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류의 역사와 문명을 바꾸는 전염병
5. 전염병 극복을 위한 인간의 노력
글 출처 : 정역주의, 인류의 역사와 문명을 바꾸는 전염병이란 무엇인가? (노영균,윤석현 공동저자. 아람 2004)
글 연재 : 개벽밸리
윤 석 현 가정의학과 전문의 (태전 증산도 사상 연구회원)
전염병은 오랜 세월동안 인간과 같이 하면서 인간을 괴롭혀 왔습니다. 그에 대응 하여 전염병을 극복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었던 시기부터 있어 왔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의학이라는 것들도 알고 보면 전염병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에서부터 시작 되었습니다.
5-1. 동양에서의 의학
동양에서 의술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신농씨가 아닌 태호 복희(太昊 伏戱 : 서기 3528∼3413)로 알려져 있습니다. 태호 복희는 5600년전 사람으로 배달국의 5대 환웅인 태우의 환웅의 12번째 막내아들로서 천하(天河)에서 나온 용마(龍馬)의 등에서 나타난 상(象)을 보고서 팔괘를 처음 그려 역의 창시자인로 알려져 있는 분입니다. 이분이 태어난 감숙성 성기(成紀)- 곧 지금의 중국 천수(天水)시 복희 사당에 들르면 복희 천제가 침구를 처음 시작해 침을 만들었다는 사실과, 금슬(악기)은 물론, 신농처럼 신농보다 먼저 백초를 맛보고, 양잠을 처음 시작해, 여와씨가 장려했음이 기록이 나와있다고 합니다. 현재 복희씨의 무덤은 중국 하남성 회양현성(淮陽縣城) 북쪽 1.5km에 위치해 있는데 회양은 엣날의 진국(陳國)으로 복희가 도읍(都邑)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깐쑤(감숙)의 천수시 복희묘의 태호복희
하지만 한의학의 시초로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 분은 5300년전에 신농(神農 : 서기전 3218~서기전 3070)황제로 되어 있습니다. 신농황제님은 의학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농사짓는 법 백곡을 정하고 온갖 풀맛을 직접 먹어 보면서 의약을 짓고 의술을 가르쳐 천하만세를 윤택하게 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염제 신농 황제의 부친 소전은 웅씨족(熊氏族)의 후예로, 9대 안부연(安夫連) 환웅지말(桓雄之末)에 소전(少典)이 명을 받고 지금의 섬서성 바오지(寶鷄)시 강수(羌水)의 감병(監兵)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 소전의 아들 신농 황제는 후에 열산으로 옮아 갔다고 합니다. 「桓檀古記」『太白逸史』에 의하면 소전(少典)은 소호(少昊)와 함께 고시(高矢)씨의 방계자손이라 했으니 곧 태호 복희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농황제의 나라는 8대 520년간 지속이 되다가 마지막 왕 유망에 이르러 치우천황에게 멸망당합니다.
지금의 한의학의 본초학은 신농황제님께서 만드신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지금 볼수 있는 신농본초경은 세월이 흘르면서 신농본초경이 원본이 희미하여진지 오래 되자 이시진 등..역대의 명의들에 의하여 많이 보완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전염병의 첫 발생이 신농씨 대 부터 시작되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이미 앞 칼럼 <생각해봐요>에서 그 가능성을 언급한 바가 있어서 여기서는 생략을 합니다.
섬서성 바오지(보계) 염제 신농씨 능
하지만 한의학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책은 황제(黃帝) 헌원이 6명의 명의들과 의학에 대해 토론한 내용을 싣고 있는 황제내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전(少典)의 별파(別派)인 황제 헌원 또한 동이족이었다고 합니다. 사기(史記) 동제본기(東帝本紀)에는 "황제는 소전의 아들(黃帝者 少典之子)이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동기록에서 "황보익이 말하되 황제는 수구에서 태어나서 희수(姬水)에서 성장하였으며 헌원에서 거주했다"라는 대목, 그리고 「제계사기」의 "황제는 백민(白民)으로 태어나서 스스로 동이에 속했다(自屬東夷)"는 대목, 황제는 백민 출신으로 동이에 속한다는(黃帝生於白民...自屬東夷:『楚史』) 대목이 있습니다. 사마천의 「사기」『5제본기』에 3 황 5 제시대가 5 백 년인데, 황제는 100여 년 재위했으며 황제는 유웅국(有熊國) 소전(少田)의 아들로 소전은 인명이 아니라 (환웅국의) "제후국 이름"이라는 기록도 나옵니다.
