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 30년(1)
-이영신 역사소설
1. H아워에 출동하라!
2. 박 장군, 지금 당신은 어디에
3. 버마식 쿠데타
4. 장도영, 양다리 걸쳤는가?
5. 장도영, 박정희를 감싸고 돌다
6. 해병대, 자정에 출동하다
7. 국무총리 장면, 숨어 버리다
8. 장도영, 그는 야누였는가?
9. 윤보선, 쿠데타를 지지하다
10. 곡! 제2공화국
제 1 부 쿠데타의 새벽 (1)
1. H아워에 출동하라!
이제 얘기의 실마리를 1961년 5월 15일,
이날의 상황에서부터 풀어나가기로 한다.
1961년 5월 15일이라고 하면 장면(張勉)
정권이 출범한 지 만 9개월이 못 될
때이다. 이른바 7.29 총선거를 통해서 장면
정권이 탄생한 것은 1960년 8월
23일이었다.
그 이래, 장면은 참으로 어수선한 가운데
지난 9개월이란 세월을 까먹어 왔다. 정권
어떻게 까먹으며 오늘에 이르렀는지 꿈만
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일을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었다. 데모 때문이었다.
그놈의 데모는 도무지 그칠 줄을 몰랐다.
아침에 눈을 뜨기가 무섭게 보고되는 것이
데모에 대한 것이었다. 학생이고
정치집단이고 모든 것을 데모로 해결하려
들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정부가 아무리 일을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극성스럽기만 하던 데모가 3월 22일
횃불데모를 고비로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5월에 접어들면서는 아예 자취를
감춰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아마도 이래선
나라꼴이 안 되겠다고 모두가 반성을 한
(고마운지고?)
국무총리 장면은 학생, 정치집단, 민중의
자각이 너무나 고마웠다. 그는 날마다
데모가 벌어져도 데모하는 자들을
미워하거나 원망할 줄을 몰랐다.
(이승만 정권하에서 얼마나 욕구불만이
꽉 차 있었으면 저렇게 한꺼번에 불만을
해소시키려 들랴!)
오히려 그들을 이해하려 애써 왔던
것이다.
장면이란 사람은 그런 성품의
인물이었다.
(일은 이제부터다.)
그는 새삼스럽게 마음에 다짐을 주었다.
이 무렵, 야당인 신민당(新民黨)의
도쿄(東京)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필리핀의 마닐라에서 열리는 아시아
반공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기 위해
국회의원 박준규(朴浚圭), 이종린(李鐘麟),
여류시인 모윤숙(毛允淑) 등과 4월 29일
서울을 떠났다가 대회가 끝난 5월 6일에
일본 도쿄로 와서 일본 정계의 지도급
인물들과 교유하며 유유자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쿄에는 유진산뿐만 아니라
유진오(兪鎭午)도 머물고 있었고,
이철승(李哲承), 박병배(朴炳培),
김상흠(金相欽) 등도 머물고 있었다.
5월 10일에 실시되었던 인제 보궐선거에
민주당 공천을 받아 출마, 당당히 당선의
영예를 차지한 김대중(金大中)이
서울로 올라온 것이 이날이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정치에 뜻을 품은 지 만
10년 만에 그는 뜻을 이룰 수가 있었던
것이다.
약관 24살에 3대 국회의원에 출마,
당선됨으로써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김영삼(金泳三)은 이때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는 신민당 내의 소장파 서클인
신조회(新潮會)의 발전책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는 장차 이 신조회를 발판으로
해서 대권을 잡아볼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날 저녁 국무총리 공보비서실의
송원영(宋元英)과 박종률(朴鐘律)은 재무부
정무차관인 김재순(金在淳)과 셋이서
무교동 삼희정(三喜亭)에서 통음을 했다.
례 안 한다고 선배에게
알려져 있었다.
"우리 남산에나 올라가세."
삼희정 술자리가 파하자 이런 제의를 한
것은 박종률이었다. 그는 남산에라도
올라가서 시원한 바람을 쐬며 술자리에서
나누던 얘기를 매듭지어야겠다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도무지 피곤해서 못 견디겠어.
그러니 먼저 집으로 가겠네."
송원영은 두 사람이 뭐라 대꾸도 하기
전에 휘청거리며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굳이 만류하지는 않았다.
술자리에서도 차치고 포치며 얘기를 나눈
것은 김재순과 박종률이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옛 KBS 앞에 차를 두고 걸어서
지금의 야외음악당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이거 이래 가지고 되겠어?"
그는 내일 아침에 서울시 내무국장을
호출해서 단단히 야단을 쳐줘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두 사람은 편안한 곳을 골라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봐, 거 고시파와 관료파들을 깡그리
보내버릴 방법이 없을까? 장면 정권을
망쳐놓는 자들은 바로 그 고시파와
관료파들이라구!"
고시파(考試派)란 고등고시 출신자들을
말한다. 물론 이들은 모두 일제시대에
고등문관 시험에 합격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관료파(官僚派)란 관리 출신자들로
이들 역시 일제시대의 관리 출신자들이다.
장면 정권을 이루고 있는 인물들은
출신자들뿐이었다. 독립운동을 했다던가
민족운동을 한 경력을 지니고 있는 인물은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래서, 장면 정권은 친일 정권이라는 말이
나돌게 되었던 것이다.
김재순은 그러한 세평이 싫었던 것이다.
그래서 술자리에서부터 노상 지겨울 정도로
그 문제만을 가지고 씨름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것이 1961년 5월 15일의
장면을 위시한 주변의 정황이었다.
그런데, 장면이 어떤 마음의 결심을 했든
또는 그 밖의 정치인들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었든 상관없이 아주 엄청난 음모가 한쪽
구석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음모였다.
여기에서 아예 까놓고 얘기를 진행시켜
나가자. 그들의 음모는 장면 정권을 뒤집어
엎는 것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쿠데타의 우두머리는 육군 소장
박정희(朴正熙)였다.
그들의 음모는 총칼로 정권을 뒤집어
엎는 일이었다. 육군 소위에서 육군 소장에
이르기까지 국민의 세금을 먹고 살며
잔뼈가 굵다시피한 사람들이 그 어떤
이유를 내걸고 정권을 뒤집어 엎을 음모를
구미고 있었던 것이다.
음모란 아주 극비밀리에 계획되는
일이니만큼 국민이나 정권 담당자가 까맣게
모르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마도
진행되었던 것 같다. 그들의 음모의 과정은
뒤에 소상히 소개하기로 하고 이들이
음모를 마무리짓고 정권을 뒤집어 엎는
날짜, 그것을 군대에서는 D데이라는 용어로
부르고 있다던가. 그 D데이에서부터 얘기를
풀어가기로 하자.
그들이 몇 번의 실패를 거듭한 끝에
또다시 잡아놓은 D데이는 5월 15일이었다.
그리고 행동개시의 뜻이라는 H아워는
22시(방 10시)였다.
이날, 쿠데타의 모의에 가담해 있던
장교들의 움직임은 부산했다. 이날은 바로
월요일, 그들은 각기 부대에 출근하자,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 수행을 위해서
은밀하게 행동을 개시했다.
30사단의 작전참모 육군 중령 이백일은
출근하자, 사단참모장인 육군 대령
이갑영(李甲榮)을 찾아갔다.
"참모장님께 D데이 H아워를 통고해
드리려고 찾아뵈었습니다. D데이는 바로
오늘, H아워는 22시입니다."
"뭐야?"
이갑영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인
모양이었다. 그만 대꾸할 말을 잊고
말았다. 잇달아 분노가 치솟는 모양이었다.
(이놈들이 도대체 나를 뭘로 보고 이러는
거야? 핵심조직하고 연결시켜 달라고 해도
연결시켜 주지도 않고 있다가 불쑥
찾아와서 한다는 소리가 D데이는 언제고
H아워는 언제라고?)
자존심도 상했다. 이백일이 상급자였다면
부하였기 때문에 유달리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
"알았어."
이갑영은 투박하게 대답하고 이백일을
물러가게 했다.
그가 물러가자, 이갑영의 가슴은 더욱
부글부글 끓었다. 모조리 깨부셔 버리고
싶은 충동이 자꾸만 일었다.
같은 시각, 김포에 있는 해병
여단사령부.
여단장 해병 준장 김윤근(金潤根)은 오전
9시에 정례 참모회의를 열었다. 이날의
참모회의는 이렇다할 특색 있는 안건도
없었기 때문에 참모회의는 간단히 끝났다.
다만 이 회의가 끝나갈 무렵, 여단장
정태석(鄭台錫)에게 지시를 내렸다.
"정 중령, 오늘 밤 12시에 오정근
대대에게 차량에 의한 대대단위 야간
기동훈련을 실시케 할 생각일세. 그 훈련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놓도록!"
"알겠습니다."
작전참모 정태석은 공손히 여단장
김윤근의 명령을 수령했다. 그는
오정근(吳定根) 대대의 차량에 의한
야간훈련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긴 군령여산(軍令如山)을 생명으로
알고 있던 작전참모 정태석으로서는 그
훈련에 대해서 털끝만한 의심도 품지
않았던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김윤근이
기동훈련은 가끔 실시해 오고 있었으니
말이다.
(안됐다, 오늘 밤 오정근 대대 병사들
고생깨나 하겠는걸.)
오히려 그는 동정심을 품기까지 했다.
여단 작전참모 정채석에게 야간
기동훈련을 준비하라는 지시가 내려진 것을
신호로 대대장 해병 중령 오정근, 작전참모
해병 중령 조남철(趙南哲), 인사참모 해병
소령 최용관(崔容琯) 등 세 사람은 미리
짜둔 계획에 따라 민첩하게 행동하기
시작했다.
같은 날 5월 15일 정오 12시.
이 시간에 이르기까지 이갑영은 번민의
늪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도무지 무엇을
없었다. 생각다 못해 부사단장 육군 대령
박상훈(朴常勳)을 찾아갔다.
"거사일이 오늘이라는데 얘기 들었어? 밤
10시 집결, 새벽 2시 출동이라는 거야."
"뚱딴지같이 그게 무슨 소리야?"
박상훈도 어지간히 놀라는 것이었다.
하긴 놀랐을 것이다. 제30사단의 경우,
이갑영을 포섭한 것은 이백일이었고 그에게
포섭당한 이갑영은 다시 박상훈을
포섭했다. 제30사단의 부사단장과 참모장을
포섭하자 쿠데타 그룹은 제30사단을
출동부대의 제1진으로 확정하고 서울로
출동, 서울로 진입할 수 있는 모든 도로를
차단하라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이갑영의 얘기를 전해 듣고 놀란
박상훈은 이갑영만큼이나 노했다.
부사단장실로 불렀다.
"참모장한테 얘기 들었어! D데이,
H아워가 오늘이라니 무슨 소리야?"
"죄송합니다. 저도 어젯밤에야 통고를
받았습니다."
"이봐 작전참모! 적어도 이런 엄청난
일을 하자면 충분한 시간을 갖고 준비를
해야 하잖아? 오늘 통고를 받고 오늘
어떻게 부대를 출동시킨단 말야? 그것도
합법적인 작전이라면 또 몰라! 이건
쿠데타란 말이다, 쿠데타!"
"그러니 전들 어떻게 합니까? 아까
말씀드린 대로 저도 어젯밤에야 통고를
받았으니 말입니다."
이백일도 딱하다는 표정을 짓고 극구
변명을 늘어놓는 것이었다.
이백일은 놀라움에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부, 부사단장님......."
"내 말을 들어! 우리 부대가 출동부대
제1진으로 정해져 있는 이상엔 나하고
사전에 협의가 있었어야 옳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것을 네놈들은 우리 결정대로
행동해 주기만 하면 된다는 수작이야
뭐야?"
"부, 부사단장님!"
이백일의 목소리는 어느 사이엔가
애원조가 되어 있었다.
"따져야 할 문제가 있으면 거사를 하고
난 뒤 따지시고, 오늘만은 이 결정에 따라
주십시오!"
박상훈이 또다시 소리를 질렀다.
없어서 못하겠단 말이다. 알겠나?"
박상훈의 마음을 뒤집어 놓고 보면
준비할 시간이 없어 못하겠단 것은 하나의
구실에 불과했다. 쿠데타 같은 대사를
며칠씩 두고 준비할 필요는 없었다.
H아워가 10시라고 했으니까, 10시 전에
비상을 걸면 그뿐이었다.
비상을 걸면 장병은 일제히 무장을 하고
연병장에 집결하게 마련이다. 그런 다음
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트럭에 실어
출동시키면 그뿐이었다.
그것을 박상훈은 어째서 <못하겠다>고
한마디로 거부해 버렸을까? 그것은 마음의
준비가 안 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쿠데타와
같은 비합법적 군사행동을 취하려면 사전에
죽음도 불사한다는 단단한 마음의 준비가
했으나 박상훈이나 이갑영은 죽음도
불사한다는 마음의 준비를 가다듬을 시간을
갖지 못했엇다.
쿠데타에 대한 소문이 난무하고 있을
때였다. 영관급 장교들은 모이기만 하면
쿠데타의 불가피성을 논의해 오고 있기도
했었다. 이백일은 이러저러한 이유에서 왜
쿠데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는
쿠데타 불가피성을 이갑영에게 역설했고,
쿠데타의 지도자는 박정희라는 것도
밝혔다. 그래서 이갑영은 한마디로 <좋다,
하자>고 확답을 했다. 그리고 박상훈을
설득해서 끌어들였다.
그렇다면 이백일은 이들 두 사람을
박정희를 위시한 쿠데타 주모자들을 만날
그는 그런 주선을 하지 않았다.
"이봐, 쿠데타 지도자가 박정희
장군이라지? 그렇다면 우리가 박 장군을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 주게. 그래야
우리도 상세한 내용도 알 수 있을 것이고
또 거기에 대한 대비도 굳건히 해나갈 수
있을 게 아니겠나?"
박상훈, 이갑영 두 사람은 이백일에게
쿠데타의 핵심조직과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여러 차례 요청했었다. 그것을
이백일이 성사시켜 주지를 못했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안했는지도 모른다. 일은
8기생이 꾸미고 있으니 여타의 가담자는
계획에 따라 주어진 임무만 수행하면
그뿐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참모장실로 이갑영을 찾아왔다.
"나, 조금 전에 이백일 중령을 불러서
물어봤어. 오늘 출동하는 게 사실이냐구
그랬더니 그렇다더군. 그래 호통을
쳐주었어! 그런 중대사를 출동 몇 시간
전에 통고하는 놈들이 어디 있느냐고
하면서."
"그랬더니 이 중령이 뭐라고 그래?"
"자기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을
늘어놓더군. 그래서 다시 호통을 쳐주었어!
난 못하겠으니 너희놈들끼리 알아서
하라고."
얘기를 듣고 있던 이갑영의 표정은 마냥
어둡고 심각하기만 했다.
"H아워가지는 이제 몇 시간 남지
않았는데 어쩌면 좋지?"
"발을 빼?"
이갑영은 꽤나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럼, 쿠데타 계획에 대해서 전혀
캄캄한 우리가 이백일 놈의 말만 믿고
출동해야겠어? 그랬다가 차질이 생기기라두
하는 날엔 우리 반란죄로 총살감이라는 걸
몰라?"
천한 표현이지만 <빼지도 박지도
못한다>는 말이 있다. 이갑영의 경우가 꼭
그랬다. 발을 빼자니 쿠데타가
성공하기라도 하는 날엔 배신자로 몰릴
것이 틀림없었고, 그렇다고 발을 들여놓은
채 있자니 계획대로 출동은 해야 할
것이고, 좀 고상한 표현을 빌자면 이것이
바로 진퇴양난(進退兩難) 아니겠는가.
"어쩌겠냐?"
"......."
이갑영은 당장에 뭐라 대꾸하기가
어려웠다.
"어쩌겠냐니까?"
박상훈이 다시 재촉했다.
이갑영은 숨막힐 듯한 답답증을 느꼈다.
당장에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인지
마음의 갈피가 잡혀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기면 관군(官軍), 지면 적군(賊軍)이
되는 것이 쿠데타일세. 지금 우리는 관군이
되느냐 적군이 되느냐 하는 갈림길에 서
있는 꼴이 돼버렸네만 처음부터 우리가
경솔했어. 군인의 직분을 망각한 탓이야.
군인의 본분은 국토방위에 있지, 정치
따위하고는 무관한 거야. 정치를 잘 하든
일이지, 군인이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었어. 후회 막급이군."
그 순간, 이갑영은 결심을 굳혔다.
(군인의 길을 지키자, 군인의 길을!
군인이면서 쿠데타를 꿈꾸다니, 어리석어도
너무나 어리석었다.)
입술을 한일자로 꽉 다문 그의 표정은
어딘가 좀 비장해 보이기조차 했다.
같은 시각, 다시 김포 해병여단.
인사참모 해병 소령 최용관과 군수참모
중령 유철수(柳哲秀), 두 사람이 여단장
김윤근을 찾았다.
"각하, 출동부대에 탄약 1기수를
지급하라고 했더니 병기참모가 말을 듣지
않습니다."
호소하는 것이었다.
"어째서 말을 듣지 않는 거야?"
"기동훈련에 무슨 놈의 탄약이
필요하냐는 겁니다."
탄약 1기수란 한 번 전투에 필요한
분량을 말한다. 병기참모가 무슨 낌새를
챘을 리는 없고, 하여간에 그의 논리는
옳았다. 실전도 아닌 기동훈련에 실탄은
필요 없었다. 김윤근은 잠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궁리한 끝에 병기참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기동훈련 부대에 탄약 1기수를
공급하라고 지시한 것은 나야. 병기참모도
알다시피 휴전 후에 입대한 장교와 사병은
탄약 1기수의 분량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고
있으니 기동훈련에 1기수를 휴대시켜
보려는 게야."
병기참모 해병 대위 이영상(李永祥)은
여단장의 뜻이라는 것을 알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을까?
"말씀대로 공급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포장을 뜯으면 분실의 우려가
있으니 포장을 뜯지 말고 상자 단위로
휴대시켜 주셨으면 합니다."
병기참모 이영상의 정신상태는 참으로
훌륭했다. 그는 탄약의 분실까지도
우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도 대대장한테 그렇게 지시하겠네. 이
대위도 보급받으러 오는 하사관에게 그렇게
지시해 두게."
이렇게 해서 탄약문제는 해결되었다.
이런 경우, 병기참모는 여단장의 명령을
이런 경우를 상정(想定)해서 군법(軍法)이
어떻게 정해져 있는지도 모른다. 그저 이
경우 병기참모 해병 대위 이영상은 <절대로
탄약을 지급할 수 없다>고 버텨주지 않은
것이 아쉬울 뿐이다.
오후 4시, 해병대 제2훈련단장 해병 대령
정세웅(鄭世雄)이 김윤근을 찾아왔다.
출동부대에 합류하기 위해서였다. 김윤근은
그가 오자 정세웅이 담당할 문제를 의논한
다음 함께 수송중대와 오정근 대대를
둘러보았다. 출동태세는 완벽했다.
오후 6시경.
H아워 4시간 전이다. 서울 영등포에 있는
제6관구 사령부.
이 제6관구 사령부는 쿠데타의 H아워
총지휘부로 변신하도록 되어 있었다. 여기
제6관구 사령부 사령관은 육군 소장
서종철(徐鐘哲), 그는 물론 쿠데타가
계획되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가 H아워와 함께 제6관구
사령부가 쿠데타의 총지휘부로 둔갑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나의 사령부가 쿠데타의 지휘본부라니?)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어이없어하는
서종철의 모습이 머리에 떠올라 김재춘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이날 서종철은 퇴근시간보다 조금 일찍
사령부를 떠났다. 김재춘은 사령관이
퇴근하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이날
당직사령(當直司令)인 육군 중령
하종구(河鐘九)를 참모장실로 불렀다. 그가
"귀관, 긴급한 일로 대구에 출장 좀
다녀와야겠어."
"대구에요?"
하종구는 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일과중에 출장 명령을 내리지 않고, 왜
하필 퇴근시간에 명령을 내리느냐 해서였을
것이다.
"대구, 어디로 출장가야 합니까?"
"2군 사령부야, 공병참모 박기석
대령한테 서류를 전해주고 오면 돼."
서류 하나 전하기 위해서 고급장교를
출장 보내다니? 하종구는 더욱 더
불만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김재춘은
그러한 하종구의 감정을 읽었다.
"이 서류는 1급 비밀이오. 너무나 중요한
서류가 돼서 그러니 실수가 없어야 할
거요."
그는 일침을 놓았다.
"전 오늘 당직사령입니다. 다른 사람을
보내면 안 되겠습니까?"
"이 서류는 1급 비밀이라 하잖았소! 이런
중요한 일은 사령관 각하의 신임이 두터운
하 중령 같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그래요."
하종구는 서종철의 심복이었다. 그
심복이 오늘 밤 당직사령인 것이다. 그래서
김재춘은 당직사령을 바꿀 생각에서
하종구에게 출장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지금 곧 떠나게. 당직사령은 내가
이경화 중령더러 대신 맡으라고 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하종구가 참모장실에서 물러가자,
대신 당직사령을 맡도록 명령했다.
장교들이 모두 퇴근해 버린 제6관구
사령부.
이 시간, 제6관구 사령부의 표정은 여느
때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안이나
밖이나 마냥 조용하기만 했다. D데이를
맞았고 H아워가 다가오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이렇게 조용하기만 한 것이 쿠데타
그룹으로서는 천만다행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여간에 이 시간, 제6관구 사령부
참모장 육군 대령 김재춘(金在春)은 일련의
조치를 취하고 나자, 이번에는 작전참모
육군 중령 박원빈(朴元彬)을 은밀히
참모장실로 불렀다.
"조금 전에 출동부대에 대한 체크를 전부
H아워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나 잠시
밖에 나갔다 오겠어. 시내 동정이 어떤지
좀 살펴봐야겠어. 내가 없는 동안 박
중령이 사령부를 장악해 주게."
"알겠습니다. 염려마시구 다녀오십시오."
작전참모 박원빈은 계급은 김재춘보다 한
계급 아래였으나 나이는 다섯 살이나
위였다. 함경북도 청진(淸津) 태생인
박원빈은 고려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군에 들어갔기 때문에 나이에 비해 계급이
낮을 수밖에 없었다.
밥그릇으로 따지는 것이 군대사회,
거기에 박원빈은 김재춘과 쿠데타 동지로서
결속되어 있었다. 군말이나 반감이 있을 수
없었다. 박원빈은 호기있게 명령을
수행했다.
서울 종로 2가
교동국민학교(校洞國民學校) 뒷골목에
은성(銀星)이라는 조용한 한식집이 있었다.
낮에는 점심을 팔고 밤에는 술을 팔았다.
간판이 붙어 있으니 은근짜집은 아니었다.
점심 한 끼를 때우는 데는 5인 가족 1주일
생활비에 해당하는 값을 받고 있었으니
한식집치고는 엄청나게 고급 요정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점심을 먹든 술을 먹든 아리따운
아가씨가 곁에 붙어 앉아 시중을 들어주는
요저이었으니, 비싼 값을 치러야 할 밖에.
그녀들을 일컬어 접대부라고 했다. 옛날의
기생(妓生)이 변신한 접대부였다. 옛날의
이르기까지 교육이 엄격했으나, 해방
이후의 이른바 접대부 아가씨들은 기생
앉았던 자리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예의범절, 풍류, 정조관념에 이르기까지
그들 접대부들은 기생하고 비교할 것이 못
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 접대부
중에는 고등 교육을 받은 아가씨들도 있어
정치인, 고급관리, 군부의 장성, 사장 족속
등이 이런 요정을 즐겨 드나들고 있었다.
저녁 7시. 육군 참모총장 육군 중장
장도영(張都暎)이 그의 막료인
정보참모부장 육군 소장 김용배(金容培)와
둘이서, 이 은성 대문 안으로 들어선 것은
이 시간이었다. 저녁을 먹자는 구실로
장도영은 김용배를 이곳으로 안내했던
두 사람은 별실로 안내되었다. 특별한
손님만을 위해서 마련된 것이 별실이었다.
방으로 들어서자, 장도영은 참모차장
육군 중장 장창국(張昌國)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그는 마침 집에 있었다.
"아, 여보 장 차장. 나요, 지금 뭘 하고
있소?"
"예, 지금 막 미군 장성들하고 골프를
끝내고 돌아와 샤워를 하고 있던
참입니다."
(샤워를 하고 있다면 벌거벗은 채로
전화를 받고 있다는 얘기인가?)
장도영은 잠시 장창국의 벌거벗은 알몸을
망막 속에 그려보고는 아마터면 풀썩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여보 장 차장, 우리 지금 은성에 와
오시오. 그래야 우리도 저녁을 먹을 수
있을 테니 말이오."
"예, 알겠습니다."
육군 참모차장 장창국은 장도영과 계급이
같은 육군 중장이었다. 그러나 장도영의
직책이 한급 위였다. 몸이 고단하다는
이유로 초청을 사양할 수는 없었다.
그는 서둘러 평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땅거미가 깔리고 제30사단 사단본부가
자리잡고 있는 영내는 점차 고요에 묻혀
들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향긋한
아카시아의 향기가 풍겨오는 것만 같앗다.
어쩌면 그 향기는 신록의 내음인지도
모른다.
의자에 무료하게 앉아 어둠이 깃드는
연병장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던 사단장
육군 준장 이상국(李相國)은 문득 생각난
듯이 팔목시계를 바라보았다. 수색에서
서울 무교동까지 약속시간에 닿을 수
있을지 시간을 가늠해 보기 위해서였다.
그는 오늘 육군본부의 김판규와 저녁이나
같이 하자는 약속이 되어 있었다. 시계는
7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40분이면 충분하겠지."
그가 막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였다. 노크
소리가 났다.
"네."
문이 열리며 사단장실로 들어선 사람은
부사단장 박상훈과 참모장 이갑영이었다.
"웬일이오? 아직 퇴근하지 않고 있었소?"
박상훈은 좀 머뭇거리며 찾아온 용건을
말했다.
이승만(李承晩)이 통치하던 자유당 시절,
사단의 부사단장은 거의가 육군
대령이었다. 당시 준장 계급 이상자에
대해서는 으레 <각하(閣下)>라는 경칭을
붙여서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부사단장은 계급에 있어서는
<장군(將軍)>이라는 칭호를 붙일 수 없는
대령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사단장
유고시에는 사단당 직무를 대리하는 것이
부사단장이라 해서 부하 사병들은
부사단장을 부를 때도
<부각하(副閣下)>라는 경칭을 붙여 부르고
있었다.
이것은 결코 우스갯소리가 아니었다.
대통령 이외에는 각하라는 칭호를 쓰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도 군대에서만은 별을
단 장군한테는 여전히 각하라는 칭호를
쓰고 있었다.
"어떻소? 중대한 문제가 아니면 시내에
나가려던 참인데 내일 얘기하면 안
되겠소?"
이상국은 약속이 있다는 것을 암시해
주었다.
(내일? 내일이면 천지개벽이 이루어져
있을지도 모르는 판국인데 이런 중대한
문제를 내일로 미룰 수 있단 말인가?)
부사단장 박상훈은 그런 생각이
들었는가.
"각하, 부대가 오늘 밤에 출동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홍두깨 같은 질문이었다.
"무슨 소리오, 그게? 오늘 밤에 부대가
출동하다니, 뭣때문에 출동한단 밀이오?"
이상국은 꼭 여우에게 홀린 듯한
표정이었다. 박상훈은 금방 뭐라 대꾸해야
할지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를 않아 잠시
머뭇거렸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질문을 던졌으면, 뭐라 대꾸가 있어야 하지
않는가. 박상훈이 대꾸도 않고 머뭇거리고
있으니 이상국은 역정이 일었다.
"말을 해봐요. 대체 그게 무슨 소리요.
부대출동이라는 게? 사단장도 모르는
부대출동도 있단 말이오?"
그러자 참모장 이갑영이 가로막고
나섰다.
"각하, 나가서 저녁식사나 하면서
"밖에 나가서?"
"예."
이상국은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수수께끼 같은 질문을 받고
그냥 흘려버릴 수도 없은 일이었다.
김판규와의 약속은 다가오고 있었고,
그래서 약속 장소로 가는 차에서 수수께끼
같은 얘기를 들으리라 마음 속으로 셈을
했다.
"그럼 그러지."
이상국이 앞장서 나갔다.
"부사단장은 내 차에 오르시오. 가면서
얘기합시다."
이상국의 지시에 박상훈은 사단장 전용
지프에 올라탔다. 핸들은 이상국이 직접
잡았다. 참모장 이갑영도 운전병을
뒤를 따랐다.
두 대의 지프가 제30사단 연병장 정문을
나서는 그 무렵, 국무총리 장면은 숙소인
반도호텔(지금의 을지로 1가 롯데호텔
자리) 809호실에서 아내 김윤옥(金允玉)이
집에서 차려 온 저녁상을 막 물리고
있었다.
참으로 정성이 지극한 장면의 아내였다.
하루 세 끼를 꼬박꼬박 집에서 마련해
가지고 와서 남편을 대접했다. 점심 요기의
경우에는 운전수를 시켜 국무총리 집무실로
들여보냈다.
장면은 아내의 정성이 언제나 눈물겹도록
고맙기만 했다. 그래서 호텔 주방에서 차려
주겠다는 식사를 사양하고 아내의 정성을
행여 밥을 남기기라도 하면 건강에
이상이 있는 게 아니냐 해서 아내가 걱정을
할세라 식욕이 부진할 때도 밥그릇
비우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여보."
"네."
"오늘은 이만 집으로 돌아가 주겠소?"
"왜 무슨 일이 있으세요?"
"8시부터 국무회의가 있어요."
"그래요? 그럼 돌아갈께요."
김윤옥은 차려 왔던 밥그릇, 찬그릇을
챙겨 바구니에 담았다.
"여보, 나이를 생각하셔야 돼요.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그녀는 언제나 똑같은 당부를 이 밤에도
하고 다소곳이 방을 나섰다.
"나한테 하고자 하는 얘기가 뭐요,
부사단장?"
사단장 이상국은 앞만 주시하면서 하고자
하려던 얘기가 무엇인지 어서 해보라고
채근을 했다. 어지간한 얘기면 시내에
나가는 사이에 끝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오늘 밤에 쿠데타가 벌어집니다."
박상훈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뭐라구? 쿠데타?"
이상국은 너무 놀란 나머지 하마터면
핸들을 놓칠 뻔했다.
"좀 자세히 얘기해 보시오. 쿠데타라니,
도대체 무슨 소리오?"
쿠데타가 모의되어 왔으며 그 지도자는 2군
부사령관 육군 소장 박정희라는 것과 몇
번인가 D데이와 H아워를 변경한 끝에
마침내 오늘 H아워에 거사를 하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이렇게 덧붙이는 것이었다.
"오늘 밤의 거사에는 우리 부대를
비롯해서 해병대, 공수단 등이 출동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각하께서도 이
문제에 신중히 대처해야 할 줄로 압니다."
(이런 때려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들!
그런 엄청난 비밀을 H아워 몇 시간 전에
나한테 얘기한단 말야?)
이상국은 오장육부가 뒤집혀 버릴 것
같은 분노가 치솟았다. 그러나 별을 단
사단장 체면에 길길이 뛰면서 악을 쓸 수도
없는 일, 그는 녹번리 사거리에 이르자,
"부사단장, 참모장하고 차를 바꾸어 타
주시오."
박상훈이 차에서 내리자 곧 이갑영이
차에 올랐다. 이상국은 다시 차를 몰기
시작했다.
"참모장, 부사단장한테 대충 얘기는
들었는데, 좀더 구체적으로 알았으면
하는데 참모장이 알고 있는 대로 얘기해
봐요."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이갑영이
작전참모 이백일에게 포섭되었다고는 하나
핵심세력과의 접촉이 없었다. 그러니
박상훈 이상으로 알고 있는 것이 있을 리
없었다. 그가 말하는 대강의 내용은
박상훈의 얘기와 같았다.
그러나 한 가지, 이갑영이 박상훈보다
"각하, 오늘 밤 행동개시 직전,
30사단장과 6관구 사령관 숙소를 포위해서
두 분을 감금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이상국의 가슴이 섬뜩해지는 정보를
털어놓는 것이었다.
"나하고 서종철 장군을?"
"네."
이상국은 가슴이 후들후들 떨리는 것을
느꼈다.
(이 친구가 나하고 서 장군을 체포해서
직결처분해 버리기로 되어 있는 것을
에누리를 해서 말한 것은 아닐까?)
그런 느낌도 들었다.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쿠데타를 모의한 자들로서는
으레 그런 계획을 세울 만한 일이었다.
1936년 2월 26일. 일본의 국수주의적
사건을 일으켰을 때 그들은 총리대신
고나저로 침입, 경비장관 4명을 사살 또는
찔러 죽이고, 총리대신 오까다
게이스께(岡田啓介)를 일도양단하려 했으나
그가 재빨리 몸을 숨기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자, 대신 그의 매부 마쯔오
덴조오(松尾傳藏:예비역 육군 중령)을
사살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또 내대신(內大臣)
사이또오 마꼬도(齊藏實)를 죽이려다가
중상을 입혔고, 육군 교육총감 와다나베
죠오따로오(渡邊錠太郞), 오오꾸라
대신(재무대신), 다까하시
시세이(高橋是淸) 등을 사살했다.
쿠데타란 이런 것이다. 쿠데타의 원인
제공자 그리고 방해꾼이 될 만한 자는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상국은 생각해 보았다. 제6관구 사령관
서종철은 수도를 경비하는 것이 주어진
임무이고 이상국은 그 임무를 분담하고
있는 제6관구 휘하의 제30사단장이다.
쿠데타 모의자들이 서종철하고 이상국을
제거하려 들 것은 상식이라 할 수 있었다.
더구나 제30사단이 쿠데타 행동부대로서
출동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감금이 아니라 직결처분해 버리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을 것이 분명한 일이었다.
(빌어먹을, 그놈들이 언제 내 부대에
마수를 뻗쳤지?)
이상국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누르며
물었다.
무슨 일을 치르겠다는 거요?"
"글쎄 말입니다."
이갑영의 대꾸는 다분히 애매모호하기만
했다.
"딴생각 말고 참모장이나 부사단장은
모두 내 지시에 따르도록 하시오."
이상국은 단호하게 명령했다.
그들이 타고 있는 지프는 어느덧 화신
앞을 가로질러 광교 쪽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바로 그 무렵.
반도호텔 809호실 장면의 거실에는
밖에서 저녁식사를 마친 각료들이 한 사람,
두 사람 모여들고 있었다. 국무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밤 8시.
필동 연합참모본부 앞에 자리잡고 있는
아스토리아호텔 커피숍에는 육군 대령
계급장을 단 제6관구 사령부 참모장
김재춘이 구석진 곳에 앉아 시켜놓은
커피를 마실 생각도 않고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는 지금 자신이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
있다는 비장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성공하면 모르되 만일 실패할 경우 내
운명은 어찌될 것인가? 아니 내 운명은
어찌돼도 좋다. 사나이로 태어나 신념에
살다 죽는다면 그 이상 영광되고 보람된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가족들의 운명은
어찌될 것인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될 것이 아니겠는가?)
김재춘은 가족의 앞날을 생각하면 가슴이
쑤셨다.
(제발, 제발 성공해 다오!)
그는 마음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어쩌면 오늘 내일이 이승에서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지 눈물이 핑 돌기까지 했다.
문득 동기생 동지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일었다. 그는 그의
동기생 동지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머리
속에 그려보았다. 그는 육군사관학교 5기
출신이었다.
제12사단장 육군 준장 박춘식(朴春植),
국방대학원 육군 준장 송찬호(宋贊鎬),
제5사단장 육군 준장 채명신(蔡命新),
문재준(文在駿), 제2군사령부 공병참모
육군 대령 박기석(朴基錫), 제1공수특전단
단장 육군 대령 박치옥(朴致玉),
육군항공학교 교장 육군 대령
이원엽(李元燁), 육군보병학교 참모장 육군
대령 최재명(崔載明) 등 같은
5기생들이지만 벌써 선두그룹은 별을 달고
<장군(將軍)> 칭호를 듣고 있었다.
누가 먼저 별을 달고 안 달고 하는 것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김재춘은
생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 태반의 5기생들은 육군
소령으로서 대대장직을 맡고 실전 경험을
쌓아 갔었다.
5기생에 대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소개하면 그들 5기생들이 육군사관학교에
?그녀의 두 눈에 담겨
4기생까지는 일본군을 위시해서 만주군,
광복군 등 군사경험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입교했었으나 5기생부터는 군사경험이 없는
민간출신자들 중에서 뽑았었다.
