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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경주유족회: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합니다. 사랑하는 할아버지 생일 축하합니다. 와~ 와~
회원일동: 94세 할아버지, 건강하세요.
김하종: 94살까지 살았다. 참 오래 살았다.
회원: 할아버지 노래 한 번 하세요.
감하종/94세: ‘고향무정’ 구름도 울고 넘는 울고 넘는 저산 아래 그 옛날 내가 살던 고향이 있었건만 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 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 산골짝엔 물이 마르고 기름진 문전옥답~
내레이션(성우 강신일): 아버지(김봉우-김하종의父)보다 오랜 세월을 살았습니다.
김하종: (아버지도) 오래 사셨으면 좋았을 텐데, 오래 살지 못하고 돌아가셨으니까 안타깝지 그렇잖아요? 그게 안 됐지.
내레이션: 단 한 순간도 아버지를 잊어온 적 없는 아들~
김하종: 아버지! 잘 계십니까?
내레이션: 아들이 가는 모든 길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돌아 갈 곳이 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마주 하기 힘든 아픈 기억을 불러내기도 합니다.
김하종: (버스표 매표소) 9시표, 경주 가는 9시표요.
매표소 직원: 9시 차 경주 가는 겁니다.
내레이션: 누군가에겐 고향이 그렇습니다. (94세 김하종).
김하종: 내가 보니 경주가 싫더라. 고향이 싫어, 경주는 고향인데도 보기도 싫어서, 애들이 대구로오니까 계속 대구에서 살았어요.
내레이션: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고향(경상북도 경주시). 끝내 돌아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명계1리 바탕곡노인정)
김하종: 보자, 여기 보자, 보자, 김 서방네는 안 왔나?
할머니: 여기 있네요.
김하종: 김 서방네야? 원래 김 서방이 나하고 동갑이지 싶은 데, 94살 아닌가?
할머니: 맞아요, 정신도 없고 가만히 들어앉아 놀러도 못 가요.
내레이션: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습니다.
김하종: 그때 스물 두 명이 총살당했거든, 이번에 보상받았다.
내레이션: 긴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가 지나온 시간을 잘 아는 고향가족들,
김하종: 김서방네 돈 30만원 가져왔다. 이거 내 돈이다. 그러니까 김 서방 줘라.
할머니: 뭘 그래요?
김하종: 돈 받아라 내가 주는 거니까 받아라.
할머니: 아니에요.
감하종: 받아라, 이 사람아,
할머니: 오빠 쓰세요.
감하종: 오빠가 뭘 써? 자 받아라 자네 돈 아니다. 자네가 주지 말라고 하면 어떡해.
할머니: 정신도 없어서 그래요.
김하종: 시끄럽다. 정신이 있든지 없든지 줘라 용돈 쓰라고 줘라.
할머니: 고맙습니다.
내레이션: 이렇게 웃으며 안부를 전하기 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세월이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지만 발 걸음은 자연스레 옛 집을 향합니다.
김하종: 여기 보니까 감회가 깊네, 그때 감나무 여덟 그루가 쭉 있었는데, 집은 세 칸 있었고, 이 밑에는 쭉 밭이고, 생생히 기억나요.
내레이션: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더 선명해 지는 기억이 있습니다. (소총 소리) 잊을 수 없는 1949년 7월의 그날,
김하종: 저 건너 두 집, 여기 한 집, 김하근(육촌 형님) 한 집 이렇게 네 집이랑 저 밑에 사는 손씨 가족 여덟 명이 그날 죽었어요. 임석순 65세, 김정도 32세, 곽귀주 31세, 김순덕 6세, 최우일 61세, 김하철 13세, 김하근 42세, 고순자 27세, 김순영 3세, 김상현 6세
내레이션: 마을 사람 30명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엄마 등에 업힌 어린 아이에게도 겨누어진 총 뿌리, 정당한 이유도 없었습니다,
김하종: 손씨 집안에서 벼 여섯 가마니를 분실했거든요. 육촌 형님인 이장이 동네 사람을 다 불러서 찾으니까. 박OO 집에 벼 다섯 가마니가 있었던 거죠. 너는 도둑질 했으니, 동네를 떠나라 라고 했는데 그때 마침 박OO 막냇 동생이 민보단에 들어간 거예요. 그러니까 (이장) 김씨랑 (벼주인) 손씨를 빨갱이에게 협조한다고 명분을 붙여서 없애버리자 했던 모양이에요. 그렇게 총살해 버렸어요.
