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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하의 4번째 영화 <비열한 거리>(2006)는 주인공 병두(
영화에 따르면 그것은 한 마디로 식구를 굶기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내 입이건, 내가 아끼는 남의 입이건, 이 목구멍(들)을 끊임없이 먹을 것으로 채워 넣는 것, 산다는 건 그런 것이다. 우리는 다 그렇게 산다. 다 (잘) 먹고 (잘) 살자고 하는 일 아닌가? 먹을 것으로 입을 틀어 막(히)고, 그 어떤 모사와 배신과 비열함도 속 좋게 집어 삼키는 식구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은 영화의 주인공인 병두(
"병두 엄마 같은 인물이 병두를 도덕적으로 단죄하고 비판하지만 사실 거기서 얻은 돈으로 자기가 생
활한다는 아이러니가 가족주의의 핵심이라고 봤다. 그러면서 또 자기 아들은 그래도 착하다고 믿잖아.
자기 가족을 위해 남을 해할 수 있다는 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보편적 마인드인데도 말이
다."(유하, <Film2.0>과의 인터뷰
이 “아이러니”는 근본적으로 이 세상에 하나 이상의 식구(household)가 있다는 사실에서 배태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먹을 것은- 절대적으로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희소하지만, 이미 하나 이상의 입으로 이루어진 식구의 수는 부지기수이고, 거기에 각각의 식구를 먹(이)는 것이 동등하게, 그것도 도덕적으로 정당화되는 상황의 아이러니. 그것은 상대방이 그의 식구를 먹이기 위해 나와 나의 식구를 집어 삼키는 상황을 나와 내 식구가 (도덕적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식구는 먹여야 한다는 것이 삶의 정의이고, "모든 삶은…그렇게 분주하고 그렇게 열심"(<무림일기>, 123쪽)이기 때문이다.
무수한 입구멍들 만이 입을 벌리고 있는 세상에서 문화는 더 이상 폭력에 대립되지 않는다. 자기 코가 석자일 때, 제 “목구멍이 포도청”(<무림일기>, 118쪽)일 때, 조폭과 영화감독 간의 차이는 무의미해진다. 그 때 엇비슷한 것으로 드러나는 것, 그것이 이 영화가 제시하는 ‘벌거벗은 삶(Homo Sacer)’이다. 하지만 ‘조폭적인 삶’의 진실이 아니라 ‘삶 자체가 조폭적인 것’이라는 스케일 정도는 되야 한다. 그래야 ‘일개 조폭 영화’를 넘어설 수 있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때부터 우리들의 일상적 삶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해오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 영화도 내용상으로는 그 연장선상에 있다. 단지 조폭이라는 무리들이 우리 일상적 삶을 가장 극단
적으로 표현해줄 수 있는 대상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조폭이란 대상을 선택하게 된 것이며, 이 영화 자
체가 조폭영화의 장르적인 장치를 답습하고 있지 않다고 자신한다. 오히려 그것들을 통해 우리 소시민
적 사회의 알레고리를 봐주셨으면 하는 기대감이 있다.” (<맥스무비>와의 인터뷰
그러나 기껏 조폭영화 하나 때문에 ‘국민학교’ 시절 친구를 배반해 결국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영화감독 민호(남궁민)의 비열함은 ‘삶은 조폭적인 것’이라는 등식마저 넘어설 것을 요구한다. 삶 자체의 조폭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아니 그냥 ‘사는’ 조폭인 병두의 솔직함, 혹은 순진함은 이를 기어이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소시민인 민호의 비열함과 대비되면서, 궁극적으로 “조폭보다 더 무서운 건 조폭을 움직이는 먹물들이다” (<씨네21>과의 인터뷰
