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잉군 이금의 탄생 설화를 간직하고 있는 대구 파계사
연잉군(延礽君) 이금(李昑 1694~1776)은 훗날 영조로 조선의 제 21대 왕에 오르게 된다.
연잉군 이금은 제19대 왕인 숙종의 아들이다. 모친 숙빈 최씨가 천민인 까닭에 왕자로 인정받지 못한다.
연잉군은 여섯 살이 되던 해 처음으로 '군'으로 봉함을 받으면서 임금의 아들로 공식 인정을 받게 된다.
실록은 영조가 태어날 때부터 신체에 특이한 부분이 있다고 적고 있다.
"왕께서는 특이한 자질이 있고, 오른팔에 용이 서린 듯한 아홉 개의 무늬가 잇따라 이어져 있었다."
영조는 52년 동안 왕위를 지켜 조선왕조 역대 임금 중 재위기간이 가장 긴 왕이다.
숙종의 세 아들(경종, 연잉군, 연령군) 중 둘째이며, 어머니는 숙빈 최씨이다.
비는 서종제의 딸 정성왕후이고, 계비는 김한구의 딸 정순왕후이다.
연잉군 이금은 탄생부터 극적인 사연을 안고있다.
어느 날 숙종은 남대문 2층에 올랐더니 남대문 밖의 세 번째 집 위에서
청룡과 황룡이 찬란한 광명을 놓아 하늘에 사무치는 꿈을 꾸었다.
숙종은 어명을 내렸다.
"남대문 밖 세 번째 집에 가서 사람이 있거든 데리고 오라!"
그날 현응스님은 묘향산에서 한양 구경하러 왔다가 남대문에 머물렀다.
왕은 현응스님에게 한양에 온 까닭을 물었다.
현응 스님이 불교계의 어려움과 승려의 부역에 대해 자세히 아뢰면서 소원을 말한다.
아들이 없었던 숙종은 현응 스님에게 한양백리 이내의 기도처에서 생남기원(生男祈願)을 해 줄 것을 청하였다.
현응스님은 쾌히 수락하고 때마침 한양 가까이에 와 있던 금강산 만회암(萬灰庵)의 농산대사(聾山大師)와 각각
수락산 내원암(內院庵)과 북한산 금선암(金仙庵)에서 기도를 시작하였다.
70여일이 지났을 때 현응스님은 선정(禪定)에 들어 이 나라 백성들 중 임금의 지위에 오를 복을 지닌 사람을 관찰하였다.
한 나라의 앞날을 이끌만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왕의 소원을 이룰 수 있도록 하려면 자신이 죽든지 농산대사가 죽는 수밖에
없었다.현응스님은 파계사의 일을 처리하기 전에는 죽을 수 없어 농산대사에게 간곡한 편지를 올려 왕자의 몸으로 태어날 것을
청하게 되었다.
“내가 나라의 위축(爲祝)기도를 맡은 것으로 인(因)을 삼았는데, 기도를 마치기도 전에
과(果)가 벌써 돌아왔구나, 아 50년 동안 망건을 쓰고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농산대사는 이렇게 말하고 백일기도를 회향한 날 밤에 입적(入寂)하였다.
이 백일기도로 태어난 것이 숙빈 최씨 소생의 연잉군, 즉 훗날의 영조이다.
전생의 농산 화상으로서 전세의 과보를 받아 현세에 왕실의 자손 즉 국왕 숙종의 아들로
태어나게 된 것이다.그 이듬해인 1694년(갑술)에 왕자로 탄생하여 커서 영조가 되었다.
실로 그의 예언대로 52년 동안 재위하였다.
대구 파계사에서 복장 유물로 발견된 영조대왕 도포(중요민속자료 제220호).
영조의 출생에는 재미있는 또 다른 일화가 전한다.
그의 생모 최씨는 대궐에서 상궁들의 물을 떠다주는 하층의 궁녀였다.숙종의 승은(承恩)을 입어
영조를 잉태하여 숙빈으로 책봉되었다. 당시 중전이던 장희빈은 질투하여 최씨에게 몹시 매를 쳤다.
때 마침 숙종이 낮잠을 자다 이상한 꿈을 꾸었다.
큰 황룡 한 마리가 큰 항아리에 깔려 죽어 가는 꿈이었다.
숙종이 괴이하게 여겨 대궐 뒤뜰로 가보니 거기엔 과연 큰 항아리가 있어
내시를 시켜 치워보니 그 속에 숙빈 최씨가 기절하여 죽어가고 있었다.
따뜻한 방으로 옮겨 치료하니 숙빈이 살아났다.