http://www.cheramia.net/board/view.php?id=bbs4&no=285
황제헌원이 훗날 청구국(배달국)에 와서 태우의 환웅 때 팔괘를 만들었던 복희씨(伏羲氏)와 함께 공부한 발귀리선인(發貴里仙人)의 후손인 자부선생에게 문물을 배우고 삼황내문경이란 책을 받아 가면서 우리 한민족의 철학인 주역, 음양, 오행의 내용이 중국에서 발전할 수 있게 되었고 그러한 가르침을 받아 만들은 것이 황제내경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황제내경은 소문(素問)과 영추(靈樞)가 81편씩 162편으로 되어 있습니다. 음양오행을 바탕으로 한 의학 서적이며 전국(戰國 :기원전 475-221년)에서 진한(秦漢 : 기원전221-기원후 220년)사이 시대에 와서 수정 보완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중에서 운기학은 「황제내경」 소문(素問)의 운기(運氣) 7편에서 하나의 학문으로 정립되었는데 대기의 운행이 주기적으로 반복하면서 각기 다른 (유행)병을 일으킨다고 보는 운기학은 원래의 「소문」에는 없었던 내용이나 당대(當代)의 왕빙(王 )이 덧붙여 넣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합니다. 이 운기학은 복잡한 상수이론을 빌어 논의를 펼치고 있으며, 중국에서는 송대 이후에 본격적으로 연구되어 전염병의 유행기전을 이해하는 이론으로 각광을 받았다고 합니다.
전염병을 이야기 하면서 또 빼 놓을 수 없는 분이 의성 장중경 선생 입니다. 지금의 한방처방은 그원류가 삼국시대의 장중경선생에의하여 집대성되고 전하여진 것입니다. 당시 삼국시대에는 전염병이 많이 돌던 시기였고 장중경 선생의 가장 큰 업적 중의 하나는 전염병을 상한론으로 이해를 하여 약을 처방을 하였다는 데 있습니다. 후한(後漢) 헌제( 帝) 때에 전염병이 크게 번져 장중경 일족 200여명의 3분의 2가 상한(傷寒)으로 죽습니다. 심한 열이 나는 돌림병을 상한이라 하며 장중경은 이를 계기로 두통 오한 발열 체온상승 식욕부진으로 시작 혼수에 빠지는 상한을 파고들어 130가지 약방(藥方)을 수록한 ‘상한론(傷寒論)’을 지었다. 장중경 선생의 상한론은 결국 전염병을 연구를 하면서 만들어 진 처방입니다. 의성 장중경께서 상한졸병론을 지어 생민生民이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나는바 되었지만 당시의 참혹한 인간들의 전란으로 인하여 졸병론 6권은 즉각 유실되었고 상한의 큰 뜻이 어지렇게 되었다고 전합니다. 중국은 장중경 의성에 의하여 모든 음식물은 반드시 요리하고 덥혀서 먹게 되었는데 전염병을 방지하려는 고심막측의 결과 였다고 합니다.
한방에서 "편작"은 최고의사의 대명사이며 기원전 5,6세기의 난경을 지은 진월인을 편작이라고한합니다. 원래 1 세편작은 상고시대의 사람이며 진월인을 2 세편작이라고도 하며, 혹은 뛰어난 의가의 집단을 "편작"이라고 하였다고도 합니다. 그리고 송나라때 개주 순검을 지내신 두재선생은 3세편작으로 편작심서라는 명저를 남겼다고 합니다. (이분들과 전염병과의 연관된 자료는 시간상 다 찾지 못하였습니다.)
5-2. 허준과 전염병 관리
동양에도 전염병 관리와 관련된 노력이 많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단연 돗보이는 분은 동의보감(東醫寶鑑)로 유명한 허준(許浚, 1546-1615) 선생이십니다. 허준은 당대에 유행하던 전염병을 효과적을 치료하는 법들을 책으로 편찬하여 전염병 관리에 성공하셨던 분입니다. 1590년 12월 당시 왕자 (후일 광해군)이 천연두(痘瘡)에 걸려 고생하자 다른 사람들이 고치지 못하는 것을 구활(求活)했던 공으로 당상관의 가자(加資·정3품 통정대부 이상의 품계)를 명(命)받으면서 유명해지신 분입니다.
