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쯤 닫아둔 창 틈으로 바람에 밀린 빗방울이 파편처럼 날렸다. 선뜻하게 꽂히는 빗방울을 막으려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점점 흐려져 가는 꿈속으로 다시 빠져들려 했지만 한 번 깨기 시작한 잠은 돌아선 여자의 목덜미처럼 냉정했다. 지난 새벽 언제부터 시작했는지 모를 비에 침낭 한쪽이 서늘하게 젖어 있었다. 잠들어 있는 동안 내리기 시작한 빗소리에 어느새 귀가 먼저 적응해 있었는지 서서히 제 정신이 돌아오는 동안 계속된 이유모를 적막이 내 지금 누운 곳이 어딘가 싶도록 어색했다. 분명 세상에 부딪쳐 깨지는 빗방울 소리가 평소 아침거리의 잡음보다 훨씬 시끄러웠음에도 귀를 기울여야 빗소리가 들렸다.
누워있던 야전 침대에서 일어나 창을 활짝 열었다. 빗물이 본격적으로 튀어 들어올 테지만 이 침대에 다시 누울 일은 없다. 열린 창을 통해 바라본 세상은 사선을 그으며 떨어지는 빗방울의 항적으로 가득했다. 현란하던 간밤의 네온이 꺼진 아침의 거리에는 우산이 몇 개 오고 갈 뿐 여느 때의 분주함은 찾을 수 없었다. 얼마 동안인지 모르게 하릴없이 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정신이 들었을 때도 변함없이 비가 내리고 있었다. 융통성 없는 공무원처럼 지친 기색도 없이,태초부터 그랬다는 듯 비가 내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검은 구름이 낮게 깔린 하늘이 조금은 밝아진 것 같기도 했다. 어디론가 한없이 걸어가고 싶은 하늘빛이었다. 우산을 들고 옥상을 걸어 나가 구름을 딛고 끝없이 걷고 싶은 우울한 잿빛. 모든 감정을 배제시키는 색이었다.
문을 열고 걸어 나갔다. 우산은 없었다. 어깨밖에 가리지 못하는 우산 같은 현실도피가 싫어 시작한 지금이 아닌가. 철저하게 세상으로부터 잠수하기 위해 찾아낸 공간. 황량한 콘크리트의 공간에 냉각탑과 창고 건물과 내가 있었다. 난간너머 허공으로 팔을 뻗어 깨지기 위해 낙하하는 빗방울을 몇 개 건졌다. 허리 높이의 난간 밑으로 흐릿하게 쳐진 건물들 사이로 우산 몇 개가 아득하게 걸어가고 있었고 편의점과,테이크 아웃 커피가게,주유소,개척 교회의 간판에 징검다리처럼 불이 들어와 있었다.
‘비오는 거리를 걸어 본 적이 언제였지?’
작년 이맘때쯤이었겠지. 작년 여름 이곳에 올라 온 후 한번도 밑으로 내려가지 않았으니. 차츰 뜸해지는 명이의 편지만 손에서 손으로 내게 건네졌을 뿐.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고 나 또한 아무도 부르지 않았다.
결국 그랬다. 도망가고 싶었고 부숴 버리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토록 증오하던 도시의 한복판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숨어 있었을 뿐이었다.
이곳은 외딴 섬. 하늘 가운데 떠있는 낙도의 유일한 원주민인 나. 도시에서는 아무도 하늘을 바라보지 않는다. 마주 선 사람의 머리를 넘긴 시선은 예상치 못한 적을 만들 뿐. 뜻밖의 장소에서,뜻밖의 상대에게,뜻밖의 일격을 당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모두 시선을 겸손하게 끌어 내린다. 그러다가 하늘을 보고 싶으면,때때로 멀리 보고 싶으면,산에 오르거나 빌딩의 스카이 라운지에 간다. 그리고 내려다 볼 뿐,도시에 하늘은 없다. 여기는 섬. 아무도 원하지 않기 때문에 나룻배조차 없다. 아무에게도 원해지지 않는 사람만이 오직 헤엄쳐 건너오는 섬. 이 섬과 세상을 이어주는 비가 오고 있다. 하늘에 닿을 듯 오르던 인간의 먼지를 깨끗이 씻어내는 비. 비가 그치면 하늘이 맑아질까. 이맘때의 장마였는데.