이 때 영조를 잉태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조는 묘하게도 사주가 4술(戌) 갑(甲)생(甲戌年, 甲戌月 甲戌日 甲戌時)이었다.
신하들이 모두 '4술갑(戌甲)'은 제왕이 될 사주라고 하였다. 이에 영조는 전국에 영을 내려
자기와 같은 사주를 가진 사람을 찾아오도록 명하였다. 강원도 산골짜기의 순박한 노인을 불려 왔다.
"너와 나는 같은 4갑술 생인데 너는 어찌 임금이 못되고 한낱 농부가 되었느냐?"
"전하? 소인은 제왕이 부럽지 않사옵니다. 크고 작은 차이는 있으나 소인의 자식이
8형제이니 전하의 8도와 같사옵고, 또 벌통을 360통을 치고 있으니 전하의 360주,읍(고을 수)과 같으며,
또한 그 벌통의 벌의 수가 700만 마리나 되니 이 나라 백성의 수와 같사와 사주가 맞는가 하옵니다."
영조는 허허 크게 웃으며 회색이 만면하여 신하들에게 사주가 아주 헛된 것은 아닌 것 같다고 말하며,
그 노인에게 많은 상급을 내리고 작은 벼슬까지 내렸다고 한다.
어렵게 얻은 아들 연잉군 이금이다.
천민출신인 숙빈 최씨는 아들을 명문가 영빈 김씨에게 양자로 보낸다.
영빈 김씨는 장동 김씨 청음 김상헌의 현손이다. 숙종은 영추문 서쪽에 창의궁을 마련한다.
숙빈 최씨는 거처를 창의궁으로 옮겨 연잉군 이금을 살뜰하게 보살핀다.
영빈 김씨의 친정과 가까운 곳에 잠저를 마련한 것이다.
겸재 정선은 영빈 김씨의 당숙 김창흡을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을 연마하고 있었다.
겸재 정선은 연잉군 이금에게 그림을 가르쳤다. 세제 연잉군 이금의 그림 선생이었다.
“그 후원자들의 중심에 영조가 있었어요. 영조는 자신이 겸재의 그림 제자라고 여러 번 이야기했어요.
겸재가 현재 경복고 자리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영조가 출궁해서 나간 자리가 창의궁 자리예요. 당시에는 왕자가 장가가면
나가 살아야 했는데 숙종이 왕자궁을 마련해준 거지요. 13세 때부터 영조 명의로 해줬는데 영조가 거기를 가끔 드나들면서
겸재에게 그림을 배웠어요. 숙종이 영조가 16,17세 때 그림을 잘 그리니까 ‘배우지도 않았는데 아주 잘 그린다’며 매번 칭찬하면서
제화시를 써주었어요. 그런데 배우지 않고 어떻게 그림을 잘 그려요? 영조는 왕이 된 뒤에도 평생 겸재를 호로 불렀지 이름을
부르지 않았어요. 스승으로 대우한 거죠.” -최완수 간송미술관-
겸재 정선은 영조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다.
영조는 세제 때 겸재에게 그림을 배워 왕이 되어서도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항상 `겸재`라면서 귀하게 모셨다.
겸재는 그는 40대 이후 관직에 본격 진출한다.
왕은 겸재가 화업(畵業)을 계속 하도록 산수가 빼어난 지역의 지방관으로 나갈 수 있게 배려했다.
65세부터 70세까지 경기도 양천현령을 지내면서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을 제작했다.
서울 근교와 한강변의 명승지를 25폭의 그림으로 형상화했다.
직접 발로 걷고 배를 타고 가면서 그린 그림들은 300년 전 한강과 서울 교외의 자취를 생생하게 전해준다.
조선 중기 사도세자(思悼世子) 이선(李愃) 1735~1762)의 <개 그림(犬圖)>이다.
사도세자가 그렸다고 전하는 <개 그림(犬圖)>은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그림 가운데 큰 개가 있고, 작은 개 두 마리가 큰 개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
강아지들이 가운데 어미개를 보며 달려가고 있다.
그런데 어미개는 등을 돌리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모습을이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 사도세자 이선의 아픔을 표현한 것 같은 그림이다.
뒤주에서 생을 마감한 사도세자는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다.
인물과 산수화, 새나 짐승을 소재로 한 영모(翎毛)화, 사군자류 등 많은 그림을 남긴 것으로 전한다.
사도세자 이선도 아버지 영조처럼 겸재 정선에게서 그림 수업을 받았다고 전한다.
이들 부자가 동시에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에게서 그림 그리기를 배운 제자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