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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사풍색혼소(死風色魂笑)
①
봉분(封墳)을 에워싸고 있는 조그만 둔덕의 한 그루의 소나무 아래 궁우노인이 서 있었다.
때에 절은 그의 백의(白衣) 앞섶에는 점점이 핏방울이 묻은 채 굳어 있었다. 눈빛은 예전처럼 밝아 보였다. 그러나 그 눈빛 깊숙한 곳에는 섬뜩한 한기(寒氣)가 서려 있었다.
백천강은 그것을 느끼고 흠칫했다. 그러나 그보다는 반가움이 앞섰다. 백천강은 궁우노인을 향해 무릎을 꿇고 물었다.
"할아버지, 그간 어디에 가 계셨습니까?"
백천강의 절을 받던 궁우노인이 입가에 야릇한 기소를 베어 물었다.
"허허... 너를 위해 한 권의 고서(古書)를 구해 왔다. 그 책은 네가 명장(明匠)이 되는데 꼭 필요한 것이다."
궁우노인은 손을 내밀어 백천강을 일으켰다.
"자, 어서 병기점으로 돌아가자. 가서 네게 주겠다."
"......?"
백천강은 엉겹결에 그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백천강은 궁우노인과 함께 병기점으로 돌아왔다. 백천강이 병기점 안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찌익!
돌연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춘 궁우노인이 현판 옆에 붙어있는 방문(榜文)을 떼어내는 것이었다.
- 검(劍)은 팔되, 살(殺)은 팔지 않음.
그 방문은 궁우노인이 손수 써붙인 것이었다. 방문을 떼어낸 궁우노인은 미리 준비라도 하고 있었다는 듯이 품에서 또 하나의 방문을 꺼내 붙였다.
- 진짜 검(劍)을 팜. 살(殺)을 위해 쓰일 검(劍)만을 팜.
실로 놀라운 글귀였다.
"......!"
새로운 방문을 바라보는 순간 백천강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글씨는 예전과 하등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나 내용은 물론이거니와 글씨가 주는 느낌은 과거와는 완전히 반대였다.
백천강은 멍하니 방문을 바라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어머니도 할아버지도 조금 이상해지셨다. 이것이 제대로 된 것인가... 아니면 잘못된 것인가?'
백천강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궁우를 따라 토방 안으로 들어갔다.
백천강이 무릎을 꿇고 앉자 궁우노인은 품 속에서 한 권의 고서를 꺼내 내밀었다. 몹시 낡은 책이었다.
너덜거리는 표지(表紙)에는 전자체(篆字體)로 제목이 씌어져 있었다.
<천마천병보(天魔天兵譜)>
"할아버지, 이건......?"
고서를 받아들고 백천강이 의아한 듯이 바라보자 궁우노인이 입을 열었다.
"오늘부터 그 책을 공부해라."
"이것이... 무엇입니까?"
"몹시 귀한 책이다. 특히 너에게는......."
잠시 후 궁우노인은 약간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다 읽은 다음 태워버려라. 아마도 그것은 네게 주는 마지막 선물일지도 모른다."
"할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마지막이라니오?"
백천강은 더욱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궁우노인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헛헛... 늙으면 죽는 법이 아니겠느냐?"
이어 그는 눈을 감았다. 궁우노인의 닫힌 입은 두 번 다시 열리지 않았다. 이제 자신이 해야 할 말은 더이상 없다는 듯이.
'모를 일이다. 할아버지께서는 부드러워지신 것도 같으면서도 날카로워지신 것도 같다. 열흘만에 할아버지가 이렇게 변한 이유가 무엇일까?'
백천강은 눈을 감고 상념에 잠긴 듯한 궁우노인을 바라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바로 그때 밖으로부터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핫핫핫! 여기서 검(劍)을 팔다니... 모를 일이군!"
백천강은 급히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궁가병기점 앞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제법 청수한 용모에 눈빛이 범상치가 않은 중년문사 하나와 일곱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몹시 귀엽게 생긴 미소녀였다.
녹의(綠衣)를 입은 소녀는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굴리며 병기점 안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소녀에게는 궁가병기점의 풍물이 몹시 신기롭게 보이는 듯했다.
"어떻게 오셨는지요?"
백천강이 나가며 물었다. 중년문사는 다시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허헛, 나는 검을 부러뜨린 문사네만... 이곳에서 검을 판다면 아니 사갈 수 없어 들렸네. 내게 검을 팔게나."
백천강은 급히 말했다.
"거... 검을 팔지는 않......."
