고는 여호수아와 갈렙 두명 뿐이었다. 나머지는 광야서 40년간 방황하다가 다 죽은 것이다. 마태복음 22장 14절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여호수아와 갈렙은 특별선택과 일반 선택이 혼합된 모습이다. 여호수아는 예수를 상징하고, 갈렙은 이방인을 상징한다.
기드온 300 용사의 이야기를 보면, 기드온은 32,000명을 불러내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지금 너희가 이기면 너희들의 힘으로 이겼다고 할까 하노라, 그래서 두려워하는 자는 돌아가라』고 했다. 하나님은 기드온과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22,000명이 돌아갔다. 돌아간 자는 주님과 함께 이기심을 버린 것이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이번에는 내가 물 마시는 자세를 보고 택하겠다』고 말씀하셨다. 머리를 숙여서 마시지 않고 손으로 움켜서 마시는 자, 전쟁에 나가는 자세를 보고 택하신 것이다. 그래서 300명을 택하게 된다. 9,700명은 물먹는 것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래서 제외시킨 것이다. 택하신 자들 300명이 이기는 자들이다. 이들은 특별선택을 받은 자라고 할 수 있다.
마태복음 22장 14절에서『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이 이야기는 천국의 비유에서 나온 말씀이다. 천국은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다는 것이다. 이게 요한계시록이다. 종들을 보내서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청했는데, 그들이 오기를 싫어했다. 마태복음 22장 4절에서『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하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자기 아들을 결혼식의 제물로 잡은 것이다. 십자가에서 인류가 먹을 수 있는 제물의 음식을 준비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오지 않는 것이다.
마태복음 22장 5-6절에서『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이게 모든 사람들의 모습이다.
마태복음22장 7절에서『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이게 요한계시록의 이야기다. 어린양이 인봉을 뗄때마다 재앙이 이 땅에 일어난다. 요한계시록의 주인은 주님이시다. 주님이 만왕의 왕이라는 것을 계시하시는 것이다.
마태복음22장 8-10절에서『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악한 자나 선한 자나 차별없이 다시 불렀다.
마태복음 22장 11-13절에서는『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예수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믿음이다. 예수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한 것을 믿는 믿음이 아닌 것이다.
『바깥 어두운 곳』에 대해서 일반 성도들은 예수믿기만 하면 일단 구원은 받지만, 예복을 입지 못했기 때문에, 즉 성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언제가 천국은 가지만 성 밖에 머문다고 말한다. 그들은 애굽을 나오면 구원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부르심을 받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하는 거짓된 교리 때문에 이런 말이 생긴 것이다.
(2) 하나님의 택하심
데살로니가전서 1장 4-7절『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하면서『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라고 했다. 베드로후서 1장 10절에서『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여기에 나오는 택하심과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말하는 택하심은 같은 단어다.
디도서 1장 1-2절에서도 『택하신 자』라고 표현했다.『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나 바울이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사도바울은 유대인으로서 부르심을 입은 백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율법에 매여 있어서 메시야를 발견하지 못한 채,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생각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을 붙잡아 죽이는데, 앞장 선 인물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를 택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왜 그와 같은 인물을 택하신 것인가?
하나님의 택함은 복음 선포의 지도자로 세우기 위한 특별선택과 지도자의 말을 믿으므로, 믿음을 따라 택함을 입는 일반선택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특별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이 잡히셨을 때, 제자들은 다 도망갔다.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를 세번이나 부인했다. 물론 가롯유다는 자살하고 말았지만,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열한 제자를 택하시고,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 그들을 택하신 것이다.
특별선택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를 예정하셨을 때 미리 정하신 바가 된다. 에베소서 1장 4-5절『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후이오데시안) 하셨으니』디아는 ~을 통하여, 후이오데시안은 아들로 입양하다라는 의미다.
바울이 우리라고 말했는데, 우리라는 표현은 에베소서 1장 1절에서 바울 자신을 포함해서 에베소 성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피스토이스)한 자라고 표현했다. 세 부류로 나뉘어지지만, 바울은 통칭하여 우리라고 했는데, 택한 자라는 것을 강조하는 의미가 있다. 피스토이스(기본형은 피스토스)는 신실한 믿음이다. 바울은 성도와 신실한 믿음을 가진 자를 구분하고 있는데, 누구인지 모르지만, 특별히 택한 자가 있다는 말이다. 사도와 제자(성도)가 그에 해당될 것이다. 신실한 믿음을 가진 자는 지도자들의 말을 따라 하늘의 믿음을 소유한 자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일반 선택은 하늘로 부터 오는 믿음을 가지는 자가 된다. 육적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믿는 자라는 것이다. 결국 택하심을 입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주지 않으면 자기를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택함을 입은 자에게 역사하기 때문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을 갖게되며, 영의 마음으로 믿음을 받아드리게 된다.
9. 구원과 예배
(1) 탕자의 비유
(누가복음 15장 11-24절)『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탕자의 비유는 아버지를 떠난 작은 아들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비유와 맥을 같이 한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천사들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탐욕의 생각을 가지므로 하나님 나라를 떠나 세상으로 온 인간의 이야기인 것이다. 이들이 잃어버린 양들이며, 그래서 예수님이 잃어버린 양들을 찾으러 오신 것이다.
