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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강촌마을 하단으로 이주
1편:피신생활시작
스치코프와 포옹한 장면이 동아일보에 기사화 되자 경찰과 광복청년단은 아버님을 좌경인물로 낙인찍어버렸다.
동아일보 기사를 보고 아버님은 자신의 행동을 크게 뉘우치셨다. 변명할 여지도 없어 보였다. 뜻을 같이 하던 동지들에게 연락도 하지 못하고 서울에서 기차로 부산역에 내려 바로 피신처를 찾아야 했다. 그때부터 경찰과 광복청년단원들은 진영집 근처에 밤낮으로 매복해가며 아버님을 체포하는데 혈안이 되어있었다. 혹시 정보를 얻을까하여 수시로 드나드는 경찰들, 청년단원들에게 어머님은 밤낮으로 시달려야 했다.
어머님이 시달림을 당하고 있을 때 아버님은 낙동강하구에 있는 이름도 생소한 下端이라는 강촌마을, 어느 기와집에 방을 얻어 놓고 피신생활을 시작하고 있었다.
下端, 멀리 태백산의 이름모를 작은 골짜기에서부터 모인 물길이 支川을 타고 흘러흘러 황지, 구미, 대구 금호강을 지나 밀양, 수산을 거쳐 이곳 하구까지 약 700리의 여정이다. 이곳 하구에서 강물로써 소임을 다하고 바닷물과 만난다. 이곳은 일본지주들이 김해평야에서 농부들이 피땀 흘려 지은 곡식을 일본으로 수송하기 위해 1차로 집하하는 곳이며 때로는 탈곡도 이곳에서 하였다.
부산항이 인접하여 항구까지 육로, 해상으로도 수송이 편리한 곳이라 일제부터 하단선창은 꽤나 번잡한 포구중의 한곳 이였다. 수많은 미곡수송배가 드나들던 낙동강의 끝(端)이라 하여 地名이 下端이라 불려지게 된 것으로만 추정 할뿐 그 상세한 역사는 알 길이 없다.
해방이 되자 일본으로 돈벌이 갔던 큰외삼촌, 작은 외삼촌 그리고 이모는 귀국선을 탔다.
그들은 귀국 후 얼마동안 진영 집에 함께 살았다. 작은 외삼촌이 수산에서 돛단배를 타고 한달에 한번정도 진영에서 아버님이 피신하고 계신 하단까지 내왕하였다. 어머님은 쌀과 반찬, 옷가지를 정성껏 챙겨서 아버님에게 보내셨다. 하단으로 가는 날이면 주위사람들 모르게 새벽에 움직였다. 수산에서 배를 띄워 삼랑진, 호포, 구포를 거쳐 명지에서 뱃머리를 동쪽으로 돌려 일웅도와 을숙도 사이로 나있는 물길을 따라 빠져나오면 하단선착장으로 오게 된다. 명지면에서 운영하는 통통선이 명지와 하단을 이어주는 유일한 수송수단 이였다. 진영에서 출발 할 때는 항상 물때를 봐서 출발하였다. 순풍 때는 하단까지 여섯 시간정도 걸렸다. 아버님이 피신해있는 기와집 바로 뒤 샛강까지 배가 들어 올수가 있었고 늦봄부터 가을까지 울창한 갈대밭 속에 배를 숨길 수 있어 은신처로써는 매우 이상적 이였다.
기와집 뒤편은 갈대밭을 흙으로 메운 밭이 이천여 평 있었다, 왼쪽에는 하단 안동네까지 연결된 샛강이 흐르고 있었는데 동네로 들어오는 길목 외에는 삼면이 온통 갈대밭 이였다.
샛강건너편에 제방이 있었고 그 제방 안에는 수 만평의 천수답과 논이 있었다. 논 건너편에는 진한 소나무 숲으로 덮힌 降仙坮라 불리는 작은 동산이 있고 부산시민들의 분뇨를 수거하여 대치고개에서 낙동강까지 흐르는 긴 똥 다리가 논 한가운대를 지나가고 있었다.
