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8일 저녁 회기역 근처, 마을버스를 잘못 타 삼십 분 늦게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덕분에 스무해 전 다닌 학교를 스치듯 보는 것을 위안 삼아 걸음을 재촉했다. 그곳에서 한 시인을 만났다. 조혜영! 참석자들이 돌아가며 그의 작품을 읽고 있었다. 잠시후 차례가 왔고, <옷 수선 가게>를 읽었다. 느낌이 어떻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던 것같다. "박노해의 시집이 생각나네요. 『노동의 새벽』이던가요? 그리고 지난 3월 갔던 상암동 박정희기념관도 떠오릅니다. 그곳 전시실에 70년대 눈부신 경제발전을 소개하며 시에 나오는 봉제공장과 미싱사들의 모형이 있었습니다. 성장의 열매는 권력자들이 전부 차지하고, 죽도록 일만하며 착취 당했던 분들이지요.“
막연한 선입견이 있었다. 시인이라면, 그윽한 눈빛으로 아련히 허공을 바라보며 자연과 인생을 예찬하는, 그래서 뭔가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멋스러운 사람들. 시인은 다 그런 사람들 아닐까? 하는. 하기야 살면서 시인을 만나본 기억이 거의 없으니... 아니었다, 그는 그냥 동네 아줌마였고 내 누이 같았다. 적어도 겉으로는. (시집을 읽은 후 그 생각이 크게 잘못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진짜 시인이었다)
낯선 사람과의 만남에서 비슷한 취향, 취미를 발견하는 건 작은 기쁨이다. 얘기를 나누던중 그와 나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혼자 하는 여행을 좋아한다는 것. 그도 약간의 역마살을 가진 사람인가 보다. 물론 차이점도 있다. 그는 그렇게 훌쩍 떠난 적이 많았겠지만, 나는 생각만 했을뿐 정작 떠난 적은 거의 없었다.
저녁을 먹으며 그의 삶과 얘기에 귀기울였다. 정확한지 알 수 없지만 내 기억은 이렇다. "현재 남편과 두 자녀와 함께 동인천에 살고 있다. 처음 서울에 올라와 미싱사 보조, 시다를 했다. 오 년여를 (강화도옆) 교동도에서 살았다. 당시 학교 급식실에서 일했고, 성추행을 당한 경험이 있다. 그리고 우울증에 걸려 정신병원에도 여러 해 있었다. 인천 GM 대우, 콜트악기 공장 등 현장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해왔다.”
시집을 받았다, 4월에 갖 펴낸 따근따근한 선물이었다. 어줍짢은 자존심에 저자 서명은 받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런데 (책을 읽은 후) 또 생각이 달라졌다. 살짝 후회가 된다. 이럴줄 알았으면 표지에 그의 서명이라도 받아둘 걸 그랬다. 짧은 만남을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도록. 그날 전철 막차를 타기 위해 우리는 서둘러 일어서야했다. 만석동 근처(나는 김광미 작가의『괭이부리말 아이들』로 이 곳을 기억한다) 에 산다는 그는 자정이 훨씬 넘어서야 집에 도착했을 것이다.
만남 이후 출퇴근 버스를 오가며 천천히 시집을 읽었다. 습관대로 밑줄도 긋고, 인상적인 시 제목에 동그라미도 치며. 그리고 알았다. 그가 4년 가까이 우울증에 걸렸고, 적어도 여덟 번 이상의 수술을 받았다는 사실을. “숱한 날을 술주정과 패악질로 살던 아버지”(<교동도에서1>)와 “다 발라먹은 생선 가시처럼 저승길 준비하던 엄마”(<염>)를 부모님으로 두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찬 밥에 물 말아 묵은 김치 쪼가리 하나 얹어 밥 한 술 떠 넘기”는 노인들(<풍경>)과 같은 동네에서 살았다는 것도. “술냄새 풍기며 젖꼭지 건드리던 그 비릿한 웃음소리”(<봄에 덧나다>)를 들었고, “툭하면 독종”(<독종>)소리를 듣는다는 사실을. 그리고 결국 그가 흔들림없이, 아니 가끔씩 흔들리겠지만 결코 포기없이 노동문학 운동의 길을 꿋꿋이 걸어가리라는 것을. 착한 독종으로.
시집을 평한다는건 나에게 주제넘은 일이다. 생의 고비를 처절하게 경험한 사람, 현장에서 싸우는 사람들과 함께해온 시인만이 낼 수 있는 생생한 목소리는 더욱 그렇다. 그날 모임에서 누군가 나에게 시집을 읽고 서평을 쓰보면 어떻겠냐는 말에 손사래를 세차게 첬었다. 그럼에도 이런 어줍짢은 글을 쓴다. 왜 일까. 솔직히 모르겠다. 이 순간 떠오르는 단 한 가지 말, 미안함! 때문이다.
인상깊은 작품을 굳이 뽑는다면, <구제역, 그리고, 소>, <남은 사람들>.
“어쩔 수 없어 뒷걸음쳐 보다
구덩이 앞에 멈추면
그 순간 소들은 안다
매립과 매장의 순간을 (중략)
포크레인 바가지
소 대가리
포크레인 바가지
소 대가리
대가리
대가리 아! 소 대가리!“, (<구제역, 그리고, 소>중에서)
“세상이 이토록 가볍고 버거울 때는
오는 듯 가는 듯 때론 물 흐르듯
냇가의 작은 돌멩이 되어 가보잔다
물길에 젖어도 보고 때론 거슬러 올라가 보고
꺼지지 않는 열정만이 삶의 무기라며” (<남은 사람들>중에서)
어떤 책을 읽기 전과 후가 같다면, 그래서 달라진게 하나도 없다면. 책을 잘못 읽었거나, 애초부터 읽을 필요가 없는 책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시집을 읽은 뒤 당장 나에게 달라진 건 없다. 여전히 맥주집에서 마른 안주를 씹을 것이고,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7시에 집을 나가, 여덟 시에 돌아오는 쳇바퀴 생활을 계속할 것이다. 집이나 직장 주변에 장기 파업사업장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살아갈 수도 있다. 다른 한 편 잘난 척 어깨에 힘 주고, 가끔 글 쓴답시고 또 잘난 척, 깨끗한 척 위선을 떨지도 모를 일이다.
시인을 따라 봄에 덧난 후, 곧바로 만나고싶은 사람, 읽고싶은 책이 생겼다. 김사이 시인과 그의 작품이다. 왠지 가리봉동의 시인이라는 그를 만나볼 차례라는 직감이 왔다. 설랜다. 어떤 사람일까, 어떤 시를 담았을까. 감히 그에게 “당신이 쓴 시집 한 권만 주세요. 꼭 읽고 싶네요.” 하고 손을 내밀어 보고싶다.
※ 조혜영: 시인, 1965년 충남 태안 출생, 2000년 제9회 전태일 문학상 수상.
시집 『검지에 핀 꽃』, 『봄에 덧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