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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극동 지역의 항일운동 유적
이 원 규
들어가는 말
필자는 <대한매일> 신문의 해외 항일유적지 기획취재에 참여하여 지난여름부터 가을까지 1차로 중국 만주지역, 2차로 중국 관내(關內)지역, 3차로 러시아 극동지역을 답사하고 그 결과를 위 신문에 기고하였다. 전공 연구자가 아니고 일개 소설장이인 필자가 기획에 참여한 것은 항일전쟁 전체를 관통하는 대하소설을 쓰면서 중국과 러시아 지역을 7차에 걸쳐 취재한 경험이 있어서이다.
그러나 연구의 심도가 깊지 못한 한 작가로서 항일투쟁사에 대한 식견에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원고 청탁에 응한 것은 우리가 잊고 있는 현장과 무수한 항일전쟁의 영웅들을 햇빛 속에 드러내야 한다는 욕구, 그리고 이런 현장답사 보고가 항일운동사 연구에 일조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이 글의 범위를 러시아 극동지역으로 방향을 한정한 것은 연구의 성과와 답사 보고가 미진하고 아예 발굴조차 되지 않은 현장이 많아서이다. 1937년의 한인 강제이주 때 회관도 집도 헐리고 모두가 끌려가 증언해 줄 노인들도 없고 전설마저 사라져 버린 것이다. 게다가 냉전시대에 한국의 연구자들이 소련에 들어갈 수가 없었고 소련 정부는 한인에 관한 기록을 비밀문건으로 분류하고 공개하지 않았던 것이다.
러시아 극동지역의 한국 항일운동 유적은 대체로 다음 지역들에 산재해 있다.
1. 두만강 접경에서부터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초기 개척시대 한인 유민들이 연추(延秋)라고 불렀던 크라스키노와 포시에트 지역
2. 블라디보스토크 시내
3.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다시 동쪽으로 뻗어간 한인 유민들이 수청(水淸. 러시아식 지명 수이찬)이라고 불렀던 빨치산스크 지역
4. 우수리스크와 그곳에서 서쪽 중국 국경에 이르는 옛 추풍(秋風. 러시아식 지명 수이푼) 지역
5. 동시베리아의 중심도시 하바로프스크 일대
6. 북만주에서 이동해 간 독립군단이 머물렀던 마사노프와 자유시 참변 현장인 스보보드니
7. 하바로프스크에서 서쪽으로 깊숙이 들어가 시베리아 중심에 박힌 도시 이르쿠츠크
이번 러시아 취재는 10월 4일부터 18일까지 보름 동안 이루어졌다. 마사노프와 스보보드니는 일정이 빗나가 가지 못했다. 그러나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지역이므로 이 부분은 필자가 앞서 답사한 노트를 중심으로 기술하려고 한다.
한인이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853년이었다. 두만강을 건너 포시에트 지역으로 산발적인 유민의 이동이 이루어졌다. 본격적인 집단이주는 1860년 북경조약으로 연해주 지역이 러시아 영토로 편입된 직후에 활발히 전개되었다. 특히 1869년 관북지방의 흉작으로 대기근이 닥쳐오자 수천 가구가 한꺼번에 이주하였다. 초기 한인 유민들의 불법이민에 대해 조선 조정은 참수형으로 엄하게 다스렸으나 러시아 정부는 오히려 방조하였다.
러시아 극동지역은 볼셰비키 혁명 이전에는 제정 러시아의 총독에 의해 통치되었다. 초기이민 시대의 총독은 극동 시베리아 개척에 한인을 최대한 이용하려고 자유이민법을 제정하고 보호정책과 함께 그들을 러시아화하기 위한 동화정책을 폈다. 그러나 후임 총독들은 한인들에 의해 어느 정도 개발이 성공을 거두자 러시아인들을 이주 정착시키고 한인들을 배척하는 정책으로 바꾸었다. 특히 1884년 한러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고부터 한인의 이주를 엄격히 제한하였다. 그러나 유민의 행렬은 그치지 않았고 1910년 한일 강제 합병 후 다시 급증하였다.
이 시기의 한인 이주민들의 생활은 귀화인인가 비귀화인인가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초기에 이주한 한인은 러시아에 귀화하고 토지 소유권을 받아 점차 생활의 안정을 얻고 부유해졌으며 납세와 부역과 군역의 의무를 졌다. 후착 이주민인 비귀화인은 소작농으로 빈궁하게 살 수밖에 없었다. 계급적 갈등이 잠재해 있었으나 한인 사회는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연추(현 크라스키노)와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등지에 민족주의 색채가 짙은 단체조직과 학교 들이 만들어졌다. 국권회복과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신문 잡지 들도 속속 창간되었다. 그리하여 항일투쟁을 위한 역량을 축적해 갔다.
1906년 최재형은 첫 의병대를 조직했다. 간도관리사를 지냈던 이범윤이 망명해와 연합함으로써 의병대는 4천여 명의 규모로 커졌다. 의병대는 한러 국경이 가까워 국내진공이 용이한 연추에 근거지를 두었다.
1908년에 이르러 그들은 수백 명 단위로 국내진공을 감행하였다. 특히 그 해 6월 함경북도 북단에서 일본군 국경수비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 안중근이 참모중장(參謀中將)이라는 직책을 갖고 싸운 것도 이들 전투였다. 평민 출신의 의병장으로 국내에서 이미 이름을 떨쳤던 홍범도도 이 해에 연해주로 왔다. 그는 자력으로 의병대를 조직해 국내진공을 감행했다. 1907년의 군대해산으로 총을 빼앗긴 병사들, 그리고 을미의병 이래 십여 년간의 의병투쟁에서 살아남은 무명 의병들도 무수히 망명해 오고 연해주 지역은 가장 중요한 항일기지로 부상하게 되었다. 국내에서 을미의병을 일으켰던 유인석이 망명해오자 홍범도를 비롯한 연해주 동포 지도자들은 그를 창의총재(倡義總裁)로 옹립해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을 만들고 힘을 집중시켰다.
1910년 조국이 일본에 강제 합방당하자 연해주 독립운동가들은 성명회(聲明會)와 권업회(勸業會)를 만들어 항일 투쟁의 역량을 증폭시켰다. 사관학교를 만들어 초급간부들을 양성하였고 대한광복군정부를 만들었다. 재미 한인들이 결성한 독립운동 조직 대한인국민회의는 이상설을 전권특파원으로 파견했다. 그 결과로 러시아에는 시베리아 지방총회가 만들어지고 그 본부를 치타에 두었다.
제정 러시아 정부는 한인의 독립투쟁을 묵과하지 않았다. 일본과의 외교관계에 따라 때로는 강압으로 제재를 가하였다. 그러나 1917년 2월혁명이 발발하자 상황은 크게 바뀌었다. 볼셰비키파가 세운 극동공화국 임시정부는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선포했던 것이다. 이에 고무된 한인들은 전로한족대표자회를 만들고 고려족회를 거쳐 대한국민회의로 발전시켰다.
볼셰비키 혁명의 성공이 눈앞에 보이자 한인 사회에서는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의 혁명투쟁과 같은 방법으로 조국의 해방을 위한 투쟁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한인사회당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곧 공산주의 기치를 앞세운 한인 빨치산을 조직했다. 새로운 구성이 아니라 이미 성장해 있던 의병대를 재편성한 것이었고 대부분 ‘의병대’라는 한국어 명칭을 병용했다. 그들은 러시아 혁명을 돕는 것이 조국독립을 위한 길이라고 믿고 러시아 백군(白軍)의 마지막 저항세력과 전투를 벌였다. 그리고 국제간섭군이라는 명분으로 출병한 일본군과도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 그런 전투에서 그들은 더 용감하게 싸웠다.