이때 5기생으로 입교한 사람은 모두
380명. 만 9개월간의 교육훈련을 받고
그들이 육군 소위로 임관한 것은 1948년
4월 6일이었다. 6.25 전쟁 때 그들이 벌써
육군 소령으로까지 진급해 있었던 것은
한국군의 성장속도가 그만큼 빨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쟁이 휴전으로 매듭지어진 1953년
7월에는 벌써 빠른 사람은 대령으로 진급한
사람들도 있었다. 전쟁이 끝나자 진급이
더디기 시작했다. 인사적체가 생기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가담하게 되었던 것도 인사적체의 불만도
구실의 하나가 돼 주고 있었다. 표면에
내세운 명분은 그것이 아니었지만.
그건 그렇고, 김재춘의 경우에는
언젠가는 별을 달게 되리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 자신은 진급문제에 그리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제발, 제발 좀 성공으로 이끌어 다오.)
김재춘은 거듭 빌고 또 빌고 있었다.
밤 8시, 같은 시각.
해병 여단장 김윤근은 제2연대장 해병
대령 박승도(朴承道)와 여단 작전참모
정태석, 두 사람을 여단장실로 불렀다.
"두 사람을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오.
나는 오늘 오정근 대대를 이끌고 쿠데타를
그는 오늘 밤의 거사를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두 사람의 눈이 놀라움에 휘둥그래졌다.
(쿠데타, 쿠데타를 한다고?)
두 사람은 숨이 닥 멎어버리는 듯한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김윤근은 어떻게 해서 쿠데타에 가담하게
됐는지를 자세히 설명했다. 두 사람은 자못
긴장해 있으면서도 김윤근의 쿠데타론을
긍정하는 눈빛이었다.
설명을 끝내고 나자 김윤근은 명령했다.
"나 없는 동안 여단 지휘를 박 대령이
맡아 해주시오."
그러자 박승도는 상기된 얼굴로 간청하는
것이었다.
"여단장님, 부대 지휘는 다른 사람한테
같이 하도록 해주십시오."
"저 역시 똑같은 심정입니다. 저도
거사부대에 합류시켜 주십시오."
정태석도 간청하고 나섰다.
"고마운 일이오만, 두 사람이 여단
지휘를 맡아줘야 내가 안심하고 나갈 수가
있단 말이오!"
김윤근은 좋은 말로 두 사람을 달랬다.
박승도와 정태석이 물러나자 김윤근은
부관 홍경식(洪景植)을 불러,
"지금부터 숙소로 돌아가서 잠시 눈을
붙일 테니까 11시 정각에 깨우도록 해."
하고는 여단장실을 나섰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다. 이것이
해병대의 슬로우건이다. 이런 정신으로
뭉쳐져 있기 때문이었을까? 이날 김윤근은
두 사람에게 아무 거리낌없이 쿠데타
계획을 털어놓았던 것이다.
쿠데타에 가담해 있는 주체가 휘하의
부하에게 쿠데타에 대한 계획을 밝히고
간접으로나마 협력을 구했던 사람은 오직
김윤근 한 사람뿐이었다.
2. 박 장군, 지금 당신은 어디에......?
서울 다동(茶洞) 입구에 있던
삼희정(三喜亭)은 대중음식점이었다.
불고기가 전문으로 꽤 번창 일로에 있던
음식점이었다. 늘 손님이 바글바글 끓었다.
사촌이 기와집을 지으면 배가 아프다고
하지만 사촌은 커녕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도 지나가다가 손님이 바글바글 끓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기라도 하는 날엔 배가
아플 정도가 아니라 쑤셨다. 그만큼
번창만을 거듭하고 있던 음식점이었다.
제30사단장 이상국이 삼희정 안으로
들어서자 그와 저녁식사를 하기로 약속이
담고 맞아 주었다. 동기생 사이인지라 늦은
데 대해서 농담섞인 핀잔 한마디쯤 던질
법도 했으나 김판규는 오히려 이쪽이
미안해할 정도로 미소만으로 맞아 주었다.
이상국은 김판규에게 늦은 데 대해서
변명 한마디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먼저 별을 달았다는 오만에서였는지도
모른다.
네 사람은 불고기 냄새와 연기가 범벅이
되어 코를 찌르는 홀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마주앉았다. 순간, 이상국은 김판규가
정보참모부에 근무무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냈다. 그는 대령으로서 정보참모부장
김용배 밑에서 일하고 있었다.
"김 대령!"
이상국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아주
"쿠데타 정보가 있던데, 이게 도시 무슨
놈의 소리인지 모르겠어?"
이상국은 그렇게 의문스러운 정보가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지금 삼희정으로
오는 동안 박상훈, 이갑영한테서 들은
얘기를 앵무새 외듯 고스란히 털어놨다.
얘기를 듣고 나자 김판규는,
"실은 나도 그런 정보를 들었어." 하는
것이었다.
"김 대령도 들었어?"
이상국은 그만 바싹 긴장되었다.
육군본부 정보참모부의 김판규도 들었다면
이건 예삿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람, 이걸 어떡하면 좋지? 바로 우리
부대가 쿠데타 행동부대 제1진으로 정해져
있는 모양이야."
김판규는 무척이나 놀라는 것이었다.
그는 젓가락질을 멈추고 휘둥그래진 눈으로
이상국을 응시했다.
(이 친구가 쿠데타에 가담해 있으면서
나를 떠보려고 그러는 게 아닌가?)
김판규의 두 눈은 그런 의심을 담고 있는
것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게 정말인가?"
김판규의 반문에 이상국은 약간 짜증이
일기도 했다.
"그럼, 이런 중대한 문제를 내가 허튼
소리 하겠는가?"
딴을 그렇다. 아무리 동기생 사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털어놓을 수 있는 얘기는
아니었다. 김판규의 표정이 사뭇
심각해졌다. 그는 건성으로 젓가락을
"그렇다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일단 방첩대에 알리는 것이 상책일 거야.
괜히 신고조차 않고 있다가 쿠데타가
실패하는 날엔 그 책임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래?"
이상국은 김판규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쿠데타가 실패하는 날에는
사단장한테 제일 먼저 책임을 물으려 할
것은 정한 이치였다. 그제야 이상국은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이었다.
"식사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우리 모두들
506방첩대로 가세."
이상국은 박상훈, 이갑영, 김판규를
거느리고 506방첩대로 차를 몰았다.
506방첩대는 서울지구 방첩대로 소공동
조선호텔 맞은편 길 건너에 있었다.
출신인 육군 대령 이희영(李熙永)이었다.
그는 아직도 퇴근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방첩대의 업무가 그만큼 폭주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도 있었다.
이희영은 예고없이 찾아온 이 동기생들이
못내 의아스럽기만 한 모양이었다.
"어쩐 일들이오. 네 분이 같이?"
"실은......."
이상국이 입을 열었다.
"쿠데타 정보가 있기 때문......."
"쿠데타?"
"예."
"쿠데타 정보라니요? 좀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면서 이희영은 용지와 펜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또다시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상국은 쿠데타 주모자가 박정희라는
것만은 뺐다. 그로서는 확증을 내세우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얘기를 듣고 난 이희영은 꽤나
미진하다는 표정이었다.
"30사단이 쿠데타 행동부대로 나서기로
돼 있다는 것만 알고 쿠데타 주동자들은
모르다니, 이거 어떻게 해석해야
하겠습니까?"
이갑영이 가로막고 나섰다.
"실은 저희들이 이백일 중령한테
주동자들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만, 이백일 중령이 차일피일
미루어 오는 통에 소개받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동자가 누군지 모른단
"그렇습니다."
이희영은 가볍게 끄덕이면서 잠시 생각에
잠기는 눈치였다.
(박정희 장군이야! 주모자는 박정희
장군일 것이 틀림없어.)
그는 이렇게 속으로 단정을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근거에서 이희영은
이런 단정을 내리고 있었던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이희영은 서둘러
방첩대 본부대장인 육군 준장
이철희(李哲熙)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철희하고는 곧 연결되었다.
"쿠데타에 관한 중대한 정보가
신고되었습니다. D데이 H아워가 바로 오늘
밤 10시라고 합니다."
이희영의 보고를 받은 이철희도 꽤나
울려나오는 목소리가 옆의 사람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누가 그런 신고를 해왔어?"
"네, 제30사단장 이상국 준장이십니다."
"이상국 준장?"
"네."
"그 사람 지금 거기 있어?"
"네, 있습니다."
"그럼 내가 지금 그리로 가겠어."
이철희는 금방 달려왔다. 대장실로
들어서는 그는 여간 허둥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생각 때문일까? 금붕어의 눈처럼
툭 튀어나온 큰 두 눈이 겁에 질려
있기조차 한 것 같았다.
이철희가 들어서자 이상국 이하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특히 이희영을 포함한
맞았다.
"귀관들이오, 쿠데타에 대한 신고를 한
사람들이?"
이철희는 네 사람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대꾸를 한 것은 이상국이었다.
"뭐가 어찌됐다는 것인지 좀 자세히
얘기해 보시오."
이상국은 다시 세번째로 되풀이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D데이 H아워가 오늘 밤 10시라?"
"그렇습니다."
"참모총장 각하는 지금 어디 게시지?"
이철희는 도무지 제정신이 아니었다.
혼자 중얼거리며 육군본부에 전화를 거는가
하면 참모총장 공관에 전화를 걸며 총장의
없었다. 전화기의 다이알을 돌리는 그의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기조차 했다.
마침내 이철희는 참모총장의 행방을
수소문해냈던 모양이었다. 그는 수화기를
놓기가 바쁘게 행선지도 밝히지 않고
밖으로 뛰쳐나가는 것이었다. 그러는 그의
행동은 꼭 실성한 사람 같이만 느껴졌다.
이철희가 황망히 밖으로 달려나가자,
이상국은 두 부하에게 나직이 명령을
내렸다.
"박 대령하고 이 대령은 속히 부대로
돌아가서 부대를 장악하시오."
이름 석 자깨나 알려진 서울 장안의
출입해 보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때는
신록의 호시절 5월이라고는 하지만 사대문
밖은 한 발만 벗어나면 하루 세 끼는
고사하고 한 끼의 끼니조차도 못하는
소외계층들이 우글거리고 있는 것이 당시의
실정이었다.
그래서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무지렁이 같은 백성들은 5월을
<보릿고개>라 일컬어 왔었다. 이
보릿고개의 5월에 들어서면서 데모가
가라앉은 것은 다행이었으나, 대신
생활대책이 막연한 민생들이 도처에서 삶을
포기하는 사건이 잇달아 일어나 뜻있는
사람들의 가슴을 더없이 아프게 해주고
있었다.
그런데도 요정 은성은 땅거미가 내릴
민생의 비극적인 얘기는 어느 먼 나라의
얘기인 듯 요정 은성의 출입자들은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는 부류의
군상뿐이었다. 그들은 대개가 이름 석 자만
대면 알 만한 이 땅의 지도급
인사들이었는데도 말이다.
요정 은성은 오늘 밤도 흥청거리고
있었다.
까르르...... 여인들의 교성이 장지문
밖에까지 울려퍼지고 있는가 하면,
하하...... 하고 기름진 호걸 웃음 또한
장지문 밖으로 새어나와 흩어지곤 했었다.
이 밤, 요정 은성의 별실.
요정 은성의 별실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육군 참모총장 장도영은 뭐가 그리
유쾌한지 마냥 싱글벙글이었다.
자다가도 낄낄댈 만한 일이기는 했을
것이다. 공자(孔子)는 30에
입지(立志)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 사나이는 38살에 벌써 별을
3개씩이나 단 육군의 총수인 육군
참모총장인 것이다.
대장부가 이만하면 엄청난 출세를 했다고
할 수 있잖겠는가. 하기야 장도영뿐 아니라
지금까지 육군의 총수를 지낸 사람은
거의가 삼십대에 그 중책을 맡긴
했지만.......
그랬다고 하더라도 장도영으로서는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하마터면 벗어야
했던 군복이었다. 그것을 행운의 여신이
편들어 주었던지 군인으로서는 최고의
영예라 할 수 있는 육군 참모총장에까지
민충이 쑥대 오른 기분이 되어 한껏
취해져 있을 때 마담이 들어와 누가 밖에
와서 참모총장을 찾는다고 귀띔해 주었다.
장도영이 밖으로 나와보니 방첩부대장
이철희가 서 있었다.
"무슨 일이야?"
장도영은 짜증섞인 말투로 물었다. 한창
주흥이 도도해져 가고 있는데 엉뚱한
훼방꾼이 주흥을 깨니 역정이 날 만도 했을
것이다.
"각하, 큰일났습니다. 쿠데타 모의가
신고되었습니다. D데이 H아워가 바로 오늘
밤 10시랍니다."
"뭐야?"
이철희로부터 보고를 받은 장도영은
기절초풍하듯이 놀랐다.
"박정희 소장이라고 합니다."
"뭐 박정희 소장?"
제30사단장 이상국은 이철희에게 쿠데타
주모자가 박정희라고는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철희는 쿠데타 주모자가
박정희라는 것을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그는 박정희가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다는 정보를 벌써부터
입수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그 정보를 입수하는 즉시 직속상관인 육군
참모총장에게 보고를 하고 어떤 조치를
강구했어야 옳았다.
그러나 그는 그 정보를 눌러놓고 있었던
것이다. 군부의 정보를 촐괄하고 있는
방첩부대 본부대장의 직책으로 볼 때, 그는
직무유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 된다.
눌러놓고 있음으로써 박정희의 쿠데타
계획을 간접적으로 방조해 주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왜?
어찌됐거나 제30사단장 이상국이 쿠데타
모의를 신고함으로써 이제 쿠데타 계획은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이철희는
판단했던 것이다. 그래서 주모자는 박정희
소장이라고 서슴지 않고 털어놨던 것이다.
"틀림없나, 박정희 소장이라는 것이?"
"네, 각하!"
장도영은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빌어먹을 새끼, 기어이 하고야 말겠다
그 수작이야?)
원색적인 욕설이 목구멍을 타고 기어
올라오는 것을 장도영은 간신히 눌렀다.
장도영은 발길을 돌려 다시 별실로
되돌아갔다.
"이거 미안하오. 급히 다녀올 데가
있어서 잠시 실례 좀 해야겠소. 그리
시간은 지체하지 않을 거요. 곧 돌아올
테니 두 분께서 천천히 들고 계십시오."
두 사람이 미처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휑하니 방을 뛰쳐나가는 것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세상에 이렇게 기가 막힌
얘기가 또 있을 수 있을까?
쿠데타는 한 정권을 뒤집어 엎는 행위,
여차하면 엄청난 인명피해를 내게 된다.
그런 대사건이 벌어지려 하고 있다는
정보를 받고도 장도영은 어째서 두
사람한테는 이 사실을 터놓지 않고, 급히
다녀올 데가 있느니 어쩌고 저쩌고
말이다.
혹시 장도영은 처음부터 쿠데타에 가담돼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박정희
쿠데타 거사쯤 혼자서라도 얼마든지
꺾어버릴 수 있다고 자신한 때문이었을까?
세월이 흐른 뒤, 장도영은 <나는 역사의
죄인> 운운하며 5.16 군사 쿠데타 전의
박정희와 인간관계에서부터 쿠데타와
관련된 많은 얘기들을 털어놓은 일이
있지만, 그는 이날 은성에서 같이 회식을
하던 장창국, 김용배 두 사람에게 어째서
쿠데타 정보 보고를 알려주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언급한 일이 없다.
장도영은 사전에 박정희와 어떤 밀약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장도영은 이철희를 거느리고 서둘러
506방첩대로 달려왔다. 그때까지 제30사단
사단장 이상국과 육군본부 정보참모부의
김판규는 이희영과 얘기를 나누며
이철희로부터 하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이 왈칵 열리면서 장도영이
506대장실로 들어서는 것을 본 세 사람은
마치 용수철에서 튕겨지듯이 벌떡 일어나
부동자세를 취하고 거수경례를 붙이는
것이었다.
장도영은 그러한 세 사람의 몸가짐에는
관심조차 없다는 듯 이희영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금 박정희 소장은 어디에 있나?"
"지금 신당동 자택에 한웅진, 장경순 두
506방첩대장 이희영도 쿠데타의 주모자는
박정희라는 것을 벌써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철희가 뛰쳐나가자 곧 무전으로
박정희를 감시하고 있는 요원들을 불러
그의 소재를 그의 소재를 파악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506방첩대장
이희영이 박정희가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 어째서
단호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느냐? 하는
의문이 일게 될 줄로 안다. 그러나
이희영은 그 자신의 직책에 충실했었다.
그는 자신의 직책에 충실했으나 이것을
상부선에서 덮어버렸던 것이다.
"집에 있는 것이 분명한가?"
"예, 분명합니다."
다소 마음이 놓였던가? 그제야 새삼
이상국의 존재를 인식하듯,
"이봐, 이 준장."
이상국 쪽을 향하며 그를 불렀다.
"네, 각하."
이상국이 한층 더 꼿꼿하게 부동자세를
취했다.
"귀관은 명색이 장군이라면서 능력이
고작 그것밖에 못 되더란 말인가?" 하고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명색이 장군이라니? 아무리 육군
참모총장이라고 하더라도 대한민국 육군의
<장군>을 그 따위로 모욕할 수 있단
말인가? 이상국은 뜨거운 것이 목구멍으로
치솟았으나, 그는 어쩔 수 없이 그 뜨거운
울화를 누를 수밖에 없었다.
"이백일인가 하는 중령 하나 제대로
다루지도 못하고 그러고도 장군이야?"
이상국은 계속 치밀어 오르는 모욕감을
억누르기가 어려웠던지 좀 거칠게
대꾸했다.
"소관은 그 내용을 오늘 저녁에 듣고
알았을 뿐입니다. 그래서......."
"잔소리 말어!"
장도영은 이상국의 변명을 끝까지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잔소리 말라는
일갈로 그의 말을 육군 참모총장의 권위로
눌러 버렸다.
"당장 돌아가서 부대를 장악하라.
알겠나?"
"예. 각하."
이상국은 거수경례를 붙이고 그 자리에서
절반쯤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밖으로
나오자 이상국은 공중전화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그는 아내에게 지금 당장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가 있으라고 했다.
아내가 별안간 왜 그러느냐고 의아해하며
반문했다.
"알 것 없어. 하라는 대로 하기나 해!"
그는 신경질을 부리며 전화를 끊었다.
제30사단 사단장 이상국이 지프를 몰고
506방첩대를 막 떠나는 그 시간,
반도호텔에서는 국무회의를 막 마치고
주차장으로 내려온 각료들이 각기 자기
전용차를 찾아 타고 떠나고 있었다.
군용전화기를 들어 잇달아 명령을
하달했다. 그가 제일 먼저 전화를 건 곳은
육군본부.
"주번사령, 즉시 각급 참모를
비상소집하라!"
두번째로 그는 헌병감 육군 준장
조흥만(曺興萬)에게 전화를 걸었다.
"헌병감, 지금 6관구 사령부에 쿠데타
주모자들이 집결해 있다. 즉시 헌병대를
동원해서 반란 모의자 전원을 체포하라!"
세번째로 그는 제6관구 사령관 관사에
전화를 걸었다. 사령관은 육군 소장
서종철이었다.
"서 사령관, 지금 귀관의 사령부 안에서
반란모의가 진행중에 있는 것을 알고 있소,
모르고 있소?"
받은 서종철은 날벼락을 맞은 듯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즉각, 진압조치 하시오!"
장도영은 상대방이 놀라 당황해하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고 추상 같은 명령을
내렸다. 네번째로 장도영은 제33사단
사단당 육군 준장 안동순(安東淳)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안 준장, 지금 즉시 부대로 돌아가서
출동태세를 갖추고 대기하시오. 내
육성명령 이외에는 누구의 명령도 수령하지
마시오."
다섯번째로는 김포에 있는 공수특전단
단장 육군 대령 박치옥(朴致玉)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자넨, 지금 뭘 하고 있나?"
시간에 단장이 부대에 있다는 사실이 좀
의외여서 그런 엉뚱한 질문을 던졌는지도
모른다. 술집 아니면 집에 있어야 하는
것이 정상이었을 테니 말이다.
"각하, 내일 있을 비둘기 작전 때문에
나와 있습니다."
비둘기 작전이란 무엇인가? 민주당
정권에서 하도 데모가 잇달아 일어나고
있는 데다가 군부 쿠데타설이 귀청 아프게
나돌고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대비해서
세워놓은 작전계획을 말한다.
"무슨 정보 못 들었나?"
"예, 각하, 못 들었습니다."
<무슨 정보 못 들었나?>라니, 이게
도무지 장도영이 맑은 정신으로 하는
질문이었을까, 아니면 경황이 없어
박상훈은 분명히 이상국에게, 이상국은
이희영과 이철희에게, 이철희는 분명하게
장도영에게 공수특전단도 쿠데타
출동부대라는 점을 강조했었다. 그랬는데
<무슨 정보 못 들었나?>라니. 이것 또한
이날의 장도영의 조치를 의심케 해주는
한가닥이었다.
"모든 훈련계획을 중지하라. 상황에
이상이 있으면 즉시 보고해. 내 위치는
506방첩대다."
여기까지 말했던 장도영은 황급히
덧붙였다.
"아, 그리고 내일 아침 7시까지
부대이동을 금지한다. 별명이 있을 때까지
대기하라!"
장도영이 공수특전단 단장 박치옥에게
있었다. 그는 박치옥을 자기 사람으로 믿고
철저하게 신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치옥을 공수특전단 단장으로 끌어준 것이
장도영 자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장도영 그는 육군 참모총장에 발탁되자
얼마 뒤 박치옥을 공수특전단 단장으로
끌어주었던 것이다. 장도영이 박치옥을
믿을 만한 일이기도 했다.
(설마 박치옥이 제가 나를 배신이야 하지
않겠지.)
그래서 은성에서 506방첩대로 달려오는
차중에서 이철희가 공수특전단도 쿠데타의
행동부대의 하나라고 귀띔해 주었던
것이나, 박치옥에게 한해서만은 엉뚱한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그러나 장도영은 마음 한구석에 아무래도
박치옥과의 통화를 끝내자 장도영은
공수특전감 육군 준장 장호진(張好珍)에게
전화를 걸었다.
"장 준장은 지금부터 공수단의 동태를
엄중 감시하고 이상이 있을 때는 즉시
보고하시오."
상대방이 무엇 때문에 그러느냐고
반문하는 것 같았으나, 그는 장호진이 미처
말을 끝내기 전에 전화를 끊어 버렸다.
이것으로 장도영은 반란 음모를 분쇄해
버릴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했다고
자신했던 모양이다. 그는 서둘러
506방첩대를 빠져나갔다. 이철희에게도
이희영에게도 별다른 지시를 내리는 일
없이.
돌아오겠다고 하는 한마디를 남기고 자리를
떴으니 곧 돌아오리라 믿고 천천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장도영이
자리를 뜬 지 한 시간도 못 돼 돌아온
것이다.
그는 방으로 들어서자 제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술잔을 들어 접대부 앞에
내밀었다.
접대부가 술잔에 술을 채우고 있는
사이에 사죄하듯 뇌까렸다.
"미안하오, 자리를 떠서. 별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공연히 법석을 떠는
바람에......."
그러면서 그는 술잔에 술이 다 채워지자
단숨에 목구멍에 쏟아부었다. 그는 쿠데타
모의를 별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법석을
기울였다. 인간에게 운명이 있듯이
국가에도 운명이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았는가?
훗날, 장도영은 이런한 일련의 사실
때문에 <장도영은 양다리를 걸쳤던
인물>이라는 혹평을 듣게 된다.
그가 쿠데타 그룹과 장면 정권에게
양다리를 걸쳤든 걸치지 않았든 간에
장도영은 별 볼일 없는 인물이었다는
느낌이 자꾸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엉거주춤하기만 했던 그의 자세, 군인답지
못한 그의 어깨에 별을 세 개씩이나 달아
주었던 인물들 또한 눈뜬 장님이었다는
가시돋친 질책을 퍼붓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앵--!
앵--!
사이렌 소리가 요란했다. 헌병들을 실은
드리쿼터를 선도하는 헌병 백차가 질주하며
울리는 사이렌 소리였다.
그 사이렌 소리에 김재춘은 번쩍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그는 지금껏 여전히
아스토리아호텔 커피숍 한쪽 구석에 앉아
오늘 밤이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라고
단정하고 있었기에 시간이 흐르는 것도
잊은 채 깊은 상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그의 상념을 깨버린 것이 바로 헌병
백차가 질주하며 울리는 사이렌 소리였던
것이다.
(저 사이렌 소리는?)
순간, 불길한 예감이 스친 그는
부지불식간에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9시가
넘어 있었다. 그는 후닥닥 놀란 토기가
튕겨지듯 일어섰다. 그리고는 밖으로
황급히 달려나가 세워둔 지프에
뛰어올랐다.
(거사 계획이 탄로난 게 아냐?)
핸들을 잡고 있는 그의 머리 속에는 이
한 가지 생각만으로 꽉 차 있었다.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았다. 차량의
통행이 뜸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만일 탄로났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느냐가 문제였다.
대처 방안을 생각해 보았으나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빌어먹을!"
터져 나왔다. 경황이 없으니 두뇌도 놀라
회전을 정지했는가 보다. 남대문에 이르자
일단 길 옆에 차를 세웠다. 제6관구
사령부에 전화를 걸어봐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마침
삼해약방(三海藥房)이라는 간판이 망막
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차에서 뛰어내리자
그는 약방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공중전화의 송수화기를 집어들기가 무섭게
다이알을 돌렸다. 신호를 보내는 소리가
울리기가 무섭게 상대방에서 전화를 받는
것이었다.
"나, 참모장이다. 박원빈 중령을
바꿔라."
"자리에 없습니다."
(빌어먹을, 어디에 갔기에 자리를
김재춘은 신경이 송곳처럼 뾰족하게
곤두서는 것을 누르며,
"그럼, 주번사령 바꿔라!"
불과 몇 초 사이에 낯익은 육군 중령
이경화(李京華)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주번사령 이경화 중령입니다."
"사령부 내의 상황이 어떤가? 이상
없는가?"
"지금 사령부에 비상이 걸려 전
장병들에게 귀대명령이 내려졌습니다. 뭔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사령부에 비상이 걸리고 전 장병한테
귀대명령이 내려졌다? 이건 잘못돼도 뭔가
크게 잘못된 게 틀림없었다. 이 비상은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사령관 서종철이
당직사령 이경화에게 전화로 명령해서
사령관 서종철이 취한 조치는 이 한
가지뿐이었던 것이다.
"알았다. 곧 들어가마."
그는 일단 전화를 끊었다가 다시
다이알을 돌리기 시작했다. 신당동
박정희의 집에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박정희와는 곧 연결이 이루어졌다.
"각하, 시내에는 헌병 백차들이 질주하고
있고, 6관구 사령부에는 비상이
걸렸습니다. 아무래도 계획이 탄로난 것
같습니다."
"뭐요, 계획이 탄로나?"
박정희는 꽤나 놀라는 눈치였다.
"각하, 제가 먼저 사령부로 들어가서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예정된
시간보다 좀 늦더라도 꼭 사령부로 와
"알았소, 내가 도착할 때까지 김 대령이
모든 일을 맡아서 수고해 주시오."
김재춘의 전화를 받고 난 박정희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탄로가 난 모양이라니?)
너무나 기가 막혔다. 오늘이 있기를
얼마나 고대했는데 탄로가 나? 그러나 그는
결코 당황하지는 않았다. 육군 정보학교장
육군 준장 한웅진이 얼굴색이 하얗게
질려서 물었다.
"김 대령이라니 누굽니까?"
"6관구 사령부 참모장 김재춘 대령이오!"
"그가 계획이 탄로났다고 했습니까?"
"아니 탄로난 게 아니라 탄로난 것 같다
"만일 탄로났다면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당장 뭘 어떻게 한다기보다도 좀더
하회를 기다려 봅시다."
계획이 탄로나 잡혀가는 한이 있더라도
의연하게 처신해야 되겠다고 박정희, 그는
스스로를 타이르고 있었다.
(쿠데타란 죽기 아니면 살기인 것을.)
그렇다. 쿠데타란 결사의 각오 없이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차피 생사관은
뚜렷이 확립해 놓고 있는 처지, 운명의
신이 생과 사, 어느 쪽으로 내몰든 결코
당황하거나 비겁한 몸가짐은 하지
않으리라. 박정희는 스스로를 타이르고 또
타일렀다.
헤드라이트를 환하게 밝히고 제6관구
옆의 담장을 등지고 군복차림을 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서 있는 것이 눈
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김재춘은 지프에서
뛰어내려 그들 앞으로 다가갔다.
헤드라이트의 불빛 덕분에 그들의 모습을
금방 가려볼 수가 있었다. 그들은 육군
준장 윤태일(尹泰日)과 송찬호를 위시해서
모두 8기생들인 이석제(李錫濟),
오치성(吳致成), 김형욱(金炯旭),
길재호(吉在號), 유승원(柳承源), 그리고
육군 소령인 이낙선(李洛善) 등이었다.
이들이 바로 혁명을 모의한 이른바
주체들이었다.
그들이 H아워 직전까지 제6관구 사령부로
집결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쿠데타
지휘본부가 바로 여기로 정해져 있었기
"왜 들어가지 않고 여기 모여 서 있는
거요?"
"사령부에 비상이 걸렸어요. 그래서
들어가지를 못하고 엉거주춤해 있는
겁니다."
누군가가 그렇게 대꾸했다.
"미안하게 됐소, 밖에 일이 있어서
나갔다 오느라 늦어졌소. 잠시 동안만
기다려 주시오."
김재춘은 정문으로 달려가 위병장교를
불렀다.
소령 계충의(桂忠義)가 달려왔다.
"귀관은 어째서 저 장교님들을 밖에 서
있게 했는가? 저 장교님들은 육군본부에서
비상소집 상황을 감독하고자 나오신
감독관이라는 것을 모르더란 말인가?"
"몰랐습니다. 참모장님!"
"몰랐다는 게 말이 돼? 위병장교가
모르면 누가 안단 말인가? 어서 통과시켜
드려!"
"네, 알겠습니다."
위병들에 의해서 정문 앞에 쳐놓았던
가시철망 바리케이드가 곧 치워졌다. 9명의
쿠데타 그룹 멤버들은 그제야 위세를
부리며 영문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육군본부에서 파견된 감독관이라는 몸짓을
하면서.
사령부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그때 막
사령관 서종철한테서 김재춘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참모장이오?"
"네, 각하."
사령부가 쿠데타의 지휘본부라는데
참모장은 알고 있소?"
"별안간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김재춘은 시침을 뚝 뗐다.
"나도 무슨 얘긴지 통 모르겠소. 하여간
나도 곧 그리로 갈 테니 참모장이 부대를
장악해 주시오."
"네, 각하. 잘 알았습니다."
"쿠데타 관련 장교들이 있다면 지체없이
체포 감금해 놓도록."
서종철은 전화를 끊으려다가 한마디
곁들여 지시하는 것이었다.
김재춘은 긴장된 가운데도 풀썩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억제하기가 어려웠다.
하기야 사령관 서종철은 김재춘이 쿠데타에
가담해 있다는 사실을 이 순간까지도 전혀
내렸을 수밖에 더 있겠는가? 고양이한테
반찬 가게를 맡겨놓는 격이었다. 이것은
뒷날의 김재춘의 술회다.
그런데 장도영이 서종철한테 전화를 걸어
귀대해서 사령부를 장악하라고 명령한 것이
언제인데, 그는 아직도 사령부로
돌아오지를 않고 밖에서 전화로만 명령을
내리고 있더란 말인가? 이러한 서종철의
몸가짐을 통해서도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질 수밖에 없었던 대한민국 장면 정권의
운명을 또다시 절감치 않을 수가 없게
된다.
제6관구 참모장 육군 대령 김재춘은
그룹 멤버들은 자기 방에서 대기하도록
이른 다음, 사령부 참모들을 부사령관실에
모이라고 지시했다. 이어서 그는 본부사령
계충의에게 명령했다.
"지금 곧 병력 2개 소대를 차출해서
완전무장시켜 사령부 외곽경비를 담당케
하고, 또한 육군본부에서 파견된
장교들에게 권총과 칼빈총을 지급하라."
이때 당직사령 이경화가 들어왔다. 그는
김재춘이 귀대하기까지 참모총장 장도영과
사령관 서종철한테서 몇 차례 전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지금 사령관 각하께서는 어디에
계시는가?"
"어디 계신다는 말씀이 없었습니다.
수시로 전화 주시겠다고만 하셨습니다."
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사령부에 나타났다 하면 어차피 체포를
해서 어디엔가 감금을 해야 한다. 그래도
상관으로 모시고 있던 처지, 아무리 혁명을
일으키는 마당이라 하더라도 지금까지의
상관을 체포해야 한다는 것이 말과 같이
그리 쉬운 노릇인가.
(차라리 잘된 일이야.)
김재춘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김재춘의 입장으로서는
다행한 일이었는지 모르나 역사(歷史)의
입장으로서는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제6관구 사령관 서종철은 이 시간 6관구
사령부 안에 있어야 한다. 육군 참모총장
장도영은 분명히 <지금 귀관의 사령부
안에서 반란 모의가 진행중에 있다는
하시오>라고 서종철에게 명령했었다.
그랬는데도 그는 어째서 이 자리에
나타나 있지 않았는가? 사령부 안에서
반란모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말을 듣자
겁을 집어먹고 감히 귀대를 하지 못하고
있는 건가? 그래서 제6관구 예하의 부대로
피신해서 반란모의를 진압할 대책을
강구라도 하고 있단 말인가?
서종철은 전화를 통해서 김재춘에게
부대를 장악하라고 지시했다. 참모장
김재춘은 쿠데타에 관련되어 있지 않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사령부
안에서 반란모의가 진행중이었다면
반란모의자들에 의해서 김재춘이
체포당했을 법한 일인데 그는 무사했고
사령관의 전화까지를 받지 않는가?
사령부에 나타났어야 옳았다. 그랬어야
군인으로서의 그의 자세는 당당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그는 여지껏 이
시간까지, H아워가 지난 시간까지도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것만을
가지고 말한다면 그는 분명히 <명령
불복종죄>를 저질렀고 <직무유기>를 범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육군 소장이다.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장교로 임명됐다고
해서 누구나 별을 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장성 심사위원회 위원들한테 돈보따리를
싸가지고 다니며 뇌물로써 별을 단 것이
아닌 이상에는 그만한 능력이 인정되어
별을 달았을 것이다.
그런 능력 있는 서종철이 최고 총수의
않고 반란을 진압하려는 적극적인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제6관구 사령관 서종철은 지금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전화를 끊자,
그는 제6관구 사령부로 가지 않고
육군본부로 차를 몰아 헌병감 육군 준장
조흥만을 찾아갔던 것이다.
"조 장군, 도대체 어찌된 노릇이오.
6관구 사령부 안에서 반란모의가
진행중이라니? 오늘 퇴근하는 그
시간까지도 반란 같은 징후는 전혀
보이지가 않았는데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린지 모르겠소. 꼭 도깨비한테 홀린 듯한
느낌이오."
"그러게 말입니다. 총장은 즉시 헌병을
동원해서 반란모의자를 체포하라는 추상
날벼락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헌병을 6관구 사령부로 보내기는
보냈습니까?"
"예, 보냈습니다."
조흥만이 헌병을 급파했다고 말하자,
서종철은 제6관구 상황이 어찌돼 있는지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는
제6관구 사령부에 전화를 걸어 김재춘을
찾았으나 부재중이라고 했다. 5분 간격으로
계속 다이알을 돌려 김재춘을 찾았으나
연결이 되지 않아,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당직사령을 불러
명령했다.
"즉각 비상을 걸어 각급 참모들을 전원
소집하고 참모장이 귀대하면 보고하도록
하라!"
김재춘이 귀대하거든 귀대했다는 사실을
자기에게 보고하라는 소리인가, 아니면
비상을 건 사실을 참모장한테 보고하라는
소리인가? 하여간에 서종철이 이런 조치를
취한 것이 9시에서 9시 반 사이, 그리고는
그는 결과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김재춘이 귀대하기 전 헌병감 조흥만이
급파한 헌병감실 수사관 70명은 이미
제6관구 사령부에 도착해 있었다. 헌병감실
수사요원들을 거느리고 제6관구 사령부로
출동한 지휘자는 헌병차감 대령
이광선(李光善)이었다.
