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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극대도] 1권 제2장 악몽(惡夢)에서 벗어나다 ① "형, 제발 옷 입어." "헤… 싫다, 뭐." "제발, 응?" "안 해!" 벼락같이 고함을 치는 단천목의 눈알이 희번덕거렸다. 흰자위가 절반 이상을 차지한 눈에는 광기가 번뜩였다. 화가 났는지 가슴은 오르락내리락하고 입가에는 허연 게거품이 물렸다. 차라리 대신 죽어 줄 수는 있었다. 그러나 형이 남들에게 조롱감 이 되게 놔둘 수는 없었다. '미안해, 형.' 단호삼은 한숨을 쉬며 손을 뻗었다. 무력을 써서라도 바지를 입히 기 위해서였다. 한데 그가 막 단천목의 상체를 잡았을 때였다. "놔! 놓으란 말이야, 이 새끼야!!" 퍼퍼퍼퍽! 버둥대는 단천목의 주먹이 얼굴에 작렬했다. 주먹에는 괴이할 정 도로 강한 힘이 들어 있어 순식간에 단호삼의 입술이 터지고 코피 가 주르르 흘렀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정말이지 형이 때리는 매라면 몸이 으스러 져도 좋았다. 하지만, "장훈아, 제발 놔줘, 응? 난 죽으면 안돼. 호삼이를, 착한 내 동 생을 돌봐야 한다 말야. 제발……." 안고 있던 팔이 스르르 풀렸다. 바지를 치켜올리던 손도 멈추었 다. 단천목의 곱사등이 총알처럼 퉁겨 나간다. "히잇! 봐라, 이게 뭐게?" 깡충거리다 여인들 앞에서 아랫도리를 내밀고 있다. 자신이 남자 임을 증명이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그러나 단호삼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랬단 말이지. 그 상황에서도 형은…….' 하얗게 탈색된 뇌리 속으로 단호삼이 보지 못했던 십 년 전의 일 이 그려지고 있었다. 낭떠러지로 부둥켜안은 두 몸이 떨어졌다. 장훈은 너무 두려워 형 을 더욱 세차게 껴안았을 것이고, 똑똑한 형은 두 사람이 함께 떨 어지면 가속도가 더해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장훈을 떨쳐 내려 했을 것이다. 덩치만 큰 동생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사정도 했을 것이다. 제 손 으로 끼니조차 구하지 못하는 동생을 위해 그 날도 남의 집 소작 을 해주러 갔을 때처럼. 단호삼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있다면…….' 한 번 엎질러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듯이, 흘러간 시간도 돌이킬 수 없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눈물이 났고, 큼직한 손 등으로 눈물을 쓱 훔쳤을 때였다. "에랏, 이 미친놈아!" 퍽! "악!" 낯선 사내의 욕설과 격타음, 그리고 단천목의 비명이 동시에 들렸 다. 이어 '꽈당!' 하는 소리가 들리며 쪼그리고 앉아 있는 단호삼 앞 으로 이지러진 한 얼굴이 나타났다. 단천목이었다. 단천목은 입가 로 선홍빛 피를 흘리고 있었다. "혀엉―!" 대경한 단호삼은 단천목의 몸을 안고 마구 흔들었다. 머리가 흔드 는 대로 흔들렸다. 혹시 죽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단호삼의 안색이 시퍼렇게 질 렸다. "정신 차려, 형!?" 그때였다. "아퍼……." 다행이다. 죽지 않았다. 그럼 된 것이다. 단호삼은 애써 미소를 보이며 물었다. "형, 괜찮아?" 단천목을 헤벌레 입을 벌렸다. 벌린 입안에 보기에도 시뻘건 핏물 이 가득 고여 있었다. "헤, 쟤가 때렸져." 단호삼은 고개를 돌려 앞을 쳐다보았다. 자신 또래의 세 명이 이죽거리며 서 있었다. 아는 얼굴이다. 어딜 가나 똥파리가 있지 않은가. 더욱이 이렇게 화창한 봄날에는 더욱 기승을 부린다. 그렇다고 보이는 대로 때려잡을 수는 없지 않은 가. 애당초 똥파리들에게 여건을 제공한 잘못도 있으니까. 다시 고개를 돌린 그는 단천목의 바지를 입혀 주고는 한숨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가자." "싫어! 복수할 거야." 불퉁한 말이 단천목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리고 단호삼이 막을 사이도 없이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고 달려들고 있었다. "덤벼, 응? 덤벼." "하… 참!" 세 사내들은 어이가 없었다. 개구리처럼 팔딱팔딱 뛰며 주먹을 뻗었다 거두었다 하는 꼴이라 니. 문득 가운데 있는 사내, 즉 서문황(西門荒)의 눈에 언뜻 살기가 스쳤다. 그렇잖아도 눈독들이고 있던 계집이 어떤 놈팡이에게 시 집간다는 소식에 속이 상할 대로 상해 낮술을 몇 잔 걸친 차였던 그는 오히려 잘됐다 싶었다. "병신, 꼴값 떨고 있네." 