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 강의를 하고 있는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
*삐딱하게 보기 : 미국과 이스라엘의 '무한전쟁' 정신분석
슬라보예 지젝의『향락의 전이The Metastases of Enjoyment』(국역본 : 이만우
옮김, 인간사랑, 2001. 인용쪽수 생략)에는 스펙타클 시대와 전쟁에 관한 라캉주의적 분석이 독특하게 소개되어 있다. 지젝의 말을 들어보자. "현대적 매체의 문제는
우리가 허구와 현실을 혼동하도록 유혹하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그 매체의 '초현실적' 성격에 있으므로, 그것들은 상징적 허구를 위한 공간을 개방하는 공동(空洞)을
채운다. 상징계는 그것이 궁극적으로 허구의 지위를 가지기 때문에 현실에 대한 미미한 거리를 유지함으로써만 기능화된다." 이 말을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라캉과 지젝이 말하는 상징계, 혹은 상징적 현실은 이를테면, 우리가 그것에 적당히 무관심하거나 거리를 두지 않으면, 우리에게 위협이 되고 또한 붕괴될 구멍을 가지고 있는 그런 현실이다. 예를 들어, 우리 손에 대장균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만 평소 때와 다름없이 손을 씻고 식사를 하는 게 우리의 습관이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상징적 현실은 어느 정도의 대장균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에 의해 지탱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손에 대장균이 얼마나 많은지 현미경으로 직접 확인한다면, 다소
놀랄 것이다. 무심한 사물이자 교육받은 지식이라 생각했던 대장균이 갑자기 우리에게 의미 있는 대상 a의 물질적 형태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새로 발견된 대장균이 대상 a자체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현미경이나 기타의 자연과학적 교육수단을 통해 그런 대장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잠시 그것들에 혐오감을 보이지만, 우리는 곧 그 충격을 잊어버리고 다시 씻지 않은 손으로 식사를 한다. 여기엔 어떤 논리적인 순환이 있는데, 대상 a는 바로 그런 상징적-논리적 순환을 근본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일종의 환상적인 텅 빈 충격이자, 놀람이다. 대상 a는 무의미하게 보였던 어떤 사물이 갑자기 우리에게 의미 있고 곤혹스럽게 다가오는 놀람이자 불안
그것이다. 프로이트는 어린아이가 겪는 최초의 불안(향락의 대상인 어머니와 떨어지는 상징적 분리-불안)을 더 큰 불안을 막기 위한 예방조치라고 말한다. 현실은, 그것을 운용하는 경제적 수단으로 대상 a에 의한 충격과 놀람을 구조적으로 동반한다.
평소의 상징적 현실 속에서 대상 a의 기능은 상징적 현실을 지탱하기 위한 일종의
경제적 충격요법으로 기능하는 게 보통인 것 같다.
하지만 이런 대상 a자체가 상징적 현실을 구조화하게 하는 어떤 틈새를 더욱 많이
채워나가면서 현실을 아주 불안하게 만들 수도 있다. 가령 TV에서 수 차례 반복적으로 방송되곤 하는 광우병 파동을 보자. 평소에 우리는 소고기를 즐겨 먹지만, 어느
날, 소에게 준 사료가 그 소를 미치게 만들고, 그것을 먹은 사람들이 소와 똑같이 미치는 증상을 나타낸다고 하는 의학적 실험결과가 나오며, 그것은 곧 수많은 방송매체를 통해 전파된다. 예상되는 결과는 뻔하다. 엄청나게 많은 소가 죽어나가고, 정육점과 고기를 파는 음식 집은 문을 닫게 된다. 하지만, 그런 광우병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니라, 어떻게 보면 우리가 소고기를 즐겨 먹는 현실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도 있다. 우리가 소고기를 먹는 현실은 그 현실에 대한 어떤 무지를 감추고 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는 허구적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더라도, 막상 광우병 파동 시에는 소고기를 먹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이 우리의 이런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가, 가 여기서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일단 주목할 것은, 그런 대상 a의 발견을 현실로 확장시키는 매체, 그 자체의 문제이다. 다시 말해 그런 대상 a는 매체를 통해서만, 지젝의