내레이션: 해방 이후 좌우 이념 대립이 격렬했던 시기, 반공을 국가운영의 핵심주제로 삼았던 이승만 정부의 지원 아래 여러 우익 청년 단체가 만들어졌습니다. 민보단은 그 중 하나였죠. 경찰의 치안유지 협력이 명분이었지만 아무런 적법절차 없이 무고한 주민들을 좌익으로 몰아 학살하기도 했습니다. (민보단-1948년 5-10 총선거 직후 조직된 우익청년단체로 경찰의 하부지원조직으로 활동).
내레이션: 민보단에게 죽임을 당한 경주 내남면 주민은 200여 명으로 추정이 됩니다.
김하종: 유두리…맞아
내레이션: 아버지는 총살당한 친척들의 시신을 수습하러 갔다가 민보단에게 폭행당했습니다. (김하종의 아버지-김봉수).
김하종: 아버지는 집안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어요. 올라가니까 남녀 할 것 없이 어린애들도 죽어 있잖아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경주유족회 회장-김하종). 총을 쏘니까 애들이 엄마 등에 꼭 붙어있으니까 (아버지가) 옷이라도 갈아 입히고 애들 전부 떼어내서 묻어야 하지 않냐고 하니까 그때 민보단장 이협우하고 경찰 한 명하고 그렇게 하면 늦어진다, 매장하는 것이 늦어진다고 하면서 곡갱이와 삽으로 아버지를 때려서 그렇게 9일 만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어요.
내레이션: (아버지와 4남 가족 사진) 남겨진 가족들도 가까스로 살아 남았습니다.
김하종 민보단장 이협우가 김하종, 너희 소를 가져가야겠다 라고 하는 거예요. 안 됩니다 라고 했거든요. 그때 (이협우가) 권총 차고 다녔거든요. 그것으로 죽인다고 하는데 그런 찰나에 (동네 사람이) ‘이 아이 바보입니다. 내려 갑시다’ 하면서 붙들고 내려 가더라고요. (제2대 국회의원 선거, 1950년 5월 30일).
내레이션: 아버지와 친척들을 죽게 만든 경주지역 민보단장, 수백 명의 주민이 ‘희생된 사건의 책임자였으나 국회에 입성해 내리 3선을 지냈습니다. (이협우, 제2~4대 국회의원 경주 내남면 민보단장 출신). 억울하게 가족을 잃은 피해자들만 숨죽여 살아야 했죠. 아버지를 잃은 소년이 할 수 있는 건 공부 밖에 없었습니다. 악착같이 공부해 서울대 법대에 들어갔고 번듯한 직장도 잡았습니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이 늘 무거웠습니다.
김하종: 원래 포항에서 살았어요. 죽도 시장 옆이 그땐 갈대밭이었어요. 제가 아버지, 엄마, 고향 가자 라고 해서 아버지가 우리를 위해 (고향으로) 이사를 왔는데 내남면에 와서 그렇게 희생당했다는 것이 그게 안타까워요.
유족: (위령비 앞에서) 회장님 오셨어요.
김하종: 네, 아이고 고맙습니다.
내레이션: 나이 수믈 일곱에 처음으로 같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유족들과 만났습니다.
김하종: 사촌 형님이 ‘야 너만 잘 되면 되냐? 신사적 복수를 하는 게 아니라 복수를 해야 할 게 아니냐?’ 하더라고요. 그래서 사표 내고 경주유족회 했죠. 4-19 혁명도 학생들이 했는데 젊은 사람이 해야지, 나이 많은 사람은 이제 안 된다. 그래서 (사람들이 저를) 회장을 시켰죠.
내레이션: 그렇게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경주유족회 회장이 되었습니다.
김하종: (위령비 앞에서) 묵념!
내레이션: (1960년 4월) 수만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1960년, 4월 19일,
김하종: (4-19혁명을) 전부 봤죠. 경무대 앞에서 총 쏘는 것도 다 봤다. 내가 천신만고를 다 겪은 사람이다.
