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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2章 꿈과 선망의 墓域
초췌한 모습의 승포노인과 청포소동 중 승포노인은 바로 기무빈에게 비굴한 죽음을 부탁하
던 바로 그 장본인으로 주름진 노안은 붉게 충혈된 채 격정으로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기무빈! 그대는 갔으나…… 그대의 이름은…… 빛나는 영웅혼(英雄魂)으로 후세 모든 사람
의 가슴에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오!"
한 줄기 뜨거운 눈물이 그의 주름진 빰 위로 흘러내렸다.
"의인이여…… 뜻있는 죽음으로 영광(榮光)된 이름을 영원히 남긴 영웅이여…… 부디 고이
잠드소서."
승포노인은 한동안 이는 격정을 억제한 후 곁에 서 있는 청포소동을 바라보았다.
청포소동은 이제 팔구 세쯤이나 되었을까. 미소녀도 수줍어 고개를 숙일 정도로 아름답고
반듯한 이목구비(耳目口鼻)와 백옥(白玉)같이 매끄러운 살결이 천상의 선동이라한들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는 없었다.
세상에 이보다 더 빼어난 용모와 기품을 겸비한 아이는 맹세코 없으리라!
특히 유난히 검으면서 샛별처럼 반짝이는 눈은 한 번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잊을 수 없는
무한한 혜지(慧智)와 총기로 가득차 있는 것이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운 소동이었다.
"……!"
승포노인은 심중의 격동을 억누르며 담담히 입을 열었다.
"영웅 기무빈! 저분이 바로 도련님의 부친이십니다."
"응…… 나도 알아!"
소동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꿋꿋한 음성을 발했다.
도저히 부친이 처형되는 모습을 목격한 아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강인한 기질이 소동의 말에
서 절로 풍겨나왔다.
한데 승포노인이 소동을 도련님이라고 부르다니! 그렇다면 그들은 주종지간(主從之間)이란
말인가?
승포노인은 적노(赤老)라 불리우며 소동이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보호해 온 인물이었으
나 그 누구도 그의 진정한 신분은 몰랐다.
단지 소동도 승포노인의 이름이 적노라는 사실만 알 뿐이었다.
그리고 청포소동은 위대한 인간 무적철혈신 기무빈의 아들 기검하였다.
적노는 문득 품 속에서 한 장의 서찰을 꺼내 기검하에게 내밀었다.
"도련님, 이 서찰은 부친께서 돌아가시기 직전 도련님께 남긴 것입니다."
기검하는 묵묵히 서찰을 받아 보았다.
<아들아! 내게 후대가 있어 이런 글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구나.
또한 이 아비는 능력의 한계를 느끼며 이렇게 죽을 수밖에 없는 내 자신이 그렇게 한스러울
수가 없다.>
기검하는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부릅뜨며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아버지는 자랑해도 돼! 자신이 일생동안 쌓아온 명예(名譽)와 자존심(自尊心)을
서슴없이 버릴 수 있는 진정한 영웅은 흔치 않을꺼야……!"
또랑또랑한 목소리 속에는 부친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끈끈하게 스며 있었다.
서찰에는 아들 기검하에 대한 진한 부정과 자애스러움, 그리고 뜻을 이루지 못한 영웅의 안
타까움과 당부의 말로 점철되어 있었다.
<아들아! 강하다는 것은 곧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다는 것. 너는 강해져야 한다.
나는 네가 백련대황교라는 만악의 절대제국을 이 지상에서 사라지게 할 수 있는 최강자가
되었으면 한다.>
"치이, 물론이야. 나는 아버지처럼 아들에게 패자(敗者)의 넋두리나 들려주는 영웅은 되지
않을거야!"
기검하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의 눈에서는 차가운 한광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고 있었
다.
"그리고 약속할 수 있어. 앞으로 십 년 후…… 백련대황교란 단어는 이 지상에서 영원히 사
라지게 될거야! 바로 나의 손에 의해서……."
선언!
