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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라는 이름의 굴레
정혜경 / 영화 평론가
흔히 가족을 사회의 최소 단위라고 표현한다. 사회의 필수 구성 요소인 개인은 가족이라는 제도를 통해 생산 및 교육된다. 또한, 가족은 위험하고 각박한 사회로부터 개인을 보호하는 방패의 역할도 수행한다. 최근에는 1인 가족이나 동성혼 같은 새로운 가족의 형태가 등장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가족은 혼인의 형태로 결합한 두 남녀가 출산이나 입양을 통하여 자녀를 양육하는 관계를 지칭한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특히 가족이라는 구성단위가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데, 이는 노동력이 생산성에 직결되는 농경 사회를 오랫동안 유지해 온 결과로 볼 수 있다. 혈연관계는 다른 어떠한 관계보다 존귀한 것으로 간주되어, 만일 가족 구성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여 인위적으로 관계를 끊는다는 것은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즉,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는 여타 사회적 관계와는 다르게 개인의 자유 의지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자식에게는 부모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며, 부모의 입장에서도 그 점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렇듯 일단 가족이라는 끈으로 연결이 되면 그 관계를 무효화하기란 상대적으로 매우 어렵고, 상호 간에 막중한 책임과 의무가 요구된다. 또한, 가족 간 관계의 시작이 자유 의지와 무관하다는 점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다른 사회적 관계에 비해 원만한 해결이 어렵고 복잡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 간의 반목은 무의식적으로 금기시되어 왔고 갈등이 방치되는 경우가 흔히 발생ㄹ하는데, 그 문제점이 수면 위로 드러났을 때 파괴력은 가공할 만한 것이 되는 것이다.
1. 참을 수 없는 생계의 무서움, ‘가장’의 굴레
과거 가부장적 시대의 가장이란 가족 구성원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남성을 의미했다. 가장은 가족의 대외적인 대표이자, 대내적으로는 의사 결정권자였다. 가장의 권위는 불가침의 영역이었고, 그 위치는 대물림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왕의 세습과 유사한 모습을 띠던 과거 가장의 모습은 대가족 시대가 핵가족 시대로 변하면서 함께 변화해 왔다. 이제 가장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바뀌었으며, 그 권력은 대폭 축소되었다. 경우에 다라서는 가장의 성별이 바뀔 수 있고, 심지어는 미성년자가 가장인 가족도 있다. 가장이라는 역할에 권리보다 책임이 강조되다 보니, 그 무거운 짐을 부담스러워 하는 것은 당연하다. 전 가족의 생계를 떠맡아야 된다는 막중한 책임감을 짊어진 가장은 개인의 정체성과 자유 보다는 가족의 생계를 우선시하게 되는데,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 그에게 가족은 벗어나고픈 억압과 굴레가 되어 버린다. 이 때 문제는 그런 가장의 역할을 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가족 성원들이 정신적으로 부담하게 되는 부채(負債)같은 짐이다. 이러한 구조는 서로가 서로에게 부담과 부채가 되는 불균형을 이루며, 결국 지속되지 못한 채 무너지고 만다.
소설가 출신으로 진지한 주제 의식을 탄탄한 내러티브에 담는 재능이 탁월한 이창동 감독의 장편 데뷔작 『초록 물고기』로 대변되는 행복했던 가족의 기억을 그리워하는 한 청년의 비극적인 삶과 죽음을 다루고 있다.