서울시 강서구 가양동 구암공원에 위치한 허준의 동상
훗 날 시두 (천연두)인 두창을 관찰하고 치료법을 적었던 「언해두창집요」(1608)를 편찬하였고 1613년에 크게 유행했던 역려(疫 )와 당독역(唐毒疫)에 대처하기 위해서「신찬벽온방(新撰 瘟方)」(1613)과 「벽역신방( 疫新方)」(1613)을 편찬하셨습니다.
1613년(광해군 5년)은 전염병이 크게 유행한 해였습니다. 1612년 봄에 관북지방을 필두로 하여 유행하기 시작한 역려(疫 )가 가을·겨울이 되어도 식지 않고 해를 넘겨 이 해 봄까지 맹렬한 기세를 떨쳤으며, 가을·겨울을 거치면서 새로운 전염병인 당독역이 기승을 부렸던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당독역의 유행 사실에 좀더 상세한 정보는 「벽역신방」 서문,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峯類說)」을 통해 얻을 수 있는데 「광해군일기」에서는 홍역(紅疫)과 비슷한 반진(斑疹)을 특징으로 하는 이 병이 1613년 가을부터 크게 유행하여 민간의 피해가 컸으나 속수무책이었음을 말하면서 그에 대한 대책의 하나로 허준으로 하여금 의서를 짓도록 조치한 사실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편찬이 되었던 책 중에「벽역신방」은 허준 선생께서 성홍열을 관찰하고 그 이유와 치료 법방을 밝혀 놓은 책으로써 허준의 성홍열 연구가 이후 조선의 학계에서는 큰 주목을 받지 못하였지만 그것이 동아시아 최초의 성홍열 연구이며 세계질병사상 가장 선구적인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 책은 중국의학의 성과를 빌리지 않고 조선에서 독자적으로 질병을 기술하고 해석한 최초의 책으로 평가 되고 있습니다. 또한 귀신소행설(鬼神所行說)을 전혀 채택하지 않고 당시 조선으로서는 "최신" 개념이었던 운기학설(運氣學說)을 운용하여 질병을 해석해낸 조선 최초의 책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허준은 이 독역을 유사질병과 구별하였습니다. 「벽역신방」에서 허준은 독역을 두창이나 수두, 홍역 (마진)과도 구분을 하였습니다. 현대의학에서는 허준 선생이 발견한 새로운 전염병을 성홍렬로 진단을 하였습니다. "마진(홍역)과 독역(성홍렬)을 구별한" 허준의 이런 견해는 이후 조선의 의가(醫家) 사이에서 별 주목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전염병과 관련된 세계사적인 의미에서는 엄청난 업적을 이루어 놓으신 것입니다.
질병사상 성홍열을 독립된 질병으로 최초로 기술한 것은 1550년 이탈리아의 인그라시아스(Ingrassias)에 의해서입니다. 두창, 홍역으로부터 성홍열을 구별짓기 시작한 것은 1624년 호르스트(Horst)가 최초입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 일로 유명해 지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젠네르(Sennert)와 뒤링(During)은 1627년, 윙클러(Winkler)는 1652년, 페르(Fehr)는 1664년에 비슷한 내용을 발표 하였지만 세간의 이목을 받고 학계에서 가장 인정을 받게 된 것은 1676년에 영국의 의사 시든햄(Sydenham)으로 부터 였습니다. 18세기에는 성홍열이 디프테리아와 자주 혼동되었는데, 그것은 인후의 염증과 발병시기의 유사성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비로서 여러 의학자들에 의해 분명하게 디프테리아와 구별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허준(1613)은 시칠리의 인그라시아스(1550)와 호르스트(1624년) 사이에 위치합니다. 그것은 영국의 의사 시든햄(1676)보다 훨씬 빠른 것이며, 중국의 葉天士(1733)과 余霖(1768)보다는 1세기 이상 빠른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허준 선생의 전염병학의 학문적인 발전이 후대에까지 연결 되지 못한 것이 정말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참고문헌 : 신 동 원 (서울대학교) 허준의 성홍열 연구「한국과학사학회지」 제21권 제2호(1999) )
5-3. 서양에서의 의학의 시초
서양 의학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히포크라테스는 그리스 시대 사람이 이었습니다. 그동안의 건강과 질병에 대한 초자연적인 접근 방식에서 탈피하여 자연주의적 접근 방법을 발달시키신 분으로 현대 의학의 첫 시원이 되는 큰 틀을 잡아준 분입니다. 의료직이 성직으로부터 분리되어 독립하기 시작을 하지만 그리스 시대에는 어떠한 형태의 병원도 갖추지 못한 정도의 수준의 의학이었습니다. 그나마 이러한 의학의 형태도 그리스가 멸망 하고 난 뒤에는 사라졌고, 다시 원시적인 형태의 의료 행위가 성행하게 됩니다.