낮게 으르렁거리던 서문황은 대뜸 주먹을 날렸다. 퍽! 단천목의 목이 오른쪽으로 홱 돌았다. "악!" 하는 비명은 땅에서 두 자 가량 허공을 붕 나르다 바닥에 푹 처박힌 후에 들렸다. 성큼 한 발 다가간 서문황은 오른발을 번쩍 쳐들었다. "이런 병신은 그저 밟아 죽……." "지금 뭐하는 짓이오?!" 그때였다. 바람같이 달려온 단호삼이 몸을 떠밀자, 서문황은 그만 중심을 잃고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고, 엉덩 이가 땅에 닿기가 무섭게 벌떡 일어나는 서문황의 얼굴은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② 수치심으로 물든 서문황의 눈으로 허리를 굽혀 단천목을 일으키는 단호삼의 큼직한 엉덩이가 가득 들어왔다. 달려들 필요도 없이 차 기에 딱 알맞은 거리였다. "이… 죽어!" 서문황은 정말 죽이고 싶었다. 그래서 발끝에 온 힘을 모아 차 올 렸다. 단호삼의 낭심을 향해. 한데 이 무슨 빌어먹을 경우란 말인가? 하필이면, "괜찮아, 형?" 단호삼이 쓱 몸을 일으켰고, "어, 어……." 허탕을 친 서문황의 두 팔이 풍차처럼 돌아갔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하였다. 하나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문황은 자신의 몸이 허공에 뜨는 것을 느껴 야만 했다. 그리고 뻣뻣하게 뒤로 넘어지는 서문황의 머리가 땅에 부딪히는 순간, 빠악―! 두개골이 부서지는 섬뜩한 소리가 들리며 서문황의 머리에서 마치 물에 젖은 종이에 빨간 물감이 퍼지듯 시뻘건 핏물이 흘러내리는 것이 아닌가. 불행히도 그가 넘어진 곳에 뾰족한 돌이 솟아 있어 그의 머리가 박살난 것이다. 부릅떠진 눈으로 사지를 벌벌 떨던 서문황은 곧 잠잠해졌다. 하나 그것도 잠시. "서문공자가 죽었다아―!" 이를 두고 모진 놈 옆에 있으며 날벼락을 맞는다고 했던가? 포졸 표인랑은 포승줄로 칭칭 감긴 단호삼의 듬직한 뒷모습을 안쓰러운 눈으로 보았다. '착한 사람이 어쩌다가… 안됐어.' 그는 한숨을 쉬며 위로의 말을 하였다. "너무 걱정 말게. 증인도 있고 하니 잘되겠지." 그러면서도 표인랑(標仁琅)은 자신할 수가 없었다. 죽은 사람이 보통 사람이라면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서문황은 장안현감조차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집안의 자식인 것이다. 그것도 하나밖에 없는 삼대독자였다. 돈은 곧 힘이고, 힘은 곧 권력이다. 그런 서문대인이 증인 하나쯤 못 구슬릴 위인이 아니다. 더욱이 불리한 것은 바로 현장에 있던 두 사내였다. 두 사내는 서문대인의 전답으로 농사를 짓는 소작농 의 자식으로 서문대인의 하인이었다. "형은요? 제 형은 어찌 되었습니까?" "응… 응?" 단호삼의 말에 표인랑은 생각에서 벗어났다. "아, 자네 형 말이지?" "예. 어떻게 됐는지 아시면 말씀을 좀……." 이 상황에도 오직 단천목에 대한 걱정뿐인 모양이다. "이 판국에… 사람도, 자네 형은 당분간 강노인이 데리고 있겠다 고 했네. 그리고 강노인이 자네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겠다고 했네." 한참만에 단호삼의 대답이 들렸다. "……다행이군요." 무엇이 다행이라는 걸까? 형의 안위가? 자신의 무죄를 증명해 줄 사람이 있어서? 아마 단호삼의 성격으로 보아 단천목을 거두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말함이리라. 두 사람 사이에 복도만큼 어둡고 칙칙한 침묵이 흘렀다. 열다섯 명씩 들어 있는 감방 다섯 개를 지나 이윽고 제일 끝 감방 앞에 도착한 표인랑은 단호삼의 포승을 풀어준 다음, 허리춤에 꿰 고 있던 열쇠 뭉치를 꺼내 자물통을 열었다. 철컹! 하는 소리가 복도 끝까지 날아가다가 되돌아왔다. 이곳이 반지하 감방인 까닭이었다. 옥문(獄門)을 연 표인랑은 단호삼을 돌아보며 미안한 듯 웃어 보 였다. "호삼, 자네도 알다시피 얼마 전에 종남파의 영웅들과 우리 관군 들이 곡서령(谷西嶺)의 산적들을 토벌하지 않았나? 그래서 빈 감 방이 없다네." 곡서령은 섬서성과 장안현을 잇는 능선으로 평소에 산적들의 출몰 이 잦은 곳이다. 그래서 두어 차례 토벌하기 위해 관병이 파병됐 으나 여느 산적들보다 흉악했고, 무공도 상당히 뛰어나 관병들은 사상자만 내고 패퇴하였다. 그런 차에 구파일방의 하나인 종남파 (終南派)와 손을 잡고 산적들을 토벌한 것이다. 이는 보름 전에 벌어진 일로 이번 토벌작전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종남파 무인들의 눈부신 활약으로 산적두령인 독심검(毒心劍) 팽 후(彭珝)를 비롯해 많은 산적들을 잡을 수 있었다. 일당들 몇 놈 이 그 와중에도 도망을 쳤지만 별로 신경 쓸 일은 아니다. 똥줄이 빠지도록 도망을 갔으니 앞으로는 산적 짓을 하지 않을 것이 뻔했 다. 