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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고싶습니다
아방가르디즘(Avantgardism) : 대개 비타협주의적인 성격을 띤 예술적인 발전의 전위이며, 하나의 저항을 의미한다. 반 전통주의적이고, 개혁적이며 새로운 예술을 추구하며 양식상의 아무 속박도 받지 않는다.
아방가르드, 전위 前衛, 전위주의 前衛主義
AVANT-GARDE
원래는 최전방에 위치한 군대를 가리키는 군사 용어인 아방가르드는 19세기 프랑스에서 혁신과 실험을 중시하는 새로운 기류를 반영하여 예술운동에 적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방가르드와 가장 통상적으로 연관되는 것은 아마도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전반의 모더니즘(MODERNISM)일 것이다. 1939년의 영향력 있는 에세이 「아방가르드와 키취」에서 클레먼트 그린버그는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아방가르드라는 용어를 썼다. 그린버그는 의도적으로 난해하고 때로는 사람을 당혹시키는 모더니즘 시대의 혁신적 작품과, 접근하기는 훨씬 수월하나 품질은 떨어지는 대중문화(mass culture)의 산물을 구별했다. 1930년대의 좌파적 분위기의 산물인 그린버그의 에세이에서 아방가르드가 취한 서로 다른 많은 형식들을 관통하는 통합의 실이 있다면 그것은 반(反)부르주아의 자세이다.
이렇게 보면 많은 모더니즘 예술의 형식 실험은 비즈니스 사회의 가치들에 대한 거부와 연결된다. 그런데 보다 근자에 페터 뷔르거, 안드레아스 후이센 같은 이론가들은 아방가르드와 모더니즘의 구별을 주장했다. 모더니즘은 일차적으로 자기 지시적인 유미주의(AESTHETICISM)를 특징으로 하는 반면, 아방가르드는 대중문화의 요소를 예술작품에 포섭하거나 아니면 특정한 정치적 프로그램을 추진함으로써 예술과 삶의 구분을 철폐하려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처럼 정치성을 표나게 중시한 결과 프랑스의 초현실주의(SURREALISM), 러시아의 구성주의(CONSTRUCTIVISM)에서 그러했듯이 아방가르드와 노동계급운동 사이에는 때때로 연계가 있었다. 계통이 아주 다른 그 밖의 비평가들은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시대에 들어 모더니즘이 쇠퇴하고 총괄적인 미디어 문화가 발흥하면서 엄정한 의미에서의 아방가르드는 소멸했다고 주장했다.
전위예술 / 아방가르드 ( 前衛藝術 : Avant-garde Art )
20세기 초 프랑스와 독일을 중심으로 자연주의와 고전주의에 대항하여 등장한 예술운동이다. 전위(아방 가르드:avant-garde)란 본시 군대용어로, 전투할 때 선두에 서서 적진을 향해 돌진하는 부대의 뜻이다. 이것이 변하여 러시아혁명 전야 계급투쟁의 선봉에 서서 목적의식적으로 일관된 집단으로서의 정당과 그 당원을 지칭하게 되었다. 그것이 이윽고 예술에 전용되어 끊임없이 미지의 문제와 대결하여 이제까지의 예술개념을 일변시킬 수 있는 혁명적인 예술경향 또는 그 운동을 뜻하기에 이르렀다. 러시아의 화가 칸딘스키는 그의 저서 《예술에 있어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1912) 속에서 ‘정신의 3각형’이라는 비유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전위미술의 선구적인 정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 의하면 시대의 정신생활이 형성하는 3각형 속의 저변에는 광범위한 대중이 있고, 정점에는 고독하고 이해받지 못하는 예술가가 있다. 그런데 이 3각형 전체가 눈에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앞으로, 위로 조금씩 움직이고 있으며, 오늘 고독한 정점에 있는 예술가의 예감에 지나지 않던 것이 내일은 지식인의 관심사가 되고 모레는 대중의 취미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예술가는 시대의 통념과 절연하여 ‘정신의 내적 필연성’에 따름으로써 다음 시대를 창조해내는 것이다. 그런데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일어난 다다이즘은 여러 의미에서 예술의 한계를 타파하고 단순한 물체도 행동도 하나의 관념으로 일관할 때 예술작품이 된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여기에서 칸딘스키의 ‘정신의 3각형’은 역전하여 예술가는 기성의 통념을 파괴하고, 흔히 있는 물체나 우연한 행위와 구별할 수 없는 지점까지 개아(個我)를 추구하였을 때 비로소 미지의 영역을 개척할 수 있는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러시아·헝가리·독일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났고 그 후 각국에서 프롤레타리아 예술운동이 전개되는 가운데 정치혁명과 예술혁명의 관계가 끊임없이 논의되고 전위예술의 개념은 널리 퍼졌다. 다다·미래파·구성주의운동이 그 초점이 되면서 이윽고 추상예술과 초현실주의가 전위예술의 2대 조류를 이루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기성예술에의 반항이나 혁명정신 그 자체가 대중사회의 다양한 풍속 속에 확산하여 전위예술은 특정 유파나 운동에 그치지 않고 첨단적인 경향의 총칭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유럽 미술에서 변혁적이며 급진적인 의욕과 운동으로 주도적·전위적 역할을 한 쉬르리얼리즘과 추상미술은 주로 전위미술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프랑스의 쉬르리얼리즘 운동은 그들의 기관지의 제명을 《초현실주의 혁명》, 《혁명에 봉사하는 쉬르레알리슴》등으로 붙여 좌경한 일도 있었다. 전위미술은 이와 같이 기성의 예술개념이나 전통적인 모든 가치와 결정적으로 대결하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으며, 다다이즘적인 백지적 환원작용(白紙的還元作用)을 내포하고 항상 전진적·유동적인 것으로서 특정한 단일양식이 아닌 추상적·절대적·순수성·전체성·초현실적·기록적·경이성· 의외성·도발성 등 갖가지 특징과 성격을 전개하면서 특히 기성 예술 장르의 구별을 초월하여 확대되어왔다.
