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귀향
구 활
이제 이 도시를 떠나야 한다. 젊음을 바친 직장도 미련 없이 버리고 떠나야 한다. 어쩔 수 없이 도시에 살고 있는 미워진 자신까지도 버려야 한다. 날이면 날마다 거듭해 오던 이별 연습도 마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멋진 귀향, 화려한 이 한 마디를 앞세우고 나는 돌아가야 한다. 잃어버린 고향이 그 어디멘지 몰라도 기어이 나는 돌아가고야 말리라. 가서 집을 지으리라.
집 뒤엔 얕은 언덕과 구릉이 먼 산으로 연해져 있고 먼 산은 걸어서 반 마장 정도 거리에 있었으면. 그 곳에 살면서 저녁 무렵이면 언덕에 올라 서산으로 지는 해를 배웅하며 붉게 물드는 황혼을 보리라. 그 장려한 낙조 속에서 내 저리고 아팠던 청춘과 생애를 다시 보리라.
집 앞에는 실개천 보다 좀 더 넓은 거랑(川)이 크고 작은 조약돌로 모자이크되어 있고 그 조약돌 사이로 맑은, 정말로 맑은 시냇물이 일년 사철 흘러가는 곳. 투망이나 반두를 들고서도 걸어서 한번쯤 쉬고 닿을 수 있는 거리. 낡은 자전거라도 있으면 단숨에 이를 수 있는 곳. 그런 곳에 살리라. 정말 그러리라.
강변 여기저기엔 키 큰 미루나무. 동네 입구에는 폭넓은 정자나무 한 그루가 노인들과 조무래기들을 불러 모으고. 아, 우리 집 입구에 들어서면 감나무 숲 속에 갇힌 듯한 토담집 하나가 그림처럼 아름다워라.
서쪽 담벼락에 붙어선 키 큰 참가죽나무 한 그루는 해마다 햇순을 피워내, 그래서 봄마다 상큼한 입맛을 돋워 주고. 동쪽 우물가에는 갓 튀겨낸 박산을 뒤집어쓴 듯한 조팝나무와 박태기나무가 친한 이웃처럼 이마를 마주 대고 서 있는 우리 집. 그리워 그리워하면서도 꿈에서만 찾아가는 아름다운 집.
찌그러진 두레박으로 길어낸 우물물은 토란 밭으로 비워지고 녹색 우산을 받쳐 든 수줍은 새악시 같은 토란들의 미소가 모여져 아침마다 수정 같은 물방울이 돌 돌 도올 굴러 떨어지는 곳. 사립문에서 처마 밑 섬돌까지는 열 발자국 아니 스무 발자국쯤. 비 오는 날을 위하여 동리 곳곳에 흩어져 있는 맷돌과 풀매 조각으로 징검다리 식 디딤돌을 만들어야지.
집 경계인 흙돌담 벽면에는 그 동안 산천을 돌아다니며 탐석했던 돌중에서 가려 뽑고 남은, 선에 들지 못한 형형색색의 돌들로 멋을 부려야지. 남은 땅은 채마밭과 꽃밭을 반반씩 일궈야지. 그래서 계절이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상추 쑥갓 오이 실파 아욱 부추 가지 등 온갖 푸성귀를 키우고 꽃밭은 봉선화 채송화 맨드라미 접시꽃 나팔꽃 등을 적절하게 어우러고 배열한 후 대추나무 아가배나무 꽃사과나무 등 유실수도 심고. 그래, 오디 열매가 주렁주렁 달리는 뽕나무 한 그루쯤 심는 것도 잊지 말아야지.
어느 빛 밝은 날, 나를 찾아오는 손님이 문간을 들어서면서 ꡒ이거 고향이네. 정말 고향이야ꡓ하고 소리칠 수 있도록. 그렇게 우리 집은 고향에서만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풀꽃들과 나무들을 가득 심어야지. 이렇게 아름다운 나의 집.