러시아 극동지역의 한인 공산주의자들은 불행하게도 이른바 ‘상해파(上海派)’와 ‘이르쿠츠크파’로 양분되어 갈등을 겪었다. 이것은 1920년 북만주에서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이동해간 독립군단을 중심으로 한 전체 한인 무장세력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대립하는 상극으로 발전해 자유시 참변을 초래하였다. 러시아 한인들의 항일 무장세력은 이를 계기로 거의 와해되고 방향도 상실되어 버렸다.
연해주 한인들은 그 후 소련 정부의 통치에 순응하며 삶을 영위하였으나 스탈린 정권에 의해 20만 명 전부가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탄 등 중앙 아시아 3국으로 강제이주당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80년간 성장해온 한인 사회는 한꺼번에 무너졌다. 그리고 항일투쟁사도 실종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금 새로운 희망이 조금씩 커지고 있다. 실종된 역사를 복원 정리할 수 있는 충실한 문헌자료들이 공개되었거나 공개를 위해 정리되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블라디보스토크 극동문서보관소이다. 1940년대 초에 시베리아 톰스크로 이동했다가 최근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 이 기관은 초기 한인들의 이주와 귀화, 1905년 이래의 항일 독립운동에 관한 엄청난 자료(일부는 아직도 톰스크에 남아 있다)를 수장하고 있다. 전공 연구자들은 어렵사리 열람 기회를 얻어 한인 유민사와 독립운동사에 관한 자료를 발굴해 공개하고 있다. 필자의 이번 답사도 상당 부분을 그것에 의존하였다.
1. 포시에트․크라스키노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차를 대절해 그 옛날의 한러 국경 쪽으로 달렸다. 국경선인 두만강의 하산까지는 270킬로미터쯤 된다. 지리를 잘 아는 블라디보스토크 극동대학의 송지나 교수(러시아 국적 동포)가 동행하는데도 태반이 비포장도로인데다 검문이 심해 가는 데만 6시간이 걸렸다.
송지나 교수는 독립운동사 연구자들에게는 잘 알려진 고(故) 송희현 옹의 딸이다. 송옹은 강제이주 1세대로서 소년기에 우즈베키스탄으로 끌려갔으나 대학 교육을 받는 행운을 얻었다. 50대가 되어 그는 여러 난관을 뚫고 옛 고향인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오는데 성공했다. 그는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 거의 사라져 버린 연해주 한인의 역사를 검증 답사하고, 1990년대에 들어 이 곳을 찾기 시작한 한국의 연구자들을 안내해 유민사와 독립운동사를 복원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필자는 1993년 첫 러시아 답사 때 송옹의 안내를 받았는데 그 때 송지나 교수가 아버지를 따라 필자의 차에 동승해 인연을 맺었다. 송교수는 아버지의 노트를 물려받았고 아버지가 못다한 일을 완성해 가고 있다.
한러 국경으로 가는 길은 멀었지만 무료하지는 않았다. 상수리나무 우거진 아름다운 산들과 소택지들이 이어지고 때때로 아름다운 호수들이 나타났다. 그것들은 지도를 보면 호수가 아니라 포시에트만의 바다였다. 포시에트와 크라스키노로 가는 길은 그렇게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절경이었다.
포시에트와 크라스키노 지역은 연해주의 남쪽에 위치한다. 남면으로 드넓은 포시에트만을 안고 있다. 1860년대에 우리 동포들이 이주하여 가장 빨리 개척한 지역이다. 이 곳을 통틀어서 우리 동포들은 연추라는 지명을 붙였다. 포시에트와 크라스키노는 십여 킬로미터 떨어져 있으나 하나로 묶어 지칭된다. 두 곳을 잇는 길에도 무수히 많은 우리 유민들의 집거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지역은 연해주 일대가 러시아와 청나라의 북경조약에 따라 러시아 영토가 된 뒤 노우키에프스키라고 불렀으나 1930년대에 이 곳에서 벌어진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죽은 러시아군 크라스킨 중위의 이름을 따서 크라스키노로 고쳤다.
포시에트와 크라스키노는 항구도시 블라디보스토크에 본격적인 한인사회가 형성되기 이전 국권 회복운동의 중심지였다. 블라디보스토크가 애국계몽운동 중심으로 나아간데 비해 이 곳은 무기를 든 무장투쟁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유인석․이범윤․최재형․안중근의 투쟁이 이 곳에서 이루어졌다. 김아파나시가 ‘조선인 민족지구’를 만들어 활동했던 곳도 포시에트였다.
자동차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포구 위에 멈추었다. 길 아래 밋밋한 경사지에 러시아인들의 목조 바라크들이 숨은 듯이 앉아 있고 그 밑자락은 바다였다. 풀숲 가운데 웬 소형 전차와 야포가 놓여 있다. 그 옆에 서 있는 건물이 ‘포시에트 박물관’이라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송지나 교수는 주인을 찾으러 나섰다가 먼 곳에 가 있다는 대답만 듣고 돌아왔다. 한 러시아인이 만들었다는 이 사설 박물관에 몇 점의 발해 유물이 있다는 소문만 돌고 있었다.
이 포구는 우리 유민들이 배를 대고 상륙해 삶의 터전을 일구었을 것이라고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발해 왕국이 쇠망한 뒤 천년 동안 임자 없이 버려진 포구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산세가 험하지 않고 작은 포구가 바다를 향해 나 있고 논농사 밭농사는 물론 과수원도 충분하게 있었음직한 아름다운 포시에트. 우리 선열들이 어렵지 않게 터를 일구고 부를 축적해 낙토로 만들었을 것 같은 좋은 땅이었다. 이 정도의 땅이라면 모국 진공을 감행할 의병대도 만들고 독립투쟁 자금도 넉넉하게 갹출했을 것 같은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최재형에 관한 기록을 보면 그가 포시에트 항에서 굶주림을 참지못해 러시아 상선에 올랐다는 말이 나온다. 수천톤급의 선박이 기항했음을 알게 한다.
이 곳 저 곳을 둘러보아도 우리 유민들의 흔적은 없었다. 강제이주 열차에 실려 단 한 사람도 남김없이 중앙아시아로 끌려갔기 때문이다. 젊은 날, 이동휘(李東輝)가 레닌을 면담했을 때 통역으로 참가해 ‘탁월한 청년 지도자’라고 레닌의 극찬을 들었던 김아파나시는 이 지역을 모범적인 집단농장을 만들었으나 강제이주 직전 일제의 밀정이라는 누명을 쓰고 총살형을 당했다.
다시 차를 달려 크라스키노로 갔다. 우리 선열들이 힘을 집중해 의병을 일으켰던 바로 그곳 연추였다. 경사 없이 수평을 이루는 드넓은 벌판이 누워 있는데 그 아래는 바다였다.
“모든 것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장소가 있어요.”
송지나 교수가 이끄는 대로 차를 몰고 표고 300미터쯤 되는 고지로 올라갔다. 그 곳에 하산 전투 기념비가 서 있어서인지 굽이굽이 오르는 길이 나 있었다. 십여 분 뒤 고지에 서니 사방이 일망무제로 탁 트였다. 정면 남쪽 수평의 벌판에 앉은 것이 크라스키노의 중심지역으로 우리 선열들이 ‘상안치혜’라고 부르던 곳이고 그 앞은 포시에트만이었다. 서쪽으로 나 있는 길이 보였는데 그것은 중국과의 국경 훈춘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리고 고지의 왼쪽 등뒤쯤에 부락 하나가 눈에 들어왔는데 그것이 한인들을 강제이주시킨 뒤 그들의 ‘하안치혜’ 마을을 부숴버리고 새로 세웠다는 쭈가노프카촌이었다.
필자는 구한말 조정이 밀사를 보내 제작했다는 ‘아국여지도(俄國輿地圖)’를 꺼내들었다. 아마도 밀사가 스케치한 곳이 이 고지가 아닐까 여겨질 정도로 지형이 실감나게 다가왔다. 상안치혜와 하안치혜 말고도 골짜기와 산자락, 그리고 산을 휘감아 흐르는 강변 이 곳 저 곳이 우리 유민들의 집거촌으로 가득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위정척사파의 거두로서 국내에서 의병을 일으켜 혁혁하게 싸웠던 유인석이 이 곳에 온 것은 1908년 8월. 그는 홍범도와 이범윤과 최재형을 만나 연해주 의병의 정신적 중추가 되고 십삼도의군, 성명회, 권업회의 최고 지도자로서 활동했다.
