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전주유씨는 내자판관 곡 의따님이요 증 정경부인이니중종36년신축1541년11월7일 연방집에서
(연방집;임금이 하사한저택)공을 탄생하니 어려서영리하고 민첩하며월등하게뛰어나서말씀을
헛되이 아니하며 멀리 큰 그릇이되리라던중 명종22년 정묘1526년(27세때)생원을 마치고
선조6년계유1573년명경에 등제하여승문원정자 에 보하고 차례로 전적에 승진 사헌부감찰
호조 형조 좌랑으로전보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 을 제수하니 어그러지게 벼슬에 들려서 피 할
바 가 없었다 서장관으로명나라 경사로 취임 일을 다 갗추어 돌아오니 황해도 도사해운판관으로
명 을받고 나갔다가 들어와서 형조 정랑을 하고 성균관직강으로 옮기어승 대동 으로 나갔다가 첨정으로 돌아오니 이어 평양 서윤 을 제수 힘을 기르고 마음을 단련하는 연무정 을 지어수시로 간략히 수련하여로범을하지못하게갗추고정치에 항상 엄 하고 밝으니 이방과 백성이 다 사랑하고 두려워하였다
경상도 순찰어사 로 나가게되어 능 하고 몾함을 살피며 친 하고 이로움을 세력과 아첨하지아니하니
옛 주 부 가 엄숙하고 종용하였다 선조24년신묘1591년통정으로 진급하고 강계(평안북도)부사 로출사하니 다음해임진년1592년 4월에 왜구 가 크게칩입하였다 임금이 이땅을 버리실때며 寅城君정철 이 귀양살이로 강계에 있었다임금의 어가 가 개성에행차하여 왕자를호위하라는 칙서와 령 을내려부르라
하니인성 이 가고져 하였다 공 이 만류하여가로되 공의 이름이 금부 에 있는 지라옮기라 는 보첩이없으니먼저 출발함은 전례가아니라하였다 임금이 평양에이르렀음을듣고이내 가도록허락하여인성이 그곳에 이르러임금에게 가 있음을 아뢰었다 사람들이 가로되 위험하고 어려웅때에인성 이가서 능히옛것을 떳떳하게 지키도록 이같이함은 조정에서 공 을 인재로 과연옳게 등용한것이라하였다
호조참의 에서동부승지로 옮겨 배명하고 6월에우부승지로 전보하여영변으로 갔다가돌아와서또 호조에제배하였다좌상 윤공 두수 가 임금 에게 아뢰어 왈 명나라에청병을 이미하였으니명나라 장수와병사를 영접하는 책략을강구 아니할수없다하니 임금 이 누가 可하느냐?물으신즉 윤 공 이 홍세공을 천거 대답하니 이네 공 을 조도사 로 배 하고군량미 를 관장케하였다
공은곳 명에 응하여 관서 렬 읍을 순행하면서병사들의먹을식량을모으고 의주에 이르러 왜적을 염탐하여병사들과 함께 유격하니 명장조 가 兵史를거느리고종사관심우승으로하여금그때그때 상황에따라
전렬밖에서공격하였다 량책에이르러수일을머무러공이명장조를따라병사를 모아거느리고공격하였다
양책두장수가 어가를기다려 출발하지않으니임금이 다음양책에서두장수를 만나보았다
공이 어가를배알하고 좌상 윤공의 말대로 평안좌도로 출발7월에 熙, 雲 ,博, 寧, 价,5군을 고루 순행하여양곡 560석을모아안주에 이르렀다 유문충공 성룡 이듣고, 조정에 갔을때,공이 더위로 상하여 설사를하며 힘이빠지니 새벽밤에달려 태천에이르러 질환으로 7일을굴러 머무는데묘당에서 공의일이늦는다하여 벼슬강등을 청하는지하 유 문충공의 말이 공을 바꾸는겄은 옳지아니하다,하고 거듭영을내려
군량을운반하도록 재촉하였다 임금이 공의 벼슬을 본대로돌려 호조참의 로제수하고다음날
평안도 순찰사 로제수, 산과 성을 정당하게파악하여막히는곳을순시하라, 명하다
10일에 명을받들어 맹산, 영원, 양군에서사격을 시도 하였으며 열읍을 두루 행 하면서병사를 모병하고
양곡을고를 것을사뢰니 뜻을베풀어주셨다 12일에행궁을나누어퍼견한 申 도체찰원수 등을 청하여 가르키며다시모은 재물에서 얻은 콩과쌀이6780여석이였다
선조26년계사 1593년정월에공이상호군으로바뀌었을때 명나라 장병들이 평양을수복하고남은왜적들은남쪽으로 다 달아났다 관북을 항상청정하게점거하면서공이 함경도 순찰사로 제수하여 元 師와장병을
불러 도망가는왜적을몰살하고 명나라장수 빙중영, 김상 등과 더불어 기미를보아 왜적을 창 으로 찔러죽이니남은 적 들이 다 달아났다 두장수와 더불어 관서로 돌아와 3월 숙령부에복명할때임금이 이제독
여송을 만나려 숙령으로 행차하였다,다시 관북으로 돌아오라는 명 이 이미있었기에각 렬 읍을순행하면서굶주리는백성을구휼해 먹이고모든범죄로옥에 갇혀있는자 들을안온하게모아 반역을평화로거느려서삶의터전에도움을주도록령에이르니춥고 쌀쌀한옥중은 마침내저녂인지라 온화하자못하였다