내레이션: 그날이(4.19) 있었기에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이승만 육성: 대통령직을 사임할 것이며…(시위군중 환호)
내레이션: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던 시절 유족들의 멈춰있던 시간도 다시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4천여 명이 모여 첫 위령제를 성대하게 열었습니다. (경주 계림국민학교 1960년 11월 13일 경주지구 피학살자 합동위령제, 조국의 산천도 고발하고 푸른 별도 증언한다. 살인마 이협우 잔당들아 이 땅 위에서 물러가라). 가슴 깊숙히 묻어두었던 아버지의 이름을 처음으로 불러보는 자리~~
김하종: 죽음터에서 사라진 무수한 원혼들을 위하는 동시에 생지옥 속에서 도탄에 헤매는 수만 명의 유족들에게 일순이나마 정신적인 위안을 주고자 합동위령제를 거행하오니
사무국장: 선생님, 어제 알아보라 하셨던 유족분들 지금 전화 연락이 안되고 거주지가 불분명합니다.
김하종: 전화가 꺼져 있어? 왜 그러지? 만나봐야 알지, 오늘 만나 봐야겠다.
내레이션: 세월이 흐르면서 연락이 끊긴 유족들이 많아졌습니다.
사무국장: 전화를 안 받습니다. 어제와 똑 같습니다.
사무국장: 안에 들어가서 제가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실례합니다.
김하종: 전화도 안 되면 곡절이 있는 거겠지 무슨 곡절이 있어서 그러나?
사무국장: 주소 확인됐습니다. 주소 확인됐습니다.
김하종: 집으로 직접 찾아가는 수 밖에 없다. 가자 1960년 부터 감포, 양남, 양북, 포항 안 간 데가 없어요. 심지어 12월에 눈이 왔을 때 차가 미끄러져 죽을 뻔하기도 했어요. 그래도 인명재천이라고 큰 사고가 안 나서 다행이라고 느끼죠. 그렇게 해서 864명을 모았죠.
사무국장: 계십니까? 안녕하십니까? 경주유족회에서 나왔습니다. 보상관계 때문에~ 경주유족회 회장인 김하종 선생님이세요.
김하종: 회장입니다.
할머니: 네, 알고 있어요.
김하종: 그런데 왜 전화를 안 받는 거예요? 우리 들어가서 이야기 좀 하면 안 되나? 아이구, 여기 까지 와야 되겠나, 보상금이 나왔거든요. 이것을 찾아가라고 하려는데 연락이 안 되는 거예요. 왜 그렇게 연락이 안 되나? 오늘 야단 좀 쳐야 한다. 94살 짜리가 여기까지 찾아와야 하나? 그래도 건강하니까 반갑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향하여) 건강하지 않아요. 서지도 못하고요. 못 걸어 다닙니다.
김하종: 86살? 85살이 못 선다고 하면…그런 소리 치워라
내레이션: 힘들게 견뎌왔을 세월이 안쓰러워 괜한 농담을 건넵니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경주유족 김진호)
김진호: 그때 이슬비가 왔어요. 비가 오는데 (경찰이) 아버지를 가자고 하면서 데리고 나가더라고요. 그러고 아무 소식이 없어요. 소식 없는 것을 어쩌겠어요. 어린애가 (아버지를) 찾을 수 있나, 그건 (마음에) 묻고 가야죠. 내 평생 가지고 가야 돼.
내레이션: 모두의 아버지를 위해 함께 싸워 온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신문보도, 前自由黨 國會議員 李協雨 兄弟拘束 良民들을 빨갱이로 몰아虐殺 數十戶에 불지르고 財産掠奪, 1960년 9월 16일) 유족회를 결성하고 가장 먼저 한 일,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민보단장을 법의 심판대에 세운 것이었습니다.
김하종: (이협우가) 구속되니까 유족들이 많이 모이더라고요. 이제 마음 놓고 해도 되는구나 싶어서 했는데 (가해자) 이 사람들이 깡패 둘을 데리고 다녔어요. 내 뒤를 미행하고 내가 재판 과정에 못 들어오도록 하려는 것을 다른 유족들이 에워싸고 그랬거든요. 그렇게 유족들은 언제나 나를 지켜줬어요. 행여 누가 나를 건드릴까 싶어서요. (1심 재판부 이협우에 사형선고, 1961년 3월 6일).
내레이션: 아버지의 恨을 풀 수 있겠다는 희망이 피어 올랐습니다.