전위라는 말의 기원과 그 사용은 포찌올리 (R.Poggioli)의 [ 전위의 이론] 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 말은 스페인 문화와 스페인-미국(Spanish-American)문화에서 아주 빈번히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토레 (Guillermo de Torre) 가 이 말을 문학에서 일어난 전위적인 여러 운동들과 그 현상을 연구하는 책의 표제로서 이용하고 있는 것은 상당한 통찰력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제트 (Ortegavy Gasset) 즉 전위 일반의 문제에 직면하여 그것을 논의하려 했던 아마도 최초의 사람인 가제트는 비록 특수한 관점에서 이기는 하지만 그 말을 피하고 대신 '비인간화 예술'. '추상예술'. 혹은 '젊은 또는 참신한 예술' 이라는 말을 더 즐겨 쓰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그가 한편으로는 이 운동의 극단적 주지주의를 강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운동이 새로운 세대의 출현과 일치되고 있는 현상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이 말이 보다 깊이 착근을 하게 되고, 보다 잘 적용되었던 풍토는 다른 어느 나라에서보다도 불란서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그것은 불란서인의 경우에 있어서처럼 예술과 문화를 특히 그 사회적 관점으로부터 바라보려는 경향의 문화적 전통 속에서 보다 생기를 얻을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독일에서의 경우는 이 말의 라틴어적 성격 때문에 '신낭만 (Neu-Romantik) 이라는 말을 더 즐겨 사용하고 있었는데서도 그러한 사정이었음을 짐작할 수가 있는 일이다. 구라파 낭만주의의 극우로서 이 독일적인 대안이 최소한 잠재적으로는 전위의 역활을 떠맡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말의 사용이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영국과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그 명칭이 고정되어 있지 않은 채, 때로는 불어 그대로 ' avant-garde' 로, 때로는 'vanguard' 나 'advanced guard' 라는 영어로 쓰여지고 있다. 실제로 영-미 비평에서 이 말이 사용될 때라면 그것은 주로 불란서의 문학과 미술 자체에 국한되어 있거나 혹은 그로부터 영향을 받은 어떤 국제적인 예술 현상에 대해서이다. 그런 중에 이 말은 불란서의 지성 곧 정신적인 갤리시즘 (Gallicism) 의 한 표본인 것처럼 간주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들 영-미의 예술 속에서 전위적이라 할 것들이 발전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현재의 뉴욕은 그러한 예술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하고 있는 중임을 상기하면 좋을 일이다.
순전히 문자적이라든가, 언어적 입장에서 말할 때 '전위예술' 이라는 용어를 갤리시즘의 한 경우인 것처럼 다룬 이 말의 현대적 어법과 의미는 -비록 그 기원이 확인되기 쉬운 성질의 것이 아니기는 하지만-분명 불란서 인들의 소산이요 실제로는 파리쟝들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이 우리 시대의 예술을 특징적으로 규정하는 데 적용되기 훨씬 전에 그것이 다른 것으로 사용되고 있었음은 지극히 흥미로운 일이 될 것 같다. 왜냐하면 애초 이 말은 예술적이기 보다 정치적인 관심을 가지고 색다른 운동을 전개하고자 했던 사람들에 의해 사용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예술은 곧 사회의 표현이며, 가장 진전된 사회의 경향을 드러내준다. 그러므로 예술이 시동자로서 그의 고유한 임무를 가치 있게 성취하고 있는지, 또한 예술가가 진정으로 '전위'의 예술가인지 아닌지를 알기 위하여 우리는 인간성이 어디로 진행되고 있는 중인지, 또 인류의 운명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행복의 찬미와 함께 음울하고 절망적인 송가를 불러라… 우리 사회의 바닥에 깔려 있는 잔인함과 부패함을 폭로하자."
이 문맥 속에서 그는 이 '전위'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위의 인용문 중 마지막 두 구절은 라베르당의 글이 예언적이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심지어 예술계에 있어서 마저 전위의 상이 애초에는 예술적이 아닌 정치적인 급진주의 (Radicalism) 의 이상에 종속되고 있었던 것" 임을 보여 주는 '최초의 가장 중요한' 인용구절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전위'는 애초 예술적이 아닌 정치적 급진주의 이상에 종속되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 말이 무정부적이고 극단적인 자유주의 사도들에 얼마만큼이나 친밀했었는가 하는 사실은 후에 [L'avant-garde] (1878)라는 표제의 정치적 선전을 위한 한 간행물이 출판되었다는 사실에 의해서도 입증되고 있다.