순간 백천강은 급히 말을 중단했다. 조금 전에 궁우노인이 새로 써붙인 방문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곧 백천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파... 팝니다. 그러나 만들어진 것이 없습니다."
그 말에 기이한 눈초리로 백천강의 아래 위를 훑어보던 중년문사가 다시 빙그레 웃었다.
"허헛, 그럼 기다리겠네. 검을 완성하면 열래객잔(悅來客棧)의 절검유사(絶劍儒士) 기세광(奇世光)을 찾아주게나!"
말을 끝낸 중년문사는 품 속에서 전냥을 꺼냈다. 그는 검의 값을 묻지도 않았다. 짚히는 대로 은자 오천 냥짜리 전표를 백천강에게 건네 주는 것이었다.
"허허헛, 계집애야, 돌아가자."
중년문사는 낭랑한 대소를 터뜨리며 녹의소녀의 손을 잡고 돌아섰다. 소녀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멍하니 서 있는 백천강을 유심히 보더니 곧 그를 따라 사라졌다.
절검유사(絶劍儒士) 기세광(奇世光).
그는 강호에서 이름난 대협객(大俠客)으로 지난 날 대마성(大魔城)을 칠 때 무림맹에 가입하여 눈부신 활약을 보였던 절정고수였다.
한동안 은거했던 그가 마침내 나타난 것이다.
②
밤(夜).
월광(月光)이 구름에 가려진 적막한 밤이었다. 낙양의 번화가는 불야성으로 아직도 불빛이 꺼지지 않았고 흥청거렸다. 그것은 화운로(華運路)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빈민들이 사는 궁핍한 거리는 인적이 끊긴 지 이미 오래였다.
이경(二更) 무렵.
땅... 땅... 땅.......
날카롭고도 밝은 쇳소리가 궁가병기점으로부터 야음(夜陰)의 적막을 깨고 들려왔다.
궁가병기점의 불화로가 싸늘하게 식은 지 열하루만의 일이었다. 백천강은 시뻘겋게 타오르는 불화로 앞에서 망치질을 하고 있었다.
그는 쉴새없이 내심 중얼거렸다.
'이제부터는 진짜 검(劍)을 만드는 것이다. 진짜 검을!'
땅... 땅... 땅.......
쇳소리는 날카롭게 들렸다. 검을 단련하는 일에 몰두해 있는 백천강의 모습은 마치 한 덩이의 바위같이 보였다.
그는 드디어 검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살검(殺劍)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제는 검을 다 만든 뒤 부수지 않아도 되었다. 지금부터 만드는 검은 누군가 임자가 있는 검이었다.
스스로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백천강의 몸 안에는 엄청난 마성(魔性)이 잠재하고 있었다.
백천강의 몸 속에는 대마성(大魔城)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인 백수련(白水蓮)은 바로 대마성의 후예인이었다. 그 마성이 백천강의 피 속에도 면면히 흐르고 있었기에 그로 하여금 살검을 만들게 하는 것이었다.
땅... 땅... 땅.......
그는 힘차게 망치질을 했다.
그에 따라 시뻘건 쇠뭉치는 점차 검의 형태를 갖추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검 만드는 일에 몰두했다.
발없는 소문이 하룻밤에 천 리를 간다고 했던가?
불과 사흘이 지나지 않아서 궁가병기점이 검(劍)을 팔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낙양 전체에 퍼졌다.
낙양사람들은 모두 의아해 했다.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또는 필요에 의해서 궁가병기점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그에따라 검을 주문하는 사람도 늘어갔다.
주문이 늘면 늘수록 백천강의 망치질 소리는 더더욱 빨라졌다. 그는 단 한순간도 쉬는 적이 없었다. 오로지 살검을 만드는 것만이 그의 숙업인 듯 미친 듯이 망치질을 할 뿐이었다.
그로부터 한 달여가 지났을까?
갑자기 놀라운 소문이 낙양을 온통 뒤흔들었다. 그것은 괴이하고 공포스러운 소문이었다.
...... 북망산에 색마가 있다. 농부 다섯이 모두 원양지기(元陽之氣)를 빨리고 죽었다!
...... 북망산의 묘지기 두 명이 발가벗은 채 죽었다.
...... 사풍색혼소(死風色魂笑)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 웃음을 듣고 많은 남자들이 홀려 북망산으로 들어갔다가 모두 죽었다.
실로 엄청난 소문이었다.