물론 이러한 전도는 조폭보다 더 조폭적인 사학재단(<두사부일체>)이나 깡패보다 더 깡패 같은 교사가 판치는 학교(<신라의 달밤>)를 배경으로 했던, <친구> 이후의 조폭 영화들에서도 충분히 읽을 수 있었던 암시일 뿐이라고 누군가 퉁명스럽게 지적한다면, 감독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별 문제될 건 없을 것이다. 어차피 “클리셰 아닌 건 없”(<천일馬화>, 24쪽)는 거니까. 그러나 그 때, “세상에 뻔한 이야기란 없다”(<무림일기>, 15쪽)고 얘기했던 시인은 사라지고, 논리적 모순을 시적인 긴장으로, 세운상가와 압구정동, 경마장에 대한 “매혹과 반성” 사이에서 진동했던 유하의 시 세계는 무너져 내릴 것이다. <비열한 거리>가 이전의 조폭 영화와 갖는 차이에 대한 질문이 중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에 대한 모범 답안은 영화 속의 영화를 만드는 민호(남궁민)라는 캐릭터가 쥐고 있다, 고 남들처럼 말해보자. 그가 만든 영화 속의 영화를 통해 성찰적 거리를 유지한다, 싶던 영화는 자신의 이야기로 다음 영화를 만들면 어떻겠느냐고, 부담 없이 들으라고 뇌까리는 황회장(
둘째로, 말을 (잘) 다루는 사람으로서의 유하는 정확한 말과 문장으로 이어지는, 말이 되는 시나리오를 만드는 데 자신이 쏟은 노력을 여러 인터뷰에서 누차 강조한 바 있는데, 이는 조폭이 고등학교에 들어간다거나, 조폭 두목이 동사무소 직원, 급기야는 검사와 결혼한다는 이전 조폭영화들의 터무니없음에 대한 감독 유하의 자의식과 맞물려 있는 것이다. <비열한 거리>를 전체적으로 짓누르는 진지함과 무거운 톤은 장르적으로 코미디의 관습에 따랐던 이전의 조폭 영화들이 일종의 농담이었다는 사실에 대한 반작용인데, <비열한 거리>가 “사실은, 안티조폭영화입니다”(<무비위크>와의 인터뷰
그러나 정말 <비열한 거리>는 감독의 말대로 “안티조폭영화” 일까? “안티조폭영화”는 더 이상 조폭영화가 아닌가, 아니면 여전히 조폭영화인가? 이 질문에 대한 진정한 답은 아이러니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 아이러니는 우리가 시인 유하에게서 읽을 수 있었던 종류의 것, 즉 시적인 것과는 좀 다른 것으로 보인다. 감독 유하가 <비열한 거리>에서 맞닥뜨린 아이러니란, 말하자면, 농담처럼 쏠 때에만 명중하고 정색하고 조준하면 맞지 않는 화살의 아이러니에 가깝다.
물론 그 화살은 우리의 삶이 조폭적이라는, 그런 의미에서 삶이란 비슷비슷한 것이라는 <비열한 거리>의 전언을 지칭하는 것인데, 그것이 기실 유하가 시인으로서 이미 깨달았던 통찰이라는 사실을 지적했던 이는 없었다. "독랄한 고문 전문가도 일요일이면, 믿쉽니다/ 독실한 믿음으로 구원의 기도 드리는 나라"(<무림일기>, 73쪽)의 아이러니, 즉 그가
문제는 이 통찰이 2006년이라는 시점에서 '일상적 파시즘'의 논리와 이루는 기이한 내적인 공명이다. 나쁜 놈들, 아니 비열한 놈들은 사실 저들이 아니라, 저들뿐만이 아니라, 우리들이기도 하다는 것, 아니 따지고 보면 우리가 더 나쁜 놈들이라는 암시.
안팎으로 자신을 먹여 살린 근거, 다시 말해 성찰의 대상이 되는 조폭 영화와 그것을 소비하는 관객들, 나아가 그런 영화를 만드는, 자신을 포함한 영화계 자체를 통째로 돌아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비열한 거리>가 일정한 성취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 민호가 보여주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씨네21>과의 인터뷰)을 통해 이 영화를 “안티조폭영화”로 둔갑시키는 것은 그 성취를 야바위로 만드는, 말 그대로 의미에서 “비열한” 짓이다. 아도르노가 지적했듯이 “스스로 그것을 수치스럽다고 비난한다고 해서 자신의 수치스러운 행위가 좋은 행위로 바뀌는 것은 아니"(<Critical Models>)기 때문이다.
<미지왕>(1996)이라는 영화의 마지막에 보면 감독인
물론 <비열한 거리>는 이처럼 자신을 대놓고 용서하는 지점까지 나아가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시종일관 농담처럼 브레히트식 거리두기를 전시하던 <미지왕>보다 <비열한 거리>는 훨씬 진지하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진지하게 드러내며 “안티조폭영화”라는 이름으로 영화가 수백만의 관객을 그러모을 때, 영화가 흘리는 죄의식의 눈물은 시나브로 악어의 그것에 가까워진다. “악어의 눈물에 끝까지 방심하지 말" (<무림일기>, 82쪽)라던 자신의 다짐을, 영화감독 유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까? 아니, 자신은 이제 악어라는 사실을 그는 인정할 수 있을까? 자신이 쓴 시의 법정에서 자신의 영화가 정죄 당하는 상황의 아이러니를, 유하는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마 그래야 할 것이다. 병두의 죽음을 사주한 종수도, 결국 식구는 먹여 살려야 한다는 병두 자신의 지상명제를 충실하게 이행했던 것에 불과한 것처럼 말이다.