하더라도 적어도 곡서령에서 하지 않을 테니까. ③ 그 소문은 들은 적이 없다. 현에 들어오자마자 이 꼴을 당했으니 까. 하지만 지금 그깟 게 무슨 상관인가. 단호삼은 씁쓸하게 웃으 며 대답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표포두님." "감사는 무슨, 너무 걱정 말고 며칠만 기다리게. 설마하니 자네같 이 착한 사람을 어찌하겠나?" 단호삼은 바보가 아니다. 그는 자신이 풀려나기가 그리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럼." 허리를 숙이고 옥문으로 들어가는 단호삼을 처연한 눈빛으로 쳐다 보던 표인랑은 돌연 얼굴을 싸늘하게 굳히며 소리쳤다. "너희들! 만약 저 친구 몸에 손가락 하나라도 대면 죽을 줄 알 아!" 누군가 이죽거렸다. "쓰팔, 어차피 죽일 거면서, 공갈치고 있네." 표인랑의 눈썹이 꿈틀 솟구쳤다. "누구야?!" "……." 대답이 없다. 표인랑은 박달나무로 만든 육각방망이로 철창을 탕탕! 치며 으름 장을 놓았다. "죽기야 죽겠지.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네놈들을 장마철에 먼 지가 풀풀 날 만큼 작신 패죽였다고 내게 뭐라 할 사람은 없어! 어때? 그렇게 해줄까?" 대답이 있을 리가 없다. 잠시 더 감방 안을 쏘아보던 표인랑은 조 금 누그러진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가끔 들를 테니까, 알아서 해." 칙칙한 어둠이 감싸인 감방에 들어서는 순간, 눅눅한 습기와 오물 냄새가 온몸을 감아왔고, 복도에 걸린 횃불에 반사되어 번들거리 는 것은 개기름이 줄줄 흐르는 얼굴과 일곱 쌍의 눈이었다. 여섯은 손에 철수갑만 차고 있었다. 그리나 한 사람, 그는 구석진 곳에서 칼을 목에 걸고 있었고 그것도 모자라 발목과 손목에도 족 쇄가 채워져 있었다. 표인랑이 사라지자 누군가가 가래침을 뱉으며 욕설을 하였다. 좀 전의 목소리였다. "쓰팔, 창자 꼬여서 이거야 원, 뚜껑 열리게 만들고 있어." 인간 몸에서 무슨 뚜껑이 열리는지 몰라도 하여튼 한 사내가 몸을 일으켜 단호삼 앞을 가로막았다. 역삼각 얼굴에 한마디로 밥맛 떨 어지게 생긴 상판이었다. 사내의 눈이 단호삼의 발부터 위로 훑듯이 올라왔다. "햐아! 거, 더럽게 크네." 단호삼은 고개를 숙였다. 지척에서 보니 마빡에 '나는 나쁜 놈이 오.'라고 쓰여 있을 만치 자유분방하게 생긴 얼굴이었다. 문득 사내의 얼굴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씹새야, 무릎 꿇어." 씹새가 무슨 말인지 몰라도 욕인지는 안다. 그리고 상대가 키 때 문에 무척 기분이 나쁜 상태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단호삼은 그 저 쉬고 싶을 뿐이었다. "날 내버려두시겠소?" "어쭈! 이 자식이!!" 순간 사내의 눈에 시퍼런 불길이 확 솟구치는가 싶더니 오른발을 날렸다. 생김새와는 달리 제법 당찬 발길질이었다. 팍! 삐걱! 사내의 발등이 단호삼의 허벅지에 모질게 박혔다. "아이고, 내 발!" 뜻밖에도 사내가 목청껏 비명을 외치며 발목을 잡고 깡충거리자, 쓰윽! 다섯 사내가 일어났다. 그들도 역시 예사롭지 않게 흉악무도하게 생긴 작자들이었다. "왜 그래, 영구(永求)?" 그 중 누군가가 물었고, 도영구는 발목을 삔 모양인지 눈물을 찔 끔거리며 아예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발목을 주무르며 더듬거렸 다. "저, 저놈 허벅지가 돌덩이입니다요." "미친, 그렇다면……." 말을 하는 도중 그 사내는 두 손으로 단호삼의 멱살을 틀어쥐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놈이 무슨 금강불괴(金剛不壞)라도 된단 말인가?" 도영구의 대답이 나오기 전에 사내는 단호삼에게 얼굴을 바짝 갖 다대었다. 눈높이가 거의 비슷한 것으로 보아 사내도 대단한 키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누런 이빨에서 풍기는 고약한 냄새보다 더 인상을 쭈그러뜨 리며 물었다. "그런 거야, 응? 정말 네가 금강불괴냐?" 평상시 같으면 웃으며 받아넘길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알 수 없 는 분노와 단천목에 대한 걱정으로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지 않은 가. 단호삼은 싸늘한 음성을 토했다. "이 손, 놓으시오!" 소두목이라는 자존심이 구겨지듯 사내의 얼굴이 와그짝 구겨지는 순간이었다. "이 자식이!" 열이 받친 사내는 단호삼을 자신의 몸 쪽으로 끌어당기며 사타구 니를 향해 무릎을 차올렸다. 철갑에 묶인 두 손은 멱살을 잡고 있 었고, 바짝 붙어 있는 관계로 공격 수단은 무릎뿐이었다. 