구원은 죽음에 처해진 자를 구하는 의미를 갖는다. 세상에 온 모든 인간은 영이 육체에 갇혀 죽어있다는 전제로, 영을 살리는 이야기이다. 요한복음 6장 63절에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라고 말을 한다.
예수님은 목숨을 걸고 잃어버린 양들을 찾기 위해 오셨는데, 양은 목자를 모른채 돌아다닌다면, 늑대에 잡혀 죽을 것이다. 구원은 제 길로 간 양이 목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들으면 돌이켜서 목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구원이다.
양은 하나님 나라를 떠나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자들을 의미하며,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주인이 보낸 목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음성을 깨달으면,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구원이라는 말이다.
(2) 믿음을 받을 만한 마음의 문을 여는 자
사도행전 16장 13-15절『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루디아는 하나님을 섬기는 여인이었지만, 성령세례를 받지 못했다. 그런데, 주께서 그녀의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와 그녀의 가족 모두가 성령세례를 받는 모습이다.
마음을 연다는 의미는 그 동안 마음의 문이 닫혀있었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요한복음 5장 26-29절『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무덤은 죽은 자가 묻혀있는 곳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 속에 갇힌 잠자는 영을 의미한다. 그의 음성을 듣는 자는 문을 열 것이다. 문을 여는 자는 그가 주인임을 아는 자인 것이다.
요한복음 10장 26-28절『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음성을 듣고 문을 여는 자는 누구인가? 마음의 문은 누군가가 문을 두드릴 때 반응하여 문을 열게된다. 스스로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베드로전서 3장 18-19절『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옥이 바로 육체에 갇힌 마음의 문을 의미하며, 예수님이 영으로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문을 두드린다.
베드로는 이 말을 노아의 방주와 연결시킨다. 베드로전서 3장 20절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노아가 120년간 회개를 외치며,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홍수로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고 노아 자신과 오직 그의 가족 일곱명만 구원받았다는 것이다. 그만큼 마음의 문을 열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오늘날도 예수님이 제자나 성도들을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계속 두드리고 있다. 영적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라는 것이다. 잠자는 자가 문을 열면, 예수님이 부활생명을 주셔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게 하실텐데, 반응이 없는 것이다.
반응하는 자와 반응이 없는 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베드로전서 3장 21절에서『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세례는 물에서 죽고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으로 거듭나는 자가 선한 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양심이 죽어있는 자는 선한 양심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양심이 조금이라도 살아있으면,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이 주신 양심으로 복원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양심이 죽었는지, 아직 살아있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계속 복음으로 문을 두드려 보는 것이다. 양심이 조금이라도 살아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할 것이다.
씨뿌리는 비유에서 마음 밭을 잘 갈고 정리하여 좋은 밭은 열매를 많이 수확한다고 비유했는데, 말씀을 듣고 깊히 묵상하여 하나님 말씀에 반응하는 것이 마음 밭을 가는 것이다. 그래서 왜 자신이 세상에 있는가 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을 떠난 죄인됨을 깨달을 때, 비로소 살아있는 양심이 작동되는 것이다.
히브리서 3장 6-8절『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생명이 복음이며, 이 말을 들을 때, 양심이 살아움직이는 자는 거역하지 않고 받아드리게 된다. 십자가의 죽음과 연합되는 것과 현재적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자가 아니다.
(3) 회개와 십자가의 죽음
회개는 죄를 반성하는 의미가 아니라, 잘못된 방향에서 원래의 방향으로 돌이키는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방향에서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 회개이다.
하나님을 떠난 원인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탐욕이며, 회개는 이 탐욕을 없애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탐욕이 하나님을 떠나게 했으므로, 그 원인 제공을 한 탐욕을 제거해야만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탐욕의 정체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하와가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 선악과를 먹었는데, 그 정체가 무엇인가? 천사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천사의 A.I.(Angel intelligence:천사의 능력)인 것이다. 범죄한 천사의 무리들이 지식과 능력을 공유하면서 그들 스스로 하나님께 대항하고자 한 것이다. 하나님은 천사들에게 부여한 지혜와 능력있는데, 그들이 공유하면서 확대 제상산한 것이다. 하나님이 이를 알고, 그들을 흙속에 가두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인간이 되도록 하여, 자기들의 뜻을 이루어 보도록 한 것이다. 참고로 인간이 만든 로봇의 인공지능도 집합체가 능력을 공유하므로 인간을 대적하는 날이 올 것이다.
하나님은 첫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으며, 하나님의 형상은 심령 속의 성전을 의미한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후에 하나님은 그 성전에서 나가셨다. 그 비유가 바로 포도원과 농부의 이야기이다. 사람들이 성전에 하나님을 모시고 희생제물을 통해서 죄를 깨닫는 제사를 드리는가 아니면 자기가 성전의 주인이 되어서 왕노릇하는가를 하나님이 보시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자기가 왕노릇하는 모습을 성경은 보여준다.
그러나 하나님처럼 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돌이켜야 하는데, 인간들은 돌이키지 않고, 끝없이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하는 모습을 본다. 그것의 모습이 최초의 살인 사건이었으며, 바벨탑을 세워 하늘 꼭대기에 도달하려는 모습이었다.