무서운 선언이 기검하의 입에서 뱉아져 나왔다.
그는 알고나 있는 것일까?
백련대황교! 이 보이지 않는 검은 제국의 가공할 힘을.
"……."
적노는 씁쓸한 고소를 베어 물었다.
"도련님! 백련대황교가 얼마나 무서운 집단인지 아십니까……?"
기검하는 고개를 흔들었다.
"몰라…… 한데 할아범은 알아?"
"알다 뿐이겠습니까……?"
적노는 어두운 시선을 허공으로 던지며 말을 이었다.
"백련대황교는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무적(無敵)의 제국입니다. 그리고, 천기
(天機)를 보건대…… 백련대황교는 결코 앞으로 백년(百年) 안에는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
다."
기검하는 고개를 갸웃했다.
"할아범! 그렇다면…… 앞으로 백 년 동안 백련대황교가 천하를 지배하는 것이 하늘(天)의
뜻이란 말이야?"
적노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미약한 힘으로서는 결코…… 하늘의 뜻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 순간 기검하는 힘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나는 하고 말거야……! 무엇이든 내 뜻을…… 내 삶을 다스리려고 하는 것은 결코
용서치 않을꺼야……! 설사 하늘(天)일지라도……."
그는 고사리같은 두 손을 움켜쥐며 하늘을 노려보고 있었다.
"하늘이 내 운명을 결정할 수는 없어…… 내 운명은 내가 결정할꺼야!"
---내 운명(運命)은 내가 결정한다!
이것이 과연 팔구 세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할 수 있는 말이란 말인가?
"……."
적노의 눈이 커졌다. 그는 누구도 꺾을 수 없는 고집이 서린 기검하의 눈을 보며 어떤 두려
움을 불현듯 느끼고 있었다.
(아무리 난세(亂世)가 영웅보다 효웅(梟雄)을 불러 일으키는 법이라지만…… 도련님은 너무
강한 기질을 갖고 있어…… 하나, 모사(謨事)는 재인(在人)…… 성취는 하늘(天)이라……!이
미 모든 것을 도련님께 건 이상 도리가 없겠지…….)
적노가 내심 곤혹감을 금치 못하고 있을 때 기검하는 서찰을 보고 있었다.
<아들아! 진정한 강자(强者)는 무엇이든 포용(包容)할 수 있는 커다란 그릇이어야 한다.
무엇이든 배워라! 안다는 것은 바로 힘(力)이다!
사소한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강한 사람이 되길 빌며……
이 애비의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길 바란다.
사랑하는 아들에게 기무빈 서.>
"……!"
기검하의 눈가에는 이슬같은 눈물이 반짝 맺혀 있었다. 그런 모습을 적노에게 보여주기 싫
다는 듯 하늘을 노려보았다.
(영웅은 피(血)를 흘릴 뿐…… 눈물은 흘리지 않는다고 했어…… 한데, 왜…… 왜……? 이렇
게 눈물이 나오려고 하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울지 않았는데…… 칫!)
그는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등을 돌렸다.
"할아범! 그만 가……."
"네! 도련님."
기검하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자 적노는 뒤를 따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도련님! 부친의 시신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물론 내가 거둘꺼야……."
"복수는 하시렵니까?"
"응! 하지만…… 복수는 내 야망을 이룩하는 동안 거치는 한 단계 과정일 뿐이야……."
그의 말은 정말로 팔구 세의 어린 소동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엄청난 말 뿐이었다.
"한데…… 할아범! 수천 년 역사를 통틀어 백련대황교와 비슷한 힘을 가진 집단은 없어?"
"없습니다. 비교가 되질 않습니다."
적노는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는 듯이 주저하지 않았다.
"……."
"마도사상 가장 강했다는 마교(魔敎)나 구마루(九魔樓)…… 사도(邪道)의 천사갱(千邪坑), 사
사혈림(邪邪血林), 배교(拜敎)…… 정도(正道)의 제황성(帝皇城), 군림풍운단(君臨風雲團), 대
소림사(大少林寺)…… 전진일맥(全眞一脈) 등…… 그들 전체가 다시 최강성기의 힘을 가지
고 나타난다 해도 백련대황교와는 상대조차 될 수 없습니다."