1870년대에 있어서 이 말이 정치적인 문학 밖에서 사용되는 경우를 찾기란 심히 힘드는 일이 되고 있으며, 아마도 그 전 1860년대에 있어서 라면 거의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사실을 밝혀줄 수 있는 한 사례로서 보들레르 (Baudelaire)의 기록을 예시해 볼 수가 있다. [Mon coeur mis a' nu] (1862~1864) 라는 사적인 기록 속에서 그는 이 말을 염두에 두고 조롱조로 '전위적인 문학인들' 이라고 쓰고 있음을 주목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군대식의 비유를 즐겨 쓰는 불란서 인들의 취향을 증명해 보일 목적으로 기술된 일련의 긴 사례들을 열거하는 과정의 마지막 대목에서 나오는 말이다. 그 같은 말을 조롱하고 있다는 바로 이 같은 사실은 그것이 이미 기존의 용어로서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냉소적이었던 보들레르를 통해 보더라도 '전위적인 문학인들' 이란 말은 예술적이라기보다 정치적인 작가, 다시 말하면 급진주의적인 작가들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보들레르와 같은 시인이나 그 밖의 예술가들에게 있어서 이 말은 그 자체가 잘못된 비유였다는 점에서 뿐 아니라 그에 함축된 의미 때문에 조롱적인 질책을 면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프러시아 전쟁과 콤뮨 (Commune)의 대두와 그 진압으로 대변되는 국가적 위기와 사회적 동요를 극복한 듯한 1870년 이후의 몇 년간을 통해서 이 말은 서서히 예술적인 별도의 의미로서도 사용되고 있는 변화된 면모를 찾을 수 있게 된다. 여전히 사회적-정치적 전위를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두 전위의 병행이라 할 현상이 나타났으며, 이 같은 병행이 가능했던 것은 잠시나마 두 전위들이 우연히 기존의 낭만주의적 사고와 1830년과 1848년 사이의 세대에 의해 확립된 전통을 새롭게 하는 입장에서 연합전선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후자의 세대는 문학적이었을 뿐 아니라 정치적이었다. 따라서 전세대의 보수주의 대신 이세대의 교리는 민주적 이상이 되어왔고, 심지어는 극좌의 이상이 되어 오기까지 했다.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이른바 세기 말의 문학-예술의 여러 운동들이 정치적인 태도를 취해야 하는 운명에 놓이게 되면서 -'소름 끼치는 해' 를 경험하고 , '해빙' 에 가담했던 세대에 게는 - 정치적 좌파와 문학적 좌파 간의 제휴는 아주 분명한 것이었고 중요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정치적 급진주의와 예술적 급진주의 간의 이 같은 제휴, 두 전위들간의 이 같은 연합은 한동안 지속되었다. 그것은 [La revue indepe'ndent] 이라는 표제의 조그마한 현대 문학지의 첫 권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것이었다. 1880년경에 창간을 보았을 이 잡지는 정치와 예술의 두 방면에서 이른바 두 전위적인 대변자들을 동류의 관계로 결합시켜 놓고 있는 아마도 최후의 기관지이다.
그 이후 급작스레 두 전위들의 결별이라고 할 현상이 눈에 띄게 진행되었다. 그것은 불란서 인들이 그렇게 부르기를 좋아하는 '황금시기'의 출발과 더불어 결별은 더욱 촉진되어 갔다. 오랫동안 찾아온 평화와 번영과 예술적인 갈등 속에서 새로운 예술의 탄생으로 인도되는 이 황금의 시기란 1885년부터 비롯되는 약 30년간에 걸친 시기임을 말한다. 그리고 바로 그 해 5월 , 낭만주의 거성이었던 위고 (V. Hugo)의 성대한 장례식이 있었다는 사실은 어떤 점에서 예술에 있어서의 새로운 진행이 곧 전개될 것임을 암시해 주는 것이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이후 그처럼 짧은 시일 내에 그처럼 많은 주의(ism)와 유파와 그룹들의 대두와 몰락을 체험한 시기는 아마 다른 어느 역사적 시기를 통해서도 찾아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듯, 1885년을 전후로 해서 예술가들은 각기 한 시대의 종언과 새로운 시대의 출발을 감지하면서 마치도 신호등을 기다렸던 사람들처럼 방향을 바꾸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1886년엔 인상주의자들의 마지막 그룹 전시가 있었고, 고갱과 반 고호는 아를르에서 함께 작업을 하는 가운데 인상주의를 떠난 새로운 회화의 길을 개척하고 있었다. 음악의 방면에서 바그너의 인기는 최소한 1900년대까지 상승세를 보이긴 했으나, 1883년에 있은 그의 죽음은 불란서의 음악을 독일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는 데 커다란 전기를 마련해주게 되었고, 샤브리에 (Chabrier)와 포레 (Faure')의 작품들이 곧 뒤를 잇기 시작했다. 또한 문학에서는 베르레느, 랭보, 특히 말라르메의 실험적인 작업이 마침내 상징주의라는 이름으로 귀결된 것 역시 그때쯤 이였다. 예술활동의 이와 같은 전개와 더불어 그 당시까지 예술현상에 단지 비우적으로 사용되어 왔던 '전위'라는 말이 당시의 예술적 활동 바로 그것을 지시해 주는 말로서 전의케 된 것이다. 비로소 '전위'라는 말이 정치적으로 이용되어 왔던 이제까지의 제일의 의미가 그로부터 완전히 탈거 되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전위의 예술과 문학'이라는 표현이 그로부터 광범하게 유행되게 되었다. 이처럼 불란서 언어와 문화의 배경 속에서 잉태되어 물려진 이 말은 불란서 국경을 넘어, 서서히 사상의 국제시장에로 유입되면서 오늘날 보는 것 같은 현대 예술의 어떤 특징을 말하는 일반 용어가 되기에 이른 것이다.
전위와 비슷한 내용과 의의가 있을 용어나 개념들이 사상의 역사 속에서 또 다시 발견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지극히 힘든 일인 것 같다. 형식적인 입장에서 비슷한 사례를 찾고자 해도 기껏 낭만주의나 혹은 고전주의적 전통이 와해를 겪게 되는 전 낭만주의적 시기 이상으로까지 소급되기는 힘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전위예술에 있어서의 '전위'라는 말은 형식적으로나 실질적으로 참신함을 지니고 있는 말이며, 그러므로 예술사의 진행 속에서 진정으로 예외적인 현상을 가리켜 주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현대예술은 곧 '전위예술'이요, 전위적인 성격의 예술이라는 것이다.