하지만 사내는 곧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④ 당연히 딸려와야 할 상대가 딸려 오지 않았고, 자신의 무릎이 중 간에서 단호삼의 손바닥에 막혔다는 느낌이 오기 전에 시커먼 물 체가 날아들었다. 팔꿈치였다. 순간, 쩌억―! 관자놀이를 가격당한 사내의 몸이 쿠당탕 하고 내동댕이쳐질 때에 는 이미 혼절한 상태였고, 그의 손에는 찢어진 옷자락이 쥐어져 있었다. 가슴팍의 옷이 뜯겨나가자 온통 털이 덮여 있는 단호삼의 가슴이 드러났다. 가늘게 호흡을 할 때마다 털 속에 숨은 근육들이 꿈틀 거렸다. 때리기보다는 맞는 데에 익숙한 단호삼은 그리 썩 유쾌한 기분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약한 모습을 보이기는 싫었다. 단호삼은 서늘한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날 좀 건드리지 마시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잠시 멍해 있던 사내들은 그제야 정신이 번 쩍 들었다. "뭐야!" "이 자식이 우리가 누군 줄 알고!" 사내들은 생김새만큼이나 엄청난 욕을 저마다 하였다. 하나 욕만 큼 그들의 행동은 빠르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거리를 좁히는 것이 자신들은 손이 부자연스럽고 단호삼은 자유스럽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게다가 철탑 같은 몸집과 단 한주먹에 자신들의 상전 인 소두목을 날려보냈다는 사실도 더불어 깨달은 것이다. 단호삼은 아랫입술을 잘끈 깨물었다.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면 이제는 피하지 않겠다!' 마치 자기 최면이라도 거는 듯이 다짐하는 단호삼의 전신 근육이 처음 느끼는 긴장감에 경악하며 경련을 일으켰다. 그때 문득, 사내들 뒤에서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물러서라! 너희들 상대가 아니다." 누구의 명이라고 거역할 것인가? 그렇다고 맥없이 물러나기도 뭐 했던지 사내들은 단호삼을 째려보았다. 개중에는 주먹을 쥐어흔들 며 '너, 죽었다고 복창 해.' 하고 입술만 달싹거리는 사내도 있었 다. 한차례의 힘겨루기는 단호삼의 승리였다 사내는 자신의 옆자리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생김새와는 다르게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이리 와서 앉게." 단호삼은 처음으로 목에 칼을 두르고 있는 사내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세모꼴의 눈을 가진 삼십 중반의 그 사내 얼굴에는 지렁 이가 기어가는 듯한 칼자국이 있었다. 한눈에도 세상을 험악하게 살아왔음을 알 수 있는 이 사내가 바로 곡서령을 주름잡던 독심검 팽후였다. 종남파의 고수들이 아니었으면 아직도 산중왕(山中王)을 자처할 작자였다. 원래 팽후는 강남(江南)에서 제법 이름 깨나 떨치던 낭 인무사였다. 그런 그가 일개 산적의 두령이 된 사연 은 한마디로 전(前)두령인 황영(黃英)의 눈이 완전히 삔 까닭이었다. 감히 제 분수도 모르고 곡서령을 넘던 팽후의 금품을 털려 했으니까. 단칼에 황영의 목을 베어버린 팽후의 놀라운 무공에 산적들은 기 겁을 했고, 그들의 간곡한 부탁으로 낭인무사보다 산적 생활이 더 편하겠다는 생각에 곡서령에 주저앉은 것이다. 이러한 팽후에 대한 소문은 들은 적이 있는 단호삼은 그의 부드러 운 음성에도 불구하고 묘한 거부감이 생겨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말은 고맙소만, 사양하겠소." 이어 그는 팽후의 반대편에 가서 앉았다. 벽에 기대고 무릎을 세 워 얼굴을 파묻었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을 행동으로 보인 것이다. 하지만 눈치가 없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팽후는 계속 이런저런 것을 알고 싶어했고, 단호삼은 계속 침묵으로 일관했다. 독심검이 라는 외호를 가진 사람답지 않게 주절거리던 그는 더 이상은 견디 기 어려웠던지 조금은 쑥스런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 치켜올 렸다. "무척 과묵한 친구로군." 팽후는 눈을 스르르 감으며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산적이라고 얕보지나 않았으면 좋겠어." 팽후는 결코 눈치가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곧 사형이 집 행될 사람치고는 신기할 정도로 태연했다. ⑤ 장안현감(長安縣監) 심학균(沈學均)의 처소. 관복을 입은 사순 가량의 청수한 중년인과 염소수염에 욕심으로 가득한 눈을 가진 오순 정도의 화의노인이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 주앉아 있었다. 