회개는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탐욕의 마음을 가진 자라는 것을 깨닫고, 희생제물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 회개이다. 이 때 희생제물이 죽었지만, 죄인도 함께 죽었음을 깨달아야만 하는데, 사람들은 형식적인 제사만 하나님께 드린 것이다. 그래서 회개없는 제사만 있을 뿐이다. 이게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의 모습인 것이다.
예수님은 단 한번의 희생제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죽으심으로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것이다. 히브리서 9장 25-28절『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회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하여 죽는 것이다. 무엇이 죽는가? 내가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던 탐욕의 옛사람이 함께 죽는 것이 바로 회개라는 말이다. 로마서 6장 6-7절『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4) 부활과 영생
오늘날 신도들은 부활에 대해서 오해를 하고 있다. 부활은 두가지 의미를 갖고 있는데, 첫째는 이전으로 돌아간다는 의미, 둘째는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의미다.
첫째, 이전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에서 부활은 원래 천사들이 영생으로 있었는데, 하나님께 죄를 범하므로 육체 속에 갇혀 있다가 영생으로 돌아감을 의미한다. 누가복음 20장 35-36절에서,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일이 없으며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그리고, 마태복음 22장 30절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라고 말을 한다. 천사는 영이다. 그래서 부활은 죽었던 영이 생명의 영으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둘째,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의미다. 죽었던 것은 육체를 의미하고, 다시 살아나는 것은 영을 의미한다. 베드로전서 3장 18절에서『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오늘날 세상의 대부분 기독교인들은 죽었던 육체가 다시 살아난다고 믿는다. 그러나 살아나는 것은 영이라는 말이다. 누가복음 8장 55-56절『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이르시되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시니』육체가 죽으므로 영이 나가고, 예수님이 살리시므로 영이 돌아왔다고 말한다. 사람이 죽으면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언젠가 죽었던 육체가 다시 살아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부활은 영의 이야기이다.
육체에 갇혀있던 영이 다시 살아나, 몸을 입는데, 그게 영의 몸이다. 부모로부터 받은 몸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몸이다. 이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이야기가 된다. 물에서 육의 몸이 죽고, 성령으로 영의 몸으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 35-38절『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뿌리는 씨는 영을 감싸고 있는 육의 몸을 의미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형체는 영의 몸이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 43-44절에서 말한다.『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5) 영적 성장과 영적 전쟁
영적 전쟁은 말 그대로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이다. 세상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나름대로 종교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으며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중에서 기독교를 종교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들에게 영적 전쟁에 대해서 질문을 한다면, 그 대상에 대해 거의 대부분 사탄 또는 악한 영으로 말할 것이다.
영적 전쟁도 육적인 전쟁과 마찬가지로 피아식별을 할 줄 모르면 전쟁에서 싸울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영적 전쟁을 하게 되는 나는 누구이며, 그 대상은 누구와 싸우는가를 알지 못하면 전쟁에서 지는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영유아기를 지나 청소년기에 접어들면 자아에 대한 의식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래서 자기라는 정체성에 접하게 되는 것이다. 나를 모르면 전쟁에 나갈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태어나면서 나타나는 자아는 바로 육적 자아라는 것이다. 이 육적 자아는 대략 일곱가지의 특성을 갖는 집합체 형식으로 되어있다. 육체의 본성, 혈연관계, 경험과 지식, 사상과 이념, 종교심, 자기의 의, 지배하고 싶은 욕망 등이다. 이것은 성장하면서 발전하기도 하고, 위축되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러한 육적 자아는 하나님과는 적대적인 대립을 세우기 때문에 육체 속에 갇혀있는 영에 대해서는 무시하거나 존재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 말씀도 거부한다.
우리는 영의 존재에 대해서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어야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바르게 설 수 있다. 성경은 인간에 대해서 육체와 영이 결합된 존재라고 말을 한다. 그런데, 영은 흙이라는 육체 속에 갇혀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흑암 속에 있는 것이다. 비유로 말을 하자면, 세상에 살다가 죄를 범하여 감옥에 들어가 있는 어떤 사람과 같은 모양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죽은 자는 영의 몸으로 태어나게 되고 그의 장체성이 영적 자아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육체 속에 육체로부터 나타난 자기의 정체성과 성령으로 하늘로부터 태어난 영적 자기 정체성이 혼재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피아식별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참된 나는 하늘로부터 태어난 영적 정체성이고, 나의 적은 다름 아닌 육으로부터 비롯된 정체성인 것이다. 대부분의 기독교인이 착각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피아식별을 하지 못하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의 의미를 모르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대상은 육적 자아이며, 부인해야 하는 주체는 영적 자아인 것이다. 이 둘은 육체가 죽을 때까지 싸우게 된다.
로마서 8장 5-8절『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율법 속에 있는 자는 영적전쟁을 말할 수 없다. 그들은 여전히 죄인이기 때문이다. 심령 속에 성전이 세워진 성도에게는 영적 전쟁의 대상이 두가지가 있다. 첫째는 거짓 선지자에 대한 전쟁이고, 두번째는 육적 자아에 대한 전쟁이다.
