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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례 단편소설] 생일 < 기획·연재 < 기사본문 - 문화앤피플
생 일
소래 한옥례
오늘은 삼복더위 속에 있는 내 생일 파티를 한다고 사위가 육회를 사고 배를 샀다. 갓난아이 머리통만 하기는 해도 하나에 만 원을 주고 산 배가 한쪽이 상했다고 투덜거리며 깎아서 채를 치고 참기름에 깨소금까지 넉넉히 넣어서 오몰 조몰 무치니, 역시 이 맛이다. 육회에는 배가 안 들어가면 제맛이 안 난다.
올해는 유난히 과일 가격이 비싸다. 가격이 비싸다고 해서 생산자가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니다. 봄에 꽃이 피면 이상기후로 눈이 와서 피다만 꽃이 얼어떨어지고, 독한 농약을 많이 뿌려서 벌 나비가 이 땅에 살 수 없어 해마다 줄어든다. 과수원에 꽃은 그냥 꽃으로 떨어지고 열매 맺기는 실패다. 그래서 평생 자식처럼 가꾸어온 사과나무 배나무 과수를 통째로 뒤집어 버린 곳이 한두 곳이 아니다.
자연이 화가 나면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예측할 수도 없고 자연재해를 막을 수 있는 천하장사도 없다.
남아있는 과수원도 어쩔 수 없어서 붙잡고는 있지만, 일할 사람도 없고 날마다 하늘 높은 줄만 알고 위로만 치솟는 인건비는 과일 판매한 값보다 더 나간다. 시나브로 매달린 과일도 해마다 태풍이 몰아치고 지난 뒤에는 가을바람에 나뭇잎처럼 우수수 떨어진 과실을 보면 세상에 살고 싶은 의욕이 사라지고, 뒤집어엎고, 그 무언가를 다시 시작하고 싶은 의욕조차 상실한다.
지금 이 나라 이 경제가 어찌 과수원만 그러하겠는가? 근근이 연명하던 중소기업이나 도소매 그리고 자영업을 하던 사람들은 코로나라는 거센 태풍에 줄줄이 도미노처럼 쓰러지고 있다. 한때는 우리도 온 식구가 깊은 수렁에 빠져서 한 발짝 앞으로 나아 갈 수 없던 시절이 있었다.
년에 한번 남편 생일이나 내 생일날은 아들, 손자, 며느리 딸 사위 외손자 우리 부부 막내아들 이렇게 모여 집에서 배달음식도 시키고 직접 만들어 먹는다. 어느 해는 회와 매운탕을 어느 해는 족발과 냉면으로 그때그때 다르다. 올해는 육회와 한우 안심 구이와 후식으로 물 회를 준비했다.
먹어서도 맛이지만 해마다 안정되어 가는 우리 집 가게와 아들딸 모습을 보며 잘살아준 아들딸이 기특하고 우리가 가장 어려운 시기에 아무 조건 없이 아들딸 손 잡아준 사위, 그리고 며느리가 눈물겹도록 고맙고 감사하다.
딸아이 혼수는 물론이고, 며느리 반지 한 돈 못 해주고 서울에 신혼집도 며느리가 얻었다. 축의금으로 들어온 돈으로 물건 사기에 바빠서 신혼살림에 한 푼도 도와주지 못했다.
그때는 앞으로는 남고 뒤로는 믿지는 가계를 살려보겠다고 온 식구가 마트운영에 매달렸다. 대학 나와서 교육청에 출근하는 딸은 직장을 사표 내고 계산대에 세우고, 큰아들은 대학 3학년에 군에 입대해서 제대하고 남은 대학 1년 복학해서 학점만 따고 졸업하는 날 졸업장도 못 받으러 갈 정도로 마트 일을 했다.
