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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이론자료 스크랩 아니마 (anima)와■ 아니무스 (animus)
행복한 삶이 되길(임은희) 추천 0 조회 83 15.04.25 22:5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칼 구스타프 융 (1875~1961)

 정신과 의사이자 분석심리학의 기초자인 칼 융은 의학, 고고학, 신비중의 철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지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정신의 이해에 지대한 공헌을 한 창조적 사상가이다. 정신분열증 연구에 정신분석의 방법을 최초로 적용한 융은 개인적 경험뿐만 아니라 종족적인 경험에 의해서도 인격형성이 영향을 받으며, 성적 욕구보다도 도덕적이며 정신적인 가치관에 의하여 인간의 행동이 결정되기도 한다는 생각 등을 기초로 분석심리학의 이론을 체계화 시켰다.


■ 아니마 (anima) : 마음속의 여성

 아니마는 남성의 마음속에 여성적 심리경향이 인격화한 것을 말한다. 즉 막연한 느낌이나 기분, 예견적인 육감, 비합리적인 것에 대한 감수성, 개인적인 사랑의 능력, 자연대 대한 감정, 그리고 무의식 등이 바로 이러한 심리경향이다. 아니마는 크게 4가지로 구분된다.

 1. 자녀의 생산과 집안일을 하는 원시적 기능으로서의 여성

 2. 외모의 아름다움을 갖춘 섹스어필한 여인

 3. 모성성과 따뜻하고 헌신적인 마음을 가진 성모와 같은 어머니 상

 4. 아르테미스 여신과 같은 지혜로 충만 되고 힘과 권능을 가진 여성


■ 아니무스 (animus) : 마음속의 남성

 아니무스는 여성의 무의식이 인격화한 남성상을 말한다. 아니마와 달리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거룩한 것의 확신이라는 모습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어떤 거룩한 것에 확신을 가지고 남성의 음성으로 남을 설득하거나 잔인하고 격정적인 태도를 내보이면서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여성의 경우가 아니무스의 성격을 나타낸 것이다. 아니무스 또한 다음과 같이 4가지로 구분된다.

1. 육체적이고 동물적인 매력의 남성.

2. 사회적 기능으로서의 말을 잘하는 남성

3. 지적인 요소를 갖추고 사회적 지위를 차지하며 힘과 권능을 누리는 자

4. 전지전능한 신처럼 대 지혜와 넓은 도량을 지닌 남성


♣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보통 자아는 인식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아니마의 경우 자신의 어머니상을 닮아가고, 아니무스는 자신의 아버지상을 닮아간다. 어머니로부터 나쁜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아니마는 흔히 조급하고, 우울하고, 불확실하며 불안정하다. 아니마가 이럴 경우 당사자는 화를 잘 내는 성격의 소유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부정적인 아니마를 극복할 경우 평균치 이상으로 남자다워질 수 있다.) 이런 부정적인 아니마상은 자기암시를 끝없이 되풀이 하여 권태감이나 무력감의 원인이 되는가 하면, 혹시 병에 걸리지 않을까, 혹은 사고는 당하지 않을까 하는 등의 쓸데없는 걱정을 하게 하기도 한다. 심각할 경우 당사자를 자살로 몰고 갈수 있다. 아니무스의 경우 아버지는 자기 딸의 아니무스에 논쟁의 여지가 없는 진정한 확신이라는 특수한 색채를 부여한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그 확신에는 그 여성 자신의 인격적 현실이 고려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보통 자신의 이상형등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자신의 아니마가 터프하다면 터프한 여성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고, 자신의 아니무스가 부드럽다면, 부드러운 남성에게 호감을 가지게 된다.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자신의 성격과 정반대의 성격을 띠고 있다. 자신의 억압된 모든 무의식적인 성격과 인격이 하나로 이루어져 나타나는 것이 아니마와 아니무스 이다.


■ ‘프린스 앤 프리세스’

 ● 그림자가 일깨우는 인간의 양성성

  모든 사람들 마음속에는 왕자와 공주가 있다. 흔히 신화나 동화는 정신

 작용이 빚어내는 가장 심오한 형태의 언어로 우리 내면의 어떤 모습을 드러내준다. 즉 개인의 꿈이란 특정화된 신화이며, 반대로 신화는 보편화 된 꿈인 것이다. 미셸 오슬로의 실루엣 애니메이션인 <프린스 앤 프린세스>는 융의 분석심리학에 대한 완벽한 구현이자 어떤 경배 같아 보인다.