전(前) 러시아 공사 이범직의 아우였던 이범윤은 간도관리사로 북간도에 파견되어 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러시아로 왔다. 그는 바로 이 곳 크라스키노에서 창의회(倡義會)를 조직하고 의병대를 만들었다. 병력 규모는 4천여 명에 달했으며 무기도 우수한 러시아제였다. 크라스키노를 근거지로 삼은 의병대는 두만강을 건너 국내진공을 감행하고 힘을 키워 나갔다.
홍범도는 국내 의병전쟁이 벽에 부딪히자 부대를 해산하고 1908년 겨울 연해주로 왔다. 그는 중국 길림에서 떠났기 때문에 처음부터 이곳을 거치지는 않았다. 중러국경 쪽 수이푼 지역과 우수리스크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들어갔다. 기록을 보면 그가 처음 크라스키노에 온 것은 1909년 겨울이었다.
최재형은 재정적 후원을 책임진 공로자였다. 소년시절 노비의 신분으로 모국땅을 떠나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한 그는 포시에트 항구에서 몰래 러시아 상선에 승선했다. 그러나 선장의 총애를 받게 되어 6년간 세계를 돌며 경험을 넓혔다. 그는 러일전쟁에서 통역으로 일하고, 군납업에 손을 대 거부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재산을 모두 항일투쟁에 바쳤다. 연해주로 망명해온 투사들치고 그의 도움을 받지 않은 이는 없었다. 수많은 의병이 먹고 입고 훈련할 수 있는 실질적인 힘은 모두 그에게서 나왔다. 블라디보스트크에서 권업회의 초대회장을 맡기도 했으며 상해에서 조직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재무부장이 되기도 했던 그는 1919년 4월 일본군에 의해 체포되어 우수리스크에서 총살당해 생애를 마쳤다.
안중근은 이범윤과 최재형이 만든 크라스키노 의병대를 이끌고 국내 진공을 감행한 지휘관이었다. 1908년 여름 그는 이 곳을 출발해 두만강을 건너 함경도로 진출해 경흥군에 주둔중인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해 큰 전과를 올리고 귀환했다. 그리고 한 달 뒤 다시 국내진공에 나서 경흥과 신아산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홍범도 의병대와 연합하려던 계획이 빗나가고, 적 포로를 국제공법에 의해 석방한 일 때문에 참패를 당해 안중근은 거의 혈혈단신으로 돌아왔다. 격렬한 비판 속에 의병의 재기를 다짐하면서 1909년 3월 김기룡․강두찬․유치현․박봉석․강기순․김백춘 등 동지들과 함께 단지혈명(斷指血盟)을 맺었다. 그리고 몇 달을 절치부심하던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의 <대동일보> 본사에 들렀다가 이토오 히로부미가 온다는 정보를 듣고 하얼빈으로 가서 그자를 저격했다.
그런 저런 자료들을 손에 들고 크라스키노 중심지를 이 곳 저 곳 돌아보다가 최재형의 저택과 연추 창의대 지휘부, 그리고 학교와 교회터, 안중근의 단지혈맹의 장소였던 증거와 함께 최근 발굴된 하안치혜 마을을 향해 차를 달렸다. 송지나 교수가 발굴팀(팀장 수원대 사학과 박환 교수)을 안내했던 터라 찾아가는 일이 힘들지는 않았다.
우크라이나인들이 이주 정착했다는 쭈가노프카 마을의 강건너 앞쪽 울창한 숲속에 전주들이 줄줄이 서 있는 곳이 바로 하안치혜였다. 상수리나무와 졸참나무 들이 관목들과 뒤엉켜 있는 밀밀한 숲 속에서 우물자리와 대저택이었음을 알려주는 담장과 벽돌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송지나 교수가 말했다.
“아버지는 하안치혜 마을 자리에 쭈가노프카 마을이 들어선 걸로 믿고 계셨어요. 강제이주 직후 한인 마을을 불도저로 밀어버리고 다시 러시아인 마을을 세웠다는 지방관청의 기록 때문이었죠. 그러나 쭈가노프카 마을을 돌아보고는 고개를 갸우뚱하셨죠. ‘이상하다, 그렇다고 단 하나의 흔적도 없다니’ 하고 말이에요.”
작년에 한국에서 발굴단이 찾아오자 송지나 교수는 아버지의 의문을 이야기했다. 그들은 쭈가노프카 마을을 찾아갔다. 거기서 소녀시절을 보내고 타지에 가서 살다가 돌아온 87세 된 노파를 만나 결정적인 증언을 들었다. 마을을 부쉈으나 잔해 때문에 새로 지을 수 없어 그냥 내버려두고 강 뒤쪽 2킬로미터에 새로 마을을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 여러 차례 그 폐허가 된 마을을 가보기도 했다고 말했고 발굴팀을 숲속으로 안내했다. 놀랍게도 층층이 쌓인 낙엽 속에 마을터가 고스란히 묻혀 있었다. 연해주 지역 유민사와 독립운동사의 가장 중요한 장소인 연추의 하안치혜 마을은 그렇게 발굴되었다.
칡덩굴과 잡초와 관목들을 헤치며 돌아본 마을의 규모는 상당히 컸다. 비록 불도저의 삽날에 파괴되었다고는 하나 60여 년을 사람의 손이 닿지 않고 버려진 터라 무슨 용도로 어떤 규모로 지어졌던 건물인가는 금방 짐작할 수 있었다. 며칠 마음먹고 달라붙어 헤쳐 본다면 의병대 병영이나 안중근이 손가락을 끊은 우물자리 옆 돌 의자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필자는 손에 잡힌 모든 근거들을 약도에 그려 넣고 아쉽게 발길을 돌렸다.
차를 몰아 하산을 향해 달렸다. 중요한 독립운동 사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1853년의 첫 한인 유민이 이 곳을 통해 연해주로 들어왔다는 기록, 그리고 장차 ‘철의 실크로드’의 중요한 기점으로서 경원선 철도를 통해 시베리아 횡단철도로 이어지는 국경 관문이 될 곳이기 때문이었다.
1993년 송희현 옹과 함께 처음 이 곳을 답사했을 때, 그리고 1995년 KBS 취재단과 함께 들어갔을 때, 필자는 아무 제지도 받지 않았다. 하산 역사(驛舍) 바로 위에 있는 패랭이꽃 핀 언덕에서 두만강 철교를 촬영하고 철교 앞까지 다가가 그 옆에 있는 1956년인가 김일성의 소련 방문을 기리는 기념관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역사와 철도를 찍는 순간 병사들이 자동소총을 겨누며 달려왔던 것이다. 필자 일행은 곧장 연행되었다.
필자는 블라디보스토크 극동대학교의 한국학대학 학장인 벨리호락 박사의 친서를 휴대하고 있었다. ‘이아무개 교수는 본대학 초청으로 입국해서 한러수교 10주년 기념 세미나에 참석하고 현장 답사를 나서니 관계기관의 협조를 바란다’는 신임장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극동대학교와 한국의 경남대학교가 공동 주최하는 세미나가 열렸고 필자는 행사 초청자 명단에도 들어 있었다.
상위(上尉) 계급장을 붙인 25세의 국경경비대 책임장교는 한국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는 연신 ‘미안합니다’하고 양해를 구하며 블라디보스토크 공항 출입국관리소와 극동대학에 전화를 걸어 모든 것을 확인한 뒤에야 필자를 놓아 주었다. 그는 여권을 돌려주며 정중하게 말했다.
