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정계는 어지러웠다. 유신에 저항하는 민중들의 궐기를 진압하느라 정부는 진땀을 뺐었고 마침내 철권의 통치자는 가장 가까운 측근으로부터 총탄을 받고 쓰러졌다.
갑작스런 권력의 진공에 국민들은 막연한 두려움에 떨었다. 그 공백을 서서히 메워나간 주인공들은 정치군인들. 암담한 나날들이 중첩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조훈현은 그 혼돈의 어둠 속에서 찬란한 개인사를 써나가고 있었다.
제3회 기도문화상 5개 부문 중 최우수기사상, 최다승기록상, 연승기록상, 승률1위상을 휩쓸어버린 거였다. 서봉수의 명인성(城) 하나만 제외하고 중원의 모든 성을 장악한 조훈현.
관철동 사람들은 그 파천황의 기세를 지켜보며 불길한 예감에 몸을 떨었다. 한국바둑계의 두께가 아무리 얇다해도 한 사람의 전횡(專橫)은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조훈현의 독재를 막아야 하는데...... 서봉수 이외에는 대안이 부재했다. 결정적일 때 괴력을 발휘하는 서봉수 명인도 조훈현과의 상대전적은 시간이 흐를수록 눈에 띄게 벌어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조만간 큰일이 벌어지고 말 것 같은 1979년.
여자 복은 없었던 황태자
어느 날 조훈현은 여자를 만났다. 결혼을 전제로 만난 파트너였다. 육촌 조카딸 유기숙이 대학동창인 친구를 소개한 것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정미화(鄭美和).
용인 출신으로 수원의 동남보건대학에서 식품영양학을 전공하고 고향의 제일약품에서 영양사로 근무하고 있는 처녀였다. 농담 비슷하게 던진 조카의 중매알선이 갑작스럽게 현실로 진행된 것은 조 국수의 나이가 결혼적령기를 살짝 웃돌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확고부동한 국가대표 프로기사로서 활동하려면 아무래도 가정을 갖고 안정적인 생활을 하는 게 필요했다. 주변의 친지들은 그렇게 우연히 찾아온 기회를 성사시키기 위해 자꾸 조훈현을 닦달했다. 그 해 봄날 롯데호텔 커피숍.
두 사람은 수줍은 얼굴로 처음 맞선을 봤다. 남자는 여자의 첫인상이 순진하다 느꼈고, 여자는 남자가 날카롭다는 인상을 받았다.
남녀는 한달 뒤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별다른 대화 없이 그냥 인상만 확인하고 헤어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미화는 조훈현이 뭘 하는 사람이고 얼마나 유명한 사람인지 전혀 알지 못한 상태였다.
조훈현은 생애 처음 만난 여자에게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독특한 성장환경 탓에 여지껏 여자를 가까이 대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연애가 바둑이라면 아마도 카사노바 뺨치고 돈환을 엎어 치는 플레이보이였으리라. 치밀한 수읽기를 바탕으로 성동격서, 도남의재북(圖南意在北)으로 치고 빠지며 능수능란하게 데이트를 주도했으리라.
그러나 그는 숙맥이었다. 자기를 표현하는데도 서툴렀고, 상대를 칭찬하는데도 인색했다. 그들은 그렇게 다소 어색한 월간 데이트를 계속 이어갔다. 한달에 한 번 롯데호텔 커피숍에서 의무적으로 만나 관성적으로 인사했으며 관례적으로 식사를 함께 하고 헤어졌었다.
운명적인 파트너라는 인식이 누구에겐가 스며들어 온 것도 아닌 것으로 필자는 판단한다. 단지 어눌하고 순진한 두 사람은 결혼이라는 명제를 쉽게 풀어 가는 해법은 찾지 못하고 그저 상대를 배려해서 다음 약속을 하는 소극적 데이트를 반복했던 것 같다.
당시 조훈현은 주말이면 산행을 빠트리지 않고 즐겼었다. 그래서 정미화를 만난 이후에는 곧장 산으로 가곤 했었다. 그러다 보니 화제도 산 이야기가 자주 등장했다. 정미화는 ‘이 사람이 나보다 산에 더 관심 있나보다’ 하는 섭섭한 생각을 품을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의 사건이 발생했다. 그 것은 다름 아닌 ‘전화사건’- 모처럼 조훈현이 정미화의 집에 전화를 걸었는데 수화기를 든 사람은 미래의 장인 정운영(鄭運永)씨.
그날따라 무슨 일로 심기가 극도로 불편해있던 빙장(聘丈) 어른은 맏딸 정미화를 찾는 청년의 음성에 왈칵 역정을 내고 만다.
“자네 누군데 미화를 찾아?” “네, 저는 조훈현이라는 사람입니다.” “조훈현이 누구냐구? 일 없으니까 끊어!” 빙장은 그렇게 매몰차게 수화기를 던져버렸다.
옆에 있던 정미화는 황당해서 말도 제대로 못하고 신음을 꿀꺽 삼켰다. 조훈현은 기가 막혀 한참동안 수화기를 쏘아보았다.
“세상에 이런 경우가 어디 있담!” 가만 생각해보니 문제가 많은 만남이었다. 여자가 집안에 이야기를 하지 않고 나를 만나고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렇지 않고서야 딸과 사귀는 남자한테 어찌 빙장어른이 이처럼 모욕을 줄 수 있단 말인가. 자존심 빼면 쓰러지는 조훈현은 그 순간 마음 속으로 결별의 획을 주욱 긋고 말았다.
“끝이다!” 그런 해프닝과 관계없이 두 사람의 맞선에는 여러 친지들의 관심이 얽혀 있었으니 그 무렵 등장하는 사람이 정미화의 외사촌 오빠. 그는 공군 출신으로 조훈현의 존재를 익히 알고있는 인물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만난 커플
그 때 외사촌 오빠가 정운영씨의 특명을 받고 조훈현을 탐색하기 위해 동행했는데, 그 자리에서 그는 전우 조훈현에게 다짜고짜 사랑에 관한 훈수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바둑에 관해서는 국보급인 조훈현이 사촌동생과 맞선을 보고 있다니 이게 웬 떡이냐 싶었던 것이다.
한편 조훈현은 느닷없는 인물의 따뜻한 훈수에 혼란을 겪고 있었다. 사실 그 자리는 결별을 선언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 그런데 여자의 사촌오빠라는 사람이 달콤한 버터를 발라주고 있었으니 여간 헷갈리는 게 아니었다.
도대체 정씨네 집안의 의중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아버지는 매몰차게 전화를 끊고 오빠는 결합을 위해 애를 쓰다니 좀처럼 앞뒤가 맞지 않는 수순(手順)이었다. 그런 혼란으로 인해 두 사람의 데이트는 가까스로 위기를 넘기고 다음 단계로 이어진다.
(예고)
본격적으로 무르익어 가는 두 남녀의 사랑. 마침내 정운영씨는 사윗감을 보기 위해 딸과 함께 상경합니다. 그에게는 맏딸 정미화가 무엇보다도 소중한 존재.
그래서 조훈현을 여러모로 재보다가 집안 어른에게 꾸중을 듣습니다.
“이 사람아 재고 자시고 할 게 뭐 있어. 그런 인물이라면 냉큼 딸을 줘야지!“
그런 사연으로 순진남과 순수녀의 결합이 이뤄지게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