아버님이 여기에 은신하면서 수염을 기르기 시작하였다. 도망자로서 얼굴모습을 바꾸어보려 했기 때문 이였다. 이름도 낙동강하구에 있는 섬 을숙도의 이름을 따서 裵乙叔 이라 假名을 지어 사용하였다. 여기서부터 고통스런 은신생활이 시작되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 직접 지은 아침을 드시고 앞산을 오른다. 앞산 중턱쯤에 있는 널따란 바위에 올라앉으면 살고 있는 동네와 기와집 마당까지 훤히 내려다보인다. 신작로 입구에서 오육십 미터 정도 샛강 쪽으로 걸어가면 기와집이 나온다. 들어가는 길은 2,5톤 트럭이 충분히 다닐 수 있었으며 이웃으로 여섯 채의 초가가 전부였다. 돌담인 두 집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갈대로 엮어진 울타리가 쳐져있었다. 기와집 울타리 안에는 또 한 채의 초가집이 있었는데 그 초가는 창고로 활용되어지고 있었다. 기와집과 초가집사이에 넓은 마당이 있었고 울타리 옆에는 우물이 있었다.
앞산바위에 앉아서 내려다보면 동네사람들 움직임까지 다 알 수 있었고 출입하는 사람들까지 알 수 있었다.
초기의 피신생활은 불안한 날들의 연속 이였다. 낮에는 앞산 바위위에 앉아 찾아오는 낮선 사람들을 확인하면서 보내야했고 밤에는 악몽에 시달려야했다.
기와집 작은방에 기거하면서 일년간의 낮과 밤을 불안하게 살아왔다. 일년이 지난 4월 어느 봄날 초저녁에 작은 외삼촌이 아버님을 찾아왔다.
2편;이주준비
아버님은 작은 외삼촌을 반갑게 맞았다.
아버님은 혼자 일 때는 되도록 등불을 끄고 지냈으나 외삼촌이 방안으로 들어오자 호롱불을 밝혔다. 방이 넓은 편이어서 얼굴을 겨우 알아 볼 정도로 불빛이 희미하였으나 술을 따르고 마시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외삼촌은 가지고온 한대짜리 소주병과 안주를 방바닥에 꺼내 놓으며 술을 따라 권하였다. 안주는 어머님이 챙겨주신 것들 이였다.
아버님은 오랜만에 술을 마시게 되었고 술잔이 채워지면 한번에 비우셨다.
“자형 고생이 많지요”
“고생은 뭐”
“수염 기른 것을 보니 형사들도 자형인지 모르겠네요.”
“그래 가족들은 잘 있는가”
“누나도 잘 있고, 명창이, 경숙이도 학교 잘 다니고 있습니다”
“그 쪽의 분위기는 어떻고”
“밤낮없이 감시하드니 얼마 전부터는 포기했는지 보이지가 않습디다”
소주 몇 잔을 연거푸 마신 아버님은 또 정국 이야기를 하셨다.
“요사이 선거 때가 돼서 경찰들이 정신없을 것이야. 선거가 끝나면 조금 안정이 될 걸세. 이승만이가 미군정을 등에 업고 남쪽에서 반쪼가리 정권을 잡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완용이 보다도 더 매국적인 짓을 하고 있는 것이야. 김구, 김규식이를 비롯한 중도파들은 선거참여를 거부하고 계속 남북협상을 추진하자고 하는데 이승만과 한민당이 반대하니 큰 문제야. 南은 南대로 北은 北대로 정권이 들어서면 나라가 두 동강이 날것이 뻔한 이치인데 이승만이가 역사의 큰 죄인이 되겠구먼. 앞날이 큰 걱정이야.“
“글쎄 말입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갈지 걱정입니다”
“진영 집과 논밭을 살 사람이 있는지 알아봐라, 경찰이 알면 방해 할 수도 있으니 조용히 알아보도록 해라.”
“정리하고 나서 어떻게 할 건데요”
“이 승만 정권이 들어서면 진영에 더 살기는 어려울 것이고, 아무래도 어딘가로 옮기기는 옮겨야 할 것 같네. 여기에 일년 살아보니 사철 조용하고 동네 사람들이 적어 소문이 안 샐 것 같구나. 요사히 앞집 金一守라는 사람과 조심스럽게 만나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입도 무겁고 학식도 있고 집안도 괜찮은 사람이더라. 그에게 집지을 대지와 농토도 알아보라고 부탁했다. 기와집 뒤쪽에 밭 이천 평 하고 집터 이삼백 평이 있는데 내일 아침에 한번 보도록 하자. 선거가 끝나고 정국이 조용해지는 것을 봐서 이리로 이사를 와야 할 것 같다.”