히퐄크라테스
의학이 다시 틀을 잡아 가기 시작했던 것은 페스트가 지나가고 난 뒤인 르네상스 때부터입니다. 15세기에는 인쇄술이 개발이 되면서 그리스 시대의 의학 핵들이 재편집이 되어서 출간이 되었고 사물을 관찰하고 연구하는 자연주의적 접근 방법에 의한 경험주의가 바탕이 되면서 의학이 발전하게 됩니다. 이발사와 와과의사로 대에스파냐전쟁에 종군을 하면서 20년 동안 군대 생활을 했던 프랑스의 외과의 A.파레(Ambroise Par
1510∼1590 )는 동맥결찰에 의한 총상치료방법을 고안을 하였고 1575년에는파레에 의해서 “외과학 전집”을 편찬하게 됩니다. 그의 업적으로 환부치료, 절단술, 골절 교정과 같은 외과학과 해부학이 많은 발전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질병과 전염병의 주 원인이 되는 미생물에 대한 인식과 이에 대한 치료 및 예방과 관련된 의학은 나타나지 못했습니다.
프랑스의 외과의 A.파레
16세기, 샤르트랑 그림, 파리 소르본대학 소장"
그러다가 1798년 에드워드 제너에 의해 천연두를 예방할 수 있는 종두법이 발견이 되면서부터 인간은 인간의 역사가 처음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실질적으로 질병과 전염병의 공포로부터 해방 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본 다면 실질적인 서양 의학의 첫 시작은 천연두를 예방 할 수 있는 백신을 처음 발견 하였던 1798년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5-4. 에드워드 제너와 천연두 백신의 발견
사실 천연두에 대한 예방법은 17세기 제너에 의해서 발견되기 훨씬 이전 시대에도 존재하기는 했습니다. 천연두 예방과 관련된 방법이 최초로 언급이 되었던 것은 11세기에 쓰여 졌다고 추정되는 구급방편 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세계에서 인정되고 있는 최초의 천연두 예방법을 적은 책자는 1644년 중국에 동한이라는 사람이 쓴 삼강시료라는 의학 서적이라 합니다.
그 방법을 보면 먼저 천연두 환자에게서 얻은 고름을 모아 놓은 병을 땅에 묻어 놓습니다. 뒤에 천연두 환자가 오면 환자의 옷에다가 천연두 고름을 묻히고 다시 옷을 입게 하여 약독화 된 천연두 균을 피부에 묻게 하였다고 합니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천연두 환자의 가피를 뜯어서 말린 뒤에 정산인의 코에다가 불어 넣는 방법을 사용 했다는 내용도 나옵니다.
다소 원시적인 방법이지만 천연두 예방 효과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고 이 방법은 뒤에 1688년 러시아에서 천연두 예방법을 배우기 위해 학자들을 중국으로 보내면서 유럽에도 소개되기 시작했습니다.
인두접종이라 일컬어지는 이 방법은 18세기 초엽 영국에 도입이 되고 유럽 세계로 퍼져 나갔습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은 1776년 자기의 군대에게 인두 접종을 시켰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러다가 18세기 말엽에 들어와서 제너에 의해서 우두법이 발견되면서 천연두뿐만 아니라 의료계에도 큰 변화를 주게 됩니다.