"이 대령, 귀관은 지금 즉시
수사요원들을 대동, 제6관구 사령부로 긴급
출동해서 거기에 모여 있는 쿠데타 관련
장교들을 전원 체포해 오시오."
사령부로 급파하면서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허나, 그들로서는 누가
반란음모자들인지 가려내기가 어려웠다.
모두가 얼키고 설켜 우왕좌왕하고 있을
뿐이었다.
김재춘은 쿠데타 그룹 멤버들을
참모장실에 대기시켜 놓은 다음
헌병감실에서 파견한 수사요원들을
불러모았다.
"나는 6관구 사령부 참모장 김재춘이다.
우선은 옥석을 구분해야 제관들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될 줄로 안다. 나 역시
지금으로서는 누가 누군지 구분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귀관들은 잠시 저기
창고에 가서 대기하고 있도록 하라!"
제6관구 사령부 건물 옆에는
김재춘은 특파된 수사요원들을 모조리 이
창고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앞으로 내 명령 없이는 절대로 위치를
이탈하지 말라! 알겠나?" 하고, 엄명까지
내렸다. 김재춘의 이 조치로 일단은 위급한
상황은 모면한 셈이었다.
이때가 10시경이었다. 수사요원들을
창고에 연금시키고 나자 김재춘은 즉시
신당동 집의 박정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각하, 30사단의 부사단장하고
참모장이란 놈이 사단장한테 밀고를 하는
바람에 일이 탄로났습니다. 그래서 30사단
출동도 어렵게 되었고, 지금 제6관구
사령부는 뒤죽박죽입니다."
"탄로가 났다고?"
"네, 각하!"
박정희의 두번째 반문은 거의 비명에
가까운 듯한 목소리였다. 한동안 침묵에
잠겨 있다가 간신히 말소리가 이어졌다.
"알겠소, 내 곧 그리로 가겠소."
박정희와 전화통화를 끝내고 나자
김재춘은 이번에는 이광선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이광선은 김재춘과 육사 5기
동기였다.
"여보 이 대령, 박 장군하고 통화내용을
들어 알겠지만 이 쿠데타는 박 장군이
주도해서 일으키려 하고 있는 거요. 당신은
헌병감의 명령을 받고 출동했겠지만 사실은
자온영 총장 각하께서도 우리를 은근히
지원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오.
그러니 헌병감의 명령을 수행하려 할 것이
아니라 우리한테 협력하는 것이 좋을
이광선은 난처하기만 했다. 그는 처음
제6관구 사령부로 수사요원들을 거느리고
달려왔을 때에는 누가 쿠데타 모의자인지
구별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조흥만이 그를
보낼 때, 쿠데타 음모자들은 이러저러한
장교들이라고 이름을 분명히 밝혀 주었던
것은 아니었다. 덮어놓고 제6관구 사령부로
출동해서 쿠데타 음모자들을 잡아오라고
막연한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그가
수사요원들을 거느리고 제6관구 사령부로
들이닥치는 즉시로 체포의 손길을 뻗치지
못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어떤 자들이
쿠데타 음모자들이냐 하는 것은 대강
눈치로 추측할 수 있었다. 그래서 명령을
수행하려 하는데 김재춘이 수사요원들을
이광선은 김 대령이 자기의 사령부에서
일이 벌어지려 하는 것을 알고 책임상 자기
스스로 사태를 수습하려 하는가 보다 하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수사요원들을 창고로 몰아넣고는
박정희에게 쿠데타가 탄로났다고
전화보고를 하는 게 아닌가. 전화보고를
들으면서 이광선은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꼭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듯한
느낌이었다.
(김 대령도 쿠데타에 가담해 있던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단 말이지, 그렇다면?)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김 대령이 쿠데타 음모자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안 이상에는 동기생이라는
정에 이끌려 방치할 수 없는 일 아닌가?
이광선이 이렇게 결심을 굳히고 있는데,
김재춘이 그를 붙들고 설득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광선은 황해도 재령(載寧) 출신이며,
재령 명신중학교를 나왔다. 황해도인을
가리켜 석전경우(石田耕牛) 운운하고
있지만 순수 황해도 토박이는 사람됨이
여간 무르지가 않다. 이광선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의 머리 속에는 자꾸
<김재춘은 동기생인데> 하는 생각이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김재춘의 입을 막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었던 것인데 그것을
눈치챘는가? 김재춘이 더욱 열을 올리며
그를 설득하였다.
"이 대령, 우리하고 손을 잡읍시다.
우리가 왜 쿠데타를 하려고 하는지는 이
정권을 이대로 놔두다간 안 되기 때문이오.
그래 군인이 돼 가지고 나라가 망하는 꼴을
바라보고만 있어야 하겠소?"
"어찌된 노릇이야, 죽든 살든 나오겠다고
했으면 나와야 할 게 아냐?"
김재춘은 신경이 날카로울 대로
곤두섰다. 당초의 계획은 박정희는 H아워
직전까지 제6관구 사령부로 나오기로 되어
있었다. 그것을 박정희가 H아워까지 나오지
못한 것은 김재춘이 혁명모의가 누설됐다고
보고했기 때문에 시간적인 차질은 있을 수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일단 나오겠다고 약속한
있어야 옳았다. 그런데 시계는 11시를
가리키고 있는데도 여지껏 코빼기조차 볼
수가 없으니 어찌된 노릇이란 말인가?
(혹시 출동하다가 방첩대에 체포된
것이나 아닐까?)
자꾸만 체포됐을 것이라는 상념만이
일었다. 쿠데타 모의가 밀고된 이상에는
주모자가 누구라는 것도 밀고됐을 것이고,
그러고 보면 방첩대에 체포당했을 가능성이
너무나 짙었다.
(빌어먹을, 사람의 애간장을 이렇게
태우다니?)
김재춘은 연방 시계만 들여다보다가 다시
한번 확인할 양으로 신당동 집에 또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는 사람은 박정희의 아내
육영수(陸英修)였다. 그녀의 대답은
떠난 지가 한 시간 가량이나 됐다는
것이다. 신당동에서 이태원을 거쳐 영등포
제6관구 사령부까지 오는 데 30분이면
넉넉했다. 집을 떠난 지가 한 시간
가량이나 됐는데도 여지껏 나타나지 않고
있다면 사고임이 분명했다.
김재춘의 마음은 또다시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박정희가 갔을 만한 곳에
전화를 걸어 수소문해 보았다. 여전히
오리무중일 따름이었다.
(빌어먹을! 혁명 총지휘자가 거사시간이
넘어도 지휘소에 나타나지를 않고,
그래가지고 무슨 놈의 혁명을 하겠다는
거야?)
김재춘은 치미는 분노에 몸을 떨었다.
"참모장님, 뭐라 지시를 내려주셔야
비상소집에 응해서 허둥대며 달려온
제6관구 사령부 소속 장교들은 한 시간이
넘도록 아무 지시가 없는 데에 뭔가 이상한
공기를 느꼈던 모양이었다.
육군본부에서 비상소집을 감독하러
나왔다는 장교들도 참모장실에서
웅성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헌병감실
수사관들은 무엇 때문에 출동을 했고
참모장은 왜 그들을 제사공장 창고에 쓸어
넣었는가? 모든 움직임이 수상쩍게
보여졌을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참모장님......."
"별명이 있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
김재춘으로서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박 장군,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
김재춘의 속은 자꾸만 타들어갔다.
입술이 바싹바싹 말라붙기조차 했다.
3. 버마식 쿠데타
박정희는 D데이 H아워에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의 동정을 살펴보기 전에
여기서 잠깐 숨을 돌리자.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부의 일부
영관급 장교들이 쿠데타를 계획하고 동지를
규합해서 쿠데타를 일으키려는 D데이에
이르기까지 장면 정권의 수사기관에서는
여기에 대한 정보를 전혀 입수하지 못하고
있었던가? 아니다. 그렇지는 않았다. 장면
정권하의 수사기관에서도 정보는 입수해
놓고 있었다. 그 내용은 국무총리
장면에게까지 보고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좋을 것 같다.
장도영이란 인물은 어떤 인물인가?
1960년 8월 민주당의 장면 정권이 출범할
때의 장도영의 계급은 육군 중장으로서
대구에 있는 제2군 사령관이었다.
그는 평안북도 신의주(新義州)
출신으로서 관서(關西)의 명문인 신의주
동중학교를 거쳐 일본 도쿄(東京)에 있는
도요(東洋)대학 영문학부에 진학했다. 당시
도요대학은 삼류급에 속하는 대학이었다.
그는 대학 2학년 때에 학병으로
끌려나갔다. 다행히 종전이 될 때까지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해방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모교에서 영어교사로 봉직했다. 이때
신의주 학생사건이 터졌다. 1945년 11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지주계급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에게도 자연
혐의가 씌워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지체없이 38선 이남으로 월남을
해버렸다. 그러나 서울에 생활 근거가 없는
그로서는 호구지책을 마련할 길조차
막연했다. 그래서 그는 그와 같은 처지의
북한 출신 청년들이 그러했듯이 그도
군대에 들어감으로써 호구지책을 세울
결심을 했다.
그가 월남해 왔을 그 무렵 때마침 미
군정에서는 군정법령 제28호로
국방사령부를 설치한 다음
군사영어학교(軍事英語學校)를 개설,
학새을 모집하고 있었다. 기초적인
군사영어를 해독하는 미군 지휘관의
목적이었다.
정원은 모두 60명으로 일본군 출신 20명,
만주군 출신 20명, 광복군 출신
20명이었다. 이렇게 군사경험이 있는 자들
가운데서 60명을 선발, 1945년 1월 14일,
국군의 모체인 남조선 국방경비대가
창설되자 미 군정은 당초의 목적과는 달리
군사영어학교 출신자들을 그들의 예전의
군사 경력을 참작해서 육군 소위에서
대령까지의 계급을 주어 임관시켰다.
장도영은 11946년 1월 15일부로 육군
소위에 임관되었다. 이때는 경비대 창설
초기라 장도영은 마치 우후죽순처럼 계급이
뻗어올라가 한국전쟁을 치르고 4.19를 거쳐
민주당의 장면 정권이 들어설 무렵에는
벌써 별이 세 개나 되는 육군 중장에까지
한데, 장도영이 별을 단 직후부터 어느
사이엔가 그에게는 <정치 장군>이란 별명이
붙었다. 그에게 그런 별명이 붙여진
까닭인즉, 자유당 정권의 제2인자인 이른바
서대문 경무대(景武臺)라 불리던 국회의장
이기붕의 집에 이들 부부가 무시로
출입하며 이기붕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모셨기 때문이었다.
하긴 그가 권력에 아첨하기 위해서
이기붕의 집을 드나들었던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장인인
백기호(白基昊)는 이기붕과는 일제 때부터
절친한 친구 사이, 그래서 이기붕 또한
백기호의 딸이자 장도영의 아내를 친
조카딸처럼 대하고 있어 서대문 경무대를
드나들게 되었던 것이다.
인간들만이 살고 있지는 않다.
"장도영이 그 작자 권력에나 아첨을 하고
있고, 그래 가지고서야 국군의 체면이 뭐가
돼?"
이래서 정치 장군이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던 것이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은 권좌에서
밀려났고 그와 함께 자유당 정권은
망해버렸다. 난처해진 것은 정치
장군이라는 별명이 붙은 장도영이었다.
세상에서는 그가 육군 중장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이기붕이가 뒤에서
봐주었기 때문이라고 쑥덕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어쩔 수 없이 옷을 벗을 수밖에
없겠지?)
자신의 처지를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더구나 젊은 영관급 장교들이 정군(整軍)을
주장하고 나서기까지 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정치 장군으로 낙인찍혀 있는 그를
그냥 내버려둘 리가 없었다.
(몰골 사납게 젊은 장교들한테
쫓겨나기보다는 스스로 내 발로
걸어나가자.)
장도영은 끝내 결심을 굳히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심을 굳히고 나자 민주당의 장면
정권이 출범한 지 1개월 가까이 된 1960년
9월 17일, 육군 참모총장인
최경록(崔景祿)에게 예편원을 제출했다.
막상 예편원을 제출하고 나니 아쉬움만이
남았다. 이때 그의 보직은 제2군
사령관으로서 운이 좋으면 곧바로 육군
했다.
(끝내 육군 참모총장 한번 해보지 못하고
군을 떠나고 말아야 하나?)
그의 꿈은 육군의 총수인 참모총장까지
승진하는 일이었다. 하기야 별을 단
장군치고 육군 참모총장이 되는 것이 꿈이
아닌 장군은 없다. 그러나 그 꿈을 이루는
자는 손으로 꼽을 정도도 얼마 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육군 참모총장 의자
근처에 접근도 해보지 못하고 군을 떠나야
하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장도영이 서울로 올라와 육군 참모총장
최경록에게 예편신청을 내고 대구로
내려왔는데, 10여 일 뒤 최경록으로부터
장거리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 장 장군, 당신의 예편신청서는
"반려되었다구요?"
장도영은 속으로 후유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반문했다. 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소, 그러니 장 장군, 당분간 예편을
잊고 현직에 더욱 더 충실해 주시면
고맙겠소."
최경록은 당부까지 하는 것이었다.
장군이, 그것도 별을 두 개나 셋을 단
장군이 예편원을 내면 군말없이 즉각
받아들여지고 있을 때였다. 이종찬,
백선엽(白善燁), 유재흥(劉載興) 등 6.25
한국전쟁의 영웅들이 4.19 이후의
사회분위기에 밀려 예편해야 했던 대표적인
케이스였다. 장군다운 장군들도 군말없이
예편이 받아들여지고 있을 때 정치
해서 예편원이 반려되었던 것인가?
그것은 전적으로 그의 아내의 눈부신
활약 덕분이었다. 미국 유학 출신인 그의
아내는 영어가 능통했다. 그로 인해서
한.미 고급 장성들이 부부동반으로 파티를
가질 때는 장도영의 아내는 단연 으뜸가는
스타였다. 그랬기 때문에 한국군 장성들
가운데서는 장도영만큼 미 8군 장성들과
친숙한 장군도 없었다.
아내가 발 벗고 나서 주었다.
"젊은 장교들이 부패 장군, 정치 장군
나가라는 소리가 드높지만 저의 남편만큼
오로지 군의 발전을 위해서 수고한 장군도
그리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저의
남편은 후배들한테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면서 에편원을 냈습니다. 지금 한창
말입니다. 장군 하나 만드는 데 얼마나
많은 돈이 먹힙니까? 그렇게 엄청난 돈을
들여 만들어진 장군인데 이제 젊은
장교들의 성토 소리가 높다해서 군을
떠나야 하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옳은 말이었다. 장군 하나 만드는 데는
엄청난 돈이 든다. 더구나 장도영은 아직도
정력적으로 일할 나이인 38살이다.
한국군의 인사문제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미 8군의 수뇌들은 장면 정권에
장도영 장군을 예편시켜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압력을 넣었다.
대학 시절 영문학을 전공했던 장도영
또한 영어가 능통했다. 한국 장성들
가운데에는 장도영만큼 영어에 능통했던
장군도 없었다. 그 영어 하나 잘하고 있던
<유능한 한국군 장성>으로 인정을 받고
있기까지 했었다.
이렇게 장도영은 아내의 이면공작과 그의
유창한 영어 덕분에 군에서 밀려나는
치욕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일
장도영이 낸 예편원이 수리되었더라면
박정희의 운명 또한 삼백육십도로 뒤바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기이한 것이 인간의 운명이었다.
장도영에 관한 얘기를 늘어놓다 보니
아무래도 장도영과 박정희의 인간관계 또한
미리 밝혀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래야만 앞으로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해서
믿어지기 때문이다.
장면의 민주당 정권이 막 출범했을 그
무렵, 육군본부에서는 박정희의 예편문제가
거론되었다.
"제너럴 박을 예편시키십시오. 사상이
불투명한 사람을 군에 오래 놔두는 것이
아닙니다."
박정희를 예편시키라고 강력히 요구하고
나선 것은 정군 운동을 일으키고 있던
한국군의 영관급 장교들이 아니라 바로 미
8군 수뇌부였다. 미 8군 수뇌부가 한국군의
장성 인사문제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기는
했으나 누구를 꼭 집어서 에편시켜라 말라
하고 압력을 가한 일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한해서는 박정희를 예편시키라고
대놓고 요구하고 나섰던 것이다.
이유로서 <사상적으로 불투명>을
운운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구실이었고 진실된 이유는
박정희를 인간적으로 싫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그들은 박정희를 싫어하고 있었던
것이었을까? 그것은 박정희가 다른 한국군
장성들처럼 미 8군의 장성들하고 골프를
친다든가 또 파티를 연가든가 하면서
의식적으로 접근하지도 않았고, 또 미군
고문의 참견에 고분고분하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인간사회란 동서를 막론하고 자주
어울림으로써 정도 생기고 유대도 강화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박정희의 경우 영어가
서툴다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는
때문에 박정희는 미 8군 장성들하고
어울리는 것을 극도로 기피하고 있었다.
그는 어째서 생리적이라 할 만큼 미국
사람을 싫어하고 있었던 것이었을까?
장군이 되고 나서도 <미국놈, 미국놈> 하고
원색적인 욕설을 퍼붓기를 주저하지 않는
그였다. 어째서 그랬을까?
미 8군 수뇌들이 박정희의 예편을
요구하고 나섰을 때의 그의 보직은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作戰參謀副葬)이었다. 요직
중의 요직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누구보다도 미군 장성들하고 우의를 돈독히
해두고 있어야 할 자리라 할 수 있었다.
그래야만 일단 유사시에는 한.미
합동작전을 원만히 수행할 수 있기
박정희가 미국인을 생리적으로 싫어하는
것을 미 8군 수뇌들도 피부로 느끼고
있었으리라는 것은 십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그들은 사상적 불투명을
운운하며 박정희의 예편을 요구하고 나섰던
것이다.
당황해진 박정희는 미군 장성들하고
누구보다도 친한 장도영에게 <살려 달라>고
SOS를 쳤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지금 당장 박정희를 살려줄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장도영 말고는 누구도
없었던 것이다.
박정희로부터 구원의 탄원이 있자,
장도영은 주저치 않고 구원의 손길을
뻗쳤다.
"최 장군, 박 장군을 제2군 부사령관으로
장도영은 육군 참모총장 최경록에게
부탁을 했다.
물론 최경록은 장도영의 부탁을 물리치지
않았다. 그는 박정희의 예편을 강력히
요구하는 미군 장성의 압력을 뿌리치고
그를 제2군 부사령관으로 내려보내 주었던
것이다.
이로써 박정희는 세번째로 장도영의
은혜를 입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박정희는 언제, 어느 때 장도영의
은혜를 입었던 것인가? 첫번째 박정희가
장도영의 은혜를 입은 것은 그가 군복을
벗고 보수 없는 문관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였다.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박정희가 공산주의자들의
사실이 탄로난 것은 1949년의 여순반란사건
직후 벌어졌던 숙군작업 때였다. 이때
무기징역을 받고 복역중에 있던 그를 밝은
세상으로 끄집어 내준 것이 만주군관학교
출신 동료들이었던 정일권(丁一權),
백선엽, 김안일(金安一) 등이었다.
박정희는 옛 동료들의 덕분에 밝은
세상으로 풀려 나오기는 했으나 그로서는
당장에 할 일이 없었다. 공산주의자로
낙인이 찍혀 군에서 불명예 제대한 그를
써주는 일터도 없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당장에 호구지책도 막연할 수밖에 없었다.
"국장님, 어떻게 제가 좀 일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십시오. 부탁합니다."
박정희는 육군본부 정보국장인 육군 대령
장도영에게 매달렸다.
매정하게 뿌리치지를 못했다. 그래서 그는
직제에도 없는 정보국 문관으로 채용해
주었다. 직제에 없으니 보수가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월급 때만 되면 장도영이
정보비에서 얼마를 쪼개고 또 정보과장
육군 소령 유양수(柳陽洙)로 하여금
과원들의 월급에서 얼마씩을 떼내어
그것으로 박정희의 호구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돌봐주었던 것이다.
장도영이 박정희에게 그런 인정을 베풀지
않았던들 어쩌면 그도 문관 자리마저
얻지를 못하고 다른 직업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도 모른다. 가장 궁한 처지에
빠져 있을 때에 그는 장도영의 은혜로
끼니를 때웠고, 계속 군에 몸을 담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만족해 있지 않으면 안 되었을 때 김일성
집단의 남침으로 6.25 한국전쟁이 터졌다.
박정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붙잡으려
애썼다. 군의 대.소 부대를 지휘하는
장교가 턱없이 부족할 때라 현역으로
복직하기에는 절호의 찬스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복직하는 데에는 장애가
없지도 않았다. 군 인사법에는 전과로
파면된 자는 2년이 경과되지 않으면 장교로
복직될 수 없다고 못박아 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과도 전과 나름이다.
박정희는 사상문제로 해서 파면된 자,
아무리 그가 전향을 했다 해도 현역으로
복직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살려 주시오!"
장도영에게 또다시 매달렸다. 장도영이
정에 무르다는 것은 익히 꿰뚫어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도영은 박정희가 가엾기도 하고 해서
백방으로 뛰었다. 당시 육군의 복직
심사위원장은 황헌친(黃憲親)이었다.
장도영은 황헌친에게 매달리기도 했고,
강문봉(姜文奉), 이기건(李奇建) 등을
설득해서 공동으로 육군 총참모장인
정일권(鄭一權)을 움직이기로 했다. 그
결과, 박정희를 파면 때의 계급인 육군
소령으로 복직시켜 줄 수가 있었다.
"이 은혜 죽을 때까지 잊지 않겠습니다."
박정희는 눈물로써 장도영의 인정에
감사를 표했다. 장도영이 백방으로 뛰지
않았던들 복직이라니, 그것도 파면 때의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박정희는
장도영의 그 고마움에 어찌
결초보은(結草報恩)을 다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두 번씩이나 은혜를 베풀어
주었던 장도영이 10년 뒤, 다시 또 예편될
수밖에 없었던 박정희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쳐 제2군 부사령관으로 끌어줌으로써
세번째로 은혜를 베풀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박정희가 육군 소장에
진급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장도영의
무른 인정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장도영의 인정 덕분에 예편을 면한
대구로 내려온 지 얼마 뒤의 일이다.
"박정희를 엄중 감시하고 그의 동태에
대해서 1주일에 한 번씩 보고하라."
방첩부대장 육군 준장
박창록(朴昌錄)으로부터 이런 지령이 제2군
방첩대장 이희영한테 떨어졌다.
(무엇 때문에 박정희 장군을 감시하라는
거야. 그분이 뭘 어쨌다고?)
이희영은 부대장의 지령이 떨어지자 불끈
반발심이 일었다. 그렇다고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아마도 6.25 이전의 사상문제에 석연치
않은 점이 있는가 하고 생각한 그는 대원
중에서 몇 사람을 선발해 특별히 감시조를
편성해서 박정희를 감시토록 했다.
이희영한테는 꽤나 괴로운 임무였다. 그럴
사람의 관계는 좀 남달랐기 때문이었다.
이희영이 5기생으로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한 것은 1947년 1월 1일, 이때
박정희는 육군 대위로서 생도대의
제1중대장이었다. 그러나 이때는 두 사람
사이에 남다르다 할 만큼의 인간적 유대가
이루어져 있지는 않았다. 이때 박정희는
이미 남로당의 육군사관학교 군사책으로서
비밀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38선 이북
평양에서 공산주의가 싫어 월남해 온
이희영을 증오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듯 소원하기만 한 사이였던 두
사람이 인간적으로 급격히 가까워지게
되었던 것은 1954년 박정희가 제2군단의
포병사령관으로 부임해 오고 나서였다.
이때 이희영은 제2군단의 병기참모였다.
출신이었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한 일이 있지만
1951년 이른바 <5.26 정치파동> 이래
오매불망으로 쿠데타에 대해서 꿈꾸고 있던
박정희였다. 그런 그였기 때문에 쿠데타
동지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두 사람한테
의식적으로 접근하려 했음직한 일이었다.
박정희는 의식적으로 이희영, 이회영 두
사람한테 접근을 했다. 인간 생활에 있어
계급이 낮은 사람이 계급이 높은 사람한테
의식적으로 접근하려 드는 법이지만 이
경우에는 사정이 거꾸로 되어 있었다.
"어떻소? 좋은 막걸리가 있는데 같이
한잔 하지 않겠소?"
"보신탕 잘하는 집을 발견했소. 우리
오늘 저녁에 보신탕이나 같이 합시다."
보신탕 집으로 초대했다.
평양 태생인 이희영과 신의주 태생인
이회영은 소주파였다. 그런 그들도 어느
사이엔가 막걸리를 즐기게 되었다.
막걸리파인 박정희와 어울리다 보니 두
사람도 이제는 술이라고 하면 청탁을
가리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오입쟁이가 계집을 가리지 않듯이
애주가라면 청탁을 가리지 않아야지.>
이것이 술에 대한 박정희의 지론이었다.
그러고 보니 술이라고 하면 박정희는
청탁을 가리지 않았었다.
사나이들이란 술자리에 자주 어울리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친숙해지기 마련이다.
이희영(물론 이회영도 마찬가지였지만)은
이렇게 2군단 시절 자주 박정희와 어울리다
남다른 친숙한 사이가 돼 있었던 것이다.
앞에서 필자는 박정희가 어쩌면 두
사람한테 의식적으로 접근하려 했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1952년 이래 박정희는 앞의
두 사람한테만 의식적으로 접근하려 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새로운 자리로
옮겨갈 때마다 똑똑하다고 느껴지는
장교들이면 어떻게 해서든 자기 품안으로
끌어들이고자 노력을 해왔었다.
자리를 옮기고 나더라도 이미 유대를
맺어 놓은 장교한테는 가끔 안부편지도
하고, 또 생일 같은 날에는 생일 축하
서신을 띄워 당사자를 감격하게 해 주기도
했었다.
과묵하기만 한 그의 성품으로 볼 때 어느
구석에 이런 자상한 정이 있었을까 하는
있어서는 그의 그러한 모든 행동은 미래에
대비해 두고자 하는 원대한 포부에서
비롯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희영은 인간적 의리상 도저히 마음이
내키지 않는 일이었으나 상급자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는 일, 그래서 박정희
감시반을 편성해서 그를 엄중 감시케
해놓고 있었으나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두 달, 석 달이 흘러도 도무지
글에게서는 이렇다할 이상한 낌새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희영은 그렇게 생각했다.
한데, 61년 1월 중순쯤의 일이다.
"이 대령, 부사령관 관사로 좀 와
주시오."
그의 부름을 받은 이희영은 적잖게
의아해 했다. 부사령과으로 부임해 온 이래
그는 한번도 관사로 초청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관사를 방문했을 때
박정희는 자리에 누워 있었다. 축농증을
수술했다는 것이었다.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끝에 박정희는
포단 밑에서 한 장의 편지봉투를 꺼내
이희영 앞에 내놓는 것이었다.
"이 대령, 알맹이를 좀 꺼내 보시오."
이희영은 그가 하라는 대로 했다.
알맹이를 꺼냈다. 그것은 접은 편지와 한
장의 사진이었다. 이희영은 그 사진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군고구마 장수를 찍은
사진이었다.
"이게 누구의 사진입니까?"
이희영은 접혀 있는 편지를 펼쳤다.
첫 줄에 <사랑하는 근혜 아빠에게>라고
쓰여 있었다. 박정희의 아내 육영수가
남편에게 보낸 편지였다.
"사모님의 편지 같은데 읽어 봐도
되겠습니까?"
"괜찮아, 읽어 봐!!"
박정희의 목소리가 좀 거칠었다.
평소에는 경어를 쓰던 그가 이때만은
그렇지 않았다.
이희영은 육영수의 편지를 읽어 보았다.
그 편지를 읽고 나서야 그는 동봉해 있는
사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 수가
있었다. 사진의 주인공은 서울 506방첩대
요원이었다. 박정희를 감시하라는 상부
지시를 받은 이 요원은 군고구마 장수로
있었던 것이다. 감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육영수가 감시자 모르게 사진을
찍어서 박정희에게 보냈던 것이닫.
이희영은 다시 한번 그 사진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드럼통에다 불을 지펴
고구마를 굽고 있는 장사치의 배경에 나와
있는 집의 모양이 낯이 익었다. 바로
박정희의 신당동 집이었던 것이다.
사진을 살펴보던 이희영은 고개를 쳐들고
누워 있는 박정희에게 시선을 던졌다. 쏘는
듯한 박정희의 두 눈총이 이희영의 시야로
파고들어 왔다. 박정희의 눈빛은 증오에
이글거리며 타고 있었다.
"이 대령, 방첩대에선 나를 빨갱이라고
해서 감시를 시켜 놓고 있는 모양인데
그래, 내가 빨갱이라면 어떻게 육군
박정희는 또다시 경어를 쓰고 있었다.
"안 그렇소, 이 대령?"
"예, 옳으신 말씀입니다. 각하!"
이희영은 맞장구를 쳐줄 수밖에 없었다.
"과거에 내가 어떤 길을 걸었건 간에
지금은 어엿한 대한민국 육군의 장성이오.
그런 장성을 사상적으로 의심을 하고
감시를 시켜놓고 있다니 이게 도무지 말이
되는 소리오?"
그의 항변에 이희영은 마치 자기가
감시시켜 놓고 있기나 한 듯이 송구스러운
마음이 일었다. 하기야 그런 송구스러운
마음이 일게 된 것은 그의 말이 옳다고
느껴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박정희의 과거가 지금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사상이란 경우에 따라 청산할 수도
아닌가. 과거 일을 문제삼아 가지고 육군의
장성을 감시케 하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매카시즘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희영은 박정희에게 동정심이 일기도
했다. 그가 더없이 측은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 대령, 이 대령이 수고 좀 해주시오."
"어떻게 말입니까?"
"방첩대에서 이런 짓 좀 안하게 해달란
말이오."
"알겠습니다."
다음날 아침 이희영은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박정희와의 인간적인
정리(情理)를 생각해서 감시문제를 해결해
주고자 해서였다.
서울역에 내리자 그는 먼저 소공동
이때 506방첩대장은 육군 대령
이행주(李幸柱)였다.
"박 장군 댁을 감시시켜 놓고 있는
이유가 뭐요?"
이행주는 명확한 대답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상부의 지시에 따르고 있을
뿐이라고만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효자동에 있는 본부로 방첩부대장 박창록을
찾아갔다. 이희영은 박창록을 대하자,
박정희를 감시시켜 놓고 있는 처사는
부당하다 역설하고 항의조로 이렇게
말했다.
"꼭 필요해서 감시를 시켜야겠다면
본인이나 가족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방법도 있잖습니까? 방법은
얼마든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게 뭡니까.
사진으로 찍히고. 이거야말로 미라잡이가
미라가 된 것하고 뭐가 다르단
말씀입니까?"
그러면서 이희영은 가지고 올라온 사진을
내보였다. 그 사진을 들여다본 박창록도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입이 쓴
모양이었다.
"우리가 박 장군을 감시하고 싶어서
감시하고 있겠소. 위에서 시키니까 할 수
없이 감시하고 있는 것이지."
방첩부대장 박창록의 윗사람이라면 정보
참모부장, 참모차장, 참모총장 세
사람이다. 참모차장은 육군 중장
김형일(金炯一)이었고, 참모차장은 유군
중장 최경록이었다. 이 두 사람 가운데
누군가 한 사람이 박정희를 감시하도록
"감시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든 군고구마
장수는 철수시키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정 마음이 놓여지지 않는 인물이라고
느껴지거든 차라리 옷을 벗겨버리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이희영은 그렇게 항의를 하고 대구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로 박정희를
찾아갔다. 그리고는 이행주, 박창록 등과
주고받은 말을 가식 없이 털어놨다. <정
위험한 인물이라 느껴지거든 차라리 옷을
벗기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하고
의견까지 제시했다는 말도 빠뜨리지 않고
털어놓았다.
그랬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박정희의 입에서 뜻밖의 대꾸가
흘러나왔다.
소리, 아마 저희들이 나보다도 먼저 옷을
벗게 될걸!"
이게 무엇을 뜻하는 대꾸였을까?
이희영은 그 당시에는 그 의미를 헤아리지
못했다.
"이 대령, 나하고 영천에나 다녀옵시다."
박정희가 전화로 이런 제안을 한 것은
군고구마 장수 사건이 있은 한참 뒤인
1961년 1월 하순이었다.
(갑자기 영천엔 왜 또 가자는 거야?)
이희영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렇다고 부사령관의 권유를 뿌리칠 수도
없었다.
그는 혀를 차면서도 동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영천행은 부사령관 전용 차를
이용하기로 했다. 이희영은 박정희와
동승해 영천으로 떠났다. 그런데 박정희는
영천으로 가는 도중 줄곧 정치적인
얘기로만 화제를 삼았다. 정치인치고
부패하지 않은 놈이 없고, 경에는 마음이
없고 잿밥에만 마음을 쓰는 놈들이
국회의원들이라느니, 또 장면처럼 무능한
국무총리도 없을 것이라며, 그런 무능한
자가 어떻게 내각책임제하의 국무총리가
됐는지 모르겠다는 등, 방첩대장으로서는
듣기 거북스러운 말만 늘어놓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의 말을 중단시킬 수도 없었다.
지껄이는 대로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연방 줄담배를 피우며 정치현실을
덧붙이는 것이었다.
"우리도 버마식 쿠데타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나라를 구할 수가 있는 거예요.
아시겠소, 이 대령? 우리도 버마식
쿠데타를 해야 한단 말입니다."
쿠데타 운운하는 말을 듣는 순간
이희영은 가슴이 섬찝해지면서 후들후들
떨리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직책상으로 말한다면 쿠데타 운운하는 말을
들은 이상, 어떤 조치를 취해야 마땅한
일이었다. 고발을 한다든가, 아니면
하다못해 <그런 말은 하시지 않는 것이
신상에 좋습니다> 하고 경고를 한다든가.
그러나 이희영은 감히 부사령관이 하는
말을 가로막지도 못했고 제지하지도
못했다. 도리어 생소하기만 한 버마식
물어보기까지 했다.
"그게 어떤 식의 쿠데타입니까?"
박정희는 이희영의 반문에 대해서
간명하게 설명해 주었다.
"버마식 쿠데타란, 군부가 거사를 해서
정권을 잡은 다음, 일정 기간 통치하다가
민간 정부에게 정권을 넘겨주는 방식을
말합니다. 그런데 일단 민간 정부에 정권을
넘겨주기는 하되 민간 정부의 정치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에는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서 군부가 정권을 잡는 겁니다."
쿠데타 치고는 참 별난 놈의 쿠데타도 다
있다고 이희영은 생각했다.
버마식 쿠데타?
도대체 버마식 쿠데타란 어떤 쿠데타를
말하는가?
위해 버마식 쿠데타가 어떤 종류의
쿠데타인지 한번 더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북한의 김일성(金日成) 집단에 의해
야기된 <아웅산 폭발 사건>으로 겨우 그
베일이 벗겨졌던 버마라는 나라의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네윈이란 인물이 무혈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했던 것은 1958년 9월
26일이었다.
당시 버마는 전쟁과 소수민족 소요로
여간 시달림을 당하고 있지 않았다. 참다
못한 수상 우누는, "참모총장, 귀하가
새로이 조각(組閣)을 해서 이 난국을
수습해 주면 고맙겠소" 하고 정권을 그에게
떠맡겼다.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온다더니
행운이었다. 그는 우누의 요청을 받아들여
심복들로 조각을 한 다음 군정을 폈다.
형식으로 따질 때는 평화적인
정권이양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그것은
묵계된 쿠데타였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네윈이라는 인물을 재평가해 볼
필요성이 있다. 네윈이란 인물은 1년 6개월
동안 군정을 편 뒤, 국민과 약속한 대로
1960년 2월에 총선거를 실시, 그에게
정권을 떠맡겼던 우누에게 정권을 이양해
주고 군에 복귀했던 것이다.
한번 정권을 잡으면 권력에 도취한
나머지 절대로 잡은 권력을 놓지 않으려
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인데 네윈은
미련없이 우누에게 정권을 되돌려 주었던
것이다. 남의 나라의 인물이지만 네윈이란
않을 수가 없다.
박정희는 그런 네윈을 본딴 쿠데타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글쎄, 박정희란
인물이 과연 네윈을 흉내낼 수 있을까?
우선 두 사람을 비교해 보자.
네윈은 수도 랭군에 있는 의과대학을
중퇴했다. 독립군에 뛰어들기 위해서였다.