서쪽 감나무 밑에는 낱알과 굼벵이 지렁이 따위를 쪼다가 지친 닭들이 하루의 피로를 풀 수 있는 닭장을 짓고 횃대도 높이 올려야지. 닭들은 동트기 전부터 부움하게 밝기 시작하는 동녘 하늘만 보고도 새벽을 알리는 꼬끼요를 목청 높여 노래할 수 있도록.
동창이 있는 서재에서 밤늦게 까지 글을 쓰다가 새벽을 알리는 계명성을 꿈속 같이 아련하게 들을 수 있도록. 간혹 찾아오는 친구들과 늦은 술을 들다 그대로 쓰러져 자다가도 꼬끼요 소리에 벌떡 일어나 찬물 한 바가지를 벌컥벌컥 들이 킨 후 아직 모든 것이 잠들어 있는 신새벽의 숲길을 취한 걸음으로 걸을 수 있도록. 아 그 축복의 나라 속에 있는 작은 나의 집.
늦은 아침상을 들고 있는데 두 그루의 나무가 자라 마치 하나의 나무처럼 되어버린 쌍둥이 감나무에 둥지를 틀고 있는 까치들이 집 주위를 선회하며 까 까까 까악 하고 신나게 떠들어 대는 곳.
이미 반백으로 늙어버린 아내가 ꡒ여보, 아이들에게서 무슨 좋은 기별이 올려나 봐요ꡓ하고 아직 우체부의 붉은 가방 속에 들어 있는 소식을 까치를 통해 미리 알아차리기라도 하면 그 궁금증 때문에 아침 식욕을 잃어버리는 나의 집.
나는 정말 그런 곳에서 살리라. 여름밤이면 처마 밑에 매달아 둔 멍석을 깔고 마당 어귀 여기저기에 엉겅퀴와 쑥대 등을 말린 건초들에 모깃불을 지피고 아스라이 치어다 보이는 은하수 너머에 마음까지 올려 보낼 수 있는 곳.
짧은 생애동안 별의 시만 쓰다 간 시인 윤동주를 생각하다가 스테파네트 아가씨를 통해 아름다운 목동의 이야기를 들려 준 알퐁스 도테 선생도 자주 떠올릴 수 있도록.
그것도 지겨우면 동리 주막에서 가져 온 모가지에 줄을 묶어 넣어둔 우물 속의 막걸리를 꺼내 풋고추와 열무김치를 안주 삼아 조촐한 술판이라도 벌여야지. 겨울이면 짚동 사이에 얼지 않게 갈무리해 둔 홍시를 꺼내 먹거나 짚 봉태기 속에 낳아 둔 씨암탉의 달걀 몇 개를 무명실로 감아 질화로의 불씨 옆에 파묻어 두었다가 꺼내 먹는 맛.
오후부터 내린 눈이 지붕 위에 한 자쯤 쌓이면 혹시 무게를 이기지 못한 서까래들이 우지끈 소리를 낼까 보아 긴 대나무 장대로 쌓인 눈을 털어 내는 야간 노동의 즐거움. 아, 꿈속에서만 천 날 만 날 찾아가는 그리운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다.
나는 아직 이 도시에 머물러 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도시의 회색 하늘을 쳐다보며 자신에게 ꡒ왜 머물고 있는가?ꡓ고 질타하고 ꡒ어서 달려가라.ꡓ고 재촉한다. 그러나 이곳에서 맺고 있는 인연의 끈들을 풀거나 끊기에는 시간과 여건이 예사롭지 않아 ꡒ그래 알았어.ꡓ하고 약간의 말미를 줄 것을 간청하곤 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이렇게 우물거리고만 있다가 영영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왈칵 겁이 날 때도 있다. 나의 몸과 기억들이 더 이상 쇠잔해지기 전에 피곤한 육신이 안주할 수 있는 곳으로 떠나야 할 텐데.