당시 유럽의 천연두는 근대의 흑사병이나 신대륙의 두창에 비해서는 사망률이 훨씬 낮았지만, 19세기까지도 여전히 위협적인 질병이었습니다. 1680년 무렵 런던에서는 한해에 5000명가량의 환자가 발생하여 그 가운데 20%인 약 10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됩니다. 이 무렵 유럽, 특히 영국에서는 천연두를 근절할 조치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천연두의 끔찍한 개인적·사회적 폐해를 널리 알리는 활동이 활발하게 벌어졌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영국의 의사 에드워드 제너(1749~1823)가 우두접종법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http://news.naver.com/news_read.php?oldid=2004021800005483096
1798년 영국의 외과의사 에드워드 제너(Edward Jenner)는 소의 젖을 짜는 처녀들은 천연두의 후유증인 반흔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주목하고 그 이유는 천연두의 가까운 사촌벌에 해당하는 소 천연두 우두에 의한 것임을 알아냅니다. 이 생각은 한단계 더 발전되어 사람의 천연두 고름을 피부에 긁는 인두 접종보다 우두의 고름을 피부에 긁어 주입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믿은 것입니다.
제너(Edward Jenner)는 이러한 자기의 생각을 확인하기 위해서 직접 실험을 해 보기로 합니다. 소의 젖을 짜는 집안 하녀가 우두에 걸리자 하녀의 손바닥 종기에서 고름을 채취하여 하인의 아이 중 8살짜리 소년인 제임스 핍스에게 우두의 고름을 접종하여 우두가 생기게 했습니다. 소년은 팔에 상처가 몇 개 생겼을 뿐 곧 회복되었고, 6주 후 진짜 천연두 고름을 주사했지만, 소년은 천연두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제너(Edward Jenner)는 소년에게서 천연두에 대한 면역을 최초로 확인하였습니다.
제너가 종두법의 발견을 공표하였을 때 종두법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영국의 영원한 맞수 국가인 프랑스 나폴레옹이었습니다. 제너의 종두법을 알게 된 나폴레응은 즉시 장병들에게 예방 접종을 받게 했던 것이지요. 뒤이어 미국의 토마스 제퍼슨 대통령도 1801년 가족에게 접종 받게 하면서 미국에도 종두법이 보급이 됩니다.
정작 영국의 왕립 학회는 제너의 공덕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1789년에는 영국예방접종반대협회가 결성이 되었고 이들의 저항 또한 거세었습니다. 하지만 1802년 제너는 정부로부터 1만 파운드의 연구비를 지급받게 되면서 이 문제는 해결이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연구를 더욱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제너는 인간의 문명이 처음 발생 할부터 함께 해 온 인류 문명의 최초의 전염병이었던 천연두의 그늘에서 처음으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인류가 전염병 통제를 최초로 가능하게 만들어 주었으며 실질적인 서양 의학의 발달이 가능할 수 있는 바탕이 되어 주었으며 이에 수반되는 현상으로 인구의 증가와 문명의 발달이 가능하게 해 주었습니다.
5-5. 루이 파스퇴르와 미생물학의 시작
제너의 종두법이 발견 된 이후 의학의 여러 분야에서 많은 발전을 하게 됩니다. 1847년에는 영국의 제임스 심프슨이 클로로포름이라는 마취제를 사용하기 시작을 하였습니다. 또한 공중보건법이 제정이 되고 상수도원의 관리를 통한 콜레라 전염병 관리는 가능해 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전염병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전염병의 원인이 되는 미생물들에 대해 밝혀지기 시작한 것은 1864년 프랑스의 화학자이면서 미생물학자이고 동시에 의학자이기도 한 에 루이 파스퇴르(1822-1897)에 의해서였습니다. 그는 전염병의 원인이 박테리아 때문임을 밝힌 최초의 학자였습니다.
http://news.naver.com/news_read.php?office=hani21&article_id=4485
1860년대 당시 루이 파스퇴르는 프랑스의 양조업자들로부터 자신들이 만든 포도주가 왜 쉽게 부패하는지 그 원인을 밝혀 달라는 의뢰를 받습니다. 그리고 파스퇴르는 현미경을 관찰한 결과 포도주 속에 지금 우리가 박테리아라고 부르는 아주 작은 생물이 있어서 부패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또한 포도주를 끓이면 그 안에 있는 세균이 죽는 다는 사실도 밝혀냈습니다.
하지만 그의 업적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당시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의사들과 학자들이 갖고 있는 미생물의 자연 발생이 틀렸다는 사실을 실험을 통해서 증명을 해 보였습니다. 그의 발견은 훗날 무균처리법의 발달에 가장 중요한 것이 되었습니다.