전위예술 / 아방가르드 ( 前衛藝術 : Avant-garde Art )
전위예술의 전위의 성격은 무엇이며, 또 그것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학원(academy)이라든가 학파(school)와 같은 기구의 틀 속에서 성장한 전 시대의 예술과는 달리 운동(movement)의 형태로서 발전된 예술의 진행이었다는 점에서 우선 한 가능한 구분의 근거가 마련될 수 있다고 본다. 설립의 근거와 목적, 그리고 그 진행과정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듯 아카데미는 확립된 이상-곧 보편적 자연의 모방과 그러한 이상의 실현을 위한 절차-곧 규칙-와, 그러한 이상의 모델이 되고 있는 대가나 전통-곧 고대 희랍과 르네상스-을 본뜨고 답습하는 교육의 장이었다. 고로 어떤 의미에 있어서 아카데미 예술은 역사를 고려하지 않고 시간만을 고려 했던 예술이 아닌가도 생각될 수 있는 일이다. 그런 만큼 그것은 정말로 고전적이고 정적인 예술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낭만주의의 등장은 지극히 의미 있는 일이다. 그것은 어느 누구도 아카데믹하다고 부를 수 없는 문화적- 예술적 출현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그 후로 대두된 대부분의 예술적인 현상들은 그들 스스로 운동으로서 규정되고, 또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고자 했던 것이라고 말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운동의 시동자들은 항상 운동 그 자체 속에 내재된 목적의 입장에서 일하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학교는 지식의 보고로서의 문화의 이념 밖에서는 존재를 생각할 수 없다. 반면 운동은 문화를 증식으로서가 아니라 창조로서, 곧 활동과 힘의 중심으로서 상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어떤 성격의 어떠한 형태로 나타나 활동을 했건 일반적으로 말해 유미주의 신봉자들은 학파의 추종자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전위적인 예술가들이 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아카데믹한 예술의 성격을 이상적 아카데미의 병리인 정체와 달리 새로운 장으로 길을 터 준 운동의 생리 속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운동은 어떤 구체적인 목적에 대해 긍정적 결과를 획득하기 위해 구성된다. 인간의 창의적인 힘의 자각과 그에 대한 확신으로부터 출발되고 있다. 이러한 출발로 인해 전위 예술가들은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기도 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끼리의 좁다란 씨족사회와 비슷한 그룹들을 형성하기도 했다.
현대예술에 성격을 부여한 바로 이들 운동의 계기로부터 제 3 계기가 유도되고 있으니, 운동 바로 그것의 생리 속에 내재해 있는 성향 곧 행동을 위한 행동에의 성향과 역동성 때문에 그것은 적개심을 가지는 사실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적개심의 대상이 되는 일체의 장벽을 부수고 장애를 제치며 그 진행을 방해하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나 파괴하는 일을 서슴없이 해내는 데서 즐거움을 발견하는 이른바 허무주의적인 성격으로 발전한다. 그러한 일의 수행을 그들은 스스로의 임무로 자처하기까지 철저히 수행해 온 것이다. 경우에 따라 이 같은 허무주의적인 운동은 제어할 수 없는 지점에로까지 인도되기도 했다. 전위예술은 운동이 지니는 이 같은 허무주의적 계기를 제 3의 특징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운동은 이와 같은 파국을 한낱 종언으로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미래에 있을 어떤 성공에 대한 값진 희생으로서 환영하며 수용하고자 함을 발견한다. 운동이 지니는 이 같은 제 4의 양상을 에고니즘 (agonism)이라 부르고 있으며, 전위예술은 이 같은 계기 역시 담고 있다.
전자의 두 계기들은 그들이 행동의 방법과 목적을 확립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위의 이데올로기를 표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후자의 두 계기들은 시간과 역사의 차원을 고려치 않고서는 생각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전자의 두 계기들이 운동의 논리를 이룬다면, 거기에 다른 두 계기가 추가되면서 운동의 변증법이라 할 것이 성립하게 된다. 그러므로 상정한 대로, 현대의 전위예술이 정체의 병리와는 달리 운동의 생리의 입장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전위예술에 있어서의 전위의 개념은 어느 한 예술의 특성 지시해주는 미학적인 개념이 아니라, 역사적인 개념이 되고 있다는 것은 전위예술이 사회학적 사실이라는 뜻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전위예술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고자 할 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 미학적인 의미를 묻고자 하기 전에 일단은 그 사회학적인 의미를 파악해야 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시대적 배경
현대 미술은 모험과 반발과 파괴와 기대의 정신의 입장에서 낡은 것과 새로움이 교차되는 진행이었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수없이 많은 '이즘'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던 예술의 장이 되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어떤 확립된 규범 속에서의 활동을 가능한 한 탈피하려 하고 있고, 또한 가능한 한 무한히 가변적인 본질을 파헤치고 드러내면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계속 문제점들을 제기하는 방향에로 인도해 왔다. 바로 이러한 사실 때문에 그것은 실험에 실험을 거듭함으로써 어떤 공식을 도출해내려는 미학의 입장을 계속 궁지에 몰아 넣어 왔다. 생각해보고, 반성을 해봄으로써 어떤 이해의 단서를 마련해 볼 틈도 주지 않은 채 과거의 부정과 미래를 위한 실험만으로 일관해 왔던 것 같은 인상이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알아보려고 그때 그때마다 열심히 뒤를 좇던 미학은 결과적으로 다양했던 예술의 경향들만큼이나 수다한 예술론만을 낳아주었을 뿐이다. 예술의 다양함과 함께 초래된 이론의 복잡함, 이것이 곧 현대미학의 특징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전위적이라는 이름의 현대미술은 왜 이처럼 실험적인 작업으로 일관되어 왔을까? 고대 희랍시대 이래로 미술에 있어서 서구인들의 제 1의 관심은 무엇보다도 외적 대상, 혹은 외적 세계에 대한 객관적 관심의 표명이었다. 이 대상이란 눈 앞에 보이는 대로의 사물의 외관이기도 했으며, 그와는 달리 초월적 실체이기도 했으며, 이성적으로 파악된 보편적 자연이기도 했으며, 무자비하리 만큼 냉담한 눈을 가지고 관찰된 사회적 현실이기도 했다. 또한 오늘날의 전위 예술가들에게 있어서는 사물자체가 되고도 있다. 그 어느 경우이든 그들 대상에 주관적 채색-혹은 구성-을 가하지 않은 채 가능한 그들을 객관적으로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서구 미술의 일차적 관심은 넓은 의미의 사실주의에 입각해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객관적 관심의 세계가 과학적 지성에 대한 반동의 물결과 함께 낭만주의 이후 현대라는 시기를 통하여 눈에 띄게 약화되어 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으며, 그것은 감정이나 상상, 충동이나 무의식과 같은 내적 세계에 대한 주관적 관심의 표명이 위의 것에 못지않은 강도를 지니고 강조되어 왔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현대 미술엔 외적 세계에 대한 객관적 관심과 내적 세계에 대한 주관적 관심의 두 경향이 거의 동일한 의미와 밀도를 지닌 채 공존해 오게 되었다. 즉 현대미술은 서로 다른 두 기준 곧 합리와 비합리가 공존하게 된 시대의 예술이라는 말이다. 더 나아가 합리와 비합리라는 이분 법을 가지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비의의 세계가 예술이 벗겨야 하는 또 하나의 표적으로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주이기도 하다.