  일단 <프린스 앤 프린세스>가 형식적인 측면에서 이 차원의 평면 그림자를 택했다는 것, 삼차원의 입체를 포기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흔히 그림자는 생명력의 일부로 '스승의 그림자를 밟지 말라'는 속담처럼 그림자를 밟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영혼을 침해하는 행위로 여겨진다.

  중국이나 타이에서 발달한 그림자극을 한번 떠올려보자. 원숭이, 개구리, 여우 등 얇은 천 뒤의 가녀린 빛이 우리의 조야한 의식을 포장하는 동안 너울거리는 그림자들은 가장 간단한 방식으로 천 뒤에서 불현듯 나타난다. 이제까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무형의 실체가 실재하는 그 순간을 보는 이로 하여금 느끼게 해준다. 동시에 <프린스 앤 프린세스>의 빛과 그림자는 영화의 본질적인 속성이기도 하다. 나비의 영혼처럼 흔들리는 종이 몇 개가 어둠의 세례를 받아 펼쳐지는 이집트나 중세의 세상. <프린스 앤 프린세스>는 바로 우리 무의식에서 끌어올려지는 우리 내면의 고갱이들로서, 영화를 보는 즉시 어린 시절 잠들면서 꿈꿨던 벽장 너머의 세상으로 우리를 데려다준다.

 융은 모든 문화권과 동화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엇비슷한 주제가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개인들도 어떤 무의식이 있을 뿐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는 공통된 집단 무의식도 있는데, 이 집단 무의식이 만들어내는 원시적 이미지를 '원형'(archetype)이라 하였다.

  심리적 원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아니마와 아니무스라는 것이다. 분석학적인 눈으로 보자면 인간은 남성적인 잠재력과 여성적인 잠재력을 모두 지닌 양성적인 존재라 할 수 있겠다.

  융이 개념화한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사람들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여성성과 남성성을 상징한다. <프린스 앤 프린세스>에 등장하는 공주는 바로 사람들 마음속에 깃들어 있는 여성성 즉 아니마로서, 막연한 느낌과 기분, 육감, 비합리적인 것에 대한 감수성, 개인적인 사랑의 능력, 자연에 대한 느낌 등의 능력을 관장한다. 흔히 비너스나 헬레네, 이브, 성모 마리아 그리고 현대의 마릴린 먼로나 마돈나, 조디 포스터 같은 여성들은 다른 수준의 의미를 지닌 아니마로 작용한다고 보겠다. 반대로 왕자로 상징되는 아니무스는 사람들 마음속에 깃든 남성성이다. 남성적인 책임과 믿음, 잔인함과 광폭성을 아우르는 이 심리적 원형은 흔히 아폴로나 헤라클레스, 타잔 혹은 간디나 낭만적인 브래드 피트의 모습 등에서도 찾을 수 있다.


 ● 따뜻함이 고정관념을 벗긴다

  <프린스 앤 프린세스>는 중세의 연금술이 그러하듯 공주와 왕자, 즉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통합에 대한 간명한 은유를 보여주며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특히 첫 삽화 111개의 다이아몬드를 찾아야 하는 왕자의 이야기는 서구의 영웅 신화 대한 짧은 소묘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박진감이 넘친다.

  많은 동화에서 청년 영웅들은 흔히 자신의 진정한 인성이나 자아를 발견하기 위해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마침내 용을 죽이고 공주와 결혼하게 된다. <프린스 앤 프린세스>에서의 다이아몬드는 상징체계에서 보자면 불멸성을 지닌 진정한 자아를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이때 다이아몬드는 여타 동화에서는 황금양털일 수도, 금은보화일 수도 혹은 성배나 신발 한 짝일 수도 있다. 왕자가 다이아몬드를 찾아 헤맨다는 것은 자신의 진정한 인성이나 자아를 발견하기 위해 진지한 내면 여행을 떠나야 한다는 뜻이 된다.