스틱을 팽개친 드러머가 연습실 문을 박차고 나갔다. 반동으로 거칠게 문이 닫혔고 힘차게 벽에 부딪친 스틱은 시멘트 바닥에 떨어져 허우적거렸다. 뒤에 남은 우리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돌려 잠시 우리를 바라보던 그도 고개를 푹 숙이고 연습실을 걸어 나갔다. 우리는 아무 말도 못하고 악기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음악밖에 모르던 그가 여자를 봤다고 했다. 음악이 좋아서 집도 뛰어 나왔다던 그가 다른 무엇보다 그녀를 먼저 잡겠다고 결심했을 만큼 순간에 깊숙이 빠져들었다. 만류도 분노도 그에겐 들리지 않았다. 그는 매일처럼 같은 플랫폼에서 지하철에서 단 한 번 마주쳤던 여자를 기다렸다.
리드 보컬이 빠진 상태로 연습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며칠 지나면 제풀에 포기하고 돌아오겠거니 했던 우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정도를 더해 가는 그의 기다림을 그저 지켜볼 따름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마른 체구였던 그는 새벽부터 밤까지 계속되는 기다림과 더위에 더욱 앙상해졌다. 그녀를 놓칠까봐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그가 안타까워 우리는 막차가 지나간 뒤 근처의 식당에 데려가 밥을 사 먹이곤 했다.
더위는 점점 지독해졌고 그는 나날이 추레해져 갔다. 어디를 가도 떼어놓지 않았던 그의 시디 플레이어가 연습실 구석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우리 모두는 맹렬한 더위에 지쳐 가고 있었다. 가끔씩 명이가 나를 보러 연습실에 들렀다가 늘어져 있는 우리에게 딱한 눈길을 보내며 연습실을 청소하곤 했다. 불어터진 자장면 면발처럼 얽힌 케이블까지 단정하게 묶은 다음에는 저 없는 사정이 빤한 데도 고기와 야채를 사와 신문지를 깔고 우리를 불렀다. 계면쩍게 다가앉았지만 처음의 한잔이 그랬을 뿐 잠시 후 얼큰한 낮술 기운이 오르자 우리는 더위도,초가을에 시작될 오디션도,돌아오지 않는 보컬도 잊을 수 있었다.
돌아갈 때면 명이는 내게 무엇인가 말할 듯 입술을 오물거렸다. 모르는 척 지하철역까지 바래다주는 십분 동안 몇 번이나 걸음을 멈추고 내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종종거리며 다시 걸음을 맞추곤 했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검표기를 지나 사라졌다. 돌아와 보면 친구들이 주머니를 뒤져 막소주와 과자 조각을 사다 놓고 담배 연기로 연습실을 메우고 있었다. 나야 애초 얼마 마시지 않은 탓도 있지만 몇 잔 분의 취기는 그나마 오고 가는 걸음으로 사그라져 있었기에 값싼 알코올에 흐무러지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서 차 오르는 상실감을 가눌 수 없었다. 손짓하며 부르는 친구들을 외면한 채 한쪽 구석에 누워 팔베개를 하고 얼룩진 천장만 바라보았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우리는 다시 일어나야 한단 말이다!’
‘미쳐야 된단 말이다!’
