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념(寂念), 그 고요한 경지를 향해 가는 기쁨
해금, 거문고 연주의 대가, 전통 국악인 김영재 명인의 마음공부
1990년대 초, 사람들은 우연히 듣게 된 한 해금 연주곡의 선율에 빠져들었다. 애절하면서도 아련하고 경쾌하면서도 깊이 있는 곡조는 국악과 해금을 잘 몰라도 듣는 이들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전통과 현대가 잘 조화된 그 곡의 이름은 바로 ‘적념(寂念)’이었다.‘번뇌를 벗어나 몸과 마음이 흔들림 없이 매우 고요한 상태의 생각’이라는 사전적 의미대로 사람들이 갈구하는 마음을 그대로 표현했기 때문일까.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적념 들어봤어?’라는 말이 유행어처럼 퍼졌다.
해금과 거문고 연주의 대가이자, 작곡가, 교육자로서도 일가를 이룬 김영재 명인(61)은 가야금과 장구, 춤에도 두루 능통한 전통 국악인이며 무형문화재 ‘거문고 산조’의 보유자이다.
그가 마음공부로 이루고 있는 적념의 경지.
글 이권자 사진 김혜균
월드컵 무용음악 등 200여 곡 작곡
김영재 명인은 86아시안게임과 2002 월드컵 개폐회식의 무용음악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심청전’ ‘춘향전’ 등의 창극과 무용곡들, 그리고 드라마 ‘분례기’ ‘관촌수필’ ‘토지’의 주제가와 연극 ‘시집가는 날’ ‘오장군의 발톱’ 등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작곡가와 연주가로 활동해온 그는 전통국악을 시대의 흐름에 맞게 재해석하여 국악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간 작곡한 것만 200여 곡.
그는 동양악기와 서양악기를 접목시킨 연주가로도 유명하다. ‘적념’ 또한 ‘해금과 기타’ ‘해금과 첼로’ 등 서양악기와 합주되었듯이 동양음악과 서양음악의 고정된 틀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음악세계를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의 대표작 ‘적념’을 듣고 있노라면 제목처럼 고요해지는 느낌이라고 한다. 김영재 명인으로서는 참으로 감사한 일이었다. 자신이 바라고, 또한 사람들이 바라는 순간을 잠시나마 음악으로써 선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좀 더 근원적인 마음의 평화를 찾아야 했다. 열네 살 때 국악예술학교에 입학한 이후, 평생 국악만을 생각하며 살아온 김영재 명인. 좋아서 했고, 열심히 했고, 모든 걸 바친 만큼 인정도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언제나 이유를 알 수 없는 두려움과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
“뭐랄까, 내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불안과 공포가 있었어요. 괜히 가슴이 두근두근 초조하고, 대인 공포증처럼 사람들 많으면 싫고, 혼자 있기 좋아하고. 이유 없는 공포, 이유 없는 외로움 같은 것에 늘 시달리는 느낌이었어요.”
공연 때마다 괴롭히던 불안과 외로움
공연이 있을 때면 불안은 더욱 극에 달했다 한다. 무대에 오르기 전에는 너무 떨려 진정제를 찾았고, 무대에 서면 ‘누가 왔구나, 잘해야 할 텐데’ 등등 온갖 번뇌들이 뒤엉켰다. 공연이 끝나고 사람들이 다 빠져나간 후에는 혼자 악기를 든 채 밀려드는 외로움을 견뎌야 했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연주 실력, 수없는 공연, 국악에 대한 열정과 창의력, 우스갯소리도 잘하는 밝은 성품…. 그런 그의 내면에 이러한 고통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너무 괴로워서 상담도 받아보고 양약, 한약도 먹어보고 좋다는 건 다 해보았지만 나아지질 않았다. 도대체 왜 이럴까, 그 이유를 꼭 찾고 싶었다. 하지만 뾰족한 방법은 없었다. 그러던 2006년 여름, 동경예술대학 연구교수로 파견 나가 있을 때였다. 가족과 떨어져 일본에서 혼자 외롭게 지내고 있을 무렵, 아내 최광희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동경에도 마음수련원이 있다니 가보라는 것이었다. 아내는 이미 한국에서 수련을 시작한 터였다. 동경수련원은 그의 숙소에서 두 시간 거리. 불편한 교통에도 불구하고 그는 매일 나갔다. 그에게 수련원은 자꾸만 가고 싶은 즐거운 곳, 마음이 편안해지는 곳이 되어갔다.