미학사적으로 볼 때 이 같은 가치기준의 이원화, 나아가 다양화현상은 서구예술의 이해에 있어 기본이 되는 두 개념 곧 모방과 영감-혹은 표현-, 제작과 창조라는 사고가 주기적으로 나타나지 않고 시대의 성격에 편승하여 동시적으로 공존하게 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같은 상이한 기준들의 공존형상은 보기에 따라 그에 여러 가지 의미가 부여될 수가 있겠다. 좋은 의미로 해석되는 경우, 그것은 예술에 있어서 기준의 다양화를 초래 시켰고, 따라서 예술활동의 폭을 확대시켜 주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입장을 바꾸면 그것은 다시 기준의 상대화, 나아가 기준의 상실을 초래 시켰다고도 된다. 그러므로 기준의 다양화로서 이해되어야 하건, 기준의 상대화로서 이해되어야 하건 현대예술의 특징은 아마도 그 두 경우 중의 어느 하나에서 찾아져야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현상은 비단 예술분야에만 특수한 것이 아니라는 이 시대의 특징적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기준의 확대로서 이건 기준의 상실로서 이건 대립적인 기준들의 이 같은 공존현상은 정치나 경제, 철학이나 종교 등 모든 방면에 걸쳐 나타나고 있는 이 시대의 특징이며, 그러한 시대의 특징이 예술의 영역에 있어서는 위와 같은 방식으로 나타났을 뿐인 것이다. 이처럼 서로 다른 두 견해가 극단적으로 첨예화되어 대극을 이룬 채 각기 자기가 기준임을 주장하고 나선다고 할 때 우리는 그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수 많은 예술의 경향과 주장들이 난무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예측할 수가 있다. 말하자면 극단을 피하기는 하면서도 어느 한 쪽에 편향되어 있는 많은 경우들이 있을 수 있으며, 내용상으로나 기법상으로 양자를 교묘히 절충 시켜 놓고 있는 여러 경우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그들 하나하나가 마치 이 시대의 예술을 대변하는 기준인 것처럼 거창한 의미를 달고 나온 것이 예컨대 '이즘'들로 점철된 지난 100여년 간의 현대미술의 역사였다.
'전위적'이라는 이름의 현대미술은 흔히 이해하듯 창조라는 곡명의 행진곡을 구가하며 걸어온 축복 받은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어느 분야에 있어서나 주도적 기준의 상실과 마비로 혼미와 방황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되게끔 된 불안한 시대의 상황 속에서 태어난, 그것을 반영하고 있는 예술적 증상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러기에 전시대의 예술이 그 힘을 잃고 있는 이 시대에 예술가로서의 운명을 타고 났음을 자각하게 되었을 때라면 그는 불가피 그것을 회피해야만 했고, 모험의 정신을 가지고 반발과 파괴를 서슴지 않은 중에 어떤 기대를 도모해보게 되었던 것이다.
이같은 현상이 '새로움의 추구'라는 말로 강조되고, '실험'이라는 말로 변호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이같은 실험은 그것이 불확정적이기도 하고 때로는 무의미한 것이기도 해서 그만큼 우리에게는 불안한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달리 생각해 볼 때라면 그러한 현대미술이기에 활동의 장은 무한히 열려 있고 많은 자유가 미술가에게 주어져 있다고도 할 수 있지만 그러하다는 사실은 곧 현대미술가가 따라야 할 분명한 행로 혹은 일반적으로 인정된 기준이 없다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현황과 공통성
M. 뒤샹, J. 케이지, J. 팅글리, R. 라우센버그 그리고 M. 커닝햄 등 다섯 명의 예술가들에게서 나타나고 있는 어떤 특징들을 살펴 보기로 하겠다. 그들은 어떤 그룹이나 어떤 유파도 형성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며, 또 그들 간에 어떤 공통적인 관점이 나누어지고 있지도 않다.
케이지는 작곡가이며, 커닝햄은 스스로 무용가이면서 이론가이다. 이 두 사람은 수년간 친밀한 협조를 하는 가운데 작업을 해왔지만 케이지의 지적 엄격성은 보다 본능적인 작업방식의 커닝햄에게는 전혀 생소한 것이 되고 있다. 팅글리에의 접근에 초점이 되고 있는 파괴의 요소는 때로 다른 네 사람에게도 나타나기는 하나 지극히 귀한 일이 되고 있으며, 뒤샹의 관념의 유희는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분명한 그 반향을 찾을 수 있는 일 이겠으나 그들 중의 어느 누구도 그에게서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사람이라고는 없다. 이처럼 이들 각자에게 그들 특유의 면모가 있음을 인정해야 함에도, 1) 삶과 예술, 2) 예술과 대중 간의 관계에 대한 그들의 기본적인 태도에는 어떤 공통성 혹은 유사성이 있음이 추론 되고 있다. 따라서 그러한 것에 대한 고찰을 통하여 현재에도 진행되고 있는 전위예술의 전위적이라 할 성격의 일단을 검토해보고자 할 것이다.