“중국인들 때문입니다. 그들은 엄청나게 밀려옵니다. 첩자들도 있는데 위조된 한국 여권을 갖고 변경을 답사하며 촬영하고 있습니다.”
중국인 불법 이주자들 때문에 러시아 당국이 골머리를 앓고 있음을, 그리고 국경에 긴장이 돌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은 연해주 한인들의 장래를 어둡게 한다. 최근 강제이주 한인 2~3세들이 중앙 아시아로부터 역이주해 오고 있으며 사할린에서도 한인들이 이주해와 지금 연해주의 한인은 4만여 명에 이른다. 강제 이주 전과 같이 회복될 수는 없겠지만 한인 공동체가 부활할 가능성은 크다. 그러나 이미 백만이 넘는 중국인이 국경을 넘었고 그보다 많은 사람들이 합법적 이민 또는 불법 월경을 시도하고 있다고 한다. 러시아 정부가 이에 대해 심각한 경계심을 표현한 소식도 들린다. 극동지역이 동양인들로 채워져 버릴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인 것이다. 백 년이 넘게 러시아에 운명을 맡겼던 한인들도 덩달아 도매금으로 넘어가 또다시 불이익을 당할지도 모른다.
국경경비대 책임장교는 필자를 새 역사로 안내했다. 역사는 예전의 낡은 건물 앞에 두 배쯤 면적을 갖춘 새 건물이 증축되어 있었다. 책임장교가 말했다.
“곧 한국에서 화물을 실은 열차들이 밀려올 테니까 증축한 거지요. 여기서 통관절차를 마쳐야 철도 실크로드를 달릴 수 있죠.”
다시 6시간을 달려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오니 밤 열시. 경제 사정이 안 좋아 항구도 도시도 캄캄했고 필자의 숙소인 한국 직영 현대호텔만이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2. 블라디보스토크
‘동방의 정복자’라는 뜻을 가진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 연해주의 중심도시이다. 지리적으로는 무라비요프 아무르스키 반도의 남단, 표뜨르 대제만(灣)에 포함된 작은 금각만(金角灣)을 안고 있는 항구도시이다. 1860년대 이래 러시아 극동함대의 모항으로서 러시아의 극동정책의 발판 구실을 해 왔다. 그리고 1903년에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개통되어 러시아 중심부로 연결이 가능해지면서 그 위상이 더 커졌다.
우리 유민사, 항일투쟁사와도 연관이 깊다. 수많은 유민들이 포시에트를 거쳐 이 곳까지 진출해 왔으며, 연해주 전체 지역의 항일투쟁을 응집시키는 역할을 했다. 시내에서 개척리와 신한촌 등 옛 한인 집거촌을 찾을 수 있다. 당시 한인들은 이 도시를 해삼위(海蔘威)라고 불렀다. 블라디보스토크 지역의 항일 운동이 애국계몽 중심으로 집중된 것은 지리적인 형편 때문이었다. 크라스키노 지역 동포들은 러시아 관․군의 통제에서 멀리 떨어졌고 한러 국경에 가까운 터라 모국 진공의 무장투쟁을 감행할 수 있었지만 블라디보스토크는 그 곳과 달랐던 것이다.
홍범도가 이 곳에 머문 기간이 짧은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는 1908년 처음 이 곳 개척리에 와서 성명회 조직에 참여했다. 처음엔 부회장을 맡았는데 나중에는 사찰부장으로 자리를 바꾸었다. 신한촌에 잠입한 밀정들을 색출하는 임무를 맡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 해 말 신한촌에서 20명의 동지와 함께 ‘21의형제 동맹’을 결의했다. 그는 계속 계몽운동 지도자들과 함께 활동했으나 무장투쟁밖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간부 자리를 박차고 나가 에겔세트 부두에서 하역인부로 일하며 군자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먼저 찾아간 곳은 홍범도가 막노동을 한 에겔세트 부두. 아직도 그 이름이 그대로 쓰이고 있는데 블라디보스토크 호텔 바로 아래 작은 포구였다. 다음에 찾아나선 곳이 뽀그라니치나야 스라보카 거리였다. 구한말 항일운동의 중심 역할을 한 개척리가 바로 이 곳이다. 눈짐작으로도 바다로 향한 전망이 좋아 주인이 없던 초기에는 최고의 장소였을 것 같았다. 지금은 지난날 블라디보스토크 극장이었다는 원형건물이 서 있다. 아래쪽에 선착장이 있고 모래펄이 있는 곳을 ‘웅덩마태’, 그 위쪽을 ‘둔덕마태’라고 불렀다는데 우리 한인들의 흔적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기록을 보면 1911년에 러시아 당국이 콜레라 근절을 명분으로 우리 동포들을 내몰아 자기들 병영으로 삼았다 하니 벌써 90년은 지난 것이다. 지난날 이 곳은 망명해온 의병장, 계몽운동가 들이 집결하던 초기 항일세력의 중심지였다. 그리고 이 곳에서 쫓겨간 우리 동포들이 자리잡은 곳은 신한촌이다.
1910년 8월 경술국치 소식이 전해지자 이상설․홍범도․이범윤 등은 개척리에서 ‘성명회’를 조직했다. 그러나 9월 11일 러시아 극동공화국 당국이 일본의 요구에 따라 성명회와 십삼도의군 간부 200여 명을 체포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상설과 이범윤을 비롯한 8 명의 간부는 이르쿠츠크로 유배당했고 유인석과 홍범도는 피신해 체포를 면했다.
안중근이 한 때 기자로서 몸담았던 <대동공보>가 발행된 곳도 개척리이나 역시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신한촌은 아파트 단지가 있는 경사진 언덕이다. 1999년 광복절에 건립한 기념비가 기슭에 서 있다. 기록을 보면 우리 동포들은 개척리에서 이 곳으로 쫓겨온 1911년 8월29일 한일합방 1주년을 맞아 반대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조국독립과 계몽활동, 민족주의교육, 농산공업을 주창하는 권업회를 창설했다.
1914년에는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하고, 1912년 신채호․이상설․장도빈 등은 <권업신문>을 창설했다. 1919년 3월 17일에는 고국에서 온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그 다음해 삼일절에는 아치형의 독립문을 세웠다. 이렇게 줄기차게 전개된 투쟁 때문에 독립운동사 연구자들은 독립운동사에서의 신한촌의 위상을 북간도의 용정과 명동보다 앞선다고 말한다.
일본군은 1918년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군인 적군(赤軍)과 짜르 황제의 백군간의 내전에 국제간섭군이라는 명분으로 출병했다. 1920년 4월, 일본군이 러시아군과 한인부대 연합군과 충돌하자 이를 기화로 신한촌을 기습하였다. ‘4월 참변’이라고 부르는 이 사건에서 주요 지도자들은 탈출하였으나 불운하게도 최재형이 동포 60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최재형은 우수리스크로 끌려가서 처형당했다.
신한촌에서 소년시절을 보낸 고 송희현 옹은 독립문 자리를 가리키며 거기서 연설을 한 홍범도를 회상하여 필자에게 말해 준 적이 있다.
“일흔이 다 된 노인네가 목소리가 쩌렁쩌렁했지. 하지만 육두문자를 많이 써서, 유식한 사람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어. 나는 개구쟁이 친구들과 함께 ‘제에미 씨부럴’하는 소리를 저 양반이 몇 번이나 하나 세었는데 열 여섯 번이나 하더군.”
홍범도는 60대 후반에 들어 은퇴군인의 연금을 받으며 1934년부터 강제이주 직전까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멀지 않은 노우니꼴라예프카(한국식 지명 水淸)의 한 꼴호즈에서 수직원(守直員)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그 때 신한촌에 다시 왔던 것이다.
그런 증언을 해줄 노인마저 사라진 것을 아쉬워하며 필자는 독립문 자리를 짚어보고 신한촌 언덕을 내려갔다. 이 마을 중앙에 있었다는 한민학교 터의 흔적을 이번에도 찾을 수 없었다. 성명회의 취지문이 낭독되고 항일투쟁을 위한 집회를 열었다는 그 유서 깊은 학교에 대해서는 위치를 알리는 지도는 없고 기록만 있을 뿐이다.