탁자 위의 찻잔이 비어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대화를 나눈 듯 했고, 관복을 입은 중년인의 얼굴에는 아무 변화도 없는 반면 화 의노인의 얼굴은 무엇 때문인지 벌겋게 달아오르다 못해 아예 검 붉게 변해 있었다. 씨근덕거리며 중년인을 째려보던 화의노인은 손바닥으로 탁자를 거칠게 내리치며 언성을 높였다. "얼마면 되겠소, 심현감?" 심학균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글쎄, 이번 일은 돈으로 해결할 일이 아니라니까 자꾸 그러시 네." 원래 심학균은 작은 고을의 현감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위인이라 이번이 중앙으로 진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여겨 곡서령의 산적 들을 토벌한 후 섬서성주에게 보고했고, 섬서성주는 또 상부에 연 락을 취한 결과 금부도사가 친히 죄수들을 데리러 가겠노라 하는 전갈을 받은 터였다. 그래서 한참 보랏빛 꿈에 젖어 있는 이때에 반갑잖은 일이 터진 것이다. 물론 평소 같으면 서문영호에게 받은 뇌물도 있고 하니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을 테지만 지금은 시기가 좋지 않았다. 더욱 곤란한 것은 단호삼에 대한 평판과 그를 아끼는 사람들의 움 직임이었다. 화의노인, 즉 서문대인이라 불리는 서문영호의 눈썹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이유는 역시 금부도사(禁府都事) 때문이오?" "그렇기도 하지만……." 심학균이 말끝을 흐리자, 서문영호는 다급히 물었다. "다른 이유가 또 있단 말이오?" "……." 심학균은 대답 대신 열심히 잔머리를 굴렸다. '이거 그냥 모른 체해 버려? 아니지. 그러다 금부도사에게 고자질 이라도 하면? 설마 그러면 저도 걸리는데… 아냐. 저 눈 좀 봐. 아들 때문에 완전히 제정신이 아냐.' 생각할수록 골이 띵했다. '왜 하필 이럴 때 죽어 가지고,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어?' 아무리 생각을 해도 답이 안 나오자 심학균은 평소대로 하기로 마 음먹었다. 그는 자신의 입만 주시하는 서문영호의 눈을 똑바로 보 며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대인과의 돈독한 관계를 생각하면 백번, 천번이라도 들어 드려야 겠지요. 하나 대인도 알다시피 단호삼에 대한 백성들의 평판이 좀 좋았소? 그런 단호삼을 판결도 없이 처형한다는 것은 좀 그렇고. 또 지금 강노인이 단호삼은 무죄라고 떠들고 다니면서 탄원서를 만들며 금부도사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소. 사정이 이러한데 어 떻게 단호삼을 빼돌릴 수가 있겠소? 잘못하면 본관이……." 심학균은 수도(手刀)로 자신의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며 혀를 길게 빼물며 한쪽 눈까지 찡끗하지 않은가. 보통 때 같으면 우스꽝스런 그의 몸짓에 크게 웃었을 것이나 서문 영호는 오히려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독자(獨子)를 잃어 졸지에 대(代)가 끊긴 사람 앞에 무슨 짓거리란 말인가? 마음 같아서는 이놈, 저놈 다 싸잡아 죽이고 싶었다. 하나 그럴 수는 없고……. 서문영호는 미간을 찌푸리는 것으로 대신하며 퉁명하게 입을 열었 다. "노부에게 확실한 증인이 있지 않소?" '이런 눈치 없는 늙은이 같으니! 눈짓을 줘도 몰라?' 심학균은 내심 분통을 터뜨렸다. 눈짓으로 안되니 조금 쑥스럽지 만 언질이라도 줘야 할 판이다. 그는 턱수염을 어루만지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증인이라는 그들도 서문대인의 사람이고 하니 좀 그렇고. 문제는 강노인인데. 그만 없다면 어떻게 될 것도 같은데……." 순간 서문영호의 머릿속이 환해졌다. 더 이상 여기에 앉아 뭉그적 거릴 이유가 없었다. "알았소!" 벌떡 일어나 나가는 서문영호의 등에 대고 심학균은 다급히 말했 다. "오천 냥이외다, 대인." ⑥ 그 날 삼경 무렵. 고서점에 딸린 작은 방에서 곰방대에 연초 가루를 밀어 넣고 있던 강노인은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단천목을 보고 있었다. 오늘만도 벌써 다섯 끼니째다. 강노인이 듣기에는 그리 많이 먹지 않는다고 들었다. 한데 동생이 지금 어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해 있는 데 형이라는 작자는 더욱 식욕이 돋는 모양이었다.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쯔쯔! 