이들 각자에게 공통적이라 할 것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을 찾자면, 예술이란 일상적인 삶의 반만큼이라도 흥미로운 것도 중요한 것도 아니라는 신념을 들 수가 있겠다. 그러므로 예술엔 고행이 있고 열반이 있다는 예술의 신앙이 이들 예술가에게는 용납되지 않고 있다. 그들에 의하면 자기들의 태도는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대한 향외적으로 정위되어 있지, 결코 그러한 세계에 대한 그들 자신의 반응에 관심을 두는 향내적인 태도로 정위되어 있지는 않다고 한다. 한마디로 사물이나 세계에 대한 주관적인 구성에는 관심이 없다. 오히려 그들은 외부세계 그 자체에서 매혹적이고 놀라운 현장을 발견하고 있다. 이같은 현장을 예술이라는 이름의 자기 구성적 작업을 통해 고정시켜 박물관에 안장 시켜 놓는 일에 그들은 하나같이 불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시종일관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예술과 삶 간에 있는 이 장벽-예술을 위해서도 생활을 위해서도 결코 있지 말아야 할 장벽-을 허물어 버리자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장벽을 무너뜨리려 하는 중에 그들은 전통적인 예술가의 상이나, 그의 제작방식 및 예술의 재료와 예술작품 등에 관한 많은 전통적인 관념들을 뒤엎어 놓고 있다.
예컨대 뒤샹이 잡화점에서 병 건조기를 하나 사 갖고는 거기에 싸인 을 해서, 그것을 라는 작품이라고 선언했을 때, 그는 전통적인 예술가 상의 관점에서 볼 때 이미 많은 것을 내동댕이 친 사람이다. 그 밖의 예술가들에 있어서도 개인의 상상적인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실재에 어떤 의미와 해석의 소지를 구성해 놓는다는 의미의 전통적인 예술가 상에 대한 동일한 불경의 태도가 보여지고 있음은 사실이다. 곧 예술가 그 자신의 정서와 기억과 사고야말로 대상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흐리게 해놓고 있는 장벽이 되고 있다는 신념하에, 이들은 자신들 특유의 방식대로 작품으로부터 개인적인 조작과 자기 구성의 기미를 제거해놓으려 노력하고 있다. 케이지가 자기의 음악을 두고 '음들로 하여금 그 자신이 되도록'하게 한 기도일 뿐이라고 말한 것이나, 라우센버그가 회화에 대한 그의 작업을 '재료들의 결합'이라고 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노력의 입장에서 나온 말들이다.
그러나 언뜻 갖게 되는 생각과는 달리, 자기 자신의 취미나 편견을 극복하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닐 뿐더러 그렇게 하기에는 오히려 교묘한 재간까지 부려야 가능한 일이 된다. 그러므로 위에 말한 다섯 예술가 모두가 어떤 점에서 공통적이라 할 방법들을 개발하고 응용해왔다는 사실은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다. 개인적인 구상을 지양코자 해서 개발된 가장 명백한 대안은 우연이라는 방법으로서, 그것은 20년간이나 케이지의 실험의 기초가 되었던 것이고, 다소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여타의 네 사람들 모두에게도 이용되고 있는 방법이 되어주고 있다. 다음으로, 항시 변모하고 있는 인간의 본질과 그 모습에 접근하기 위해 개발된 방법으로 운동이 있고, 이것은 팅글리의 기계를 닮은 조각과 뒤샹의 초기 작품에서 명백히 보여지고 있으며, 라우센버그의 만화경 같은 캔버스와 케이지의 음악 속에서 은밀히 작용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무용의 경우, 커닝햄에 있어서는 그 미디엄이 움직임이 되고 있는 만큼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처럼 전통적인 예술가 상을 청산하고자 하고 있고, 우연과 운동을 그들의 제작방식으로 이용하고 있는 예술가들이므로, 따라서 예술의 재료에 있어서도 엄청난 변모가 초래될 것임은 당연한 일이다. 이를테면, 커닝햄이 무용에 있어서의 운동들에 대한 개념을 얼마나 확대시켜놓고 있는가를 알면 지극히 도움이 될 것이다. 그에 의하면 어느 움직임이고 무용의 일부가 될 수 있으며, 그래서 그의 무용보는 일상적인 걸음걸이, 달리기 그리고 정지해 서있는 것까지를 포함시켜놓고 있다. 비슷한 입장에서 케이지의 음악은 기존의 '음악적인'인 음조를 벗어나서 도시환경 속에서 '발견되는 음'을 음악에 흡수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여온 것 역시 이미 오래된 일이다. 뒤샹, 팅글리, 라우센버그 같은 조형 예술가들에 있어서는 그들의 작품 속에 눈 치우는 삽이든가, 거리의 간판이라든가, 폐품자에서 줏어 온 조각난 부품들이라든가 하는 것이 수용되고 있다.
이같은 보잘것없는 재료들을 예술가들이 사용해 온 것은 현대미술에 있어서는 별로 새로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두드러진 차이점이 있으니, 그것은 이전의 미술가들과는 달리 그처럼 보잘것없는 재료들을 사용하고 있는 그들의 태도에 있다고 할 것이다. 그 같은 재료들에 대한 오늘날 예술가들이 태도는 어떤 이미지와 심볼 을 위한 그들 재료의 기능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 자체만을 위해 그것을 액면 그대로 수용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범상적인 것을 예술로 구성-변모 시키려는 일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하등의 손때도 묻히지 않은 채, 어떠한 채색도 가하지 않은 채, 우리가 매일 살고 있는 삶 속의 생생한 편린, 그대로를 내보이고자 할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작업은 예술이 아니요 반 예술이라는 빈번한 비난에 직면하게 되지만,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이 사물 그 자체라고 할 때 도무지 왜 예술에 대해 신경을 써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식의 답변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것은 전통적인 입장에서 볼 때, 미적 이단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전문적인 비평가에게서 마저 외면당하기 일쑤이지만, 그러나 그러한 비평가의 노래는 장단이 틀린지 이미 오래다. 그래서 매력을 잃었다고 그들은 말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가꾸어지고 다듬어진 유리상자 속의 인형보다는 추하더라도, 또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것이라 해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대한 관심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많은 예술가들이 실제로 작품 속에 사물에 대한 자기 해석의 구성적 계기를 배제시키고 있는 채 그들의 작업을 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팝아트는 그러한 경향의 한 사례라고 할 수 있으며, 비슷한 구성의 작업인 것처럼 보이지만 전전의 추상과 전후의 컬러 필드 페인팅을 갈라놓고 있는 것도 화가의 그러한 태도 때문이다. 이러한 메아리는 음악-문학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작곡가 중의 한 사람인 블레즈는 그의 모든 작품 배후에 있는 동기를 일컬어 '익명의 추구'라고 말하고 있다. 또 스톡하우젠은 의심할 여지없이 케이지로부터 유도된 작품-즉 음악적이기도 하고 연극적이기도 한 작품-을 무대에 올려 놓고 있다. 이오네스코와 핀터의 연극, 로브그리에의 의해 씌어진 이른바 '신소설'의 경향, 또한 새로운 해프닝의 운동, 오늘날의 실험영화 그리고 무용가들의 무용보 등은 모두가 다 의미 있는 예술, 실재 해석의 예술이라는 관점에 대한 강력한 반발의 면들로서 추진되고 있는 것들이다.