김하종: 감개무량하죠. 한 마디로 좋지, (집에서) 보통 4시간 반이면 일어나요. 깨면 한참 움직이고 누워서 발을 자꾸 이렇게 들어요 (맨손체조).
내레이션: 한 달 한 달 나이가 들수록 몸을 더 부지런히 움직이게 됩니다.
김하종: 그리고 경주 가게 되면 일찍 가요.
내레이션: 1주일에 세번은 유족회 사무실이 있는 경주에 갑니다. 버스로 왕복 2시간, 내려서 걷는 거리도 만만치 않다 보니 꽤 긴 시간을 길 위에서 보냅니다. (사)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경주유족회 T.741-0979 3층.
김하종: 버겁고 그런 것은 없습니다. 없을 수는 없죠.
내레이션: 아흔 넷,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인다는 소리를 자주 듣지만 계단을 오를 때 만큼은 숨이 가빠집니다. (경주 유족회 (사)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김하종: 사실 제가 자식들한테 일체 이야기를 안 했지만 걷는데 조금 지장이 있어요. 통증이 있어요.
내레이션: 통증이 느껴질 때마다 청춘을 통째로 빼앗겼던 그때가 떠오릅니다.
김하종: (형무소에서) 3년 동안 살았던 것이 후유증이 있구나. 느껴질 때가 많아요. 형무소가 열악해서 담요 한 장으로 깔고 덮고 잤어요. 그렇게 추울 수가 없어요. 낮에 일어나면 기대지도 말고 눕지도 말고 꿇어앉아 있으라고 하거든요. 하루 종일 그렇게 하면 얼마나 힘들겠어요.
내레이션: 스물 여덟 살 되던 해에 찾아온 또 한 번의 시련 (1961년 5월) 5.16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군사정권은 전국에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유족회 회원들을 체포해 기소했습니다.
김하종: 부산에 군대 인쇄공창에 있었는데 5.16 쿠데타 나니까 중령하고 날 잡으러 왔다고 하는 거예요. 요새는 KTX지만 당시에는 통일호에 태워서 서울역에 내리자마자 사이드카 두 대를 붙이더라고요. 내가 정말 큰 죄를 지었나? 했는데 혁명재판소로 가는 거예요. 딱 가니까 혁명재판소 책임자 박창암이 아직 젊네 그러더니 갖다 넣어요. 그리고 나서 서대문 형무소에 딱 들어갔잖아요.
내레이션: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해 주요 정당 및 사회단체 관계자 등을 처벌할 혁명재판소, 그곳엔 혼란한 바깥 세상 만큼이나 다양한 인물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김하종: 백선엽 장군의 동생 백인엽 중장, 박병배 국방부 차관,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도 있었고요. 조용수 사장이 얼마 있다가 얼굴이 하얘져서 들어오더니 나(구형) 뭐 받았게? 이러더라고요. 10년형? 그래더니, 아니다, 나 사형 구형 받았는데 일본에서 역술가가 당신 서른 두 살 넘기기가 참 힘들다. 서른두 살 넘기면 장수한다 했다는 거예요. 그때 서른 두 살에 죽었잖아요. (사형장) 가면서 잘 있으라고, 아마 오늘 내가 끝인 모양이다 이랬죠.
내레이션: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시작한 유족회 활동은 국가를 위협하는 범죄가 되어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도 그랬듯 아들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김하종: 아국 군관민 이간책을 집요히 꾀하는 북괴의 간첩 남침에 이유상 동조한 것이라고 볼 것이며 징역 7년에 처한다. (1962년 1월 31일 혁명재판), 최영우씨, 동생(김하택), 신경시 혁명재판소에서 재판받는 광경을 볼 때 감회가 너무 깊었습니다.
내레이션: 28세 김하종 20대 후반 청춘의 끝자락을 오로시 감옥에서 보냈습니다.
김하종: (네 명중) 생존자는 나 하나뿐이지 싶다. 지금, 생존자는 제사(위령제)를 지낸다고 하기에자식과 집안된 도리로 나간 것이 어찌 죄가 됩니까? (김하종 상고이유서 1962년 3월 3일).
대법원 이협우 등 무죄선고 1962년 6월 28일(출처: 매일신문) “유족회 간부 탄압으로 인한 유족들의 증언 변화가 무죄판결에 영향” [경주 내남면 민간인 학살사건 진상규명운동에 관한 연구, 이창현(2009)]
내레이션: 그 사이 민보단장인 이협우에게는 무죄가 선고되었습니다.