첫째 거짓선지자에 대한 전쟁인데, 마태복음 7장 15절에서『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오늘날 거짓 선지자들은 성경 말씀을 왜곡하여 전하는 자들일 것이다. 왜곡된 성경 말씀은 잘못된 번역 성경을 사용하는 경우, 잘못된 교리와 의도적 왜곡 등을 들 수 있겠다. 오늘날 수많은 목사들 중에 경력이 화려하고 말솜씨는 뛰어나지만 진리를 전파하지 않는 자들이 있다. 진리를 전파하지 않으면, 모두 거짓 선지자가 된다.
두번째는 육적 자기와의 전쟁이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셨다. 성도가 심령 속에 성전이 세워져도 인간의 육체로 비롯된 일곱가지의 육적인 모습은 쉽게 떠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와의 전쟁을 하는 것이다. 성도의 심령 속에 견고하게 자리 잡은 것은 육체의 본성, 혈연관계, 사상과 이념, 종교심, 자기의 의, 지배하고 싶은 욕망, 인공지능 등이다. 이전의 “나” 라는 정체성이 바로 이 일곱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성도의 정체성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영의 생각이다.
성도가 되고 심령 속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져도 이 일곱가지의 악한 모습은 죽을 때까지 나타난다. 그러나 성도는 이를 부셔야먄 하는 것이다. 성도가 성령의 능력을 의지할 때, 하나님이 전쟁에서 승리로 이끌고 가신다. 이게 영적 성장이다. 영적 성장은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지가 아니라, 나를 부인하고 성령을 의미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며, 날마다 죽노라를 기억하고 사는 것이다.
(6) 예배와 기도
요한복음 4장 23-24절『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참된 예배는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라고 말을 한다.
“영과 진리로”는 헬라어로 보면 “엔 프뉴마티 카이 알레데이아(ἐν πνεύματι καὶ ἀληθείᾳ)” 이다. 엔 프뉴마티 카이 알레데이아(ἐν πνεύματι καὶ ἀληθείᾳ)는 영과 진리 안에서 라는 말이다. 영은 성령을 의미하며, 진리(알레데이아)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요한복음 10장 41-42절『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알레데) 하더라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배드려야 한다는 것은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으로, 그래서 성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삼위일체는 한 분의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가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되어야 성도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게 된다는 말이다. 성도의 심령 속에 성전이 세워지고, 그 성전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여 들어가 임재하시므로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신도가 성령 세례를 받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가 심령 속의 성전에 재림하여 들어간 것을 믿지 않는 자들은 구약시대 제사를 하고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의 예배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와 연합되어 죽고, 부활하신 예수와 함께 현재적으로 부활하였음을 믿지 못하는 자는 예배를 드린 것이 아닌 것이다. 예배 드리는 장소는 구약시대 성전과 같이 어느 한 장소에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장소에 불구하고, 참 성도가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드리는 것이 예배라는 말이다. 참 성도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자이다.
사도행전 18장 7-8절『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경외하는(세보마이)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은 회당 옆이라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에피스튜센)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세보메누(기본형은 세보마이:σεβομένου)는 경배하다, 예배하다 라는 의미다. 디도 유스도라 하는 회당장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라는 것이다. 회당예배를 여는 것은 함께 하는 찬양이다. 회당장은 예배의 부름과 함께 예배를 시작할 사람을 회중가운데서 맡은 자를 부른다. 누가복음 4장 20절에서『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회당 예배의 첫번째 순서는 예배를 인도하는 자가 몇가지의 말로서 예배를 이끈다.“주님께 복이 있으리, 주님은 복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라고 외치면서 예배를 인도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주님께 영원토록 복이 있으리”라는 축복으로 응답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유일성을 중심적인 고백으로 선포하며, 보상과 징벌의 교리를 강조하고, 거룩하기에 힘써야 하는 각 사람의 의무를 강조한 후 기도로서 예배가 시작된다
회당예배의 두 번째 순서는 바로 기도이다. 기도는 세 단계로 이루어지는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께 경의를 표함으로써, 그리고 하나님을 살아 있는 자들을 양육하시고 죽은 자들을 심판하시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으로 높임으로써 하나님 찬양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둘째 부분은 회개, 죄의 용서, 율법 연구의 능력, 핍박이나 기근 및 질병 등과 같은 재난들로부터의 구원 등에 집중한다. 이 기도는 또한 더 나아가서 메시야의 오심에 대해서 언급하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기도를 들으실 것을 요청한다. 세 번째 부분은 마지막 세 가지의 결론적인 기도인데, 이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개인적인 감사를 강조하며, 평화를 위한 기도로써 끝을 맺는다. 오늘날 교회 공동체에서 하는 기도와 유사하다.
세 번째 순서는 바로 율법의 낭독과 해석이다. 모든 유대인들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토라를 연구하고 그것의 가르침을 다음 세대에 전해주는 데 있었다. 그들은 회당예배를 드릴 때마다 토라를 낭독하였고, 토라의 낭독 뒤에는 설교를 행하였다.
설교는 낭독된 성경본문을 해석하고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적용하였다. 설교자들은 도덕적이고 신학적인 가르침을 목적으로 삼았고, 그들은 사람들이 기준으로 삼고 살아야 할 교리들과 율법들을 가르치면서 그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안겨 주었다.