군대를 막 제대한 막동.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급속한 도시화로 논과 밭이 아파트로 바뀌어 가고 있는 고향 마을 일산과 뿔뿔이 흩어져 버린 가족들뿐이다. 일자리를 찾아 헤매던 막동은 제대 열차에서 스치듯 만났던 미애를 나이트클럽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데, 폭력 조직 보스인 배태곤의 정부였던 미애는 막동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준다. 밑바닥부터 일을 시작한 막동은 이내 배태곤의 눈에 들어 조직의 정식 일원이 된다. 미애를 향한 연정을 가슴에 묻고 배태곤에게 충성을 다하는 막동. 어느새 깡패가 되어버린 막동은 기대하고 떠난 가족 야유회에서 영혼의 안식을 얻지는 못한다. 정신 지체자인 큰 형, 알코올 중독인 둘째 형, 채소 장사로 근근이 살아가는 셋째 형, 그리고 식구들 몰래 다방 레지를 하는 여동생까지, 막동의 지친 마음을 기댈 수 있는 가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희망이라는 단어가 점점 낯설어지는 막동은 조직의 보스인 배태곤을 위해 살인을 자행한다. 하지만 손에 피를 묻힌 그는, 초록 물고기를 잡으러 냇가를 뛰놀던 과거의 순수와는 영원히 결별했음을 느낀다. 그리고 배태곤에게 충성을 증명함으로써 그 쓸모를 다한 막동은 배태곤의 칼에 쓰러진다.
몇 개월 후, 배태곤과 그의 아이를 임신한 미애가 밥을 먹기 위해 한 식당에 들른다. 그 곳은 아파트로 둘러싸인 일산 신도시에 위치한 ‘큰 나무집’ 식당이다. 배태곤과 미애가 토종닭을 주문하자 온 가족이 합심해서 닭을 잡느라 소동이 나는데, 날랜 닭을 잡는 이는 행동이 불편한 막동이의 큰 형이다. 막동이가 생전에 그렇게 바랬던 온 가족이 모여 오순도순 식당을 운영하는 꿈은 그가 죽은 후에야 성취돈 것이다.
이 영화에서도 가장의 위치는 역전되어 있다. 경제적으로 무능한 형들을 대신해서 짊어진 가장의 짐이 막동을 조직 폭력의 세상으로 이끈 계기가 되었고, 자신도 가정을 이루고 싶다는 바람과 가족과 함께 살고 싶다는 소망 때문에 폭력 조직에서 ‘형님’의 골칫거리를 제거해 주는 희생양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배태곤에게 먹히지 않기 위해 막동의 가족들을 피해 필사적으로 도망 다니는 토종 닭의 모습이 쓸쓸한 것은 그것이 영화 내내 보였던 막동의 모습을 연상시키기 때문이 아닐까.
한국의 불행했던 과거사에 끈끈한 가족사를 엮어 만든 흥행 대작 『태극기 휘날리며』(강제규 감독, 2004)에서도 한국 남성들의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는 가장으로서의 책임감과 그로 인해 몰락하는 인간성의 비극을 낱낱이 보여 주고 있다.
머리 좋은 동생을 전쟁터에서 집으로 돌려보내 공부시켜 몰락한 가족을 일으키겠다는 형의 의지와 집념은 점점 살인귀의 모습을 닮아가지만 이를 저지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러한 맹목적 집착은 현대사의 모순적인 이데올로기의 함정에 휘말리게 되면서 결국 파멸의 비극으로 이어진다.
가족 성원 중의 누군가를 위해 다른 가족들이 희생되거나, 한 사람이 가족의 짐을 짊어지고 나아가야 하는 삶은 건강하지 못하다. 각자가 자신의 몫에 책임을 다하고 서로에게 부족한 요구를 교환하는 공정한 관계는 인간관계의 기본인데, 이 관계의 룰은 가족이라는 공동체 속에서도 예외 없이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988년 일본에서 실제 일어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아무도 모른다』(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2004)에서는 부모가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거부했을 때 발생하는 비극을 매우 담담한 시선으로, 그래서 더욱 가슴 아프게 그리고 있다.
