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심강변에서
▲ 아스타나 풍경(blog.naver.com/citiopera에서)
그리 크지 않은 (인공으로 만든 강이라 한다. 그래서 사실은 물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고여있는) 잔잔한 강, 까만 울타리가 쳐진 강변 산책로. 유모차를 끌고 가는 어머니, 조깅하는 사람, 왁자지껄 떠들며 지나가는 젊은이들... 이심강변에서만큼은, 끝없이 펼쳐지는 들판에 서리는 메아리처럼 아련한 그래서 양들의 울음소리 속으로 스며들어 버리는, 소박하지만 우울한 낭만을 지닌 양치는 소녀가 아니라, 야심만만하고 발랄한,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자신을 끊임없이 가꾸고 노력하는, 세련되면서도 우아한 도시여성이 될 수 있었다.
물론 이심강을 끼고 있는 아스타나는 시골마을이 아니라 수도이긴 하지만 몇 년 전만 해도 아크몰라라는 조그만 시골마을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유명한 건축가들에 의해 설계되었다는 여러 건물들과 유람선까지 떠 다니는 강, 그리고 강변에 고풍스러우면서도 현대적으로 지어진 고급 아파트 건물과 상가...
과연 일국의 수도라 할 만하다.
11시 58분 알마티발 아스타나행 기차. 차를 타는데 기차표를 보며 차장이 묻는다,
여권 등 서류가 다 있냐고. 있다고 대답하니 보지도 않고 그냥 들어가라고 한다. (보통은 차장이 해당 기차객실 앞에 서서 여권이나 신분증과 차표를 일일이 확인한다)
기차가 출발하고 30분 정도 지나서 차표를 회수해 가는 차장, 인상이 좋다.
수도를 왕래하는 기차라 그런가... 실내도 깨끗하고... 내다보이는... 이어지는 푸르스름한 평지. 아무리 보아도 바다가 지겹지 않은 것처럼 펼쳐진 들판도 아무리 보아도 지겹지 않다.
이어지는 평지와 저 멀리 수많은 언덕들. 7시. 강렬하고 눈부시던 햇살이 조금씩 눅는다. 9시. 아주 큰 호수가 지나간다, 저 멀리 하늘빛이 비치는 호수가. 노을이 지면서, 계속 이어지는 낮은 언덕과 호수 풍경을 한참 쳐다보는데 갑자기 ‘AZAMAT'라고 돌을 얹어서 쓴 글씨가 보인다.
피식 웃음이 돌며 순간 황량한 언덕과 하늘빛 거대한 호수에서 느낄 수 없는, 사람의 체온이 따뜻하게 느껴진다.
노을지는 하늘과 어스름 깔려 가는 대지. 한시간이 지났는데 아직도 호수가 보인다.
같은 꾸페의 여자분에게 물었더니 ‘발하쉬’호수라 한다.
호수라 해야할 지 바다라 해야 할 지... 과연 발하쉬 근처 역에선 각종 생선을 많이 판다.
그러나 정작 호수 근처엔 불빛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거대한 호수이지만... 위락시설이 없다는 건 그만큼 개발이 안되어 있다는 것인가...
다음날 아침 8시 40분, 아스타나에 도착. 어제 출발할 땐 분명 햇살 강렬한 여름이었는데... 도착하니 가을이다.
짧은 소매옷으로 버티기엔 좀 괴로운 쌀쌀한 날씨... 지도상으로도 알마티에서 아스타나까지는 위도차이가 꽤 나니까, 과연... 긴팔옷을 준비해오기 망정이지...
큼직큼직하고 넓은, 그리고 깨끗한 시가지. 큰 도로의 건물 뒤편은 사실 볼 품 없긴 하지만, 도로에서 내다뵈는 풍경만큼은 훌륭하기 그지없다.
한 나라의 수도로 발전해 가는 도시답게 신선하고 생기있는 모습. 어쩌면... 다니는 자동차들도 저렇게 깨끗할까... (나중에 알고 보니 자동차가 지저분한 채 몰고 다니는 것도 단속에 걸린다고 한다) 도로 한쪽은 한창 아스팔트를 까는 공사를 하고 있다.
그리고... 바람이 장난이 아니다. 겨울에 눈이 올 때도 사선으로 떨어지는 게 아니라 거의 가로로 떨어진다더니...