말을 빌리면, "상상적 과잉성장"을 가능하게 한다. 우리가 이 시대를 그렇게 부르는
스펙타클의 기능이야말로, 이런 상징적 현실의 틈새를 과잉으로 만회하려는 "상상적
과잉성장"을 가능하게 한다. TV나 비디오와 영화뿐만 아니라, 컴퓨터 오락게임 등
그러한 매체는 부지기수다. 하지만 매체를 비판하는 일은 별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매체를 통해 우리가 상징적 현실을 이해하고 구성하는 어떤 행위, 이데올로기적
행위의 수준이다. 즉 우리가 광우병 파동의 소식을 접하고 소고기를 먹는 행위를 기피하는 그 이데올로기적 체험이 중요한 것이다. 지젝은 다른 글에서 헤겔의『대논리학』의 개념을 빌어, 이데올로기=허위의식이라는 고전적 정의인 '즉자적 이데올로기'(ideology in-itself)나 루이 알튀세의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ISA)에 대한 개인의 상상적 동일시("이데올로기적 장치가 개인을 주체로 호명한다"는 것)라는 '대자적 이데올로기'(ideology for-itself)의 체험을 넘어선 '즉자-대자적 이데올로기'(ideology in-for-itself)에 대해 언급한다. 지젝은 '즉자-대자적 이데올로기' 체험의 한 예로 스펙타클 사회에 대해 언급한다. 즉 매체들이 미리 현실에 대한 지각을
구조화하고, 현실과 현실의 이미지를 미학화하는 것을 구분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Slavoj Zizek, The Spectre of Ideology, The Zizek Reader, Oxford :
London, 1999 참조)
지젝의 말을 계속 들어보자. "이러한 상상적 과잉성장이 상징적 허구를 위한 공간을
충족시킬 때 무엇이 발생하는가? 창조적인 상징적 허구에 의해 채워진 공동은 타대상, 욕망의 대상원인, 그리고 욕망의 분절을 위한 공간을 제공하는 텅 빈 틀이다. 이러한 공동이 채워질 때 타대상(a)과 현실을 분리시키는 거리는 사라진다. 따라서 타대상은 현실이 된다(...중략...)타대상이 현실에 지나치게 접근하는 불가피한 결과는
상징적 허구의 활동을 질식시키므로, 따라서 현실 그 자체의 탈현실화이다. 현실은
더 이상 상징적 허구에 의해서 구성되지 않고, 상상적 과잉성장을 조절하는 환상들은 직접적으로 현실을 장악한다. 여기서 폭력은 정신병적인 행위로의 이동을 가장하여 실현된다." 지젝은 스펙타클의 시대에서는 우리의 향락의 핵심인 대상 a가 상징적 현실을 구성하는 어떤 결핍의 기능을 떠나 그 자체로 완전한 현존과 자립을 획득하게 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상징적이고 히스테리적인 현실의 수준에서 대상 a의 현존을 믿어 의심하지 않는 정신병이 그 자체로(in-itself) 자립화되는 계기를 가능하게 한다. 지젝은 구체적으로 보스니아 내전에서 일어난 강간과 인종학살, 그리고 서유럽에서의 스킨헤드의 폭력을 스펙타클 사회에서 그렇게 전면으로 드러난 주체의 대상 a를 정면으로 공격하는 예들로 보고 있다. 지젝은 악의
세 가지 형태로 자아-악(ego-evil), 초자아-악(superego-evil), 이드-악(id-evil)을
이야기한다. 이드-악은 그 합성어가 암시하듯, 자아의 어떤 목적이나 계산, 혹은 초자아의 이데올로기적 광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주체가 어떤 쾌락원칙을 근본적으로 유지하려는 데서 비롯된다. 그것은 일종의 무의식적인 충동이며 거기엔 자아나
초자아가 조절하고 중재할만한 어떤 죄의식조차도 자리잡지 못한다. 이드-악은 대개 "난 그냥 네가 기분 나쁘기 때문에, 널 즐겁게 때린다, 널 즐겁게 죽인다"라는 구문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바로 보스니아 내전이나 스킨헤드의 폭력에서 구현된 이드-악은 바로 주체가 원초적으로 상실한 향락의 대상 a를 그것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되는 타자(외국인, 다른 종교인, 다른 민족)의 면전에서 빼앗으려는 행위이다. 왜
그런가 하면 그런 타자는 폭력의 주체에게 향락의 대상 a 그 자체를 구현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 그런 타자는 폭력의 주체에게 어떻게 잉여-향락의 대상으로 구성되는가. 왜 그리고 현재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내전에서 보듯 그런 폭력은 이런 저런 정치적 중재에도 불구하고 계속 쾌락원칙을 배가시키면서 가속화되는가.
보스니아-세르비아 내전은 1989년, 소련의 붕괴이후, 맨 처음엔 종교적 갈등과 민족간의 분리독립의 요구를 통해 시작되었다. 바로 소련과 그것이 목표로 하던 공산주의라는 상징적 질서, 일종의 '큰 타자'(The Big Other)가 붕괴한 것이다. 이에 따라
유고연방이라는 단일국가 내부의 상이한 종교적 배경과 문화를 가진 민족들은 각각
자신이 상실된 큰 타자를 대신하여 자립적인 큰 타자로서의 지위를 요구하게 된다.
