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선(金忠善, 1571~1642)
임진왜란 때 귀화한 일본인.
일본명은 사야가(沙也可, さやか), 원래 이름은 하라다 노부다네(原田信種)이다. 자(字) 선지(善之), 호(號) 모하당(慕夏堂). 이름을 하사받은 후의 본관은 김해이다.
1592년 4월 13일 일본은 육지부 침략을 목표로 하여 제1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제2군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1562~1611), 제3군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로 나뉘어 북상했다. 당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かとう きよまさ) 휘하의 좌선봉장(左先鋒將)으로 3,000여 군사를 이끌고 침입했다가, 경상도병마절도사 박진(朴晉)에게 귀순했다. 귀순후 처음에는 순찰사 김수(金睟, 1547~1615) 등을 따라서 경주, 울산. 진주 등지에서 일본군과 싸워서 큰 전공(戰功)을 세웠고 후에는 1595년 경상우병사가 된 김응서 장군 휘하에 있었다. 일본군을 여러 차례 무찔러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에 올랐다. 1593년 도원수 권율(權慄), 어사 한준겸(韓浚謙) 등의 주청으로 선조로부터 선조(宣祖)로부터 김충선(金忠善, 김해김씨) 이름을 하사받고 자헌대부(資憲大夫. 정2품)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는 10여 년 간 북쪽 변경의 방어를 맡았고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정헌대부(正憲大夫, 정2품, 자헌대부와 같은 품계인 정2품이지만 자헌대부의 상위 품작)에로 승진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이괄의 부장 서아지(徐牙之)를 잡아 죽이는 등 난의 진압에 공을 세웠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광주(廣州) 쌍령(雙嶺)에서 청군 500여 명을 죽인 전과를 올려, 임진왜란 때의 공에 더하여 임갑병(壬甲丙) 삼란(三亂)의 공신으로 일컬어진다. 청과 화의(和議)가 성립된 뒤에는 대구(대구광역시 달성군(達城郡) 가창면(嘉昌面) 우록리(友鹿里))로 내려가 터를 잡았다.
1600년 진주 목사 장춘점(張春點)의 딸 인동장씨(仁同張氏)와 혼인하여 살면서 우록김씨(友鹿金氏)의 시조가 되었고 5남을 두었다. 인조 20년(1642) 72세로 사망 정 2품 정헌대부 지중추부사 병조판서(正憲大夫 知中樞府事 兵曹判書)로 추증(追贈) 되었다.
김충선은 가훈·향약 등을 저술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정조 22년 1798년 6대손 김한조(金漢祚)가 편찬한 모하당문집(慕夏堂文集)이 있다.
그리고 정조 13년 1789년 대구 우록리에 김충선을 배향하는 사액서원 녹동서원(鹿洞書院)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