그런데 이러한 회당예배가 초기 기독교 예배에 미친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다. 신앙을 확인하고, 특별한 관심사를 위하여 기도하며, 성경을 낭독하고 해석하고 설교하는 일 등은 초대교회의 예배로 연결이 되었고, 쉽게 기독교 예배에 적용되었다. 그러나 교리와 율법들을 적용하는 것은 차이가 있는 것이다. 고린도교회는 시작부터 문제가 많은 공동체였던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일년 육개월을 머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하나님의 말씀은 헬라어로 “톤 로곤 투 데우”(τὸν λόγον τοῦ θεοῦ)인데, 톤 로곤은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성경에서 적용되는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그 말씀 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신도가 성경 말씀을 문자적으로 보면, 어떤 사실을 말하고 있으며, 그 말씀을 통해서 교훈을 배우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성도는 그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말씀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드리면 바로 호 로고스가 되는 것이다.
바울은 호 로고스께서 하시는 말씀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그 당시는 신약성경이 문자적으로 적용되어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바울이 심령 속에서 임재하시어 환상가운데 나타나시는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고, 그 내용을 적용하여 사람들에게 설교로서 전하는 것이다.
항상 프로슈케의 기도를 하고 호 로고스와 대화를 나누는 사람의 경우는 문제가 안되지만, 갑자기 어떤 사람에게 계시가 주어진다면 참인지 가짜인지 분별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분명히 진짜인지 가짜인지 분별해야만 하는데, 영적으로 분별하기 위해서는 심령 속의 지성소로 들어가서 확인을 해야 하는 것이다. 지성소에 들어가서 머물고 호 로고스와 대화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대요리문답 178. 기도란 무엇인가? 답. 기도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바쳐 올리는 것인 바 우리 죄를 자백함과 그의 긍휼을 감사히 인정하면서 하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오늘날 신도들의 소원이 기복신앙으로 전환되어 기도의 본질이 왜곡되고 있다.
기도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심령 속의 하나님과 대화를 하는 것이다. 모든 기도가 복음과 연결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주기도문이라는 예를 통하여 기도의 방식을 말씀하셨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한 기도를 하라는 것이다. 개인의 기도도 이와 연계해서 기도하라는 말씀이다.
문 184.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기도할 것인가? 답.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 교회의 평화,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기도할 것이나 무엇이든지 불법적인 것을 위해서 기도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성도의 기도의 목적은 복음을 전파하는데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오늘날 신도들의 기도는 대부분 율법시대 회당에서 유대인들이 하는 기도를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7) 율법과 율법주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자는 구원을 받는 것이 복음이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준다. 그래서 희생제물을 통해서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 속에 복음이 있는 것이다. 율법은 세례요한의 때까지라는 말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의 마지막 선지자가 바로 세례요한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세례요한으로 주터 세례를 받고 공생애를 시작하시므로, 신약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즉 율법의 시대는 가고, 복음의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런데, 복음이 왔는데도,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을 하는 자들이 있다. 이들이 바로 율법주의자들인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 내에서 복음과 율법을 구분하여 말한다.『율법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구원받는다』라고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우리는 율법과 율법주의를 구분하지 못하면 이런 함정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율법주의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구원받는다』라고 말을 하는 것이 바른 말일 것이다. 교회에서 흔히 말하는 계명을 지켜 행하는 모든 행위들은 율법주의인 것이다.
율법과 율법주의를 구분하는 것은 구원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일이다. 율법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의 의에 이르도록 명령하셨다. 백성들은 율법의 계명들을 지키려고 했으나 지킬 수 없었다. 그래서 모두가 동물의 희생제사를 통해서 죄에서 벗어나려고 한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너희들은 모두 죄인들인데, 율법을 통해서 그러한 사실을 깨달으면, 희생제사를 통해서 약속의 씨(그리스도)를 발견하라는 것이다.
율법 속의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율법 속에 복음이 있다. 율법과 복음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그러나 율법주의는 다른 이야기가 된다.
죄인들은 동물을 죽여서 그 피를 제단에 뿌렸다. 제사장은 죄인으로부터 죄를 동물에게 전가시키고, 죄인을 대신해서 동물이 죽는 것이다. 그런데, 그 죽은 동물이 다름 아닌 죄인이라는 것이다. 비록 대신 동물이 죽지만, 죄인과 동물이 연합되어, 죄인이 죽은 것이다. 그래서 희생제사를 통해서 다시 태어남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연합되는 자는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새 창조에 속한다. 히브리서 9장 11절에서 이 세상의 창조와 같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과 니고데모가 서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요한복음 3장 1-9절에 나타난다.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말을 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3장 10절에서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비난의 말씀하신 것이다. 이스라엘 선생(랍비)들은 제사에 관한 규칙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제사를 통해서 죄인을 대신해서 동물이 희생당하고, 그 결과로 인해서 죄인이 죽고 다시 태어나는 진리를 왜 깨닫지 못하느냐 라는 의미가 된다. 이렇듯 율법 속에는 그리스도가 있다. 따라서 율법은 엄밀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인 것이다.
율법은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율법주의는 그리스도를 제거한 인본주의 사상인 것이다. 율법주의와 인본주의 사상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교회 안에서 만연한 율법주의(인본주의) 사상은 나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내세우게 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십계명이다. 십계명 속에서 죄를 발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계명에 얽매여 그것을 지키느니 마느니 하는 것이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계명이지만, 하나님의 죄인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향한 사랑을 생각하게 한다. 규정에 얽매이게 하는 것이 율법주의다.