“살다보면 뭔가를 배우고 채워 넣는 데만 애를 쓰기 마련인데,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마음을 버린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참 좋았습니다.” 수련을 통해 육십 평생을 돌아보며 그는 오늘의 자신을 있게 한 답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50년대 전쟁 직후 볼거리가 없었던 시절, 아이들은 동네에서 굿판을 벌이거나, 농악, 풍물이 열리면 우르르 쫓아가서 구경을 했다.
어린 영재는 집에 돌아오면 그날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흉내 내며 끼를 보였다. 어린 마음에 굿판에서 본 해금은 생긴 것도 재밌고 아주 명쾌하고 코믹한 소리를 내는 악기였다. 국악예술학교에 들어간 그는 해금과 거문고를 전공하며 본격적으로 국악인으로서의 길을 걷는다.
학교에는 기라성 같은 국악계의 명인 지영희, 신쾌동 선생이 있었다. 해금의 지영희 선생은 국악지휘자로서도 선구적인 역할을 하신 분이었고, 거문고의 신쾌동 명인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6호 거문고산조 기예능보유자였다.
스승들에게 김영재는 마음에 꼭 드는 학생이었다. 스스로 열심히 하는 그를 스승들은 잠시도 한눈을 팔지 않도록 매일 앉혀놓고 가르쳤다. 군대를 갔을 때조차 휴가를 나오면 집으로 오라는 호출이 떨어졌다.
그동안 잊어버렸나 안 잊어버렸나 한번 타봐라, 하고는 장단을 맞춰주시는 것이다. 그것이 될 성부른 떡잎을 알아본 스승의 심정이었다. 그리고 김영재는 모범생 중의 모범생이었다. “수련을 하며 보니까 떨림이나 공포가 다 거기서 비롯된 거였더라고요. 너무 잘해야겠다는 완벽주의, 선생님이 시킨 대로 해야 한다는 압박감, 틀리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한 마음….”
어린 시절부터 차곡차곡 쌓아온 그 마음들이 긴장과 공포, 쓸데없는 번뇌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던 거다. 김영재 명인은 수련을 하며 그런저런 마음들을 버려갔다.
비우고 나서 얻게 된 몸과 마음의 고요함
수련을 하던 중 그는 한순간 커다란 깨침을 얻는다.
마음수련은 순리를 알고 순리대로 살게 해주는 공부라는 것. 가만히 살아온 걸 돌이켜봐도 그랬다. 국악예술학교에 간 것도, 무작정 국악을 좋아했던 것도 스승님들을 만난 것도 다 그렇게 되어지게 하는 순리의 힘이었다. 그는 문득 중학교를 졸업했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국악은 비전이 안 보이니까. 공장에 다닌 적이 있어요. 쇳물을 끓여서 문고리 만드는 데였는데, 몇 개월 해보고는 적성에 맞지 않아 그만뒀어요. 그건 내 일이 아니었던 거예요. 그때부턴 흔들리지 않고 국악만 했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순리의 삶. 이제 그 삶을 방해하는 마음들만 버리면 되는 거였다. 인정받고 싶은 욕심, 비교하는 마음, 완벽하려는 집착…. 지난 5월 20일, 그는 또 한 번 큰 공연을 해냈다.
국악인생 45주년이자 회갑을 기념하는 뜻 깊은 연주회, 그날 그는 마음수련 10개월 차 수련생으로서 달라진 자신을 발견한다. “떨리는 게 훨씬 줄어 있었어요. 누가 왔구나, 잘해야 되는데 하는 번뇌도 안 일어나고, 그냥 연주에만 깊이 몰입하고 있더라구요.
정말 편안한 마음으로 즐겁게 연주를 했지요.” 무대 위에 선 그는 그야말로 마음수련의 효과를 단단히 보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마지막 연주곡은 역시 ‘적념’이 장식했다. 해금, 가야금, 거문고,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 드럼이 함께 한 협주곡. 제자들과 나란히 앉아 연주에 몰입하던 김영재 명인은 한순간 환희에 젖었다.
적념(寂念)…. 번뇌를 벗어나 몸과 마음이 흔들림 없이 매우 고요한 상태. 꿈에도 이룰 수 없을 것 같았던 이 경지에 자신 또한 이를 수 있음을 안 것이다. 그것은 마음을 비우고 버림으로써 얻어지되, 또한 누구나 갈 수 있는 지극히 평화롭고 자유로운 자리 아니던가.
마음수련월간지 2007년 7월호에서 퍼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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