우리에게 무엇이 남아 있는가. 세상에 대해 주눅들지 않고 소리칠 수 있는 것은 음악 속에서일 뿐. 낡은 앰프에서 울리는 소리에 마르지 않은 영혼을 담으려 뒤돌아보지 않고 여기 모였다. 언젠가는 우리만의 음악으로 당당하게 세상을 향해 호소하고 구애하고 꾸짖고 용서하는 손을 내밀 수 있다는 희망. 그 희망을 위해 가지고 있던 다른 것을 버리고 사람 말리는 이 도시의 구석에서 하루를 견뎌 낼 수 있었다. 애초 버릴 것도 많지 않았지만 그나마 가지고 있던 것들을 버리기는 가난했기에 더 힘든 노릇이었다. 얌전히 머리 숙이고 공부해서 고등학교를 지나 대학을 건너 하다 못해 9급 공무원에라도 안착하는 것이 우리 가난한 부모님들의 꿈이었다. 그 소박한 청사진의 가치를 무시했던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는 말라가는 자신을 견딜 수 없던 것이다. 우리에게는 음악과 진실과 사랑이 인생의 가치,타인의 정의는 알지 못한다. 내 몫의 인생,아름답게 살고 싶었을 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할말이 많았다는 듯,오랫동안 참아왔다는 듯 줄기차게 내리는 빗속을 걸어 그가 돌아 왔다. 계속되는 더위에 늘어져 있던 우리는 그가 몰고 온 서늘함에 선뜻 정신이 들었다. 그의 얼굴은 형편없이 말라 있었지만 그 눈빛은 여지없이 뜨거웠다. 야전 침대 위에서 팔을 괴고 누워 있던 리더가 물었다.
“어떻게…?”
“…….”
우리는 모두 그를 응시했다. 그는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셔츠를 그대로 몸에서 뜯어냈다. 단추가 터지며 젖은 셔츠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이어 청바지를 벗어 던지고 맨발에 신은 전투화를 구석에 던진 그는 알몸이 되었다. 여기저기 불거져 나온 골격이 앙상했지만 비에 젖어 번들거리는 그의 알몸은 싱싱했다. 은근히 눈이 부셨다. 구석의 빨랫줄에 걸려 있는 수건을 둘둘 말아 몸을 닦은 그는 말없이 야전 침대의 침낭 속으로 파고들었다. 우리는 그의 행동을 하나 하나 눈으로 따랐다. 침낭속에 파묻히기 전 그는 우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름이 수주였어. 그 여자.”
침몰하는 배처럼 그는 잠속에 빠져들었다. 둘러앉은 우리는 하릴없이 그의 숨소리를 듣고 있었다. 누군가 불을 껐다. 멀리서 비 내리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그 여자.
말 한 번 건네지 못하고 주위를 서성거리는 한 남자를 전혀 모르던.
역시 비오던 다음 날 우리는 빌딩의 현관을 걸어 나오던 그 여자를 보았다. 우산을 들고 차분한 걸음새로 걸어 나오던 그 여자의 서늘한 얼굴과 하늘한 몸매를 우리는 무작정 바라보았다. 말할 수도 없었고 할 말도 없었다. 왠지 모르게 가슴 한 구석이 투명하게 얼고 그 밑으로 소리 없이 샘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한 듯한 느낌. 잔잔히 흘러 온 가슴을 적시고 끝내 넘쳐 눈물로 흐를 것 같은 느낌이었다. 우리는 망연히 고개를 돌려 젖어가는 스커트 자락이 빗줄기 사이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누구도 묻지 않았지만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듯 그가 말했다
“이 빌딩에 있는 장애인 복지재단에서 일해.”
우리는 모두 빗속을 터벅터벅 걸어 돌아왔다.
그날,밤이 늦도록 그가 기타를 놓지 않았다. 가는 목을 지그시 쥐고 기타의 늑골을 손가락으로 깊숙이 찔러 만들어 낸 울음소리가 밀물처럼 우리를 삼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헤드폰을 깊이 쓰고 돌아앉아 묵묵히 기타와 함께 울고 있는 그의 영혼까지도. 군데군데 도장이 벗겨진 국산의 싸구려 일렉트릭기타가 우리를 닮았다. 이 어둡고 좁고 습한 공간까지 어쩌면 이렇게 우리를 닮은 것인가. 이 초라한 공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아름답게 우는 일 뿐이었다. 외양 아름답지 않은 우리지만 속에 있는 것으로 아름다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손을 멈추면 사라져 버리는 반향이 허무해 우리는 쉬지 않고 울었다. 울고 있을 때만은 우리도 아름다웠으니.