하지만 상징적 질서를 구현하는 큰 타자는 오직 하나이어야만 한다는 요구가 등장하고, 이에 따라 그런 큰 타자의 지위를 부여받을 만한 각기 상이한 민족 공동체들은
갈등에 휩싸이게 된다. 지젝이 있었던 슬로베니아는 독립을 성취했지만, 나머지 연방은 전쟁에 휩싸이게 된다. 보스니아-세르비아 내전은 바로 상이한 공동체가 이런
각자의 상징적 질서를 구축하는 원동력인 큰 타자에 대한 조직적인 파괴와 보복의
행위이다. 물론 여기에는 힘의 우위와 편들기가 절대적으로 등장하고, 그 전부터 전제가 되어 있었던 인종적, 문화적, 종교적 갈등이 전쟁을 통해 한꺼번에 노출된다.
세르비아 경찰과 민병대의 보스니아 이슬람 인에 대한 조직적인 강간과 학살은 바로
보스니아의 독립을 외치는 보스니아인 내부에 구현된 상징적 질서(이슬람 종교, 문화 등등)=큰 타자의 무능함을 전면으로 드러내는 '대상 a(소 타자)'에 대한 잉여 향락의 구현이다. 지젝은 보스니아 이슬람 아버지를 면전에 두고 아내와 딸을 강간, 살해하는 세르비아 민병대의 행위를 두고 바로 보스니아의 '상징적 타자=아버지의 이름'의 무능함을 폭로하는 근본적 행위라고 본다. 이렇게 상징적 질서의 무능함을 폭로하면, 남는 것은 타자 속에 구현된 '소 타자=대상 a'의 전면적 노출이다. 그런데,
이는 근본적으로 파괴될 수가 없다. "증오가 그 대상의 '실제적 속성'에 제한되지 않고 그 실제적 핵심, 타대상(대상 a-인용자), 즉 '그 자체보다 대상 속에' 존재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로 증오의 대상은 파괴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현실적으로 대상을 파괴하면 할수록 그 대상의 숭고한 핵심은 우리 앞에서 보다
더 강력하게 융기한다." 그러니까 끊임없는 학살, 강간, 폭력의 행위는 '최후의 보스니아인'이 사라질 때까지 계속된다는 것이다. 현재 압도적인 군사력과 미국의 지지를 등에 업은 채 행해지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무자비한 파괴와 살육의
핵심의 명분엔 바로 그런 이슬람 팔레스타인 자살폭탄 테러범의 마지막 색출까지라는 목표가 자리잡고 있다. 마지막 자살 테러범이 없어질 때까지 우리의 전쟁은 계속될 것이다라고 말하는 이스라엘의 샤론 총리, 마지막 테러범이 잡힐 때까지 테러 국가들에 대한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미국 조지 부시 대통령의 선언 뒤에는 이런 상징적 타자의 무능함을 폭로하고 남은 이후에 무능한 타자 속에 남은 최후의 잉여 향락에 대한 공격이 숨어있다. 그리고 그런 이스라엘은 똑같은 목표를 가진 미국의 지지를 받거나 비슷한 의지를 가진 다른 서방국가들의 침묵과 묵인에 힘을 얻고 있다. 왜
이들의 공격목표가 세계에서 가장 빈곤하고 더 파괴할 것조차 없이 상징적으로 완벽하게 무능력한 국가나 민족(아프카니스탄과 팔레스타인인들, 여기에는, 오호라, 북한도 포함되어 있다)을 향해 있는지는 이제 분명하다! 그리고 그런 전쟁과 파괴를 계속 수행하겠다는 테러에 대한 '무한 전쟁'의 선언 의도도 이젠 분명해졌다.