나는 야채코너에 직원이 안 나오면 야채코너에서 야채를 다듬고, 생선코너에 직원이 없으면 생선 내장을 바르고 소금 뿌려주는 일과, 닭 모가지를 잘라서 닭요리 재료로 토막을 냈다. 정육점에 들어가서 삼겹살도 자르고 다짐육도 갈았다. 정육점 육절기에 우족을 자를 때는 살타는 냄새와 뼈 타는 냄새가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여름날 아침에 출근하면 전날 깨끗이 청소한 육절기나 다짐육 기계 속에서 꼬물꼬물 구더기가 기여 나와 누가 볼까 봐 아무도 모르게 다시 청소하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몸에 소름이 돋고 진저리가 처진다. 직원들 점심을 해주는 아주머니가 쉬는 날은 직원들 점심을 했다.
남편은 여기서 돈 꾸어서 저기 막고 저기서 돈 꾸어다 여기 막고 새벽시장에 물건 해오기 바빠서 그야말로 죽을 내야 죽을 시간도 없다. 고등학교 나온 막내아들도 새벽부터 형 따라 다니며 배달 일을 했다. 장사가 안되는 장사는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나갈 것이 더 많아서 밑 빠진 독에 온 식구가 물 붓기를 하는 것이다.
빨리 포기하면 할수록 피해가 덜하다. 그러나 남편은 포기를 못 했다. 사채 돈에 일숫돈 심지어 이름도 생소한 따려 돈까지 끌어서 하루하루 견디기만 했다. 결국은 온 식구가 신용불량자가 되고 마트장사는 막을 내렸다. 큰아들은 대학 졸업하고 취업 한 번 못해보고 억대 이상의 세금을 못 낸 실업자가 되었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내 생일을 정확하게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내 생일 지나고 3일 만에 아버지 생신인데 아버지 생신날 친구분들과 드실 밀주를 하필이면 내 생일날 세무서에서 나온 술 조사관에게 들키고 말았다. 나라 법을 어긴 죄인도 죄인이지만 무엇보다 많은 벌금을 내야 하는 것이 문제다.
아버지는 술을 들고는 못 일어나도 먹고는 일어나는 알코올 중독자다. 식구들 밥해 먹을 쌀은 없어도 본인의 술은 해 먹어야 했다.
그날은 핑계도 좋았다. 어차피 들킨 술 에라 모르겠다. 먹고 나보세 김 서방 박 서방 지나가는 오 서방까지 불러서 술독을 깨끗하게 비워버렸다. 그것이 끝이라면 내가 말을 안 한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슬하에 자녀를 11명을 낳았다. 그중에 11번이 나다. 맨 위로 아들은 호적에 올리기도 전에 죽었다. 계속 딸만 9명을 낳았는데 아들 죽고 바로 놓은 큰언니가 죽고 내 위로 언니 3명이 죽어서 나와 바로 위에 언니는 나와 나이 차이가 띠동갑이다. 11명 중에 아들 2명 딸 4명이 죽어서 우리 부모 자식 농사 반타작도 못 했다.
아들이 없으면 대를 이을 수가 없으니 핏줄이 끊어지고 지역에서 어르신 대우도 못 받는다. 무엇보다 죽어서 제삿밥을 못 얻어먹는다고 딸은 자식으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우리 집은 그날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밀주를 들킨 내 생일날은 그야말로 초상집이다. 내가 태어난 날 아침은 더했다. 설마 이번에는 아들이겠지 하고 낳으면 딸 낳고 보면 또 딸, 어머니는 삼신할머니가 야속했다.
그래도 나를 임신했을 때는 마지막 희망이었고 간절히 아들이기를 빌었다. 어머니 배가 불러올수록 저 배 속에 아이가 제발 아들이기를 온 동네 사람들까지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낳아놓고 아무리 헤집고 봐도 고추는 보이지 않고 아이는 울기만 악을 쓰고 울었다. 그냥 그 자리에서 포대기에 싸서 둘둘 말아 덮어놓고 뱃속에 또 무엇이 들어 있나 꺼내 보고 싶었다.
아이는 자지러지고 숨이 깔딱 넘어가게 악을 쓰고 울어서 듣기도 싫고 보기도 싫었다. 고추 하나 못 달고 나온 아무 쓸데없는 그 깐 년, 계집애는 울거나 말거나 죽거나 말거나 방바닥에 그냥 두고 속이 답답해서 방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왔다.