김하종: 5.16쿠데타가 안 났으면 이협우는 죽었죠. 5.16쿠데타가 나니까 이 세상에 억울한 사람은 집어넣고 죄지은 사람은 나가는구나 그랬죠. 그때 혈서를 써서 ‘너무 억울하다’ 다른 말 없이 억울하다. 이런 법이 어디 있느냐 그랬어요. 착잡하죠.
내레이션: 단골 미용실에 들렸습니다.
김하종: 안녕하세요
미용사: 이쪽으로 들어오세요.
김하종: 양동에 가니 참 새롭더라.
미용사: 고향에 아는 사람이 있어요?
김하종: 아직도 질부가 살고 있어요. 종질부가 자식들이 아빠는 그렇게 고향을 싫다고 하면서 왜 경주에 가려고 하냐? 이래서 경주가 공기가 좋고 맑아서 가려는 거지 다른 의미는 없다. 옛날에 그런 일이 있었지만…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고향이 좋지.
내레이션: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흰머리 염색을 거른 적이 없습니다.
김하종: 염색은 막내 딸이 상견례할 때 아버지가 늦게 딸을 낳았으니까, 신경이 쓰인 모양이에요. “아빠 이거 해” 염색해야 한다고 자기가 막 해주고 그때부터 오늘까지 계속 염색하게 됐어요. (딸말을) 안 들어 줄 수 없죠. 딸이 귀엽잖아. 이발하고 나니까 나도 젊어 보이네
미용사: 하~하~ 10년
김하종: 10년 젊어 보이네.
내레이션: 딸 덕분에 10년은 젊게 사는 기분입니다.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결혼해 딸 다섯을 얻었습니다. 떠 올리면 아프기만 했던 가족의 의미를 다시 찾아준 딸들,
김하종: 나한테는 (딸이) 정말 좋은 존재지. 참 좋지. 딸이 좋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프지. (가족 사진을 가리키면서) 큰 딸, 둘째 딸은 국어, 수학선생이고 셋째는 약사고, 우리 딸 다섯이랑 사위 다섯이 다 착해요. 회사 다니고 다 잘 되고 있어요.
내레이션: 잘 자라준 아이들이 고맙기만 합니다. 평생을 아버지의 아들로 사느라 딸들에게 좋은 아버지가 되어 주지 못한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김하종: 우리 애들은 유족회 활동하는 것을 싫어하거든요. (애들) 할머니가 귀에 못이 박히다시피 절대로 너희 아버지 유족회 하지 못하게 해라 라고 했으니까. 안 맡았으면 좋겠다고 자꾸 그러면서 지금도 반대해요.
내레이션: 한 집안의 가장으로 평범하게 살고 싶었지만 세상은 좀처럼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동국대학교 사범대학부속 선화여자고등학교).
김하종: 건물이 참 새롭다. 하여간 새로운데 그때 내가 5층 건물 뼈대만 세워놓고 2층 까지만 지었는데, 격세지감이네. 연좌제에다 신원특이자로 저 사람은 앞으로 공직생활도 못하고 아무 것도 못한다고 직장생활을 못한다고 하니까 장사하든지 농사짓든지 하는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고요.
내레이션: 제 때에 교육받지 못한 이들을 위해 설립된 공민학교 교장직을 제안 받았지만 그 마저도 쉽게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김하종: 내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東方中學校 一回 卒業生一同). 유족회 회장한 것? 죄라면 그것인데, 경찰서와 특무대에 연락해서 교장이라도 하도록 해주세요. (그랬죠).
내레이션: 지역 인사가 신원을 보증해 준 뒤에야 겨우 교단에 설 수 있었습니다.
김하종: 내가 교장으로 있을 때도 정보과 형사들이 가끔 왔어요. 와서 “교장 선생님, 유족회(사람들) 만납니까?” 하고 “안 만난다. 만날 새가 어딨나?”
내레이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그가 지나온 삶의 흔적을 마주하게 된 유족도 있습니다.
사무국장: 습기가 안 차게 보자기를 안에 한 번 더 싸셨습니다.
내레이션: 할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고 싶었던 아버지가 소중하게 모아 둔 자료, 낡은 서류안엔 중앙정보부장으로 부터 받은 편지도 있었습니다. (중앙정보부장 김형욱).