전통적인 예술의 관념에 대한 이와 같은 반발은 그것을 수용하는 쪽의 대중에게까지 어떤 변화를 초래해 놓고 있다는 점이 또한 중요하게 거론되어야 할 것 같다. 즉 작품 속에 개인적인 어떤 의미를, 집어넣음으로써 대중들에게 그것을 전달시켜주려는 대신에 오늘날의 주도적 전위 예술가들의 작업방식에는 대중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작업과정에 직접적이고 능동적으로 관여케 하려는 기도를 보여 주고자 하는 측면이 있다. 의미가 배제된 채 진행되고 있는 작품자체에 그 스스로 가담해서 그 스스로 경험케 하고, 어쨌든 그 스스로 해석케 하자는 의도가 발견되고 있다는 말이다. 사실 이러한 의도가 억지라고 될망정 그것은 그들 주장의 한 귀결로서 논리상의 일관성만은 인정해야 될 것 같다. 왜냐하면 작품에 의미부여를 포기하고자 한 입장에서 그들이 주로 이용한 방식은 우연과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성의 계기가 우연으로 대체되고 동시에 운동 그 자체가 한 요소가 되고 있는 작품을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길은 보는 이의 직접적인 참여의 길 밖에 없다.
전위 예술가들이 의도하고 있는 이 참여는 엄청난 지식이나 주의 깊은 태도가 요구될 필요가 없도록 작품은 어느 점에 있어서나 일상적인 방식이나 재료들로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작품이 진행되는 현장은 때로는 생활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농악의 현장이 집의 마당이나 전답근처의 공터이듯, 일상이 넘실대는 거리일 수도 있고, 지하철 정거장일 수도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예술은 또 다른 형태를 강조하게 되었으니, 그것이 움직임을 미디엄으로 하는 예술을 전면으로 등장시키게 된 것이다.
미학적 논점
그들의 선언에 있어서나 실제에 있어서 예술과 인간의 삶 간에 놓여 있는 벽이 탈거될 수만 있다면 예술은 그만큼 훌륭한 것으로 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바로 이러한 그들의 기본적인 주장이 미학적 접근의 한 단서로서 구실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술은 언제고 삶을 떠나본 적이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양자의 분리에 대한 관념이 강력한 법전으로서 통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관념을 만들어 준 전 시대의 미학적 가정 때문이다. 그것은 이 기본적인 개념이 근대 미학의 형성과 함께 출발된 무관심성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무관심성은 미의 경험에 관련된 개념으로서, 그것 때문에 미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인식이나 도덕 등으로부터 독립된 자기 충족적인 영역을 이루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이와 같은 자기 충족적인 미의 경험과 병행하여 예술작품에는 자기 완결성의 의미가, 예술가에게는 일상적 사고나 요구에 구애됨이 없이 활동하는 자유로운 상상적 창조의 의미가 부여되어 왔던 것이다. 이것이 자율적인 예술이라는 사고의 배경인 것이다.
예술 쪽에서 보면 그 같은 계기들이 예술에 자율성을 획득해주는 것이 될지 모른다. 그러나 관점을 달리하면 그들 계기들은 예술을 삶의 생활권으로부터 단절되고 고립되게 하는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고도 된다. 이러한 고립이 자명한 진리이기라도 한 것처럼 많은 미술작품은 독자적인 회화공간을 가졌다는 표시로 틀 속에 갇혀 있고, 희랍의 조각이나 성당의 벽화들은 공기마저 차단된 유리진열관 속에, 그것도 자연스럽게 안치되고 있다. 그리고 관람자는 그러한 진공 속의 작품에 들어 있을 고고한 무엇인가를 경험하기 위해 당분간이라도 현실과 생활을 잊자는 의미에서 '관조적 태도'라든가 '심적거리'를 취하고 그 앞에 서 있게끔 인식되고 있다. 그런 만큼 예술가는 현실로부터 구할 수 없는 그 무엇-그것이 일종의 지식이든 특수한 감정이든-을 그 속에 투영해 놓기 위해 사물을 재구성하거나, 혹은 상상적 이미지를 창조해야 함을 당연한 것으로 알아 왔다.