그것이 1940년 10월의 일이다. 그러니까,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기 2개월 전에 그는
의사가 되어 인술을 펴려던 꿈을
던져버리고 독립군에 뛰어들었다. 그의
군대생활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독립군에 뛰어든 네윈의 활약이 어찌나
눈부셨던지 오늘에 이르기까지 <독립의
아버지>로 불리우고 있는 사령관 아웅산은
네윈이란 태양처럼 빛난다는 뜻이다.
네윈의 본명은 슈마웅이었던 것이다.
아웅산이 네윈이란 이름을 지어 주었던
것과 군사 정부를 청산하고 민정으로
이양할 때 깨끗이 우누에게 정권을
돌려주었던 것을 결부시켜 생각해 보면
네윈이란 인물의 인품이 어떠했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줄로 안다.
그런데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문경 땅에서 국민학교 선생으로
봉직하다가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군관학교를 나왔고, 또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거쳤다. 여기까지는 좋다.
그런데, 그는 결코 독립군으로 달아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달아나려면 얼마든지 가능한 지역에 주둔해
천황에게 충성을 다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랬던 그가 지금 육군 대령 이래의
꿈을 실현시키고자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고
버마식, 곧 네윈식 쿠데타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그래, 쿠데타를 해서 모든 질서를
바로잡고 나면 누구한테 정권을 이양해 줄
생각이란 말인가? 과연 박정희가 점치고
있는 한국의 우누는 누구란 말인가?
그와 함께 이희영의 머리에는 문득 얼마
전 박정희가 씹어뱉듯이 내뱉았던 말이
그의 뇌리에 되살아났다. <흥! 저희들이 내
옷을 벗겨? 어림없는 소리, 아마 저희들이
나보다 먼저 옷을 벗게 될걸.>
그때의 그 말과 지금 차 안에서 버마식
쿠데타 운운하는 말을 연결시켜 보고 난
하는 확신이 들어 다시 한번 가슴이
섬찝해지는 것이었다.
이런 확신이 선 때문인지 7년 전 2군단
시절의 박정희의 언동도 다시 되새겨졌다.
7년 전 2군단 시절은 54년이다.
이 해에도 정치적 사건은 무척이나 많이
벌어졌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사건이 <초대 대통령 중임제 철폐를 위한
개헌 사건>이요, 이 개헌안이 부결됨으로써
벌어졌던 사건이 소위 <사사오입(四捨五入)
사건>이었다.
크고 작은 정치적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박정희는 정치인들을 향해 원색적인 욕설을
퍼부었다. 그리고는 꼭 이렇게 덧붙이는
것이었다.
"이놈의 정권 확 뒤엎어 버려야 해,
그때의 그의 언사까지를 되새겨보자,
이희영은 박정희가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는 확신이 더욱 굳어졌다.
이렇게 확신이 굳어지자 마음에 갈등이
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의 신분이
방첩대장이었기 때문이었다.
방첩대가 하는 일이 무엇이었던가? 적의
유형, 무형의 침투를 막고 군령을
어지럽히거나 통수권에 도전하려 들거나
하는 발칙한 불순분자의 도량(跳梁)을 막는
것이 주어진 임무였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말이다. 박정희가
쿠데타 같은 짓을 하지 못하도록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 아닌가?)
이희영의 마음에서 갈등이 일게 된 것은
직책에 충실해야 한다고 다짐을 하면서도
못하고 있는 데서였다.
영천에서 돌아온 뒤로 이희영은 몇 날
며칠을 두고 이 갈등 때문에 번민했었다.
(내가 방첩대장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면 또 몰라! 내 직책이 뭔지 뻔히 알고
있으면서 내 앞에서 쿠데타 운운한 것은
무슨 속셈에서야? 내 반응이 어떤지 그걸
떠보자 그 수작이었는가?)
어쩌면 속셈을 떠보자는 수작이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번민을 하다보니
방첩부대장이 <엄중감시>를 지시한 것도
까닭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문제군 문제야. 공(公)은 공, 사(私)는
사라고는 하지만.)
없었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다는 확신은 들었지만 증거는 없었다.
그가 <쿠데타를 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는
했지만, 그까짓 말로 한 것이야 녹음을
해둔 것도 아니고 부인해 버리면
그만이었다.
(내가 언제까지 햄릿 같은 고민을 하고
있어야 하지?)
스스로를 채찍질해 보았지만 끝내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에
제2군 사령관이었던 장도영은 육군
참모총장으로 영전돼 대구를 떠났고, 얼마
후 이희영도 장도영이 서울
506방첩대장으로 끌어올리는 바람에
박정희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는 결과가
되고 말았었다.
"안녕하십니까? 총장 각하!"
"아니, 이거 박 장군 아니시오?"
육군 참모총장실로 들어선 박정희가
부동자세를 취하고 거수경례를 붙이는 것을
보자 장도영은 환하게 웃으며 그를
맞아들였다.
"언제 올라오셨소?"
"어제 올라왔습니다. 곧 내려가야
합니다. 내려가기 전에 총장 각하를 뵙고
가려고 찾아왔습니다."
"찾아줘서 고맙소, 자 앉읍시다."
두 사람은 쇼파에 자리잡고 마주 앉았다.
장도영이 먼저 박정희에게 담배를
권했다. 라이터를 켜서 불도 붙여 주었다.
"예. 별일 없습니다."
"부인도 안녕하시고요?"
"예."
의례적인 인사가 끝난 후, 박정희는
뻐끔뻐끔 서너 모금이나 담배를 빨았을까?
이윽고 그는 정색을 하고 말문을 여는
것이었다. 그 표정이 꽤나 굳어져 있었다.
"실은, 오늘 총장 각하를 찾아뵌 것은
긴히 말씀드려야 할 중요한 얘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얘기라니요?"
장도영도 덩달아 정색하며 반문했다.
"누가 또 박 장군을 모함이라도 했는가?"
그렇게 묻는 장도영의 얼굴에는 <당신
뒤에는 내가 있지 않느냐?> 하는 표정이
역력히 어려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군을 떠날 수밖에 없다 해서
예편원까지 냈던 그가 전화위복이 되어
꿈에 그리던 육군 참모총장직에까지 오른
처지였다. 불과 반 년 사이에 일어난
변화였다. 그 변화는 장도영을 자신만만한
인물로 만들어 주었다. 세상에 두려울 것이
무엇이겠는가. <박정희 장군 기운을 내요.>
그런 표정이 되어 있었다.
"총장 각하, 그런 개인적인 문제로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박정희는 단호하게 부정했다.
"그럼 나한테 하고자 하는 중요한
얘기라는 게 뭐요?"
장도영의 반문에 박정희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고 눈빛은 더욱 형형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판단하고 있습니다."
"뭐라구요?"
장도영의 표정이 금세 굳어졌다. 입가에
맴돌고 있던 미소도 사라졌다.
(다짜고짜 혁명이라니? 이거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워오고 있는 게 아냐?)
장도영은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박정희는 그러한
장도영의 감정의 변화를 읽으려는 듯 그를
뚫어지게 살피고 있다가 들고 들어온
가방에서 한 뭉치의 서류를 끄집어냈다.
"이것이 쿠데타 계획서입니다. 한번
훑어봐 주십시오."
박정히는 그 서류를 장도영의 앞으로
밀어놓았다. 그러나 장도영은 그 서류에는
눈도 주지 않았다. 박정희의 거동만을
"각하, 그것을 한번 검토해 봐
주십시오."
"박 장군,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요? 쿠데타라니?"
"왜 그러십니까? 각하, 갑자기?"
"갑자기라니?"
"각하께서도 대구에 계실 때는 혁명에
대해서는 긍정적이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사실이었다. 박정희를 제2군
부사령관으로 끌어준 뒤로 장도영은
박정희와 참모장 육군 소장 이주일(李周一)
셋이서 점심을 함께 하는 일이 허다했다.
"자꾸 어지러워지기만 하는 정국을
바로잡는 길은 쿠데타밖에 없습니다."
"옳은 말이오, 아무래도 쿠데타라도 하지
않고는 정국을 바로잡기는 힘들 것 같소!"
"각하, 그때는 혁명의 필요성에 대해서
동조하시더니 이제는 마음이
변하셨습니까?"
박정희는 아픈 곳을 찔렀다.
"그때는 그저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한 소리가 아니었소? 그것을 진담으로 믿고
쿠데타 운운하면 어쩌자는 거요?"
장도영은 예전의 얘기를 한낱
우국방담이었던 것으로 흘려 버리려 했다.
(이 양반이 육군 참모총장으로
영전되더니 마음이 변했구나.)
박정희는 장도영이 변심했다고 단정했다.
그렇다고 물러설 그가 아니었다.
"각하, 제 말씀을 잘 들어봐 주십시오."
박정희는 이렇게 운을 떼고 나서 <당신이
혁명의 필요성에 긍정적이었기 때문에 나는
간접적으로 비추고, 지난 몇 개월 동안
추진해 온 쿠데타 진척상황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을 했다.
그런 다음 이렇게 덧붙였다.
"각하, 우리 혁명동지들은 이에 각하를
혁명의 최고 영도자로 모시기로 합의를
해놓았습니다. 그러니."
거기까지 말했을 때 장도영이
가로막았다.
"참, 답답하군. 그게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소?"
박정희는 단호하게 대꾸했다.
"승산을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은 해야만 합니다. 지금 육군의
요소요소에는 우리 혁명동지들이
물샐틈없이 깔려 있습니다. 각하의 심복
동지가 수십 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장도영의 얼굴이 굳어지다 못해
창백해지기조차 했다.
"박 장군, 뭣 때문에 그런 위험한 짓을
하려는 거요?"
"위험한 짓이라니요? 총장 각하. 군인은
국가보위가 본분입니다. 지금 나라는
걷잡을 수 없이 어지럽습니다. 이대로
방치해 두었다간 언제 제2의 6.25가 터져
북한 괴뢰한테 먹힐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위기상황을 보고 있으면서도 위험하다는
이유만으로 방치해 두어 옳겠습니까?"
"내가 대구에 있을 때는 나라 안이 온통
시끄러워서 쿠데타라도 해야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을 수 있겠다 생각했던 것은
사실이오. 허나, 보시오. 지금 나라안
민주당 정권에서도 잘해 보려고 애쓰고
있고......."
이렇게 말하고 장도영은 박정희의 반응을
살폈다.
"나로서는 박 장군더러 계획을
중지하라는 말밖에 할 말이 없소. 생각해
보시오. 실패할 것도 뻔하고 실패하는
날에는 어찌된다는 것도 뻔한 일 아니오?"
애원하듯이 계획을 중단하라고 타일렀다.
그러나 박정희의 태도는 여전히
단호하기만 했다.
"실패하는 날에는 제가 모든 책임을 지고
사형장으로 가겠습니다. 절대로 각하께
폐를 끼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협력해
주십시오."
쿠데타가 실패하는 날에는 박정희 자신이
장도영한테는 절대로 폐를 끼치는 짓을
하지 않고. 이 얼마나 무서운 집념인가.
쿠데타가 실패하는 날에는 모든 책임을
지고 사형장으로 가겠다는 것은 죽음도
각오하고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장도영은
박정희의 얼굴을 새삼스럽게 뜯어보며 그의
마음 속을 헤아려 보려 애를 썼다.
(하긴, 일본군에서 교육을 받았고
법정에서 사형구형까지 한번 받았던 사람이
아닌가. 쿠데타를 할 결심을 했다면 죽을
결심도 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를 거쳐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인물이다. 일본군에선
사관학교든 졸병이든 먼저 군대에 들어오면
생사관을 확립하는 정신교육부터
<충군애국(忠君愛國). 천황폐하를 위해서
죽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떳떳하고
자랑스럽고 명예스러운 일인가!> 이런
정신교육을 반복해서 실시하기 때문에
일본군은 전장에서 적탄에 맞아 쓰러지게
되면 <천황폐하, 만세> 하고 소리높여
외치고 숨을 거두는 장졸들이
부지기수였다.
박정희도 그런 일본군의 정신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목숨 하나쯤 개같이 버릴 수
있는 생사관은 확립돼 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장도영은 박정희의 마음을 그렇게
읽었다.
그렇다고 쿠데타에 동조할 수는 없다고
장도영은 스스로를 타이르고 있었다.
(나로서는 이제 군인으로서는 최고의
쿠데타 같은 위험한 짓을 해야 한단
말인가?)
이런 생각이 들자 장도영은 자신의
태도를 분명하게 밝혀둬야겠다고 마음을
다졌다. 그래서 장도영은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협력할 수 없습니다."
그 말을 들은 박정희는 조금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관자놀이가 불근거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어금니를 질근질근 씹으며
활활 타는 눈빛으로 장도영을 쏘아보았다.
장도영도 너한테 꺾일 수는 없다는 듯이
박정희를 마주 쏘아봤다.
(여기서 약한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된다.)
장도영은 수없이 마음 속으로 뇌까렸다.
끝내, 박정희가 시선을 밑으로 내리깔고
말았다. 그리고 애원 어린 목소리로
"그렇다면 묵인이라도 해주십시오.
그것만으로도 협력 이상의 숨은 공로라고
생각합니다."
"글쎄요, 딱한 주문이오. 어쨌거나
나로서는 밀고 따위의 그런 비겁한 짓은
하지 않겠소. 그 점만은 안심하시오."
이게 도대체 무슨 수작인가? 밀고 따위의
비겁한 짓은 하지 않겠다니? 도대체 이게
육군의 총수인 참모총장으로서 할 수 있는
수작인가? 박정희가 <우리 혁명동지들은
이미 각하를 혁명의 최고 영도자로
모시기로 합의를 해놓았습니다>라고 한
말에 감격한 나머지 밀고 따위의 비겁한
짓은 하지 않겠다고 지껄였던 것일까?
장도영이 밀고 따위의 비겁한 짓은 하지
않겠다고 하는 말을 듣고 박정희는 그 말에
"잘 알겠습니다, 각하."
그러면서 자리에서 일어서며 이렇게
덧붙이는 것이었다.
"그럼, 우리들의 지도자가 돼 주시겠다고
약속한 걸로 이해를 하고 돌아가겠습니다."
이것이 1961년 4월 10일의 일이었다.
5.16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기 36일 전의
일이었다.
이상은 박정희의 진술을 토대로 구성한
것이다.
그는 누구에게 4월 10일 이날에 있었던
일을 진술했던가? 바로 <장도영 일파
반혁명 사건>을 다루고 있는 검찰관에게
진술했던 것이다. 소위 <장도영 일파
반혁명 사건>이 벌어진 것은 1961년 7월
3일이다. 쿠데타를 일으킨 지 한 달 반
대해서는 뒤에 구체적으로 소개하겠지만 이
사건이 벌어지자 장도영은 물론이고 그의
추종자 모두가 구속되게 되었다. 이때 이
사건을 다루었던 혁명 검찰부의 검찰관
배명인(裵命仁)은 의장공관으로 찾아가
박정희로부터 장도영과 관련된 모든 증언을
들었던 것이다.
형사 사건의 증인신문을 집으로 찾아가
듣는다는 것도 웃기는 얘기지만 하여간에
박정희는 4월 10일의 일에 대해서 검찰관
배명인에게 다음과 같이 진술했던 것이다.
"4월 10일경이라 생각되는데, 그때는
계획이 상당히 진전된 때인데 우리가
논의하여 기록해 놓은 혁명위원회의 구성,
정부기구의 개편, 임시헌법 등을 적은
서류를 장 장군에게 보이며 4.19가 무사히
등의 이야기를 한 끝에 그 서류를 장
장군에게 교부하고 돌아왔다. 최초에
우리가 계획한 정보가 누설되어 거사를
중지하고 최종적으로 거사일자가 결정된
것이 5월 16일이며 따라서 장 장군이
군사혁명이 있으리라는 것을 전연 알지
못하였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말이다."
그러한데 장도영은 4월 10일경에
박정희가 참모총장실로 찾아왔던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전적으로 부인하고
있다. 그의 진술에 따르면 4월 10일경이
아니라, 4.19 일주년을 한 4,5일 앞둔
일요일 아침에 참모총장 공관으로
찾아왔다는 것이다. 이때 장도영은
정복으로 단장을 하고 육군본부 교회로
나가려고 막 현관으로 내려서려고 하는데
"각하, 2군 상황과 4.10 일주년 기념일에
대비할 계획에 대해 보고할 일이 있어서
잠깐 들렀습니다. 잠깐 시간을
내주십시오."
박정희의 간청이었다.
"보다시피 지금 예배당으로 가려고 나선
길인데 시간이 다 됐다."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습니다. 속히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박정희의 재간청에 못 이겨 할 수 없이
현관에서 응접실로 돌아와 둘이
마주앉았다고 한다.
당시 육군은 이미 3월에 서울지구
주둔부대와 일선 제5사단의 출동을 포함한
서울지구 폭동진압과 질서유지를 위한
<비둘기 작전> 계획의 지휘부 연습을
계엄이 선포되면 계엄업무를 모범적으로
철저히 수행할 준비를 다 갖추고 있었다.
응접실에서 둘이 마주 앉았다.
"4.19에는 꼭 무엇이 일어날 것입니다.
지금 2군 사령관도 부재중이고 해서 제가
대략 계엄시행 계획을 작성하여
보았습니다."
박정희가 접은 원고지 몇 장을
내놓더란다.
당시 제2군 사령관은 최경록, 그는 이때
도미시찰 여행중에 있었다. 사령관
부재중에는 부사령관이 대행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장도영은
당연히 그가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잘했소, 시간이 있을 때 읽어 보지요."
박정희가 내놓은 원고를 부관에게 주어
박정희가 내놓은 원고의 표지에는
<서울지구 계엄실시 계획안>이라는 표제가
붙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날 저녁 장도영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서울지구 계엄실시 계획안을 훑어보았다고
한다. 이 계획안에 따르면, <계엄이
선포되면 그 해당지역에 군정을 실시하게
되는 것이며, 전국 혹은 수도 서울지역의
계엄일 경우에는 현행 헌법에 의해 육군
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이 되며 계엄업무를
육군의 일상 업무와 분리하기 위해 별도로
계엄사령부를 설치하고 별개의 참모진으로
그 업무를 수행케 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서울 근교에 주둔하는 부대를
서울 시내에 배치하고 일선사단을 예비대로
첨부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이 이날에 있었던 전부인데 언제
박정희가 검찰관에게 진술한 내용과 같은
일이 있었느냐고 장도영은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럴 경우 역사를 더듬는 사람은 어느
쪽의 말을 믿어야 옳을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쿠데타를 일으킨 5월 16일 그날까지
정부기구 개편, 임시헌법 따위의 안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이날에 이르기까지
마련된 것이 있었다면 <국가 재건
최고회의> 기구표 정도였으나 이것 역시
김종필의 호주머니에 간직돼 있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4월 10일에 있었다는
박정희의 진술은 아무래도 <창작>이었다는
심증이 일기만 한다.
여인은 휘청거리며 몇 걸음 뒤?
왜냐하면 이미 박정희는 장도영을 내치고
모든 실권을 한 손아귀에 쥐고 있었기
때문에 그 자신에게 유리하게 역사를
창작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었으니
말이다.
칼자루를 쥔 자와 칼날을 쥔 자의 차이는
이렇듯 엄청나기만 한 것이다.
4. 장도영, 양다리 걸쳤는가?
군사 쿠데타.
한국인은 정권욕에 사로잡힌 장군이 부하
장졸들을 동원해서 총칼로 합헌정부를
뒤엎어 버리는 이른바 군사 쿠데타라는
것이 중미나 남미, 또는 동남아시아
등에서나 일어나는 것이지 한국에서 그와
같은 불행한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하고 있었다. 그랬던 것이 1961년도에
들어서면서 한국에서도 쿠데타에 대한
소문이 끈질기게 나돌기 시작했다.
"확 뒤집어 엎어야 돼, 이놈의 장 정권!"
쿠데타에 대한 소문과 함께 그놈의
하고 기대하는 사람도 점차 늘어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장면은 자유민주주의 원칙만 고집하고
혼란을 야기시켜 놓고 있는 무리들에
대해서는 전혀 대응책을 강구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유민주주의? 이 지구상에서 제일 좋은
주의와 사사이라 하겠지. 그러나 한국인은
자유민주주의를 누릴 자격이 없어!"
태반의 지식인들은 벌어지고 있는
사회현상에 환멸을 느껴 이렇게 자조하고
있었다. 그래서 쿠데타를 기대하는 심리가
싹트게 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지식인들의 기대에 부응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군부의 일부에서 쿠데타가
모의되고 있다는 정보가 미국 CIA 한국
아마도 1961년 2월경이었던 것 같다. 서울
506방첩대장이었던 이희영이 박정희가 군사
쿠데타를 음모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
그 무렵이 아닌가 여겨진다.
미국 CIA 해외정보 담당책임자로 있다가
1973년에 은퇴한 피어드 실봐가 그의
회고록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그는
한국군의 한 장교를 통해서 박정희와
그에게 동조하고 있는 무리들이 군사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정보를 제공해 준 그 장교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박정희의 측근 참모라고만 밝히고
있다. 이 참모는 미국 CIA의 한국 분실의
한 요원과 친한 사이여서 이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고 한다.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이 정보를 장면
국무총리에게 알려주고 경각심을
촉구하도록 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이런 협의를 받은 매카나기는,
"그게 좋겠지요" 하고 미지근한 태도를
취했을 뿐이었다.
실봐는 매카나기가 그 정보를 가늠해 볼
능력이 없기 때문에 관망하는 자세를
취했을 것이라고 증언한 바 있다. 실봐는
매카나기의 허락이 떨어지자, 즉시 장면의
숙소인 반도호텔로 찾아가 군사 쿠데타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즉시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장면의 반응은 어떠했던가?
"적절한 조치를 취하기는 하겠지만 나는
장면은 꽤나 미래를 낙관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되면 오히려 정보를 제공해 준
쪽이 민망하기 마련이다. 실봐는 한국의
최고 통치권자가 <무슨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믿지 않는다>는데야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는가. 자칫 잘못하면
내정간섭을 하고 있다는 비난이나 받기
십상이다. 그래서 그는 장면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무슨 권고도 하지 않기로 작심을
하고, 다만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기로 했을
뿐이었다고 했다.
실봐의 정보제공이 있었을 때, 군
수사기관을 강화해서 군부의 동향에 대한
감시를 철저하게만 했던들 한국의 현대사는
지금쯤 다른 궤도 위를 달리고 있었을 것을
하는 아쉬움은 지금도 가실 길이 없다.
박정희가 육군 참모총장실로 장도영을
찾아갔다고 주장하는 그날에서 한 열하루쯤
지나 4월 21일 아침, 육군 중령 계급장을
단 정복차림의 한 고급 장교가 서울
506방첩대에 들어섰다.
누군가가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대장님을 좀 뵈려고 찾아왔습니다."
"누구라고 전해드릴까요?"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의 장세현
중령이라고 전해 주십시오."
장세현(張世顯)은 곧 대장실로
안내되었다. 이희영이 그의 앞에 나섰다.
"제가 이희영 대령입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장세현 중령입니다. 실은 오늘 아침에
엄청난 정보를 입수했기에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신고하려고 찾아뵈었습니다."
"엄청난 정보라니요? 우선 좀
앉으십시오."
이희영은 그를 쇼파로 안내해서 마주
앉았다.
"엄청난 정보라는 게 뭔가요?"
"쿠데타에 대한 정보입니다."
"쿠데타에 대한 정보?"
쿠데타에 대한 정보라는 말에 이희영의
두 귀가 쫑긋 곤두섰다. 그의 말마따나
엄청난 정보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족청계(族靑系)의 쿠데타설의
진상이 아직 파악되지 않고 있을 때였다.
족청계 쿠데타설이란 다름이 아니었다.
참모장이었던 이범석(李範奭)은 난립해
있는 청년단을 하나로 묶을 계획을
세워놓고 모든 청년단체를
대한청년단(大韓靑年團)으로 통합시켜
버렸었다.
이때 민족청년단 단원들 중 여전히
청년운동에 뜻을 둔 사람들은 기꺼이
대한청년단 깃발 밑으로 들어갔지만 통합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은 대거 군으로
들어갔는데, 군으로 들어간 족청계
장교들이 주동이 돼서 쿠데타를 일으킬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소문이 그럴싸하게
나돌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소문이 나돌고 있는 것은 대구
제2군 방첩대장이었던 이희영이 서울
506방첩대장으로 자리를 바꿔앉은 바로
(이거 원, 무슨 놈의 팔자가 이
모양이야? 내가 가는 곳마다 쿠데타 소문이
나돌고 있으니!)
이희영은 탄식하기를 마지않았다. 그럴
법도 했다. 그가 대구에 있을 때는 공군
쿠데타설이 빈번하겐 나돌고 있었다.
1961년 2월의 일이었다.
이희영은 이 공군 쿠데타설의 진상을
파악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른다.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이런 흑색선전을
퍼뜨린 것은 박정희의 쿠데타 그룹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음모를 은폐하고자 해서
이런 흑색선전을 마구 만들어내 퍼뜨렸던
것이다.
그는 공군 쿠데타설의 진상을 캐내지
못하고 서울로 올라왔었는데 이번에는
나돌고 있는 게 아닌가.
박정희는 박정희대로, 족청계는
족청계대로 쿠데타 음모를 꾸미고 있단
말인가?
이희영은 이번에도 족청계 쿠데타설의
진상을 파악하고자 해서 506방첩대의
정보와 수사의 총역량을 여기에 집중시켜
캐기 시작했다.
여담이지만 족청계 쿠데타 음모설로 인해
국무총리 장면의 아내 김윤옥과 철기(鐵驥)
이범석이 전화로 대판 싸운 일까지 있었다.
족청계 쿠데타설의 소문을 들은 김윤옥은
어느 날 밤, 신당동에 살고 있는
이범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장군님, 족청계에서 쿠데타를 일으킬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는데 장군께서도
장면과 이범석은 절친하다고까지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친한 사이였다. 이러한
사이를 잘 알고 있던 김윤옥은 호소를
겸해서 진상이나 알아보려고 이범석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한데, 이범석은
김윤옥이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벌컥
화부터 내며 쏘아붙였다.
"지금 세상에 족청계가 어디 있다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요? 당신네들 이젠 정권을
잡으니 족청의 망령까지도 때려잡지 못해
안달이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족청의
망령까지도 때려잡지 못해 안달이라니요?"
김윤옥도 발끈해졌다.
"나는 혹시 이런 소문 때문에 장군님한테
행여 해가 돌아갈까, 걱정이 돼서 전화를
때려잡지 못해 안달이냐구요? 그래
장군님의 인격이라는 게 고작 그 정도밖에
안 돼요?"
"뭐 인격? 아니 이 여편네가......."
"뭐 여편네?"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다. 또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다. 남과
여, 그것도 육순이 훨씬 넘은 노인네들이
전화통에 대고 입에 거품을 물고 악을
쓴다는 것은 그리 아름다운 광경이라 할 수
없었다. 족청계 쿠데타설은 이런
일화까지도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이희영은 족청계
쿠데타의 진상을 가려내고자 모든 역량을
여기에 집중시킨 결과 그에 따른 보상이
있었다. 3월 중순이었던가?
청요리집에서 박정희 장군이 박병권
소장하고 밀담을 나누고 있습니다" 하는
정보가 날아들어 왔다.
"박정희 장군이 박병권 소장하고?"
이희영의 촉각이 곤두설 만한 정보였다.
박정희에 대해서는 이미 그가 쿠데타를
음모하고 있다는 확신을 품고 있던 인물,
그런 인물이 지금 박병권(朴炳權)과 만나고
있다면 <뭔가가 있다> 하고 촉각을 세울
만한 일이었다.
박병권이란 어떤 인물이었던가? 그는
충청남도 논산 태생이었다. 1920년생이니까
박정희보다는 세 살 아래였다. 그러니까
1961년 당시 마흔한 살, 해방 전 해인
1944년 봄에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를
졸업했다. 1946년 3월 군사영어학교에
시초였다.
그런데 사실에 있어서 그는 민족청년단
출신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를
민족청년단 출신이 아니니까 족청계라 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도 세상에서는 그를
족청계 취급을 하고 있었다. 어째서였을까?
내용을 알고 보면 별 것도 아니었다.
민족청년단을 만든 이범석이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지자 대통령 이승만에 의해서
초대 국모총리 겸 국방장관으로
발탁됐는데, 이때 박병권이 이범석의
국방장관직 부관으로 기용됐던 것이다.
박병권이 족청계로 몰리게 됐던 것은
오직 이 한 가지 인연 때문이었다. 그런
터에 그가 장군으로 승진을 하자,
민족청년단 출신 장교들이 의식적으로
상관없이 족청계로 낙인찍히고 말았었다.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도청하라."
이희영은 지시와 함께 이 방면에 능통한
요원을 즉시 관해관으로 밀파했다.
이 무렵에 도청기가 발명돼 있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군 수사기관에 그런
문명의 이기가 마련되어 있지 못한 것만은
분명했다. 그럼 어떤 방법으로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도청한단 말인가? 가장 손쉬운
방법은 요원이 청요리집 보이로 가장해서
두 사람이 마주앉아 있는 방에
들락날락하면서 도청을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방법이야 요원들이 알아서 할
일이고, 하여간에 이희영은 사계의
전문요원들을 관해관으로 급파했다.
나누었던가? 여기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박병권이 먼저 박정희에게 <장군,
두 그룹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쿠데타
계획을 합칩시다>고 제의했던 바, <이미
모든 계획이 완성돼 있는 마당에 두 그룹을
합치게 되면 오히려 혼선을 빚어낼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박정희가 박병권의 제의를
거절했다는 설이 있다.
또 하나는 박정희가 박병권에게 <소문에
듣자하니 장군께서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다
하던데 그게 사실이라면 내가 계획하고
추진중에 있는 것과 합치는 것이 어떻소?>
하고 제의했던 바, 박병권이
<쿠데타라니요? 나는 그런 것을 계획한
일도 없고 상상조차 해본 일도 없소.
군인은 군인의 길이 따로 있는데 무엇
뛰어들려 한단 말이오?> 하고 쿠데타 계획
그 자체를 부인했다는 설이 있다.
이 두 가지의 설을 놓고 볼 때, 아무래도
후자의 설이 옳지 않나 하는 느낌이 든다.
왜냐하면 박정희 쿠데타 정권하에서
박병권의 언어 행동, 또 그가 정치하고는
전혀 담을 쌓고 여생을 보내고 있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후자 쪽이었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게 한다.
그야 어찌됐든, 이희영이 이렇게
쿠데타에 대한 정보 때문에 노이로제가
걸리다시피 되어 있을 때에 장세현이
쿠데타에 대한 정보를 신고하겠다고 하면서
찾아왔던 것이다.
"장 중령, 좀 상세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쿠데타에 관한 정보가 어떤
것인지?"
"네,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아침의
일입니다만......."
장세현의 고발 내용은 이러했다.
오늘 아침의 일이다. 오늘 아침이란
1961년 4월 21일 월요일 아침을 말한다.
장세현의 집은 인천(仁川)이었다. 그가
아침에 육군본부의 출퇴근용 버스를 타고
가는데 이 버스가 인천역 앞에 정거했을
때였다. 그곳에 같은 육군본부에 근무하고
있는 육군 대령 이종태9李鐘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합승택시를 타려는 것 같은
눈치였다. 그래서 이 버스를 타라고 손짓을
보자 그제야 이 버스가 육군본부 출퇴근용
버스라는 것을 알아챘던 모양이었다.
그는 버스에 올라오자 장세현 옆의
빈자리에 앉았다.
"어쩐 일입니까, 인천엔?"
"내 집이 인천 아니오. 어제가
일요일이기에 집에 내려왔다가 돌아가는
길이오."
이종태는 육군본부 근처에서 하숙생활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출근길의 무료함을 메꾸기
위해 꽤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소문으로
나돌고 있는 군부 쿠데타설에도 화제가
미쳤다.
"이 대령님은 쿠데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필요하겠지요."
"긍정적이란 말씀이군요?"
"학생들이 판문점으로 가자고 데모를
하는가 하면 정치가 이처럼 무질서한
상황이 계속된다면 그런 것도 필요치
않겠소?"
"나도 힘만 있다면 한번 해봄직한
일이오만."
이종태는 덧붙였다.
한데, 바로 이 덧붙인 대목에 대해서 두
사람의 주장은 엇갈리게 된다. 이종태는,
<나도 힘만 있다면 한번 해봄직한
일이오만> 하고 말했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데 반해서, 장세현은 이종태가 <그래서
지금 박정희 장군을 중심으로 해서 젊은
장교들이 치밀한 계획을 세워 놓고 있는
두 사람의 주장을 놓고 생각해 볼 때,
이종태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장세현이
별것도 아닌 그 말 한마디만을 가지고
일부러 506방첩대까지 찾아가서 <쿠데타
정보가 있다> 운운하며 신고를 했을까?
이 대목에 관한 한 이종태가 박정희의
쿠데타 내용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발설을
했기 때문에 장세현이 삼각지에 있는
육군본부에서 소공동에 있는 506방첩대로
일부러 찾아가 신고를 하게 된 것이 아니냐
하는 심증이 가게 된다.
장세현의 신고가 있자, 이희영은
육군본부에 전화를 걸어 즉시 이종태를
호출했다.
"506방첩대로 나오라."
여기에 대해서도 이희영과 이종태의
신고가 있자 즉시 이종태를 호출햇다고
하고, 이종태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진해서 506방첩대로 출두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종태의 주장을 그가 남긴
기록에 따라 살펴보기로 하자. 다음에
인용하는 글은 그의 수기임을 밝혀둔다.
4월 21일 아침 나는 출근하기 위해
인천역에 갔다(20일은 일요일). 아차 하는
사이에 1, 2분 늦게 도착해서 기차를
놓치고 말았다. 다음 열차를 타면 출근이
늦어진다. 합승 택시를 타려고 역전을
서성이고 있는데 군용버스가 왔다. 육본
출퇴근용 버스였다. 나는 그때까지 인천과
육본 사이에 출퇴근 버스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인사참모부의 장세현 중령이 어서 타라고
손짓했다. 장세현의 옆자리에 앉았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최근 신문에 보도된
군부 쿠데타설이 화제에 올랐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장세현의 질문에
학생들이 판문점에 가자고 데모하고 정치가
이처럼 무질서하게 위험한 상황이
계속된다면 그런 것도 필요치 않을까, 나도
힘만 있다면 한번 생각해 봄직한 일이라고
대답했다.
일반적이고 평범한 이야기였다. 또
시중에 나도는 이야기에 불과했고
조금이라도 의식이 있는 장교라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나로서는 장세현을
동조세력으로 포섭하기 위한 첫 시도이기도
했다.
되지 않아 오치성이 찾아왔다. 큰일났다며,
그는 장세현이 내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방첩대에 고발했다는 것이었다. 또 혁명
운운했다는데 혹시 무슨 깊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느냐는 것이었다. 이것은
보안부대에 있는 동지로부터 연락받은
사항이라며 많은 동지들이 걱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쁜 놈>이란 소리가 저절로 내 입에서
나왔다. 그리고 초조하고 걱정스럽게 서
있는 오치성에게 "우리와는 아무 관게 없는
말이니 걱정할 것 없다. 개인적인 생각만
이야기했을 뿐이니 추호도 걱정할 것 없고
만약 문제가 된다면 내가 혼자 책임지고
해결할 테니 안심하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오치성은 "최악의 경우 고문을
대령의 사상이 의심스럽고 혁명을 해야
한다고 하더라는 말까지 했다고 하니
주의하고 그리고 서울 방첩대장 이희영
대령은 장도영 총장의 심복이니 최악의
경우 장 장군을 물고 들어가면 해결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내 스스로 이희영을 찾아가서 해명하면
어떨까? 나는 장세현에게 별로 한 말이
없는데, 장세현이 말을 만들어 했을 수도
있고....... 나를 잡으러 오기 전에 내가
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내 질문에 오치성은 "그건 알아서
하시오" 하면서 자리를 떴다. 나는 이것
저것을 생각했다. 정보계통에 근무한 적이
있는 나는 아무래도 잡혀가는 것보다는 내
발로 걸어가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희영은 나를 보자마자 <그렇지 않아도
한번 부르려고 했는데 잘 오셨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종태가 제발로 걸어서 506방첩대로
찾아갔다는 데 대해서 이희영은 일소에
붙였다.
