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계백”에서 가장 관심있는 대목은 ‘의자왕’에 대한 것이다.
역사에서 가장 불행한 왕을 들라면 나라가 망할 때 집권했던 왕들이다. 조선시대로 치면 선조, 인조, 고종을 들 수 있다. 고려시대엔 공민왕, 통일신라(신라-발해)시대엔 경순왕, 그리고 백제에선 의자왕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나라를 망하게 했으니 아무리 치적이 많다 한 들 나라를 망하게 한 원흉으로서의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그래서 나라가 망하기 전의 그들의 행동에 대하여 당연히 좋지 않은 모습이 부각될 수 밖에 없다. 역사는 승자의 것이니 그런 모습이 더욱 부각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백제의 의자왕 또한 3000궁녀를 거느리고 음주가무로 향락에 빠진 왕으로 충신의 말을 듣지 않은 폭군으로 지금까지 역사에 기록되어 왔다. 필자는 드라마 “계백”에서 의자왕을 어떻게 그려나갈까 하는 것이 궁금했다. 실제 의자왕은 지금껏 알려진 것과는 다른 모습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다행히 드라마 “계백”에서는 이런 의자왕의 일그러진 모습을 바로 교정하고자 하는 기획 의도를 보인다.
의자왕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는 우애가 깊어 사람들은 그를 '해동증자'(海東曾子)로 불렸다. 641년 아버지 무왕이 승하하면서 그 뒤를 이어 백제의 왕이 되었다. 그는 신라와의 병합 의지를 불태우며 여러 차례 신라를 공격해 영토를 확장한 용맹스러운 왕이기도 했다. 의자왕은 642년, 고구려 연개소문과 연합해 신라의 미후성 등 40여 성을 정복했고, 장군 윤충이 신라의 구 가야지역 최대 거점인 대야성을 함락하는 위세를 떨치기도 했다. 이때 신라의 김춘추가 대야성에서 사위와 딸을 잃었다. 의자왕은 649년 신라의 7성을 빼았었고 655년에는 고구려, 말갈과 연합해 신라의 성 30여 개를 빼앗었다.
하지만 의자왕은 57세를 넘기면서 총기가 흐려지고 방종해진 것으로 전해졌다. 왕비와 함께 사치스러운 주연을 열었고, 충신 성충의 말을 무시하고 하옥하기도 했다. 그러다 660년 나당연합군으로부터 협공을 당한 백제는 결국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다. 하지만 마지막까지도 의자왕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운 것으로 알려졌다. 끝내 전멸했지만 계백과 5천 군사가 황산벌에서 10배나 많은 신라군에 맞서 용맹하게 싸워 4번이나 막아낸 것은 유명한 일화다.
의자왕이 술과 여흥에 빠져 나라를 멸망시켰다는, '3천 궁녀'로 대표되는 이야기는 정작 역사책에는 나오지 않는다. <삼국사기>에는 의자왕이 마지막까지 군대를 보내 싸웠다고 전해지고, 술과 여흥에 빠졌다는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는다. 당시 궁궐의 터는 삼천명이나 되는 인원을 수용하지 못한다. 시청자들은 “계백”이 의자왕의 '오명'을 씻겨내고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