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나서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살았던 마을을 院同이라고 불렀다.
그 이름이 정식행정명이었다.
이웃 마을에서는 '서원'이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결국 院자를 풀어서 쓴 것이니 별다른 의미는 없었다.
자세한 이유는 지금도 알 수 없지만 조부께서는 藍山이라고 하셨다.
어째서 쪽 남자를 썼는지에 대해서 여쭙지 못했다.
그외에도 조부께서 언급하신 족보에 기록된 명칭이 있었지만
다른 누구한테서도 그 이름을 들은 적은 없다.마을 남쪽으로 감천 내가 동쪽으로 흘러들어 낙동강에 합류되었다.
지금 보면 감천을 江으로 부르긴 궁색하지만 그땐 낙동강을 큰강이라고 불렀으니 아마도 작은 강의 의미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든다.
감천 내 건너편에 넓은 벌판이 펼쳐지고 있어서 우리 마을 주민들의 농토는 대부분 강 건너에 있는 셈이다.
번듯한 다리는 甘川 다리뿐인데 3킬로미터쯤 서쪽으로 올라가야 한다.
궁여지책으로 가을에 나무 다리를 놓아서 겨울을 지냈다.
다리를 놓으려고 낙동강에 홍수 때마다 밀려와 농지를 만들어 준 곳에 버드나무를 심어서 그 나무를 썼다.
그 땅을 하천부지라했다.
마을에서 입찰을 붙여서 주로 낙하생(땅콩)을 생산했다.
덕분에 가을에는 집집마다 땅콩을 손질해서 장마당에 내어 파느라 밤잠을 설칠 정도로 가을이 바빴다.
그 땅에서 베어낸 보풀라나무를 우마차로 실어서 앞강변에 쌓아뒀다가 사용했다.
1990년대에 콩크리트로 된 다리를 놓고 버스가 단면서 그 광경은 사라졌다.
그렇지만 친구들이 모이면 반드시 다리 놓아지던 이야기가 나오곤 한다.
마을은 웃마(웃마을)과 아랫마(아랫마을)로 구별해서 불렀다.
마을 가운데에 방앗간이 있었고 그 앞에 큰 샘(우물)이 있었는데 그 샘을 기준으로 동서로 나눠서
서쪽을 웃마, 동쪽을 아름마로 구별해서 불렀다.
나는 아랫마에서도 성기(이성계)네 집이 외떨어져서 있었지만
종처이(윤종천),한골네(팔개 김종배),태무이(윤씨네.
나중에 명태네가 집을 샀다), 내가 태어난 집 서쪽에는 조서방네(조태근이 아버지를 그리 불렀다.),
동쪽에는 종구기(김종국),뒤쪽에는 태조네(한골네),종문네(학이네),
그리고 태무레 뒤 산쪽으로 원화네(나중에 인화네. 나랑 사촌지간이다)
종구기랑 팔개 성기 종처이는 동갑이고 태조는 한 살 위였다.
국민학교는 아버지의 실수로 그 친구들보다 1년 늦게 입학하는 바람에
그 1년을 들째와 넷째 삼촌이 자리잡고 살던 원주에서 생활하며 꽤나 도시적인 맛을 일찌기 본 셈이다.
그해1960년 이른 봄에 돌아왔을 땐 촌티를 벗고 도시적 냄새가 난다고들 했다.
집안 어른들께서도 우리집 아가 아인 것 같네. 라고 하셨다.
그 바람에 친구들한테서는 기차를 타고 먼 여행을 한 친구로 선망의 대상이 됐다.
학교에 입학하고서부터는 도시물을 일찍 먹은 덕분에 수월하게 상위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조모께서 대구를 자주 들락거렸다. 해소가 있어서 약을 구하러 다니셨다.
그 영향으로 늘 새로운 옷을 입을 수 있었다. 조모는 약재이 하마씨로 소문이 나 있었다.
10남매를 키우셨다.