"장세현의 고발이 있자, 즉시 이종태를
불렀다. 어떤 혐의를 받고 있다 해서
제발로 찾아 들어오기 어려운 곳이
방첩대인데, 설혹 제 발로 걸어 들어왔다고
해도 누구를 붙들고 무엇이라고 변명할 수
있겠느냐?"
이희영의 증언이었다.
그는 또 이렇게 덧붙이기도 했다.
"만약 이종태가 제발로 걸어들어 왔다면
얘긴데, 그렇다면 이종태의 변명을 듣기
이전에 비밀을 누설시킨 자를 가려내기
위해서 자체 내의 조사부터 시작했어야
마땅했을 게 아니냐?"
그건 그렇다. 장세현의 신고를 공개했을
리는 만무한 일이었다. 육군 소위에서 육군
대령에 진급하기까지 줄곧 방첩대에서만
근무해 온 이희영이 그런 중대한 정보를
아무한테나 흘렸을 리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 이종태를 찾아온 오치성이
<이것은 보안부대에 있는 동지로부터
연락받은 사항>이라고 운운했다고 했다.
506방첩대에도 쿠데타 그룹에 포섭되어
있었던 자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러니까 포섭된
자가 있었다고 가정하고 이희영이 혼자서
알아냈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해명한 일이 없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접어두기로 하고,
요는 이종태가 쿠데타 음모에 대해서 그
전모를 털어놨느냐, 아니면 비밀은
비밀대로 지켰느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관건인 것 같다.
여기에 대해서 이종태는 그의 수기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그는 장세현의 고발로 부르려 했다는
것과,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해서 이미 나의
사상과 경력에 대해 알아보았다고 말했다.
여러 조사 결과는 사상적으로 의심할
이유가 없으나 고발이 있으니 불러서
물어보는 것은 자기 책무라면서 이해를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이 대령이 혁명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데 무슨 계획이나 생각이 있어서
한 말입니까?"
"그런 말이야 했지요. 그렇지만 최근
시중에서 떠돌아다니고 신문에 보도된
이야기에 불과한데, 그런 얘기도
못합니까?"
"아무 의미 없이 혁명 운운했을 리는
없고 무슨 계획이나 조직이 있는 것은
아닙니까?"
"내가 혁명을 하려는 계획이나 조직이
있으면 뭐하러 그런 얘기를 하겠소. 그런
게 없으니까 누군가 나서야 되지 않을까
해서 한 소립니다."
변명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면 꼬투리가
수도 없다. 문득 오치성의 충고가
생각났다. 마침 이희영이 물었다.
"그러면 혹시 누군가가 그런 일을 한다는
소문은 못 들었습니까?"
"사실인즉, 참모총장이 혁명을 한다는
소문이 있는데,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총장을 지지하겠다는 말을 장 중령에게
말했습니다. 다른 소문은 모르겠소."
이 대목에 대한 이희영의 증언은
엇갈린다.
이종태는 방첩대에 불려오자, 처음에는
횡설수설로 일관하려 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이 자의 입을 열게 할 수 있을까 하고
궁리를 하고 있을 때 얼핏 묘안이
떠올랐다.
다 알고 있소. 쿠데타는 장 총장과 박
장군이 손을 잡고 추진중에 있는데 뭐가
두려워 그러시오?"
그러자 이종태는 술술 전모를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종태, 그는 경상남도 남해 태생이다.
1927년생이니까 1961년 현재의 나이는
34살. 육사 4기 출신이다. 그의 수기에
따르면 그는 1958년도부터 박정희와 쿠데타
모의를 했다고 한다. 어느 정도의 구체적인
진전이 있었는지는 의문이지만 모의 정도는
있을 법한 일이었다고 여겨진다. 박정희는
1951년 이래 오매불망 쿠데타에 대한 꿈을
이종태는 벌써 그때부터 박정희와
쿠데타를 모의해 온 사람이니까 김종필
외에는 5.16 쿠데타 그룹 중 누구보다도
박정희와 밀착돼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쿠데타 음모에
대해서는 세부적인 문제에 대해서까지
누구보다도 소상하게 알고 있었으리라
믿어진다.
하여간에 이종태는 이희영이 <쿠데타는
참모총장과 박 장군이 손을 잡고
추진중>이라고 하자, 쿠데타의 내용을 모두
불었다고 했다. 그는 쿠데타 그룹에 가담해
있는 인물, 그 인물들이 맡고 있는 임무
등에 이르기까지 세세히 진술했다고 했다.
"혁명공약도 내가 이미 초안을
잡아두었다."
털어놓더라고 했다.
이희영은 이종태의 진술을 토대로 해서
도표를 작성했다. 박정희를 정점으로
쿠데타 모의에 가담해 있는 장군과 장교들
이름 그들의 소속 부대명과 직책,
동원부대, 거사일자 등. 거사일자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이른바 D데이, 거사일자는
5월 12일로 되어 있었다. 뒤에안 일이지만
쿠데타 그룹은 이종태 누설사건이 벌어지자
5월 16일로 연기했다는 것이다.
이희영은 또 그동안 입수한 족청계
쿠데타 계획에 대한 정보도 도표로
작성했다. 그런 다음 이것을 가지고 먼저
방첩부대장 이철희를 찾아갔다. 그에게 두
계열의 쿠데타 음모를 브리핑해 주고,
"각하, 쿠데타 음모에 대한 브리핑을
해드리려고 찾아뵈었습니다."
그러면서 이희영은 들고 간 보따리를
끄르려 했다.
"이미 내용을 잘 알고 있어, 그러니
설명할 것도 없어."
천만 뜻밖이었다.
내용을 잘 알고 있다? 어떻게? 누군가가
이미 보고를 했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이종태가 쿠데타 음모내용에 대해서
자백을 한 것은 오늘인데, 그 말고 누가
브리핑을 했기에 이미 내용을 알고 있단
말인가? 이철희가 전화로? 그럴 리가 없다.
시간을 다투는 문제도 아닌데 전화보고를
할 리가 있는가. 더구나 이철희에게
브리핑을 끝내고 나서 <지금 육본으로 가서
생각입니다>라고 하자, 그렇게 하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던가.
(젠장, 뭐가 어찌된 거야?)
이희영은 꼭 여우한테 홀린 듯한
느낌이었다. 육군의 총수가 이미 알고
있다는데야 뭐라 하겠는가. 그래서 무슨
조치에 대한 지시가 있을까 해서
부동자세를 취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장도영은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각하."
이희영은 조용히 장도영을 불렀다.
힐끗 시선을 이희영한테로 던진 장도영은
가볍게 두어 차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아마도 이희영이 물러가겠다고
(그게 아닌데?)
이희영은 잠시 망설이고 있었다.
"쿠데타 음모에 대해선 이 대령 혼자만
알고 있어. 절대로 발설해선 안 돼."
갑자기 정도영이 입막음을 하는
것이었다.
"각하, 즉각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 줄로
압니다만?"
"조치?"
"네."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은 음모를
꾸미고 있는 자들을 일망타진해야 한다는
간접표현이었다.
(내 직책이 뭔가? 그런 군의
불순분자들의 발호를 미연에 방지하는 게
아닌가.)
하고 여전히 선 채로 버텼다.
"이 대령, 내가 뭐라고 했어? 쿠데타
음모 문제는 이 대령 혼자만 알고 있어야
한다고 했잖아? 절대로 발설해선 안 돼.
그만 물러가!"
이희영은 참으로 이상한 양반도 다
보겠다고 생각하며 참모총장실을
물러나왔다.
문득, 그가 오늘 이종태를 심문하면서
했던 말이 상기되었다.
<쿠데타는 장 총장과 박 장군이 손을
잡고 추진중에 있는데.......> 그가
이종태에게 이런 말을 했던 이유는 그의
입을 열게 하기 위한 임기응면의 수단에
불과했다. 그랬는데, 그럼 사실에 있어서는
그게 진실이었단 말인가?
받아들여야 할지 꼭 안개 속을 헤매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문득 대구에서 있었던 일이 되새겨졌다.
장도영이 2군 사령관직에서 육군
참모총장으로 영전된 것이 1961년 2월
중순이었다. 그런데 후임 2군 사령관은
장도영이 서울로 올라가고 나서 새로
발령이 났었다. 장도영은 번거로우나 다시
또 대구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신구
사령관이 이.취임식을 가져야 했기
때문이었다.
대구로 내려온 장도영이 영접차 나간
이희영에게 한 말이었다.
"이상 없지?"
이상 없느냐는 것은 군부의 동향에
이상이 없느냐는 질문이었다.
그쪽에만 신경을 쓰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
공군 쿠데타설은 이미 장도영도 익히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는 이희영의 대답을
듣자 <그래?> 하며 빙그레 미소를 짓는
것이었다.
그때의 그 미소가 무엇을 의미하고
있었지?
이희영은 그때의 장도영의 미소하고 지금
입막음을 엄명한 것과를 연관시켜 보았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숨이 콱 막히는
듯한 답답증이 일었다.
(장 장군이 박정희 장군하고 손을 잡은
게 틀림없어!)
이희영은 하늘이 노랗게 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종태 쿠데타 음모누설 사건>이 있은
지 꼭 보름 만인 5월 6일, 이날 아침
11시경이다. 경상남도 거제 출신 민주당
소속 민의원 윤병한(尹炳漢)이 한 낯선
신사를 거느리고 국무총리 공보비서실로
들어섰다. 당시 국무총리 공보비서실은
중앙청 별관 1층에 자리해 있었다.
비서실로 들어선 윤병한은 공보비서관
송원영(宋元英) 곁으로 다가갔다.
"총리를 좀 뵈어야겠소. 송 비서관이
주선 좀 해주이소."
총리하고의 면담 주선을 요청했다. 무엇
때문에 만나고자 한다는 이유나 설명도
없었다.
수석비서관이자 장면 내각의 대변인이었다.
윤병한의 부탁을 받은 송원영은 조금
짜증이 나는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국무총리를 면회하고자 찾아오는 사람이
하루에도 수십 명에 이르고 있었다. 그들이
국무총리를 만나고자 하는 것은 태반이
개인적인 용무 때문이었다. 고작해야 취직
부탁이 아니면 이권 청탁 이런 것들이었다.
총리를 만나고자 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다 만나게 해주려 했다간 총리는 몸뚱이가
백 개라도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국사를
돌볼 시간을 갖기도 어려운 일이었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총리 면회신청을
해오는 사람들을 통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거 윤 의원, 어지간하면 총리의 시간을
아실 만한 국회의원들까지도 자꾸 총리만을
만나려고 하니?"
송원영은 조금 짜증 섞인 말투로 총리
면담 주선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이거 와 이러능기요, 송 비서관? 내가
개인적인 일로 총리를 만나려고 하는 줄
아시오? 중대한 정보가 있어서 만나려는
거요, 중대한 정보가 있어서."
윤병한은 사적인 일이 아니라 공적인 일
때문이라는 것을 큰소리로 떠들고 나서
송원영의 귀에 바싹 입을 대고 소근거렸다.
"여보 송 비서관, 여기 이분이 군부
쿠데타 계획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려 왔단
말이오."
"군부 쿠데타 계획?"
곤두섰다. 그렇지 않아도 며칠 전 <장면
국무총리 암살미수 사건> 같은 것이 벌어져
모두가 긴장에 쌓여 있을 때였다.
이 사건은 황해도 안악(安岳) 출신인
박대완(朴大完)이란 자가 주모자가 된 매우
우스꽝스러운 사건이었다. 그러나 긴장해
있는 가운데서도 송원영은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 친구 엉뚱한 소리를 하면서 총리를
만나려는 게 아냐?) 하는 생각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웃자, 윤병한의 눈꼬리가 치켜졌다.
"여보, 이게 웃을 일이오? 더구나
구체적인 증거까지도 가지고 왔는데?"
증거까지 가지고 왔단다. 그렇다면
총리를 만나려는 수단이라고만 해석할 수도
"알겠습니다. 총리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송원영은 앞장서서 나가며 비서관
정주성(鄭周成)에게 따라 오라고 눈짓을
했다.
총리 집무실로 들어섰다.
"윤병한 의원께서 총리께 중대한 말씀이
있으시답니다."
윤병한을 만나 줄 필요가 있어서
안내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했다.
"정 비서관이 배석해 있도록 하시오."
송원영은 정주성에게 귀엣말로 말하고
물러나왔다.
"중대한 말씀이라니 무슨 말씀인가요?"
장면이 나직히 물었다.
"예, 다름이 아니라 군부 쿠데타에 대한
"군부 쿠데타?"
장면이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예."
윤병한은 안주머니에서 메모지 한 장을
꺼내 장면 앞에 펼쳐 놓았다.
"여기 적혀 있는 자들은 모두 군부
쿠데타 모의에 가담해 있는 자들입니다.
살펴보십시오."
장면은 그 메모지를 집어 들었다. 제일
먼저 눈 속으로 파고든 이름이 <제2군
부사령관 육군 소장 박정희>라는 직함과
계급 그리고 이름이었다.
"박정희? 박정희가 어떤 사람이지?"
그 누구도 그가 어떤 인물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사람은 없었다. 박정희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박정희라는 인물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면
상황은 어떻게 벌어지게 되었을까? 그의
사상적 경력, 그리고 1951년 5.26 정치파동
때 이종찬에게 쿠데타를 건의했던 사실
등을 알고 있었으면 장면에게 박정희라는
인물을 구체적으로 소개하기만 했던들,
장면은 좀더 다른 방법으로 대처하지
않았을까?
장면은 그 메모지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육군 소장 이주일(李周一)의 이름도 들어
있었다. 그 밖에는 태반이 육군 중령의
이름들이었다.
"윤 의원이 이 명단을 용케 입수했구려.
이 명단을 어떻게 입수했소?"
"예, 바로 이 오 사장이 제보해
주었습니다."
장면에게 소개했다.
이 신사의 이름은 오인환(吳仁煥),
한양공업(漢陽工業)주식회사 사장으로 그의
설명에 따르면 그가 군부 쿠데타 계획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게 된 경위는 이러했다.
김덕승(金德勝)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일제시대 때 만주땅에 주둔해 있던 일본
관동군(關東軍)의 정보원으로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던 인물이었다. 관동군이라고
하면 포악하고 악명 높은 군대였는데 그
관동군의 정보원이었다고 하면 그 인물이
만주땅에서 어떤 짓을 했으리라는 것은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런데도 그는 해방 후 만주에서
귀국하자 <만주땅에서 독립운동을 했다>고
떠벌리고 다녔다. 만주땅에서 돌아온
모르는 사람이 없을 지경이었는데도
말이다.
하긴, 그가 광복군(光復軍)에 몸담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전전(戰前)
광복군이 아니라 전후(戰後) 광복군이었다.
8.15 해방이 되자, 광복군에서는
북경(北京)에 광복군 초모처를 설치하고
북지(北支) 또는 만주땅에서 일본군 군적에
있던 한국 청년들을 모아서 광복군에
편입했던 것이다. 그가 관동군 첩자짓을
했다는 것을 광복군 초모처 요원이
알았던들 광복군에 편입시켜 줄 리가
없었다.
그가 박정희라든가 이주일 등 5.16 군사
쿠데타 후에 쿠데타를 성사시키는 데
협조를 했다고 해서 군사정부에서는
중앙일보 자리 건물을 주어 산업박람회를
열어 치부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뒤에는
마사회(馬事會) 회장 감투를 씌워주기도
했었다. 전두환(全斗煥)이 정권을 잡은
후에는 중국 요리집을 경영했다던가.
김덕승은 5.16 군사 쿠데타 전에는
<김용천>이라는 가명으로 행세를 했다.
전후 광복군에서 돌아온 사람들 가운데
군의 요직에 앉은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군납도 하고 그 일의 중개업도 하는 등
그러면서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었다.
한양공업 사장인 오인환에게 대구에
내려가 있는 김용천 아니 김덕승으로부터
장거리 전화가 걸려온 것은 1961년 5월
2일이었다. 제2군 사령부에서 큰 공사를
맡게 되었으니 즉시 내려오라는 것이었다.
공사를 맡게 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가슴이
부풀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만사 제쳐놓고 대구로 달려 내려갔다.
오인환을 맞은 김덕승은 그를
중화원(中和園)이라는 중국 요리집으로
안내했다. 방으로 들어서니 거기에는 벌써
선객들이 있었다. 어깨에 번쩍번쩍하는
별들을 달고 있는 장군들이었다.
"이 어른은 제2군 부사령관 박정희 소장
각하, 이 어른은 참모장 이주일 소장
각하."
김덕승은 자못 의기양양해져 장군들을
소개했다.
오인환의 가슴은 설레이기 시작했다.
제2군 사령부에 큰 공사가 있다고 하더니
과연 틀림없는 일이었구나 하는 느낌이
자신이 부담하리라 작심을 했다. 그러면서
그는 장군들하고는 초대면이었으나, 그들의
환심을 사두고자 해서 호기있게 놀았다.
진탕 술을 퍼마신 다음에 여관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아침 김덕승이 여관으로
찾아왔다. 그는 여관으로 찾아가기 전에
부사령관 관사로 박정희부터 찾아갔다.
"각하, 오인환 그 사람 어떻습니까?"
"글쎄, 내가 보기엔 괜찮은 사람 같은데
전부터 잘 아는 사이오?"
"네, 그렇습니다. 저하고는 금전상의
거래도 잦았고......."
"그래서 내가 부탁한 군자금을 그
사람한테서 조달하려고 불러내렸나?"
"네, 그렇습니다. 제 주위에는 그만한
사람밖에 없어서......."
군사 쿠데타를 추진하고 있는 박정희는
군자금 조달이 막막했다. 그래서 김덕승을
불러내렸다. 그리고는 쿠데타에 필요한
자금 5백만 환만 마련해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김형, 그래 그 사람이 돈을 선뜻 내놓을
것 같소?"
박정희는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눈치 같았다. 사실에 있어서는 김덕승도
자신은 없었던 것이다.
"문제는 바로 그것입니다. 큰 공사를
따내게 되었다고 내려오라고 하긴
했습니다만 뭐라고 하면서 5백만 환을
달라고 해야 할지......?"
박정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담배만
"각하,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어떻게?"
"지금 각하께서 추진하고 있는 일을
솔직하게 털어 놓고 협조를 해달라고
부탁하는 게......?"
"쿠데타 계획을 털어놓겠단 말이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방법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을 것만 같습니다."
박정희는 한동안 또 말이 없었다. 여전히
담배만 빨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을 때에는 담배 한 개피를 다 태우고
난 뒤였다.
"김형이 믿을 수 있다고 자신하거든
생각대로 해보시오."
김덕승이 방안으로 들어서자, 오인환은
인사를 생략하고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공사 내용이 어떤 것입니까?"
"오 사장."
김덕승은 오인환을 불러놓고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런 다음 오인환의 의중을
떠보았다.
"공사 내용을 말하기 전에 먼저 한 가지
물어보겠는데 우선 나한테 5백만 환만 먼저
줄 수 있겠소?"
"그야 공사만 확실하게
따낸다면야....... 하지만 어떤 공사인지,
규모는 어느 정도인지 그런 것을 알아야
나도 확실한 대답을 할 수 있을 게
아니오?"
당연한 대꾸였다. 공사 규모가 몇
푼짜리이지도 모르면서 5백만 환이란
대금을 선뜻 내놓을 미친 놈이 어디 있단
5백만 환이 어느 정도의 큰돈인지
독자들이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1961년 5월 당시(쿠데타 직전)의 쌀값을
소개하면, 한 가마니(10말)에 도매로 1만
9천 5백 환이었다. 그러니까 5백만 환을
지금의 쌀값으로 환산하면 2억 8천만 원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오 사장, 꼭 공사 내용을 알아야만 돈을
줄 수 있겠소? 나를 믿고 줄 수는 없겠소?"
오인환은 힐끔 김덕승의 표정을
살펴봤다.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어? 이놈아 너
같은 브로커를 뭘 믿고 5백만 환이라는
큰돈을 주어?)
그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으나
입으로 뱉아 내는 대답은 좀 부드러웠다.
나는 사업가올시다. 5백만 환이란 돈이
크다면 클 수도 있고 작다면 작다고 할
수도 있지요. 그러니 공사 내용을
알아야만......."
"알겠습니다."
김덕승은 끝까지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럼, 내 얘기하죠. 공사치곤 아주 큰
공사요."
"큰 공사라면 어느 정도로 큰 공사냔
말입니다."
"대한민국을 청부 맡는 공사요."
"대한민국을 청부 맡는 공사?"
무슨 뜻인가, 대한민국을 청부 맡는
공사라니? 오인환은 얼핏 납득이 가지
않았다. 알쏭달쏭하기만 했다.
"김 선생, 속시원히 툭 까놓으시죠? 어떤
돌리기만 하십니까?"
"그러게 대한민국을 청부 맡는 공사라고
하지 않았소?"
이렇게 말하고 김덕승은 지금 박정희가
장도영을 업고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다고
툭 털어놓았다.
오인환은 놀랐다.
"아니 장도영 장군도 가담돼 있단
말입니까?"
오인환은 장도영이 어떻게 해서 육군
참모총장으로 영전되게 됐는지 대강은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의 놀라움은 더욱 컸던
것이다.
장면은 놀라기보다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 김 무엇인가 하는 사람이 분명히
장도영 장군도 가담돼 있다고 했소?"
장면이 따지듯이 다시 물었다.
"가담돼 있다고 한 것이 아니라 장도영
장군을 업고서 할려고 한다 했습니다."
오인환은 조금 걱정을 했다.
"그게 모두인가요?"
오인환이 힐끔 윤병한을 바라보았다.
"있었던 사실은 모두 말씀드려요."
윤병한이 재촉했다.
오인환은 다시 장면을 바라보면서 얘기를
계속했다.
쿠데타 계획을 털어놓는 김덕승은 비밀을
털어놓는 사실이 아무래도 좀 불안했던
털어놓고 잠시 오인환의 감정의 변화를
살피고 있다가 이렇게 덧붙였다.
"이제 당신은 장도영 장군과 박정희
장군의 비밀을 알고 났으니 이 비밀을
지키지 않는 한 당신의 목숨을 보장받을 수
없게 됐소. 그리고 당신은 이 시간
이후부터 당신을 미행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 두시오."
김덕승은 협박을 했다. 일제시대
관동군의 첩자노릇을 하던 때의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금 썼던 것이다. 제
버릇 개 주랴. 오인환은 그 말을 듣자
등골이 오싹해지는 오한을 느꼈다.
김덕승은 이런 협박 한마디로 그치지를
않고, 또 하나의 협박을 보탰던 것이다.
"이제 오 사장은 돈을 내놓지 않고는 못
없다면 모를까, 능력이 있는 이상엔 싫든
좋든 우리의 요구 조건을 들어줘야 할
거요. 싫다고 하는 것은 곧 우리들의
비밀을 누설시키겠다는 얘기밖에 되지
않으니 말이오. 어떻게 하겠소? 언제 돈을
마련해 주겠소?"
김덕승은 마치 맡겨둔 돈을 받아내려는
듯한 투의 말을 했다.
오인환은 오금이 저리며 가슴이 후들후들
떨리는 것을 느꼈다. 엄청난 함정에 빠지게
되었다는 절망감도 일었다.
"김 선생, 2,3일만 여유를 주십시오.
돈을 반드시 마련해서 드리겠습니다."
오인환은 약속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경우 만일 거절했다가는 어떤 봉변을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사기를 치려는 게 아냐? 하는 생각이
번갯불처럼 일었다.
박정희가 장도영을 업고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까짓 돈
5백만 환이 없어 한 사업가를 협박해서
돈을 울거내려 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긴 그랬다. 박정희는 제2군
부사령관이었다. 2군의 어떤 공사를
주겠다고 가짜 계약서 하나 만들어 주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틀림없어, 이 사나이는 쿠데타를
빙자해서 사기를 치려는 거야.)
이것이 사기냐 아니냐 하는 것을
가려내자면 어떤 방법이 있는가?
김덕승이란 인물이 박정희하고 어느 정도로
한 가지만 알아내도 군사 쿠데타의 진부는
가려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오인환은 한두 가지 꾀를 부렸다.
"김 선생, 난 대구는 초행이라 이왕에
내려온 김에 구경이라도 하고 올라갔으면
하는데, 박 장군한테 말씀해서 차를 좀
얻어쓸 수 없겠습니까?"
오인환은 청을 했다.
"그러십시오. 그거야 뭐 그리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김덕승은 선선히 대답을 하고 여관
대청마루로 나가는 것이었다. 아마도
박정희한테 전화를 걸려는 모양이었다.
오인환은 두 귀를 대청마루 쪽으로 바싹
모았다. 박정희한테 전화를 거는 것이
분명했다.
20분쯤 되었을까? 밖에서 클랙슨이
요란하게 울렸다.
"나가 보실까요?"
김덕승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밖으로 나가보니 과연 별판에 두 개의 별이
달려 있는 세단이 대기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가까운 사이인 것만은 틀림이
없군. 그렇다면 쿠데타 계획도 사실이라는
얘기가 아닌가?)
박정희가 보내준 차에 올라 대구를
한바퀴 돌았다.
(쿠데타 계획이 사실이라면, 쿠데타
계획이 사실이라면 나는 어떻게 처신해야
한다?)
구경하는 동안 오인환은 마냥 번민만을
거듭했다.
마련해 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모른 체 내버려 두었다가 쿠데타가
성공하기라도 하는 날엔 김덕승은 보복을
하려 들지도 모른다. 속된 말로 <빼지도
박지도 못하는> 경우가 바로 이런 경우일
것이다.
김덕승과 함께 대구 시내를 일주하고
여관으로 돌아왔다.
"김 선생, 실은 내가 어젯밤에 몽땅
털어서 술값을 내버렸더니 수중에 무일푼이
돼 버렸습니다. 죄송하지만 서울까지의
차표를 좀......."
오인환은 노자돈을 요구했다.
사실 수중에 무일푼이 돼 버려서
노자돈을 요구했던 것은 아니었다. 둘
사이는 스스럼이 없는 사이가 됐다는 것을
"나도 마침 가진 돈이 없는데......."
김덕승은 꽤나 면구스러운 모양이었다.
서울까지의 기차표 값이 얼마라고 그만한
돈도 갖고 있지 못한단 말인가? 명색이
사업가라면서.
"잠깐만 앉아 계십시오."
김덕승은 다시 또 대청마루로 나가는
것이었다. 아마도 다시 또 박정희한테
전화를 걸려는 눈치인 것이 분명했다. 그가
방으로 돌아온 지 한 30분 뒤에 박정희의
운전수가 서울까지의 기차표를 전해 주고
돌아갔다.
여관방을 나서기 전 오인환은 다짐하듯이
물어보았다.
"김 선생, 쿠데타의 영도자로 장도영
장군을 모시기로 한 것이 틀림없습니까?"
틀림없다면 돈은 어김없이 마련해 주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틀림없습니다."
김덕승은 한마디로 잘라 대꾸했다.
"김 선생께서 친히 장 장군을 만나
보셨습니까?"
"나는 만나본 일이 없습니다. 하지만 박
장군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틀릴 리가
있겠습니까?"
오인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또
이렇게 물었다.
"내가 5백만 환만 내놓게 되면 나도
대한민국 청부공사에 한몫 끼게 되는
거죠?"
"물론입니다. 오 사장이 5백만 환만
내놓게 되면 오 사장의 공로야말로
오인환은 김덕승과 단단이 약속을 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 도착하자 꼭
호랑이 굴에서 빠져나온 듯한 느낌이었다.
김덕승한테 군사 쿠데타에 대한 계획을
들었던 그의 마음은 그만큼 두려움에
휩싸여져 있었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자, 그는 사흘 동안을
두문불출하며 번민을 했다. 돈을 어떻게
마련해 주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 때문이
아니었다. 고발을 해야 할 것이냐? 아니면
돈을 마련하는 척 동분서주하면서 시간을
끌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 때문이었다.
끝내, 오인환은 고발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그렇다고 군 수사기관이나 경찰에
고발할 수는 없었다. 쿠데타를 계획해 놓고
있는 사람들이고 보면 어디에 손을 뻗쳐
때문이었다.
그래서 생각다 못해 평소 친하게 지내고
있는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인 윤병한을
찾아가 의논을 했다. 그랬더니 윤병한은
당장 총리를 만나자고 하며 이리로 끌고 온
것이었다.
얘기를 듣고 난 장면은 절로 한숨이 새어
나오는 모양이었다. 흐음 하고 알게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국토방위를 하라고 쥐어준 총칼이지
그게 어디 정권을 뒤집어 엎으라고 쥐어준
총칼인가?"
또 한번 알게 모르게 한숨을 쉬는
것이었다.
"박정희라는 사람이 쿠데타 모의를 하고
있는 것이 명백한 이상에는 빨리 손을 쓰는
윤병한은 꽤나 초조한 모양이었다.
장면은 거기에는 대답을 않고 기립해 서
있는 비서관 정주성을 돌아보며 말했다.
"가서 송 비서관더러 어서 좀 올라오라고
해."
비서관 정주성이 공보비서실로 내려왔다.
그의 표정이 사뭇 긴장되어 있었다.
송원영은 그러한 정주성을 의아한 듯
바라보며 궁금한 듯 물었다.
"윤 의원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던가요?"
"상세한 말씀은 나중에 올리겠습니다.
어서 위로 올라가 보십시오. 총리께서
부르십니다."
말수도 적은 사람이었다. 어지간한 사람
같으면 놀라움에 호들갑을 떨 법한
일이었으나, 그는 조용히 말하며 자리에
앉는 것이었다.
장면이 부른다는 말에 송원영은 부리나케
다시 총리실로 올라갔다. 윤병한과
오인환은 그때까지도 자리를 뜨지 않고
앉아 있었다.
"송 군, 지금 즉시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하고 이태희 검찰총장을
들어오라고 해주게."
지시하는 장면의 표정도 사뭇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장면의 부름을 받고 먼저 달려들어온
사람은 장도영이었다. 그는 총리실로
들어서자 부동자세를 취하고 거수경례를
장면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선 좀 앉으시죠."
장도영이 쇼파에, 장면하고는 대각선으로
앉았다.
"바쁘실 텐데 들어오라고 해서
미안하오."
장면은 이렇게 운을 떼고 난 뒤,
"장 장군을 들어오라 한 것은 다름이
아니고 박정희라고 하는 2군 부사령관이
쿠데타를 추진하고 있다는데 장 장군은
알고 계시오?"
장도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해서 이 정보가 총리의 귀에까지
들어갔지?)
그는 가슴이 방망이질을 했으나 시침을
"각하, 쿠데타라니요? 그 사람은
쿠데타를 할 만한 인물이 못 됩니다."
"쿠데타를 할 만한 인물이 못 된다구요?"
"네, 각하! 그 사람 지금까지 쭈욱 제
밑에 있었기 때문에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절대로 쿠데타를 할 만한 인물이
못 됩니다."
장도영은 어째서 이렇개 박정희를
두둔하고 나섰던 것일까? 자기를 지도자로
업고 쿠데타를 할 것이라는 박정희의 말에
행여나 대권을 잡을 호기라고 내심
쿠데타를 지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요?"
장면은 도시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지
곤혹스러운 모양이었다.
참모총장직에 있는 한 쿠데타에 대한
염려는 놓으셔도 됩니다."
장도영은 다시 한번 자신있게 강조하는
것이었다.
"하여간에 장 장군, 박정희라는 사라미
쿠데타를 추진하고 있다는 믿을 만한
정보가 있으니 조사해서 나한테 보고를
해주시오."
장면은 조사할 것을 지시했다.
"네, 각하."
장도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일분 일초라도 빨리 이 자리에서 떠나고
싶은 심정이 굴뚝 같은 모양이었다.
"그럼, 각하, 물러가겠습니다."
장도영은 거수경례를 붙이고 총리실에서
물러났다. 그는 문을 열기 직전 장면과
눈총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초리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군사 쿠데타 어쩌고 하며 제보를 한
놈들이 너희놈들인 모양이구나. 괘씸한
놈들!)
육군본부로 돌아온 장도영은 즉시 대구에
있는 박정희한테 전화를 걸었다.
"여보, 박 장군. 좀 조심들 해야겠소. 박
장군이 중심이 돼서 쿠데타를 추진하고
있다는 온갖 소문이 다 돌고 있으니
아무래도 조심해야 할 것 같소."
장도영의 전화를 받은 박정희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장 장군이 나를 감싸주고
있는 이상엔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갈 리가
없다. 이제는 오히려 마음놓고 일을 추진할
수가 있다.
장면의 부름을 받은 검찰총장
이태희(李太熙)가 총리실에 나타난 것은
장도영이 물러간 직후였다.
평안남도 강동(江東) 태생인 이태희는
이때 나이는 꽉 찬 오십이었다. 남에게
주는 인상이 꼭 검찰총장에 알맞는 얼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장면이 물었다.
"이 총장, 군사 쿠데타설이 분분한데 이
총장께서도 소문 들은 일이 있으시오?"
"예, 그런 풍설은 벌써부터 듣고
있습니다. 3,4월 위기설이 나돌고 있을 때
벌써 퍼져 있던 풍설입니다."
이태희는 <뭐 그까짓 풍설 같은 것을
가지고 마음을 쓰느냐?> 하는 그런
"아니 풍설이 아니고 이번엔 구체적인
제보가 있어서요. 2군 부사령관인가 하는
박정희라는 사람이 주동이 되어 있는
모양이오."
장면의 입에서 <박정희>라는 이름까지
구체적으로 거론되자 이태희는 긴장했다.
"2군 부사령관이라구요?"
"그렇소."
"그렇다면 장도영 장군한테 명령하실 일
아닙니까? 군부의 장성에 대해선 검찰에서
손을 댈 수는 없으니 말씀입니다."
"아니, 장 장군한테는 벌써 지시를 했소.
박정희라는 사람에 대해서 조사를 해서
보고하라고. 검찰에선 김덕승인가 하는
사람에 대해서 조사를 해주었으면 좋겠소."
"김덕승이라니요? 처음 듣는
"김덕승이란 사람에 대해서는 여기 앉아
있는 오 사장이 익히 잘 알고 있소. 그러니
오 사장한테 듣고 그 사람에 대한 조사를
진행시켜 주시오."
"알겠습니다."
오인환은 김덕승이란 인물이 어떤
인물이며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는
박정희와는 어떤 관계인가를 이태희에게
다시 한번 설명을 해주어야만 했다.
다음날인 5월 7일은 일요일이었다.
이날 대검찰청 총장실에는
일요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침 일찍부터
세 사람이 모여서 구수회의를 하고 있었다.
대검찰청 총장 이태희, 부장검사
김홍수(金洪洙). 서울시 경찰국 부국장
김덕호(金德鎬) 등이었다. 어제
쿠데타에 관한 정보를 어떻게 수사 처리할
것인가를 논의하고자 두 사람을 불러들여
연 구수회의였다.
한데, 대검찰 총장인 이태희는 어제
오인환한테 들은 얘기를 두 사람한테
되새겨 들려주고 자기 견해를 피력하는
것이었다.
"내 생각엔 말이외다. 암만 생각해 봐도
이번 정보는 군사 쿠데타를 빙자한 사기
사건 같은 느낌이 든단 말이오. 어제
총리실에서 만난 그 정보 제공자인
오인환이란 사람도 말합니다만, 적어도
엄청난 국가예산을 쓰고 있는 군의 장성이
단돈 5백만 환을 마련할 길이 없어서 그
김덕승인가 김용천인가 하는 사람한테
5백만 환의 군자금을 조달해 달라고
기가 막힐 노릇이 또 한 번 벌어진
것이다. 생각해 보라,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 이 자리는 총리의 명을 받아
군사 쿠데타 정보를 어떤 방법으로
수사해서 처리할 것이냐를 논의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가 아니었던가? 그런 자리였고
보면 이태희는 마땅히 심각하게 이 문제와
씨름을 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군사 쿠데타에
대한 정보를 흐려놓는 발언을 했느냔
말이다. 아마도 이태희는 장도영이 군사
쿠데타의 영도자로 추대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미지근하게 수사를 해주기 바라는
마음에서 이런 발언을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태희와 장도영은
사돈(査頓)간이라는 말이 있었으니 말이다.
철두철미한 법률가였다. 법률가가 인정에
끌려서 일을 그릇되게 처리하려 들었을
리는 없다. 하여간에 결과론이지만
이태희가 좀더 적극성을 띠고 수사에
임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있다.
서울시 경찰국 부국장 김덕호가 묘안을
내놓았다.
"저쪽에다 프락치를 넣어 보면
어떻겠습니까?"
"프락치라니?"