“난 모든 종류의 진지함을 경멸했어”(<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49쪽)라고 외치던 시인이 자신의 태도를 180도 바꿔 조폭 영화를 만드는 자신의 죄의식을 진지하게, 정색하고 전시하며 흥행할 때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것일까? 시를 쓰는 게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그의 암울한 전망과 반열에 오른 영화감독으로서의 정체성을 인정하며, 그의 시집을 내다 버려야 하는 것일까?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단, 이제부터 그의 시와 영화에서 아이러니를 지우고 읽고 봐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아이러니는 이 시대의 시대정신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유하가 <비열한 거리>의 원제로 삼으려 했던
“게으른 시인은 대상을 바꾸며 깊이를 얻는 척한다.” (<행복한 책읽기>)
첫댓글 늦어진데다 심려까지 끼친 것 다시 한 번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폭차님 마음, 감사드립니다. 모두들 건강/건필하시길 바라겠습니다.
다행입니다. 활자가 눈에 들어올 정도의 몸은 된 듯하니, 정말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시인은 깊이 대신에 부피를 얻은 것 같아요. 그 몸집과 그 거드름... 애당초 패러디라는 게 깊이를 대가로 지불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몸도 성치 않으신 것 같은 데 찐한 글을 올리셨군요.^^ 말씀하신 그 아이러니가 우리 인간의 비극적인 조건이 아닐까도 싶습니다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고苦에 의거해 이해하고자 하는 비극적인 것에는 늘 이중구속이 함께 하지요. 즉 사람이면 누구나 보편화 경향의 충동을 가지고 앞으로 매진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과 동시에 단독화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한 발짝 뒷물러서지 않을 수 없을 거라는.... 문제는 양자의 궁극 사이에 화해가 불가하다는 것이겠지요.
다른 문제는 다 차치하고라도 조인성의 영화에서의 이미지는 깊이 이상의 강력한 정서를 환기시키는 것 같습니다. <아나키스트>라는 영화의 사내들이 <영웅본색2>를 흉내내면서 걷는 포스터와 대비한다면, 조인성의 포즈는 훨씬 외롭고 감동적인 것 같습니다.
짧으면서도 풍부한 답글들,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생각외로 세 분의 언급이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먼저 -로쟈님께서도 잘 아시리라 생각하기에 좀 의아하지만- "모든 진지함을 경멸"했던 '시인 유하'는 '깊이'란 것에 당최 별 관심이 없었죠. 표피적인 것, 가벼운 것, 덧없는 것(의 영원성)에 대한 그의 (보들레르적인) 환멸과 매혹만이 그를 세운상가에서 압구정동으로 그리고 다시 경마장으로 끊임없이 이끌었던/혹은 내몰았던 것이니까요. 아이온님께서 언급하신 비극성이나 니브리티님께서 지적하신 조인성의 (엄격하게 얘기하자면 영화가 아니라 포스터에 쓰인 스틸사진의) 포즈가 주는 정서의 정체는 궁극적으로 이러한
덧없음(transience)에, 보다 정확하게 얘기하면, 영원한 것은 없다라는 (절대적) 인간조건에 대한 체념적 수용, 혹은 인식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러므로' "가자, 헛됨의 끝까지"(<천일마화>, 18쪽)라고 외치는 유하의, 다시 말해 조인성의 태도가 비극적인 정조를 띠는 것은 따라서 놀라운 일이 아니지요. 그럼에도 로쟈님의 안타까움에 동의하는 의미에서 쓴다면, <비열한 거리>의 아이러니란 깊이[기피]/표피의 대립항보다는, 똑같은 통찰에 기반했다고 하더라도 서로 다른 물질적 조건과 토대에 기반한 두 매체/쟝르의 의미와 성공은 전혀 다른 성격을 띨 수 있다는 사실과 더 큰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미 시인으로서 성공한 그가 영화를 좀 얕잡아 봤다고 얘기할 수도 있겠구요. 그와 같은 시인은 여전히 그 하나 뿐이지만, 그와 같은 감독을 찾는 것은 이제 그리 힘든 일이 아닙니다. 나아가 그가 종종 물신화하는 1970년대의 뉴 아메리칸 씨네마에는 쌔고 쌨지요. 저의 불길한, 따라서 그만큼 틀리길 바라는 예감은 그가, 70년대 당시에는 예술가로 오인되었지만 얼마 안 가 평범한 장인으로 판명난 알란 J. 파쿨라 같은 감독의 전철을 밟을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후자가 당대를 풍미했던 음모이론(conspiracy theory)을 영화로 대중화시킨 장본인이라는 사실까지 염두에 두면, 둘 사이의 비교는 단순한 유비를 넘어서게 됩니다)
<비열한 거리>를 계기로 정점에 오른 듯한 인상이지만, 유하의 시나 글을 인용하면서 유하의 영화에 대해 쓰여진 많은 글들은 대개 시인으로서의 유하와 감독으로서의 유하를 구분하지 못한 채,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시인으로서의 그의 아우라에 눈이 멀어/겁을 먹어 딱 꼬집어 정확한 평가를 내리지 못했습니다. (정성일이 <씨네21>에 기고한 장문의 글이 그나마 가장 근사치에 갔지만, 마지막에는 그 역시, 너무 황당하다 싶을 정도로 흐지부지 꼬리를 내리지요...) 이런 맥락에서라면 누군가는, 시인이 조폭보다 더 조폭적이다라는 얘기까지 할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 전언을 통해 살아남는 것은 '영화감독 유하'가
아니라 여전히 '시인 유하'이겠지만 말입니다...