실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말이 아닌가?
적노가 열거한 문파가 어떠한 집단들인가!
한 문파의 힘만으로도 능히 천하를 좌지우지 하였던 가공할 집단이 아니던가?
그러한 문파들이 하나로 힘을 합쳐도 백련대황교의 상대가 안된다니 진정 믿을 수 없는 일
이었다.
"……!"
무림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는 기검하는 묵묵히 적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백련대황교! 그들은 이제까지 존재한 모든 세력(勢力)의 무학(武學)을 모조리 파해(破解)했
기 때문입니다."
기검하는 별빛처럼 영롱한 눈을 반짝 빛냈다.
"그럼…… 내가 어떠한 무학을 익혀도 그들의 상대가 될 수 없겠네?"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대체 어떤 무학을 익혔길래 그 무서운 백련대황교를 혈혈단신(孑孑單
身)으로 상대했지……?"
기검하가 짙은 의혹이 담겨 묻자 적노는 신비스럽게 웃었다.
"도련님의 부친께서 익히신 무학은…… 여태껏 무림에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어둠의 세력…… 암흑등혈옥(暗黑騰血獄)의 무학입니다."
"암흑등혈옥? 그건 어떤 집단이야……?"
"암흑등혈옥이란 팔백 년(八百年) 전에 존재했던…… 지하 수백 장의 금광(金鑛)과 유황광
(硫黃鑛)의 이름입니다."
"그럼, 금과 유황을 캐는 곳이란 말이야?"
적노는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곳에는 수많은 죄수(罪囚)들이 평생 유황과 금을 캐다 죽어가던 지하뇌옥(地
下牢獄)이었습니다."
"……."
---암흑등혈옥!
이 세상에서 가장 신비한 한 집단의 음악(陰惡)한 유래와 무적철혈신 기무빈의 내력이 밝혀
지는 순간이었다.
"한데…… 언제였는지 모르지만 그 지하감옥…… 암흑등혈옥의 지상(地上) 입구가 천재지변
(天災地變)으로 막히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곳에 갇힌 사람의 수효는 무려 만 명이 넘습니
다."
"만 명이나?"
"그렇습니다. 그 후…… 암흑등혈옥은 이 지상(地上)과는 완전히 격리된 또 하나의 지하세계
(地下世界)가 형성이 된 것입니다. 사실…… 그곳에 갇힌 죄수들은 대부분이 무림(武林)의
절정고수입니다. 하나, 하나같이 피(血)를 좋아한 인물들이죠. 잔인(殘忍), 비정(非情), 그리고
극악(極惡)함에 있어서는 세상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극사(極邪)한 마인(魔人)들이었습니
다."
"……."
기검하의 눈에 언뜻 기이한 광채가 스쳤으나 너무도 찰나지간이라 적노는 보지 못했다.
그는 나지막한 헛기침을 토하더니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들은 저마다 지하세계의 일인자(一人者)가 되기위해 처절한 암투(暗鬪)와 살륙(殺戮)을
끊임없이 벌였습니다."
"……."
"때문에, 암흑등혈옥은 일순간에 오직 강자만이 모든 법(法)으로 통하는 무법천지(無法天地)
가 되었으며…… 외부와 밀폐된 지 팔백 년…… 그 기나긴 세월이 암흑등혈옥의 인물들에게
남겨준 것은 승부(勝負) 이전에 오직 상대를 죽이는 잔인무도한 살인무학(殺人武學) 뿐입니
다."
"……."
"그 살인무학의 위력은 현세(現世)…… 그 어떤 방파의 무학도 비교될 수 없는 극랄하고 악
독한 무공들이죠."
적노의 말을 듣고 있던 기검하의 얼굴로 문득 의혹의 빛이 일렁였다.