8월의 아스타나에서 무엇보다 볼 만한 것이라면... 이심강... 그리고 강변 야외 카페에서 먹는 샤슬릭과 밤의 레이저쇼. (밤에 레이저를 쏘아서 수상쇼를 한다는데, 사실 그 쇼는 보지 못했다. 아스타나는 야경이 더 볼 만하다던데...) 물론 아스타나는 아직 건설되고 있는 도시라 중심도로만 벗어나도 건물도 후줄근하고, 조금 더 벗어나면 완전히 시골이다.
그러나 이심강에서 본 풍경은 유럽풍의 깔끔하고 세련된 분위기.
물이 없는 땅은 메마르고 건조해 보이지만... ‘강’이 주는 부드러운 이미지와 고급스러워 보이는 아파트(처음에 봤을 때 호텔이나 국회의사당 정도의 관공서인지 알았다)와 궁전, 박물관 등은 지금까지 카자흐스탄에서 봐왔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이심강에서 멀지 않은 곳의 대학건물과 실내체육관, 기념동상 등 중심거리에서 내다뵈는 건물들은 모두 세련된 디자인의 화려한 것들이었다.
맑은 날씨의 아스타나도 잠시, 다음날부터 구름이 끼고 비가 오는 듯 마는 듯... 들어보니 아스타나 날씨는 변덕이 상당히 심하다고 한다.
죽죽 뻗은 산으로 둘러싸인 알마티와는 다르게 사방이 탁 트인 이곳은 거치는 것이 없이 바람이 불어와 비가 오는 날씨엔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늦가을 같은 음산한 분위기마저 조성했다.
비가 자주 오기 때문에 자동차를 깨끗하게 유지하는 것도 꽤 번거로운 일이라 한다.
그리고 아직은 가스나 전기, 수도 상황이 알마티만큼 공급이 되고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한다.
잠시 숙식을 신세진 집도 며칠째 가스가 공급되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선물로 미리 준비해간 휴대용 가스가 요긴하게 쓰였음은 물론이다.
이심강 건너편으로는 제법 넓은 놀이공원이 조성되고 있는 중이었다.
순전히 꼬마직원들에 의해 운영되는 꼬마기차를 탔는데, 자기네들끼리 차표를 확인하고, 안내방송도 하고 왔다갔다하며 이것저것 확인하는 아이들을 보며 한편으로 대견스럽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공원엔 사람들도 많았고, 카페나 놀이시설도 제법 있었으나... 아직 제대로 꾸며져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공원 안이라 해야 할지 근처라 해야 할지, 여기저기 다니다 보니, 카자흐스탄을 축소한 모형을 만드는 것이 보인다.
카자흐스탄 지도를 커다랗게 만들어 놓은 셈인데, 특징적인 건물들도 만들어 세우는 모양이었다. 또 국회건물 뒤쪽으로 특이한 모양의 탑이 있는 것도 보았는데, 무슨 위령탑인 듯 하다.
시장에도 잠시 들렀었는데... 물가가 알마티의 2배라고 들었는데, 과연 야채류는 알마티 가격의 2배 정도를 부른다.
공산품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으나 어쨋든 알마티보다 비싸다.
주거에도 확실히 알마티보다 비용이 많이 든다, 시설이 썩 훌륭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12시 20분경 알마티행 기차 출발, 둘러봐도 탁 트인 지평선뿐인 아스타나에 나흘 정도 머물고 이제 떠난다.
저 멀리 시가지의 중심 건물이 지나가고 이내 땅집 풍경의 아크몰라. 3시경엔 카라간다를 지나쳤는데, 공장과 아파트들이 즐비했다. 삭막한 느낌.
같은 꾸페에 청년이 있었는데, 아기를 동반한 아주머니와 자리를 바꾸어 주었다. (아주머니의 원래 자리는 2층 침대자리였다.) 2살 된 여자아기, 제 고집대로 안되니 금방 울음을 터트린다.
11시 넘은 시각, 불을 끄니 달빛에 훤하다.
잠들기는커녕 차를 마시며 잡담을 나누고 있는 맞은편에 앉아있는 아주머니 가족은 새벽 3시에 목적지 ‘슈’란 곳에 도착한다 한다.
달빛이 조요한 들판, 기차 안에서도 별똥을 봤다.
이신애
고려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