“정치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야. 철저한 자기희생과 순정이 없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지. 질투와 원한이라는 난류와 한류가 교차하는 바다와 같아. 이 나라의 현실로 보아 결국 가족들도 한시대의 이유 없는 제물이 되고 말 걸세. 그사이 가족들 고생 참으로 많이 시켰다. 내 나이도 이제 오십이 넘었으니 정치에서 완전히 인연을 끊고 여기서 농사도 짓고 가족들을 돌보며 여생을 보내야겠다. 네 누나한테 내 뜻을 잘 전하거라.”
“예”
“진영에 가서 상구를 만나 내 뜻을 전하고 조용히 처리하도록 부탁해 봐라. 땅값을 너무 받으려 하면 시간만 끌고 거래가 않 될수도 있으니 적당한 값이면 처분하도록 하여라.”
“예”
“그리고 애 이름은 지었습니까. 누나가 꼭 지어오라 부탁합디다.”
“때 時, 창성 昌, 시창으로 지었다. 나라를 찾은 좋은 때에 태어나서 그렇게 지었다.”
아버님은 외삼촌에게 이름을 漢字로 적어주시며 면사무소에 가서 출생신고를 하라고 지시하셨다.
다음날 새벽, 쾌종시계가 새벽 네시를 두들겼다. 고요한 새벽에 둥둥 울리는 이 시계소리는 초가의 찢어진 창호지 문틈으로 새어 들어와 이웃들에게 새벽을 알린다.
외삼촌은 밀물에 맞추어 일어나 떠날 채비를 하였다. 아버님도 집밖으로 따라 나오셨다. 사월인데도 강촌의 새벽공기는 서늘하게 느껴졌다. 동쪽하늘의 여명의 문이 서서히 열리는 중이였다. 기와집 갈대울타리를 돌아 강 쪽으로 향하는 나지막한 언덕에 돋아난 갈대의 새순들이 머금은 아침이슬에 발이 젖었다.
언덕을 내려가기 전 기와집 바로 울타리 옆에 있는 텃밭을 가리키며 “이곳에 집을 지어려한다.” 그리고 기와집 뒤편인 서쪽을 가리키며 “저 밭이 약 이천 평이 되는데 이 땅하고 한 주인인 가봐”
외삼촌은 아버님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눈길을 주면서 언덕으로 내려와 배에 올랐다.
“진영 땅 살 사람이 있으면 가급적 일시불로 받고 처리하고 팔리는 데로 빨리 다녀갔으면 좋겠다. 조심해서 가거라.”
외삼촌은 제밋대를 저어 샛강까지 빠져나갔다. 배가 샛강으로 빠져나가자 하얀 돛이 올라 갔다. 아버님은 배가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외삼촌은 수산에 도착하여 배를 묶어 놓고서 진영 집까지 걸어와야 했다. 진영 집 까지 두 시간정도 걸어야만 도착할 수 있었다. 저녁시간에 마당으로 들어오는 외삼촌을 보며
어머님은 “고생했제. 시장 할 테니 어서 방으로 들어가거라.”
외삼촌은 저녁을 들면서 아버님의 소식과 전하는 이야기를 아주 작은 목소리로 어머님에게 들려주었다.
“애 이름은 지어 주더나”
“시창이라고 지어 줍디다.”
어머님은 “시창아”한번 불러보고는 새근새근 자고 있는 아기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자형은 어떻게 지내더노”
“불안감이 사라져 그런지 얼굴은 좋아져 보입디다. 수염도 기르고 동네사람들과도 자주 어울리는 모양입디다.”
“그러면 내일 상동 씨를 만나 보거라”
어머님은 그날 밤 지나간 일들을 생각하며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다음날 작은 외삼촌은 8촌동생인 상구 씨와 상동 씨를 찾아가 의논하였고 치산의 정리를 위해 그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열흘 후에 진영의 집과 논밭은 헐값에 팔렸으며 외삼촌은 그 돈을 가방 넣어 물때를 맞추어 수산에서 배를 띄웠다.
하단에 도착하니 오후 4시경 이였다. 아버님은 집에 안계셨고 외삼촌은 방으로 들어와 이부자리를 깔고 잠이 들었다. 두어 시간을 자고 잠이 깨었을 때 아버님이 와 계셨다.
“그래 어떻게 되었노”
“상구 씨와 상돈 씨가 수소문하여 헐값에 팔았습니다.”
“얼마를 받았노”
“2천원 받았습니다”
“생각보다는 적지마는 어쩌겠노. 좌우간 애섰네.”
“지난번 내가 말하던 그 땅을 흥정붙여 놓았는데 천 원 정도면 매수 할 수가 있겠다.”
“네가 이삼일 여기에 있으면서 그 땅을 계약하고 난후에 올라 가도록해라”
“계약은 일단 네 이름으로 하거라.”