그 소문은 낙양성을 뒤집어 놓기에 충분했다. 어디 그뿐인가? 무림의 사람들도 모두 관심을 곤두세우기 시작했다.
"흐으윽... 하아악!"
묘한 소리가 바람을 타고 흘렀다.
신음소리같은가 하면 흐느끼는 것 같기도 한 야릇한 소리는 묘하게도 뭇 사내들의 색정(色情)을 자극했다.
황혼(黃昏)이 북망산의 서편 하늘을 처절하게 물들이는 시각.
묘한 신음소리를 따라 북망산의 중턱에 위치한 한 묘옥을 향해 조심스럽게 접근해가는 인영이 있었다.
장한의 골격을 지녔으나 얼굴은 뜻밖에도 소년의 티를 벗어나지 못한 인영은 바로 백천강이었다.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음이 틀림없다!'
백천강의 가슴은 뛰었다.
북망산 계곡에서 흐느끼는 듯한 여인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한 지 닷새째였다. 뭇 사내의 혼을 빼앗는 흐느낌은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들려왔다.
그것을 들을 때마다 백천강은 어떤 예감 때문에 부르르 몸을 떨곤 했다.
마침내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던 백천강은 작심을 하고 북망산 안으로 들어선 것이었다.
벼락을 맞아 불타버린 고목을 지나자 언덕의 무덤 사이로 허물어져가는 모옥이 보였다. 바로 그의 모친인 백수련이 기거하는 곳이었다.
모옥을 향해 발소리를 죽이며 다가가던 백천강은 한순간 얼어붙은 듯이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활짝 열린 모옥 안의 풍경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 이럴 수가?"
두 눈을 부릅뜬 백천강은 경악에 찬 외침을 토해내고 말았다. 석침상 위에서 발가벗은 두 남녀가 뒹굴고 있었기 때문이다.
"흐으흑... 하아......"
차마 눈뜨고 못볼 일이었다. 두 남녀는 짐승처럼 서로의 몸을 핥으며 정사를 벌이고 있었다.
"오오... 이럴 수가... 어머니가 통정(通情)을 하다니!"
백천강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부르짖었다.
그것은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충격이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듯한 현기증을 느끼며 백천강은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다음 순간 그의 눈에 핏발이 섰다.
"이... 이 놈을......."
그는 즉시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어머니와 정사를 벌이는 사내를 쳐죽이기 위해서 맹목적으로 달려든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사내 밑에 깔린 채 희열의 신음성을 토해내던 백수련의 눈이 번적 떠졌다. 이어 그녀의 손바닥이 백천강을 향해 흔들렸다.
"바보같은 자식... 가라!"
꽝!
"아악!"
폭음과 함께 백천강은 비명을 지르며 모옥 밖으로 날아갔다. 전신이 산산조각으로 으스러지는 고통과 함께 무덤가에 떨어진 백천강은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바로 그때였다.
스슥.......
하나의 그림자가 소리없이 나타나더니 정신을 잃은 백천강을 안아드는 것이었다. 바로 궁우노인이었다.
품에 백천강을 안은 궁우노인이 발을 움직였다. 그 순간 놀랍게도 그의 신형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뒤이어 궁우노인은 단번에 오십 장을 날아 사라져갔다.
그로부터 일각(一刻) 후.
거친 신음소리가 잦아들면서 모옥 안으로부터 넋을 잃은 듯한 사내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헤헤헤... 헤헤......."
발가벗은 사내 하나가 전신에 비지땀을 흘리며 비틀비틀 걸어나왔다.
사내의 동공은 텅 비어 있었다. 마치 온몸의 기운을 모두 빼앗긴 듯했다.
"헤헤헤......."
넋을 잃은 웃음을 연신 흘리며 사내는 허우적거리듯 앞으로 걸어갔다.
"헤헤헤... 어... 억!"
불과 삼 장이나 걸었을까? 하나의 무덤 옆을 지나던 사내가 무엇에 걸리기라도 했는지 풀썩 쓰러졌다. 그것이 끝이었다. 그는 영원히 다시는 움직일 줄을 몰랐다.
"호호...호호홋......!"
그 순간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돌연 모옥 안으로부터 음탕하고 마성이 가득찬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③
궁가병기점.
"......!"
타오르는 불꽃 앞에서 백천강은 고서를 보고 있었다.
<천마천병보(天魔天兵譜)>
바로 궁우노인이 그에게 준 책자였다.
천마천병보를 읽어나가는 백천강의 눈알이 시뻘겋게 충혈되면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한순간 그의 입에서 살기와 저주에 찬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죽인다. 모두 죽인다. 나의 어머니를 범한 자들을!"
