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발견 (39) 3.1절 날 TV
2-30년 전만 해도 시골엔 텔레비전이 귀했다.
또 텔레비전이 있다 한들 지금처럼 채널이 많은 것도 아니고 KBS, MBC 달랑 두 개만 있었다. 전라도 운봉에서는 TBC라는 방송국이 있는지도 몰랐다. 또 지금처럼 종일 방송이 아니라 오후 6시에 애국가를 시작해 정확히 12시면 애국가를 부르며 KBS는 어쩌고, 저쩌고 지자랑 만 실컷 늘어놓고는 치~~~ 혹은 삐~~~ 소리를 내며 악을 쓴다. 맞다. 악을 쓴다는 표현이 맞다. 그것 들은 정말 독살스럽게 악을 쓰며 귀청을 떼 가려 했다.
그러니 어린 맘에 하루 종일 텔레비전이 나오는 국경일은 얼마나 좋은 날인가. 마침 오늘이 삼일 만세운동을 벌인 날이고 보니 나 어릴 적 일이 생각난다.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은 3.1절 기념식에 참가 한다며 서림공원(전적 기념비가 있고 충열탑이 있는 공원)으로 가고 나는 혼자서 텔레비전을 보아야 했다. 친구가 없어도 그날은 좋은 날이다. 텔레비전에서 재미있는 것을 많이 해 주기 때문이다. 나는 느긋하게 방바닥에 배 깔고 텔레비전만 보면 되었다. 그때는 프로레슬링이 제일 인기 있는 프로그램 이였다. 김일 선수가 이노~ 머시깽이를 박치기로 때려눕힐 때는 너무 신이 나서 걷지도 못하는 내가 뛰어 댕기는 것만 같다. 조금만 더 극적이고 조금만 더 쇼맨십이 강했더라면 내가 일어나 걷는 기적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3.1절 날 오전 8시 경에 만화영화가 방영된다. 대게 로봇태권V나 맥칸더V 혹은 마루치 아라치 이었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다음 80년대로 넘어 서면서는 홍길동전을 했으며 90년대로 넘어서면서는 영구와 맹구씨리즈가 번갈아 가며 찾아 들었다. 어쨌건 그런 것들이 끝나면 3.1절 기념식이 방송되었고 그 다음엔 좌담횐가 머시깽인가가 또 있었다. 알지 못하는 높은 분들이 나와 우리나라가 부강해야 큰소리치며 산 다 어쩐 다 그런 얘기들을 듣고 나면 12시 그러면 12시 뉴스가 있고 그 다음 3.1절 영화를 해 주었다. 가끔 프로레슬링과 영화 하는 시간이 바뀌기도 했지만 12시 20분쯤 영화를 시작해서 2시 30분쯤 끝나고 그것이 끝나고 나면 프로레슬링을 해주었다.
3.1절 날 텔레비전에서 보여주던 영화는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같은 고전명화에서부터 미군과 이탈리아 군이 싸우는 영화, 일본군과 미군이 싸우는 영화 뭐 그런 것들이다. 진주만 기습에 관한 영화가 제일 많았던 것 같고 오키나와 전투 필리핀 전투 등에 관한 전쟁 영화도 본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어리고 순진한 맘에 그 나쁜 일본 놈들이 따뜻하고 살기 좋은 남쪽 나라들만 침략하고 춥고 먹을 것 없는 만주나 시베리아 쪽으로는 안 간줄 알았다. 지금에 와 생각하니 그 때 실세들이 만주 군관학교 출신이거나 북간도 지역에서 독립군 토벌하던 조선 출신 일본군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뒤가 구린 실세들이 자기 욕하는 영화를 틀어주지도 않고 만들지도 않았던 모양이다.
눈만 뜨면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놀았던 나도 청산리 전투에 관한 영화나 중국과 만주에서 펼쳤던 독립사 같은 다큐멘타리나 영화 드라마 같은 것을 자주 보지 못했다. 본다고 해도 뭔가가 이상하고 엉성한 느낌을 지울수도 없었다. 대중문화가 이정도니 역사인들 오죽할까. 오늘 광복절 기념식을 텔레비전에서 할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나올지 아니면 이해찬 총리가 나올지 모르지만 아마 노대통령이 나오겠지. 명색이 민주세력이 내세운 대통령이 아닌가. 허나 나의 관심은 귀빈석에 앉아 있을 광복회 회원 분들이다. 작년에 나오셨던 분들이 몇 분이나 계실지........ 유구하지 못한 세월 속에 속절없이 가셨을 그 분들……. 민족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버리고 팔을 버리고 다리 한 쪽을 내어 놓으신 분들, 나라걱정 하다 보니 자식들은 못 입고 못 먹고 못 배워서 가난이 대물림 되는 고단하신 분들이 축사를 읇어 대는 친일파 놈들을 볼 때 마다 얼매나 속이 쓰리고 비위장이 틀렸을까.