밤마다 비에 젖은 그가 힘없이 돌아와 제 몸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매번 용기를 내어 그녀 앞에 서 보지만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본다고 했다. 묵묵히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거부도 방관도 무시도 아니게 애매하다고 했다. 정열적인 연인들을 바라보는 수녀같다는 그녀의 깊은 시선을 받을 때마다 힘없이 스러져 버리는 그의 열정. 그녀가 사는 아파트의 입구에서 밤을 보고서야 그는 고달픈 하루의 기다림을 끝내고 우리에게 돌아왔다. 힘없이 돌아오는 그의 가슴속에서 다시 불타오르는 열정이 그를 견딜 수 없이 힘들게 했다. 매일처럼 그는 그녀에게 갔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돌아올 뿐이었다.한 달이 되어 가도록 비가 그치지 않았다.
칠월의 마지막 목요일이었다. 머리끝까지 취해 돌아온 그가 우리에게 도움을 청했다. 한번 고백해 보겠노라고,도와 달라고. 지금껏 한번도 누구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았던 그였다. 곁에서 보고 있기에도 지친 우리는 그의 제안을 반겨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가 만들어 두었던 곡 몇 개를 골라 흐름을 정했다. 가을의 오디션 따위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아픔,그의 기다림,그의 절망만이 눈앞에 절실한 우리의 것이 되었고 그녀는 우리 모두의 여자가 되었다. 오랜만에 연습실 안이 팽팽한 열기로 가득해졌다. 그 열기 속엔 여느 연습 때와 전혀 다른 비장함이 배어 있었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최고의 연주를 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마음을 담아 노래했고 사이사이 고백했다. 마치 눈앞에 그녀가 있는 것처럼 울며 마음속에 있는 진실을 그가 말할 때 우리는 가슴이 저려 고개를 돌려야 했다. 그는 그녀를 말할 때 울었고 그녀를 노래할 때 절규했다. 우리에게 사랑이 무엇인가. 사랑이 그렇지 않다면 세상 어디에 목숨 걸 일 어디 있는가. 한 여자에게 고백하기 위해 우리는 밤을 새웠고 땀 흘렸다. 줄기차게 내리는 비가 세상과 우리 사이를 가려 주었다. 세상과 우리는 비로 연결되어 있었다. 우리는 살아 있었다.
오후에 들어서자 빗발이 점차 가늘어졌다. 초조하게 하늘을 바라보던 그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 연습실 안은 오직 담배 연기로 자욱했다. 용달차의 기사가 연신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비를 맞으며 일톤 화물차에 실어 놓은 앰프와 악기들이 덮어놓은 포장 밑에서 비를 긋고 있었다. 짙게 깔린 구름 때문에 날이 곧 어두워질 것 같었다. 가늘어지던 비가 안개처럼 변하자 우리는 연습실 문을 닫고 차에 올랐다. 우리가 탄 택시가 앞서고 짐을 실은 화물차가 뒤를 쫓아 그녀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로 향했다. 한참을 달려 도착했을 때 마침 수위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재빨리 아파트 현관에 짐을 내리고 화물차를 돌려 보낸 뒤 엘리베이터 가득 앰프를 싣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대충 앰프를 올려놓고 다시 내려와 악기를 실어 올렸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고 긴장한 표정으로 재빨리 움직였다. 짐을 다 옮기고 난 후 그가 옥상에서 아래로 백미터 전선을 내려보냈다. 아파트 벽을 타고 내려온 전선에 다시 백미터를 더 연결하여 미리 얘기해 두었던 아파트 경로당의 전원을 끌어내었다. 밤이면 경로당이 비어 아무도 손대지 못하리라 요량하고 경로당 노인들에게 약주를 받아다 주었고 따로 봉투도 만들어 주었다. 전선을 보이지 않게 아파트 화단 안으로 갈무리한 다음 우리는 옥상으로 올라갔다. 함께 탄 유치원생 꼬마는 긴 머리칼에 은빛 굵은 목걸이를 한 우리가 신기한 듯 눈이 빠질 것처럼 바라보았다. 옥상에 올라간 우리는 옥상으로 통하는 문이 열리지 않도록 굵은 철사로 묶어버렸다. 한숨 돌리고 난 우리는 전원이 이상 없이 들어오는 것을 확인한 후 앰프와 악기를 설치했다.