도쿄의 한 작은 아파트에 케이코라는 여인과 그녀의 아들인 아키라가 이사를 온다. 게이코는 집주인에게 초등학생인 아들과 함께 둘만 있을 거라 말하지만, 그들이 들고 온 여행 가방에는 아키라의 세 동생들이 숨어 있었다. 게다가 네 아이들의 아빠는 제각각 달라서 누군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아이가 많은 세입자를 싫어하는 집주인 몰래 아파트 입성에 성공하는 네 남매와 철없는 엄마. 아파트를 얻기 위해 존재가 부정된 교코, 시게루, 유키, 이 세 남매는 절대 떠들지도, 집 밖에 나가지도 않겠다고 엄마와 약속을 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는 유일하게 바깥 출입이 허락된 장남인 아키라에게 동생을 맡기고는 눈이 맞는 남자와 도망친다. 졸지에 12살 가장이 되어버린 아키라는 꼼꼼히 가계부를 적으며 생활을 꾸려가지만, 여전히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야구 글러브가 갖고 싶은 어린아이일 뿐이다. “엄마는 제멋대로야”라고 말하는 아키라에게 엄마는 정작 무책임한 사람은 아빠라며 자신도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고 강변한다. 크리스마스 때 돌아오겠다고 약속한 엄마는 새해가 지나도 돌아오지 않고, 아이들은 좁은 공간에서 점점 시들어 간다. 결국 수도와 전기가 끊기고, 어쩔 수 없이 아키라는 동생들을 데리고 나와 빨래도 하고 목욕도 한다.
무거운 책임감에 짓눌려 있던 아키라에게 어느 날, 동네 야구 시합에 참가하게 되는 우연이 찾아오고, 아키라는 잠시나마 소년 가장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마음껏 야구를 즐긴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아키라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막내 유코가 의자에서 떨어져 심하게 다쳤다는 사실이었다. 유코는 변변한 치료 한 번 받아보지 못하고, 그 동안 살아 온 모습처럼 조용히 숨을 거둔다. 아키라는 막내 동생이 보고 싶다던 비행기를 보여 주겠다고 공항 옆 고수부지에 동생의 시신을 묻어 준다. 그리고 아이들은 어른들의 방치와 무관심 속에서, 공원에서 물을 긷고 공중전화를 뒤져 동전을 찾는 일상으로 돌아간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부모에게 자녀란 먹여 살려야 하는 부담스러운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부모가 가장의 책임을 회피하면 아직 사회적으로 부적응 상태인 미성년자가 그 짐을 지게 되고, 이는 비극적 사고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핵가족화 된 현대 사회 속에서 자신에게 지워진 부모의 역할이라는 짐을 견딜 수 없어 그 의무를 집어 던진 부모가 점차 늘어가고 있는 사실은 우리에게 새로운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현상은 과거의 대가족 속에서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옛날이야기를 들으며 성장했던 우리 윗세대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아이들이 정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부모의 사랑과 관심뿐만 아니라 적절한 영양과 교육적 환경이 제공되어야 한다. 그러나 아무런 사회적 보호나 지원이 없는 상태에서 가장으로서의 책임감과 육아의 짐을 어느 한 개인이 짊어진다면, 그 고통과 무게를 감당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러므로 예전의 공동 육가 형태를 유지할 수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성장할 수밖에 없는 도시빈민층의 자녀들을 위해 정부가 제도적인 보호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
2. 남성들의 이기심이 만들어 낸 판타지, ‘현모양처’의 굴레
여성은 결혼을 하면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중차대한 사명을 부여받는다. 작게는 보금자리를 정리하고 음식을 마련하는 것에서부터, 크게는 출산을 통해 후세를 잇고 육아를 담당하는 일 등이다. 사실 가족의 한 구성원에게 이렇게 많은 책임을 부과하는 것은, 가장에게 생계를 전담시키는 것만큼이나 부당해보인다. 특히나 일반적으로 각인된 사회적 통념으로서의 어머니의 모습, 아내의 모습, 며느리의 모습은 사회 주류인 남성이 이상화한 것들이 대부분이어서 오랫동안 여성 운동가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다. 즉, 남성들은 자신들이 분담해야 할 가정 내 노동을 회피하기 위해 어머니를 성스러운 존재로 미화해 왔다는 것이다. 훌륭한 위인들 뒤에는 항상 위대한 어머니가 있었다는 경구 뒤에는, 기혼 여성은 자식을 훌륭하게 키우는 것이 주된 임무라는 이데올로기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1975년에 제작되었던 동명의 스릴러물을 블랙 코미디로 재해석한 『스텝포드 와이프』(프랭크 오즈 감독, 2004)는 위에서 언급한 남성들의 이기심을 노골적으로 회화한 작품이다.