동쪽 하늘에 해가 뜨기 직전에 우리 마당으로 햇살이 쭉-욱 비치는데 집안이 갑자기 전기가 들어온 것처럼 환해지고 어머니는 약간의 현기증을 느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해마다 내 생일이 되면 아침에 해가 뜨기 직전에 햇살만 쭉 비추는 시간을 알고 싶지만 그날만 되면 깜박하고 지나면 생각이 나서 지금까지도 올해도 역시 그 시간에 밖에 나가 시간을 재여 보지 못했다.
내가 세상에 나왔을 때 여자라는 이유로 세상 사람 모두가 부모님까지도 죽이고 싶도록 축복을 못 받았다. 오죽했으면 동네 사람 모두가 우리 집 앞을 못 지나고 다른 길로 외돌아 다녔다. 하필이면 그런 내 생일날 아버지가 좋아하는 술을 술 조사에게 들킨 것이 재수 없는 나 때문이라고 밤새 딸 5명 어머니까지 섞인 것 하나 없는 여자 6명을 앞에 놓고 밤이 새도록 한소리 또 하고 한소리 또 하고 우리는 아버지 술주정에 밤을 꼬박 새우고 벌을 썼다.
“송아지 강아지는 길에 나가 돌아다니면 사람들이 주워가지만 아들 없는 늙은이는 아무도 쳐다보지도 않는다. 아무 쓸데없는 딸년들 시집가면 남의 식구다. 논두렁을 베고 죽어도 딸네 집에는 안 간다.” 그렇게 드신 술이 깨던지 아버지가 제풀에 지쳐서 잠이 들 때까지 우리는 제비들이 빨랫줄에 나란히 앉은 그것처럼 그런 자세로 밤을 새워야 했다. 아버지는 그 말 대로 정말 논두렁을 베고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아버지 그 말이 싫어서
“딸도 자식인데 딸 집에라도 가지 왜 하필이면 논두렁을 베고 죽어요. 나는 딸 집에 가서 살래요.” 어머니 그 말씀대로 아버지 돌아가시고 20년 가까운 세월을 딸 집에서 살다 돌아가셨다. 나는 내가 딸로 세상에 나온 것이 왜 내 잘못인지 구박받고 야단맞아야 하며 딸은, 여자는, 계집애는, 왜 재수가 없고 집구석에 되는 일도 없다고 하는지 지금 생각해도 어린 시절 그때 생각해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늦가을에 돌아가셨다. 그래서 아버지 이야기는 어머니나 언니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통해서 알고 있다. 년에 한번 어머니 생일이면 어머니와 같이 사는 인천 주안에 살던 셋째 언니 집에 모여서 밤이 새도록 어린 시절 이야기꽃을 피우며 울고 웃고 했다. 그 중에도 아버지와 술에 관한 이야기는 해도 해도 끝이 없다.
나는 더러는 상상이나 꿈에서 본 아버지를 생각하지만 그중 몇 가지는 그림으로 그리라면 그릴 정도로 또렷하다. 술 때문에 죽을 뻔했던 일화가 있고, 결국 술 때문에 죽은 이야기다.
아버지는 아버지가 어머니와 사별인지 이별인지 알 수 없지만 아버지와 동생은 성이 다르다. 그러니까 미루어 생각해보면 낳아준 친어머니가 아니고 동생의 어머니다.
아침마다 밥을 주며
“너는 이밥 먹고 어디든 멀리 가서 제발 이 집에 다시 들어오지 말고 나간다오”
반찬처럼 이런 말을 했다. 아버지는 집을 나서기는 했지만 어디로 가야 하나 막막했다. 하루 종일 동네를 빙빙 돌다가 해가 떨어지고 어두워지면 세상이 무섭고 갈 곳이 없다. 살금살금 도독 고양이처럼 부엌 아궁이 앞에서도 자고 헛간에도 잤다.
아침이면 눈칫밥 한술 얻어먹으며 오늘은 제발 멀리 가서 들어오지 말라는 경고를 듣는다. 아버지의 아버지는 이런 아버지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건지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아버지가 야속했다. 점점 구박이 심해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다.
어느 날 작심을 하고 그 집을 나섰다.