  흔히 왕자는 가는 도중 여러 어려움을 겪지만 결국 자신을 도와주는 조력자들을 만나게 된다. 조력자는 까마귀일 수도 있고, 늙은 노파일 수도, 혹은 두꺼비나 개구리, 혹은 새일 수도 있다. 왕자는 이들 조력자들이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연민으로 잘 대해주지만 결국 조력자들의 도움은 다이아몬드를 얻는 데 결정적인 열쇠가 된다. 그렇다면 <프린스 앤 프린세스>에 나오는 조력자는 무엇이었을까? 콩쥐에게 물을 긷게 하는 두꺼비, 낟알을 모아주는 새들이었을까? 이들은 사람들이 자신 안에 있지만 잘 모르는 어떤 잠재능력과 원초적인 본능을 나타낸다.

  흔히 사람들은 항상 자신이 잘 이용하고 겉으로 보여지는 능력만으로 보물을 얻으려 하지만 겉으로 보여지는 능력의 대극에 있는 숨겨진 능력을 깨닫는 것이 자아의 완성에 핵심이 된다고 동화들은 가르쳐준다. 조력자는 이렇게 우리가 좀더 신경써야 하고 혹은 그 존재 자체가 있다는 것을 겸허히 인정해야만 하는 우리의 열등기능들이다. 왕자는 자신이 간과했지만 자신 안에 있었던 어떤 능력- 개미, 즉 질서, 바름, 덕, 혹은 복종을 배움으로써 111개의 다이아몬드를 무사히 찾게 된다. 결국 주인공 왕자는 다른 왕자들과 달리 내부의 본성을 이용해 111개의 다이아몬드를 찾고 자신의 여성성을 통합하는 데 성공한다. 왕자는 마침내 공주와 결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미셸 오슬로 감독은 <프린스 앤 프린세스>에 고답적인 동화의 숨결만을 불어넣지 않았다. 매우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으로 교정된 감독의 안목은 '마녀의 성'이나 '왕자와 공주의 키스' 같은, 감독이 직접 창작한 이야기에서 더욱더 그 묘미를 발휘한다.

  어린시절, 흑인만 다니던 공립학교의 유일한 학생이었던 감독답게 <프린스 앤 프린세스>의 이야기는 매혹적이면서 동시에 세상의 편견을 깨부수는 묘한 쾌감이 공존하고 있다. 예를 들면 마녀의 성에 들어가려던 청년은 대포를 동원하고 높은 벽을 타고 오르던 이들과 달리 결국 마녀의 성에 들어가는 가장 간단한 방법을 알게 된다. 그것은 바로 마녀의 성문을 살짝 노크하는 것. 사람들이 마녀라 불렀던 그녀는 실은 예술과 문학을 사랑하는 지혜로운 여자였다. 마치 누가누가 먼저 지나가는 이의 외투를 벗기나 내기한 '바람과 태양의 동화'처럼 '마녀의 성'은 결국 편견을 허무는 따뜻한 마음의 손길, 사람들의 정신적 방어물을 허무는 중용과 겸허함의 미덕에 대해 이야기한다.


 ● 이론을 앞서는 오랜 지혜

 특히 <프린스 앤 프린세스>의 백미는 황당한 마법의 키스로 인해 개구리, 나비, 코뿔소, 코끼리, 애벌레, 벼룩, 기린, 고래, 황소로 변하는 왕자와 공주의 키스 행진곡이다.

   융에 따르면 흔히 여성들은 자신이 억압시켰던 내면의 남성성인 아니무스를 다른 남성에게서 보게 되면, 그 남성에게 자신의 아니무스를 투사함으로써 사랑에 빠지게 된다고 한다. 이 점은 남성 역시 마찬가지이다. 융식으로 말한다면 남성들은 사랑하는 여성에게서 자신이 억압했던 자신의 여성성을 보게 된다. 여기서 투사라는 말이 어렵다면 흔히 말하는 '눈에 콩꺼풀이 씌운다', 이런 말로 대치해보자.

  왕자와 공주는 서로의 눈에서 서로의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발견하고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곧 벼룩과 기린으로 변한 두 사람은 1분 전에 한 사랑의 맹세를 어기고 뜻밖에 이기심어린 비난을 서로에게 퍼붓는다. 사람들이 하마나 코끼리로 변하는 까닭은 무얼까? 그것은 두 사람이 상대편을 그렇게 지각했다는 말에 다름 아닐 것이다.