방송국의 여성 CEO인 조안나 에버트는 기획하는 작품마다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승승장구한다. 하지만 성공에 도취된 그녀는 더욱 자극적인 방송을 지향하다 결국에는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하루아침에 해고당하고 만다. 실의에 빠진 그녀에게 남편 윌터는 도시를 떠나 조용한 동네에서 새 출발하자고 제안한다. 살기 좋은 동네로 소문난 스텝포드로 이사 온 조안나와 윌터는 친절한 주민들의 환대와 너무나도 완벽한 환경이 어리둥절할 정도이다. 특히 스텝포드의 부인들은 모두 예쁘고 남편에게 헌신적인데, 자신의 사회적 성공을 위해 가정을 등한시했던 조안나에게는 이러한 스텝포드의 모습이 너무나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조안나는 지나치게 완벽해서 이상한 이 동네에 무언가 비밀이 있음을 짐작하는데, 그나마 동네에서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과 마을의 미스터리를 풀어 나간다. 그들은 스텝포드의 순종적인 아내들은 과거에 사회적으로 성공을 이룬 여자들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자신보다 사회적으로 지위도 높고 연봉도 많았던 부인들에게 주눅이 들어 살던 스텝포드의 남편들은 그녀들의 머리에 순종을 프로그래밍한 칩을 이식하여 그들이 원하는 아내로 만들었던 것이다. 더욱 기가 막힌 사실은 이 칩을 개발한 사람은 여자라는 사실이었다. 사회적으로 성공했지만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뇌 수술 전문의였던 그녀는 남편이 젊은 여자와 바람을 핀다는 사실을 알고 절망 끝에 이러한 칩을 만들었던 것이다. 모든 내막을 알게 된 조안나와 친구들은 이기적인 스텝포드의 남편들에게 응징을 가한다.
다소 황당한 설정의 이 영화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남성들이 배우자에게 갖고 있는 열등감과 이기심을 비웃는 작품이다. 그리고 남성들이 가지고 있는 ‘현모양처’ 판타지는 결국 여성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남성들의 허영심이며, 이러한 판타지가 투영된 여성의 모습은 인간의 온기가 사라진 바비인형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이 영화는 희극적으로 보여 준다.
사실 영화를 보고 웃을 수만은 없는 것이, 한국의 어린이들 역시 남편을 내조하고 자식에게 헌신적이어야 한다는 ‘현모양처’라는 절대선 앞에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살아 왔다. 자녀들에게 대리 만족을 느끼고 남편의 출세에 사회적 성취를 투영시키는 한국 어머니들의 모습은 가족 성원들이게도 부담이 되지만, 무엇보다 여성 스스로 만족하고 즐기는 ‘자족적인 삶’을 빼앗긴다는 점에서 개인에게도 큰 불행이다.
3. 폭력과 억압의 굴레
출산과 입양을 통틀어서 자식에겐 부모를 선택할 권리가 없다. 하지만 부모가 자식의 인성과 미래에 끼치는 영향은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부모의 지위와 경제적 계층에 따라 자식의 미래가 결정되는 경우가 허다하며, 올바르지 못한 부모의 교육은 자식의 미래를 암울하게 바꾸어 놓을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가 스스로의 도덕성을 확립하고 경제적, 사회적 위치를 세우는 것까지도 자녀를 위한 교육의 일부분이 된다.