‘오늘은 해가 떨어져서 세상이 어두워도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그 집에는 절대 안 들어간다.’ 단단히 결심하고 그 집에서 멀리 더 멀리 무작정 걸었다. 계절은 잘 모르겠지만 한겨울도 한여름도 아닌 것 같다.
그렇게 홀로 살아가는 동안 부잣집 머슴 밑에서 잔심부름을 하면서 먹는 것 잠자는 것이 해결되고 그곳에 머물게 되었다. 그러다가 품값을 받을 수 있는 머슴으로 승진도 하고 딸 하나 혹이 딸린 우리 어머니를 만났다.
아버지는 학교라는 곳에는 근처에도 못 갔다. 그러니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른다. 부모·형제 일가친척 하나 없는 타향 땅에서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뼈가 부서지게 온몸으로 벌어서 겨우 목구멍에 풀칠은 했다.
그러나 하늘도 무심하시지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아들 하나 없이 쓸데없는 딸딸이 아버지로 살면서 자괴감에 살아갈 낙이 없어서 술 없이는 못 살고 밖에서는 법 없이도 살 착하고 부지런한 사람으로 순종적이다.
그렇게 밖에서 억압받고 기가 죽어서 살던 긴장과 화풀이를 집에 들어오면 딸들에게 술주정하면서 자신이 고생하면서 살아온 지난날을 내가 이렇게 살아오고 살아낸 사람이다. 라고 딸들에게 상기시키고 먹여 살리는 것을 생색내고 아버지는 그런 식으로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 시절에는 부모가 자식에게 밥을 안 주고 폭행하거나, 학교에서 선생님이 종아리에 멍이 들게 매질을 해도 가정폭력이나 학교폭력이라는 단어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처럼 생각하는 무식한 무모도 더러는 있었다.
아버지는 가정이나 가족 없이 사는 것이 한이 됐다. 그래서 처가에 장인·장모에게 효도하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과는 달리 오랜 세월 가족 없이 자연인으로 혼자 살아온 습관이 있어서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었다.
무슨 연유인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외삼촌이 가산을 탕진해서 외할아버지가 오갈 데가 없게 되자 아버지가 친히 모시겠다고 나섰다. 충남 예산에서도 한참을 더 들어가는 예당저수지 아랫동네에서 우리 집 도고면 까지는 40리 길이 넘는다. 차편이 없기도 하지만 있다고 해도 할아버지가 차멀미를 아주 심하게 하셔서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지게에 지고 오셨다.
얼떨결에 모시고는 왔지만 초심과는 다르게 시간이 가면 갈수록 외할아버지 꼴이 보기 싫었다. 외할아버지 기침 소리, 숨소리조차 듣기 싫고 걸음 걷는 것까지 밥 먹는 것을 보면 밥그릇을 빼앗아서 마당으로 던지고 싶은 충동을 참아야 했다.
밥 먹을 때는 개도 건드리면 주인이라도 문다고 하는데 어린 시절 동생의 어머니가 날이면 날마다 하필이면 밥 먹을 때마다 나가라고 했는지, 장인을 미워하는 자신을 느끼며 그 어머니가 신세 한탄처럼 중얼거리던 말이 있었다.
“매는 몽둥이로 패면 억지로라도 맞지만 사람이 미운 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 이러는 나도 싫다. 사람 미운 건, 정말 죽이고 싶도록 미운 건 일력으로 안 된다. 내 마음 나도 모르겠다. 제발 부탁이다 내가 나쁜 맘 먹기 전에 내 눈에서 멀어 저라. 그것이 너도 위하고 나도 위하는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길이다 제발 부탁이다. 내 눈에 보이지 말아다오” 그때 동생의 어머니 심정을 이제는 백번 이해할 수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 싫은 걸 어떻게 하란 말인가 송아지 강아지 같아야 길에 버리기라도 하지 목소리가 카랑카랑하고 밥을 저렇게나 잘도 많이 처먹으니 쉽게, 올내년에 죽을 것 같지도 않다.
그러다가 무릎을 '탁' 치는 아주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렇게 좋은 방법을 왜 내가 생각을 못 했지 당장에 실천에 옮겼다. 그 좋은 생각은 전 재산인 초가삼간을 홀랑 팔아버리는 것이다. 집도 절도 없으니 당연히 장인어른을 모실 수가 없게 되었다.