"이쪽 사람을 저쪽 사람한테
접근시키도록 한단 말씀입니다."
김덕호가 내놓은 묘안에 따라 군사
쿠데타 그룹에 프락치를 넣오 보기로 이날
세 사람 사이에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프락치로서는 김덕호의 친구인
군사 쿠데타에 대한 정보는 또 다른
루트를 통해서 장면에게 제공되었다. 이
정보는 송우범(宋宇範)이 조폐공사 사장
선우종원(鮮宇宗原)을 통해 장면에게
제공되었다.
송우범은 경찰출신으로서 제3대 국회의원
선거때 자유당 공천을 받아 충청남도
대덕에서 입후보해서 당선됐던 인물이다.
그는 제3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자
국방분과위원으로서 활동했기 때문에 군부
사정에 꽤 밝은 편이었다.
그가 어떤 루트를 통해서 박정희가
주동이 돼서 계획, 추진되고 있는 쿠데타에
관한 정보를 입수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여간에 그는 꽤 소상하게 쿠데타 계획에
관한 정보를 입수했었다. 주동자가
것, 여기에 과도정부 때 예편당한 해병소장
김동하(金東河)도 가담돼 있다는 것,
그리고 영관급 장교들의 이름과 육군
참모총장 장도영도 동조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해서 선우종원에게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송우범은 이 정보를 선우종원에게
제공할 때 그냥 구도로 전하거나 메모지에
간단하게 적어서 제공해 주었던 것이
아니었다. 친절하게도 쿠데타 주동자들의
인맥을 도표로 그려서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평양(平壤) 태생인 선우종원은 1942년에
경성제국대학 법과를 졸업, 다음해인
1943년에는 고등문관(高等文官:지금의
고등고시) 시험 사법과에 합격, 해방과
함께 사상검사로서 이름을 날렸던
장면이 대통령중심제하에서 국무총리에
임명되었던 때로 이때 선우종원은 장면의
비서실장으로 발탁되었다. 그러므로
선우종원은 장면의 측근 중의 측근이라 할
수 있었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더니, 장도영이 그자가 쿠데타에
동조를 해?"
선우종원의 놀라움은 컸다. 분노도 컸다.
그는 송우범이 제공해 준 쿠데타
주동자들에 관한 인맥도표를 장면한테
가지고 갔다.
"장도영이란 자를 즉시 파면하고 군
수사기관으로 하여금 쿠데타 계획을
추진하고 있는 자들을 모조리 체포해서
엄중 문초하도록 하십시오."
"장도영 장군이 쿠데타에 동조를 하고
있어?"
장면은 이때에도 도무지 믿기 어렵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이미 오인환을 통해서
박정희가 장도영을 업고 쿠데타 계획을
추진중에 있다는 제보를 받지 않았던가?
장도영이 쿠데타에 동조를 하고 있다는
것은 쿠데타 그룹에 기울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장면은 송우범이 제공해 준
정보 중에서도 장도영에게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5. 장도영, 박정희를 감싸고 돌다
국방장관 현석호(玄錫虎), 제3대 국회
때는 자유당 공천을 받아 고향인 경상북도
예천(禮川)에서 당선됐었고 제4대 때는
민주당으로 변신, 민주당 공천을 받아 역시
예천에서 입후보했으나 낙선했었다. 그가
다시 국회에 들어온 것은 4.19 뒤
과도정권에서 치른 7.29 총선 때였다.
그러니까 그는 재선의원이었다.
일본의 경우 같으면 2선 정도로 내각에
입각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못한다. 한국의
경우에도 내각책임제로 정권이 바뀐
이상에는 다선(多選) 위주로 조각을 해야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뒤에 장면 정권에 대한 얘기를 소개할 때
구체적으로 언급하겠지만, 장면이 다선
위주로 조각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으면서도 재선인 현석호를 처음엔
국방장관으로 입각시켰다가 2개월 만에
내무장관으로, 다시 또 2개월 뒤에는
국방장관으로, 마치 데리고 들어온 자식
끼고 돌듯이 계속해서 내각에 머물게 했던
것은 현석호란 한 정치인이 너무나
성실했기 때문이었다.
1961년 5월 8일 월요일. 이날 육군
참모총장인 장도영이 아침 일찍
국방장관실로 현석호를 찾아왔다. 적어도
육군의 참모총장이 국방장관을 찾아갈 일이
있으면 사전 양해를 얻는 것이 예의요,
없이 불쑥 찾아왔던 것이다. 현석호가
의아했을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무슨 일로 찾아왔소?"
현석호는 예고 없이 찾아온 이 사나이의
행동이 꽤나 못마땅한 모양인지 묻는
목소리가 좀 퉁명스러웠다.
"예. 장관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장도영도 아차 하고 예고를 하지 않은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던가? 잠시
머뭇거렸다.
"앉으시오."
현석호는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는
장도영에게 눈으로 쇼파를 가리키며 앉기를
권하자 장도영은 앉았다. 군인답게 자세가
흐트러짐 없이 꼿꼿이 바로하고 앉았다.
몇 번이나 스스로에게 다짐을 주었다.
이틀 전, 장면에게 불려가 박정희에 대한
조사를 명령받은 장도영은 육군본부로
돌아오자 전화로 박저희에게 조심할 것을
귀띔해 주고 나서 이 문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박정희의 쿠데타가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보다는 불안한 마음만 일었다.
(어떻게 기어오른 참모총장 자리인데?
결코 이 자리에서 밀려날 수는 없다.
어떻게 해서든 이 자리만은 차고 앉아
있어야 한다. 그런데 박정희 쿠데타 계획이
누설됐으니?)
장도영은 생각하면 할수록 자꾸만
불안해졌다.
그렇듯 뒤가 켕기고 불안했으면 육군
않았는가 말이다. 인정에 끌려서 박정희를
잡아넣으라 못하겠거든 전격적으로
예편조치를 취하기라도 했으면 될 게
아니겠는가. 그런 다음 영관급 쿠데타
주동자들을 일망타진해 버렸으면 그것으로
족했을 게 아니겠느냔 말이다.
한데, 장도영 이 사나이는 그 어떤
조치를 취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오로지
어떻게 해야만 육군 참모총장직을 고수할
수 있을까? 그것만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는 월요일이 되자 불쑥 현석호를
찾아갔던 것이다.
"무슨 일로 찾아왔소?"
현석호가 다시 한번 물었다.
마음 속으로 멋진 연기를 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다짐을 주고 있던 장도영은
표정을 지었다.
"장관님, 군 일부에서 쿠데타 모의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는데
장관님께서도 아시고 계십니까?"
"그렇소, 들어서 알고 있소."
물론 현석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소문은
소문대로 들어서 알고 있었고 장면한테는
구체적으로 들었기 때문에 모의를 하고
있는 자가 어떤 자들이라는 것까지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 쿠데타 계획에는 장
총장 당신도 가담돼 있다는 정보던데?>
하고 덧붙이려다가 그 말을 목구멍에서
눌러 버리고 말았다. 도대체 이 자가 무슨
수작을 하려는 것인지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얼핏 일었기 때문이었다.
현석호는 장도영의 가슴 속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려는 듯 그를 날카롭게
쏘아보며 반문했다.
"장관님, 군부의 군사 쿠데타 음모에는
저도 거기에 가담되어 있다고 모략하는
자들이 있기에 그렇지 않다는 것을 미리
말씀드려 두고자 해서 찾아 뵈었습니다."
처량한 표정을 짓고 있던 장도영의
얼굴엔 어느 사이엔가 슬픈 그림자가
자욱히 어려 있었다.
(이 자도 그 소문은 들은 모양이군.
그래서 변명을 해둬야 되겠다 그거지?)
현석호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장도영의 감정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장도영이 말을 이었다.
"장관님, 제가 누구와 손을 자고 그런
무근입니다. 군부에는 전혀 그런 움직임이
없을 뿐더러 이 장도영이나 박정희
부사령관도 그런 일을 꾸밀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 아시고 믿어 주십시오."
"믿어 달라고?"
"예, 장관님."
장도영은 더욱 슬픈 빛을 띠며 말을
계속했다.
"알고 보면 모측에서 참모총장인 저와
2군 부사령관인 박정희 장군을 모해하려는
계획적인 조작입니다. 장관님은 절대로
현혹되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읍소(泣訴)란 아마도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 줄로 안다. 장도영은 눈물을
뚝뚝 흘리지는 않았지만 울음을 터뜨리려는
순간의 표정을 짓고 애원어린 목소리로
선질(善質)의 인간은 결코 남을 의심할
줄을 모른다. 남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고
의심하는 사람은 그 자신의 어느
구석인가에 조금이라도 악질(惡質)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현석호는
철저하다고 할 정도로 선질의 인간이었다.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에 장도영의 읍소를
듣고 있는 사이에 어느덧 그의 마음에는
측은해하는 동정심이 일고 있었던 것이다.
(정치 장군이라는 세평을 받고 있는
인물인 만큼 모해하려 드는 자도 있겠지.)
현석호는 이렇게 장도영의 읍소에
동의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장도영을 육군 참모총장으로 이끈
것이 바로 현석호 자신이었다. 자기가
밀어서 육군 참모총장에 앉혀 놓은 사람을
흔들어대는 격이나 다를 것이 없다.
현석호는 그래서 장도영의 말을 믿기로
했던 것이다.
(모측이란 누구를 가리켜 한 말인가?)
현석호의 마음 한구석에 털끝만한 악질이
깃들여져 있었더라도 그는 이런 질문을
던졌을지도 모른다. 그랬더라면 장도영의
연기는 폭로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석호는 모해하고 있는 모측이
누굴 가리켜 한 말이냐고 묻지를 않았던
것이다.
거기에 또 현석호는 군사 쿠데타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기에 장도영의 읍소를 진정한
것으로 받아들여서 가볍게 넘겨버리고
말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돌았?? 그의
손바닥에선 조금씩 선혈이 배어 나오기
움직이려면 미군의 동의가 필요하고, 설혹
또 동의 없이 병력을 움직인다 해도
작전권을 쥐고 있는 미군 수뇌부가
반란행위를 그냥 내버려둘 리가 있겠는가?)
이래서 현석호는 쿠데타는 불가능하다고
단정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장도영이 현석호를 만나고 있는 그 시각.
"뭐야? 박정희 장군이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어?"
서울 육군 제15범죄수사대 대장 육군
중령 방자명(方滋明)은 범정과장(犯情課長)
육군 대위 오기수(吳箕洙)로부터 박정희가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다는 정보를 보고받자
놀라움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오기수는 구두로 정보를 보고한 것만이
자들의 이름을 도표로 그려가지고 와서
방자명 앞에 내밀기까지 했다.
그 도표에는 별 세 개가 그려져 있고 그
밑에 별 두 개를 그린 다음 박정희의 이름
석 자가 분명히 쓰여져 있었다. 별 세 개
밑에는 이름이 적혀져 있지 않고
동그라미만 세 개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박정희 이름 밑에는 김종필,
김형욱(金炯旭), 오치성(吳致成) 등의
이름이 적혀져 있었다.
(소문대로가 아냐?)
방자명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소문대로란
무슨 뜻인가? 그는 하극상(下剋上) 사건이
일어난 뒤, 그들이 쿠데타를 음모하고
있다는 것을 소문으로 듣고 있었다.
하극상 사건을 일으켰던 김종필, 김형욱
동기생들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런 소문에
대해서는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그들이 동기생이라고 해서만이 아니었다.
군 내부의 사상적인 문제라든가 쿠데타
같은 반란행위는 방첩대 소관이지 파렴치한
범죄를 다루는 범죄수사대의 소관은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별 셋이 누굴까?)
방자명은 박정희의 이름 위에 그려져
있는 별 세 개의 주인공은 누굴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당시 별 세 개를 달고 있는 현역 장군은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육군 참모총장 장도영, 제1군
사령관 이한림(李翰林), 제2군 사령관
최경록(崔景錄), 육군 참모차장
김종오(金鐘五) 등이 별 세 개를 달고 있는
장군들이었다.
(박정희 장군이 이 다섯 장군 중의 한
사람을 업고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는
모양인데, 과연 이 다섯 장군 가운데
박정희가 업고 있는 장군은 누구일까?
최경록?)
방자명의 마음에 제일 먼저 짚인 장군은
최경록이었다. 다른 어느 장군보다도
최경록이라면 쿠데타를 음모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고 무슨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심증으로 그런 느낌이
들었을 뿐이었다.
"대장님, 이 정보는 정확한 정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일단 위에 보고해야 옳지
않습니까?"
"옳은 말이오. 우리 소관은 아니지만
일단 입수된 정보니 위에 보고해 두도록
하세."
방자명은 즉시 오기수가 제출한 보고서를
가지고 헌병감 육군 준장 조흥만(曺興萬)을
찾아가 보고했다. 그런 다음 그는 이날 밤
이 보고서를 가지고 참모총장 공관으로
장도영을 찾아갔다. 불행하게도 장도영은
부재중이었다. 방자명은 총장 보좌관 육군
소령 김동수(金東洙)에게 <총장 각하께 꼭
보여드려라> 하고는 아쉬운 마음을 안고
물러나올 수밖에 없었다.
방자명은 평안북도 자성(慈成) 출신으로
이때 나이 서른일곱 살, 별 세 개를 단
장도영보다는 한 살 아래였다. 그는 명문인
경기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징병 1기로 끌려나가 일본군에 입대했던 군
경력의 소유자였다. 해방으로 귀국한 그가
만일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했더라면 아마
이때쯤에는 아무리 진급이 늦었더라도 별
두 개는 달고 있었을 것이었다.
그도 평안북도 태생이라 이를테면
장도영의 심복의 한 사람이었다. 그런
유대관계로 해서 그는 오기수가 올린
정보보고서를 가지고 일부러 총장 공관으로
찾아갔던 것이다.
이틀 후였던가? 아니면 사흘 후쯤의
일이다. 그러니까 5월 10일이나 11일쯤의
일이다. 이때 방자명은 다른 문제로
장도영을 만났다. 이 기회를 이용해서
방자명이 물었다.
말씀입니다만 박 장군이 업고 있는 별 셋이
누굽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장도영은 단 한마디로
잘랐다.
"그런 보고는 정보 가치가 없어.
쓸데없는 소리야."
방자명이 올린 보고가 정보 가치가
없다는데 그도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어쩌면 그도 오기수가 입수한 정보가
정확한 정보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더 이상 캐물으려 들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장도영이 육군본부로 돌아오자, 부관이
검찰총장 이태희가 아침부터 찾고 있다고
전해 주는 것이었다. 장도영은 미처 자리에
앉을 겨를도 없이 부리나케 방을 뛰쳐
나갔다. 대검찰청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장도영은 검찰총장실로 들어서면서
인사를 겸해서 그렇게 말했다.
사돈관계 같이 어려운 사이도 없다.
그런데도 장도영과 이태희는 호형호제하며
지내고 있었다. 사회적으로 출세를 했다고
자부하고 있는 두 사람은 오히려 그렇게
지내는 것이 속편했을는지도 모른다.
"무슨 일로 찾으셨습니까?"
장도형은 거침없이 쇼파에 앉으면서
물었다.
"총리께서 나한테 특명을 내리셨소. 군사
쿠데타에 관한 정보를 수사하라고."
내각책임제하에서는 통치권자인
국무총리의 특명은 검찰에서도 군까지도
수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법률전문가가
하여간에 이태희는 장도영에게 총리의
특명사항을 털어놨다.
그 말을 듣자, 장도영이 펄쩍 뛰었다.
"형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군의 최고 책임자 자리에 올랐는데 저를
봐서라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제가
명예스럽게 물러날 수 있도록
도와주셔야죠."
명예스럽게 물러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은 군에 대한 검찰의 수사를 중지해
달라는 뜻이었다.
(뭔가 있기는 있는 모양이구나.)
이태희는 속으로 생각하며 반문했다.
"그럼 총리의 특명을 묵살하란 말이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제가 이미 지시를
내렸습니다. 조만간 조사가 끝나면 총리께
과히 염려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그럼, 그 문제는 아우님한테 맡길 테니,
총리의 근심을 덜어드리기 위해서라도
조사를 서둘도록 하시오."
장도영하고의 인간관계에 금이 가는 일은
하고 싶지 않은 것이 이태희의 솔직한
심경이었다.
대검찰청에서 물러나오는 길로 장도영은
육군본부로 돌아가지 않고, 미 8군
사령부로 사령관 매그루더를 찾아갔다. 이
무렵에는 매그루더 역시 박정희의 쿠데타
음모에 관한 정보를 입수해 놓고 있을
때였다.
물론 이 음모에는 장도영도 동조하고
있다는 정보 또한 입수해 놓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가 이 정보를 한국군 육군
있었던 것은 장본인인 장도영이 쿠데타에
동조하고 있다는 정보 때문이었다.
그래서 매그루더로서는 이 정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지 며칠을 두고 고뇌하고
있었는데 장도영이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온 것이다.
"좀 미리 귀띔해 둘 일이 있기에
찾아뵈었습니다."
"귀띔해 둘 일이라니요?"
"지금 한국 사회에는 군 내부에서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다는 그럴싸한 루머가
끈질기게 나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줍잖게도 본인이 그 쿠데타 음모에
동조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너무나 기가 막히고 억울해서 장군께 호소
겸 귀띔해 두는 것이 옳겠다는 생각이
그 말을 들은 매그루더는 장도영의
진의가 어떤 것인지 파악하기 어렵다는
표정이었다. 그것을 장도영도 눈치챘는가?
"장군, 절대로 그런 뜬소문에 현혹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쿠데타라니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한국군에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 장군께서는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장도영이 힘주어 말하는 것이었다.
매그루더는 일체 침묵을 지키고 말았다.
쿠데타에 동조하고 있다는 장본인이 일부러
찾아과서 해명을 하는데야 뭐라 의사표시를
하겠는가? 그는 다만 이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한국 사회도 이제 안정을 되찾은 것
같소. 한국의 안전보장을 책임지고 있는
바랄 뿐이오."
김덕승이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온 것은
5월 10일이었다. 이날 전화 연락을 받은
오인환은 홍경한과 남산동에 있는 김덕승의
집을 방문했다.
"홍 선생,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 혼자
김을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김덕승의 집 앞에서 오인환은 홍경한을
밖에 세워두고 혼자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낯선 사람을 동반할 것 같으면 김덕승이
경계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부탁한 돈은 마련했소?"
김덕승은 오인환과 마주앉아 돈 문제부터
"아, 이거 정말 미안합니다. 어떻게
마련해 보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녔습니다만
아직......."
오인환은 무척 송구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소리오. 오늘이 며칠인데
아직껏 돈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거요?"
김덕승은 얼굴빛이 싸악 변하며
채권자처럼 노기를 띠고 나무라는
것이었다.
"박 장군이 12일쯤 서울로 올라오겠다
했단 말이오, 돈을 가지러!"
그렇게 덧붙이는 김덕승의 얼굴은
험악하게 일그러지기조차 했다. 누가
말하기를 얼굴 모습은 직업에 따라
변한다던가. 관동군 첩자였던 김덕승은
그랬는지 첩자 때의 얼굴 모습이 별반
변해져 있지 않았다. 그의 일그러진 얼굴
모습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악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오인환은 못내 송구스럽다는 표정으로
일그러진 김덕승의 험상궂은 얼굴을 지그시
살펴보며 말했다.
"실은 그래서 여러 가지로 생각 끝에 제
친구를 데려왔습니다. 제 친구가 그런
뜻있는 일이라면 자기가 돈을 대겠다고
해서요."
"친구가?"
"예."
"어떤 사이인 친구요?"
"죽마고웁니다."
"믿을 만한 사람이오?"
아닙니까? 믿지 못할 친구 같으면 아무리
친구라 한들 이런 중대 문제를 까놓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제야 김덕승의 험악한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러나 한가닥 경계하는
마음만은 풀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오인환은 밖에 세워둔 홍경한을 불렀다.
수인사가 끝나자 홍경한은 자못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친구를 통해서 김 선생에 대한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선생이 장군들과
함께 대한민국을 공사할 계획을 추진중에
있다는 말을 듣고 저는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릅니다. 저도 미력하나마 이 친구와 함께
김 선생을 돕고자 단단히 작심했습니다."
홍경한이 김덕승을 한껏 치켜세우자
허허...... 하고 오만하게 웃음까지
터뜨리는 것이었다.
홍경한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김 선생님, 이런 대사는 대사를
추진하는 사람이야 응당 결사적이겠지만
뒤에서 자금을 대는 사람도 결사적인
각오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니다."
"그야 물론이지요. 이르다
뿐이겠습니까?"
"그러자면 확신을 가져야 하는데 확신을
갖자면 좀더 구체적인 내용을 알아야
확신을 갖든 말든 할 수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좋습니다. 성생이 확신을 갖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물어보시오. 내가
알고 있는 바는 모조리 털어놓겠소."
꼬치꼬치 묻는 홍경한의 질문에 막힘 없이
대답해 주었다. 김덕승은 달변이었다.
쿠데타 음모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홍경한은 단정했다.
"선생님께서는 쿠데타의 자금 조달책이신
모양인데 지금 말씀을 듣고 보니 더욱
존경하는 마음이 깊어집니다. 그런 위험한
일이란 어지간한 용기 가지고는 어림도
없는 일이죠."
그는 감격한 듯이 한껏 김덕승을
치켜세웠다.
김덕승은 자못 의기양양해 졌다.
"이제 두고 보십시오. 이 쿠데타는
기필코 성사시키고야 말 것입니다. 그땐
선생한테도 상당한 보상이 있을 줄로
압니다."
같은 말투를 거침없이 내뱉았다.
홍경한은 더욱 감격했다는 듯이 머리를
조아렸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 자금을......."
김덕승은 돈을 가져왔으면 어서
내놓으라고 독촉을 했다.
"사실은 좀더 확실한 내용을 알고 나서
제공해 드리려고 오늘은 그냥 왔습니다."
"그래요? 그럼 언제쯤이나?"
"모레 해드리겠습니다. 이런 일이란
비밀을 요하는 일인만큼 모레 아침 7시쯤
요 앞 남산길에서 만납시다. 그래야 남의
눈도 피할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홍경한은 5월 13일 오전 7시 남산길에서
다시 만날 것을 굳게 약속하고 오인환과
두 사람이 물러가자, 김덕승은 즉시
대구로 장거리 전화를 걸었다. 물론
박정희한테였다.
"쿠데타 음모가 추진되고 있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시경으로 돌아오자 홍경한은 즉시
부국장실로 가서 김덕호에게 김덕승을 만난
사실을 보고했다. 홍경한의 보고를 받은
김덕호는 대검찰청으로 달려갔다. 이태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쿠데타 음모가 추진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네, 총장님."
이태희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입을
한일자로 꽉 다무는 것이었다.
관련되어 있다고 보고 있소?"
이태희는 아무래도 장도영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장 장군이 관련됐다 안 됐다 제가 이
자리에서 뭐라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그 김덕승인가 김용천인가 하는 자가
장도영 장군이 쿠데타의 영도자라는 것을
누차 강조하더랍니다."
김덕호는 이태희의 반문을 이런 식으로
회피했다.
이태희는 이번에는 자기 나름으로 추리를
해보는 것이었다.
"쿠데타를 음모하고 있는 무리들이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물귀신작전을 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장도영 장군이 장면
정권 요인들하고 줄이 연결되어 있다는
"그런 점도 전적으로 배제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한 급이라도 직급이 높은 사람한테는
더없는 외경심을 품고 있는 것이 공권력
기관 사람들이다. 김덕호는 이태희의
비위를 거슬르지 않는 범위 내에서
맞장구를 쳐 주었다.
"총장님, 김덕승인가 하는 자가 요구한
군자금을 모레 아침 7시에 만나서
건네주겠다고 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김덕승인가 하는 놈을 아예 그때 덮쳐
버릴까 합니다만?"
"김흥수 부장검사와 상의해서 사건을
처리하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경찰이 검찰의 하부기관인 것만은 어김이
있으니만큼 쿠데타 음모에 대한 수사를
경찰한테만 맡겨 놓기엔 이태희는 조금
마음이 놓이지 않는 것 같았다.
쿠데타를 주도하고 있는 제2군 부사령관
육군 소장 박정희가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온 것은 앞에서 이미 소개한 바와 같이
5월 12일이었다. 그는 신당동 자택으로
들어서자 제일 먼저 김덕승에게 전화를
걸어 상경했음을 알려주었다.
한데, 이런 경우를 두고
천려일실이라고나 할까? 쿠데타를 저지가
아니라 아예 박살내버릴 기회가 또 한번
주어졌었다.
이날 서울로 올라온 박정희는 오후
2시경, 506방첩대장 이희영과
두 사람은 각기 별도로 박정희의 신당동
댁을 방문했다.
그들이 응접실로 드러서자 5,6명의
장교들이 먼저 와서 박정희와 자리를
같이하고 있었다. 예비역 해군 소장
김동하(金東河)도 자리를 같이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들어서자 박정희는 김동하를
소개했다. 그리고는 진행중이었던 얘기를
계속하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버마의 네윈식 쿠데타라야 합니다."
힐끔 두 사람의 표정을 살피는 것이었다.
(버마의 네윈식 쿠데타?)
506방첩대장 이희영은 벌써 두번째 듣는
얘기였다.
박정희 등의 담론의 내용으로 보아
이들이 쿠데타를 논의하고 있는 것만은
동지도 아니고 도리어 쿠데타를 막아야 할
위치에 있는 이희영이나 방자명을 불러놓고
쿠데타에 대한 담론을 들려준 속셈은
무엇이었을까? 쿠데타를 막아야 할 위치에
있는 이희영이나 방자명의 반응이 어떤
것인지 떠보자 해서였을까? 아니면, 나는
너희들을 동지로 믿고 있다. 그러니
우리들의 거사를 눈감아라 하는
뜻에서였을까? 어쨌거나 박정희를 비롯해서
김동하 등 그 자리에 모여 앉아 있는
사람들은 쿠데타에 대한 구체적 의논을
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희영이나 방자명은 아예
처음부터 쿠데타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박살내 버릴 조치를 취해야 옳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사람이 쿠데타 그룹을 박살내 버리고자
기도했다 하더라도 장도영이 그들을
감싸주고 있는 이상엔 그 어떤 손도 쓰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자꾸 아쉬움이
남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어찌됐거나 이쯤되면 5.16 쿠데타 그룹은
쿠데타를 공개적으로 진행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 우리는 쿠데타를 진행중에
있다. 어디 너희놈들 우리 쿠데타를 막아
보려거든 해봐!> 박정희는 이렇게
공언하면서 쿠데타를 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5월 13일 아침, 날이 훤히 밝을 무렵
5명을 지금의 남산에 있는 케이블카
발착지점 밑에 매복시켜 놓았다. 김덕승과
만나기로 한 7시 훨씬 전이었다.
그는 약속 장소에 이르자 마치 아침
공기를 마시러 나온 산책객인 양 팔다리
운동을 하는가 하면 이리저리 서성거리며
시가지를 내려다보기도 하는 등 시간을
재촉했다.
정각 7시가 되자, 검은 지프 한 대가
나타났다. 그 지프는 물론 김덕승이
서성거리고 있는 곁에서 멈추었다. 차가
서자 내린 사람은 홍경한이었다. 그는
돈뭉치를 싼 듯한 꾸러미를 들고 있었다.
홍경한이 그의 앞으로 다가서자 김덕승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그는 홍경한의
오른손을 힘껏 잡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홍경한이 들고 있는
꾸러미를 받으려는 듯 왼손을 내밀었다.
그때였다. 그의 왼손에 철거덕 하고 수갑이
채워졌다. 과연 민완형사들이었다. 어느
사이에 기척도 없이 두 사람한테
다가섰는지 홍경한조차도 눈치채지 못했을
지경이었다.
꾸러미를 들고 있는 홍경한의 오른손에도
철거덕 하고 수갑이 채워졌다. 수갑이
채워지자, 김덕승은 무척이나 당황하는
것이었다.
"왜, 왜 이러는 거요? 다 당신들은
도대체 누, 누구요?"
"잔말 말어, 가 보면 알아."
한 형사가 김덕승의 어깨를 툭 치며 입을
다물라고 소리쳤다. 홍경한도 조금 연극을
"죄목이 뭐요, 죄목이? 우리가 뭘
잘못했기에 영장도 없이 수갑을 채우는
거요?"
형사들한테 대드는 거이었다.
"김덕승을 체포했다고 합니다."
김덕승을 체포했다는 보고는 서울시
경찰국장 이귀영(李貴英)을 통해서 즉시
보고되었다. 김덕승 체포 보고를 받자
그제야 장면은 장도영에게 하명했던 일이
떠올랐던 모양이다.
그는 즉시 장도영을 다시 또 불러들였다.
"내가 장 장군한테 지시한 일
어찌되었소? 며칠이 지났는데도
감감소식이기만 하니?"
"죄송합니다. 각하, 군 수사기관에서
장도영은 얼굴 한번 붉히지 않고 잘도
거짓말을 주워 삼켰다.
평소 감정의 변화를 잘 나타내지 않는
장면도 이때만은 버럭 화를 냈다.
"죄송하긴 뭐가 죄송하다는 거요?
경찰에서 김덕승인가 하는 사람을 체포까지
했다는데? 그래, 쿠데타 문제에 대해선
참모총장이 먼저 알아서 나한테 보고해야
할 성질의 사건인데 거꾸로 내가
참모총장한테 지시를 하고 있으니 이래도
되는 거요?"
무안을 느꼈는가? 그제야 장도영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내가 박정흰가 하는 사람에 대해서
조사해서 보고하라고 한 지가 언제요? 벌써
열흘이 다 됐잖소? 그런데도 아직도 조사를
장면은 <내가 어떻게 이런 자를 믿고
참모총장에 기용했던가?> 하고 후회하는
빛이 역력했다.
장도영이 도 변명을 늘어놓았다.
"각하, 사실은 군 수사기관에서 박정희
장군에 대한 조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혐의점도 발견할 수 없다는
보고였습니다."
"아무런 혐의점도 발견할 수 없다는
보고였다고?"
"네, 각하."
"그렇다면 어째서 보고를 하지 않은
거요? 가타부타 뭐라 보고가 있어야 했을
거 아니오?"
"아닙니다, 각하. 아무런 혐의점도
없는데 어째서 박 장군이 쿠데타를
있는지 재조사하라는 지시를 내려놓고 있던
참입니다."
거짓말도 이쯤 술술 예사롭게 잘하게
되면 가히 국제 챔피언감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장도영 그는 국무총리 장면의
명령를 수행하려 하기는커녕, 어떻게 해야
자신의 동조설을 해소할 수 있을까 하는
데만 급급해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도
모르는 장면이 다시 또 장도영을 불러
보고가 없다고 호통만을 치고 있었으니
이런 경우 장면을 동정해야 할지 힐난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가 어렵게 된다.
"장 장군이 군무에 바쁘리라는 것은
짐작이 가지만 내가 지시한 것도 서둘러
조사해서 보고하도록 하시오."
"예, 각하."
해야 한시바삐 빠져나갈 수 있을까 그것만
궁리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는 장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거수경례를 붙였다.
"물러가겠습니다. 각하."
한마디를 던지고는 휑하니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그러한 장도영의 거동을 살펴보고 있던
장면은 입맛이 쓴 듯 밖으로 시선을 던지는
것이었다.
김덕승은 체포되자 곧 서울시 경찰국
뒤에 있는 태평(太平) 호텔로
호송되어졌다. 말이 호텔이지 여관 크기의
5.16 군사 쿠데타로 그가 석방된 것은
5월 17일이었다.
"취조관들이 나를 홀랑 발가벗기고
구타를 했는가 하면 고춧가루 고문에다가
8시간 동안에 물을 세 초롱이나 먹이고
고문을 했다."
석방되자 그는 허풍을 떨었다.
여기에 대해서 수사를 지휘했던 검찰관
김흥수의 증언은 사뭇 천양지차였다.
필자가 1967년 5월 TBC(동양방송)에
<5.16혁명비화>라는 타이틀로 다큐멘터리
드라마를 집필하고 있을 때 김흥수는
필자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좀 만나자는
것이었다. 필자가 김흥수를 만난 것은 종로
1가에 있는 조그마한 다방에서였다. 그는
김덕승이 고문을 당했다고 떠벌이고 있는
"고문을 했다구요? 그런 터무니없는
수작을 함부로 지껄여도 되는 겁니까? 그
자를 고문했다면 그 자를 체포해서 취조를
한 나나, 수사관들이 무사했을
성싶습니까?"
김흥수는 이렇게 전제하고 자못
흥분하면서 다음 말을 이었다.
"우리는 고문은커녕 뺨 한 대 때린 일이
없습니다. 최대한으로 인간적인 대접을
해줘 가면서 취조를 했단 말입니다."
고문을 당했다고 주장하는자와 뺨 한 대
때린 일이 없다고 펄쩍 뛰는 이 양자 중
어느 쪽 말을 믿어야 할까?
물론 필자는 수사를 지휘했던 부장검사
김흥수의 주장을 믿기로 했다. 그가
부장검사를 역임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이
쿠데타가 성공한 뒤에 김흥수나 취조관들이
절대로 무사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어째서 김덕승은 엉터리 수작을
떠벌리며 다녔던 것일까? 이 대목에 대해서
필자는 나름대로의 추리를 해서 방송을
했었다. <군사 쿠데타는 성공을 했다.
그런데 김덕승은 박정희가 요구한 자금을
마련해 주기는 커녕, 체포당하자 끝까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음모 전모에 대해서
불어버렸었다.
일이 이쯤 돼버렸으니 쿠데타의 공로자
대열에 끼지 못하게 되자 한탄하기
시작했을 게 아니겠는가? 쿠데타의 공로자
대열에 끼어 한몫 차지하자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방법은 오직 하나, 체포당해서
지독한 고문을 당했다고 함으로써 박정희의
것뿐이었으리라.> 필자의 이 추리는 물론
전파를 탔다. 당시 이 다큐멘터리 드라마는
쿠데타 주체자들 거의가 들은 것으로 알고
있다.
만일 필자의 추리가 지나쳤다면 김덕승
당사자든 또 쿠데타 그룹의 누구든 엄중
항의를 해왔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일언반구의 항의를 받은 바도 없었다.
털끝만큼도 고문을 한 일이 없다고 주장한
김흥수의 증언은 그의 육성 그대로
삽입해서 전파를 탔었다.
고문한 일이 없다고 증언한 김흥수의
육성 녹음, 여기에 필자의 추리가 어우러져
전파를 탔는데도 김덕승을 위시해서 그
누구도 일언반구의 항의도 하지 않았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태평호텔의 한 구석진 방에서 김덕승에
대한 취조는 잠시 틈도 주지 않고
계속되었다.
"자, 김 선생, 이제 버틸 만큼
버텨봤으니 그만 불어버리시죠?"
"쿠데타를 주동하고 있는 인물들이 어떤
인물들이오?"
취조관들의 심문에 김덕승은 처음부터
일관해서 딱 잡아떼기만 할 뿐이었다.
"군사 쿠데타라니요.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그런 엄청난 일을 누가 감히
꾸민단 말씀입니까? 저는 다만 쿠데타를
구실로 사기를 치려고 했던 것뿐입니다."
이 대목은 수사관들의 증언과 일치했다.
그는 완강히 부인하며 마냥 버티었던
것이다.
하고 고춧가루 고문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장면 정권하의 경찰은 4.19라는
격동을 겪은 지 겨우 1년 세월이 흘렀을
때였다. 더구나 쿠데타설은 분분했었고
그래서 꽤나 몸조심을 하고 있을 때였다.
김덕승을 고문하지 않았던 이유는 경찰의
사기가 떨어져 있었던 데에도 있었다.
취조관들은 도리 없이 홍경한하고
대질시킬 수밖에 없었다. 물론 홍경한이
김덕승과 대질할 때도 피고인으로서의
신분으로 위장하고서였다.
"김 선생, 모든 것이 탄로난 이상에 이제
버텨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김 선생한테 들었던 얘기를 모두
불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김 선생도
더 이상 버티려 들지 말고 자백해 버리는
홍경한은 자백해 버리라고 권고했다.
그제야 김덕승이 체념하고 술술
불어버리기 시작했다. 물론 쿠데타에
가담해 있는 장군들과 영관급 장교들
모두의 이름을 불어버렸던 것이다. 그것이
5월 15일 한나절이었다. 김덕승은 체포당한
지 사흘 만에 비로소 입을 열었던 것이다.
5월 13일 토요일.