영화 『셀레브레이션』(토마스 빈터버그 감독, 1998)에서는 부도덕한 부모가 만드는 상처가 얼마나 오랫동안 자식의 삶을 지배하는 지를 신랄하게 보여준다.
덴마크 시골의 호텔 경영자인 헬게 클링겐펠트의 환갑을 맞이해서 오랜만에 가족과 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도시에서 레스토랑을 경영하는 첫째 아들인 크리스찬이 도착하고, 지난 번 생일잔치에서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렸던 둘째 아들은 초대도 받지 못했지만 누구보다도 요란스럽게 가족을 대동하고 나타난다. 과묵한 첫째 아들을 따로 부른 아버지는 잠시 후 있을 생일 만찬에서 얼마 전에 죽은 크리스찬의 쌍둥이 여동생이자 자신의 딸인 린다에 대한 추모사를 부탁한다. 남매들 중 맏이자 큰 딸인 헬렌은 죽은 동생 린다가 있던 방에서 그녀의 유서를 발견한다. 고급 요리들이 서빙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파티는 시작된다. 하지만 사람들의 주목을 끌면서 자리에서 일어난 크리스찬의 입에서 나온 말은 죽은 동생에 대한 의례적인 조사가 아닌, 과거 자식들을 성적으로 학대했던 아버지에 대한 비난이었다. 그러나 만찬에 모인 친구들과 친척들은 크리스찬의 충격적인 폭로를 받아들이기보다는 어색하게라도 잔치의 분위기를 지키려고 애쓴다. 특히 호텔의 경영권에 관심이 있는 둘째아들인 미켈은 아버지의 편에 서서 형을 비난하지만, 헬렌이 가지고 있던 린다의 유서가 공개되면서 크리스찬의 폭로는 사실임이 밝혀진다. 온화한 인상 뒤에 감추어진 아버지의 악행이 만천하에 드러나면서, 오랜 세월 가족의 내면을 짓눌렀던 끔찍했던 과거의 상처는 현재에도 여전히 아물지 않고 그들에게 남아 있음이 드러난다.
범죄자를 조사해 보면, 대부분의 범죄자들이 어릴 적 불우한 가정환경을 겪었다는 사회 과학적 통계를 흔히 접할 수 있다. 가족 안에서 자행되고 있는 폭력은 그것의 피해자가 자신이 당한 폭력을 외부에 함부로 발설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누적 되서 정신적인 피해로까지 확산된다. 문제는 이러한 폭력의 피해자가 자신이 당한 폭력을 대물림한다는 사실이다. 어릴 적부터 매일 자행되는 폭력 속에서 성장한 아이는 그것이 너무나 당연한 삶의 일부가 되고, 이러한 상태가 비정상적이라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게 된다.
미국에서는 가정 내의 폭력을 중요한 사회 문제로 다루고, 특히 아동 폭력자는 중죄인으로 취급하고 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의 법규나 제도는 아직 미비한데, 이로 인한 가장 큰 피해자는 그러한 폭력에서 벗어날 경제적 능력이 없는 어린이와 노인, 여성이다. 그러므로 가정 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권’에 대한 연구와 의식적 진보가 선행되어야 하며, 동시에 공동체적 분위기 속에서 각종 보호 시설과 단체들의 후원을 적극적으로 활성화 시키는 정부의 정책 마련이 시급하다.
4. 가족의 해체와 대안 가족의 등장
여성의 교육과 의식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여성의 취업률이 매년 증가하고 있다. 이에 따라 여성의 사회 참여는 늘어나고 있지만, 제도적인 뒷받침은 현실적으로 전혀 진보되고 있지 않은 실정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기혼 여성들은 여전히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이제 여성에게 일과 가정은 양립하기 힘든 선택의 상황이 되어 버렸다.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없어지자, 이제는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들도 가정을 꾸려 가장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기피와 두려움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동거나 대안 가족 형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대두되고 있다.
