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장소인 롯데 호텔커피샵에 들어서니 비발디 사계의 선율이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오케이 사장은 먼저와서 손을 들어 나를 불렀다.
"오사장 오늘 약혼식이라며. 약혼식 장소는 어디지?"
"여기가 약혼식 장소일세"
"커피샵에서 약혼식을?, 하객도 없이?"
"기다려보게나, 무싸"
잠시 후 출입문쪽에서 깔금한 투피스 정장을 한 캐리웹이 들어서고 있었다. 그 뒤를 따라서 사슴 눈망울을 한 어여쁜 규수도 들어왔다. 두리번 거리던 캐리웹은 이쪽의 우리를 보고 이내 성큼성큼 환한 미소를 띠며 다가와 자리를 했다.
"자 인사들 하십시다.저는 오케이라 합니다. 그리고 이쪽은 오늘 증인이 되실 저의 십년지기 무싸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무싸라고 합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목례를 가볍게 한 캐리웹이 받아서 소개를 이어갔다.
"저는 마크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쪽은 저의 동기동창인 꽃사슴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첨 뵙겠습니다. 꽃사슴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서로간 통성명이 끝나고 우리는 차와 음료를 시켰다. 다소 어색한 시간이 흐른 뒤 캐리웹 마크가 말문을 열었다.
"일전에 오사장님과 구두로 정했던 결투에 대한 내용을 문서로 만들었으니 읽어보시고 이의가 없으시면 밑에 서명하시도록 하시죠."
"마크 사모님, 아아니 결투라니 그건 또 무슨 말씀?"
"모르셨어요.무싸님.저하고 여기 오사장님하고 일생일대의 대결투에 대한 결투 조인식을하고 있는 거잖아요."
점입가경이라. 일단 마크가 건네준 [결투 서약서]를 읽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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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투서약서 ]]
오케이와 마크는 대결투를 진행함에 있어 대한민국의 신사도와 숙녀도를 걸고 아래 사항을 지킬 것을 서약합니다.
1.대결투 일시: 2002년 3월 ~ 5월(1~3차 결투 진행)
2.대결투 장소: 발안 C.C
3.대결투 방법:
1)제 1차 대결투(3/17); 18홀 스토록 플레이로 진행.
2)제 2차 대결투(4/21); 18홀 매치 플레이로 진행.
**2차 대결투로 승부가 나지 않을 경우 제 3차 대결을 진행한다.
3)제 3차 대결투(5/19); 하리수 매치 플레이로 진행
4.대결투 판정:
모든 룰은 PGA룰과 발안C.C 로칼룰을 적용하여 3판 2승제로 한다.
증인 무싸와 꽃사슴은 동반 라운드를하며 이 두사람의 대결투가 공정하게 진행되도록 한다.
5.대결투 결과에 따른 약속이행:
마크가 이길 경우에는 오케이가 마크의 평생 머슴이 되고,오케이가 이길 경우에는 오케이가 원하는 바를 마크가 들어준다.
상기의 대결투 서약에 대해 대한민국의 신사 숙녀의 명예를 걸고 증인앞에 약속을 이행할 것을 서약합니다.
결투자: 오케이 인, 마크 인
증인: 무싸 인, 꽃사슴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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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가 찰 노릇이었다.
별별 내기골프를 다 들어 봤지만 이런 내기는 첨이라.
그런데 오사장과 마사모의 불타는 눈길을 보니 이미 그들의 대결투는 시작된것 같았다. 이 농담도 진담도 아닌 것 같은 대결투와 승복조건에 어리둥절해 있는 나에게 먼저 서명한 오사장이 결투서약서를 내밀며 서명을 종용한다.
"여보게 무싸 뭐하나. 얼른 서명 하게나"
"하여튼 알았네. 나원참 기가차서"
우리는 무슨 역적모의에 사발통문 돌리듯 네장의 서약서에 서명했다.
식어가는 찻잔에 다소 대결투의 열기도 숨이 죽을 무렵 마크 사모님이 먼저 말을 꺼냈다.
"오사장님 지금 노비문서에 서명하신거 아시죠"
"물론입니다. 마사모님 미혼이란거 알고 있습니다.마사모님은 지금 혼인 서약서에 서명하신겁니다."
"원하는 것은 뭐든 들어준다고 했으니까, 걱정 마십시요"
"그런데 다 알겠는데 하리수 매치 플레이는 뭡니까?
별별 방법 다들어 봤지만 금시초문이라서요"
"아 그거요, 하리수가 지금 골프친다면 어떻게 치겠어요"
"그거야 뭐 이젠 여자이니까.치마입고 레이디티에서 여성용 골프채로 치겠지요."
"바로 그거지요. 오사장님은 저의 골프채를 가지고 레이디티에서 치시고 저는 오사장님의 골프채를 가지고 남성용 레귤러티에서 치는 거죠.
치마입으란 말까지는 안하겠습니다."
"그렇게하면 마사모님께서 불리하지 않으실까요"
"천만에요, 꼭 그렇지 만은 않을 겁니다. 그리고 하리수 게임 하실려면 한번은 저를 이겨야 할 겁니다."
"하하하 그렇게 자신만만하십니까. 좋습니다. 그럼 이제 서약식도 끝났으니 제가 잘아는 횟집에 가서 식사나 합시다."
골프역사에 전무후무한 대결투 서약식을 마친 우리 네사람은 의기양양하게 명동 횟집으로 향했다.
나의 손폰에서 전자음이 요란스레 울린다. 나의 손폰 벨 소리는 롯떼 껌 로고송이다.
요즘 좋은 노래도 많지만 난 아직도 7~80년대 민주화 운동하던 시대의 노래들이 정겹게 들리는 까닭은 386세대의 추억에 대한 미련 때문일까!
추억에 잠겨 잠시 딴 생각을 하는 사이에 다시 두 번째 손폰이 울었다. 제1차 대결투 날짜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토요일 오후 동네 연습장에서 안양 베네스트 연습장으로 훈련캠프를 바꾼 오케이 사장한테서 온 전화였다.
오케이 사장은 전력노출을 피하기 위해 훈련장소를 바꾸었을 뿐 아니라 나를 대결투의 전략 연구소장으로 임명하고 마크 사모님에 대한 훈련상황을 면밀히 관찰하게 하는 한편,
자신이 이 결투에서 승리해서 장가 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을 해온 터여서 우린 이제 마치 냉전시대에 FBI와 KGB가 했던 첩보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이미 상호 탐색전에 들어가 있었다.
“여보게 무싸! 그 쪽 상황은 어떤가? 마크는 어쩌고 있느냐고?”
“여전히 예쁘구먼. 오늘은 날씨가 너무 포근하여 웃옷을 벗고 반팔차림으로 스윙하는데 흰 살결이 아주 예술인데. 게다가 뭔 마음에 변화가 있었는지 겨울연가의 최지우 헤어컷을 했다네. 한번 와서 보지 그래,상큼한데”
“이 친구가 지금 놀리고 있나. 아 어서 베네스트로 오게나. 작전 숙의 좀 하게. 15번 타석이야. 그리고 난 아직 점심 전이거든 올 때 뭐 김밥이라도 싸오라고. 난 오늘 여기서 1000개는 때리고 갈 테니까 말야. ”
“알았네. 총알 같이 날아 가겠네. 그리고 내가 디지털 카메라로 마크가 스윙하는 거 10초 동영상으로 촬영해 놓았으니까. 자네 노트북에 연결해서 보면서 작전을 짜 보세나. 작전 명은 [처녀장가] 아니 것는 감.”(4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