이날 필자는 국무총리 장면의 수석
공보비서관인 송원영과 효창운동장에서
벌어지기로 되어 있는 고려대학교 팀과
일본 와세다(早稻田) 대학 팀의 축구
경기를 구경하러 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필자 개인에 관한 얘기를 여기에
언급하기는 무척 송구스러운 얘기나 역사
목격했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필자 자신을
소개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민주당 정권이 성립되자 필자는
공보비서관 송원영에 의해서 공보비서실의
촉탁으로 채용되었다. 필자가 담당하는
것은 방송분야였다. 4.19라는 시대정신은
방송에까지 파급되어 방송인들도 민주화를
운운하며 도에 지나친 방송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시정 건의하는 것이
필자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오후 1시 퇴근 시간이 되자, 필자는
송원영의 전용 지프에 동승해서
효창공원으로 갈 요량으로 중앙청을
나섰다. 조선호텔 앞에 이르자 송원영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니 구경은
다음으로 미루고 오늘은 이만 헤어지세."
(송 비서관이 어째서 갑자기 심경에
변화를 일으켰을까?)
필자는 적잖이 의아하게 생각하며 명동에
있는 목동다방으로 향했다.
이날, 송 비서관은 어떻게 해서 심경에
변화를 일으키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이틀
뒤인 5월 15일에 들었다.
갑자기 비서관 정주성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는 것이다. 장면이 장도영을
불렀을 때 그 자리에 입회했던 그는
대검찰청으로, 육군본부로 부지런히
뛰어다녔다. 쿠데타 음모에 대한 정보처리
상황을 체크하기 위해서였다.
한데, 2,3일 전이었던가? 정주성이
"제가 못할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만,
아무래도 저는 장도영 참모총장의 태도에
의심이 가는군요."
어째서 정주성은 장도영의 태도에 의심을
품게 되었던 것인가? 그것은 장면이
장도영에게 박정희에 대해서 조사해서
보고하라고 명령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조사에 착수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주성이 장도영의 태도에
의심을 품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총리께서 지시하신 일 어떻게
됐습니까?"
정주성은 장도영에게 독촉하기까지
했었다.
"아, 지금 조사가 진행중에 있습니다."
그때마다 장도영은 얼버무리려고만
의심을 품게 될 수밖에.
축구 경기를 관전하고자 중앙청을 나섰던
송원영은 차 안에서 문득 정주성이 했던
말을 떠올렸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축구
경기를 단념했던 것이다.
조선호텔 앞에서 내린 송원영은 조선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에서 그는 조폐공사
사장 선우종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그때까지도 퇴근하지 않고 자리에 있었다.
"저녁에 장도영 총장하고 같이
옥류장에서 한잔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송원영이 의향을 묻자 선우종원은 좋다는
것이었다. 선우종원과의 통화를 끝내고
나자, 송원영은 이번에는 장도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통하게도 장도영 역시
아직 퇴근을 하지 않고 자리에 있었다.
세 사람이 종로 화신 뒤에 있는
옥류장에서 술상을 가운데 놓고 마주앉은
것은 7시경이었다. 어지간히 취기가 돌았을
무렵, 송원영은 마치 문득 생각이 나서
묻는다는 듯이 쿠데타에 대한 얘기를
끄집어냈다.
"참, 장 총장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렁 그는 손을 휘이휘이 내저으며
한마디로 잘라 버리는 것이었다.
"아, 그 이야기 말이오? 그거
모략입니다, 모략."
"모략이라니요? 한 사람뿐이라면
모르지만 선우 사장께서도 송우범
씬가한테서 정보를 입수했다는데, 그런데도
모략이란 말입니까?"
송원영은 힐책하듯 물었다.
일어나시지요?"
장도영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이었다.
(참으로 알쏭달쏭하기 짝이 없군. 쿠데타
얘기를 꺼내자 갑자기 몸이 불편하다고
자리를 피하려고 해?)
이번에는 송원영이 부쩍 장도영을
의심하게 되었다.
한데, 여기 세월이 20여 년 흘렀는데도
아직 풀리지 않고 있는 수수께끼가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수사를 지휘했던
부장검사 김흥수는 분명히 김덕승이 사흘
만에 쿠데타 음모에 대한 전모를
자백했다고 했다. 그런데 장면한테는
<김덕승이란 자를 체포해서 취조했던 바,
그 자가 돈이 탐이 나서 쿠데타를 빙자해
보고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보고는 검찰총장 이태희가
했다. 그러면 이태희가 허위보고를 했단
말인가? 법률가인 이태희가 그런
허위보고를 했을 리는 없다. 그는 예사로운
공인이 아니요, 검찰총장이라는 공권력의
최고 책임자가 아닌가? 더구나 그는
국무총리 장면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허위보고를 했을
리는 없을 것 같다.
그러면 김덕승을 취조해서 받아낸 자백이
어디에서 변조되었던 것일까? 서울시
경찰국장 이귀영(李貴永)한테서? 이 선에서
변조되었다고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장면 내각 성립과 함께 정보비서실의
수석비서관으로 있다가 서울시
장면이 그를 서울시 경찰국장으로
내보냈던 것도 4.19로 사기가 저하된
경찰의 사기진작에 있었다. 그러한 막중한
책임을 지고 전직을 했던 그가 쿠데타
음모의 전모를 변조시키려 들었을 리가
없다.
그러면 어느 선에서 김덕승의 자백
내용이 변조되어 장면에게 보고되었던
것일까? 바로 이것이 지금껏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6. 해병대, 자정에 출동하다
이제 이쯤에서 얘기를 쿠데타 총수인
박정희한테로 돌리자.
D데이 H아워인 5월 15일 밤 10시경
신당동 자택을 나선 박정희는 어디서 뭘
하고 있었기에, 제6관구 사령부 참모장
김재춘의 애간장을 태우고 있었던 것일까?
그러니까 박정희에 대한 얘기는 5월 15일
밤 10시 이후의 행적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옳겠으나, 기왕에 그에 대한 얘기를
꺼낸 이상에는 그가 쿠데타를 지휘하기
위해서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왔을 때의
그의 행적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보고
박정희의 보직은 제2군 부사령관, 그가
쿠데타 지휘를 위해서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온 것은 5월 12일이었다.
그는 서울로 올라오자 조카사위인 예비역
중령 김종필(金鐘必)로부터 쿠데타에 따른
세부계획에 대한 것까지 자세하게 브리핑을
받았고, 그런 다음 그 자신이 이 계획을
엄중 재검토했다.
먹느냐 먹히느냐의 쿠데타에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 먹으려면 계획 자체에도
차질이 없어야 하고 실행에도 차질이
없어야 한다.
그런 다음 이틀 뒤인 5월 14일 일요일에
쿠데타 주체 중의 주체인 알짜들만을
김종필의 형인 김종락(金鐘洛)의 집에
불러모았다. 감시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것이다.
우선 이 집에 모였던 주체 중의 주체인
알짜들의 면면을 살펴보기로 하자. 공수단
단장 육군 대령 박치옥, 공수단 대대장
육군 중령 김제민(金悌民), 제30사단
작전참모 육군 중령 이백일, 제33사단
작전참모 육군 중령 오학진(吳學鎭),
제6군단 포병단 단장 육군 대령
문재준(文在浚), 제6군단 포병단 대대장
육군 중령 신윤창(申允昌), 제6군단 대대장
육군 중령 구자춘(具滋春), 제6군단 포병단
대대장 육군 중령 백태하(白泰夏), 제6군단
포병단 대대장 육군 중령 정오경(鄭五敬),
제6군단 포병단 대대장 육군 중령
김인화(金仁華), 제6관구 사령부 참모장
육군 대령 김재춘, 제6관구 사령부
해병여단 여단장 해병 준장
김윤근(金潤根), 해병여단 대대장 해병
중령 오정근(吳定根), 해병여단 부연대장
해병 중령 조남철(趙南哲), 해병여단
인사참모 해병 소령 최용관, 육군본부 소속
육군 대령 오치성(吳致成), 육군 중령
옥창호(玉昌鎬), 육군 중령
김형욱(金炯旭), 육군 중령
이석제(李錫濟), 육군 중령
유승원(柳承源), 그리고 예비역 육군 중령
김종필과 박정희 등이다.
여담부터 미리 한마디 해두자. 지금 여기
김종락의 집에 모인 24명의 주체들은
쿠데타가 성공한 지 불과 1,2개월도 안
되는 사이에 엄청나게 각도가 달라지는
운명의 길을 걷게 된다. 시간이 흐르는
그런가 하면 엄청난 출세를 해서 그
자신들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엄청난
치부를 해서 떵떵거리며 살게 된다. 이들
24명의 인생 역정만을 살펴보고 연구를
해도 인생이란 것을 대강은 체득하게 된다.
각설하고.
이날의 소집은 오전 10시에 이루어졌다.
소집의 목적은 각 부대에게 임무를
부여하는 데 있었다. 모여야 할 사람이 다
모이자 박정희의 인사말이 있었고, 각
부대에 대한 임무부여와 작전계획을
제6관구 사령부 작전참모인 박원빈이
발표했다. 그가 발표한 계획에 따르면
쿠데타에 참가한 각 부대에게 주어진
임무는 다음과 같았다.
대대장 육군 중령 김제민, 중대장 육군
대위 차지철. 육군 제1공수단은 쿠데타에
있어 한강교를 도하, 반도호텔과
중앙방송국(KBS)를 점령하고 요인 체포.
일부 병력은 중앙청, 국회의사당을
장악한다.
-해병대:여단장 해병 준장 김윤근,
대대장 해병 중령 오정근, 부연대장 해병
중령 조남철. 쿠데타 제2부대로 내무부,
치안국, 서울시 경찰국을 점령한다.
-제30사단:참모장 육군 대령
이갑영(李甲榮), 부사단장 육군 대령
박상훈, 작전참모 육군 중령 이백일,
전투대대장 육군 소령 고병만. 제30사단은
중앙청, 청와대, 서울시 경찰국 탄약고,
서대문 형무소, KBS 연희 송신소를
-제33사단:연대장 육군 대령
이병엽(李秉燁), 작전참모 육군 중령
오학진. 제33사단은 서울 시청앞과
덕수궁에 위치, 방송국, 국제 전신전화국,
마포 형무소를 점령한다.
-제6군단 포병단:포병사령관 육군 대령
문재준, 군단 작전참모 육군 대령 홍종철,
5개 대대장 육군 중령 신윤창, 백태하,
구자춘, 정오경, 김인화. 제6군단 포병단은
5월 16일 새벽 3시 40분까지 육군본부를
점령한다.
제6관구 사령부:참모장 육군 대령
김재춘, 작전참모 육군 중령 박원빈.
제6관구 사령부를 제1지휘본부로 정한다.
-반도호텔(국무총리 장면 숙소):육군
소령 박종규(朴鐘圭) 지휘하에 국무총리
같다. 엘리베이터조 육군 대위 차지철,
계단조 육군 대위 김인식(金仁植), 정문
계단조 육군 대위 유국준(柳國俊), 우측
층계조 육군 대위 장종원(張鐘源), 좌측
계단조 육군 대위 차병섭(車炳燮).
-요인 체포조:내무부장관, 대위
김상목(金相睦). 외무부장관, 대위
오필생(吳泌生). 국방부장관, 대위
손기훈(孫基勳). 무임소장관, 대위
이덕기(李德基). 치안국장, 대위
안충인(安忠仁).
-특수 활동조:예비역 육군 중령 김종필,
소령 이낙선은 연락업무와 인쇄물을
준비한다. 육군 대령 오치성, 육군 중령
김형욱, 김동환(金東煥)은 반혁명 및
국내외 정보를 취급한다.
조창대(曺昌大), 이종근(李鐘根),
박용기(朴勇琪), 심이섭, 엄병길(嚴秉吉)은
사령부 안에서, 정문순(鄭文淳),
윤필용(尹必鏞)은 방송을 신호로
육군대학에서 각각 혁명세력에 대한
지지활동을 벌인다.
이상과 같이 발표하고 나서 박원빈은
다음과 같이 엄숙히 말하는 것이었다.
"먼저 D데이 H아워를 16일 오전 3시로
정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제30사단 작전참모
이백일이 참모장 이갑영한테는 D데이
H아워가 15일 오후 10시라고 했던 것을
기억해내지 않을 수가 없다. 이렇게
5시간씩이나 차이가 나게 된 이유는
박원빈은 각 부대가 수행해야 할 임무에
대해서 설명하고 난 다음 말했다.
"오전 3시 목표점령을 기준으로 해서 각
부대에서 목표까지의 거리를 감안, 각
부대별로 출발시간을 정해 주십시오.
그리고 한강 서편에 위치한 부대의 한강
인도교 통과 순서를 해병여단, 공수단,
제33사단의 순서로 정했습니다."
<귀신 잡는 해병>, 한국 해병이 얼만
용감한 군대냐 하는 것은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한마디로도 설명이 충분하다고
본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귀신까지도 잡을
정도니 한국 해병이 얼마나 용감한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 아니겠는가.
쿠데타를 위한 작전계획을 짠 사람들,
그들은 김종필을 위시한 오치성, 옥창호 등
잡는 해병대의 용감성을 가장 높이
평가했기에 한강 다리를 제일 먼저
건너가게 하려고 했던 것이 분명하다.
거사를 하다 보면 어떤 장애가 부딪칠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 장애를 물리치는 데 있어
해병대가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런데 해병 여단장인 김윤근이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해병여단이 제일 먼 곳에 위치해 있는데
어떻게 한강 인도교를 제일 먼저 건널 수
있단 말이오. 그러니 해병여단을 맨 뒤로
바꾸어 주시오."
"그래서 각 부대별로 목표까지의 거리를
감안해 가지고 출발시간을 정하도록 한
것이 아닙니까?"
하여간에 이미 세워 놓은 작전계획대로
따라주는 것이 좋겠다는 투로 김윤근의
이의를 물리치려 했다.
박정희도 한마디 거들었다.
"귀신 잡는 해병대가 아니오? 아무래도
제일 용감한 부대가 제1진으로 선두에 서는
것이 좋을 것이외다."
"해병대에 대한 신뢰가 깊다는 것은
고마운 말씀입니다만, 무슨 착오가 생겼을
때 혼란을 덜하게 하자면 해병대가 맨 뒤에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무슨 착오가 생겼을 때라니? 무슨
착오라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납득하기가
어려운 이유를 내세우며 김윤근은 자기
주장을 굽히려 하지 않았다.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해병대가 제3진에
해병대의 임무가 경찰을 제압하는 데 있는
만큼."
해병대에 주어진 임무는 내무부, 치안국,
서울시 경찰국의 점령이었다. 모두가
해병대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기 때문에
해병대가 앞장서 줄 것을 간청했으나
김윤근이 끝까지 고집을 부리자 박정희가
단안을 내렸다.
"그럼 공수부대를 제1진으로 세우도록
합시더."
박치옥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대한민국 사상 최초의 군사혁명에
있어 공수단이 선봉군이 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 궐기하는 일만이 남았소.
승패는 하늘에 맡기되, 동지 여러분은
각자의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해 최후의
일인까지라도 싸워서 꼭 이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도록 해야겠소."
박정희의 짧은 격려사로서 이날의 회의는
끝났다.
벌써 어둠이 깃들어져 있었다. 그만큼
회의가 길었던 것이다. 모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깐만 좀 그대로 앉아 주십시오."
그때 김종필이 제지했다. 모두 그 자리에
다시 주저앉았다.
"거사를 하자면 아무래도 군자금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신문지에 싼 돈을 부대 단위로
나누어 주었다. 일금 30만 환씩이었다.
D데이까지는 앞으로 이틀, 이미 모든
출동을 해서 임무만 수행하면 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돈 같은 것이 필요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해병대의 경우, 나중
일이지만 김윤근은 30만 환을 보관하고
있다가 거사가 성공한 후에 <5.16
혁명기념>이라는 반지를 만들어 출동했던
장병 1,500명에게 하나씩 기념으로 나누어
주었다나......?
마침내, 마침내 D데이로 정해져 있는 5월
15일은 밝았다.
이날 아침, 잠자리에서 눈을 뜨기가
무섭게 박정희의 가슴은 고동치기
지경이었다.
(오늘이 내 운명을 건 대도박의
날이렷다!)
그는 입을 한일자로 꽉 다물며 천장을
응시하면서 새삼 스스로에게 다짐을
주었다.
(10년을 두고 가슴에 품어온 계획이
아니냐! 어떤 일이 있어도 어떤 난관이
있어도 이 계획을 성공시키고야 말 테다.)
그렇다. 10년을 두고 가슴에 품어 왔던
계획이었다.
(이놈의 나라, 뒤집어 엎어 버리고
말아야 돼!)
이렇게 내뱉고 그가 군사 쿠데타를
계획했던 것은 1952년 5월 26일, 이른바
5.26 정치파동이 벌어졌을 때였다. 이때의
육군본부 작전국 차장.
그러나 육군 대령 신분으로 쿠데타를
계획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육군 참모총장인 이종찬(李鐘贊)을
업을 계획을 세웠다. 이종찬이 육군의
총수라서가 아니라 그에 대한 군부의
인망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각하, 지금의 정치적 혼란을 방치해
두었다간 나라는 망하고 맙니다.
이제야말로 군이 나서서 국정을 바로잡아야
할 때입니다."
그는 이종찬에게 쿠데타를 건의했다.
"무슨 허튼 수작을 하고 있어. 오히려
군이 정치에 간섭하게 되면 나라를 망치고
마는 거야!"
이종찬은 일갈하면서 단 한마디로
만일 이때, 이종찬이 박정희의 흑심을
외면만 해버릴 것이 아니라 예편조치를
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적극적인
조치도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박정희는
더욱더 쿠데타에 대한 꿈을 다져나갔고,
끝내는 쿠데타를 단행함으로써 군부
독재정치의 막을 열어 놓고 말았던 것이다.
천려일실(千廬一失)이었다.
하여간에 이종찬이
대갈일성(大喝一聲)으로 쿠데타를
반대했다고 해서 그 꿈을 버릴 박정희가
아니었다.
(그래, 싫어? 싫다면 좋아, 너 아니면
사람이 없는 줄 아냐? 나도 언젠가는 별을
달겠지. 별을 달게 되면 나 스스로
테다.)
오히려 박정희는 더욱더 쿠데타에 대한
결심을 굳건히 다졌다. 이런 경우
와신상담(臥薪嘗膽)이란 표현이 합당할까?
아무튼 그는 10년 세월을 두고 칼을
갈았고, 급기야는 이제 거사를 하기까지
일을 진행시켰던 것이다.
이날 신당동 박정희의 집은 참으로
부산했다. 그가 미처 조반상을 대하기도
전에 김종필이 찾아왔고, 김용태(金容泰)도
찾아왔다. 장태화(張太和)도 찾아와서
민주당 정권의 동태를 보고하기도 했다.
오늘이 거사의 날이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던 박정희의 아내 육영수(陸英修)는
가정부의 아침 설거지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그녀를 안방으로 불러들였다.
오세요."
가정부의 고향은 육영수와 같은
옥천군이었으나 마을이 달랐다. 육영수의
고향은 능월리였고, 가정부의 고향은
청산리라는 곳이었다.
"갑자기 고향엔 왜요?"
가정부는 꽤나 의아한 모양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하고 있던 분부였기 때문이었다.
"날씨도 좋고 하니 좀 쉬다 오라고
그러는 거예요."
육영수는 행여 가정부가 언짢아 할세라
미소를 지어보이며 별 뜻이 아님을 암시해
주었다.
"오늘 따라 손님이 저렇게 많이 오시는데
혼자서 어쩌시려고요?"
"내 걱정은 마세요. 그깟 하루 이틀쯤
육영수는 싫다는 가정부를 기어이
설득해서 고향으로 내려보냈다. 노자돈도
넉넉히 주어서.......
15일 밤 9시 45분.
H아워인 밤 10시가 가까워지자, 박정희의
가슴은 더욱 뛰기 시작했다. 동시에 숨이
막힐 듯한 중압감이 일기도 했다. 그는 그
무거운 가슴을 털어 버리기라도 하듯이
안방으로 건너갔다. 정장하고 있던 군복을
벗고 작업복에 잠바 차림으로 갈아 입었다.
그런 다음 아내를 돌아보며 말했다.
"여보, 내 가방 속에 있는 권총 좀 꺼내
주겠소?"
"예."
박정희가 대구에서 들고 올라온 가방
속에서 권총을 꺼내는 육영수의 손이
아내가 건네 주는 권총을 받아 허리에
차고 나자, 박정희는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녀오겠소."
"여보, 아이들 숙제 좀 봐주시고
나가시지 않겠어요?"
"아이들 숙제를?"
박정희는 아이들의 숙제를 봐달라는
말뜻이 무엇인지 곧 알아차렸다. 어쩌면
이게 마지막 길이 될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아이들 얼굴만이라도 한번 보고
떠나라는 암시임을 그는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지."
박정희는 아이들의 방으로 건너갔다.
이제 겨우 국민학생인 근혜, 근영 자매가
책상 앞에 엎드려 공부를 하고 있었다.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다가
아랫목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
유치원생인 외아들 지만이가 외할머니
무릎을 베고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그는
세 아이의 모습을 한번 더 번갈아 보고
나서 조용히 물러 나왔다.
다시 응접실로 건너왔을 때가 밤 10시.
박정희가 막 응접실을 나서려는데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늘 같은
파장으로 울리는 전화벨이었으나 이날 밤의
벨소리는 유별나게도 크게 그의 귀청을
두드렸다.
순간, 이상한 예감이 일었다. 모두가
수포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아마도 H아워가 다 되었는데 전화벨이
울렸기 때문이었으리라.
들었다.
"신당동이오."
"각하, 김재춘이올습니다."
전화의 주인공은 제6관구 사령부 참모장
김재춘이었다.
"응, 김 대령, 무슨 일이오?"
"각하, 30사단의 부사단장하고 참모장이
사단장에게 밀고하는 바람에 일이
탄로났습니다."
"뭐라고?"
박정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한순간
숨이 딱 끊어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불길한 예감이 그대로 적중했던 것이다.
"각하, 부대 출도잉 어렵게 됐으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이제 뭘 어쩌겠소. 제2안으로 할
제2안? 제2안이란 어떤 것이었던가?
여기에 대해서는 쿠데타 그룹의 그 누구도
기록으로 남긴 바가 없다.
그가 응접실을 나서는데 육군정보학교
교장 육군 준장 한웅진(韓雄震)과 육군본부
교육처장 육군 준장 장경순이 나타났다.
원래 이 두 사람들하고는 김포 입구에서
만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그런데 계획이
탄로나 차질이 생기게 되자, 신당동
박정희의 집으로 달려왔던 것이다.
"박 장군, 계획이 탄로난 모양인데 이제
어쩌면 좋겠소?"
한웅진이 물었다.
"계획이 탄로난 이상 댁에 계시면
위험합니다. 일단 피신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일단 제가 묵고 있는 여관으로 가시죠.
거기에서 사태를 지켜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한웅진의 권고였다. 그는 지난 토요일에
서울로 올라와서 종로구 청진동의 한
여관에 투숙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단 그렇게 합시다."
박정희는 앞장서 걸어나갔다. 그는 자기
차에 한웅진과 부관 육군 소령 이낙선을
태우고 나서 차에 올랐다. 장경순이 몰고
온 차에는 그와 한웅진이 데리고 올라와
있던 정보학교 장교 세 사람이 동승했다.
두 대의 지프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한 대의 검은 지프가
그들 뒤를 따랐다. 506방첩대에서 파견한
박정희 감시조의 지프임이 틀림없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꼭 질식해 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장도영, 그런 자를 믿고 쿠데타
지도자로 모시느니 어쩌니 하면서 비밀을
털어놓다니.......)
박정희는 혀를 깨물고 싶은 충동이 일
정도로 후회만이 일었다.
그가 장도영을 업고 쿠데타를 일으키고자
계획했던 것은 장도영이 예뻐서 업으려고
했던 것은 물론 아니었다. 장도영, 그를
쿠데타 지도자로 초대할 생각 같은 것은
애시당초 털끝만큼도 없었다. 다만, 그가
육군 참모총장으로 영전했기 때문에 그를
이용하고자 했던 것뿐이었다.
위해서 발벗고 나섰다면 박정희는 자기
자신의 착오를 아프게 반성해야 옳았다.
그런데도 그는 반성은 커녕 장도영만을
증오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인관계에
있어서 박정희의 애증(愛憎)은 좀
남달랐다. 한번 사람을 미워하게 되면 그
미워하는 감정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
하더라도 그는 그 감정을 버리려 하지를
않았다. 그러한 성격 형성은 그의 찌든
가정 환경에서부터 비롯됐기 때문이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관방에 쭈그리고 앉은 그는 연방
장도영에 대한 증오심만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사람을 미워한다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남을 미워하는 만큼 자기도 거기에
때문이다.
"여보, 한 장군. 이거 미치겠구려. 우리
어디 가서 대포나 한잔 합시다."
박정희는 정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어디 가서 대포나 한잔 하자고 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는 것이었다.
장경순은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이
양반이 정신이 있나 없나 하는 눈초리로
바라보며 물었다.
"동지들이 눈이 빠지게 기다릴 텐데
6관구 사령부로 나가봐야 하잖겠습니까?"
"이미 탄로가 났다는데 나가 본들
무엇하겠소?"
박정희의 대꾸는 퉁명스러웠다.
장경순은 울컥하는 역겨움이 치밀어
올라왔으나 의지로써 그것을 지그시 누르며
"생사를 같이하기로 맹세한 동지들이
아닙니까? 일단은 나가 봐야 할 줄로
압니다."
"그렇긴 하오만,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아서 도저히 이대로는 갈 수가 없구려.
한잔 하면서 생각을 해보도록 합시다."
박정희는 다음의 대꾸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앞장서 나갔다. 한웅진,
장경순 두 사람도 일어서지 않을 수
없었다.
여관에서 나온 세 사람은 청진동의 한
대폿집으로 들어갔다. 주모가 꽤나 반기며
맞아주었다.
술상이 들어오자 박정희는 마치 기갈들린
사람 모양으로 자작으로 연거푸 세
대접이나 대폿잔을 비웠다.
15일 밤 11시. 해병 제1여단 여단장
숙소.
"여단장님, 여단장님."
누군가가 어깨를 가볍게 흔들어 깨우는
소리에 김윤근은 눈을 번쩍 떴다. 그가
눈을 뜨는 것과 동시에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는 부관 홍경식의 얼굴이 김윤근의 동공
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김윤근은 얼른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정확히 11시였다.
"지금 옆방에서 문성태 중령하고 최용관
소령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부관 홍경식이 귀띔하자, 김윤근은 벌떡
일어나 옆방으로 갔다.
김윤근이 들어서자 두 사람은 벌떡
일어서며 거수경례를 붙이는 것이었다.
"출동 준비를 끝내고 출발시간이 되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최용관의 대꾸였다.
"그래, 수고들 했군. 그런데 혹시 김동하
장군이 오시지 않았던가?"
"김동하 장군께서는 9시경에 여단장실에
오셨습니다. 여단장님께서 눈을 붙이셨다고
말씀드렸더니 오정근 대대로 가신다면서
나가셨습니다."
부관 홍경식의 보고였다.
"그런데 저어......."
문성태가 조금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뭔가?"
"밤 9시에 전화선을 끊었습니다. 그런데
서울과의 전화선은 절단된 상태로
있습니다만, 군단과의 전화선은 끊은 지
가면서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리기에 다시 끊지를 못했습니다."
두 번씩이나 거듭해서 끊게 되면 문제가
발생할 것이 틀림없었다.
"고문단의 동태는?"
"이상이 없습니다. 조용하기만 합니다."
김윤근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는 입을 한일자로 꽉 다물었다.
자꾸 흔들려지는 마음을 꽉 붙들기
위해서였다.
밤 11시 30분. 청진동 대폿집.
박정희는 취했다. 취하자 그의 사고력이
한골수로만 파고 들었다. 그리고는 자꾸 그
한 가지 생각만 곱씹었다.
(쿠데타를 꿈꾸어 오기 10년, 이제
거사하려는 마당에 탄로났다고 해서 내가
수는 없지 않은가? 체포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쿠데타 지휘본부로 가는 것이
떳떳한 장부다운 행동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체포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6관구
사령부로 가자!)
마침내 박정희는 결심을 했다. 취기
덕분이었다. 알콜이 마비시켜 놓은 두뇌는
사고력이 감퇴되고 단순해지기 마련이다.
술이란 그래서 사나이들의 세계에 없어서는
아니될 마약인지도 모른다.
"한 장군, 장 장군, 상황이 어찌됐든
우리 지휘본부로 갑시다. 여기서 이렇게
앉아서 잡으러 오기를 기다릴 수야 없는 일
아니겠소?"
박정희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별 한
개가 더 많은 육군 소장이 지휘본부로
사람은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장경순의 표정은 순간 비장한
각오가 서렸지만 한웅진은 좀 내키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
"장 장군, 장 장군도 눈치 챘으리라
생각하오만 아까 우리 집에서 나올 때 우리
뒤를 검은 지프차가 미행하지를 않았소?
그들은 우리를 또 미행할 것이 틀림없소.
그러니 장 장군이 그 지프를 맡아서 따돌려
주시오. 그리고 나서 지휘본부로 와
주시오."
"알겠습니다."
박정희는 두 사람에게 쿠데타가 실패했을
경우에는 장부답게 어쩌구 하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거리에는 쥐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가리지 않고 발을 묶어 버렸던 것이다.
통행금지시간은 밤 12시 자정에서 새벽
5시까지였다.
고요에 묻혀 있는 거리를 있는 힘을
다해서 달린다는 것은 참으로 상쾌하고
유쾌한 일이다. 그러나 박정희는 지금
그러한 기분을 만끽할 만한 마음의 여유는
없었다.
"속력을 낼 수 있는 한 힘껏 달려."
박정희의 명령에 운전병은 그런 명령을
기다리고 있기나 했던 것처럼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100, 120, 130,
속도계는 쭈욱쭉 뻗어 올라갔다.
박정희의 지프가 속도를 올리는 것과는
반비례로 장경순의 지프는 처음에는
박정희의 지프에 보조를 맞추어 달렸으나
죽을 지경인 것은 미행하는 지프였다.
미행 지프는 박정희의 뒤를 따르는
지프에는 관심도 없었다. 오직 박정희의
지프에만 관심을 쏟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박정희의 차가 속도를 내기
시작하자 미행 지프도 덩달아 속도를 냈다.
그것을 장경순의 차가 훼방을 놓았다.
미행 지프가 오른쪽으로 빠져 나가려
하면 장경순의 차가 오른쪽으로 핸들을
꺾어 진로를 방해했고 왼쪽으로 꺾으면
왼쪽으로 꺾어 훼방을 놓았다. 이날 밤 세
대의 지프가 연출해내는 곡예는 꼭 영화의
한 장면을 방불케 해주고 있었다. 장경순은
미행 지프가 앞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훼방만 놓다가 박정희의 지프가 모습을
감추자 그는 미행 지프를 엉뚱한 길로
심야의 추격전 같은 이 한 장면은 결국
장경순이 미행 지프를 엉뚱한 길로 유도해
놓고 어디론가로 쏜살같이 달아나 버리는
것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같은 시각, 제6관구 사령부.
H아워는 훨씬 지났다. 그런데도 박정희는
꿩 구워먹은 소식이었다. 도대체 그가
어디에 있는지 소재조차 알고 있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도 제6관구 사령부 작전참모
육군 중령 박원빈은 출동부대에 전화를
걸어 독려하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뭐, 장애에 부딪혀 있다고?"
제33사단 작전참모 오학진은 출동준비를
갖추어 놓고 H아워가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출동할 수 없는 장애게 부딪혀
무엇이었을까? 제30사단의 작전참모
이백일하고는 숫제 전화 연결조차 되지
않았다.
박원빈은 도무지 제정신이 아니었다.
쿠데타는 여기에서 좌절돼 버리고 말 것
같은 두려움이 일기도 했다. 곁에서
박원빈이 혼자서 애쓰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송찬호가 옆에 있는
윤태일에게 나직히 속삭였다.
"여보 윤 장군, 우리가 언제가지나
이렇게 앉아서 박 장군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 아니라 총장을 찾아가 그분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보고 한번 설득해 보는 것이
어떻겠소?"
"그래요? 그럼, 그래 봅시다. 어차피
쿠데타가 실패했다면 이판사판이 아니오?
두 사람은 함께 제6관구 사령관실을
나섰다.
"아차! 이 노릇을 어쩌지?"
박정희의 지프가 서대문 로터리를 돌아
서울역 쪽으로 달리고 있을 때 박정희는
비명을 지르다시피 부르짖었다.
"왜 그러십니까?"
한웅진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내가 한 장군의 여관방에 권총을 놔두고
깜빡 잊고 그냥 왔구려."
박정희는 한웅진의 여관방에서
대폿집으로 갈 때, 권총을 풀어 놓고 갔던
것이다. 대폿집에서 여관에 들르지 않고
그냥 제6관구 사령부로 향하고 있던
박정희는 이때에 이르러서야 몸에 무기를
것이다.
"한 장군, 여관으로 다시 돌아가야겠소.
가서 권총을 가지고 와야겠소."
어쩌면 진압군과 한바탕 붙게 될지도
모른다. 그럴 경우를 대비해서 무기를 꼭
지니고 있어야 한다. 이들과 같은
범인(犯人)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정상적일지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박정희는 체포의 손길을 뻗쳤을
경우를 대비하여 자결용으로 권총이
필요했던 것이다.
(패자는 군말이 있을 수 없다. 자결로써
깨끗이 최후를 마칠 뿐이다.)
박정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차를 돌려!"
운전병이 속도를 늦추며 급회전했다.
있었다.
송찬호, 윤태일 두 육군 중장이
506방첩대에 도착한 것은 박정희가
대폿집을 떠나던 그 무렵이었다. 두 사람이
대장실로 들어서는 것을 본 이희영은 조금
굳어졌다. 그 두 사람은 이희영과는 육사
5기 동기였으나 쿠데타에 가담해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이희영은 찾아온 용건을 물었다.
"우리는 총장 각하를 뵈려고 왔소."
송찬호가 찾아온 목적을 밝혔다.
"총장 각하는 지금 여기 안 계십니다."
"우리가 여기 계시다는 것을 알고
찾아왔는데 안 계시다는 것은 무슨
"안 계시니까 안 계시다는 것 아닙니까?
계시는데 뭐가 무서워 안 계신다고 한단
말입니까?"
윤태일이 나섰다.
"이 대령, 왜 우리를 따돌리려는 거요?"
"따돌리다니요? 따돌릴 이유가 없는데 뭣
때문에 따돌린단 말이오?"
육군사관학교 5기 동기생이지만, 지금은
적대관계에 서 있는 이들 세 사람. 한쪽은
쿠데타를 일으키려 하고 있고, 다른 한쪽은
그것을 막으려 애쓰고 있는 이들. 그들은
지금 506방첩대 대장실에서 묘하게 신경을
곤두세우며 입씨름을 벌이고 있었다.
5.16 군사 쿠데타의 와중에 있었던 또 한
토막의 해프닝이 있었다.
이 무렵이었다. 도대체가 매일 얼굴을
맞대는 참모차장이요, 정보참모부장이다.
무슨 해야 할 얘기가 그리도 많기에
장도영은 자정이 넘도록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더란 말인가? 참으로 배포 한번 유한
장도영이었다. 박정희 등이 쿠데타를
일으키려 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도
요정에 질펀하게 쭈그리고 앉아서 술잔이나
기울이고 있어? 일찍이 세계 역사상에 이런
육군 참모총장이 있었을까?
하기야 장도영으로서는 쿠데타를
저지하기 위한 조치를 모두 취했으니
그만하면 됐다고 마음을 탁 놓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각하, 육군본부에
비상을 거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이희영도 건의를 했고 이철희도 건의를
없어!> 하고 한마디로 잘라 거부했다.
그리고는 다만 헌병감 조흥만에게 전화로
명령을 내렸을 뿐이었다.
"본부 헌병을 전부 비상대기시키고
제6관구 사령부로 긴급 출동해서 쿠데타
음모자들을 전원 체포하라."
이 명령만을 내리고 506방첩대에서 다시
은성으로 돌아온 것이 9시 넘어서였으니까,
그는 은성에서 3시간 가까이를 낭비하고
있는 셈이 된다.