그의 눈에서도 무시무시한 살광(殺光)이 흘러나왔다.
천마천병보는 갖가지의 신병(新兵)과 암기(暗器), 가공할 죽음의 비병(秘兵)을 제작하는 방법이 적혀 있는 책이었다.
"죽이리라. 모두!"
한 점 허공을 바라보며 연이어 중얼거리는 백천강의 음성에는 섬뜩한 살기가 배어 있었다. 그런 백천강의 등 뒤에 한 사람이 유령같이 서 있었다.
다름아닌 파검장인(破劍匠人) 궁우(宮羽)였다.
"......!"
한순간 궁우의 입가에 잔혹한 웃음이 악마의 저주처럼 묻어났다.
낙양성 외곽.
북망산 초입의 한 언덕에 한 채의 초옥이 생겨난 것은 늦가을이 지나가기 전의 일이었다.
밝은 햇살이 열린 토방문 사이로 비껴들어 따스한 양지를 만들고 있었다. 백의를 입은 절세의 미부(美婦)가 스며드는 양광을 쬐며 침상 가에 걸터 앉아 있었다.
"......."
아무런 표정도 없는, 그러나 신비스러운 여인이었다.
초점을 잃은 몽롱한 눈빛만이 꿈 속을 헤매는 듯했다. 어떻게 보면 꼭 백치(白痴)처럼 보이는 여인이었다. 바로 그런 분위기가 여인을 더더욱 신비스럽게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백의는 약간 남루했다. 오히려 그 점이 더욱 미부의 미모를 돋보이게끔 만들었다. 정말이지 경국지색(傾國之色)의 미모를 지닌 여인이었다.
그녀는 바로 십육 년 전 대마성의 후예인들에게 천하제일미(天下第一美)라고 불리우던 백수련이었다.
그녀가 몸을 일으킨 것은 초옥을 따스하게 하던 아침 햇살이 사라진 후였다. 어느새 해는 중천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초옥 앞에 홀로 나와서 멍하니 서 있기 시작했다. 그것이 살풍(殺風)의 시작이었다.
우연히 북망산 초입에 서 있는 초옥을 지나던 사람들은 한 순간 그녀의 백치같은 미모에 사로 잡히고 말았다.
마력적이기까지 한 백수련의 미태(美態)를 발견하는 순간 사내들은 자제력을 완전히 상실해버렸다. 그것은 여인이 원해서가 아니었다.
"헉헉... 우... 우물(尤物). 내 혼을 바치더라도 단 한 번만이라도 너를... 안고 싶다!"
색(色)의 바람은 그렇게 불기 시작했다.
우연히 북망산을 지나던 사내들은 노소를 불문하고 백수련의 용모에 반해 초옥 안으로 빨려들듯 들어갔다. 그 소문은 삽시에 퍼져갔다.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자 언제부터인지 색정(色情)에 눈이 어두워진 많은 사내들이 고의적으로 북망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여인은 사고능력이 전혀 없는 백치임이 틀림없었다.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고 사내들이 이끄는 대로 순순히 따르는 것이 분명 그것을 증명했다.
그러나 백치의 여인이 풍기는 염기(艶氣)는 사내들의 이성을 마비시키고도 남았다. 여인을 올라탄 사내들은 넋을 잃고 육신을 불태웠다.
휘이잉... 휘이이잉.......
세찬 동풍이 몹시 불던 날.
중원에서 인품과 풍모가 뛰어난 것으로 알려진 한 은거인이 초옥을 찾아 북망산을 오르고 있었다. 다름아닌 절검유사(絶劍儒士) 기세광(奇世光)이었다.
검을 꺾고 은거한 지 십육 년만에 모습을 나타낸 그가 북망산의 초옥을 찾는 이유는 간단했다. 수없이 많은 사내를 호리는 파렴치한 여인을 처단하기 위해서였다.
기세광은 강호에 나온 이래 유난히도 색을 미워하기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던 자였다. 아니 색(色) 자체를 죄악시하는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는 살기가 흐르는 검 한 자루를 들고 북망산 초입에 당도했다.
스스스.......
언덕 위.
앙상하게 마른 채 바람에 흔들리는 잡초들 사이로 듬성듬성 떼가 벗겨진 무덤이 드러났다.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언덕을 올라갔다.
얼마동안 돌보지 않은 것일까? 비석조차 사라진, 허물어지기 일보직전인 무덤을 지나는 순간 언덕 아래 초옥이 보였다.