사무국장: 이 자료는 집안의 자료로서 중요합니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경주유족 조학수). 엣날에 연좌제로 묶여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공직이라든지 이런 데 가실 수도 없고 그렇게 됐는데 할머니께서(李鍾德) 중앙정보부에 아주 애절하게 서신을 올리신 것으로 제가 알고 있습니다. 중앙정보부장으로부터 직접적인 연좌제 사면령이 내려온 서신입니다. (1967년 1월 중앙정보부장 김형욱).—---현요시 대상에서 완전 삭제--------이 서신으로 인해 공직생활을 하실 수 있었던 것으로 확인됩니다.
내레이션: 할머니는 위령제에서 메모를 읽었던 이유로 옥살이를 했고 유족회 활동을 한 아버지는 평생 감시를 받으며 살았습니다. 모질고 긴 세월을 홀로 견뎌 왔을 아버지, 아들은 이제야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조학수/유족: 선친께서도 유족회 활동일이든지 이런 것을 지속적으로 하시면서 많이 힘드셨죠. 그렇지만 저한테 그런 말씀을 안 하셨습니다. 저한테 물려주기 싫으셨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내레이션: 모처럼 유족회 사무실이 분주합니다. 낡은 집기들을 정리하고 새 단장을 하기로 했습니다.
유족: 저 맨손으로 왔습니다.
회장: 맨손으로 왔는데, 조국장, 그것을 주면 어떡해? 맨손으로 오는 사람은 안 줘야지.
유족: 이렇게 배우죠.
회장: 배우나?
유족: 네
내레이션: 유족들이 모일 수 있는 이 공간을 잘 가꾸어 다음세대에게 물려주고 싶은 바람도 있습니다.
일꾼: 경첩이 안 맞습니다.
회장: 알아봐서 경첩을 새로 싹 바꿔야지.
유족: 맞아, 고쳐야 해.
최혜숙/유족: 제가 닦게 놔 두세요. 빗자루 가져와서 빗자루 가져와서 닦을게요. 설치하고 난 뒤에 닦아야죠 (최혜숙).
회장: 혜숙이가 안 닦고 있는가 싶어 걱정돼서 미리 닦아보면서 시범을 보인다. 혜숙이는 나를 보고 아버지라 합시다 하는데 “이 사람아, 아버지라 하나마나지만 (말해주니) 고맙다 , 그러라” 그래서 혜숙아 혜숙아 부르게 됐어요.
내레이션: 최혜숙은 10년전 세워진 위령탑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희생자 명단) 앞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최혜숙: 제가 유복녀거든요. 어릴 때는 아버지라는 존재 자체를 몰랐죠. 처음부터 없었으니까 아버지 얼굴도 모르지, 사진도 없지, 아무 것도 모르잖아요. 웃어른들이 “쟤는 자기 아버지를 똑 닮았다”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내레이션: 유일하게 알고 있던 아버지의 이름 석자, 최현택,
최혜숙: 아버지, 젊은 엄마와 어린 자녀를 두고 그 젊은 나이, 서른 살도 안 돼서 그렇게 가실 때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지나가다 보니까 위령탑이라고 쓰여 있는데 안강읍에 우리 아버지 이름이 있더라고요. 딱 보는 순간 (우리) 아버지다 싶었죠,
김하종: 위령탑이 어떤지 보러 갔더니 여자분이 울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어째 웁니까?” 물으니까 “와보니까 아버지 이름이 있어서 웁니다” 이러더라고요. 일찍이 부모를 잃고 아버지를 못 보니까 그 정을 잊지 못해 우는구나 싶었죠. (유해발굴-자료 [경주 민간인 희생자 유해 발굴 보고서] 신라문화유산 연구원).
내레이션: 시신 조차 찾지 못하고 흘러간 70여 년의 세월 속에서 남겨진 건 아버지들의 이름뿐입니다. 늦은 저녁에도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유족(전화): 손자, 손녀들 한테도 나오는 거예요?
회장: 네, 그 정도죠. 맞습니다. 나중에 한 번 (사무실에서) 만납시다.
내레이션: 잠자리에 들기 전 빼놓치 않는 습관이 있습니다.
회장: 유족들의 전화가 많이 오니까 누가 전화 왔다 오늘 몇 시에 누구를 만났다. 그런 것들 적어 놓고 60년대부터 유족회 하면서 많이 썼어요. 그때부터 쭉 써왔는데, 너무 많아서 없애기도 했어요.