북로는왜구에빠져서,작은성으로 막히었고 기기는잔인하게후ㅖ손되어,남은것이없었다
공은 본도가 북쪽오랑케와 이웃됨으로써여러차례 오랑케 도적에게 약탈을 당하였으니왜구가 비록 물러갔으나 하루라도병사가 없으면 옳지아니하다 하고 조정에 모든병사와 기기를 급히 청원하여조치
하였다 또 말씀하기를 란시 에는 소 돼지 닭 등 을 가두어 기르고다스려서 지키도록하였다
단천군수 강 찬 은 나오지아니한 군내 의병을모아 합쳐서왜구를 참살하고 잡아들이는데 공이 많았고
경원부사 오응태는왜적이 크게이르러 닥치니 성 을 굳게 지키지못하였읍을 가히 알고북쪽을 향하여 통곡하고굶주리고 있는 백성에게 가서 구제하여 먹이고정치가 폐허해가니경흥부 로가서 죽었으며
김굉국은오랑케 들이 약취함에 굽히지 아니하고 죽었으니 청 하여 상 을 증여 하였다
삼수군 사람은 겨우 백여호가 사는데 전년에 70호 가 오랑케에게 약탈을 입고떠나서 재물을 손실한지라 속죄르르청하여 돌아오게하고 또한 대궐의 장수와 군신들은 좁고 기운곳을 왕래하는자 공사 외는
말을 타지 못하게아뢰니 다 옳다고 하였다 전주부윤을 제수하고 전주에서 병사를 따게니 또 거듭 흉년을 만난 지라 마음을 다하여 무마하니 백성들이 이네 깨어서 회생함을 얻게되었다
본도에있는 안렴자 가 공에게 혐의 가 있다하여 공을 헐 뜻고져 하였으나얻지못한지라
이에 정치를 임금이들으시게 잘하니 본보 관찰사 겸부윤 으로 제수하였다 앞서 호남 도백은 대게 1년임기로 바꾸는데 바꾸어서 그 부윤 을 겸하여2년을 명하시니 특별한교지였다 가을에 크게 흉년이
드니 토적 김희 와 이복 의 무리들이경상 적 고파 와더불어 결탁하여수차 관군을 격파하고 문산에 웅거하여재물과 돈 그리고 부녀자 까지 약탈하는세력이 불같이 성하였다공이 8군의 병사를 출동하여손가락으로 가르키며 목을베여죽였으니 다 공의 힘이였다
체찰사 이공 원익 과 권공 률 이함께 남원에 모여서작전의 계획을꾸미는데 선조28년 을미 1595년명나
조정에서 풍신수길 로 하여금 일본왕 에게강화를 제의 하고 병사 를 풀었다 명나라 사신이종성과 양방형 이일본으로 사신의 명을 받들고우리 국경의 길을 떠나니 공은 연도를 순시하며도로를닦고정비하여
명나라사신에게 바칠것을힘써갖추고 유제독 정 은남원에병사를 주둔허여 두 사신의행차하는데 사람과 말이 수천 5,6 삭 을 연이어 머무는데일산대 를 들고 의관을 쓰고 영접하며 환송함이 번거로워 경비를 만 이상의계수로 움직여야했다 수령이된자가 재물을 취 할바없어서민간의 집과 마을을 수색하기에 이르러공로읍이 매우 떠들썩하고 소란스러웠다 많은수를 바치느데 견디지 못하여이방이 사로 흩어저도망할려는자 서로 바라더라 공이 조정에 품의 하여 조정에서 각사 고비를 첨가하여 주고 내지 각읍에 나누어 붙이라 령 을 내리니 동로읍은 사람과 말에지불하는 비용 을 그 힘 에 맞추어골고루 분배하고 해 가 오래도록 세금을 못낸 백성들을 면제 시켰다
각사 노비에게 면포 를 받치는자 쌀로 대신하려는 그힘이 더디었으니 이에 앞서 호남에 물은 많으나
때 를 미치지 못하여자주 흉년을 불러 들였던겄이다 공이 백성을 가릌켜 쟁기를 수 십 백 만개 만들게하여나무에 기 를 달아 북치며 노래하도록농민들을 권 하여서로흥행에이르니 이제 먹는것은 공의보람이라 하였다체찰사 절도사 가 함양에서 머무루고 공은왕래하면서자문도하면서낮에는 궐문을 설치하여엄 하게 수비하도론하였다 섬진8량60치 여러곳에 장수를뽑아배치하여지키게하고담양 김제 에
주진하여몽우 무단자는 법률로서 제어하고수령이 정무를 휼륭하게 하지못하는자는 파직하니위덕 이 아울러 흘러 맑고숙연하였다 만기가 됨에 우승지로 돌아오고또한평안도 조도사 로 제수하여양서및경기 가까운곳에서 항복한왜적들을 모아서기만하고 횡폭과 약탈한놈을 가려내니 대게 길에많았다
공이 명을받고 말을 타며 달리다가 여러번위태함을만났다 본곳으로이내돌아오니선조30년 정유 1557년 왜적이 두번째 부딧침으로 명나라 조정에서 또한출병하여토벌하고우리 관서의 일을 공에게 맏기니
공이 모은 서속,을 군량으로 돌려 문득먼저 헐지아니한 괘를꾸려서굶주림을다한 기민을먹이려고농가에 나누어 주니 범백성에게 베푸는마음과힘이 다하여 이로써 등창병으로 선조31년무술1598년7월3일
안주에서 서세 하니향년58세였다 임금이 부음 을 듣고 슬픔과서러움이 깊었다 모년월일에 장단 자작리 경좌를 짊어진 둔덕에서나라에서 예장으로 봉안하였다 다음으로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