"할아범은 어떻게 그런 사실을 자세히 알고있지?"
"부친께서 남기신 비록에 그 내용이 담겨 있으니 훗날 도련님께서 그것을 보시면 암흑등혈
옥에 대해 더욱 자세히 알게될 것입니다."
암흑등혈옥!
일명(一名) 암흑무림(暗黑武林)으로 불리며 무학의 승부 이전에 오직 죽느냐, 사느냐만을 결
판내는 살인무학의 집단이다.
이 세상과 완전히 격리된 무법천지(無法天地)의 지하세계(地下世界)로 현존(現存)하는 모든
무학과 완전히 틀린 또 하나의 류파(流派) 살인미학(殺人美學)을 추구하는 암흑등혈옥의 인
물들.
그 가공하고도 엄청난 힘이 이 세상에 나타나는 날 천하는 공포에 젖고 말리라!
"……!"
기검하는 적노를 향해 호기심이 가득한 눈망울을 굴리고 있었다.
"할아범! 암흑등혈옥과 같이 천하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으면서 무서운 힘을 지닌 집단이 또
없어?"
적노는 한동안 골똘히 생각하더니 이내 차분하게 대꾸했다.
"있습니다! 그들은 단 한 번도 천하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 힘들은 막강한 집
단입니다!"
"어떤 집단인데……?"
기검하는 적노의 말에 눈을 빛내며 대답을 재촉했다.
"우선…… 첫 번째로 들 수 있는 세력은 융천밀환세(隆天密幻勢)입니다."
존재하나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그 신비가 적노의 입을 통해 하나씩 밝혀지고
있는 순간이었다.
"융천밀환세! 그들은 구름처럼 천하를 떠돌거나…… 속세의 일에는 관여치 않는 인간괴물
(人間怪物)들의 집단을 말합니다."
"인간괴물집단……? 그럼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 괴물이란 말이야?"
적노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기검하는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요. 이 늙은이도 잘은 모릅니다. 단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융천밀환세의 인물들은
인간이라 여기기에는 너무도 엄청난 힘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기검하의 입가에 싱그런 미소가 떠올랐다.
"으응! 그러니까…… 사람들이 상상할 수도 없는 재주를 지니고 있어 인간괴물이라 말한다
는거지."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허공을 날아다니거나…… 두더지처럼 땅 속을 자유자재로 뚫고 다
니는 등……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는 인간같지도 않은 인간들입니다."
"하아! 정말 인간괴물이라 할 수 있겠는데……."
기검하는 감탄하며 적노에게 또 다른 궁금한 점을 물어보았다.
"한데…… 그들은 그 좋은 재주를 가지고도 왜 세상에 나오지 않는거지?"
적노는 기검하가 그런 질문을 하리라 짐작했다는 듯 주저없이 대답했다.
"그들의 주인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수천 년 동안 주인을
찾아 세상을 떠돌고 있는 것입니다."
"……!"
그제서야 기검하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괴물집단--- 융천밀환세!
초능력을 지닌 인간괴물들의 집합체이나 신비의 장막에 가려진 어마어마한 능력을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또 없어?"
기검하가 눈을 반짝이며 적노를 바라보았다.
"일명, 상문(喪門)으로 통하는 구유조상혈(九幽弔喪穴)이 있습니다."
"구유조상혈!"
"예! 그들은 바로 죽은 사람의 장례(葬禮)를 치뤄주는 장의사(葬儀社)들로 이루어진 집단입
니다."
---구유조상혈!
사람이 죽은 후 시신을 염(殮)하고 분장(扮裝)과 묘를 이장(移葬)하는…… 한 마디로 모든
시신을 관장하는 인물들의 집단이다.
이 땅에 역사가 존재하면서부터 있어온 장의사들이나 그 누구도 모른다.
이들의 숨겨진 잠재력이 그 얼마나 가공한지를 말이다.
---인간이 살아있을 때에는 황금과 권세, 무력 등이 인간을 지배한다 하나 인간이 죽으면
그 어떤 것도 지배할 수 없다.