바다 쪽으로 몇십 미터 이동하니 ‘서울스카야 A2’라는 옛 표찰이 붙은 러시아인의 전통적인 바라크 주택이 나온다. 강제이주 전 거리 이름이 적인 표찰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는 그밖에 오께얀스카야 20번지에 옛 일본영사관 건물이 아직도 견고하게 서 있다. 그리고 그 건너편에는 1930년에 설립했던 해외 소재 최초 한인들의 대학인 조선사범대학 건물이 세월의 풍상을 이기며 서 있다. 청회색 페인트가 칠해진 3층 짜리 건물인데 현재는 파제예프 도서관 겸 노동자동맹 연해주 지방위원회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다.
3. 빨치산스크
빨치산스크의 옛날 러시아식 지명은 노우니꼴라예프카, 옛 한국식 지명은 수청(水淸)이다. 한러 국경과 반대인 동북쪽으로 200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는 산세 험한 지역의 작은 도시다. 물론 초기 한인 유민들이 개척한 땅이다. 석탄 매장량이 많아 탄광이 발달했고 강제 이주 전 우리 동포들도 탄광에서 일한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홍범도가 강제이주 열차를 타기 전 머물던 곳이다. 최근에 수입된 러시아 영화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 거야>의 배경이기도 하다.
필자가 빨치산스크 취재에 나선 것은 그 곳이 김경천이 이끌던 창해(滄海)청년단과 수청고려의병대의 활동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창걸이라는 우리 독립전쟁사에 잘 알려지지 않은 또하나의 이름을 들어서였다.
광복군 사령관을 지낸 이청천보다 일본 육사의 3년 선배로서 함께 일본군을 탈출해 조국 독립에 한 몸을 던졌던 김경천. 그에 대한 연구자들의 성과가 거의 없는 편이지만 그의 자취를 한 조각만이라도 밝혀보고 싶었다.
1909년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 육사 기병과에 진학한 그는 재학시절 조국이 강점당하는 비운을 겪었다. 요코하마에서 그는 이청천․홍사익 등과 함께 뒷날 탈출하자고 결의했다. 1919년 6월 그는 이청천과 함께 만주로 망명, 신흥무관학교로 가서 교관으로 일했다. 후배 교관 중에 이범석이 있었고, 김경천이 가르친 제자들 가운데 일부가 뒷날 이범석을 따라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로 가서 연성대 교관이 되고 그들이 초급장교로서 청산리의 백운평 전투를 지휘했으니 그의 영향을 외면할 수 없다.
이청천이 중국 땅에 남은 것과 달리 그는 1919년 말 러시아로 가서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렀다. 1920년 4월 일본군의 신한촌 기습에서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면한 그는 수청으로 가서 한인들을 괴롭히는 마적들을 제압하고 일본군과 싸웠다. 그는 이 때부터 ‘백마 탄 김장군’이라는 별명을 들으며 이름을 날렸다. 추풍 지역에서 수청 쪽으로 이동해온 독립군 부대 혈성단은 수청고려의병대로 개칭하고 그를 지휘관으로 초빙했다. 군사전문가인 그의 지휘에 의해 의병대는 큰 전과를 올리고 연해주의 다른 지역으로 활발하게 진출했다. 1922년 연해주 혁명군사위원회에 의해 포시에트 군사구역 조선 빨치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두만강 하구까지 진출하는 전투에 참가했다.
그는 조국독립을 위해 투쟁하면서도 때때로 러시아 백군과 싸워 볼셰비키 혁명에도 공로를 쌓았지만 홍범도가 그랬던 것처럼 강제 이주열차를 실려 중앙아시아로 끌려갔다. 그리고 1942년 한 수용소에서 불우하게 사망했다.
한창걸은 수청지역의 농민의 아들이었다. 그는 독립적인 세력을 만들어 김경천이 오기 이전에 수청지역에서 고군분투하며 일본군과 싸웠다. 김경천 부대가 커진 뒤에는 그와 연합해 싸웠고, 김경천 부대가 다른 곳으로 이동한 뒤에도 수청 지역을 지키며 싸웠다.
빨치산스크로 가는 길은 멀고 험했다. 자동차는 첩첩산중으로 들어가고 또 들어갔다. 곳곳에 포장공사를 다시 하고 있어 이따금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달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단풍에 흠뻑 물든 산이 이어지고 또 이어졌다. 도무지 러시아 연해주에서 무수히 본 드넓은 평야는 나타나지 않았다. 정규군을 상대로 하는 유격전에는 안성맞춤인 지형이었다. 김경천과 한창걸이 일본군을 기습한 곳이 여기일까 저기일까,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차는 계속 달렸다.
3시간을 달려서 도착한 빨치산스크의 중심가는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이 지역 한인들이 강제이주 열차를 탔다는 중앙역을 찾아갔다. 틀림없이 홍범도도 여기서 열차를 탔을 것이라는 확신을 필자는 갖고 있었다. 역사는 고풍스런 모습으로 서 있었다. 중앙역 앞에 박물관이 있다는 어떤 연구자의 기록이 있어 찾아갔으나 웬 밀랍인형 전시관이었다. 역사 박물관은 다른 곳에 있었다. 수많은 빨치산 그림을 샅샅이 뒤졌지만 김경천과 한창걸의 이름은 없었다. 이 곳이 한인 항일유격대의 근거지였다는 흔적은 없었다. 나탈리아라는 이름의 관리원이, 수장고에 다른 자료들이 있으나 열쇠를 관장이 갖고 나갔다 하며 연락해보겠다 하여 두 시간을 기다렸으나 연락이 없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4. 우수리스크․수이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지프를 다시 대절했다. 130킬로미터 북쪽 우수리스크 시내를 취재하고 서쪽으로 나아가 선열들의 피어린 격전 현장을 더듬기 위해서였다. 포장이 잘 돼 있어 지프는 바람을 가르며 내달렸다. 한국의 산세를 닮아 마치 시골 국도를 달리는 기분이었다. 색다른 것은 커다랗게 쓴 러시아어 광고 간판들과 이따금 눈에 들어왔다가 물러나는 주말농장 ‘다차’의 러시아식 바라크들이었다.
우수리스크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을 연결하는 철도의 분기점에 있으며 우수리강과 연해 있다. 옛날 발해 시대 지명은 쌍성자(雙城子), 북경조약으로 러시아 영토가 된 직후에는 니콜리스크 우수리스크라고 불리기도 했다. 기사년(己巳年. 1869년) 함경도의 대기근으로 유민행렬이 이어질 때 일찌감치 한인 집거촌을 이루었다. 국운이 기울자 홍범도․이상설․이동휘․이동녕 등 많은 우국지사들이 찾아와 근거지로 삼았다. 그리하여 1917년 고려족회를 열렸고 그것은 대한국민회의로 발전했다.
그러나 그 때를 증언하는 흔적은 시내에 없다. 군납업으로 많은 재산을 모아 의병대를 조직하고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최재형이 일본군에 사로잡혀 처형당한 곳이 우수리스크다. 이상설이 숨을 거둔 곳도 이 도시다. 두 분의 충혼을 되새기며 거리를 이리저리 달려보고 우수리스크역 앞에 차를 멈추었다. 우리 선열들이 무수히 드나들었을 3층 역사(驛舍)는 낡았으나 산뜻하게 녹색 페인트로 단장된 채 앉아 있다. 치체리나가(街) 54번지의 사범전문학교도 옛 모습 그대로 서 있다. 1917년 고려족중앙총회가 4만루불의 기금을 모아 만든 이 학교는 수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다. 국내에서 카프(KAPF)파로 활동하다가 망명한 시인 조명희가 강의했던 이 학교는 지금 이과(理科)초급사범대학으로 사용되고 있다. 필자는 1995년 홍범도가 말년을 보낸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의 크즐오르다에 갔는데 이 학교의 후신(後身)이 세워져 있었다. 한인들은 강제 이주 몇 년 뒤 기어이 거기에 다시 세웠던 것이다.