이 밖에도 파스퇴르는 닭 콜레라와 탄저병, 디프테리아를 예방 할 수 있는 백신을 개발을 하고 1881년에는 광견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혈청도 개발 하게 됩니다. 당시 광견병에 의한 사망률은 거의 100%에 가까웠는데 이러한 광견병의 치사율을 1% 미만으로 낮추게 되면서 광견병의 공포로부터 유럽을 해방 시켰으며 이로 인해 유럽 전체에 명성을 떨치게 됩니다.
뒤에 파스퇴르는 자신이 고안한 예방법에 사용한 약화된 균을 백신(vaccine)이라 하고, 백신을 사용하여 질병을 예방하는 방법을 예방접종(vaccination)이라 명칭 하였습니다.
백신(Vaccine)의 어원은 라틴어로 암소를 의미하는 vacca 에서 유래한 것으로 제너(Edward Jenner)가 천연두(smallpox)의 예방법을 고안할 때, 천연두 균을 직접 주입하는 것 대신에 병원성이 약한 우두(소 천연두)에 걸린 암소를 이용한 우두법을 최초로 시행한 것을 기리기 위해 파스퇴르가 붙인 이름입니다.
파스퇴르의 중요한 업적은 크게 4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1. 포도주의 부패는 미생물에 의해 일어나며 발효 또한 마찬가지 원리라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2. 미생물을 없애는 멸균법을 발견하였습니다.
3. 탄저병을 예방하고 칠하는 접종법을 개발하였습니다.
4. 닭 콜레라와 디프테리아, 그리고 광견병에 대한 접종법을 개발하였습니다.
1888년 프랑스 정부는 위대한 업적을 남긴 파스퇴르를 기념하여 “파스퇴르 연구소”를 세웠으며 1895년 세상을 떠날 때 까지 이 연구소에서 연구를 하며 훌륭한 제자들을 배출하였습니다.
△ 루이 파스퇴르가 말년에 세운 파스퇴르연구소.
http://blog.naver.com/teletubby21.do?Redirect=Log&logNo=60001480994
이들 중에는 훗날 탄저균, 결핵균, 그리고 콜레라의 균을 분리해 내는데 성공한 독일의 미생물학자인 로베르트 코흐 같은 사람도 이들 중 한명입니다. 코흐는 뒤에 최초의 화학 요법을 발견하게 된 에를리히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베트만은 파스퇴르와 코흐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고 합니다.
“파스퇴르가 세균학을 과학의 한 분야를 만들었다면, 코흐는 그것을 보다 정확하고 정밀한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어찌 보면 파스퇴르의 가장 큰 업적은 로베르트 코흐와 같은 인재를 양성하였다는 점일 것입니다. 파스퇴르와 코흐 이후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기에 걸쳐 여러 세균학자들의 노력으로 많은 병원체가 발견이 되었습니다.
파스퇴르 이후에 발견된 병원체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875년 뢰쉬 이질 아메바
1876년 코흐 탄저병
1879년 나이세르 임질균
1880년 에베르트 장티푸스균
1880년 한센 나병균
1882년 코흐 결핵균
1883년 코흐 콜레라 균
1884년 클렙스 디프테리아균
1894년 키타사토 페스트균
1898년 시가 세균성 이질균
1905년 샤우딘 매독균
20세기 들어서는 세균 이외에 바이러스와 곰팡이와 리케차 등도 전염병의 원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인류는 전염병 퇴치에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전염병학의 입장에서 서양 의학의 역사를 살펴본다면 서양 의학의 실질적인 아버지는 천연두 종두법을 발견한 제너이며, 그러한 정신을 이어받아 서양 의학을 탄생 시켜 지금의 현대 의학으로 발전 할 수 있게 해준 어머니의 역할을 한 것은 루이 파스테르입니다. 이분들에 의해 전 세계는 전염병의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첫 희망을 얻게 된 것입니다.
5-6. 최초의 화학요법 살바르산 606
천연두에 대한 종두법이 나온 이래로 1890년 에밀 베링에 의해 디프테리아 균이 만드는 독소를 파괴하는 물질인 항독소가 발견이 되었고, 1906년에는 알버트 칼넷과 카밀 구에린에 의해 결핵균에 대한 백신인 BCG 가 만들어 졌습니다.
하지만 전염병의 근원이 되는 미생물에 직접 타격을 주고 균을 멸균 시켜버릴 수 있는 치료제가 발견이 된 것은 1910년에 가서야 가능하게 됩니다.