단지 구유조상혈만이 인간의 사후(死後)를 지배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이 죽고난 후의 모든 것을 관장하며 지배한다는 집단, 구유조상혈!
일명 사후무림(死後武林)이라 일컬어지는 구유조상혈의 힘은 결코 어떠한 힘도 당해낼 수
없다고 전해졌다.
암흑무림 암흑등혈옥!
사후무림 구유조상혈!
인간괴물집단 융천밀환세!
이들 세 집단의 힘이 얼마나 막강하길래 보이지 않는 지배자 백련대황교와 비교할 수 있단
말인가?
"……."
기검하의 눈에 언뜻 열망의 광채가 피어올랐다.
(암흑등혈옥! 융천밀환세! 구유조상혈! 좋다. 내 힘으로 그것들의 신비를 풀고 말겠다!)
그는 야무지게 입술을 깨물며 자신에게 약속했다.
결정(決定)!
이것이 시작이었다. 이것으로 기검하의 미래 설계는 세워졌고, 풍운의 태동(胎動)이 잉태되
었던 것이다.
위대하면서도 외로운 거인의 후광과도 같은 황혼은 멀어져가는 두 사람의 어깨 위로 소리없
이 내려앉고 있었다.
* * *
북망산(北邙山).
중원제일의 고도 낙양성(洛陽城)에서 북쪽으로 십 리 가량 떨어진 근교에 위치한 산으로 중
원인치고 이곳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리라!
공동묘지(共同墓地)!
일명, 북망귀부(北邙鬼府)라 불리는 이곳은 옛부터 중원최대의 공동묘지로 유명한 산이다.
또한 북망산은 산세의 수려함이나 서기로움으로도 단연 중원의 으뜸으로 꼽히는 산이나 중
원인이라면 이 산에 묻히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황친거족이나 왕후장상, 그리고 일세에 영명을 드날린 대영웅들만이 묻힐 수 있다는 꿈과
선망의 묘역인 북망산을 수천 년 전부터 지켜온 터줏대감들이 있었다.
유상촌(幽喪村)!
북망산중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촌락 이름이다.
이곳 주민들의 유일한 사명과 소일거리는 오직 한 가지 뿐으로, 북망산에 묻힌 왕후장상이
나 대영웅들의 묘역을 지키고 관장하는 일이다.
한 마디로 유상촌은 묘지기들과 장례 일체를 도맡아 하는 장의사들이 모여사는 촌락이었다.
유상촌의 주민들은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오직 시신을 처리하는 장례일과 묘지기 일만 천
직(天職)으로 생각하고 살아간다.
그것은 이미 수천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유상촌 불변(不變)의 관습(慣習)이다.
천민인 이들에게도 한 가지 불가침(不可侵)의 괴이한 특권(特權)이 있었다.
---북망산에 묻히는 사람은 우리가 직접 결정을 내린다!
제 아무리 돈이 많은 거부도, 천하를 떡 주무르듯 막강한 권세의 고관대신일지라도 이들이
거절하면 북망산에 묻히기를 포기해야 한다.
그것은 당금의 황제도 어쩔 수 없는 유상촌의 절대적인 특권이기 때문이다.
* * *
새벽 안개를 물들이며 하늘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여명(黎明)은 늦가을의 단풍(丹楓)에 물들어 빨갛게 만산홍엽을 이룬 북망산을 아름답게 채
색(彩色)하고 있는 광경은 일대장관(一大壯觀)이었다.
따가닥! 따가닥!
북망산의 시리도록 상큼하고 신선한 새벽공기를 헤치며 한 대의 사두마차가 산의 능선을 타
고 쭉 뻗은 소롯길로 나타났다.
마차 안에는 검은 목관(黑木棺)이 실려 있었고, 마부석에는 한 노인과 청포소동이 앉아 있었
다.
백설같이 희디흰 순백색의 털모자를 눌러쓰고, 은빛여우(銀狐) 가죽으로 만든 털조끼를 입은
소동은 실로 깨물어 주고 싶도록 앙증맞고 아름다왔다.