필자는 서쪽으로 차를 돌려 시내를 벗어났다. 우수리스크에서 중국 국경에 이르는 수이푼 지역에는 우리의 항일투쟁 현장이 많다. 우리 선열들이 재피거우라고 불렀던 꼬르사꼬프까 마을은 유인석이 1910년 6월 십삼도의군을 결성한 유서 깊은 곳이다. 홍범도는 십삼도의군 조직 이전에 이미 국내진공을 감행했다. 이 곳 수이푼 지역에서 동포들로부터 5천루불의 군자금을 받은 그는 30여명의 대원들과 함께 함경북도 무산으로 진공, 일본군 42명을 전멸시키고 귀환했던 것이다. 짐작컨대 그가 병력을 일으켰던 장소는 이 꼬르사꼬프까로 여겨진다. 당시 연해주에는 그밖에 간도관리사로서 북간도에서 투쟁하다가 온 이범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갔던 이상설, 그리고 안중근 등이 현지의 대부호인 최재형과 동포들의 지원으로 병력을 조련하고 이따금 국내진공을 감행하고 있었다. 위정척사파의 거두로서 국내 의병전쟁을 이끌다가 망명한 유인석은 그들을 이 곳에서 하나로 응집시켰다.
그리고 꼬르사꼬프까 마을을 포함해 근처의 수이푼강과 뿌질롭까, 솔밭관은 1920년대 러시아 혁명전쟁 때 국제간섭군으로 출병한 일본군과 그들이 조종하는 마적단에 맞서 한인 유격대가 수차 격전을 벌인 곳이다. 당시 지휘자는 ‘백마를 탄 김장군’으로 전설처럼 회자되었던 김경천과 채영․김규면․조맹선․이중집․황운정 등이었다.
필자를 태운 지프는 야트막한 산과 들판이 어우러진 곳을 달리고 있었다. 우수리스크역에서 눌러놓은 운전석의 태코미터가 3.5킬로미터를 가리킬 때 차를 세웠다. 수청(水淸. 현재의 빨치산스크) 지역에서 활약하던 김경천은 1922년 부하들을 이끌고 이 곳으로 이동해 대한혁명단으로 개칭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해 500명 정도의 대원을 교육시켰다. 그 장소가 ‘우수리스크 서방 7리’라는 기록이니 이 근처인 것이다. 일본 육사 출신으로 대위 군복을 벗어 던지고 항일전선에 뛰어든 그는 사관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해 이 곳에 장교 양성소를 세웠던 것이다. 이리저리 노인들을 붙잡고 물었으나 아쉽게도 그 현장은 찾을 수 없었다.
나침반을 꺼내 들고 다시 한참 차를 달리는데 길가 수풀 속에서 꼬르사꼬프까라는 간판이 불쑥 나타난다. 1869년에 마을이 처음 생겼다는 표시도 있고 ‘1917부터 1967년’이라는 표시도 있다. 우리 동포들이 황무지를 개척하여 만든 곳, 우국지사들이 십삼도의군을 창설한, 그리고 항일 유격대의 근거지 구실을 한 유서 깊은 마을은 큰길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 평온하게 자리잡고 있다. 차에서 내려 천천히 마을의 고샅으로 걸어 들어갔다. 굴렁쇠를 굴리며 노는 아이들과 체스를 두는 노인들만 보일 뿐이었다.
홍범도와 수이푼 지역이 연관된 기록은 1910년의 1차 국내 진공 말고 또 있다. ‘수이푼의 다아재골에서 최병준의 집에 무기를 숨겨놓고 동지들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또다시 국내진공의 기회를 기다렸다’는 기록이 있는데 다아재골이 어디인지는 찾을 수 없다. 동포들이 강제이주당해 지명도 사라지고 우리 노인들도 없고 전설마저 사라진 때문이다.
체스를 두는 노인들에게 뿌질롭까 마을과 솔밭관 마을, 그리고 수이푼강 가는 길을 물어 약도를 그렸다. 수이푼강은 이름이 라즈돌리노이로 바뀌어 있었다. 뿌질롭까는 확인했으나 솔밭관은 알 수가 없었다.
뿌질롭까는 십 분만에 도착했다. 마을의 옛 이름은 육성촌(六城村). 조명희 시인이 교장을 지낸 ‘육성촌농업학교’가 고색창연한 모습으로 필자를 반겼다. 조명희 교장 집에서 하녀로 일한 노파를 만났다. 이 곳 출신이었다는 아버지의 말을 기억하는 그녀의 짐작대로라면 솔밭관은 북쪽 1~2 킬로미터. 들길을 달려 찾아가니 마을 자리가 남아 있다. 강제이주 후 버려져 있는 것이다.
차를 돌려 수이푼강을 찾아갔다. 폭이 50미터쯤 되는 우수리강의 한 지류였는데 포장도로가 나 있는 다리 옆으로 옛 다리가 보였다. 이 강을 중심으로 벌어진 수많은 혈투를 생각하며 주변의 산야를 휘휘 둘러보는 필자는 가슴이 아팠다. 우리 역사의 소중한 일부인데도 지도자들 이름조차 묻혀져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채영은 중국 군관학교 출신으로 1919년 ‘혈성단’이라는 항일유격대를 지휘해 일본군과 싸워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중집은 6백 명 규모의 ‘솔밭관 유격대’와 ‘우리동무군 유격대’를 지휘해 싸웠다. 김규면은 기독교계의 지도자로 국내에서 투쟁하다 연해주로 와서 ‘혈성단’의 단장을 맡았다. 조맹선은 국내 의병 지도자로 북간도를 거쳐 연해주로 와서 채영과 더불어 항일부대를 지휘해 싸웠다. 황운정은 최진동과 함께, 홍범도가 지휘한 봉오동 전투에서 대승한 뒤 연해주로 와서 이중집 부대에 합류했다.
필자는 수이푼강 다리의 오른쪽 교두보에서 활처럼 휘어져 뻗은 작은 둑으로 걸어갔다. 한국의 보훈처가 그 곳에 이상설의 기념비를 세울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거기서 시든 잡초와 관목들을 헤치고 강변으로 내려갔다. 강은 오염되지 않아 맑고 깨끗했다. 이상설의 유해가 화장되어 이 곳에 뿌려진 것은 1917년 3월. 강물은 그 옛날의 선각자의 한을, 그리고 이 곳에 무수히 뿌려진 피의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히 흐르고 있었다. 필자는 강물 앞에 국산 소주팩을 꺼내 한 잔 부어놓고 절을 했다.
5. 하바로프스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침대열차를 타고 밤새 15시간을 달려 하바로프스크에 내렸다. 8백 킬로미터를 북상한 까닭으로 기온이 뚝 떨어져 입김이 허옇게 퍼져나갔다. 어디 따뜻한 수프라도 먹을 곳이 있을까 하고 몸을 움츠린 채 두리번거리는데 역전 광장에 동상 하나가 아침 햇살을 받으며 우뚝 서 있다. 17세기 중반 이 곳을 탐험한 하바로프였다.
하바로프스크는 우수리강과 아무르강의 합류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예스런 건축물들이 훌륭하고 강변을 따라 만들어진 공원의 산책길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인구가 60만밖에 안 되지만 러시아의 극동 경영 중심지로서 대통령 대리가 상주하고 있다. 이 도시 곳곳에 우리의 항일투쟁 자취가 남아 있다.
만주와 러시아를 오가며 투쟁하던 이동휘는 1918년 2월 하바로프스크로 와서 볼셰비키 혁명의 완수를 다짐하는 한인혁명가회의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볼셰비키 측으로부터, 한인들이 러시아 혁명투쟁에 참가한다면 그 대가로 독립운동을 지원하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3월 28일 유동열․김알렉산드라 스탄케비치 등과 더불어 한인사회당을 창당하고 위원장에 취임했다.