이 3시간 사이에 쿠데타군을 진압할
진압군 이동은 불가능했던 것일까? 진압군
출동은 또 그렇다 치고 은성에서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참모차장 장창국이나
정보참모부장 김용배한테는 어째서 박정희
등의 쿠데타 거사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참모차장 장창국과 정보참모부장
김용배가 누구인가? 바로 육군본부의 핵심
인물들이 아닌가. 이들 두 사람에게
쿠데타에 대해서 눈꼽만큼이라도
털어놨던들 두 사람은 그 어떤 비상대책을
세웠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것을
장도영은 이 두 사람에게 단 한마디도
귀띔해 주지 않았던 것이다.
오오! 하늘이여! 하늘은 어째서 장도영과
같은 인간을 이 당에 내리셨는지
해명하소서.
역사는 한 인간이 얼마든지 나라를
그르칠 수 있다는 것을, 장도영을 통해
분명하게 실증으로 보여주었다.
은성에서 술자리가 파하자, 장도영은 두
사람을 집으로 보내고 그 자신은
16일 자정 0시.
찌르릉 찌르릉.......
야전용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해병여단장 김윤근은 송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단장님, 지금 막 부대의 선두가
출발했습니다."
전화보고를 해온 사람은 대대장
오정근이었다.
순간, 가슴의 고동이 딱 멎으며 숨이 콱
막혀 버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마침내
주사위는 던져졌구나! 하는 체념이
번갯불처럼 머리를 두드렸다.
김윤근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0시에서 1분이 지나고 있었다. 예정돼
있었던 대로 해병대는 0시에 출발했던
것이다.
"행운을 빈다."
김윤근은 짤막하게 대꾸하고는
송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해병대 지휘부는 주력부대의 후미에 붙어
진군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지휘반의 출발까지는 다소 시간이 있었다.
그래서 김윤근은 기다리는 동안
군종참모(軍宗參謀)를 찾아보고자 숙소를
나섰다. 해병여단에는 신교 예배당이
마련되어 있었다.
"군종참모를 모셔 오게."
김윤근은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면서 부관
홍경식에게 말했다.
잠자리에 들어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홍경식이 그를 깨워 <여단장님이
부르신다>고 하자, 김광덕은 <이 밤중에
무슨 일이야> 하는 표정을 짓고 달려왔다.
"한밤중에 깨워서 미안하오."
김윤근은 김광덕을 대하자 사과부터
했다.
"무슨 언짢은 일이라도......?"
김광덕은 여단장의 기분부터 살피려
했다.
"우선 좀 앉으십시오."
김광덕이 앉기를 기다렸다가 김윤근은
말을 꺼냈다.
"실은 오늘 밤 우리는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되어 있소. 선발부대는 이미
0시 정각에 떠났소."
휘둥그래졌다. 쿠데타라는 말을 그는 생전
처음 들었던 것이다.
김윤근은 왜 쿠데타를 계획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떤 사람들이 주체가 되어
있는지를 간략하게 설명하고 이렇게
덧붙였다.
"잘하는 일이라고 믿고 하는 일이라 해도
하나님이 보실 때에 잘못된 일이라면
우리가 하려는 일을 깨뜨려 주시겠지요.
다만 출동 목적을 모르고 나가는 많은
장병들이 피 흘리지 않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얘기를 듣고 난 김광덕은 조용히
일어나더니 마루에 꿇어 엎드렸다.
그리고는 차분하면서도 힘있는 목소리로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박정희 장군 지금 어디 있는지 알고
있나?"
장도영은 506방첩대장실로 들어서며
소리를 질렀다.
"10시경가지는 자택에 있었습니다."
이희영의 대답이었다.
"지금은?"
"10시경에 한웅진 장군하고 자택을
나서자 감시조가 미행을 했습니다만
놓쳤다는 보고였습니다."
"뭐 놓쳐?"
장도영은 꽤나 착잡한 모양이었다.
의자에 털썩 앉으며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눈치였다.
"박정희 장군이 오셨습니다."
경비병이 큰 소리로 외쳤다.
"뭐, 박정희 장군이?"
김재춘이 먼저 복도로 달려나갔고
여기저기에서 웅성거리고 있던 쿠데타
르룹의 장교들도 달려나갔다. 얼결에
이광선도 달려나갔다.
복도를 걸어오다가 우르르 몰려나온
장교들에게 둘러싸인 박정희는 그들의
얼굴을 한 사람씩 찬찬히 훑어보았다.
김재춘의 얼굴도 있었고 오치성의 얼굴도
있었다. 또 송찬호의 얼굴도 있었고
윤태일의 얼굴도 있었다.
(아직은 무사하군.)
박정희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부사령관실
앞으로 다가와 호기있게 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김천경, 군수참모 육군 중령
김종호(金鐘鎬) 등 사령부 참모들이 모여
앉아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박정희가 제6관구 사령관이었을 때 이
부사령관실이 사령관실이었다. 아마도
박정희는 아직도 이 방이 사령관실인 줄로
알고 이리로 들어온 모양이었다.
박정희를 에워쌌던 장교들도 모두 그의
뒤를 따라 부사령관실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박정희의 거동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박정희의 입에서는 주변 사람들이
역겨워할 정도로 심하게 술냄새가 풍겨지고
있었다. 그는 부사령관실로 모여든
장교들이 모두 그 자신의 혁명동지라는
착각이라도 들었는가? 그들을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여러분, 우리는 4.19 학생혁명 후
그래도 나라가 바로 잡혀지기를 기대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꼴입니까?"
박정희가 입을 열 때마다 술냄새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목소리만은
또렷했다.
"국무총리라는 사람을 비롯해서
장관들까지도 멋대로 호텔 방을 잡아 나라
일을 본답시고 돈보따리로 뒷거래하는가
하면 이권운동, 엽관운동에 여념이 없으니
이게 무슨 꼴이란 말입니까? 과거의 자유당
정권을 뺨치는 부패와 무능으로 이 나라를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으니 이게
어디 될 말입니까?
데모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장안을
나라가 잘 되기를 바라겠습니까? 이러한
절망적 상황을 보다 못해서 우리는 목숨을
내걸고 궐기한 것입니다. 동지들도
이제부터 구국혁명의 대열에 서서 각자
맡은 바 임무에 전력을 다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박정희가 쿠데타의 명분을
공개적으로 밝힌 제일성이었다.
쿠데타의 지도자로서의 연설 내용치고는
좀 치졸한 느낌이 드는 내용이었다.
웅변대회에 나간 중학생의 쿠데타
명분론이었다면 꼭 알맞았을 것 같았다.
그러나 부사령관실에서 숨을 죽이고 그의
연설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사람들 가운데
<연설 내용이 너무 치졸하구나> 하고 느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모두가 긴장된
멤버들은 <꼭 쿠데타를 성공시키고야
말겠다> 하고 새삼 결의를 다졌고 쿠데타의
내용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던 사람들은
엄청난 사실 앞에 넋을 잃고 있었다.
여기서 잠시 오늘의 현실과 대비해
보기로 하자.
노태우(盧泰愚) 정권하의 사회상은 장면
정권하의 사회상과 비교가 안 된다. 적어도
장면 정권하에서의 데모에서는 화염병이
날고 공공기물을 기습, 파괴하는 일은
없었다. 정당 당사를 점거해서 며칠씩
농성을 벌였던 일도 없었다.
그러므로 박정희의 논리대로 말하자면
지금이야말로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야 할
때라는 얘기가 된다. 정권욕에 사로잡힌
사람이 쿠데타를 통해서 정권을 잡고자
내세우겠는가. 하여간에 앞의 박정희의
연설 내용이 군사 쿠데타의 구실이었던
명분론이었다는 것을 독자는 분명히
기억하기 바란다.
연설을 끝내고 나자, 박정희는
김재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김 대령, 장도영 참모총장이 어디
계신지 아시오?"
"506방첩대에 계신 줄로 압니다."
"그러면 전화를 걸어서 나한테 연결시켜
주시오."
"알겠습니다."
김재춘은 명령을 받기가 무섭게 전화
송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장도영과는 곧 연결되었다. 그는
그때까지도 506방첩대에 그대로 앉아
대체로 비대한 사람은 알콜기가 있으면
의자에 앉아서 꾸벅꾸벅 잘도 존다.
장도영은 비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마른 편도 아니었다. 혹시 그는 취기에 못
이겨 꾸벅꾸벅 졸기라도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왜냐하면 자정에 박정희와
통화할 때까지 1시간 남짓 움직임은 전혀
정지상태였으니 말이다.
그가 은성에서 506방첩대로 돌아와서
취한 조치란 박정희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탐지해서 보고하라는 이 한 가지뿐이었던
것이다.
하여간에 두 사람은 전화기 옆에서 마주
섰다.
"각하......."
박정희는 장도영과 연결되자 쿠데타의
"저희들은 각하를 혁명의 지도자로
모시고 궐기했습니다. 각하께서도 그리
아시고 적극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박 장군, 무엇인가 잘못 판단한
모양인데,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오. 좀더
기다려 보기로 합시다."
장도영은 박정희한테 사정을 하고
있었다. 좀더 기다려 보자니 뭘 기다려
본단 말인가?
육군의 총수가 풀이 죽어 있다는 감을
잡았던가? 박정희는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는 이미 계획단계를 넘어서 행동할
태세를 갖추고 대기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명령 일하에 총궐기하여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여러 말 마시오. 이번에는 장면 정권에
자세히 얘기해 보는 것이 어떻소?"
"내일 다시 만나자구요? 오늘 밤은
어두워서 뜻대로 안 되니까 내일 환할 때
모조리 잡아 넣겠다는 말씀입니까?"
"그럴 리가 있소? 박 장군 좀 취한 것
같으니 오늘은 이만하고 내일 만나자는
겁니다."
찰카닥, 송수화기를 놓는 소리가
울려왔다.
그러나 박정희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너무 취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정희는 빈
전화기에 대고 계속 퍼부어대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소용없습니다. 혁명군은
이미 출동을 개시했습니다. 각하께서는
그저 보고만 계십시오."
옆에서 통화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오는 것을 떨쳐 버리기가 어려웠다.
이번에는 CID 수사요원이 아니라 어디선가
진압군이 출동해서 제6관구 사령부를 덮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박정희를 격리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체포돼도 박정희만은 체포돼선 안 된다.)
이런 생각이 퍼뜩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자, 김재춘은 박정희에게 진언을
했다.
"각하, H아워보다 시간이 많이
지연되었습니다. 혁명군의 사기가
염려됩니다. 한시바삐 공수단으로 떠나셔야
되겠습니다. 서둘러 주십시오. 촌각을
아껴야 할 결정의 순간입니다."
"알겠소."
박정희는 김재춘의 건의를 순순히
김재춘은 사전에 제6관구 수송근무대 중
2개 수송중대를 급유시켜 대기시켜 놓은 바
있었다. 그는 서둘러 책임 장교를 불러
박정희가 떠날 때 그 뒤를 따라가도록
지시했다. 공수특전단에는 자체 수송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수송수단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 사이에 박정희는 편지 한 장을 썼다.
장도영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그는 사령부를 떠나기에 앞서 이 편지를
김재춘에게 주었다.
"이 편지를 꼭 참모총장에게 전해
주시오."
"알겠습니다."
"김 대령, 내가 떠난 후에는 김 대령이
계속해서 혁명군을 지휘해 주시오.
이렇게 당부를 하고 박정희는 한웅진과
더불어 제6관구 사령부를 떠났다.
한편, 506방첩대장실에서 장도영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송찬호와
윤태일은 장도영이 나타나자 박정희와
통화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통화를
통해서 두 사람은 박정희가 제6관구
사령부에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와 동시에 장도영이 쿠데타에 대처하는
태도가 미온적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두
사람은 생각했다.
(굳이 장도영을 자극하게 될지도 모르는
설득 같은 것은 안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들 두 사람은 아예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일부 기록에는 송찬호와 윤태일이
박정희의 편지를 가지고 506방첩대로 간
것으로 되어 있으나 사실은 그게 아니라
김재춘의 명에 따라 박정희의 편지를
가지고 506방첩대로 간 사람은 제6관구
작전처에 근무하고 있던 육군 중위
송정택(宋正澤)이었다.
송정택은 평안북도 신의주(新義州)에
있는 동중학교(東中學校) 출신이었다.
장도영이 신의주 동중학교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김재춘은 일부러 그의 후배인
송정택에게 이 중요한 심부름을 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의 편지는 장도영의 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장도영이 육군본부로
떠난 후였기 때문이었다.
또, 이 편지는 서울 장악과 동시에
장도영에게 전달키 위해서 김종필이 미리
대필했던 것이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필적으로 볼 때 박정희의 친필인 것 같은
심증이 간다. 장도영에게 전달되지는
않았지만 당시의 박정희의 생각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헤아리기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여기에 그 전문을 소개한다.
존경하는 참모총장 각하.
각하의 충성스러운 육군은 금 16일 3시를
기하여 해.공군 및 해병대와 더불어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궐기하였습니다.
각하의 사전승인을 얻지 않고 독단
생각하옵니다. 그러나 백척간두에 놓인
국가와 민족을 구하고 명일의 번영을
약속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오직 이 길
하나밖에 없다는 확고부동한 신념으로
민족적인 사명감에 의하여 결사 감행하게
된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택한 이 방법이 조국과
겨레에 반역이 되는 결과가 된다면
우리들은 국민들 앞에 사죄하고 전원
자결하기를 맹세합니다.
각하께서는 저희들의 우국지성을
촌탁하시오 쾌히 승락하시고 동조하시와
나오셔서 이 역사적인 민족 과업을
수행하는 시기에 영도자로서 전두에서
지도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저희들은 총장 각하를 중심으로 굳건히
신명(身命)을 바칠 것을 다시 한번
맹세합니다. 소관이 직접 각하를
찾아뵈어야 하오나 부대를 지휘중이므로
부득이 동료들을 특파하게 되었사오니
양해하여 주시기 바라옵니다.
여불비 재배.
5월 16일
소장 박정희
박정희가 제6관구 사령부를 떠나자
여기에 와 있던 쿠데타 그룹 멤버들 중
길재호, 유승원, 강상욱 등은 소사에 있는
제33사단으로, 오치성, 김형욱, 이석제
등은 수색의 제30사단으로 달려갔다.
출전을 독려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제33사단의 전투단장 육군 대령
H아워에 맞추어 출동할 수 있는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시간이 되기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숙소에서 장도영의 전화
연락을 받고 달려온 사단장 안동순이
가로막는 바람에 H아워에 맞춰서 출동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1961년 당시 우리
국군의 상명하복(上命下服)의 정신이
얼마나 투철했는지를 실감할 수가 있다.
쿠데타란 목숨을 내건 반란행위다.
그렇듯 비장한 각오하에 결행하려는
쿠데타를 훼방하는 자가 있다면 그
자리에서 쏴 죽이고라도 출동할 것
같았으나 우리 국군은 그렇게까지
무자비하지가 않았다. 제33사단의 전투단장
이병엽이나 오학진은 그런 무자비한 수단을
속수무책으로 난감해 하고만 있었던
것이다.
이럴 때에 길재호, 유승원, 강상욱 등이
독려차 들이닥친 것이다.
"어째서 여지껏 출동치 않고 있는 거야?"
길재호가 호통치듯 힐난하자, 오학진이
풍이 죽어 대꾸했다.
"사단장이 가로막고 있으니 어쩔 수가
없잖아?"
그 말을 듣자, 강상욱이 사단장 안동순을
협박했다.
"20여 분 후에는 서울에 3개 사단이
진주합니다. 해병대하고 공수단도 이미
출동했구요. 전군의 영관장교가 모두
참여했기 때문에 몇 사람이 방해해도
성사가 된다는 것을 아십시오."
"입장이 곤란하면 가만히 계셔도
좋습니다. 이제는 결심할 시기가
왔습니다."
이렇게 사단장 안동순을 붙들고 설득을
펴고 있는 사이에 유승원이 오학진에게
속삭였다.
"우리가 사단장을 붙들고 있을 테니
부대를 이끌고 나가라!"
제30사단의 경우도 사정은 제33사단이나
마찬가지였다. 작전참모 육군 중령
이백일은 사단장, 부사단장, 참모장이
부대를 떠난 후 서둘러 출동태세를
갖추었다.
이미 탄약까지도 지급해 놓고 H아워에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H아워가
되기도 전에 부사단당과 참모장이 귀대를
아니라 사단장 이상국은 귀대할 때 혼자가
아니었다. 헌병 1개 분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장도영은 이상국에게 귀대명령을
내릴 때 어딘가 미덥지 못한 구석이
있었던지 김시진과 이강배에게 헌병 1개
분대를 이끌고 가서 제30사단의 반란
주모자를 체포해 오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아상국 등은 부대에 도착하는 즉시
이백일 체포명령을 내렸다. 다급해진
작전참모 이백일은 작전참모실 뒤 창문을
열고 뒷산으로 도망쳤다. 이로써
출동준비를 갖추고 있던 제30사단은 완전히
이상국의 손아귀에 쥐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전혀 아무런 장애도 받지 않고 예정대로
거사진행을 시킬 수 있었던 부대는 제6군단
설치해 놓고 있던 이 부대는 정각 새벽
1시에 출병, 1시 15분에 X지점에 집결,
서울로 진입하기로 되어 있었다.
제6군단 포병단의 거병은 한치의 오차도
없었다. 단장 육군 대령 문재준(文在駿) 등
5개 대대장이 이끄는 포병대는 1시 15분,
예정된 X지점에서 합류했다. 이들 포병대를
가로막는 장애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
포병들은 그 육중한 포차를 이끌고 마치
무인지경(無人之境)을 가듯 서울을 향해
진군해 나갔다.
같은 시각 제6관구 사령부.
박정희가 떠나고 쿠데타 그룹 멤버인
8기생들이 제30사단과 제33사단으로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참모장실에 있던 송찬호,
돌아왔다. 그들은 쇼파에 헌병차감인
이광선이 앉아 있는 것을 보자 재빨리
허리에 차고 있던 권총을 빼드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거동은 마치 서부극에서 보는
총잡이들처럼 권총을 빼드는 솜씨가
민첩했다.
김재춘이 미소를 담뿍 담고 일어서며
손을 들어 두 사람을 제지했다.
"헌병차감도 협력하기로 했어요."
그제야 두 사람은 다소 안심이 된 듯
권총을 도로 권총집에 집어 넣는 것이었다.
이광선의 처남 역시 군인이었다. 그의
처남 김성구(金聖九)는 육군 중위 시절
박정희의 부관으로 오랫동안 근무했었다.
이광선은 처남 김성구를 통해서 <군인다운
군인>, <청렴결백한 장군> 등으로 박정희를
그 처남의 영향을 받은 탓이었는지
이광선은 박정희를 존경할 만한 장군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런 인물이 쿠데타의 지도자로 추대를
받았다면 협력할 가치가 있다고 그는
판단했을 것이다.
송찬호, 윤태일 두 사람이 사령관실로
들어선 지 채 5분도 안 되어 제6관구
사령관 서종철과 헌병감 조흥만이
사령관실로 들이닥쳤다.
조흥만은 제6관구 사령부로 올 때, 헌병
1개 중대를 거느리고 왔다.
사령관실로 들어서자 조흥만은 쇼파에
앉아 있는 이광선을 보자, 신경질을
부렸다.
"당신 어떻게 된 거야?"
했다. 반란 음모자들을 체포하라고 보낸
헌병차감과 수사관 70명이 꿩 구워먹은
소식이요, 함흥차사가 되어 버려 가슴을
조이고 있다가 급기야는 그 자신이 출동을
했으니 어찌 핏대가 서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잠깐만!"
이광선은 눈짓을 하며 서종철, 조흥만을
복도로 끌고 나갔다.
"왜 그러는 거요?"
조흥만이 의아해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미 때가 늦었습니다."
"때가 늦어? 때가 늦다니?"
"해병대가 이미 출동했습니다. 공수단도
출동했다는 소식입니다."
"했으면 했지 그게 어쨌다는 거요?"
"나도 박 장군에게 협조하기로 했단
말입니다."
이광섭이 씹어 뱉듯이 선언했다.
"뭐?"
조흥만은 놀라서 한동안 멍해져 이광선을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제 체포하든 말든 그것은 헌병감께서
알아서 하십시오."
이광선을 이렇게 말했다.
조흥만은 그 말을 들은 둥 마는 둥
말없이 사령관실로 들어갔다. 서종철도
따라 들어갔다. 사령관실로 들어오자, 그는
506방첩대로 전화를 걸었다.
"각하, 해병대와 공수단이 출동했다고
합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했다는 보고를 나도 받았어. 하지만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하여간 좀 두고
기다려 보자."
장도영의 태도는 어정쩡하기 짝이
없었다.
반란진압의 총책임을 지고 있는 육군
참모총장이 이 모양이니, 서슬이 시퍼런
기세를 가지고 제6관구 사령부로
들이닥쳤던 조흥만도 깊은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체포해야 하나? 아니면
방관하고 있어야 하나? 그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시간은
자꾸자꾸 흘러만 가고 있었다.
7. 국무총리 장면, 숨어버리다
0시 정각, 해병여단의 선두부대가 행동을
개시한 시각.
여기는 휴전선 근방의 포천 제6군단
사령부 포병단.
북한 괴뢰군의 도발을 막고 있는
제6군단의 사명은 막중했다. 군단장은 육군
소장 김웅수(金雄洙).
제6군단 휘하 부대에서 쿠데타에 가담한
자들은 참으로 묘하게도 보병장교들이
아니라 포병장교들이었다. 단장인 육군
대령 문재준을 위시해서 제636대대장인
육군 중령 신윤창, 제933대대장 육군 중령
제99대대장 육군 중령 김인엽, 제6중포
대대장 육군 중령 정오경, 포병단 작전참모
육군 중령 홍종철 등이 바로 박정희에게
아니, 김종필에게 포섭당한 쿠데타
멤버들이었다.
제6군단 포병단에 주어진 임무는 새벽
3시 40분에 육군본부를 점령하는 일이었다.
정각 0시, 자정이 되자 포병단장
문재준은 명령을 내렸다.
"출발!"
군단장 김웅수가 부재중인 것이
무엇보다도 다행이었다. 그는 군단장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지금 제1군 사령부가 있는
원주(原州)에 체류중이었다.
포병단장 문재준의 명령이 떨어지자 1개
대대 300명씩 편성된 5개 대대 1,500명의
올라탔다. 이 80대의 트럭 꼬리에는 각기
육중한 대포들이 달려 있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북한 괴뢰군과
대치하고 있는 제6군단의 임무는 막중했다.
그런 막중한 임무를 지니고 있는 제6군단
포병단이 쥐도새도 모르게 전선(戰線)을
이탈한 것이다.
만일 이 사실을 김일성이 알기라도
했다면 또 어떤 광기를 부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휴전전 북방에 배치돼 있는 북한
괴뢰군은 김일성의 명령 한마디만 떨어지면
단 1초의 여유도 두지 않고 남침을 개시할
수 있는 만반의 태세를 갖추어 놓고
있었다.
그것을 쿠데타 멤버들이 모르고 있을
리가 없었다. 알고 있어도 너무나 잘 알고
쿠데타를 위해서 후방으로 빼돌린 것이다.
참으로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로 아찔한
순간이었다.
서울을 향해서 경원가도를 달려 남하하고
있던 제6군단 포병단은 헌병 초소에서
정지당했다.
"어느 부대입니까?"
초소 헌병이 물었다.
"제6군단이다. 야간작전 훈련중이다."
지프차에 올라 선두에서 부대를 지휘하고
있던 단장 문재준이 헌병의 질문에 이렇게
대꾸했다.
그러자 초소 헌병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상부에서 제6군단이 야간작전 훈련을
한다는 통보가 없었습니다."
"이놈아, 그럼 상부에 물어보면 될 일이
아냐? 어서 비켜."
초소 헌병은 움찔했다. 문재준이 고급
장교의 위엄으로 일갈하거나 말거나 초소
헌병으로서는 제6군단 휘하부대의 야간작전
훈련 통보가 없는 이상에는 부대의 남하를
저지해야 옳았다. 그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의 하나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초소 헌병은 주어진 임무를
포기했다. 문재준의 위세도 위세려니와 1개
분대의 병력으론 포병부대 1개 연대에
해당되는 병력을 저지하기란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임무에 투철한
헌병이어서 기를 쓰고 저지하려 들었다면
문재준이나 그 밖의 쿠데타 멤버들은 초소
헌병을 가차없이 쏴 버렸을지도 모르는
쿠데타를 위해서 궐기한 그들이 한두
명의 생명 따위는 안중에 없었을 것이라는
것은 여기에서 증언부언 하나마나한
일이다.
"출발!"
문재준은 다시 명령을 내렸다.
얼이 빠진 듯한 초소 헌병은 그저 멍한
표정이 되어 포병단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 초소 헌병들은
포병단의 차량행렬이 꼬리를 감춘 뒤에도
상부에 보고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여전히
멍청해져 있을 뿐이었다.
제6군단 포병단도 서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캄캄한 채 사령부를
떠났었다.
설마하니 제6군단 포병단이 쿠데타
있었던 육군 참모총장 장도영은 제6군단
포병단에 대해서는 아무런 명령이나 조치도
취하지 않았던 것이다.
서울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
캄캄하기는 해병대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서울 상황에 대해서는 캄캄한 채
부대를 출동시켰던 것이다. 하기야
해병대는 육군 참모총장의 권한이 미치지
못하는 별도의 부대였다.
그러므로 장도영이 해병여단이 쿠데타의
행동부대라는 것을 알았다고 하더라고
해병대 사령관 김성은(金聖恩)에게 통보를
하고 협조 요청은 할 수 있을지언정 그
이상의 조치를 취할 방법은 없었다.
쿠데타 행동부대로 유일하게 제동이 걸려
있는 것은 오직 육군 공수단뿐이었다.
준장 장호진(張好珍)이 단장실이 턱 버티고
앉아서 부대출동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어차피 목숨을 걸고 쿠데타에 참가하기로
한 이상에는 그까짓 장호진 하나쯤 단
한방에 거꾸러뜨리고 출동하면 그만이었다.
거칠고 용감하기로 말한다면 공수단만한
용사들이 또 있겠는가. 그런데 바로 이
점이 백 개의 입을 가지고 칭찬해도 모자랄
정도로 아름다운(?) 마음씨를 지니고 있는
한국 육군 공수단 용사들이었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고 하지만
그 점에 있어서는 육군 공수단 역시
마찬가지였다. 상명하복을 절대적인 신조로
삼고 있는 공수단 용사들은 상관을
않았다.
(이런 빌어먹을, 이 노릇을 어쩌면
좋지?)
공수단 단장 육군 대령 박치옥은 도무지
제정신이 아니었다. 출동 예정시간인
0시보다 벌써 30분 이상이나 지나 있었다.
쿠데타 제1선봉부대로 지목되어 있는
공수단이 출동을 하지 못할 경우 쿠데타에
차질을 빚게 될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었다. 박치옥이 그 어떤 결단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에 대대장 육군 중령
김제민이 급히 단장실로 뛰어들어 왔다.
그는 단장실로 뛰어들어 오자 박치옥의
귀에 대고 나직이 보고했다.
"단장님, 지금 중대장, 소대장 등 위관급
장교들이 무기고를 부수고 야단입니다."
박치옥은 힐끗 장호진의 표정을
살펴보고는 황급히 밖으로 달려나갔다.
부대 무기고가 있는 곳으로 달려와 보니
중대장 육군 대위 차지철(車智徹)이 도끼로
무기고의 자물쇠를 부수고 있는 중이었다.
(됐다. 위관장교들이 저렇듯 혈기에 차
있다면.)
박치옥은 이제는 더 주저할 것도 망설일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놈의 자물쇠가 꽤나 단단했다.
황소 같은 몸집을 한 차지철이 아무리 힘을
다해 내리쳐도 연방 불꽃만 튀길 뿐 좀처럼
부서지지를 않았다.
해병여단 사령부 안에 있는 예배당에서
군종참모인 김광덕의 뜨거운 기도를 듣고
몰았다.
주력부대를 태운 트럭 종대도 요란한
엔진소리를 내며 어둠이 깔린 김포
통진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부대 이동차량대를 목격한 사람들은
참으로 장엄하다고 느꼈으리라. 사실
한밤중의 부대 이동차량대는 장엄한
느낌보다는 머리칼이 쭈뼛하고 곤두설
정도의 공포감을 자아내게 해준다.
김윤근은 차를 세우고 한동안이나
차량대의 행진을 지켜보았다.
믿음직스럽다는 느낌과 함께 영문도 모르고
출동하고 있는 병사들한테 미안한 느낌이
들었다.
이 시간에 이르기까지 몇몇 지휘관을
제외한 해병용사들은 그들이 왜 한밤중에
그저 야간 연습을 위해서 출동하고 있는
것으로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한동안 차량대를 지켜보고 있던 김윤근은
차량대가 행진해 오는 반대 방향으로 다시
차를 몰았다. 그가 찾아간 곳은 탱크
중대였다. 정문 보초가 차를 세웠다.
용건을 물으려 다가서다가 범퍼 위의
별판을 보고는 기겁을 하고 놀라서 경례를
붙이는 것이었다. 경례를 받고나자
김윤근은 중대장을 만나려고 하니 깨우라고
지시했다.
중대장 막사에 들어서자, 해병 대위
김현호(金鉉浩)가 옷을 입고 있다가
김윤근을 맞아 주었다. 그는 김현호에게
쿠데타에 대한 대강의 설명을 해주었다.
그의 말을 다 듣고 나자 김현호는 주저치
않고 말했다.
"여단장님이 나선 이상에는 저도
나서겠습니다."
역시 동지애로 뭉쳐진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었다.
"오전 4시에 출동할 수 있겠소?"
김윤근이 물었다.
"네. 명령만 내리시면 언제든지 출동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어 놓고 있습니다."
김현호의 대답은 믿음직스럽기만 했다.
휴전선을 지척에 두고 있는 해병여단
탱크 중대였다. 그들은 24시간 언제나
출동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어 놓고 있었던
것이다.
"좋소! 그러면 오전 4시에 여단을 출발,
서울로 진군해 오시오."
김윤근은 이 한마디 명령을 남기고
그때 마침 여단 지휘반이 출발하려 하고
있었다. 김윤근은 그 여단 지휘반에 끼여
여단본부를 나섰다.
그때가 1시. 그러니까 날짜는 5월
15일에서 16일로 바뀌어져 있었던 것이다.
청진동 대폿집에서 대폿잔을 기울이고 있던
박정희가 비장한 각오를 하고 제6관구
사령부로 달려온 바로 그 시간이었던
것이다.
새벽 1시 30분.
장도영이 진치고 있는 506방첩대
대장부속실에는 참모총장의 부관과
보좌관들이 공연히 서성거리고 있었고
앉아 있었다. 그 곁에는 이철희와 이희영도
앉아 있었다. 장도영이 앉아 있는 테이블
위에는 소형 권총이 놓여 있었다. 모젤 4호
권총이었다.
이때 제5범죄수사대 대장 육군 중령
방자명이 대장실로 들어왔다.
그를 본 장도영은 반색을 했다.
"벌써 갔다 왔나?"
"네. 이상국 사단장하고 헌병차감하고
같이 갔었습니다."
"그래, 수고했어."
방자명의 보고를 듣고 나자, 장도영은
문득 생각난 듯이 군용 전화기의
송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제30사단의 사단장을 연결해!"
제30사단 사단장 이상국과는 곧
"총장이다. 신임할 수 있는 병력으로 4개
소대를 편성해서 대기시켜라. 내 명령
외에는 누구의 지시도 받지 말라."
장도영은 명령했다.
이게 도시 무슨 소리인가? <신임>할 수
있는 병력이라니?
그럼, 제30사단에는 사단장인 이상국이
<신임할 수 없는 병력>도 있단 말인가?
더구나 1개 사단 병력 중에서 신임할 수
있는 4개 소대 병력을 빼내서 뭘 어쩌겠단
말인가? 4개 소대 병력이라면 1개 중대
병력밖에 되지 않는다. 1개 중대 병력으로
쿠데타군을 저지하겠다는 말인가?
아아, 장도영은 마냥 답답하기만 했다.
그때 김포에 있는 해병대가 출동했다는
긴급보고가 들어왔다. 아마도 이
같으나 그 경위는 확실치가 않다. 장도영은
다시 군용 전화기의 송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헌병감 조흥만하고 즉시
연결되었다.
"6관구 사령부에 집결해 있는 반란
음모자들의 처리가 어찌 됐나?"
"헌병차감 이광선 대령에게 수사요원
70명을 붙여서 보냈습니다만, 지금껏
아무런 보고도 없습니다."
조흥만의 대꾸였다.
"지금 몇 신데 아직 보고가 없단 말야!"
장도영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헌병감이 직접 헌병중대를 이끌고 6관구
사령부로 출동해! 그리고 해병대가 출동한
모양이니까 헌병으로 하여금 저지선을
구축해 놓도록 해."
이렇게 미온적인 저지책을 명령하고
있었는지 또다시 의문을 품게 된다.
알고 있는 사람은 익히 잘 알고 있겠지만
헌병은 전투요원이 아니다. 전쟁이 터졌을
경우 헌병은 독전대로서 투입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그들이 전투부대와 똑같이
전투를 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장도영은
어째서 전투부대도 아닌 헌병대로 하여금
한강 다리에 저지선을 구축할 생각을
했던가 말이다.
서울 근교에도 신속히 동원할 전투부대가
없지는 않았다. 제30사단이 있었고
제33사단이 있었다. 물론 쿠데타 그룹이
행동군으로 이용할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지만 이미 사전에 그 계획이 탄로나
사단장들이 부대를 장악하고 있지
그렇다면 어떤 이유에서든 이 두 사단을
동원해서 한강 다리에 저지선을 구축해야
옳았다. 그것을 장도영이 그렇게 하지를
않고 헌병대를 출동시켜 저지선을
구축하도록 명령을 내렸던 그 속셈은
무엇이었던가 말이다.
그는 진정으로 쿠데타를 저지해야
되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없었던 게
아니었을까? 장도영은 조흥만과의 통화를
끝내고 나자 이번에는 일반전화를 이용,
반도호텔에 묵고 있는 장면에게 전화를
걸었다.
장도영의 전화를 받은 사람은 장면의
경호대장인 경감(警監)
조인호(趙仁鎬)였다.
"웬일이십니까, 총장께서 이 밤중에?"
"해병대가 장난질치는 것을 막도록
조처해 놨으니 안심하라고 총리께 말씀드려
주십시오."
"아니 밑도 끝도 없이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하여간에 그렇게 말씀드려 주십시오."
조인호도 쿠데타설이 한창 나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무엇인가 좀
이상하다는 예감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장도영이 수화기를 놓으려는 눈치를 채자
다급히 소리쳤다.
"기다리십시오, 총장. 그건 중대한
문제인 만큼 총리께 직접 보고토록
하십시오."
조인호는 급히 침실로 뛰어들어가 잠들어
있는 총리를 깨웠다.
전화입니다."
"이 밤중에?"
눈을 뜬 장면은 의아한 표정으로
머리맡의 송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나요. 무슨 일이오, 장 장군!"
"각하, 30사단에서 반란하려는 것을 막아
놨습니다. 그리고 해병대가 술에 취해
가지고 장난을 하려고 해서 헌병대를 보내
막도록 조치했습니다."
장도영의 보고는 조인호한테보다는 조금
더 구체적이었지만, 장면의 미간이
찌푸려지며 표정이 굳어졌다.
"내가 며칠 전에 말하던 그것 아닌가?"
장면은 다그치듯 물었다.
"아닙니다. 별것 아닙니다. 총리
각하께서는 그저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만
하겠습니다."
"이보게, 그게 무슨 소리야? 별일
아니라고만 하지 말고 내게 직접 와서
진상을 보고해!"
장면이 거칠게 소리쳤다.
"예, 알겠습니다. 조치를 취하고 바로
그리 가 뵙겠습니다."
말을 마치자 장도영이 먼저 전화를 툭
끊었다. 불손하기 짝이 없는 행위였다.
윗사람이 먼저 전화를 끊기도 전에 앞질러
전화를 끊는 이런 불손한 행위가 어디 있단
말인가? 장면은 감정이 언짢았으나 참았다.
(30사단이 반란을 일으키려 했고
해병대가 장난질을 하려 했다? 그렇다면
이게 쿠데타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장면은 장도영의 애매모호하기만 한
전화를 끊어버렸으니 구체적으로 꼬치꼬치
따질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침대에서 내려와 평복으로
갈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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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뭐라도 한 공 제대로 봐 봐야 쓰것는디... 정치 이약은 누가 썼던 간에 다 지는 잘했다는 이약이라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