조셉 콘라드의 소설『암흑의 핵심』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지옥의 묵시록>은 아마
적이 현존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파괴와 살육이 끊임없이 행해지는 탈현대적 스펙타클의 전쟁 양상을 맨처음으로 보여준 것 같다. 히틀러가 좋아했다는 바그너의 <니벨룽의 노래>의 한 장인 <발퀴레의 기병>의 음악 테잎을 장착하고 공격용 헬리콥터에 단 확성기로 크게 틀면서 베트남의 난민촌을 무자비하게 공격하며 다른 한편으론
써핑을 즐기는 미군 장교와 휘하 병사들의 모습을 보라. 물론 이 영화의 배경이 되었던 베트남 전에서 미국은 베트남을 먼저 침략하고, 또한 그들 민족을 적으로 삼아 전쟁을 벌였지만, 이 영화에선 그런 명백한 적은 영화의 마지막이 끝날 때까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남는 건 무지비한 파괴와 학살과 광기의 악무한의 연속이다. 작년의
9.11테러는 헐리우드 영화에서 보듯 외부의 테러단체(대개 이슬람 광신도로 표상되는)의 침입 하에서 미국을 보호한다는 카우보이적 정신의 스펙타클의 환영을 자본의 힘을 빌어 가장 많이 창출하던 미국 자신이 자신들이 바라던 대로 상상한 사건을
현실의 층위에서 강력하게 되돌려 받은 일이다. 기시다 슈(岸田 秀)와 같은 일본의
정신분석 비평가가 말하는 것처럼, 한번도 외부의 침입을 받아본 적이 없는 미국은
그 수많은 인종과 다문화와 이질적인 것들의 공존을 허락하는 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가 저변에 깔린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 자신은 대단히 자족적이고 폐쇄된 공간에
틀어박혀 살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이들의 행복과 자족감은 그것을 가능하게 한 타인의 불행과 아픔에 대한 절대적인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심지어 미국의
좌파 지식인들조차 9.11테러가 일어났을 때, '왜 우리를 이리도 증오하는가'라는 무능한 기사를 낼 정도로 그들은 미국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환상적인 지식의
수준 이상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아마 9.11테러와 아프칸 전쟁에 대한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글에서 지젝이 말했던 것처럼, 미국인들은 이제
"그들을 '외부' 세계로부터 분리하는 허구적 스크린으로부터 걸어나와서 '실재' 세계에 개입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런 일은 '이곳'에서는 일어나면 안돼"라는 태도로부터 "이런 일은 '어디에서도' 일어나면 안돼"라는 태도로 매우 늦어버린 전환을 시도"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어디에서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
아프칸 전쟁에 최신으로 도입되었던 미국의 무인 항공기 '사냥꾼' 프레데터(Predator)와 그 항공기의 역할에 대한 미국의 인터넷 생방송 중계 때 일어난 사건을 보면, 미국이 어떠한 자기반성에 대해서도 얼마만큼이나 스스로 무능한 나라임을
고백하는 명백한 증거가 될 만하다. 남한에서도 그 보급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는
엄청난 액수의 돈으로 만들어진 이 미국의 무인 항공기 프레데터는 최소한의 희생을
통해 최대의 전과를 올리자는 걸프전 이후의 미국의 전쟁수행의 상징적 목표를 구현한 무기로 보인다. 프레데터엔 전투를 수행하는 현장을 직접 담을 수 있는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는데, 그것은 위성을 통해서 미국의 인터넷에 생방송 될 수 있다고 한다.
아프칸 전쟁이 거의 지나 고립된 탈레반의 남은 병사들을 사살하거나 체포하고 이들이 활동하는 지역을 색출하기 위해 무인 항공기가 활약을 하고 있었고, 미국인들은
인터넷과 그 밖의 방송매체를 통해 전쟁이 일어나는 아프칸의 상황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한데, 이 무인 항공기의 카메라에 좀 별난 장면이 포착되었다. 대략 7명쯤 되는 고립된 미군 병사들이 탈레반 병사들의 포위망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채 모조리 사살되는 몇 초간의 장면이 카메라에 찍혀서 미국인들의 안방에 그대로 생중계
되었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전투장면들을 즐기던 대다수의 미국인들은 스크린 내부에서 자신들의 형제들이 죽어 가는 충격적인 사건에 놀라 다들 고개를 흔들며 아찔했던 것이다. 라캉 식으로 말하자면, 그들이 바라보던 투명한 스크린에 일종의 '왜상적 얼룩(traumatic spot)'이 발생했던 것이다.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쾌락에 찬 시선으로 스크린을 쳐다보다가 되려 불쾌한 응시를 되돌려 받았다. 라캉이 응시와 시선의 분열의 예로 자주 보여주는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1533)의 그 왜상적 해골이
실은 그림을 보는 그 자신을 불쾌하게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미국과 이스라엘의 테러와의 무한전쟁을 또 다른 수준에서 가능하게 하는 것은 미디어를 통해
여과된 환상적 현실을 지켜보는 대다수의 무기력한 시선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지젝이 말한 것처럼, 오늘날의 진짜 적은 테러리즘과 같은 근본주의가 아니라 이를 바라보고 환상 속에서 구조화하는 무기력한 응시, 즉 이데올로기적 냉소주의다. 아마
미국인들은 <대사들>이 가르쳐주는 시선과 응시의 변증법적 계몽을 익히기 위해선
또 다른 충격적인 사건을 필요로 할지도 모른다. 그런 미국과 이스라엘, 그들의 폭력적인 환상적 허구를 하나의 얼룩으로 뒤틀어버릴 근본적 수준의 사건에서 말이다.
* 한스 홀바인, <대사들> (153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