소동은 바로 기검하이며 노인은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적노였다.
"……!"
신비하도록 아름다운 북망산의 새벽을 쳐다보며 기검하의 시선이 문득 적노에게 옮겨졌다.
"할아범! 이 북망산에 묻히려면 유상촌의 계율에 따라야 한다는데…… 그 계율이 뭐야?"
적노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나직하게 대답했다.
"천하를 구한 대영웅이나…… 청렴결백(淸廉潔白)하고 대쪽같은 성품과 의연한 기개를 지닌
선비와 관리…… 그리고, 그 치덕이 왕후장상에 못지않은 자랑스러운 중원인만이 북망산에
묻힐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검하의 눈에 반짝 이채가 어렸다.
"자랑스러운 중원인……? 그럼 아버님같은 영웅은…… 북망산에 묻힐 자격이 충분히 있어.
그렇지 할아범?"
적노는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입니다."
그때 두 사람의 시야 속으로 한적한 촌락의 모습이 들어왔다.
자그마한 모옥(茅屋) 수백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그림같은 마을로 그 모습은 마치 한 폭
의 산수화(山水畵)와 같아 아늑하고 평화롭게만 보였다.
속세의 더러움 따위는 추호도 찾아볼 수 없는 이 마을이 바로 유상촌이다.
유상촌은 생기에 차있었다.
이른 새벽부터 부산히 움직이고 있는 마을 사람들은 하나같이 검소하고 질박한 삼베 옷차림
이었으나 생의 활기로 넘쳐흘렀다.
한동안 촌민들을 뜯어보던 기검하는 다소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할아범! 이 유상촌 주민들은 결코 평범한 인물들이 아닌 것 같애."
적노는 빙그레 웃었다.
"그렇습니다. 이 유상촌의 사람들은 남녀노소 모두가 강한 힘을 지니고 있습다. 하다못해 나
약하게만 보이는 아녀자와 아이들까지도 강호의 일류고수들에 못지 않는 엄청난 힘을 지니
고 있습니다."
"화아…… 할아범은 어떻게 그걸 알았어?"
기검하는 놀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전에…… 이 늙은이가 곤경에 처했을 때…… 그들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지요. 그때
알았습니다."
"아……."
기검하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때 마차의 곁을 지나가는 유상촌의 사람들은 친근한
눈빛을 그들에게 보냈다.
낯선 외지인을 경계하는 기색이나 불쾌한 표정은 일체 눈에 띄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찾아
온 손님을 따뜻하게 반기는 순수한 정감만이 가득 담겨있는 정겨운 표정이었다.
"……!"
기검하가 그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해맑은 미소로 답례하는 것은 그의 순수한 감정을 보
여주는 한 가지 예일 것이다.
"할아범! 유상촌 사람들이 그토록 강한 힘을 가지게 된 원인은 뭐지?"
기검하는 문득 궁금하다는 듯한 시선으로 적노를 쳐다보았다.
"그것은 도굴(盜掘)을 막기 위해서 힘을 길렀기 때문입니다."
"도굴이라니?"
기검하의 의아한 표정에 적노는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이곳 북망산의 왕릉(王陵)과 고분(古墳)에는 많은 보물이 숨겨져 있습니다. 하여 수많은 무
림고수들이 눈에 불을 켜고 무덤을 파헤쳐 그 엄청난 보물들을 도굴하려고 했지요."
"……!"
"유상촌 사람들은 그들을 막기 위해서 힘을 기르지 않을 수 없었고…… 또한 그들을 막다보
니 더더욱 강하게 변한 것입니다. 유상촌이 존재한 지 어언 이천 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까지 그 누구도 보잘 것 없는 무덤 하나 도굴할 수 없었으며…… 그 어떤 세력도 유상
촌을 범접하지 못한 이유는…… 그만큼 그들의 힘이 막강했기 때문입니다."