한인사회당은 1920년 8월 경에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 참가하였다. 대회 결정에 의하여 국제당에 참가한 각국 당들은 다 공산당이라는 명칭을 쓰게 되었고 한인사회당은 고려공산당으로 호칭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국제당 결정에 의하여 1921년 초 중국 상해에서 고려공산당 창립대회를 소집하였다.
그러나 김철훈과 최고려, 오하묵을 리더로 하는 일파는 그들에게 반대하며 이르쿠츠크에서 또다른 고려공산당 대회를 열었다. 그래서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로 나뉘어 불리게 되었는데 이것은 코민테른의 ‘일국일당(一國一黨)’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한인사회당은 연해주 내 한인 유격대를 통합하고 힘을 집중시켰다. 이동휘를 비롯한 지도자들은 이르쿠츠크파와의 알력을 조정하지 못했고 그 결과로 자유시 참변이라는 비극을 가져왔지만 한인사회당이 항일투쟁에 끼친 영향은 지대했다.
김알렉산드라는 러시아 혁명의 완성이 조국 독립의 첩경이라는 확신을 가졌던 열정적인 여성투사였다. 1918년 2월 한인혁명가회의를 발기하여 성사시켰고 그것을 발전시켜 한인사회당을 결성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 해 4월 일본이 무장간섭군이라는 명분으로 연해주에 출병하자 적군 편에 서서 무장투쟁에 나섰다. 하바로프스크가 적에게 포위되자 3~4백 명의 대원을 이끌고 탈출하다가 러시아 백군에 체포당했다.
“혁명군의 승리만이 조국 독립을 돕는다는 확신 때문에 수많은 조선인이 적군에 가담해 일본군과 백군을 상대로 싸우는 것이다. 내가 이제 13보 걷는 것은 조선의 13도를 의미한다. 곧 조국 13도에 자유와 행복이 깃들일 것이다.”
최후 발언을 하고 열세 걸음을 걸은 그녀는 절벽 위에서 총살되어 벼랑 아래 아무르강으로 떨어졌다.
필자는 한인사회당 창당 현장부터 찾아갔다. 무라브요바 아무르스크 22번지에 있는 그 건물 외벽에 김알렉산드라의 얼굴 부조가 붙어 있다. 원동중앙은행이 들어 있었다는데 내부 수리중이었다. 차를 몰아 그녀가 처형된 ‘우쩌스(절벽)’로 갔다. 시립 문화휴식공원의 한 쪽으로 거무튀튀한 바위 절벽이었는데 처형 현장에는 그녀를 추모하는 순백색의 전망대가 서 있다. 김알렉산드라가 유언을 남기고 떨어진 벼랑 아래는 아무르강의 파도가 힘차게 꿈틀거리고 있다. 멀리 강 대안에 중국 땅이 보인다.
필자가 숙소로 잡은 인투리스트 호텔 앞에 있는 역사박물관에 김알렉산드라의 유물을 찾으러 갔다. 나나이․야쿠트․에벤키 등 시베리아 소수민족 자료와 동식물 표본, 러시아 혁명 투쟁에 관한 사료가 놀라울 정도로 풍부하게 전시된 이 박물관에 사진 몇 점과 일기, 편지 등이 있었다.
박물관을 나와 강제이주 직전 반발을 막기 위해 한인지도자들을 처형해 매장한 묘지 자리(카를 마르크스 거리 입구), 정찰대를 이끌고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한 김유경(러시아어 표기법 때문에 김유천으로도 읽힌다) 거리, 조명희 시인이 살았던 집을 돌아보았다. 하바로프스크에는 그밖에 70킬로미터 북쪽 야스코에 마을에 ‘붉은군대제88저격여단’에 배속되었던 김일성과 만주 항일유격대의 유적이 있다.
6. 마사노프․블라고베시첸스크․스보보느니
이 지역은 북만주에서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독립군단이 이동해 온 후 한동안 한인들의 항일 무장투쟁의 중심지가 되었다. 일본군의 대대적인 반격과 한인에 대한 무차별한 학살, 그리고 일본과의 외교문제로 난처해진 중국 정부의 협조 거부로 근거지를 잃은 홍범도․김좌진․김규식․최진동․허재욱․안무․김철․서일․이범석 등 지도자들은 러시아 극동공화국 임시정부의 지원 약속을 믿고 병력을 이끌고 이동했다. 독립전쟁의 가장 큰 별이었던 홍범도는 러시아로의 이동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가 7백 명의 부하들과 함께 아무르강을 건너 러시아로 들어온 것은 1921년 1월 하순 그의 나이 53세 때였다.
그러나 독립군단의 러시아 이동을 반대한 사람들도 있었다. 김규식․김좌진․이범석 등은 러시아령 이만에서 부대가 적군에 편입되는 기미가 보이자 돌아섰고 서일은 좀더 이동한 뒤 몸을 빼 만주로 돌아갔다. 독립군단은 자유시로 가기까지 몇 달 동안 마사노프에 머물렀다. 그밖에 박일리아가 이끈 사할린 특별의용대까지 합류해 마사노프 주둔 한인 무장세력은 3천명이 넘었다.
그 곳에서 멀지 않은 블라고베시첸스크는 아무르강을 끼고 중국과 마주하고 있는데다가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지나는지라 마사노프 주둔 무장세력의 연락 근거지 역할을 했다. 스보보드니는 옛 이름이 알렉세예프, 항일투쟁사에서 자유시라고 부르는 도시이다.
독립군단은 마사노프에 주둔하면서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군정협의회를 발족해 대통합을 시도하는 한편 코민테른과 러시아 극동공화국 정부와 긴밀한 연락을 취했다. 블라고베시첸스크에 전진연락소를 설치했다.
그러나 이들의 지휘권을 놓고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이르쿠츠파 고려공산당의 갈등이 불거졌다.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쏘비에트와 연합해 조국독립을 쟁취하는’ 것에 일치했지만 전자는 독자성을, 후자는 적군에의 복속을 각각 내세웠다.
러시아 적군 지휘부는 한인 공산주의자들에게 고려혁명군정의회을 조직하게 하고 위원장 겸 총사령관에 갈란다시베리, 위원으로 오하묵․김하석․채동순․최고려 등을 임명하고 대규모 병력을 자유시로 파견했다. 갈란다시베리 장군이 지휘하는 러시아 적군은 마사노프의 무장세력을 자유시로 불러내서 무장해제와 투항을 요구하다가 거부하자 포위공격을 해서 괴멸시켜 버렸다. 한국독립단의 기록에 의하면 사망 272명, 포로 864명이었다. 그리고 사지에서 탈출한 생존자들은 근처의 제야강까지 달려가 맨몸으로 도강하다가 익사했다. 요행히 목숨을 건진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진 채로 방황하다가 아무르강을 건너 북만주로 돌아갔다. 생포된 간부들은 이르쿠츠크로 끌려가 감옥에 갇혔다. 홍범도는 참변 직전 부하들을 이끌고 갈란다시베리 장군 쪽에 합류함으로써 위기를 면했다. 이것이 자유시 사변의 전말이다.
필자는 지프를 타고 비포장 도로를 달려 마사노프 마을을 찾아갔다. 이 곳에 대한 국내 연구자들의 답사보고는 없었으므로 기대와 걱정이 반반이었다. 길가 상수리나무 숲에서 갑자기 나타난 마사노프라는 간판을 보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무슨 기념비가 보여 혹시 우리 독립군에 대한 한 줄의 기록이라도 있을까 하여 달려갔으나 이 지역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한 러시아군 빨치산 병사들의 추모비였다. 자작나무 원목으로 지은 러시아식 주택들 가운데로 걸어가니 러시아인들이 호기심에 찬 눈으로 모여들었다. 필자는 최고령 노인을 찾아 만났다. 코노바야로프카야 12번지의 낡은 집에서 사는 제니셍코 빅토르 이바노비치라는 90세 된 노인이었다.