1890년 파울 에를리히(1854~1915)는 베를린에 자리 잡고 있던 파스퇴르의 제자인 코흐가 있는 전염병 연구소의 연구팀원으로 합류하게 됩니다. 당시 코흐는 염색 물질로 세균을 염색하는 법을 개발하여 관찰 중이였는데 에를리히는 코흐의 방법에 매료 되어 스스로 수백 번의 실험을 반복한 결과 코흐의 연구를 더욱 발전 시켰습니다. 그는 그러한 연구 과정 중에서 혈액에는 특수한 세균에 대한 항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파울 에를리히
http://www.pjt.hs.kr/nobel/nobellist/B15a1820a.html
그리고 에를리흐가 전염병 연구소에 들어간 지 20년이 지난 1910년, 에를리흐와 그의 연구팀은 드디어 매독 치료제인 살바르산 606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로서 매독에 대한 치료가 가능해 졌을 뿐만 아니라 인간에 의해 화학적으로 합성한 약으로 직접 병을 치료하는 최초의 화학요법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제너의 발견이 파스퇴르에게 새로운 방법을 제시해 주었고, 파스퇴르 연구소를 통해서 배출된 코흐를 통해서 미생물 분리 방법이 발전 하였으며, 코흐 전염병 연구소에서 교육을 받은 에를리흐를 통해 인류는 최초의 화학 요법을 얻게 되었습니다.
5-7. 최초의 항생제 페니실린
하지만 박테리아에 의한 전염병 치료에 획기적인 치료 방법이 나오게 된 것은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1928년에 이르러서였습니다. 알렉산더 플레밍이 최초의 특효약 페니실린의 발견은 제너의 종두법 발견과 비교될 정도로 인류의 전염병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습니다.
[ 알렉산더 플레밍 ]
http://www.sciencetop.co.kr/scwebzine/webzine.htm?tb=webzine&page=1&number=91&keyfield=&key=
1928년 플레밍은 배지에 세균을 기르는 실험을 하고 있었는데 관리를 소홀히 하였던지 배지의 일부에 생각지도 않게 푸른색 곰팡이가 생겼습니다. 다른 보통 사람 같았으면 배지가 망가졌다고 버렸을 상황이었지만 플레밍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오히려 그가 기르던 세균들 가운데 곰팡이 바로 가까이에 있는 것들은 잘 자라지 못하고 죽는 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이 사실에 착안하여 페니실린을 개발 하게 됩니다. 이 발견은 훗날 이차세계대전을 진두지휘한 영국의 위스턴 처칠 수상의 생명을 구함으로써 영국 연합국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줍니다.
페니실린의 발견은 질병과 전염병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을 제시해 주었고 페니실린에 이은 치료제들의 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됩니다. 1932년에는 프론토질이 세균성 질환에 쓰이게 되고 1938년에는 설파 제제가 폐렴, 화상, 외상 감염에도 쓰이게 됩니다. 이렇게 1942까지 3천 종에 가까운 설파제가 개발이 되어서 각종 감염증에 쓰였습니다.
그러나 플레밍의 페니실린과 같은 항생제가 널리 사용될 수 있기 까지는 플레밍이 페니실린을 발견 한 때로부터 14년이라는 세월이 걸린 후에야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1939년 제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약의 수요가 증가 하였고 1941년 미국이 참전을 결정하게 되자 미국 정부는 미국 회사에 거약의 자본을 투자 하면서 페니실린을 대량 생산할 것을 요구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페니실린은 감염증의 만병통치약으로 그 명성을 떨치며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하게 됩니다.
<생각해봐요>
감염성 질병의 원인균들이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 했던 것은 상제님이 마테오리치 신부의 탄원에 의해 배드로 성당에 처음 내려 왔던 1830년데부터라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그동안 인류의 역사 속에서 보이지 않는 신명으로 작용을 하던 병원균들이 상제님의 명을 받고는 본인들의 정체를 이 인간 세상속에 들어낸것 같은 느낌마저 듭니다. 서양 의학의 역사는 무척이나 긴 것 같은 착각들을 많이 하지만 결국 서양 의학이란 것도 상제님께서 이 땅에 내려 오시면서 부터 시작된 학문입니다. 그렇다면 서양의학은 상제님의 명에 의해서 천상의 의학이 지하신들의 알음귀를 통해서 인간계로 내려온 학문이 아닌가도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