다시 외할아버지를 지게에 지고 예당저수지 근처에 사시는 이모네 집으로 모셔다드렸다. 언니 셋은 누구든 아버지 술만 사드리면 먼저 데려가는 사람이 임자다.
“한 서방 자네 딸 우리 주게 나” 아버지는 남들한테 거절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러세” 무슨 송아지 강아지 보내듯이 언니 셋은 시집이라고 갔다.
띠동갑인 내 바로 위에 언니와 어머니 나 그리고 아버지 4식구는 동네 지인의 집 윗방에 월세로 잠시 살기로 했다. 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7살 때 일이다.
아버지는 도둑질도 급하면 다시 한다고 할 줄 아는 것이 머슴 일이라 천안에서도 한참 떨어진 어느 동네 부잣집 농가에 1년 머슴살이로 떠났다.
아버지의 머슴살이도 힘드셨겠지만 초가삼간 남의 집 윗방에 세를 살아야 하는 우리는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다. 그 집에 내 또래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1년 동안 나는 그 아이 몸종이나 다름없이 무엇이나 시키는 대로 다 해야 했다.
부엌을 같이 쓰는 어머니는 색다른 음식하나 못 해 먹고 저녁에 아궁이에 불을 때면 새벽이면 윗방이라 온기가 없다. 어머니를 가운데 주무시고 언니와 내가 솜이불 하나로 추워서 양쪽에서 서로가 잡아당겨서 광목이불이 찢어지는 바람에 야단을 맞았다.
아버지는 1년 동안 작심하고 그 좋아하던 술도 참으며 열심히 일만 했다. 그때 머슴살이를 해서 번 돈은 쌀 12가마로 그 돈이면 우리가 셋방살이하는 정도의 집을 살 수 있다. 아버지가 머슴 살던 집 주인아주머니는 보너스로 손수 바느질해서 만든 바지저고리 속에 쌀 12가마 값을 넣고 박음질까지 해서 보자기에 싸서 주며 조심해서 잘 가지고 가라고 신신당부했다. 아버지는 두둥실 뜬 기분으로 동네를 돌며 사람들에게 작별인사를 한 뒤 보따리를 품에 안고 집을 향해 개선장군인 양 길을 나셨다. 그때 형님 동생하고 서로 필요한 때는 일손도 도와주던 청년이 1년 동안 정도 들고 일손을 맞출 만하니 떠나서 서운하다며
‘천안 가서 국밥이나 같이 먹자’ 하며 따라 나셨다. 아버지는 한사코 사양했지만 그는 끝까지 따라왔다. 천안역에서 차표를 사고 시간을 보니 2시간 넘게 기다려야 했다. 점심때가 되기도 해서 그 와 함께 국밥집에 들어갔다.
헤어지는 마당에 탁주나 한잔하자며 술을 권했다. 기분이 좋았다. 오늘 같은 날 술 한잔은 해도 좋을 것 같았다. 1잔을 마시니 그 술맛이 기가 막히게 좋았다.
1잔이 2잔이 되고 2잔이 4잔이 되고 이제는 술이 술을 마시고 에라 모르겠다. 결국 취하게 마셨다. 술을 마시니 소변이 보고 싶었다.
보따리를 품에 안고 천안역 공중변소로 들어갔다. 나름대로 정신을 바짝 차리고 바지춤을 내리기 위하여 보따리를 잠시 바닥에 내려놓고 한참을 시원하게 소변을 보고 나서 바닥에 보따리를 찾으니 감쪽같이 사라졌다.
어느 겨울에 우리 동네에는 사람들이 모이면 공공연한 비밀 아닌 비밀로 수군수군하던 일은 아버지 술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아버지는 집에 담가놓은 밀주가 떨어지고 주막에 갈 돈도 떨어지면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했다. 머리에는 수건을 질끈 매고 삽자루 하나 둘러메고 이웃 마을에 시집간 딸 집에 지나는 길에 잠시 들린 것처럼 불쑥 들어갔다. 추운 겨울 어느 날 그런 차림으로 딸이 보고파서 지나는 길에 잠시 들린 것처럼 아버지가 불쑥 나타났다.