기검하의 눈에 반짝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유상촌! 이곳은 결코…… 한낱 묘나 지키는 평범한 마을이 아냐…….)
그가 내심 중얼거리는 동안 마차는 어느 덧 마을의 중심부에 위치한 어느 거대한 모옥 앞에
서 멈춰섰다.
드르륵!
모옥의 문이 열리며 진작부터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한 명의 청수한 중년문사가 허둥지둥
뛰어나와 반갑게 두 사람을 맞이했다.
"대사! 어서 오십시오. 아버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허허…… 오래간만이외다. 촌장님께서는 별례무양하신지……?"
중년문사는 황공스러운 표정으로 공손히 허리를 숙여 답례했다.
"예! 대사께서 염려해 주신 덕택으로 여전히 정정하십니다."
적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기검하를 바라보았다.
"도련님! 안으로 드시지요."
"응! 할아범!"
두 사람은 마차에서 내려 천천히 모옥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의 대화를 옆에서 듣던 중년문사의 눈이 경악으로 치떠졌다.
(이…… 이럴 수가? 저 청포소동의 신분이 대체 무엇이길래…… 고검만리향(孤劍萬里香) 적
대협이 스스로 종복(從僕)을 자처한단 말인가?)
그는 좀전의 사실을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 아연한 표정으로 두 사람의 뒷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중년문사는 왜 이토록 크게 놀라는 것일까?
혹시 중년문사가 알고있는 적노의 또 다른 신분인 고검만리향이란 인물이 그토록 엄청난 신
분이란 말인가?
적노의 진정한 정체는 훗날 자세히 밝혀지게 되리라!
모옥 안에는 허름한 삼베옷을 걸친 한 노인이 긴장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새하얀 눈썹이 귀밑까지 길게 늘어져 있고, 네모로 각이 진 얼굴에서 풍기는 냉철함과 강인
해 보이는 모습 때문에 결코 평범해 보이지 않는 독특한 기품의 노인이었다.
"……!"
그는 기검하가 들어서는 순간 그대로 얼어붙었다.
(구만 리 창천(蒼天)을 웅비할 제황 중의 제황…… 전륜제황지재(轉輪帝皇之才)…….)
백미노인의 전신은 들끓는 격동과 터질 듯한 희열로 가늘게 떨렸다.
(트…… 틀림없다. 틀림없어…… 조사께서 예언하신 구청룡제황지재(九靑龍帝皇之才)가 분명
해…….)
그는 격동 때문에 숨까지 막히는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구청룡제황지재!
그것이 과연 무엇이길래 백미노인이 이토록 놀라고 있는 것일까?
백미노인은 문득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듯 헛기침을 하며 자신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소공자! 노부는 유상촌 제사십구대 촌장 백미조상수(白眉弔喪搜) 서문기(西門基)라고 하네."
친근감에 배여있는 부드러운 어조였다.
"나는 기검하야……."
기검하는 자연스럽게 하대했다.
기실 기검하는 태어날 때부터 적노라 불리우는 승포노인에 의해 키워졌고, 적노는 기검하가
갓난아이 때부터 보통아이와는 달리 강하게 키웠다.
---도련님은 장차 천하에서 가장 존귀한 귀인이 되실 몸입니다. 절대로 어느 누구에게도 허
리를 굽혀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되도록 누구를 막론하고 하대를 하십시오. 하나 결코 오만해서는 아니됩니다.
어린 기검하의 하대에도 불구하고 백미조상수 서문기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떠올라 있
었다.
"후후후…… 알고 있다네. 뿐만 아니라…… 소공자의 선친 무적철혈신 기무빈을 이곳 북망
산에 묻기 위해 온 것까지도 알고 있지."
기검하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아니…… 어떻게 그걸 알지?"
서문기는 흐릿한 미소를 베어 물었다.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반드시 죽어야 하고…… 죽은 사람들은 위해 장례를 치뤄야만
한다네."
"……."