  사랑의 변덕스러움과 서로의 투사를 떨쳐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상대편을 보는 방법을 가장 간명한 방식으로 전달하는 공주와 왕자. 이 에피소드의 마지막 반전은 스크린에 뽀뽀라도 해주고 싶을 정도로 귀엽고 장난스럽다. 물론 <프린스 앤 프린세스>는 분석학을 동원하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 충분히 사랑스럽고 재미있다.

  감독 미셸 오슬로는 자타가 공인하는 프랑스 애니메이션의 거장으로 행복은 멀리 있지 않음을, 삶의 지혜는 가장 간명한 방식으로 찾아내는 것임을 한칼에 보여준다. 그런데 여기에 마음만 먹는다면 단아한 그림자를 사모했던 종이 한장에 융의 통찰력을 겹침으로써 가장 저렴하고 즉각적인 방법으로 삶에 대해 많은 것을 깨닫게 되는 신기한 내면여행의 보너스도 가능한 것이다.

  그건 위의 꼬마환자나 노파를 등에 업고 후지산에 올라갔던 <프린스 앤 프린세스>의 도둑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에 대한 심한 분노와 자신의 정서를 잘 통제하지 못하는 꼬마소녀는 자신의 손이 불이 되어 스스로를 옥죄고 있다고 느낀다. 또한 도둑이 얻기를 바랐던 기모노나 큰 옷 등은, 안으로 감싸 안는 이미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가 외부세계에 자신을 드러내는 가면으로써의 자아, 바로 페르소나만을 원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껍질인 페르소나는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 여기에 신성한 노인이 나타난다.

  노파나 게이샤 혹은 할아버지나 도사가 될 그 또는 그녀는 우리의 마음 안에 초자연적인 개성, 즉 우리를 한 단계 이끌어 올릴 현명한 노인 필레몬이다. 마치 헤라 여신을 등에 업고 강을 건너면서도 그녀를 평범한 노파로 착각했던 그리스신화의 영웅 이아손처럼 우리는 일종의 도둑이며 노파인 동시에 하마가 될지도 모르는 왕자이자 공주는 아니였던가.

<프린스 앤 프린세스>는 향기는 없는 평면의 실루엣이지만 깊이있는 애니메이션의 전형으로 오래된 지혜의 향내를 화면 가득히 품어내고 있었다.



남성 속의 여성- "아니마"  /  여성속의 남성- "아니무스"

신경정신과 전문의 김종훈


누가 보나 강직하고 남자답다고 인정받는 사람이 있다. 그 리더십, 결단력과 추진력, 동료간의 우애, 개인적 감정에 좌우되지 않는 공정무사한 자세로 하여 그는 주변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부인은 그를 그렇게 보지 않았다. 집에 돌아오면 그는 잔소리꾼이고 변덕쟁이라고 한다. 사사건건 작은 일을 가지고 짜증내고 버럭 화를 내기도 하고 가족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원망하고 여기저기 몸이 불편하다고 호소하고 공정무사는커녕 어린애 같고 자기 중심적이며 기분이 이랬다저랬다 해서 맞추어 주기 어렵다. 그래서 식구들은 아버지가 퇴근해서 돌아올 무렵이면 슬며시 제 방으로 숨어 들어가 접촉을 피하려 하고 이것이 또한 그의 불만이다.

이 남자를 생각해 보자. 누가 보아도 남자다운 남자, 사회에서 말하는 남자 이미지 ---남성의 패르조나--- 에 일치된 생동을 하는 남자가 집에서 보이는 약하고 변덕스런 성격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회무대에서 보인 이남자의 인격 속에 숨어있던 또 하나의 인격----'여자 중에서도 유치하고 미숙하고 열등한 여자'라고 사회가 말할만한 성격이다. 그것은 평소에는 무의식에서 잠자고 있다가 그가 사회적 의무와 요청에서 해방되는 순간 밖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 그 남자의 아니마, 남자 속의 여자이다.