네 개의 건물이 사각형으로 배치되어 있는 단지의 동쪽 아파트는 10,12,14,16층이 계단형으로 되어 있었다. 지금 우리가 있는 동쪽의 10층과 북쪽 아파트는 불과 이십 몇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았고 그녀가 산다는 북쪽 아파트 11층의 끝 호와 거의 모서리를 맞대고 있었다. 스피커를 그녀의 창쪽으로 향하게 설치했다. 비는 거의 내리지 않았지만 하늘은 여전히 구름으로 가득했고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기타의 스트랩을 목에 걸고 또는 드럼세트의 가운데 앉아 우리는 그의 신호를 기다렸다. 아파트 옥상의 협소한 공간에 우리는 조그맣게 앉아서 제각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모두들 떨고 있었다. 이상한 일. 공연이 시작하기 전에 늘 느꼈던 오금이 죄이는 듯한 짜릿함은 어디로 간 걸까. 모두들 굳어 있다가 시선이 마주치면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위대한 강처럼 시간이 흘렀다. 흐르고 있는 것 알고 있지만 우리가 서있는 언저리는 강가의 갈대밭에 묶인 것처럼 고요했다. 하늘이 점점 어두워졌고 칸칸이 나뉘어진 아파트 여기 저기서 불이 켜졌다. 환하게 빛나는 불빛들을 보자 왠지 외로워졌다. 어디로든지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스피커 위에 걸터 앉아 있던 그가 뒤돌아보았다. 긴장한 얼굴이었다. 순간 모두들 동작이 굳었다. 지척에 있던 그녀의 아파트에 불이 켜지고 거실 복판에 서 있는 그녀가 보였다. 여전히 아름다웠다.
“미안합니다. 이것이 제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꼭 들어 주세요. 저 아시죠? 밤마다 아파트 입구에서 기다리던 사람입니다. 단 한 번도 서로 이야기 해보지 않았지만 저는 수주씨를 정말 사랑합니다. 스치는 감정은 아닙니다. 가파른 급류 속에 빠진 나를 수주씨에게 밀어 붙이는 그런 절대적인 감정입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음악하는 사람이에요. 음악 말고 내게 뭔가 의지를 준 것은 이 세상에서 수주씨가 처음입니다. 어쩌면 음악보다 더 갈급하지만 아무리 해도 돌아보지 않는 수주씨가 내게는 너무 힘듭니다. 그래서 이 방법을 준비했어요. 짧은 시간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방법으로 내 마음을 전하겠습니다. 듣고 제발 나를 바라보세요. 제발 내 감정에 대해 반응해 주세요. 여기 있는 친구들과 며칠 밤을 새우며 이 시간을 준비했습니다. 이토록 절실하게 공연을 준비한 적은 여지껏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울 거에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음악을 보내겠습니다. 마지막에도 수주씨가 돌아보지 않는다면 나는 음악을 포기하겠습니다. 음악 말고는 알지 못하는 내가 음악을 포기한다는 것은 이렇듯 열망하는 수주씨에게도 내 진심이 전해지지 않는다면 누구에게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나를 봐 주세요. 그리고 들어주세요. 이것이 나의 마음입니다. 내 심장입니다.”
그의 고백이 시작되자 곧 불이 켜져 있던 아파트의 창들이 모두 열렸다. 창마다 사람들이 머리를 내밀고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몇몇은 웃고 있었고 몇몇은 저녁의 휴식을 방해 받아서인지 화를 내고 있는 듯했다. 멀리 있는 사람들은 잘 보이지 않았다. 설치해 둔 몇 개의 백색 라이트가 그의 뒷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우리는 각각 악기를 들고 연주하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떨리는 손으로 그를 위해 머릿속의 악보를 연주했다. 그는 평소보다 가늘어진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인 노래를 만들어 냈다.