다음날 김일수와 지주인 임병락이와 만나 계약을 하였다.
“집은 언제쯤 비우라고 하드노”
“집을 비우는 날짜는 자형과 의논하여 이야기 하겠다고 말해 놓았습니다.”
“이왕 비울 바엔 빨리 비우자.”
“짐은 배로 한두 번 옮기면 될 것이고 가족들은 한꺼번에 와야 한다. 이삿짐이라야 솥하고 식기하고 농하고 이불, 옷가지하고 괘짝, 그리고 책밖에 더 있나. 책들은 다 가져와야한다.”
“곳간에 곡식은 얼마나 있드노.”
“20여 가마는 될 것 같습니다”
“다섯 가마는 네 엄마한테 주고 나머지는 싣고 오너라.”
“집을 지으려면 땅도 수평으로 골라야하고 뒤로 좀 더 매립해야 할 것 같다. 이 일은 내가 인부를 대려 시킬 테니 네는 가서 이사준비를 하도록 하여라. 특히 남의 이목을 조심하여야 한다.”
“짐은 어디로 옮김니까”
“집지을 때까지 이집으로 가져와야 안 되겠나.”
다음날 외삼촌은 떠났다. 아버님은 매입한 밭을 둘러보았다. 갈대밭에 돌로 축을 쌓아올려 흙으로 매립한 땅 이였다. 滿水일 경우 두어 자 정도 여유가 있었다.
집을 앉힐 곳에 왔다. 진영 집처럼 세 칸짜리 초가를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당을 넓게사용하자니 뒤뜰이 조금 부족했다. 뒤뜰은 갈밭 흙을 삽으로 파서 올리면 필요한 만큼 매립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하였다.
김일수를 찾아갔다. 아버님은 도움 청 할일이 있으면 항상 그를 찾았다.
“집을 지으려하니 폭이 조금 부족할 것 같아 뒤쪽에 매립을 해야 갔소. 일할 인부들을 수배 좀 해주어야 겠소.”
“예 알겠습니다.”
그 다음날 앞집에 사는 복상(박씨)이 찾아왔다. 박씨는 아버지와 함께 현장을 돌아본 후에 내일부터 일을 바로 시작 하겠다고 하였다. 박씨는 함안, 산청사람으로 일년 전 결혼한 처를 대리고 기와집 앞집, 한 칸짜리 초가로 이사 왔으며 집 짓는일, 갈대로 지붕 입히는 일등, 막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박씨를 동네사람들은 복상(일본식 발음)으로 불렀다.
한편 진영 집에도 이사준비가 척척 진행되고 있었다. 어머님과 외삼촌은 가져가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고르고 있었다.
가져갈 것은 어머님이 시집올 때 가져왔던 농과 괘짝과 약간의 살림도구 였다. 십 몇 년간 손때가 묻은 것을 전부다 가져가고 싶었으나 외삼촌이 극구 말렸다. 그곳에는 밭일 밖에 없는데 논농사와 누애 치는데 필요한 기구는 다 버리고 가자고 했다.
이삿짐을 수산까지 옮길 때 필요한 소 구루마는 동네 것을 빌렸고 도와줄 사람으로 외삼촌 동네이웃에 살았던 친구를 불렀다. 무거운 것은 다 실었다. 남은 자리에 쌀도 두 가마 실었다. 남은 것은 식기와 이불가지 그리고 어머님이 아꼈던 싱가미싱 이였다. 나머지는 식구들이 갈 때 가져가기로 하고 소 구루마는 날이 어두워 진후에야 수산을 향해 출발했다.
외삼촌이 하단에 도착하니 오후 2시쯤 되었다. 인부들이 배에서 짐을 내려 옮겨주었다. 강바닥의 흙을 파서 매립을 해야 함으로 외삼촌이 도착했을 때 인부들은 강물이 빠져 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저녁 잠자리에서 아버님이 외삼촌에게 정국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였다.
“4.3 제주도 폭동사건은 5.10 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여 일어났는데 미군정과 이승만이는 공산주의자들의 소행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이승만이는 조병옥 경무부장에게 강경하게 진압하라고 명령을 한 모양이야. 내륙에서도 유사한 폭동사건이 발생 할 것이라 예상하고 좌익분자 색출바람이 또 한 차례 불 것 같네. 곳간에 있는 쌀은 웅천 댁에 당분간 맡겨 놓고 내일 가서 가족들을 급히 대리고 와야 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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