또한 누가 보아도 여자답다고 할 만한 사람이 있다. 섬세하고 아름답고 조용하며 항상 남의 그늘에서 나서지 않고 겸손하면 매사를 거역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마음씨 고운 여자---그녀가 어느 날 사소한 일로 흥분하여 자기 아이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붓는 것을 본 사람이 그녀를 "딴 사람 같았다"고 하였다. 그 사람은 이때 그녀의 여성 페르조나 밑에 미숙하고 열등하며 원시적인 상태로 남아 있던 남성성 ---- 여자 속의 남자, 아니무스를 본 것이다.

아니마(Anima-Seele-심령 : 心靈) . 아니무스(Animus-Geist-심혼 : 心魂)는 융이 무의식에 대한 오랜 탐구 끝에 발견한 개념이며 남성과 여성의 페르조나 --- 외적 인격에 대한 내적 인격을 말한다. 남자는 남자일 뿐 아니라 그 마음속에 여성적 요소를, 여자는 그 마음속에 남성적 요소를 가지고 태어나고 인격의 성숙을 위해서는 '남자'와 '여자'라는 사회적 역할에 집착하기보다 내면의 인격을 통합해야 한다는 것이 융의 아니마. 아니무스 가설의 골자이다. 남자는 남자다움을 배우는 동시에 이에 맹목적으로 집착하지 말고 내면의 여성적 감성(感性)을 키워 나가야 하고 여자는 여자다움을 배우더라도 마음속의 남성성 -- 로고스(Logos), 곧 판단하는 힘과 지혜를 발전시켜야 한다.

남성의 아니마는 '기분'으로 표현되고 여성의 아니무스는 '생각' 또는 '의견'으로 표현되는데 아니마가 미숙한 상태에 있으면 앞에 예를 든 남자처럼 '짜증'과 '변덕스런' 경향을 나타낸다. 여성의 미숙한 아니무스는 폭발적인 공격성과 따지는 버릇을 가지고 있다. 이런 때 여성은 경직된 의견과 논리로 남성을 공격하며 남성의 미숙한 아니마는 이런 여성의 따지는 말버릇을 가장 싫어하고 이에 상처를 입는다.

아니무스는 '다수의 의견'이라고도 한다. 그 의견은 보편 타당하여 이론의 여지가 없다. 미숙한 아니마는 감상적인 분위기에 머물러 있으려고 한다. 여성의 아니무스는 그런 흐리멍덩한 남자를 용서할 수 없다. 그러니 미숙한 아니마의 소유자에게 여성의 아니무스가 논쟁을 시작하면 남성은 기겁을 해서 도망가거나 조금 대응을 해보다가 궁지에 몰리면 화를 버럭 낸다.

부부싸움을 반복하는 사람들, 우리는 성격이 안 맞는다고 하는 사람들을 자세히 보면 무의식의 미숙한 아니마와 미숙한 아니무스가 서로 자극하고 서로 상처를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이들의 과거 생활사를 보면 서로 상대방에게 둘도 없는 이상적 남성상과 여성상을 보고 결혼한 경우이다. 그런데 그들이 서로 모습에서 본 그 이상적인 남성과 여성상은 또한 바로 그들 자신의 아니무스, 아니마의 인격상의 일면이었던 것이다. 아니마나 아니무스는 그 용어의 뜻이 말하는 것처럼 매우 깊고 다양한 의미를 갖는 원초적 상징으로 표현된다. 그것을 자세히 설명하기에는 이 간단한 계몽서로는 부족하다. 아니마는 창녀에서 성녀에 이르는 여러 측면을, 아니무스는 타잔과 같은 육체적 영웅에서 간디와 같은 지혜로운 자에 이르는 여러 발전단계를 보여주고 있다.


아니마는 인류가 여성에 대하여 체험한 모든 것의 침전이고 새와 사슴, 해와 달과 같은 자연의 상징으로도 표현된다. 아니마. 아니무스를 발전시킨다는 것은 그림자를 살리는 것보다 더 어렵고 엄청난 창조적 작업이다.