고향을 생각하면 그저 가슴만 답답하고 기억 속의 그곳은 아득할 뿐이다. 그래서 꿈속에서 자주 행하는 나의 귀향은 우울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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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가 노트
우리 집 가풍을 지키며
우리 집에는 제왕 절개 수술로 아이를 낳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할머니 어머니 아내 딸 며느리 이렇게 나열하면서 손꼽아 봐도 아무도 그런 여인은 없다. ‘자연 분만이 싸게 먹힌다’는 경제를 앞세운 알뜰 환경이 가풍을 만든 셈이다.
나도 글을 쓰면서 대체로 가풍을 따른다. 덜 익은 글을 끄집어내 인큐베이터에 넣어 요모조모 인간이 될지 말지를 뜯어보며 노심초사하지 않는다. 되면 되고 말면 말고 이른바 배짱이다. 어릴 적 우리 동네 아이들 중 어쩌다가 배냇병ㅅ으로 태어난 아이들이 있긴 해도 대부분 자연분만으로 태어난 아이들은 건강했다.
가풍을 따른다고는 하지만 때론 설사를 만난 듯한 잡지사들이 뒷간 자리 비워달라고 아우성칠 땐 제왕 절개로 설익은 글들을 바쁘게 드러낼 때도 더러 있다. 그 땐 “손가락 길이가 어떻게 다 같을 수가 있냐”며 내 자신을 위로하지만 송구스런 마음은 한참 동안 지속된다.
임신 기간 중의 태교는 주로 산행을 하면서 한다. 능선을 휘어 감는 바람소리, 계곡의 살가운 물소리, 살아 있음의 환희를 확인시켜 주는 숲 속의 새소리, 그리고 뭇 벌레들이 부끄러워 몸을 움츠리며 사랑하는 소리 소리들이 모두 선생님들이다.
산에서 온갖 소리들을 들으면서 힘겨운 산행을 하면 희미한 불씨 같은 글의 소재가 단번에 살이 찌고 뼈가 굵어진다. 산행은 혼자도 좋고 여럿이 함께 가도 상관없다. 어차피 혼자서 걷는 것이니까. 산에서는 첫 문장을 만들고 끝부분을 간추린다. 그리고 문맥의 흐름은 개울물에 소나무 껍질로 만든 조각배를 띄워 그냥 흘러가게 만들 듯 자유스럽게 버려둔다. 항상 설계도 없이 글을 쓰기 때문에 구성이 탄탄치 못한 단점이 있긴 하지만 개의치 않는다.
그러면 정충 격에 해당하는 글의 씨앗은 어디서 오는 걸까. 내 경우에는 어디서 누가 보내 주는 것 같다. 글의 소재가 될만한 그 무엇이 ‘반짝’하고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그럴 때 나는 그 걸 받아들이지 않고 그냥 둔다. 대부분의 ‘반짝’은 남정네의 바람기처럼 일회성으로 끝나지만 유독 질긴 놈은 사나흘 아니라 몇 달이 지나도록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질 속에 들어온 수많은 정충들이 모두 아기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안다. 나는 인연처럼 끈끈하게 달라붙는 놈만 받아들여 산으로 안고 간다. 내 글이 잉태되는 교접 장소는 머리 속인지 가슴 속인지 그건 아직 잘 모르겠다.
어디서 누가 보내 주는 것 같다던 그 누구는 다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다. 내 속에는 글을 쓰는 내가 있고, 글을 쓰도록 도와주는 다른 내가 있다. 글을 쓰는 나는 감성적이고 도와주는 나는 이성적이다. 나는 둘 중에 누구도 편애할 수 없고 또 배반할 수도 없다, 이성적으로 사유하고 그리고 글쓰기는 감성적으로 하고 있다는 게 맞는 표현인지 그것도 잘 모르겠다. 그래, 이런 문제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내 문학을 위해 사실 문학이랄 것도 없지만 그동안 ‘이성이’가 큰 고생을 한 대신 ‘감성이’는 놀고먹었다. 허기야 아버지 부재에 따른 가난했던 유년의 경험은 둘 다 함께 겪었던 귀한 고생이었지만 그것이 오늘의 내 문학적 모태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면 그렇게 노여워하거나 슬퍼할 일이 아니다. ‘초년고생은 황금을 주고 산다’는 말은 내게 있어 로또복권 같은 횡재이거나 기도와 같은 위안이었다.