내레이션: 아버지를 위해 걸어온 아들의 여정이 빼곡히 담긴 수첩,
회장: 2019년 4월 1일, 6시 KTX로 서울에 갔다. 영등포에서 내려 국회의사당 본관에 갔다.
내레이션: 아버지의 죽음을 밝히려면 국가가 나서 조사를 해야 하지만 이를 위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출범은 법안심사를 위한 소위원회의 문턱조차 넘지 못했습니다.
회장: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제2기 만들 때부터 국회의원들 만나러 가고 국회에 거의 살다시피 했어요. 간절했죠 사실은 간절했죠.
내레이션: 길 위에서 보낸 10년, 갈 수 있는 곳은 모두 찾아 다녔습니다.
회장: 경주에서 35명이 2018년 5뤌 3일 관광버스를 타고 광화문 광장에 갔다. 기자회견을 하고 청와대에도 다녀왔다. 2020년 5월20일 찜질방에서 자고 국회에 갔다. 과거사법이 통과됐다.
기자회견: (사회자) 근 60년 동안을 한국전쟁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 회복 회복을 위해서 앞장서 온 분이 계십니다. 올해 87살 되셨습니다.
김하종/당시 87세: (기자들 앞에서) 국가가 범죄를 저질러 놓고 시효 소멸 운운하고 반성은 커녕 국가예산이 많이 든다고 과거사법 통과를 반대하니 천인공노할 처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2020년 12월 10일 2기 진실위원회 사무실에 갔다. 아버지 사건을 접수했다.
경주유족회 사무실: 여기에다 서류를 정리해 (놓았어요).
내레이션: 국가를 상대로 77년 전의 사건을 묻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회장: 피해자 김봉수 1886년 10월 20일생 가해자 민보단장 이협우 외 10여명
결론: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2기 아버지 김봉수 외 경주유족 270여 명 진실규명결정 “경찰과 민보단 등이 민간인을 법적절차 없이 실해한 명백한 불법행위”
회장: 참 오래 걸렸어요. (시간이) 걸리긴 오래 걸렸는데 (진실규명) 결정문 딱 받고 보니까 기뻤죠. 더 좋은 일이 있겠습니까? (2025년)
내레이션: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진실은 밝혀졌지만 경주와 서울을 오가는 그의 여정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회장: 다 편안하지?
유족: 회장님네 (경주)는 아직 판결이 안 났다면서요?
회장: 또 연기돼서 재판이 10월 23일이다. (진실규명) 결정된 것을 또 두 달 연기를 하고 그러더라고, 우리 아버지만 (진실규명) 됐다고 해서 그냥 방치할 수 없잖아요. 경주 유족 중 진실위원회 결정문 못 받은 사람이 20명 정도 남은 것 같아요. 하는 김에 내가 마무리 짓고 가야 되겠다는 마음이 들어요. 1960년대부터 했습니다. 27살 부터 활동을 했는데 지금 나이가 93살 입니다. 93살까지 이런 활동을 오늘까지 해도 과거사 치유재단 설립이 안 됐는데 좋은 결과가 나오기를 기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6년 1월 25일 돌아가신지 오랜만에 아버지가 꿈에 나타났다. 이런 꿈도 있는지 참으로 이상하다. (거실에서) 참 눈이 많이 오네, 평생 꿈을 안 꿨거든요. 평생 아버지 꿈을 잘 안 꾸는데 그날 저녁 아버지가 딱 나오면서 얘야, 돈 받아라 하면서 만원 짜리를 수북이 세서주고, 이런 꿈도 있나 싶었어요. 그래서 좋은 일이 생길 모양이라고, 길몽으로 여겼죠.
내레이션: (동대구역에서) 빠르게 흘러 가는 시간에 조급한 마음이 듭니다.
회장: 유족들도 작년하고 올해 자꾸 한 사람씩 죽어 가니까 어떻게든지 죽기 전에 좋은 결과로 유종의 미를 거뒀으면 하는 생각이 더 간절합니다.
내레이션: 국회 본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에 서울로 향합니다.(2026년 1월 29일).
회장: 안녕하십니까? 오래만입니다.
유족: 회장님, 오셨네요.