남성이 사회에서 요구하는 역할에만 맞추지 말고 정서적인 취미를 익히고 작고 섬세한 것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여성이 여성다움에 머무르지 말고 공부하며 일함으로써 생각하는 힘을 기를 때 남서은 보다 깊은 공감능력과 안정된 정서를 지닌 존재로, 여성은 따지는 여자에서 지혜로운 여성으로 한걸음 더 다가가게 될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찾아본 아니마와 아니무스


• 이성에게 느끼는 사랑의 감정 (첫눈에 반하다)

• 젊은 청소년들의 ‘오빠부대’ 혹은 ‘누나부대’

• 돈을 밝히다 / 알콜중독 : 이는 물질에 대한 아니마∙아니무스의 투사라 할 수 있다.

• 병리현상 : 애정 망상증

• 예술가의 작품 : 자신의 아니마 아니무스를 작품속에 형상화 시킴

• 동성애자 : 그들의 아니마∙아니무스의 강한 표현


아니마 아니무스의 내용과 성격


● 아니마 : 의식화하기 쉽지 않은 내용.

  ○ 꿈속에 나타는 황홀한 감동을 주는 이름 모를 여인, 어둠의 베일에 싸인 귀신같은 노파, 청순한 소녀의 상

  ○ 영원으로 향하는 이념에의 열정, 개인적인 성격

  ○ 미분화 상태

    • 폭발적 분노, 여성화된 요변스럽고 변덕스러운 남자

    • 분방한 추측과 질투로 부인을 괴롭히는 남자의 경우 완전무결한 호남

  ○ 잘 분화된 아니마는 창조적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 아니무스 : 복수의 성격, 다수의 재판관, 권위자들의 집회


  ○ 굽힐 수 없는 당당한 이성적인 판단

  ○ 미분화 상태

    • 따지는 버릇.

    • 자기의 생각이 정담함을 믿고 이론을 제기할 틈을 주지 않는 확고부동한 의견의 형태

    • 자기의 의견을 증명하기 위한 궤변.


  ○ 잘 분화된 아니무스는 지혜의 원천

→ 결국 아니마는 비합리적인 감정이며 아니무스는 비합리적인 의견


● 원형의 예

- 샤만 Shaman (영혼의 인도자, 동자, 신의 사자) : 아니무스 원형

- 성오거스틴의 어머니, 맹자의 어머니, 율곡의 어머니 : 아니마 원형에 해당


● 아니마 ∙아니무스를 소재로 한 미디어


영혼의 줄리엣트 (GIULIETTA DEGLI SPIRITI)

* 줄거리

인간 영혼의 미지 세계로의 영화적 탐험으로 가는 "줄리에타에 대한 영화이자 줄리에타를 위한 영화"이며 그녀의 심령론에 대한 편향성을 다룬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 감독의 전기에 이어 이제는 그의 부인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결혼한지 15년이 되는 어느 부인은   그녀의 남편을 속여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줄리에타는 열등 의식적 콤플렉스에 괴로워한다. 그녀는 아름답지도 않고 성적으로 매력적이지도   않다. 영화가 시작되고 몇몇 사람들이 영적 교류를 위해 둥그렇게 모여    앉는다. "너는 아무 쓸모없는 인간이다. 그리고 아무런 의미도 없다. 아무에게도" 그 자리에서 줄리에타는 이 말을 듣고 정신을 잃는다. 사회, 카톨릭적 교육, 소시민적인 관습은 결혼 후에 그녀의 역활을 축소 시켜 버렸다. 남편의 외도를 알아차렸을 때 그녀는 생존의 기반을 잃어버린다.

 이 작품은 "치열한 분석"으로 부인과 가정주부에 대한 사회적 정의의 범주를 넘어선 곳에서 고통스럽게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나서는 한 인물을 추적한다. 줄리에타는 몽환적인 어린 시절의 체험에 휩싸인다. 그녀는 수도원 부속학교의 여학생 시절 연극 공연에서 순교자 역할을 맡았었는데 이것은 그녀의 뇌리에 깊이 박힌 끔찍한 체험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심령심리학, 동방적인 구원론이나 정신분석(한때는 계몽의 도구였으나 오늘날 미신의 현대적 변형으로 간주되는) 같은 미신적인 것에 마음이 쉽게 끌렸다.