마침 시댁 식구가 아무도 없고 술이 먹기 좋게 익어가고 있었다. 언니는 누가 올까 부랴부랴 술을 정종 술을 담았다 비운 유리병에 담고 때가 조금 이르지만 저녁 식사를 챙겨드렸다.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집 식구 오기 전에 서둘러 가시라고 유리병에 담은 술을 보자기에 싸서 품에 안겨드렸다. 토끼 꼬리만 한 겨울 해는 깜박 넘어가고 날씨가 추웠다. 언니 집과 우리 집 사이에 저수지가 있는데 겨울에 물이 얼면 아이들은 눈썰매도 타고 사람들은 가로질러 얼음 위로 걸어 다녔다. 술 먹은 걸음이라 얼음판 위를 비틀비틀 걷다가 그만 쫄딱 미끄러지는 바람에 유리병이 박살 나게 깨져 버렸다.
피보다 더 귀한 술을 얼음판에 버리게 생겼다. 아버지는 얼결에 얼음판 위에 술을 혀로 핥기 시작했다. 한참을 정신없이 드시다가 고개를 들려고 하니 수염이 얼음판에 붙어서 떨어지지를 않는다. 그때 아버지 수염은 그림책에 보면 지팡이를 짚고 있는 산신령같이 수염이 있었다. 얼음판에 붙은 수염은 요지부동이고 날씨는 점점 더 추워지고 밤은 깊어지고 꼼작 없이 얼음판에서 죽게 생겼다.
이때 마침 새우젓을 팔러 갔던 동네 아주머니가 얼음판에 붙어서 끙끙거리며 죽어가는 아버지를 발견했다. 사방팔방 둘러봐도 어찌해야 하는 방도가 없다. 때마침 오줌이 마려워서 아버지의 수염에 대고 오줌을 싸버렸다.
61살이 되면 회갑이다
아버지는 61살 생일선물로 언니들이 추렴해서 사드린 최고급 두루마기와 가죽구두를 자랑하기 위하여 평생 오도 가도 안 하던 고향에 시향 제사에 참석하고 오시다가 가을비가 내려 살짝 얼은 갯 뚝 에서 미끄러지면서 물에 빠졌다.
1년에 한 번 가을 김장 때만 새우젖배가 들어오는데 그 배를 묶어 맨 밧줄에 두루마기 자락이 걸려서 그나마 시신이라도 찾을 수 있었다.
그대로 바다로 떠내려갔다면 지금까지 실종으로 생사를 모를 뻔했다. 신분증을 지참하지 않아서 신분확인이 어려울 뻔했는데 아버지 주머니에서 호적등본이 나왔다. 이 호적등본은 중학교에 들어가려면 지금처럼 아무나 가는 것이 아니고 시험을 봐서 합격해야 들어갔다.
시험 보는 서류에 호적등본이 필수였다. 나는 아버지가 마침 고향에 시향제사에 가신다기에 중학교는 절 때 안 들어가지만 시험 한번 보게 해달라고 온갖 아양을 떨며 가시는 길에 호적등본 한 통만 떼다 달라고 졸랐다.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아무 말도 안 하고 가셨는데 그 호적등본 덕분에 돌아가신 분이 아버지라는 것을 빨리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마을에 소문은 막내딸 중학교 보내려고 호적등본 떼러 고향 갔다 오다 객사했다고 수군거렸다.
호적등본을 사는 곳이 아니라 본적지에서만 발급해 주었다. 물에 젖은 호적등본을 말려서 온양온천에 있는 삼화중학교에 서류를 접수하고 시험을 보았다. 내가 시험 보러 간 날 어머니는 동네 친구분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다니셨다.
“우리 애가 시험에서 떨어져야 내 원망을 안 할 건데 만약에 붙기라도 하면 큰일이다.”라고 시험 봐서 떨어지기를 빌었다. 어머니의 바람과 상관없이 나는 합격자 발표 날 장학생 명단에 3등인지 4등인지 합격했다. 그때 아산에는 온양 여자중학교가 있고 삼화중학교가 있었다.