단장공만 불쌍치……." 그 말을 들었는지 밥그릇에 코를 박고 있던 단천목이 고개를 들어 천치답게 웃었다. "헤… 단장공이 누구야?" 밥알로 얼굴에 도배를 한 단천목의 볼썽사나운 모습에 강노인은 곰방대를 빨며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네 동생이지, 누구긴 누구야!" "동생?"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 속으로 되새기던 단천목은 돌연 밥그릇을 집어던지며 큰소리로 울었다. "호삼아! 호삼아… 아… 앙앙!" 뜻밖의 울음에 강노인의 눈이 둥그래졌고, 단목천은 발을 버둥거 리면서 두 손에 잡히는 물건을 마구 집어던지며 더욱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엉엉, 호삼아! 집에 가자. 어디 있니?" 어찌나 서럽게 우는지 강노인의 콧등이 다 시큰해졌다. "에구, 저 바보도 뭔가 아는 모양이야." 담배 연기 때문인지 아니면 단천목이 슬프게 우는 모습 때문인지 강노인은 고목처럼 앙상한 손가락으로 눈두덩이를 찍다가 갑자기 땅바닥을 치며 통곡했다. 전장에서 죽은 아들 생각이 났던 것이다. "아이고오! 춘호야, 춘수야! 이놈들아 이 아비 혼자 어찌 살라고 … 에구, 에구… 천하에 불효막심한 놈들 같으니라고……." 사람의 눈과 체면 때문에 남몰래 이불 속에서나 꺼이꺼이 울어 왔 었다. 그렇게 이를 악물고 참아 왔는데, 한 번 울음이 터지자 가 슴속에 묻어두었던 설움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어? 나보다 더 크네. 아앙― 앙!" 강노인이 자신보다 더 큰소리를 내며 울자, 단천목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 더 크게 울었다. 이제 그의 머리에서 동생에 대한 생각은 떠났다. 오직 강노인보다 더 크게 울면 되는 것이다. 이것도 울음이라고 할 수나 있을는지……. 삽시간에 방안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강노인의 표정을 곁눈길로 힐끔거리면서 울음 조절을 하던 단천목의 기분이 한창 즐거울 때 였다. "울다 죽은 조상이 있나? 왜 이리 찡찡거려!" 거친 음성에 이어 문짝이 거칠게 열렸다. 이어 두 개의 험상궂은 얼굴이 쑥 들어오는가 싶더니 욕심으로 가득한 초로의 노인이 나 타났다. 서문영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강노인은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 나며 소리쳤다. "대인이 어쩐 일이오?" 그러다 험상궂은 사내의 손에 들린 시퍼런 칼에 시선이 닿자 번개 같이 스치는 불길한 생각에 강노인은 볼이 실룩거렸다. 목소리까 지 떨려 나왔다. "설마 노부를 죽이려고?" 하나 서문영호는 그를 보고 있지도, 그 말에 대꾸하지도 않았다. 그의 눈은 아직도 억지울음을 터트리는 단천목의 얼굴에 못박여 있었다. '저 등신 때문에 내 아들이 죽었단 말인가?' 보기만 해도 한심하기 짝이 없는 모습에 서문영호는 죽은 서문황 이 더욱 한심스러웠다. 무슨 협행(俠行)을 하다가 악한(惡漢)의 손에 죽은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악한 짓을 하다가 죽은 것이 다. 그것도 칼에 맞아 죽은 것이 아니고 제풀에 넘어져 돌부리에 대갈통이 터져 죽었다. 그렇다고 복수를 안할 수는 없지 않은가. 서문영호는 빙글 몸을 돌리며 짤막하게 외쳤다. "죽여버려." ⑦ 단호삼은 꿈을 꾸지 않았다. 십 년 동안 유령처럼 따라다니던 악 몽을 꾸지 않아 참으로 오랜만에 달콤한 잠을 잘 수가 있었다. 하도 신기해 꿈결에서 단호삼은 생각했다. 악몽도 자신처럼 갇힌 것 같다고……. "이봐, 이봐! 일어나." 누군가 몸을 흔들고 있다. 그러나 실로 오랜만에 포근한 수면에 빠져 있던 단호삼은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잠을 방해하 는 사람이 지쳐 멈추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방해자는 단호삼만큼이나 끈질겼고, 방해자는 마침내 비장 의 무기를 쑤셔 박았다. "이봐, 네 보호자가 찾아왔다." 보호자라면 형인 단천목밖에 없지 않은가. "형이 왔다고!?" "저기 보라구. 보호자가 왔지." 자지러지듯 일어나 사내의 턱짓에 시선을 돌린 단호삼은 적잖게 실망했다. 철창 밖에 보이는 얼굴은 기다리던 단천목이 아니라, 표인랑이었다. 표인랑이 손을 까닥거리며 불렀다. "호삼이, 이리 와 보게. 할말이 있다네." 왠지 표인랑의 신색이 그리 밝지 않다는 것은 혼자만의 생각인가? 철창으로 다가간 단호삼은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잠시 단호삼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표인랑은 한숨을 푹 쉬며 운을 떼었다. "이런 소식을 자네에게 알려야 하나 하고 무척 망설였네. 