“나는 그 때 열두 살이었소. 고려 군인들이 생각나요. 우리 집에도 십여 명이 묵은 걸요. 그들은 참 다감했고 아이들을 좋아했지요.”
그는 독립군단이 4열 종대로 질서정연하게 행군해 들어왔으며 기수가 붉은빛과 푸른빛이 나는 깃발을 들었다고 회상했다. 태극기를 수첩에 그려 보이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필자를 옛 연병장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거기서 총검술과 공격전술 훈련을 목격한 기억을 말해 주었다.
제니셍코 말고 80대 노인들 몇을 더 만나 보았지만 지휘부와 국기 게양대 자리가 어디인가는 알아낼 수가 없었다.
마사노프에서 블라고베시첸스크까지 가는 길은 두 시간쯤 걸렸다. 도시는 아무르강을 끼고 형성되어 있었다. 아마 옛날에도 정부기관이었을 것이 분명한 시인민위원회 건물이나 기차역도 강에서 가까웠다. 강에는 국경경비대의 고속정이 순찰을 하고 있었다. 강안은 풍광이 그지없이 아름다웠는데 대안(對岸)을 쌍안경으로 보니 중국 쪽 도시의 건물들이 선명하게 보였다.
기차로 스보보드니까지 간 필자는 다시 차를 대절해 자유시 참변 현장인 슬라세프카 역을 찾아갔다. 시베리아 철도가 지나가는 아주 작은 역이었다. 당시에도 있었다는 급수탱크를 둘러보고 그 앞의 철제 육교로 올라가니 참변 현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옛날 독립군단이 박일리아의 부대와 함께 자리잡았던 역 뒤의 숲은 자작나무와 이깔나무가 무성하고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역장으로부터 이 도시에 역사박물관이 있다하여 찾아갔으나 예상한 대로 수많은 빨치산 자료 중 한인에 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거기서 30분쯤 차를 달려 제야강을 찾아갔다. 슬라세프카에서 탄우를 뚫고 탈출한 독립군단 병사들이 도강을 시도하다가 무수히 목숨을 바친 강은 푸른빛으로 꿈틀거리며 흐르고 있었다.
7. 이르쿠츠크
이르쿠츠크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에 이르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중간점이다. 하바로프스크에서 비행기로 3시간 이상 걸렸다. 도시의 65킬로미터 동쪽에 세계적 명승지인 바이칼호가 있고 도시 풍광이 아름다워 ‘시베리아의 파리’라고 불린다. 거리의 가로수와 아름다운 창문을 가진 벽돌 건물들이 조화를 이룬다. 제정 러시아 때 데카브리스트의 폭동 주동자들을 실어 보낸 이후로 유배지 구실을 했는데 우리의 항일 운동가들도 유배되거나 이 곳 감옥에 수감된 적이 있다. 그 감옥은 지금도 남아 있다.
이 도시에는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에 관련된 현장이 있다. 그리고 이르쿠츠크파의 편을 들어, 상해파에 동조하는 독립군단을 압살하여 이른바 ‘자유시 참변’을 연출하고 동조세력과 투항자들을 이끌고 이 도시로 온 갈란다시베리 장군이 주둔한 5군단 거리도 있다.
이르쿠츠크 공항 청사 밖으로 나가자 기온은 빙초산처럼 차가웠다. 더구나 공항청사를 촬영하다가 공안요원의 경고를 받아 마음은 더 추웠다. 마음씨 좋아 보이는 60대 초반의 택시기사를 골라잡아 취재에 나섰다. 처음 찾아간 곳은 고려공산당 1차 대회장소. 레닌가(街) 23번지에 있는 옛 ‘인민의 집’ 극장은 붉은 벽돌로 된 3층 건물인데 아직도 장려한 아름다움을 갖고 서 있다. 이 곳에서 1921년 5월에 오하묵․최고려 등의 주도로 열린 대회는 상해파를 제외하고 이르쿠츠크파가 요직을 독점함으로써 분파를 기정사실화하고 한 달 뒤의 자유시 참변을 예비하는 불씨를 만들고 말았다.
늙은 택시 기사는 필자 일행을 5~6킬로미터쯤 떨어진 도시 외곽 바리깟 거리의 교도소로 데려다 주었다. 제정 러시아 시절부터 감옥으로 사용되었던 이 곳에는 자유시 참변 때 포로가 된 수이푼지역 유격대장 채영을 포함해 4백 명의 항일투사들이 갇혀 신음했다. 기록을 보면 한인 수감자들이 너무 많아 감방이 넘쳤다고 한다. 1910년 한일합방 강제체결 직후 이상설과 이범윤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체포되어 이 도시로 유배되었었다는 기록도 있는데 이 감옥에 머물렀는지는 알 수가 없다. 건물이 낡고 우중충했지만 망루에 경비병이 있고 지상에도 동초(動哨)가 보였다. 촬영이 문제였다. 감옥 정면은 달리는 차 안에서, 뒷면은 민가 고샅으로 가서 찍을 수밖에 없었다.
시내로 돌아가는 길에 문화휴식공원에 있는 그 원망스러운 갈란다시베리 장군의 기념비를 돌아보고 그의 군대가 주둔했던 5군단 거리로 갔다. 1873년에 준공되었다는 찬란하면서도 우아한 아흐로브고프 극장 사거리 길목이었다. 이르쿠츠크파에 동조함으로써 갈란다시베리 장군에게 일찌감치 복속한 한인 독립군 부대원과 투항자들 1,745명이 이 거리로 실려와 한인연대로 재편성되었다.
항일 독립전쟁의 최고 영웅이라고 일컬어지는 홍범도는 이 곳에서 러시아 적군 대대장 군복을 입었다. 자유시에서 충돌 직전 이르쿠츠크파 편에 섬으로써 자신과 부하들의 목숨을 구했지만 결과는 무엇인가. 북만주의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혁혁하게 싸운 수많은 투사들, 그들은 도와주겠다는 볼셰비키 측의 약속을 믿고 이동해 왔다가 무수히 죽거나 생포당해 이 도시의 감옥에 갇혔다. 복속한 사람들도 러시아 적군이 되어 버렸다. 모두 독립전쟁과는 먼 운명을 안게 되었던 것이다. 필자는 홍범도의 감정이 어찌했을까 상상하며 쓸쓸히 이 거리를 걸었다. 한 때 그의 생애에 경도되어 천리 만리 위험과 난관을 무릅쓰고 그의 자취를 추적했던 필자는 만감이 교차했다.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나 머슴, 종이공장의 직공, 사찰의 불목한, 그리고 산포수 대장을 지내고 항일전쟁에 뛰어들었던 그는 나이 오십 줄에 이르러 심신이 지쳤을 것이다. 어쩌면 소좌나 중좌급의 직급을 받고 소비에트의 품안에 안기는 것을 행복으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뒷날을 기약하려는 노회한 계산에서 갈란다시베리 장군 편에 복속했다가 재기하려고 했는데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자 혼자 통곡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한인 대대를 이끌고 러시아 백군 토벌전에서 혁혁하게 싸워 레닌의 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뒷날 강제이주의 굴레를 피하지 못했다. 필자가 다섯 해 전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의 집터를 밟아보며 확인한 그의 최후는 바람 심한 겨울날 허리가 구부정한 채로 멍석에 엎드려 쌀의 뉘를 고르던 모습이었다. 그것이 그 곳 동포들에게 보인 마지막 모습이었다.
러시아 한인들의 독립운동사는 홍범도의 생애가 상징한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걷는데 뉘엿뉘엿 해가 지기 시작했다. 시베리아의 평원이 붉은 낙조로 물들고 있었다. (2003년 3월 계간 [황해문화]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