‘이성이’는 부지런하고 ‘감성이’는 아주 게으르다. ‘이성이’는 ‘감성이’가 글을 잘 쓸 수 있도록 지치지 않고 읽고 생각한다. 그러나 ‘감성이’는 글쓰기가 지겹고 귀찮고 때론 두려움을 느끼기도 한다. ‘감성이’는 지금도 ‘자연 뻥’이나 공짜 탈 생각만 하고 있다. 그러나 세상사가 뜻대로 되지 않듯 어느 시점에 이르면 쓰지 않고 못 배긴다. 어쩌면 팔자이자 운명이다.
도가에서 도를 닦는 데는 법(法) 재(財) 지(地) 여(侶)등 네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스승 돈 암자 도반을 가리킨다. 도를 닦는 데는 스승과 기간 동안 버틸 재물 그리고 장소와 친구가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이 이야기를 내 문학에 대입해 보면 나는 네 가지 중 어느 것도 흡족할 정도로 갖추지는 못했지만 네 번째 도반의 경우만은 크게 불평할 정도는 아니다. 나는 문학이 막연한 환상 또는 무지개처럼 일렁거리던 대학시절에 김원일(작가) 강운구(사진가) 도광의(시인) 등과 그 주변의 여러 친구들을 만나 문학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었고 공부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을 따라 가기 위해선 ‘하루 한 권의 책을 읽어야 겠다’는 엉터리없는 결심이 수필 문단의 말석에 앉아 이렇게 음풍농월을 하게 된 단초가 되었다. 그러나 하루 한 권의 독서는 불가능했다. 어릴 적 장래 희망이 대통령인 아이가 면서기가 되듯 목표를 높게 잡은 덕에 한달에 열권은 읽을 수 있었다. 지금도 그 생각에 변함은 없다.
나는 시를 열심히 읽는다. 요즘 젊은 친구들이 쓴 야한 소설은 코드에 맞지 않아 읽지 않는다. 그리고 수필은 많이 읽지 않는다. 수필이론은 한번도 읽어 본 적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수필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모른다. 그런데도 나는 수필을 쓰고 있다. 무형식이 형식이라고 하더라도 내 글은 형식에도, 무형식에도 맞지 않는 그런 글일 게다.
앞서 이야기한 ‘반짝’하는 그 무엇은 대부분 시에서 오는 것 같다. 내 글은 시의 연장이라고 생각하고 시를 쓰듯 수필을 쓴다. 그리고 한 가지 추가할 게 있다면 신문을 읽다가 아름다운 문장을 만나면 아무렇게나 뜯어 붉은 연필로 밑줄을 긋고 스크랩을 한다. 그런 버릴 수 없는 문장은 아무도 모르게 이미 써둔 글 속에 집어넣기도 하고, 앞으로 쓸 글 속에 끼워 넣기 위해 기억의 서랍 속에 은밀히 감춰둔다.
장황한 이야기를 요약해 보자.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쓰고, 그리고 쓰고 나선 많이 고치면 내 글쓰기는 끝이 난다. 그러고 보니 옛 어른들의 말씀은 하나도 버릴 게 없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 에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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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산 하양출생. 경북대 영문과 졸업. 매일신문 문화부장 논설위원 역임. 저서 <하안거 다음날> <고향집 앞에서> <바람에 부치는 편지>등. 현대수필문학상 대구문학상 금복문화예술상 원종린수필문학상대상수상. 방일영문화재단 집필지원,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저술지원. 매일신문에 <구활의 스케치 기행> 100회 연재.
*'배냇병ㅅ' 은 등록할 수 없는 단어이기에 저와같이 표기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