또한 예수님을 닮아 거룩한 생활을 하도록 강요하거나,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도록 지침을 내리는 듯한 말도 다 율법주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을 하면서, 생활 속에서는 자기를 나타내려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시는데, 많은 목사들은 자기를 살리고 있는 실정이다. 모든 인간들은 죄인들이며, 하나님 앞에서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들로서,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삶 외에는 방법이 없음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한다. 『날마다 죽노라』라고 외치는 사도바울의 말을 기억하지 않으면, 율법주의(인본주의)에 빠져버리는 것이다.
율법주의에 빠지는 자들의 모습은 행동을 강조한다. 야고보가 말하는 규정을 들어서 거룩한 모습의 행동이 나타나도록 하는 것이다. 야고보서 2장 26절에서『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라고 말했다. 행함은 바로 율법주의를 버리라는 말이다. 그런데, 율법주의에서 벗어날 생각은 않고, 자기의 의를 들어내는 거룩한 모습의 행동을 행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율법주의에서 벗어나 복음으로 들어오라는 말씀이다.
거룩한 모습의 행동을 강조하는 자들은 율법주의(인본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다른 종교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율법주의(인본주의)를 섞는 기독교는 이미 참된 진리의 복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거룩한 모습의 행동으로 모든 종교가 통합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자각해야만 한다.
그래서 오늘날 성도는 교회 안에서 영적 분별이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영적 분별이 있으면, 열처녀의 비유처럼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복음과 율법주의(인본주의)가 섞여 있음을 알게한다.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도 마찬가지이며, 양과 염소의 비유도 마찬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10. 교회 공동체
(1) 성전과 교회 공동체
고린도전서 3장 16-17절에서『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성경에서 성전의 개념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까지 다양하게 변화되어 왔다. 첫사람 아담의 심령 속에 세워진 하나님의 형상에서 시작하여, 보이는 상수리 나무 돌 등 자연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을 지나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지시한 성소, 솔로몬 성전, 스룹바벨 성전, 헤롯 성전, 예수님의 육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 모든 성전은 다 무너져야만 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심령 속의 성전을 다시 세우기를 원하신 것이다.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시는 성전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성전인 것이다. 이 성전은 예수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한 것을 믿는 자에게 세워지는 성전이며, 이 성전이 세워진 자에게 성도라고 칭하여지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가 성전이며, 왕 같은 제사장이 된다. 교회라는 말도 성전의 개념으로서 성도를 의미한다. 성도가 교회라는 말이다.
심령 속의 성전에 성령이 계신다는 말은 성부와 예수 그리스도 성령이 함께 한다는 말이다. 구약시대 성전의 언약궤 안에는 성부와 예수 그리스도, 성령을 예표하는 것이 세가지 있었는데, 계명의 돌판과 맛나와 싹난 아론의 지팡이를 말한다. 히브리서 9장 3-4절『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금 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따라서 성령이 함께 하지 않는 곳은 성전이 아닌 것이다.
오늘날 교리는 교회를 유형교회와 무형교회로 구분한다. 그러나 성경 어느 곳도 이러한 말은 없다. 초대교회 당시 예루살렘 교회나 안디옥 교회라는 이름은 교회라기 보다는 교회 공동체라는 의미가 된다.
유형교회는 교회 건물을 의미하나, 이는 교회라기보다 예배당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무형교회는 오늘날 총회 등 교단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를 성전의 개념인 교회로 볼 수 있는가 라는 것이다. 무형교회는 성도들이 모인 교회 공동체라고 함이 타당할 것이다. 성도가 교회이며, 성도들이 모이는 곳이 교회 공동체이다. 그런데, 기독교 신도들이 주일에 모여서 예배를 하므로, 교회라고 지칭하며, 고유명사가 된 것이다. 따라서 교회 건물이 교회가 되어 버렸고, 교회라고 할 수 있는 신도는 교회라는 말 대신에 성도라는 말로 대체된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를 건축하거나 할 때, 성전 건축이라는 용어를 쉽게 사용하는데, 성전 건축은 잘못된 표현이다. 이미 눈에 보이는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무너져 버렸으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세우시는 하늘로부터 오는 성전이 참 성전인 것이다. 따라서 건물을 성전이라고 말을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참여하지 않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 성전인 하늘로부터 오는 성전을 받지 않은 자가 되는 것이며, 성령이 없는 자가 된다.
(2) 안식일과 주일
일반적으로 교회 사람들이 말하는 주일이라는 개념을 안식일을 대체해서 부르는 것으로 이해한다. 주일은 일주일 중의 한 날을 의미하지만 대체로 교회에서는 예수님을 주로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로서 일요일을 주일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구약시대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켰던 것을 대체해서 사용하는듯 하다. 그래서 주일성수라고 부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일을 거룩히 지켜라는 의미이다. 특별히 일주일 중에서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하는 것은 성경에 있는 내용이 아니다.
단지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말인데,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고, 예수님이 일요일에 부활했으므로, 그 날이 안식일이라는 주장이다. 성경에도 없는 말을 만들어 낸 것이다. 주일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주일을 거룩히 지켜라(주일성수)라고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주일은 일주일의 한 날인데, 무슨 근거로 주일을 안식일의 대체로서 거룩히 지켜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성경에서 안식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히브리서 4장 8-10절에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에게 안식을 주었다면 그건 가나안 땅이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하는 그림자이다. 참 안식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있다는 말이다.