"저곳이로군. 사악한 계집이 살고 있다는 곳이."
기세광은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초옥 앞에 한 백의여인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검을 쥔 기세광의 오른손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그는 초옥을 향해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니, 이럴 수가?"
마침내 여인의 앞에 당도한 순간 기세광은 얼이 빠져버리고 말았다.
인기척도 느끼지 못하는 채로 초점 잃은 눈으로 한 점 허공을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는 여인을 본 순간 그의 분노는 눈 녹듯이 사라지고 말았다.
여인이 완전히 백치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 이것은... 이 여인의 잘못이 아니라... 사내들의 잘못이 빚은 일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 돌아섰어야만 옳았다.
하지만 기세광은 여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여인이 은연중 풍기는 기이한 마력이 그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말았기 때문이다.
갑자기 터지는 활화산(活火山)처럼 색정(色情)이 기세광을 휘몰아쳤다. 여인을 품고 싶다는 뜻하지 않은 욕망은 거짓말처럼 그의 이성과 인품 자체를 한순간에 무너뜨리고 말았다.
"아아... 마... 마물(魔物)!"
기세광은 검을 내던지고 여인을 안고 말았다.
"헉헉... 헉헉......."
쾌락의 신음이 이어지고 또 이어졌다.
④
절검유사 기세광이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된 것은 이튿날 오전이었다. 그것도 초옥에서 불과 오십 장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였다.
그 후부터 무림의 내노라 하는 기인고수들이 북망산의 초옥으로 여인을 찾아갔다.
기세광을 죽인 흉수를 추적할 겸, 또는 여인이 일으키는 색의 유혹에 자신을 시험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호기심 때문에 초옥을 방문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런데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튼날이면 그들 역시 싸늘한 시신으로 변해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그것이 괴사(怪死)의 시작이었다.
자면신검(紫面神劍) 선우현(鮮于玄)을 비롯하여 도를 잘 쓰기로 유명한 옥면천도(玉面天刀) 위천걸(韋天傑), 을목존자(乙木尊子) 도원강(都元江), 천산신필(天山神筆) 여운몽(呂雲夢)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무림인들이 목숨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한 지역을 웅패하거나 중원무림을 질타하는 패웅고수들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여인을 찾았다가 유혹을 떨치지 못하고 정사를 벌였다. 이상하게도 그럴 때마다 날카로운 바람이 몹시 불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그들은 예외없이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죽은 그들의 공통점은 두 가지였다.
모두 초옥에서 오십 장 밖의 거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쓰러졌다는 것이 하나, 그들의 왼편 가슴에 둥근 테 모양의 상처가 관통되어 있다는 점이 둘이었다.
상처에는 바늘같이 얇은 수십 개의 쇠조각이 박혀있기도 했다. 그것이 치명적인 사인(死因)이었다.
한순간에 저승객이 되어버린 그들 중에는 정도인(正道人)도 있었고 사도인(邪道人)도 있었다.
무림은 연속되는 괴사에 마침내 크게 경동하고 말았다. 마침내 정도 사도를 막론하고 숱한 무림고수들이 흉수를 잡기에 혈안이 되어 나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흉수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서도 호기심이 많거나 자신의 무공을 믿는 자들이 초옥으로 찾아가 여인을 범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은 기다렸다.
그러나 그들 중 아무도 사신의 그림자를 볼 수가 없었다. 오로지 그들의 목숨만을 사신에게 내어주고 말았다
비응삼협(飛應三俠).
비응삼협이라 일컫는 관씨(關氏) 삼형제의 연이은 죽음은 중원무림을 완전히 공포와 경악의 도가니 속으로 만들고 말았다.
비응삼협의 첫째가 초옥의 여인과 정사를 맺은 후 죽자 둘째가 다시 여인을 찾았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도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고 죽자 다시 셋째가 여인을 찾아와서는 정사를 맺었다.
그러나 그도 역시 모진 바람 속에서 넋을 저승으로 날려보내야 했다. 사인은 왼편 가슴에 박힌 수십 개의 쇠조각에 의한 것이었다.
그 쇳조각들을 짜맞추어본 결과 날카로운 원형의 형태임이 판명되었다.
마침내 무림은 분노하기 시작했다.
정사(正邪)를 막론하고 무림인들의 의론이 분분해졌다. 초옥의 색녀를 죽여야 한다는 말이 있는가 하면 흉수를 잡기 위해서는 여인을 살려 두어야 한다는 의견도 강력했다.