아파트로 둘러싸인 중앙의 거대한 공간이 울리고 있었다. 어쿠스틱 기타의 공명통처럼 우리의 미약한 소리를 증폭시켜 웅장하게 만들고 있었다. 점점 많은 창들에 불이 켜지고 불빛 환한 창 속에 선 사람들이 묵묵히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번째,세 번째 곡이 끝났다. 불이 켜진 베란다에 서서 그녀가 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투명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뒤에 서 있는 우리들의 가슴마저 떨려 왔다.
“당신은 내게 가능성입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날 수 있다는 가능성,당신과 함께 하는 내가 아름다울 수 있다는 가능성,지금껏 혼자 몸부림쳐 온 지하실을 벗어나 당당하게 설 수 있다는 가능성,당신을 위해 땀 흘리고 당신을 위해 열매를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햇빛 속에서 웃을 수 있다는 가능성,가능성을 위해 목숨 걸 수 있다는 가능성,당신이 그런 사람입니다. 당신의 손을 잡으려 하는 내가 지금 어떤 모습인지 잠시 잊을 때도 있었습니다. 초라한 삼류 보컬이지요. 스스로 알고 있는 내 자신이 초라해서 수주씨에게 당당하게 서지 못하고 잊고만 싶어했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이성과 달라서 자꾸 떠오르는 당신 모습에 못 견뎌 합니다. 알고 있습니까? 너무 힘들어서 너무 고통스러워서 미칠 것만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내안에 솟아나는 당신의 향기가 나를 미치게 합니다. 쉴새 없이 당신께 나를 내몰지만 그래서 당신 앞에 서 보지만,난 할 수 없었습니다. 초라한 모습으로 기다렸다가 비참한 모습으로 돌아섰습니다. 단 한 번도 당신께 말하지 못했습니다. 말하면,내 가장 부드러운 마음을 토해내 당신께 드리면 혹시 당신은 돌아서 버리고 내 마음은 이 더러운 세상 속에서 상해 버릴 까봐 꺼내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들어주세요. 지금 나는 여기에 있습니다.”
네 번째 곡이 시작될 무렵 아파트 주차장에 경찰차의 경광등이 파랗고 빨갛게 번쩍거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모여 웅성대고 있었다.
난간의 모서리에 선 그에게 순찰차의 탐조등이 쏟아졌다. 확성기를 손에 든 경찰관이 치직거리는 소리로 경고하기 시작했다. 발빠른 경찰이 옥상으로 통하는 철문을 쾅쾅 두드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점점 초조해졌지만 그는 오직 그녀의 베란다만을 보고 있었다. 베란다에는 여전히 그녀가 서 있었다. 거의 모든 창에 불이 켜졌다. 창속의 사람들이 창 밖의 우리를 지켜보았다.다섯 번째 곡을 시작했다. 여섯 번째 곡을 시작했다.
그가 우리를 돌아보았다. 창을 적시는 소나기처럼 그의 얼굴이 흠뻑 눈물로 젖어 있었다. 그의 시선이 잠시 위를 향했다. 십이층의 옥상으로 나온 경찰들과 수위들이 우리를 향해 소리쳤다. 한 경찰관이 자일을 늘어 뜨렸다. 타고 내려올 듯 한 경찰관이 난간에 섰다. 베이스를 치고 있던 친구가 달려가 자일을 걷어 되던졌다. 짐승처럼 눈빛을 번득이며 벽면을 지켰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를 바라보았다. 일곱 번째 곡을 시작했다. 그가 만든 곡이었다. 퍼스트와 세컨 기타의 이펙터를 모두 껐다. 얼음을 담은 크리스탈잔처럼 맑은 화음이 잔잔히 울렸다. 돌연 세상이 조용해졌다.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비보다 젖어 드는 그의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내게 한 이름이 있어. 떨리는 입술로 노래 부르는
그 이름 넘치는 소망이 되어 순간도 잊지 못할 느낌이 남아.