내 기억으로 2회 아니면 3회가 아닐까 생각된다. 삼화중학교는 유일하게 장학생 제도가 있었다. 6학년 담임선생님이 삼화중학교에 시험 보기를 권했다. 내 형편에 언감생심 중학교는 어림도 없는 일인 줄 알지만 어린 마음에도 합격만 하면 어찌 됐든 들어 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서류접수에 필요한 호적등본을 떼러 가는 것이 충남 예산군하고도 더 가는 신양면사무소로 갔다 와야 하는 일이다. 차마 입이 안 떨어져서 말을 못 하고 있던 차에 아버지가 신양에 시양 제사 지내러 가신단다. 앗싸! 얼씨구나! 하늘이 나를 버리지 안으셨구나! 중학교는 절대 안 들어간다는 약속 아닌 약속을 하면서 부탁을 드렸다.
그것이 아버지의 시신을 찾을 수 있는 서류가 될 줄은 아버지도 나도 몰랐다. 혹시 아버지가 살아오셨으면 내가 중학교에 갈 수 있었을까? 어찌 되었든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나는 중학교에 못 들어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졸지에 소녀 가장이 되어버린 나는 아버지가 하던 일을 내가 해야 했다. 산에 가서 나무하고 물 길어오고 거름통까지 내가 비우고 밭에는 씨 뿌리고 김매고 해서 손바닥이 못이 박이고 굳은살이 소나무 껍질 같았다. 여름에는 땀띠가 좁쌀처럼 온몸을 덮어버렸다.
아버지가 계실 때도 오늘은 학교 가지 말고 보리 베라고 했는데 날씨는 뜨겁고 보리 꺼럭은 따가워서 보리 베기 싫어서 학교로 도망갔다가 두 시간 수업이 끝나고 어머니 손에 잡혀 와서 울면서 보리 베기도 했다.
5학년 때는 아버지가 손을 크게 다쳐서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3개월을 아버지 병간호하느라 병원에 있고 학교를 통째로 빠졌다. 그러니까 학교는 이런 일 저런 일로 툭하면 못 가고 빠지고 가는 날보다 못 가는 날이 더 많았다.
어머니는 나무한 줌 풀 한 포기 뽑을 줄 모르고 날마다 머리가 뻐개질 것같이 아프다며 머리를 끈으로 동여매고 담배만 열심히 피우시던 모습만 생각난다.
우리 학교 교장 선생님은 학교 안에 교장 사택에서 사셨다. 나이 드신 교장 선생님과 사모님 댁에는 자녀는 아니고 그때는 식모라고 하고 지금은 가사 도우미라고 하는 나보다 나이가 두세 살 정도 더 먹어 보이는 중학생이 있었다.
그 선배가 삼화중학교 1회 입학생이다. 지금은 이름도 성도 얼굴도 모르겠지만, 내가 입학을 포기하고 3개월 정도 지났을까 그 선배가 물어물어 우리 집을 찾아왔다. 학교에서 지금이라도 나오기만 하면 수업료 일체 면제해주고 책과 교복까지 준비해준다고 나오라고 해서 왔다고 자기일 같이 좋아서 달려왔다. 고맙고 반가웠다.
공부보다 교복이 입고 싶었다. 그러나 학교 측에 배려도 그 선배가 기뻐서 한걸음에 달려온 보람도 없이 나는 학교를 갈 수 없었다.
그것이 다 해결된다 해도 집에서 일할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도고에서 온양은 삼십 리길 걸어 다닐 수도 없고 5리를 걸어서 갈티 재에서 버스로 통학을 하거나 선장 역까지 10리를 걸어서 선장에 있는 선장 역에서 기차 통학을 하든지, 아니면 온양에 하숙하던지 친구끼리 모여서 자취를 해야 했다.
나는 그중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저녁, 어떻게 소식을 들으셨는지 6학년 담임선생님이 술이 얼근하신 모습으로 학교 근처에 사는 온양여중에 다니는 동창을 앞세우고 우리 집을 방문하셨다. 오실 때는 어떻게든 우리 어머니를 설득해서 중학교에 보내려고 오셨겠지만 어머니와 나의 사는 형편을 보고 어머니에게는 아무 말도 못하고 가시던 선생님은 대나무밭을 지나 은행나무 밑에 서시더니 나를 돌아보시며 밑도 끝도 없이 미안하다고 하셨다.