결국 한 가지 결정을 택한 무림인들은 초옥 주위에 천라지망(天羅之網)을 치고는 사내 한 명을 여인과 관계를 맺게 했다. 그리고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전신의 내공을 격발시키며 흉수를 기다렸다.
그러나 실패의 연속이었다. 희생자는 자꾸 늘어가기만 했다.
마침내 무림인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흉수가 쓰는 둥근 테의 무기에 사풍인(死風刃)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또한 흉수를 사풍객(死風客)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것으로 희생자가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휘이이잉.......
마치 넋이 빠진 것처럼 날마다 누군가가 초옥을 찾아들었고 여인을 범했다. 그리고 이튿날이면 그는 여지없이 싸늘한 시신이 되어 있는 것이었다.
궁가병기점(宮家兵器店).
백천강은 타오르는 용광로의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빨갛다 못해 파랗고, 파랗다 못해 새하얗기까지 한 불꽃을 바라보는 백천강의 눈빛은 잔혹이 도에 지나쳐 오히려 무심해 보였다.
그는 일말의 미동도 없이 타오르는 불꽃을 한동안 노려보고 있었다.
그로부터 한 식경이나 지났을까?
휘르르!
옷깃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와 함께 한 교영(嬌影)이 그의 등 뒤로 떨어져 내렸다. 이를 가는 소리와 함께 날카롭고 저주에 찬 음성이 교영의 입으로부터 터져나왔다.
"으드득! 네... 네 놈이 만든 마검(魔劍)으로 아버님이 회갑날 한 사람을 죽였다. 그것도 내가 가장 아끼는 시녀를... 네 놈은 저주받은 놈이다!"
미녀였다.
일신에 화려한 교의를 입고 손에는 공작선을 든 여인은 바로 월아보(月娥堡)의 여화연(如華娟)이었다. 여화연의 아름다운 눈망울에는 원망과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등을 돌린 채 불 앞에 묵묵히 앉아 있는 백천강을 노려보았다. 한동안 불꽃을 응시하고 있던 백천강이 돌아서면서 말했다.
"후후... 그 검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 사람은 낭자가 아니었소?"
조소가 어려 있는 서늘한 눈매가 여화연의 얼굴에 떨어졌다.
그 눈빛을 받은 순간 여화연은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드는 기분이 되었다. 그러나 곧 여화연은 이빨을 갈면서 대들었다.
"이... 이 저주받은 놈!"
쐐액!
그녀가 왼손에 쥐고 있던 말채찍이 호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팍!
백천강의 단단한 어깨에서 피가 튀면서 선명한 채찍자국이 드러났다. 그러나 백천강은 눈살을 찌푸리지도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다.
그의 입가에 또다시 냉소가 떠올랐다.
"후훗... 나를 죽이러 왔소?"
그의 냉연한 태도에 한순간 여화연은 휘청거렸다.
"어... 어처구니 없는 자!"
그녀의 마음은 두서없이 엉켰다. 미움과 증오 한 켠에 떠오르는 이해못할 감정 때문이었다. 불현듯 여화연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마침내 그녀는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검... 검을 하나 더 만들어다오. 아버님의 부탁이었다. 그 말을 하기 위해 왔다."
말을 마친 여화연이 돌아섰다. 더이상 백천강과 마주보고 있을 자신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무심하면서 찬 그의 눈빛을 대하는 순간 그녀의 마음은 여지없이 뒤흔들리고 말았던 것이다.
돌아선 여화연이 세 걸음쯤 걸었을 때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검을 만들어 월아보로 온다면... 내가 널 죽이겠다. 사람을 죽이는 살검만 만드는 너의 손에는 저주가 들어 있다."
여화연은 앞으로 걸어가며 내심 탄식을 했다.
'아아... 어째서 사내들은 네가 만든 칼만을 찾는 것인지.......'
두두두두.......
잠시 후 문 밖에서 말발굽 소리가 멀어져 갔다.
백천강은 몸을 돌렸다. 그는 거대한 망치를 집어들었다. 용광로에서 벌겋게 달은 쇳덩이를 꺼낸 그는 망치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땅...땅... 땅.......
망치소리가 들리자 토방 안에서 기침소리와 함께 궁우 노인의 음성이 흘러 나왔다.
"쿨룩... 쿨룩. 진짜 좋은 검을 만들어야 한다. 천강아......."
어둠이 잦아들었다. 용광로의 불꽃을 반사시키는 백천강의 얼굴이 점차 기이한 표정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잼 납니다
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