돌아보면 부끄러운 흔적을 끌고 순간마다 그리워하며 여기껏 왔지.
내 가진 아름다운 이름 하나로 지친 마음에 위로가 되네
언제나 겨울인 마음에 봄볕을 주네.
그 이름 소리내어 말하려 했지만 할 수 없었지
그 사람 나를 모르기 때문에
놀라서 물러나면 내마음이 찢어지는데
오실 듯 그 사람 기다릴 수 있을까,
내게 한 이름이 있어 지금도 생각하면 눈물이 나는
그 이름 내게 별이었다가 그 이름 내게 새벽이 되고
찢어지는 가슴 사이로 그 이름 내게 들어와 영혼이,
내 영혼이 되었어.”
가슴을 찢듯이 그가 절규했다. 비가 점점 거세어 졌지만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마이크를 어두운 하늘을 향해 들고 온 몸의 날숨을 모아 육성으로 외쳤다.
“사랑합니다. 당신을 이렇게 사랑합니다. 나를 봐주세요. 나를 알아주세요. 사랑합니다. 수주씨.당신을 미치게 사랑합니다.”
비가 거세어졌지만 사람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우리를 향해 경고하던 순찰차도 조용해졌다. 모든 사람이 땅에 뿌리를 박은 듯 손끝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그 숨막히는 정적의 공간을 수만의 빗방울이 수직으로 관통하여 땅에 머리를 부쉈다. 우리는 숨도 쉬지 못하고 그녀의 베란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뒤에 누군가 서 있었다. 키가 큰 젊은 여자였다. 두 여자는 우리를 한 번 더 바라본 후 거실을 지나 사라졌다. 돌아서는 그녀의 옷자락이라도 붙잡으려는 듯 그가 손을 내저었다. 필사적으로 그녀가 있던 거실을 향해 손을 뻗으며 철판을 생으로 찢는 듯한 소리로 그가 외쳤다.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이윽고 거실의 불이 꺼졌다. 그녀가 서 있던 공간에는 오직 어둠만 고여 있었다.
마지막 곡의 도입부분을 연주했다. 우리는 옥상 바닥을 바라보며 태엽을 감은 메트로놈처럼 연주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가 외치는 단음절의 고함소리가 길게 여운을 남기고 있었다. 여운이 사라지고 한참이 지나도 그의 보컬이 시작되지 않았다. 우리는 기계처럼 고개를 들었다. 그가 서 있던 옥상의 난간이 하얗게 비어 있었다.
아래 주차장에서 누군가 비명을 질렀지만 우리는 연주를 멈출 수 없었다. 보컬이 시작될 부분이 지나면 다시 도입부분으로,다시 도입부분으로 다시 도입부분으로.몇 번을 돌아가는 동안 비가 더욱 거세졌고 합선된 앰프가 퍽 소리를 내며 나갔다. 누군가 달려와 내 기타를 잡았다. 공연은 끝났다.
진술서 몇 장을 거듭 쓰고 벌금을 물고 나서 우리는 경찰서를 나설 수 있었다. 연락을 받고 달려온 명이가 경찰서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튿날 조간 신문에 몇 줄의 기사가 실렸다. 실족에 의한 추락사라고 했던가. 경찰서를 나서자 거짓말처럼 하늘이 개었다. 사물들이 제각기 가진 색으로 눈물나게 선명한 세상 위에 태양이 뜨거웠다.
그날 저녁 우리의 연습실로 한 여자가 찾아 왔다. 황망히 퍼져 있던 우리들은 멀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여자도 무감한 눈빛으로 우리를 둘러보았다. 내 곁에 앉아 있던 명이가 그녀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한참이 지나도 명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살며시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 내 등뒤로 무덤덤한 시선들이 따랐다.