내레이션: 6년전 국회에서 함께 했던 사람들이 다시 모였습니다. (제431회 국회 (임시회) 제2차 본회의 (2026.1.29. (목). 14:00), 어쩌면 이 순간이 77년의 세월을 매듭지을 마지막 고비일지 모릅니다. 과거사법 개정안에 통과돼 3기 진화위가 출범해야 남은 유족들이 진실화해규명 신청을 할 수 있습니다..
국회: 제431회 국회 임시회 회기 결정의 건을 상정합니다.
내레이션: 그 동안 쟁점법안에 밀려 있던 법안들이 차례로 상정됐습니다.
국회: 여러분의 권리도 일한 만큼의 대가를 받을 수 있는 국가가 되도록~~양 당의 원내 대표 잠깐 앞으로 나와 주세요.
회장: 사실 긴장되는 것이 다른 것은 무사히 통과하는 데 혹시 우리가 안 될까 봐 상당히 걱정했어요.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관 47.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 전부개정 법률안(대안) 제안설명: 모경종 위원). 과거사 정리기본법 전부개정법 법률안(대안) 이상 3건을 상정합니다.
내레이션: 드디어 눈 앞에 놓인 마지막 숙제~ 숨 죽인 채 표결과정을 지켜봤습니다,
국회: 투표 결과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재석 194인 중 찬성 168인, 반대 8인, 기권 18인으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기본법 전부개정법률안(대안)이 가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유족회 회원: (일동) 일어나서 박수 치다.
내레이션: 한참 동안 자리를 떠날 수 없었습니다.
회장: 축하합니다. 서로가 잘 됐다.
유족: 회장님 안녕히 내려가시고요.
회장: 고맙습니다. 유족이 고생 많으셨습니다.
김하종/94세/한국전쟁 유족회 특별법 추진위원장: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제3기가 설립되지 않아서 유족들이 진실규명을 못 받은 것에 대해서 상당히 걱정했는데 이제 마음 놓고 잠을 잘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해서 마지막으로 모든 것이 뜻대로 다 잘 통과되기를 바랍니다.
내레이션: 긴 세월 쉴 틈 없이 달려왔습니다. 앞만 보고 달려오다 보니 많은 것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의 아들이란 숙명, 그 앞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 조차 제대로 돌보지 못 했습니다. 유족회 일로 바쁜 남편을 묵묵히 지켜봐 준 아내,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김하종/남편: (사원 납골당에서) 여보, 잘 있었어요? 이번에 다행이도 명예회복을 했습니다. 내가 못다 이룬 한을 다 풀고 제3기 진실위원회가 설립될 때까지 일하고 위령탑도 다 건립되고 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잘 지내기 바랍니다. 당신이 잘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극락 세계에서 만나 얘기를 하세.
내레이션: 아내 앞에 서니 더욱 진하게 남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때의 선택이 아니었다면 모두의 삶이 달라졌을까.
김하종: 만약 포항에 그대로 살았으면 어떻게 변했을까. 아버지도 그렇게 희생 안 당하고 우리가 다 잘 살았을 텐데, 꿈이라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죠. 상상도 못 했죠. 내 꿈이라고 하는 것은 나는 그저 부모, 형제를 위해 유족회 활동을 했기 때문에 청춘을 다 바쳤죠.
내레이션: 아버지에게 가는 길은 멀고도 길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어떤 말을 해 주실까요.
김하종: 아버지가 좋아할 겁니다. 아버지가 네가 잘하고 왔다고, 집안 일도 아버지 일도 잘 하고 왔다고 나를 칭찬하지 싶어요. 아버지~~ 잘 계십니까? 큰 아들 김하종이 여기 와 있습니다. 아버지 보러 왔습니다. 아버지를 위하여 아들이 모든 일을 다 바치고 있습니다. 아버지한테 갈 것 같아요. 이 길로 가면 아버지한테 꼭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아버지가 보고 싶어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Republic of Korea) 진화위 사무실 국회
김하종: 본인도 왔고, 제가 대표자고 같이 왔어요.
진화위: 여기 진실-규명 신청서 작성을 해 주셨는데 접수를 하겠습니다. 김하종 씨는 오늘도 경주와 서울을 오가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유족을 돕고 있다. 접수번호: 1306호, 접수완료! (KBS 다큐인사이트 257회 아버지에게 가는 길에서 정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