최근의 전위 운동은 예술에 대한 이 같은 제 관념들에 대한 적개요 반발인 것이다. 앞서 알아 보았듯이 예술가에 의한 의미 부여는 사물을 옳게 보는 방법을 가르치기 보다는 혼란만 일으킬 뿐 오히려 유해한 것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따라서 작품이 사물 그 자체로 대체되어야 함을 주장한 것이다. 그러한 방향전환의 입장에서 보는 이를 관조자가 아니라 참여자로 되게 한 묘안을 짜내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들 작품 속에 우연의 계기며, 운동의 계기를 궁리 끝에 도입시켜놓게 된 것이다. 실상 예술의 영역에서 일어난 이 같은 전환은 자아가 세계를 구성한다라는 주관적 관념론에 대한 비판이 대두된 현대철학의 경향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현상학 쪽으로부터는 의식의 분석을 통한 삶의 세계 혹은 상호 주관성의 개념이, 분석철학 쪽으로부터는 언어의 분석을 통한 삶의 형식의 개념이 정립되어 예술의 개념에 대한 재해석이 시도되고 있는 중에 그것을 삶의 차원으로 재통합 시키려는 기도를 하게 된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의미야말로 전위 예술가들의 선언이나 활동으로부터 우리가 끌어낼 수 있는 긍정적 측면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점에서 최근의 전위예술은 예술을 삶으로부터 독립시켜, 그것을 다른 종착지로 몰고 가보려 했던 이론과 실제로부터의 철저한 일탈인 셈이다. 이 같은 긍정적인 이론적 축면과는 달리 그들의 활동에 성공이 있을 지, 또는 '예술'이 아니라 '사건'이 있을 뿐이라는 라우센버그의 말 속에 들어 있는 이 사건이 귀중한 것일지, 우스개 꼴로 전락될지 현재로서는 재단키 어려운 중에 그들이 물려 받은 실험정신 만이 수다한 방식으로 계속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아방가르드 미술의 치유적 실천
포스트 모더니즘이 모방이나 풍자를 포용하는 개방성을 가지고 있는 듯 보이지만 원칙없는 현대사회에서 그들만의 고유한 원칙을 지니고 있었던 아방가르드의 예술적 원초성을 상실했기 때문에 포스트 모더니스트의 미적 가치들은 진실로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새로운 삶의 형식들을 포용하지 못한다.
인간 경험의 개혁자, 인간의 피폐한 정신을 자극하여 치유 과정으로 유도하는 아방가르드 미술의 원초성이, 관객의 존재와 경험을 무시하고 총체적으로 예술의 심각성을 부정하는 포스트 모더니스트의 예술적 태도로 상실되었다고 말한다.
몬드리안이 그랬듯이 인간 역사의 불확실성에 대한 대안으로 초월적 예술형식의 창조를 위해 노력하는 작가의 확신과 의지는 예술작품의 치유성을 긍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술이 지닌 본질적 권위에의 의지 없이 표피적 허상을 추구하는 네오 아방가르드는 자기 혁신을 통한 초인정신으로의 승화보다는 세속적인 부와 명성을 좇아 천박성을 드러낸다. 그리하여 그들은 아방가르드 작가들이 미술을 통해 표현하는 자발성과 종합성, 변화에의 의지, 현실과 예술적 감수성의 조화 같은 미학적 균형을 상실해 버린다. 아방가르드 작가들이 가졌던 예술의 치유적인 실천을 통해 자신과 인간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과 믿음은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의 나르시시즘 뒤에 숨어 있는 허무주의적인 퇴행적 세계관과 대비된다.
그러므로 예술이 삶의 비극에서 개인을 해방시킨다고 믿었던 아방가르드의 개혁성은, 이노베이션 자체를 물신화시키고 예술작품을 최고의 세속적인 상품으로 전락시킨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에 의해 변질되어 버렸다. 그들에게 미술은 세속적인 명성과 부를 가져다주는 가장 비세속적인 수단이기 때문이다.
아방가르드 작가들이 노벨티(novelty, 새로움) 혹은 추상을 다양한 스타일에 대한 개방성과 보수적인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개인의 미묘한 저항이 가지는 창조성의 무한한 가능성으로 인식한 반면, 네오 아방가르드 작가들은 세속적 명성과 부를 위해 미학적 사유 없이 노벨티를 이용할 뿐이다.
그러므로 쿠스핏은 재스퍼 존스와 로버트 라우센버그에 기생한 데이비드 살르, 잭슨 폴록과 조셉 보이스에 기생한 줄리앙 슈나벨 같은 네오 아방가르드 작가들의 성공을 무의미하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얻은 작가로서의 명성과 부는 미술의 치유적인 비판성을 상실한 대가이기 때문이다.
아방가르드 미술은 미술사의 정점으로 우리가 미술을 보아왔던 관점과 지각조차 변화시켜 놓은 미술이다. 아방가르드 작가들은 파괴적인 독창성에 반영되는 예술의 치유적 원초성을 통해 명성을 획득했지만, 아방가르드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인식하고 기생한 네오 아방가르드 작가들은 작위적인 예술적 행위를 만들어내며 명성을 찾아다닌다.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해 안젤름 키퍼는 작가로서의 인기와 명성을 획득했다.
쿠스핏은 모더니스트들이 표방했던 이성주의적인 초월성, 미적 심각성이 포스트 모더니스트에 의해 창조성의 단초를 잃고 우리 삶의 일상적인 진부함으로 변질된 것을 지적한다. 그들은 미술의 원초적 치유성과 도덕적 열정을 철저히 변질시킨다. 경직된 아폴론적 이성에 유린당한 전후 독일 국민의 상처를 디오니소스적인 비이성과 샤머니즘적 카리스마로 대안을 제시한 보이스는, 명성을 위해 이미 사회적으로 대단히 성공적이고 돈이 되는 상업적 이미지를 작품에 차용한 제프 쿤스의 표절적인 미술과는 질적인 상이함을 가지고 있다.
그에게 피터 핼리나 쉐리 레빈은 개혁성을 가장한 쇼를 보여줄 뿐이고 키퍼나 바젤리츠는 20세기 초의 독일표현주의의 부정적인 측면인 비합리성을 전용하고 있을 뿐이다. 이들은 아방가르드를 시스템화시켜 박제된 미술양식으로 고착시켜 버렸다.
이처럼 네오 아방가르드 작가들은 자신과 자신의 창조성 사이에서 세속적 명성과 돈을 위해 신성한 창조성을 전용했다. 이들의 태도는 다이애나(Diana)의 신전에 불을 질러 그 신전보다 더 유명해지려고 했던 그리스 신화의 헤로스트라투스에 비유할 수 있다. 본질적인 예술적 정신보다는 상업자본주의의 세속적인 가치가 지배하기 시작한 20세기 후반 포스트 모더니즘 미술의 표절주의는 결국 미술에서도 하나의 유행으로 정착하게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