"희미해져서 가시적인 영역을 넘어서는 현실을 표현하는 것이 나에게는 큰 관심사다"

악령은 그녀를 사로잡는다. 그녀에게 초감각적인 현상들과 그로테스크한 꿈의 세계가 서로 교차한다.

"중대한 비밀은 현실에서 자발적으로 실현된다"

영화에서 이 말은 펠리니가 묘사하려고 했던 "여인의 자기 해방"이었다. 그러나 그는 긍정적인 전환을 신뢰감 있게 전달하지 못했다. 마지막 영상은- 줄리에타 얼굴의 웃음, 빛이 스며나오는 소나무 숲, 이에 배경음악이 깔리는 서커스 음악- 그가 곤경으로부터 모호하게도 재빨리 빠져 나올 때 사용했던 잘 알려진 요술 같은 속임수로 작용하고 있다.


영화 <결혼 피로연>은 미국인 사이먼과 그의 동성 애인이며 부유한 부동산 딜러인 대만인 위동의 동성연애에 대해 약간의 유머를 가미하여 동양적인 정서로 그린 작품이고, 영국영화 <풀몬티>는 동성애가 중반에 잠시 언급되고 있다. 이 두 영화는 두명의 동성연애자들 사이의 남성적, 여성적인 역할이 불분명하지만, 여성의 동성애를 소재로 한 <바운드>는 여성적인 바이올렛과 남성적인 코키의 동성애를 매우 에로틱하면서도 저질스럽지 않게 연출해낸 작품이다. 그리고 남성의 동성애 영화인 <버드케이지>에서는 게이바를 운영하는 아만다 콜먼은 남편의 역할을, 클럽의 스타인 앨버트는 아내의 역할을 하고 있다. 스위스의 심리학자이자 정신병학자인 칼 G. 융(Carl G. Jung)은 동성애에 대해서 무의식 속에 있는 여성적 성향인 ‘아니마’와 남성적 성향인 ‘아니무스’에 주목했다. 보통 남자, 여자라고 하면 외면적인 성향을 나타내지만 내면에는 반대 성향의 인격요소가 있다는 주장이다. 남자에게는 아니마가, 여자에게는 아니무스가 내면에 있어서 상대에게 투영될 때 이성애를 느낀다는 것이다. 그런데 동성애자들은 자기 자신을 내면의 아니마나 아니무스와 동일시함으로써 동성에게 끌린다고 설명한다.


 

 • 제목 : 꽃과 토르소

 • 작가 : 피터 블룸

 • 내용 : 가슴을 드러낸 것으로 여성이라는 것을 부정 할 수 없음에도 그녀의 각진어깨, 팔, 엉덩이 선으로하여 어쩌면 ‘그녀’가 아닌 ‘그’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일어난다.

  러시아 태생의 미국작가 피터 블룸은 그의 초기 작품에서는 초현실주의적스타일을 내포하지만 꿈과 환상에 대한 몽환적 표현과 비현실성을 바탕으로 한 초현실주의에 관여하지 않고 일상적 삶에 근본적인 관심을 가졌다. 반면에 그의 후기작들에는 점차 리얼리즘 성격이 짙어지지만 작품 ‘꽃과 토르소’과 같이 단순한 사실성 이외에 복잡한 알레고리를 형성하기도 한다. 얼굴이 잘려나간 인물의 토르소에서 느껴지는 성별의 모호함을 감추기라도 하듯 꽃은 화려하게 클로즈업 되어 있고 다소 어울리지 않는 풍경으로 얻어낸 공간감으로 더욱 알 수 없는 세계로 이끌리고 있다.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투사를 지닌 이성과의 결합은 매우 이상적이지만 개인의 안과 밖에서 남성적인 힘과 여성적인 힘이 조화롭게 상호 작용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했던 융의 이론이 블룸의 작품 앞에서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 제목 : 무제

  • 작가 : 루이즈 부르주아

  • 내용 : 무제’에서 보여지는 남성과 여성의 신체적 혼성 묘사는 여성의 남성성(아니무스)과 남성의 여성성(아니마)이 동시에 공존하는 인간으로서의 우선적 이해와 함께 꿰매거나 붙이는 과정을 통한 자신의 트라우마(정신적외상)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있다. <펌>

출처 : 오또기는 넘어져도 하늘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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