지하실을 나서서 골목으로 통하는 계단입구에 명이가 앉아 있었다. 혼자였다.조용히 다가가 곁에 앉았다.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앉은 명이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떨리는 어깨. 울고 있었다.
잠시 후에 명이가 얼굴을 들었다.
“그 여자 누구야?”
“같이 살던 여자래요. 그 오빠가 좋아하던 여자와.”
“그런데 여긴 왜?”
“말해 줘야 된다고 생각했대요. 미안하다고 그랬어요. 전혀 그런 감정 가지고 있는 줄 몰라서. 그냥 무서워 했고 그래서 가만히 있었던 건데. 그 오빠가 좋아하던 여자,듣지를 못한대요. 그래서 곁에서 수화로 꼭 통역해 줘야 한대요. 그런데 바보같이 말도 한번 안 건네보고 혼자서만….”
비에도 빛깔이 있다. 아침의 비와 오후의 비가 다르다. 봄비가 다르고 겨울비가 다른 것처럼. 살아가는 하루하루 잊지 않으면 그대로 눈물이었다. 구름보다 높은 하늘에서 울고 있는 먼저 떠난 사람들의 눈물. 그리워하다가 가슴아파 하다가 참지 못하게 되면 울어 버리는 걸까. 울고 있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구름으로 하늘을 가리고 한사코 울고 있는 걸까.
구름 너머의 하늘을 담은 빗방울이기에 비에는 빛깔이 있다. 떠난 사람 모두 사라진 세상에 다시 떠날 사람과 남을 사람이 비를 맞으며 자란다. 눈을 감으면 빗소리 속에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는 누군가의 발소리.
모두들 지하실을 떠났다. 그가 그렇게 죽은 후 우리였던 모두가 제각기 다른 방향을 찾아 도시의 구석구석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나 역시 그곳을 떠나 은둔 속에 들어와 있다. 우리가 모여 할 수 없던 것을 이루기 위해 나 자신만을 믿어 보기로 했던 일년이 지났다.
긴 비가 그치면 매미소리 생생한 세상이 아름답겠지. 사타구니까지 철저하게 씻어진 세상 위로 얼룩 한 점 없을 하늘이 파랗겠지. 자연스럽게 우리는 비를 잊겠지. 끝난 장마와 닥친 더위를 투덜대다가 찬바람이 불면 시집 몇 권 사고 시들어 가는 자연과 반대로 오다가다 눈맞춰 연인이 되고 그렇게 겨울이 되고 눈이 녹으면,봄이 가면 다시 긴 비가 오겠지. 그런 세상이겠지.
빗속에 문득 그가 생각났을 뿐이다. 그가 나를 생각하며 울고 있을 것 같은 생각에 잠겨 있던 내 마음을 한 번 열었다 닫았을 뿐이다.
지금껏 쉬지 않았다. 땀흘리는 동안은 잊을 수 있던 것,방향을 모른다는 상실감이었다. 그 빈 울림이 두려워 지금껏 뒤돌아보지 않고 달려 왔다. 여전히 젊은 나. 무엇을 했다고 이리 피곤할 걸까. 쉼은 이룬 자의 몫,아직도 나 제자리를 맴돌고 있을 뿐인데.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 목숨 걸 일이 있는가 생각했던 우리들은 하나같이 아프게 아프게 사랑의 등가가치를 배워야 했다. 나는 지금 쉬고 싶을 뿐이다. 시간이 지나면 그 뿐 끝까지 남을 아픔도 없다고 자위할 뿐.
창고로 돌아와 창문을 닫았다. 창에 퍼지는 빗방울처럼 빗소리도 창을 한 번 두드리고 사라졌다. 가방을 꺼내 짐을 꾸렸다. 옷가지와 편지 뭉치,그리고 기타 하나. 자물쇠를 잠그고 창고를 나섰다. 옥상을 가로질러 계단입구에 앉는다. 오후 한시,명이가 곧 올 것이다. 그녀의 방에 들어가기 전 다리가 경직될 때까지 걷고 싶다. 명이가 우산을 가지고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