참 안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들어가는 것이 바로 참 안식이다. 하나님이 참 안식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가 성령으로 연결되어 있으면 안식에 있는 상태에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성도는 이미 안식에 들어간 자이다. 따라서 안식일을 지키는 행위는 무의미해진 것이다. 마찬가지로 주일성수의 개념으로 주일을 생각한다면 안식일을 지키는 자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이들은 참 안식이 이루어지지 않은 자가 되는 것이다.
히브리서 4장 10절에서『이런 자들을 이미 안식에 들어간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옛사람이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새생명 가운데 태어난 자는 이미 안식에 들어간 자이다. 안식에 들어간 자에 대해서 자기의 일을 하지 말라고 하신다.
『자기의 일』이라는 말은 바로『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라든가『안식을 대체하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아직 안식에 들어간 자가 아니라』고 고백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거룩히 지켜야 안식에 들어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는데도 아직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는 경우와 별로 다르지 않는 것이다.
아직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지 못하므로 하나님 나라의 안식에 들어있지 못한 자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만이 이미 안식에 들어간 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주일을 일주일의 하루로 생각하고 성도들이 모여서 성경 공부하고 예배드린다면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주일을 거룩히 지켜야 하는 날로 생각한다면, 이런 안식의 의미를 깊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안식일(주일)을 거룩히 지켜야 하는 자는 현재 하나님 나라에 안식하지 못하고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거룩히 지킬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안식에 이미 들어간 것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면 될 것이다. 안식을 거룩히 지키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발견하여야 하는 율법주의에 있는 자라고 할 수 있다.
11. 천사
(1) 하나님을 보좌하는 영
천사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을 보좌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천사는 세 종류로 나뉘었다.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메신저, 범죄한 천사를 가두고 고소하는 악역을 맡은 천사들, 그리고 인간의 육체 속에 갇힌 천사들이다.
하나님을 보좌하는 천사들은 복음을 전하는 천사가 된다. 천사에 대해서 히브리서 1장 14절에서『모든 천사들은 섬기는(레이투르기카)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디아코니안) 보내심이 아니냐』
레이투르기카(λειτουργικὰ)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라는 의미다. 디아코니안(διακονίαν)은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는(봉사하는) 영이라는 것이다. 성경에는 천사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나타나 구원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섬긴다는 것은 종처럼 부리는 것이 아니라,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섬기듯이 한다는 것이다.
천사들은 그리스도에 관하여 광범위하게 사역했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위한 선구자와 구세주의 탄생에 대해(눅1:17, 눅1:30-38) 예언했으며, 그리스도께서 나셨음을 목자들에게 알렸다(눅2:10-12). 겟세마네에서 그리스도의 힘을 돋우어드렸고(눅22:43), 그분을 보호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마26:53). 부활하셨을 때 이들이 돌을 굴려 목격자들로 하여금 빈 무덤에 들어가게 해주었으며, 그리스도께서 이미 부활하셨음을 알려주기도 했다(마28:2-4). 이들은 부활의 증거를 지켰고(요20:12,13), 또한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에게 부활을 알려 주었다(눅24:4-7).
사도행전1장10-11절에서 천사들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것처럼 다시 오실 것을 내다보았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 지금, 선한 천사들은 복음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죄인이 구원받는 것을 기뻐하고 있다(벧전1:12, 눅15:10). 천사들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심판하실 때 눈부신 활동을 하게 될 것이다(마13:39, 41, 42, 49, 50, 살후1:7-10 등). 천사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하는 예들은 계시록에 많이 등장한다.
(2) 사탄과 그의 추종자들
범죄한 천사의 영이 흙에 갇혀 인간이 되었는데, 그 영을 관리하는 천사에 관한 이야기다. 일명 사탄, 마귀, 귀신, 어두운 영이라 불리는 천사들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하여 천사의 영이 흙에 갇혀 인간이 되었는데,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 되었다. 즉 그들은 사탄의 지배하에 있게 된 것이다. 세상에 살면서도 율법에 따라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 고소한다.
욥기에서 사탄은 고소자로 등장한다. 또한 세상에서 죄인이 감옥에 들어가면 반드시 기한을 채워야 나오는데, 만일 감옥에서 죽으면 형집행을 정지시켜 감옥에서 나오게 도 한다. 또한 죄인을 담당하는 천사는 죄인이 회개하여 의인으로 나아갈 때 정말 회개하는지의 여부를 시험을 치르게 하는 감독관 역할을 한다. 그래서 죄인이 사면을 받을 때 즉시 풀어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일곱 귀신들린 막달라 마리아를 죄에서 용서하시므로 귀신들이 나가는 것이다. 죄인들이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을 때 악역을 맡은 천사들은 그들에게 복음을 주는 천사로 바뀐다.