『바람난 가족』(2000)을 만든 임상수 감독은 여성에게 부조리한 사회적 상황에 대해 한국의 어떤 남성 감독보다도 관심이 많은데, 이러한 시각은 때론 영화 속에 급진적으로 반영된다.
30대의 인권변호사인 영작은 출장 간다며 애인과 떠난 여행에서 술 취한 채 오토바이를 몰던 지루와 부딪히는 교통사고를 당한다. 영작의 아내이자 7세 아들 수인을 입양해 키우는 호정은 전직 무용수지만 현재는 동네 고등학생 지운의 유혹에 불장난 같은 섹스를 한다. 한편, 영작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로 간암 말기 판정을 받았는데, 평생 술병만 끼고 살았다는 남편에게서 한 번도 만족을 못 느꼈던 그의 아내 병한은 초등 학교 동창과의 섹스에 활력을 느낀다. 영작의 아버지가 죽자 병한은 새로운 애인과 미련 없이 외국으로 떠난다. 이렇게 온 가족이 뿔뿔이 바람난 상황에서 영작이 낸 교통사고로 일을 잃게 된 지루는 술김에 병작의 아들 수인을 죽이게 되면서 가족의 해체는 시작된다. 수인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호정은 그 일을 촉발시킨 계기가 된 영작의 ‘바람’을 빌미로 심하게 다투게 되고, 다툼 끝에 다친 호정은 영작과 헤어지기로 결심한다. 호정과 이혼하고 애인에게도 버림받은 영작은 호정을 찾아와 앞으로는 잘하겠다고 하지만 그녀는 가볍게 일축해 버린다. 그리고 영화는 호정의 몸 안에서 자라는 새 생명을 보여 주면서 의미심장하게 끝난다.
온 가족이 바람을 피운다는 설정의 가족 문제를 다룬 이 독특한 드라마는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가족의 안쪽 면을 뒤집어 봄으로써 ‘한국인의 성과 삶’을 다루고 있는 이색적인 작품이다. 스토리는 단순하지만 그 속에 담겨 있는 인물들의 이야기는 다채롭다. 할머니까지 바람난 가족을 보는 것은 사회의 지배적 질서 논리에 익숙해진 우리의 눈에는 웃긴 상황이지만, 육체적 욕망과 사랑은 남성들뿐만 아니라 여성들 모두에게도 가능한 감정이라는 점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시원한 해방감을 준다. 영작은 밖으로는 잘 나가는 인권 변호사이지만 혼란스럽고 형식적인 가족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아들에게 따뜻함을 줄줄도 모르며, 바람난 어머니를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하며, 아버지에 대해서는 애증이 교차한다. 이에 비해 호정은 입양한 아들이나 시부모, 심지어 밖으로만 도는 남편에게도 인간적인 연민과 배려를 베푸는, 그러면서도 관계에 자기중심적인 집착을 하지 않는 조금은 비현실적이지만 그야말로 ‘쿨’한 여성이다.
감독은 이러한 인물들을 통해 개인의 행복을 가로막는 현재의 관습적인 가족 제도에 대한 전복(顚覆)을 시도한다. 영작은 엔딩에서 걸레질하는 호정에게 “잘할게”라고 이야기하며 재결합을 제안하지만, 그가 변하지 않을 것이고 현실을 변화시킬 능력도 없다는 것을, 썰렁한 체육관과 그 곳에서 아이러니하게 흘러나오는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의 놀리는 듯한 버전의 음악이 대변해 준다. 자유롭게 춤추고 등산하던 호정의 몸은 가족이 해체된 그 자리에서, 생물학적 재생산의 능력을 발휘한다. 영화는 마침내 호정의 자궁 속에서 꿈틀거리는 태아의 모습을 초음파로 보여 주며, 이제는 그녀들이 중심에 선 새로운 가족 관계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영화는 스토리상에서는 가족의 해체라는 비극적 엔딩을 갖고 있지만, 역설적으로는 새로운 활력을 가진 ‘새로운 시작’이라는 의미로서 해피엔딩의 희망을 제시한다.