“선생 월급 받아서 동생 둘을 공부시키느라 사는 것이 버겁다. 내가 너는 꼭 공부시켜야 하는데 참마음이 아프다.” 살면서 가끔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생각난다. 동생이 공부한 책이라고 동아전과와 동아수련장도 챙겨주셨다. 그날 저녁 그렇게 가시고 한 번도 만나 뵙지를 못했다. 아무리 철이 없어도
“선생님 고맙습니다.” 한마디는 해야 했었다.
어머니는 동네 사람들이 온양으로 이사 가서 식모를 살아도 나를 중학교에 보내라고 한다며 자기 딸도 중학교에 안 보내면서 남의 말은 잘도 한다며 나에게
“우리 집보다 잘사는 구장 딸 정이도 안가고, 오빠가 면서기 하는 진분이도 안가는 중학교를 무순 재주로 네년이 들어간다고 쓸 대 없이 시험을 쳐서 나만 나쁜 어미 만들고 욕 먹이냐, 이년아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했다.” 아버지가 하던 술주정을 그대로 했다.
기차역이 있는 동네에 고아원이 있었는데 그곳에 사는 아이들은 나라에서 중학교에 보내준다고 했다. 나도 어머니가 죽으면 저기로 가서 중학교에 보내 달라고 해야지 속으로 생각하고 저렇게 아파서 아무 일도 못 하시니 아마도 내년에는 돌아 가실 거야 속으로 생각했지만 아프다는 것과 사람 죽는 것은 아무 상관도 없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이 딸 저 딸, 딸들을 힘들게 하며 20년을 사셨다.
나는 살면서 한 번도 부모님을 그리워해 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미워하거나 원망도 안 했다. 그때는 돈이 있어도 시험에서 떨어지면 중학교에 못 들어가고 나처럼 시험에 합격하고도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못 들어갔다.
우리 동네는 아들은 중학교에 보내고 딸은 한집도 중학교에 보내는 집이 없다. 그래서 아예 일찍 포기하고 미용 학원이나 양재학원 편물학원에 다녔다. 그것도 부모님이 계시고 집안 형편이 어지간해야지 나는 꿈도 꾸지 못했다.
오늘은 아주 특별한 초대를 받았다.
줌으로 소설 수업을 하시는 온양온천에 박우승 문우님의 90살 생일이고, 문우님이 설립하신 한올 중.고등학교 60주년 기념과 어머니 문학관 개관식 행사라고 했다. 문우님들과 약속한 시각보다 1시간이나 일찍 도착했다. 온양역 광장에는 비둘기들이 종종걸음으로 몰려다닌다. 다정하게 보여서 참 보기 좋다. 역까지 마중 나온 박우승 한올 학원 이사님에게 궁금했던 질문을 했다.
“온양에 삼화중학교가 없어졌나요?”
“우리 학교가 삼화중학교 였어요.”
◆ 笑 來 한 옥 례
1952년 충남 아산 출생.
수필가, 소설가
2010년 ~ 2023 (사)한국문인협회 진천지부회원
2011년 4월 스토리 문학 봄 호 수필 등단
2019년 ~ 청주시문학회 부회장 소설분과위원장겸임
2020년 04월 새 한국문학 소설 등단
2020년 ~ (사)한국문인협회. 충북소설가협회 입회
2021년 ~ 국제PEN한국본부 충북지역위원회 회원
2019년 한국 방송 통신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E-mail. okhan0703@hanmail.net 연락처. 010-4409-2002
<수필집>
2011년 12월 에세이집 『에델바이스 피는 언덕』
2018년 01월 수필집 『이웃집 할매는 아무도 못 말려』
<소설집>
2024년 12월 『무심천에 지는 달』
동인집 『미래소설』
<수상>
2022년 12월 청주 우암문학희 주관 우암문학상 수상
2024년 12월 청주 청주시문학협회 주관 작가상 수상
출처 : 문화앤피플(https://www.cnp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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