내가 아는 한 분이 계신다. 얼굴 한번 뵌 적이 없는 분이라 소상히는 모르나 독립운동을 하시다 고향으로 돌아 오셨다고 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이후 그분은 자신의 입으로 독립에 독자도 꺼내지 않았지만 동네 사람 모두가 다 안다. 그 분이 독립 운동을 하였다는 것을. 그래서 일본 놈들이 그 집을 이 잡듯이 뒤지고 잡아다 고문하고 매일같이 감시하고 그랬던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가장 없는 가솔이 어찌 살았을지 짐작하고도 남는 일, 허나 가장이 돌아 왔다고 해서 나아질 일이 아니다. 독립 운동가는 집으로 돌아 왔으나 아들을 소학교(초등학교)에도 보내지 못했다. 탯줄을 끊어 주지도 못하고 옷 한 벌 사 입히지 못했던 그 아들을 친일파 혹은 친일파 비스끄므리 한 사람의 집에 머슴을 살려 호구를 연명했다. 아들은 장성 하도록 이집 저집을 돌며 머슴살이를 했고 그래서 또 그렇게 식모살이를 하는 여자를 만나 자식을 낳았다. 독립운동가의 아들이 자식을 낳았고 그놈이 제법 똑똑해서 고등학교까지 나와 면서기 시험을 보는데 가산점이 필요하니 국가 유공자 쯩을 만들어 달라고 할아버지께 통사정을 했다. 그때 그 독립가 양반 큰 기침 한번 하고 입을 닫아 버렸단다. 손주가 무릅 꿇고 몇 날 며 칠을 빌고 또 빌어도 대답이 없으셨단다.
아마도 실력으로 안 되는 길이면 가지를 말라는 뜻이었을 게다. 그렇게 또 몇 날 몇 칠이 흘렀다. 자식과 아버지 사이에 벌어지는 팽팽한 신경전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던 독립 운동가의 아들이 농약병을 아버지 앞에 내놓으며 이렇게 말했단다.
“아부지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었지만 나는 자식을 위해 목숨을 걸랍니다. 아부지! 자존심 한번만 꺾어 주소. 대통령이 일본군이건 군수 가 일본 놈 앞잽이였건 간에 우리 자식들도 밥 먹고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명질 날 이믄 쇠고기 한 근 선물 받아가 고깃국 한 번 끓이 묵는 손지 새끼들 바야 하지 안 것십니까. 얘, 아부지.”
아버지를 하늘처럼 믿고 무조건 따르던 아들이 아비 앞에 목숨을 걸었다. 독립운동가 손짓으로 아들을 내 보낸 다음날로 서울로 올라가 그 놈의 쯩 하나 만들어 손주에게 주고는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 가셨다.
참, 서글픈 일이다. 그분이 돌아가신 다음에 국가에서 훈장까지 내려질 정도로 독립유공이 혁혁 하셨던 분이었는데 그분이 어찌 독립유공자협회에도 나가지 않고 보훈처에 등록도 하지 않았을까? 그 분 가슴에 그토록 응어리지고 그토록 한 맺혔던 것은 무엇일까.
헌재에서 판결 하길 국가 유공자 가산점이 헌법 불합치란다.
할아버지에게 쯩 하나 만들어 달라고 통사정을 했던 손주, 지금은 제법 출세를 하였다고 하는 그 손주가 이 기사를 보았다면 어떤 심정일까?
나라에서 후사를 책임 저 주지 않는다면 나라를 위해 누가 죽을 것인가? 친일파 후손이 조상 땅 되찾겠다고 소송 건이나 유공자 자식들에게 준 가산점으로 먹고살 길이 없다고 소송을 건 것이나 다를 게 뭔가?
이레 저레 나라위해 목숨 걸었던 분들이 오지랖 넓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또 무슨 가상치도 않은 생각인지 모르겠다.
텔레비전 얘기를 하다 보니 또 여기까지 왔다.
너무 많이 온 탓에 마무리 지을 길이 막막하다. 내친걸음 허허벌판이라도 달려볼까. 아니다 마서라. 그리한들 또 무슨 소용일꼬. 대통령을 바꾸고 실세를 바꾸고 주류를 바꿔도 똑같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