그렇다 고 숨길 수도 없고 해서……." 말끝을 흐린 표인랑은 잘게 흔들리는 단호삼의 눈을 마주볼 수 없 어 슬며시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어젯밤에 강노인 집에 불이 났다네. 그리고 좀 전에야 겨우 진화 가 끝이 났는데… 시신 두 구가……." "시체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철창을 왈칵 붙잡은 두 손이 부르르 떨렸다. 불길한 생각이 떠오 르기 전에 목구멍 저 밑에서 무언가가 치밀어왔다. "설마하니 그 시체가 바로……." 두렵다. 생각도 두렵고, 말하기조차 두려워 단호삼은 끝까지 말하 지 못했다. 한참만에 표인랑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면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 다. "……강노인과 자네 형이었네." 터엉! 팽팽히 당겨진 시위가 끊어지는 소리를 귀로 들은 단호삼의 동공 이 급격히 풀어졌다. 마치 단천목이 십 년 동안 보여 주였던 그 눈처럼. "아냐, 아냐. 그럴 리 없어… 그럴 리가……." 다리가 휘청거렸다. 강철같은 근육으로 뭉쳐진 허벅지에서 힘이 쭉 빠져 나가고 텅 빈 뇌리로는 단천목의 약간 모자라는 듯한 웃음소리만 들렸다. "형이 왜 죽어……. 그럴 리가 없어." 똑같은 말만 반복하던 단호삼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미끄러지 듯 스르르 주저앉고 말았다. 그 모습을 처연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던 표인랑은 깊은 탄식을 토 했다. "휴우! 호삼, 몸조심하게. 아무래도……." 뭔가 말하려던 그는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몸을 돌렸다. "가겠네." 그때였다. "잠깐, 잠깐만요." 표인랑의 몸이 멈칫하는 사이 철창 너머로 한 얼굴이 나타났다. 제일 쫄다구인 도영구였다. 심기가 편치 않은 표인랑의 눈썹이 상큼 치솟았다. "뭐야?" 거친 말투에 도영구는 찔끔하며 쫄다구다운 비굴한 웃음을 짓고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두령님이 무슨 일인지 알아보라고 하셔서……." "미친, 곧 죽을 놈들이 조용히 염불이나 외고 있지 왜 나서는 거 야." 그러면서도 표인랑은 주섬주섬 단호삼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 했다. 제놈들도 소위 인간이라면 슬픔에 잠긴 단호삼에게 위로의 말을 해주려니 하는 기대를 하면서. 하나 그는 곧 이놈들은 인간 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만 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도영구의 입에서 나온 소리가 대뜸 이랬다. "뭐, 별거 아니구먼. 그런 천치가 죽었다면 기뻐할 일이지 울긴 왜 울어." "뭐야! 이 자식이 어디 함부로 주둥이를 놀려!" 부화가 머리꼭대기까지 치밀어 오른 표인랑의 팔이 번쩍 올라갔을 때였다. 휘익! 하는 소리에 이어, 빠각! 뼈가 부러지는 섬뜩한 소리에 표인랑의 눈이 휘둥그래졌고, "죽어!" 단번에 도영구의 턱주가리를 날려 버린 단호삼은 그래도 분이 풀 이 풀리지 않아 바닥에서 '나 죽네.' 하며 뒹구는 도영구를 사정 없이 걷어찼다. "악!" 비명을 지르며 일 장 밖의 벽에 부딪혀 퉁겨 나오는 도영구의 눈 이 허옇게 까뒤집혀져 있었고, 입에서 피가 분수처럼 뻗어 나왔 다. 일견(一見)에도 중상 내지는 사망 같았다. "이 새끼! 또 주먹질이야!" "이젠 도저히 못 참아!" "죽어랏!" ⑧ 퍼퍼퍽퍽! 쿵당! 콩 볶는 듯한 소리에 이어, "아이고오! 코뼈가 부러졌다." "난, 갈비……." "난, 다리가……." 그리고, "이럴 수가? 어떻게 이런 일이……." 표인랑은 쩍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행여나 단호삼이 다칠까 봐 감옥 안으로 들어가려던 그의 손은 자물통에서 멈추어진 상태 였다. 그 짧은 순간에 벌써 일이 끝난 것이다. 혼절한 도영구와 덤비지 않은 독심검 팽후 빼고는 모두 괴성을 지르며 바닥을 벌벌 기고 있지 않은가. 등을 돌리고 있어 단호삼의 표정을 알 수 없지만 늠 름하게 서 있는 뒷모습을 보아하니 어디 한군데도 맞지 않은 것 같았다. 믿어지지 않은 현실 앞에 표인랑은 금붕어처럼 눈을 끔벅거려 보 았다. 그러나 현실은 어디까지나 현실이었다. 그것을 증명해 주듯 여기저기서 '두령님, 무슨 일입니까?' 하고 묻는 소리가 들려왔 다. "시끄러! 모두 입 닥치지 못해!!" 이곳에서는 팽후가 왕이 아니다. 포졸이 왕이었고, 포두는 황제였 다. 표인랑의 말 한마디에 그들은 찍 소리도 내지 못했다. "자식들이 말야, 싸가지없이 어디서 까불고 있어." 