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하면, 재클린스타일의 부풀린머리에 가느다란허리 산뜻한 플레어치마를 입고 찐한 눈썹을 달고 총총걸음을 걷던 흑백화면들이 생각납니다. 전혜린씨가 검은머플러에 검은 옷을입고 걸었을 60년대의 명동은 빠리의 샹제리제 거리같은 문화와 낭만이 있었다고 합니다.
영국의 작가거리에선 작가들의 집뿐만 아니라 그들이 자주가던 술집도 모두 상품화되어 여행자들을 이끌고 있지요..우리나라 명동도 근현대를 아우르는 너무나 멋진 향수와 역사를 지닌곳인데.. 그 자취와 낭만이 남아있지않아 안타까운마음이 듭니다. 최근 서울 중구문화원에서 '명동변천사'를 발간, 이러한 명동의 역사를 담았다고해서 퍼온 글입니다.
'명례방골.혼마치(本町).모시전골…'.
시대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온 서울 명동(明洞)은 조선 초 한성부(漢城府)명례방(明禮坊)이라는 지명에서 유래했다. 일본인들의 동네라는 뜻인 '혼마치도리(本町通)'는 명동의 한축을 이루는 충무로의 일제시대 이름. 모시전골은 저동과 명동1가 일대에 밀집해 있던 모시가게에서 나왔다. 수도 서울의 역사와 함께 5백여년간 중심지 역할을 맡아온 명동. '유행의 일번지''금융 중심지''영화 예술의 요람' 등 다양한 수식어 만큼이나 굴곡 진 변화를 겪어왔다. 최근 서울 중구문화원은 '명동변천사'를 발간, 이러한 명동의 발자취를 담았다.
◇유행.예술.건달의 주무대=한국전쟁 직후 유행한 햅번 스타일이나 60년대 샤넬 스타일도 이곳에서 시작됐다. 1956년 신세계 백화점의 전신인 동화백화점에선 국내 최초의 패션쇼가 열렸다. 최경자.앙드레 김 등 패션 1세대들의 데뷔무대도 명동이다.
50년대 충무로 입구에서 명동에 이르는 좁은 골목길에 늘어서있던 다방은 예술과 철학이 난무하던 젊은이들의 해방구였다. '목마와 숙녀'로 유명한 요절시인 박인환, '명동백작'이란 애칭으로 불린 소설가 이봉구, 60년대 여류문인 전혜린 등 문화예술인들도 명동을 즐겨찾은 단골이었다. (특히 명동의 돌체다방과 술집 '은성'은 혜린이 자주 찾던 곳이래요, 지금도 남아있나요..? ^^;; 다방은 있다고 들엇는데..술집은..ㅠㅠ)
70.80년대는 통기타 가수들의 활동무대로 변했다. 중앙통 통기타거리에선 김세환.송창식.이문세 등의 공연을 생맥주 한잔과 함께 즐길 수 있었다.
90년대 초 강남에 '한국 유행의 일번지' 명성을 빼앗긴 적도 있었으나 이후 젊은층을 상대로 하는 중저가 의류매장이 들어서면서 다시 10~20대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현재 이곳에는 옷가게.제화점, 음식점, 레스토랑, 커피숍, 미용실 등 3천6백여 점포가 모여있다. 이 중 가장 많은 것은 옷가게.
최근에는 다양한 패션 의류점과 액세서리점, 화장품점, 패스트푸드점 등이 한 건물에 모여있는 대형 멀티숍이 인기를 모으고 있다. 2000년부터는 일본인.러시아인.중국인 등이 안과나 성형외과를 찾는 '병원쇼핑'이 새로운 풍속도를 그리고 있다.
명동은 오래전부터 '주먹 세계'의 무대로 악명을 떨치기도 했다. 한시대 조직폭력세계의 거물이 된 조양은 등이 일으킨 75년 사보이호텔 기습사건에선 회칼.쇠파이프 등의 흉기가 등장해 단순히 주먹으로 승부를 내던 건달들의 낭만적 시절이 막을 내렸다.
◇원래 이곳은=신세계백화점 건물(충무로1가)은 개항 후 일본영사관이 들어섰던 곳. 1927년 미쓰이(三井)재벌이 이 자리에 미쓰코시(三越)백화점을 세웠고 광복 후엔 동화백화점으로 상호를 바꿨으며 한 때 미군 PX로도 이용됐다.
1963년 삼성이 인수하면서 현재의 이름을 갖게 됐다. 명동거리 한복판에 있었던 국립극장도 1935년 일본영화를 상영하던 메이지좌(明治座)로 건립, 국제극장-시공관-예술극장-국립극장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가 현재 현대투자신탁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최근엔 명동 상인들이 주축이 돼 이곳을 복원키로 해 2005년쯤이면 옛 시공관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