한가지만 더. 물론 아이러니는 아이온님께서 지적하셨듯이 '원리적으로 볼 때' 비극성과 내적으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문제는 인간 모두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 비극성이 초역사적으로(trans-historically), 인간사의 모든 시기와 모든 영토를 뒤덮지 않는다는, 단순하면서도 참 신기한 사실입니다. 제 '응응' 논문은 바로 이 질문에 대답하려 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야 세상이 힘드니까 그렇지 뭐,' 라는 단순한 역사주의의 유혹인데,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과 그것을 진정으로 넘어서 관념론도 역사결정론도 아닌 지점에 이른다는 것은 다른 것이라는 것 또한, 알고는 있습니다...^^
아자비님이 제기하신 화두를 오랫동안 간직할 것 같습니다. 저는 말씀하신 아이러니, 비극성 및 역사성이 만날 수 있는 지점을 하이데거와 하이데거 이후 헤겔주의에서 읽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헤겔을 드러내 놓고 얘기하지 않지요. 머지 않아 그쪽 계통의 사상가들이 한 소리할 날도 있으리라 믿습니다.^^
제 '깊이'는 마지막에 인용해주신 김현의 멘트를 이어받은 것인데요, 덕분에 보다 자세한 코멘트를 들을 수 있게 되어 목적을 초과달성했네요.^^
그렇군요. 그럼 제가 제대로 낚인 건가요? ^^
"이 “아이러니”는 근본적으로 이 세상에 하나 이상의 식구(household)가 있다는 사실에서 배태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먹을 것은- 절대적으로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희소하지만, 이미 하나 이상의 입으로 이루어진 식구의 수는 부지기수이고, 거기에 각각의 식구를 먹(이)는 것이 동등하게, 그것도 도덕적으로 정당화되는 상황의 아이러니. 그것은 상대방이 그의 식구를 먹이기 위해 나와 나의 식구를 집어 삼키는 상황을 나와 내 식구가 (도덕적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Bio-politic을 둘러싼 핵심 쟁점을 이렇게 훌륭하게 압축한 문장은 보지 못했습니다! 바로 이 아이러니에 또한 anti-globalisation 운동
이 이념적, 이데올로기적 어려움이 결부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각각의 식구를 먹이는 것이 동등하게 정당화되는' 상황 속에서 '문화와 폭력'이 더 이상 대립되지 않는 경우를 우린 오늘날 도처에서 접하고 목격하고 있으니까요.
제가 쓴 글에 그런 심오한 뜻이... ^^ 덧붙이자면 이러한 아이러니 개념은 로티 철학의 핵심이기도 한데, 그에 대한 서구와 우리나라 학계의 반응은 유하의 이 영화에 대한 영화계의 반응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있습니다. (즉 저는 이러한 아이러니 개념을 '돌파'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몇년 간의 한국문학, 그리고 한국영화 속에서 기이하게 공명하는 아이러니에 대해 쓰려던 글이 있었는데 김남시님 덕분에 논점을 보다 명확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유하, 황종연, 그리고 로티" 정도가 될텐데, 연말을 알차게 보내면 연초에는 뭔가 하나 나오겠죠. ^^)
아, 그리고 이곳 미중부는 이제 영하 5-10도가 평균입니다. 지난 주말엔 차문이 얼어서 열리질 않을 정도였죠. 독일은 어떤지 궁금합니다. 덕분에 거의 두 달간 감기를 앓았는데 (이제 거의 나아갑니다), 정~말 감기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아, 그랬군요 로티! 저는 제가 인용 - 사실은 copy, paste - 한 님의 글을 읽으면서 한나 아렌트의 Vita Activa 를 떠올렸는데요. 로티를 읽어봐야겠군요. 님이 계획하시는 글을 읽어보기 위해서라도, 아쟈비님이 연말을 알차게 보내시길 바래야 할 것 같군요. 여긴 아직 그렇게까지 춥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애들은 기침과 콧물을 달고 있지요. 건강 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