창세기 3장 24절에서『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그룹은 죄를 담당하는 천사들을 의미한다. 두루도는 불칼은 불세례를 의미한다. 죄인이 에덴동산으로 들어가려면, 죄에 대해서 죽고, 새사람의 옷을 입고 들어가야 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누가 그런 상태에 있는가 알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게 바로 그런 자격이 있는지 시험을 치는 것이다. 학생들이 시험에 합격하면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듯이 성도 역시 시험에 합격해야만 한다. 그 시험은 사탄이 예수님께 내는 시험이었다. 그 시험은 이런 식으로 내고 답은 예수님과 같이 하면 된다는 말이다.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알고 있는가에 대한 시험이다. 세가지의 시험이 있다. 첫째 시험은 돌을 떡덩이로 만드는 시험이다. 이것은 믿음에 대한 시험인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말을 하면서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지를 시험한다.
두번째 시험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 천사가 받들 것이다 라는 것이다. 이 시험은 인본주의 기복신앙과 관련있으며, 하나님을 원망하는 자를 가려내는 것이다.
세번째 시험은 영지주의에 대한 시험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말을 하면서도 우상을 숭배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돈이 우상이 될 수 있고, 세상이 우상이 되며, 자기 자신이 우상이 될 수 있다.
예수님을 시험하는 자는 악역을 맡은 천사였다. 천사가 사탄의 이름으로 시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험이 끝나자 천사는 본래의 위치로 돌아가서 하나님 아들에게 순종한다.
사탄 또는 마귀, 귀신, 어두운 영이라고 표현된 영적인 존재는 모두 천사인 것이다. 죄를 지은 천사, 즉 흙에 갇힌 영들을 관리하는 천사들인 것이다. 그러나 이 죄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 전환되는 것이다. 사탄이 따로 있고, 선한 천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역할에 따라서 마귀의 역할도 하고, 복음을 전하는 역할도 하는 것이다.
성도라 할지라도 죄의 문제가 발생하면, 천사가 갑자기 사탄이 되어 찌르기도 하는 것이다. 결국 죄를 짓지 않도록 보호하는 차원일 것이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사탄의 지배하에 들어가지만,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나가면, 천사가 하늘의 복음을 전하고, 죄를 짓지 않도록 돕고 보호하는 역할도 한다는 말이다.
(3)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은 천사들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천사들에 대한 이야기는 유다서 1장과 베드로후서 2장 4절에서 말하고 있다. 유다서 1장 6절에서『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베드로후서 2장 4절에서『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를 흑암에 가두었다는 것이다. 흑암이 바로 이 세상이다.
이 범죄한 천사들을 가둔 곳이 지옥이라고 불리는 이 세상이라는 말이며,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이다. 사람은 천사의 영이 흙에 갇힌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창세기 6장 1-13절에서『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천사의 영을 의미한다. 천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얻는다. 그런데, 사람의 딸은 누구인가? 바로 흙(아다마)을 의미하는 것이다, 영이 흙과 결합되어 사람이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들을 아내로 삼았다는 표현이다. 범죄한 영들은 하나님과 함께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을 떠나서 세상의 물질세계에 있으므로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범죄한 자들이 하나님께로 부터 쫒겨나서 물질세계에 오게 되었는데, 이것은 갇혀진 것이요 최종 심판은 유보되어 있지만 그것은 심판을 받은 것이요, 쫒겨나서 육체 안에 모든 것이 갇혀있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것은『하나님 없이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 없이 해보라고 하나님 나라에서 쫒겨난 것이 천지창조요, 세상에 쫒겨난 상태로 흙이라는 육체를 입고 인간으로 왔으니까 어두운 가운데 탄생한 것이요, 죄악 가운데 탄생한 것이요, 하나님이 없는 상태로 창조가 된 것이 천지창조의 요약이다.
욥기 38장 `1-4절『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무지한(다아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아자르)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욥은 세상에 태어난 범죄한 천사의 영을 상징한다. 다아드는 야다와는 다른 하나님의 지식이 아닌 범죄한 천사들의 A.I.(Angel Intelligence지능)을 의미한다. 이것이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탐욕이며, 이것이 천사들 개개인의 생각을 어둡게 한 것이다. 그들이 이 능력과 지식을 공유하므로 스스로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다.
하브리어 아자르는 묶다 라는 의미가 있으나, 여기서는 준비하라, 대비하라는 것이다. 너 자신을 사람으로서 준비하여 대답하라는 것이다『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하나님이 범죄한 천사의 영을 가두기 위해 물질세계를 만들었는데, 왜 만들었는지 아느냐 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물질세계를 만들고, 흙으로 된 사람을 창조하여 그 속에 영을 가두었으며, 그들은 사탄의 지배를 받는 자가 된 것이다. 하나님은 욥을 통해서 세상에 살고 있는 인간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특히 욥기가 읽어질 당시에는 이스라엘이 멸망하여 이민족의 지배를 받던 시기였다. 그들은 조국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렸다. 마찬가지로 세상에 살고 있는 모두가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신다.
하나님이 없는 상태로 범죄한 자들이 쫒겨나서 어두움 가운데서 죄악된 상태로 태어나서 하나님이 세상에 보내어진 인생들에게 하시는 말씀은『나 없이 의를 이루어 보라』는 것이다. 해 본 결과가 하나님께서 모든 생명있는 것들, 사람, 짐승, 새 등 모든 것들을 지면에서 쓸어버릴 수 밖에 없는 그런 심판을 받게되는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즉 하나님없이 살아본 결과를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없이 살아본 결과 멸망에 이르게 된 결과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