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희문 성지 순교자 전
서론
광희문은 시신(屍身)을 내가는 문이라는 뜻으로 시구문으로도 불렸다. 광희문 밖은 박해 시기에 서울의 좌·우포도청 옥과 형조의 전옥 등에서 순교한 수많은 순교자와 그들 가운데 794위의 순교자 시신이 버려지고 묻힌 곳이다(서종태, 「광희문 성지의 실체 규명과 순교자 영성」, 제1회 광희문 성지 학술심포지엄, 2017.11.25 참조).
광희문 밖은 수많은 성인·복자들과 무명의 순교자들이 묻히고 버려졌던 곳이다. 단순히 조선의 죄수와 무연고자들의 시신이 방치되었던 곳이 아닌 순교자들의 주검과 피를 통해 성화(聖化) 된 중요한 성지라 할 수 있다.
1801년 신유박해 이후 한양 도성 내 중부에 위치한 좌·우포도청, 형조, 전옥, 의금부옥 등에서 병사, 장살 또는 교수형으로 순교한 천주교 신자들은 그 가족 친지들이 즉시 시신을 수습하지 못할 경우, 중부서원(中部書員) 등에 의해서 광희문 밖으로 운반되어 버려졌다. 광희문은 이때부터 순교자의 영광이 빛나는 문이 되었다.
조정의 문서에 천주교신자들 794위의 시신이 이곳에 버려졌다고 기록되어있다. 최경환 프란치스코의 시신은 수습하여 수리산에 이장하였으나 이성례 마리아의 시신은 찾지 못하였다.
이들 794명의 순교자들 가운데 54명은 신유박해(1801)~병오박해(1846) 시기에, 나머지 740명은 병인박해(1866)~기묘박해(1879) 시기에 각각 서울의 좌·우포도청 옥과 형조의 전옥 등에서 순교하였다. 대부분 병인양요(1866), 남연군묘 도굴 사건(1868), 신미양요(1872) 등으로 거듭 박해가 격화되던 때에 순교한 신자들임을 알 수 있다.
이들 794명의 순교자들 중 거주지가 확인되는 750명 가운데 서울 신자는 309명, 충청도 신자는 213명, 경기도 신자는 158명 순이었다. 이어 강원도 신자가 39명, 황해도 신자가 13명, 경상도 신자가 12명, 평안도 신자가 3명, 함경도 신자가 2명, 전라도 신자가 1명이었다. 이처럼 서울·충청도·경기도 순으로 거주자가 많은 것은 박해를 격화시킨 병인양요의 진원지가 서울이었고, 남연군묘 도굴 사건이 충청도 덕산에서 발생했으며, 병인양요가 경기도에서 벌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 794명의 순교자들 중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이 아가다·최경환(프란치스코)·민극가(스테파노) 등 13위와 병오박해 때 순교한 현석문(가롤로)·한이영(라우렌시오)·정철염(가타리나)·김임이(데레사)·이간난(아가다)·우술임(수산나) 7위 도합 20위가 성인품에 올랐다.
이어 신유박해 때 순교한 심아기(바르바라)·김이우(바르바라) 2위와, 1867년 순교한 송 베네딕도 가족 3위, 도합 5위가 복자품에 올랐고, 황석지(베드로)·최영수(필립보)·이윤일(안토니오)·피 가타리나·최지혁(요한)·이병교(레오) 등 1833~1879년에 순교한 25위가 ‘하느님의 종’에 올라 시복·시성될 날을 고대하고 있다.
[이자료는 주교회의 시복시성위원회 133위 시복 대상자 약전[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약전]을 참조하였음.
편집자 주: 광희문성지 순교자 중. 성인과 복자는 포도청순교자전에서 다루고, 광희문 성지에는
‘하느님의 종’ 25위를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