미혼 여성들의 연애와 결혼관을 흥미롭게 다루었던 영화 『싱글즈』(권칠인, 2003)에서도 이러한 대안 가족의 형태가 조심스럽게 제시된다.
영화에서 절친한 친구 사이인 나난과 동미, 영준은 각자 결혼과 일, 연애가 화두인 동갑내기 친구들이다. 결혼에 관심 없는 자아 지향적인 동미가 실수로 영준의 아이를 임신하자 그녀는 고민하다 중절 수술을 결심한다. 나난은 자신의 일에 혼란을 느끼자 결혼을 통해 일에서 탈출하려 고민한다. 영준은 연애에 실패하자 동미가 자신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새로운 일을 찾아 떠난다. 나난은 결혼이라는 쉬운 탈출구를 접은 채 다시 일에 도전하기로 결심하며, 동미는 고민 끝에 혼자 아이를 낳기로 결심한다. 동미의 결심을 보듬어 주는 친구 나난이 있기에 동미는 용기를 얻고, 영화는 아이가 나난과 동미 사이에서 행복하게 성장할 것이라는 예감을 보여 주며 끝난다.
아직 우리 사회는 1인 가족이나 동성혼 같은 대안 가족의 형태를 ‘비정상적’인 가족이라는 편견의 눈으로 보는 것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떠한 형태이든 서로에게 공정하고 평등하다면, 그래서 가족 개개인이 행복하고 건강한 정신을 갖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가족의 형태일 것이다. 근래의 한국 영화들에서 ‘여성’이 중심이 된 새로운 가족의 형태가 등장하는 것은 사회적인 변화의 한 징표라 할 수 있다. 비민주적인 ‘호주제’와 가부장적인 이데올로기의 지배 속에 놓여 있던 가족 제도가 이제까지의 많은 상처들을 쏟아 내며 균열하고 있는 것이다.
나날이 개인화되고 있는 사회에서 가족의 가치는 오히려 더욱 존중 받아야 할 대상인지도 모른다. 결국, 가족이란 사회의 공포로부터 개인을 방어해 줄 마지막 방패이기 때문이다. 출생에서 성장까지의 시간을 공유한 가족은 각박한 사회에 시달리는 개인이 언제나 회귀하고 싶은 포근한 엄마의 품에 가장 근접한 것이다. 그러나 결손 가정에 대한 공적인 보호는 그 한계를 일찌감치 드러내고 있다. 대가족의 공동체 속에서 이웃 간의 인간적인 교류를 교환했던 과거의 가족 형태에서는 서로가 서로의 부모를 보살피고 돌보는 역할을 담당했었기 때문에 폭력과 억압의 비극적 상황이 현대사회보다 현저히 적었다. 그러나 핵가족화에 따라 주거의 형태가 아파트라는 공간으로 이동되면서, 삶의 양태는 달라졌다. 바로 옆집에서 폭력, 심지어 살인이나 자살 같은 사건이 벌어져도 서로에게 특별한 관심을 두지 않는 한 그것을 알 수 없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 “비인간화”야말로 사회 문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도시화’의 편리함과 ‘인간성의 회복’이라는 명제는 과연 양립할 수 없는 딜레마인가?
어느 한 사람만의 희생을 강요하지 않는 관계, 가족 이기주의를 버리고 이웃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인간성의 회복’이야말로 이 시대의 화두이자 가족 내의 폭력과 억압으로 인한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다. 대안 가족이든 평범한 가족의 모습이든 가장 우선시되어야 할 것은 개인의 행복과 그에 따른 사회의 안녕이다. 가족이 더 이상 굴레가 아닌 안전한 울타리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때 비로소 사회 공동체의 결속도 이루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