"우리 유상촌은 천하 모든 장의사들의 하늘…… 죽은 사람에 대한 그 어떤 것도 우리 유상
촌의 이목에서 벗어날 수 없네."
"그랬었구나!"
기검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이내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서문기를 쳐다보았다.
"한데…… 촌장 할아버지는 어떻게 나를 미리 알고 있었지?"
서문기의 표정이 숙연하게 변했다.
"이 늙은이는 소공자가 태어날 때부터 소공자를 주시하고 있었다네. 그리고 이렇게 소공자
가 찾아오길 눈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다네."
"나를……?"
"그렇다네. 소공자를 기다린 것은 비단 나 혼자만이 아니라…… 유상촌을 포함한 천하의 모
든 장의사가 무려 이천 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소공자를 기다렸네."
기검하의 눈이 경악으로 치떠졌다.
"장의사 전체가…… 이, 이천 년 동안이나 나를……!"
서문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숙연한 표정을 지었다.
"올해가 꼭 이천 년이 되는 해지. 정말 길고도 지루한 기다림의 세월이었네. 하나 이제는 삼
산오악 사해구주팔황, 천하의 모든 정기를 받고 태어난…… 구청룡제황지재인 소공자가 나
타난 이상 기다림의 제약(制約)은 풀린 것이나 다름없네."
"구청룡제황지재…… 기다림의 제약……?"
기검하의 얼굴에 그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에 의혹이 떠올랐다.
서문기는 입가에 모호한 미소를 지으며 적당히 얼버무렸다.
"소공자의 궁금한 점은 시간이 해결할 것이니…… 길게 생각할 필요는 없네."
기검하는 의혹을 털어 버릴 수 없었으나, 또 다른 질문을 퍼부었다.
"좋아! 그럼…… 아버님의 장례는 어떻게 할꺼야?"
"그것도 우리가 알아서 처리할 것이니 염려하지 말게."
"……."
기검하는 내심 커다란 의혹이 생겼다.
(이 서문기라는 노인은 무엇 때문에 나에게 이토록 잘 대해주는 것일까?)
그가 도저히 풀 수 없는 의문에 잠겨있을 때 서문기의 부드러운 음성이 상념을 깨뜨렸다.
"하지만…… 장례를 치르기 전에 소공자가 만나야할 분들이 계시다네!"
"누군데……?"
서문기는 신비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것은 소공자가 만나보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이고…… 단지 내가 약속할 수 있는 것은 그
일이 소공자에게 득(得)이 되면 됐지…… 해(害)가 되지 않으리라는 점이지."
기검하의 맑은 눈에 망설이는 듯한 기색이 떠올랐고 한동안 생각하다 옆에 있는 적노를 쳐
다보았다.
그의 눈이 어떻게 해야 좋으냐고 묻자 적노는 생각해볼 필요도 없다는 듯 서슴없이 말했다.
"도련님! 촌장의 말대로 그분들을 만나보시지요!"
"좋아!"
기검하가 기분좋게 허락한다는 듯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자 서문기와 적노의 두 눈에 뜻모를
희열의 빛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두 사람 사이에는 기검하가 모르는 무슨 묵약이라도 되어있단 말인가?
잠시 후 서문기와 기검하는 함께 모옥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 뒤를 따르는 적노는 기검하의 뒷모습을 충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도련님! 제가 어째서 이곳으로 모시고 왔는가를 이제 곧 알게 될 것입니다. 사실…… 제가
도련님과 이곳 유상촌에 온 것은 부친이신 기무빈의 장례보다도…… 도련님께 이 세상에서
가장 가공할 힘을 드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공할 힘을 얻는 일이 적노가 기검하를 유상촌에 데리고온 진정한 이유
였던가?
지금 이 순간 기검하는 꿈에도 모르리라!
앞으로 자신에게 쏟아질 연속적인 숙명(宿命)의 기연과, 그것이 바로 하늘과 땅이 창조(創
造)된 이래 가장 큰 대풍운(大風雲)의 서막(序幕)임을 말이다.
첫댓글 잼 납니다
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