어깨를 으쓱 치켜올리며 낮은 음성으로 말하던 표인랑은 단호삼의 등을 한 번 더 쳐다보았다. '착한 사람이 한 번 화를 내면 더 무섭다더니.' 옛말을 상기한 표인랑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걸어나가고, 이 를 기다린 팽후는 아직도 끙끙대며 신음을 토하는 수하들에게 '입 다물어!' 하고 조용히 시킨 다음 새삼스런 눈으로 단호삼을 훑어 보다가 입을 열었다. "자네, 무공을 익혔군그래." 대꾸할 필요가 없다. 단호삼은 잠시 그를 쏘아보다가 제자리로 가 서 쪼그리고 앉았다. "우선 수하들의 무례한 행동에 대해 내가 사과하겠네." 상대가 정중하게 나오는데 아무리 마음이 괴롭다고 해도 이를 무 시할 만큼 단호삼은 매정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무릎에 얼굴을 파묻으며 조용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괜찮소." "그리고… 자네 형의 죽음에 진정으로 애도의 뜻을 전하고 싶네." 상상치도 않은 뜻밖의 말에 단호삼은 고개를 들었다. 사람이 자신 에게 어울리지 않은 짓을 하면 의심을 사는 법! 팽후의 눈을 가만 히 들여다본 그는 세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흉악한 생김새답지 않게 생각 밖으로 눈이 맑았고, 방금 한 말이 진심이라는 것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다. 곧 죽을 사람이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것은 두 가지 유형으로 생각할 수가 있었다. 죽음조차 초월한 사람이거나 믿는 구석이 있다는 것이다. 소문으로 비추어 볼 때 첫번째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탈옥을 하려는 겁니까?" 순간 팽후는 흠칫 놀랐다. 마치 숨겨 놓고 혼자서 먹던 꿀단지를 들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순간적으로 얼이 빠져 있던 그는 어색 한 웃음을 흘렸다. "허허, 내가 자네를 잘못 보았어. 좋아! 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 지." 크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팽후는 심중에 있는 말을 꺼냈다. "소문이 났는지 모르겠지만 수하 몇이 도망쳤다네. 그들은 내가 이렇게 있는 것을 방관만 하고 있지 않을 걸세. 그래서 말인데… …." 본론으로 들어갈 때라 그의 음성이 낮으면서도 은근하게 변했다. "어떤가? 자네도 이 기회에 우리와 함께 탈출하지 않겠나?" 산적이 되라는 뜻이다. 그는 단호삼의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을 보며 황급히 말을 이었다. "자네는 똑똑한 사람이니, 자네 형의 죽음이 석연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을 거야. 물론 우연한 화재일 수도 있지만, 시기가 너무 공교로워. 하여튼 우연인지 아닌지를 알려면 우선 이곳을 벗어나 야 하지 않겠나?" 실로 산적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교묘한 말솜씨에다 머리마 저 비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단호삼의 생각과도 비슷했다. 형의 죽음 뒤에는 무언가 있다는, 그것이 무엇인지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자신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팽후의 말이 끝나자 단호삼은 불쑥 물었다. "그들이 꼭 구하러 올 것이라고 어떻게 장담하지요?" 팽후는 흠칫 놀라 대꾸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렇다. 왜 팽후는 수하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올 것이라 자신했단 말인가? 산적이라는 직업(?)은 말 그대로 날강도들이다. 그런 그 들에게 의리니, 정이니 하는 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지 않은 가. '하지만…….' 팽후는 '하지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흔들리는 눈빛처럼 떨리는 음성으로 대꾸했다. "그 동안 나는 수하들에게 잘 대해 주었다네." 무릎 사이로 얼굴을 파묻고 있던 단호삼의 이가 악물렸다. 거듭된 일로 고운 심성(心性)이 변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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